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주소 복사
모바일 (밤모드 이용시)
댓글
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단편/조각 팬픽 만화 고르기
기타 변우석 정해인 이동욱 세븐틴 빅뱅
l조회 657l 3

꽃은 웅크린다.

겨울의 풍상은 꽃을 혹독하게 내리친다.

꽃은 몸을 더 웅크린다.

꽃은 생각한다, 화려한 봄의 정취를.

그리고 꽃은 더욱 더 몸을 웅크린다.

겨울에서 꽃은 봄을 기다릴 뿐이다.

 

 

 

 

 

[백현/경수] 화홍

w. 일기장

 

 

 

"아버지, 소자 경수입니다."

"들어오거라."

 

 

경수는 방문을 열었다. 근엄한 자세로 앉은 경수의 아버지인 영석은 서책에서 눈을 떼 경수를 힐끔 보았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경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침 문안이었다. 경수는 예를 갖춰 아버지의 앞에 마주 앉았다. 영석은 엄한 사람이었다. 도씨 집안답게 영석 또한 인재의 수순을 밟아온 사람이었다. 딸인 송화가 세자빈의 자리에 오르면서 더욱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영석은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힘을 위해서는 무엇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경수와 송화는 아버지 영석과는 달랐다. 경수와 송화는 아버지 영석보다는 어머니인 송씨를 더 닮았다. 송씨는 권력보다는 가족이, 정이 더 우선인 사람이였다. 그렇기에 영석과도 충돌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란 경수는 권력의 냉철함과 정의 따뜻함을 동시에 보고 배웠다.

 

"어제 이조에서 전갈이 왔더구나."

 

자신의 근무처가 정해진 모양이었다. 장원급제자에겐 종6품의 실직이 주어지게 된다. 대개는 3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영석은 사헌부라고 했다. 아마도 영석의 입김에 의한 것일 것이었다. 사헌부가 어떤 곳이던가. 언론이 가지는 힘이란 막강했다. 경수는 알겠다고 답했다. 영석은 또다시 경수에게 가문의 일원으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을 이야기했다. 어릴 적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군말없이 경수는 알고있다고, 그러겠다고 했다. 영석은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보아도 좋다는 듯이 손을 까딱하는 영석을 뒤로 경수는 방을 빠져나왔다. 알 수 없는 혐오감이 일었다. 속이 메슥했다.

 

 

 

 

 

 

 

"어머니. 소자입니다."

"경수구나. 들어오렴."

 

안채는 사랑채에 둘러쌓여 있었다. 도씨 집안의 안주인인 송씨는 부지런한 성정과 온화한 마음씨로 집안을 가꾸었다. 도씨 일가 곳곳에 송씨의 노력이 베여있었다. 별 말썽없이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송씨의 기여가 컸다. 가족 대부분이 별탈없이 둥글게 갈 수 있었던 것도 송씨의 탓이었다. 안채에 들어설 때의 포근함을 경수는 좋아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었다. 시집가기 전은 송화가 있던 별당이었으나 별당은 비어 있었다. 안채에서 보이는 별당을 힐끔 쳐다본 경수는 문을 열어 방으로 들어갔다. 송씨가 하던 수를 옆으로 제쳐두고 경수를 반겼다. 아들을 향해 보이는 웃음에는 어떠한 사심도 담겨 있지가 않았다. 경수는 마음이 편해졌다.

 

"소자, 사헌부의 직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 대감께 들었단다. 그나마 고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마음을 놓았다만.. 이 어미가 무엇을 알겠느냐"

"소자 걱정은 마세요, 어머니."

"그래, 우리 경수 걱정을 왜 하겠니. 어련히 알아서 잘 하려고.. 그저 어미된 마음으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구나."

 

송씨는 오랫동안 남편을 지켜봤다. 남편이 속한 조정도. 송씨가 지켜봐온 정치라는 것은 냉혹했다. 하지만 남편은 냉철했다. 현명하고 판단력도 뛰어났다. 그에 비해 경수와 송화는 권력욕도, 냉철함도 없었다. 물론 둘도 남편을 닮아 현명했다. 하지만 그 둘은 너무 따뜻했다. 남편은 항상 제게 너무 자식들을 감싸돈다고 했다. 둘은 좀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종종 송씨도 그것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친 걱정은 기우라고 했다. 자식들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지금까지는 별 문제없이 여기까지 왔으니까. 하지만 송씨는 이유 없는 불안감에 떨었다. 기분 탓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달이 참 휘영청하구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걱정? 무슨 걱정 말이더냐?"

