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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자."
헤어지자는 말에 5개월하고도 3주 4일을 사귀었던 사람의 얼굴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거짓말하지 말라며 현실을 부정하더니 힘없이 하하 넋나간 사람처럼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드라마 여주인공이었다.
드라마같이 살고 싶어 안달난 5개월하고도 3주 4일의 여자친구 였는데 오늘로써 그 꿈에 한발자국 다가간 듯 하다.
혼자 울분에 차 독백을 늘어놓길래 눈의 초점을 534의 얼굴이 아닌 그 뒤로 보이는 사각무늬 벽지에 맞추며 정신을 아득하게 놓아보았다.
카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락 음악에 귀 기울이며 클래식한 카페 분위기와 정말 맞지 않는다 는 잡생각을 늘어놓다가
강렬한 락과 534의 울분에 찬 고함소리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 그녀의 고함소리를 곁들여 노래를 감상했다.
그러다 통유리로 쏟아지던 따뜻한 봄볕이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와 나를 적시자 금세 노곤해지며 이대로 잠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넋을 놓는데에도 나름대로의 기술이 필요하다. 몸에서 힘을 적당히 들어낸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 상태에서 힘이 1g이라도 더해지면
금세 눈은 초점을 맞추고 아득해졌던 정신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현실에 집중하게 되어버린다.
넋이 돌아와서 들은 534의 가장 첫마디는 '대체 왜!' 였다. 미루어 짐작컨데 왜 헤어지자고 하냐는 뜻일터.
나는 망설임없이 팔을 들었다. 그리고 534의 바로 뒷편 소파에 등돌리고 앉아 소파 위로 빼꼼 튀어나온 뒷통수를 가리켰다.
" 쟤가 헤어지래."
" 야! 미친새끼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
그 말에 뒷통수가 소파 위로 튀어올랐고 자리에서 일어난 뒷통수의 주인은 나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지만
이내 534의 더 뜨거운 눈빛을 감지하고는 후다닥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 애가 사라지자 534의 눈빛은 나를 향했다.
그 애를 쳐다볼 때보다 분노가 덜어지고 울음기가 서린 눈빛이었다. 아무런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534는 내게 물었다.
쟤가 누군데.
망설임없이 답했다.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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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그런 친구들 하나씩 있을 것이다. 자신의 연애는 등한시하면서 친구 연애에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열변을 토하고 헌신하는 친구.
내가 그런 사람이다. 당하는 쪽이 아니라 내가 가하는 입장. 그리고 그 대상은 전정국. 나의 5년지기 친구. 그 애의 연애는 모두 나의 소관이다.
전정국이 누구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 무슨 과정을 거쳐 사귀는지 내가 전부 알아야하고 내가 통제해야 한다.
"너는 애가 눈치가 없는 거냐. 생각을 안 하는 거냐? "
"몰라. "
"거기서 나 때문이라고 하면 걔가 학교에서 뭐라고 하고 다니겠냐고. "
"네가 헤어지라매. "
전여자친구가 전정국의 뺨을 후려친 뒤 울며불며 뛰쳐나가고 다시 들어와 전정국의 반대편에 앉았다.
뺨을 맞은 것이 내 탓이라는 듯 볼을 어루만지며 나를 뾰루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전정국을 좋아해서- 라는 오해는 이미 5년 동안 질리게 들어왔다. 결단코 '아니'라고 말하지만 내가 하는 행동들은 내가 보아도 설득력이 없다. 전정국의 연애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바람에 전정국의 전 여자친구들과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 난 천하의 불여시, 나 갖긴 싫고 남 주긴 싫어하는 천하의 X년이었다. 덕분에 5년간 더러운 소문들을 줄줄히 달고 다녀야 했지만 이게 내 할 일인 것을 어떡하나.
"넌 걔 좋아하긴 했냐?"
"아니."
"그럼 왜 사겼는데?"
"네가 사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며. "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애와 사랑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전정국이다.
내가 괜찮다고 하는 사람과 사귀고 그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하면 헤어지는 수동적인 태도 덕에 일이 아주 수월하게 풀린다는 것.
이 아이는 사람을 사귄다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준수한 외모 덕에 다가오는 여자들을 받아주기만 하면 되니까. 먼저 들이댄다해도 실패한 것을 본 적이 없다.
"너는 그럼 나랑 사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면 나랑 사귈 거냐?"
"더러운 소리 하지마."
전정국의 반응이 너무나도 당연해 나는 별 타격없이 가방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전정국이 보지 못하게 파일을 세워 들었다.
몇 장을 넘겨 원하는 페이지를 펼쳐놓은 뒤 가방에서 꺼낸 펜으로 종이에 씌여진 문장 하나를 죽 그어냈다.
'20XX년. 3월 25일. '백수지' 와 5개월 3주 4일 / 연애종료.'
그리고 흡족하단 표정으로 파일을 다시 덮고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전정국은 옛날부터 들고 다니는 그 파일이 대체 뭐냐고 물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이 파일은 전정국이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만나고 헤어질 인연들의 리스트다. 그 날짜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아주 공신력있는 문서다.
그게 말이 되며 내가 그런 것을 왜 가지고 있느냐?
"으. 나도 너랑 사귈 일 절대 없네요. "
나는 '한국인연공사' 에서 파견된 '전정국' 님 담당 큐피트 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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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와 동시연재합니당
웹드라마 공모전 준비하면서 시나리오 정리 및 보충을 위해 연재하는 글이라 유치할 수도 있고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연재텀이 어떻게될지도 모르니까 가볍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