"..걱정이 많은 날이면 항상 달타령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내가 그랬더냐? 그랬구나. 본인도 모르는 사실이건만. 너는 참으로 대단한 놈이야. 네가 내 곁에 있는 것이 다행이다.. 그래. 다행이지."

 

 

확실히 백현에게 무슨 걱정이 있는 모양이라고 세훈은 생각했다. 백현이 말수가 적은 사람은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하게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였다. 하지만 긴장하거나 걱정이 있는 때면 두서없이 말이 튀어나오고는 했다. 세훈은 백현의 그런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인지 세훈은 걱정이 되었다. 백현은 솔직한 사람이었지만 속에 있는 걱정을 잘 털어놓는 것은 아니였다. 그것은 순전히 백현의 착한 성정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과는 짐을 나누지 않는다. 백현은 늘 그랬다. 하지만 세훈은 그것이 가끔은 섭섭했다. 그래도 어엿 10년을 모신 주인이었다. 해서 세훈은 독촉하듯 백현을 보았다. 백현도 세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백현은 사람 좋게 웃으며 볼을 벅벅 긁었다.

 

 

"녀석. 별 것 아니거늘.."

"소인에게도 말씀하실 수 없는 것입니까?"

"내가 너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 있겠느냐? 너라면 무엇이든 다 말할 수 있다. 허나.."

"허나, 무엇이옵니까?"

"..하하. 어머니께서 재가를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시는구나."

"..."

 

세훈은 쓴 표정을 지었다. 백현의 혼인은 순탄해보였다. 아들을 지극하게 아끼는 부모는 준면만큼이나 신경 써서 간택의 절차를 거쳤다. 백현의 짝으로 결정된 여인은 당시 대제학의 여식이었다. 세훈은 김씨 처녀를 백현과 혼례를 치른 후에 처음 보게 되었다. 둘은 혼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궐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왕세자를 제외한 왕자는 혼인 후에는 출궁하는 것이 법도였다. 둘은 금술 좋은 부부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고. 둥글고 곧은 성정의 둘이었으니 서로에게 상처주는 것 없이 부부 생활을 잘 이어나갔다. 허나 출산 후에 시름시름 앓던 김씨는 결국 운명을 달리했다. 백현은 아내를 보내던 날을 소리를 내어 엉엉 울었다. 백현이 세훈의 앞에서 유일하게 약한 모습을 보이던 날이었다. 그런 주인을 따라 세훈도 울었다.

 

 

하지만 김씨가 낳은 백현의 씨는 잘 자라주었다. 아들이었다. 백현은 자신의 씨에게 지극했다. 백현의 아들 선은 백현을 닮아 총명한 면모가 있었다. 물론 아직 어린 아이가 총명해봤자 얼마나 총명하겠냐마는 눈에 콩깍지가 씌인 아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백현은 선을 아꼈다. 부인을 참으로 많이 닮은 아이였다.

 

 

"오늘 나와 부딪힌 자를 자세히 보았느냐?"

"예?"

"순간 놀랬다. 부인과 참으로 닮은 사내로더구나."

"..."

"그래. 그래서 괜한 생각이 들었다."

"왕자님."

"자꾸 망자를 마음 안에 메어두면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한다고 하더구나. 허니 이제는 놓아주어야 하는데."

"..."

"잘 안 되는구나. 마음만큼 그게 잘 안 돼."

 

백현은 쓸쓸하게 웃었다. 백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이 착잡한 날이었다. 세훈은 그런 백현의 곁을 말없이 묵묵하게 지켰다.

 

 

 

 

 

 

"빈궁께서는 소식이 없으십니까?"

"...예?"

"이 어미가 또 괜한 말을 하는군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송구하옵니다, 어마마마."

 

 

송화는 죄스러운 표정을 했다. 중전 김씨의 의도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중전 김씨는 백현의 부인인 김씨가 아들을 낳던 날부터 세자 내외를 독촉했다. 하지만 자식은 하늘이 점지해주는 것이었다. 또 세자 내외와 백현 내외는 애초에 합방의 절차부터가 달랐던 탓도 있었다. 이상하게 합방 날이면 준면이나 송화의 몸이 이유도 없이 아프고는 했다. 신성한 의식인 세자 내외의 합방에서 한쪽이라도 몸이 아프면 합방은 연기되었다. 송화는 속상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은 죄악이었다. 여자의 부도덕이었다.  물론 아직 준면과 송화가 후사가 급한 나이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중전 김씨는 다급해했고 덩달아 송화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래서 김씨는 계속해서 직접적은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 송화에게 압박을 넣는 것이였다.

 

 

"선은 잘 자라고 있소, 권빈?"

"..예.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합니다."

"다행이구려. 어미가 그렇게 떠나 아이 또한 약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거늘.."

 

 

권빈은 이를 악물었다. 은근히 자신의 속을 긁는 중전 김씨였다. 걱정을 하다니? 오히려 석이 탈이라도 나기를 바라고 있을 중전 김씨였다. 권빈은 갸소로웠다. 하지만 여유를 잃지는 않았다. 세자 내외가 합방을 치루지 못한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생각하는 것보다 컸다. 그러나 백현에게는 후사가 있었다. 후사가 가지는 힘은 크다. 권빈은 아무 대꾸도 않았다. 중전 김씨와 권빈 김씨 사이에 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송화는 당황했다. 둘과 있으면 항상 분위기가 이 지경이 되고는 했다. 송화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정원군은 재가를 들 생각은 없다던가요?"

"..아직은 없는 모양입니다."

"저런. 그래도 아이에게는 어미가 필요한 법인데."

"..정원군이 사별한 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그런 모양입니다."

"..그렇겠지요."

 

 

권빈의 생각에도 정원군이 재가를 드는 쪽이 더 나을 것으로 느껴졌다. 그런 권빈의 권유에도 백현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부인과 사별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거절하는 것이였다. 백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권빈은 애가 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싫다는 아들에게 재혼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송화는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였다. 계속해서 자식 이야기가 나오니 더 그런 것이었다. 권빈 김씨도 그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권빈 김씨는 중전 김씨와 사이가 지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송화에게까지 차갑게 대하는 것은 아니였다. 중전 김씨와 달리 세자 내외는 권빈에게도 깍듯하게 대했고 본디 성정이 착한 권빈 김씨 또한 둘에게 살갑게 대했다. 해서 지금도 권빈 김씨가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다. 송화는 한결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중전 김씨는 표독스러운 눈을 풀지 않았다.

 

 

 

 

 

경수는 관복을 입고 사모를 썼다. 명색이 첫 출근이었다.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는 것이였다. 송씨가 경수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홍식에게 경수를 잘 모셔야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 송씨에게 홍식은 싹싹하게 웃으며 그러겠다 대답했다. 송씨 또한 얼굴을 풀고 홍식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그리고 경수와 눈을 마주쳤다.

 

 

"어미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적구나. 늘 행동을 조심하고 겸손하거라."

"예, 어머니."

"그래. 늦기 전에 가보거라."

"예. 소자 다녀오겠습니다."

 

 

경수는 송씨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송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식과 함께 집을 나섰다. 여전히 속이 두근두근대는 것이었다. 홍식이 그것을 눈치채고 옆에서 경수의 기분을 풀어주려 무던히 애썼다. 그런 홍식의 노력에 경수가 웃기도 하곤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수는 떨렸다. 그것이 설렘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마 반반일 것이다.

 

경수는 다른 선비들과는 달리 걷는 것을 좋아했다. 경수는 바람을 맞는 것이나 저자의 소리를 듣는 것을 즐겼다. 물론 그렇게 튼튼한 몸이 아니라 오랫동안 걸을 수는 없었지만 짧은 거리 정도는 이렇게 걷고는 했다. 홍식과 발을 맞춰 걸었다. 홍식을 배려한 것도 있었고.

 

"도련님, 잘하실 것입니다."

"고맙구나. 네 말처럼 그래야 할텐데."

"떨지만 않으시면 도련님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요. 진짜입니다."

"하하, 녀석두 참."

 

홍식은 진심이었다. 무식한 홍식이 무엇을 알겠냐만 홍식의 눈에는 커다랗기만 한 경수였다. 소문으로는 경수는 나라에서 강산이 바뀌는 전에는 다시 나오기 드물 인재라고 했다. 장원급제를 하던 날에도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그것을 주워들은 홍식의 눈에 경수는 더 커보였다. 하지만 경수는 겸손했다. 따뜻한 천재는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가 있었다. 경수가 딱 그런 것일 것이다. 홍식은 진심을 담아 경수를 칭찬했다. 경수 또한 그 마음을 알아 홍식이 더욱 고마웠다. 마음이 편해졌다.

 

 

 

 

사헌부의 일은 쉽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그렇게 힘들다할 일은 없었지만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경수였다. 심지어 상관들조차 경수를 조심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상관들마저 그런데 동료들 말은 더 할 필요도 없었다. 경수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대충 이럴 것이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다. 관료들 사이에서도 파벌이란 것은 존재했다. 경수의 파벌 쪽은 경수의 어깨를 간간히 두드려주기도 하고 관등성명을 대기도 했지만 비교적 젊은, 그러니까 경수의 동료층에 속하는 관료들은 경수를 아는 체도 안 했다. 그저 경수가 처음이다 인사를 하면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잠시 눈길을 줄 뿐이었다. 한숨만 나오는 경수였다.

 

사실 경수는 혼자인 것이 익숙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 하나 둔 적이 없는 경수였다. 차라리 외로움이 벗이었다. 외로웠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영석은 경수에게 외로운 것은 약한 것이라고 했다. 영석은 늘 경수를 강하게 키우고 싶어했다. 영석은 늘 경수에게 쉬이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경수는 영석과 달랐다. 경수는 늘 외로웠고 사람을 믿고 싶었다. 여러모로 영석과 경수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영석은 경수에게 자꾸 영석의 방식을 강요했고 경수는 그것이 버겨웠다. 경수는, 사람이, 그리웠다.

 

 

 

 

 

 

"마노하. 사헌부 도 감찰께서 드셨습니다."

"경수가? 들이게."

 

경수가 들어와 보료에 앉은 송화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송화는 나긋한 웃음으로 경수를 맞아주었다. 경수가 궐에 드는 일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송화와 얼굴을 마주하는 일도 늘어났다. 경수는 외롭던 송화의 심사를 달래주려고 싶었다. 송화는 사람들이 좋지 않게 볼 것이라며 되도록이면 발걸음을 자제하라 말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피붙이 동생의 방문이 반갑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오늘은 어땠느냐? 일은 어찌 할 만하더냐?"

"예.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행이구나. 사람들과는 잘 지내느냐?"

"..예."

 

경수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경수의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송화는 단번에 경수의 걱정을 간파했다. 순간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을 망설이는 경수를 보며 송화는 주변 사람들과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수는 현명한 사람이니 어떻게든 잘 풀어갈 것이다. 해서 송화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기로 했다.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경수임을 알았다. 송화는 경수의 어깨를 다독여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경수는 힘이 되었다.

 

 

 

 

 

"서사엔 어찌 들리시려고요?"  * 서사(書肆) : 오늘날의 서점.

"그저 들리지 않은지 오래 되지 않았느냐? 서책 구경이나 하련다."

"그럼 소인을 시키시지 그러셨습니까."

"하하, 구경까지 너를 시켜서 되겠느냐?"

 

백현은 소탈하게 웃었다. 보통의 왕자들은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아무리 학식을 쌓는다 한들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왕자들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 어떠한 대외적인 활동을 해서도 안 되었다. 따라서 학식을 쌓아봤자 그것은 온전히 자기 만족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대개 왕족들은 서책 따위는 때려쳤다. 하지만 백현은 달랐다. 백현은 서책을 세상의 창이라고 생각했다. 서책에서는 백현이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백현은 배움을 즐겼다. 그런 백현을 세훈은 늘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순전한 자기 만족으로, 지식을 쌓는 즐거움만으로 고리타분한 서적을 읽고 지식을 배우는 왕자는 드물었다.

 

"주인장, 잘 있었는가?"

"아이고, 대감. 오셨습니까?"

 

서사의 늙은 주인이 백현을 맞았다. 이따금 서사를 들리는 백현은 단골 손님 축에 속했다. 백현은 손을 들어올려 휘휘 저었다. 세훈이 조용히 백현의 뒤를 따랐다. 세훈은 원래 글을 쓸 줄 몰랐지만 백현의 종용으로 생활하며 꼭 필요한 글자 정도는 배웠다. 처음에는 마냥 귀찮은 것이었으나 나이가 들면서 백현이 옳았음을 깨달은 세훈이었다.

 

"그렇게 새책이 많이 보이지는 않는구나."

"오래 되었다, 오래 되었다 하시지만 달포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면 오래 된 것이 아니더냐?"

"그동안 책이 많이 쓰여지면 얼마나 쓰여지겠사옵니까?"

 

백현이 그렇냐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백현도 알고 있었다. 그저 오늘따라 흥이 나 발걸음했을 뿐이었다. 백현은 서사의 쾌쾌한 먼지 냄새를 즐겼다. 세훈은 그런 백현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백현은 그랬다. 서책들에서는 오래된 지식의 냄새가 났다. 그것들을 맡는 것은 퍽 유쾌했다. 세훈은 얼굴을 찌푸릴지라도.

 

"에, 홍식아. 그럼 동전을 하나도 챙기지 않았단 말이야?"

"예엡.. 분명히 소인이 챙겼었는데.."

"흐음. 그럼 어쩔 수 없구나."

 

왠지 익숙한 목소리에 백현이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에서 말을 나누는 사내는 분명 얼마 전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내였다. 백현은 왠지 모를 반가움이 들었다. 사내와는 아무 연관이 없었지만 왠지 아는 척을 하고만 싶었다. 해서 큼큼대며 백현은 경수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훈은 고개를 갸웃대며 백현을 따랐다.

 

"죄송합니다요, 도련님."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 무얼."

"분명히 제가 챙겼는뎁쇼.."

"괜찮다고 하지 않았어. 나중에 다시 오거나 하면 되는 것이지, 무어."

 

큼큼.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에 경수가 화들짝 놀라 뒤로 돌아보았다.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내와 얼굴이 닿을 뻔하자 경수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정말로 놀랜 눈치였다. 백현은 무안해하며 얼굴을 당겼다. 경수는 백현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단번에 누구인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누구, 신지."

"허?"

"..? 어찌 그러시오?"

 

왠지 어디서 본 것은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백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경수가 백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었다. 얼굴은 본체 만체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내뺐으니 백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던 것이다. 백현은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꼈다. 전혀 서운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기억 안 나시오?"

"..무엇이 말이오?"

 

경수의 입장에선 백현이 답답했다. 알면 안다, 자신이 누구이다 밝히면 될텐데 무슨 말을 하려고 멀뚱히 서있는 것인지, 말을 질질 끄는 것인지. 경수가 답답한 표정을 하자 백현 또한 답답한 표정을 했다.

 

"얼마 전에 내가 길에서 그대를 구해주었었는데.."

"...아."

 

경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내였나. 경수는 이상한 눈초리로 백현을 보았다. 고작 그 정도로 인사를 할만큼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게다가 경수 쪽에서는 별로 좋은 기억도 아니였다. 물론 고마운 일이었지만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이었다. 경수는 마지못해 백현에게 인사했다. 앞서 말했듯 경수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표정이 경수의 기분을 대체로 그대로 드러내었다. 백현은 무안해졌다. 대놓고 별로 반갑지 않은 것을 티내는 경수였다.

 

"내가 별로 반갑지 않소?"

"..예?"

 

참으로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경수는 생각했다. 경수에게는 그저 얼굴 한 번 마주친 사이로 반갑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당황한 것이었다. 경수는 마땅히 친분을 가지고 오랫동안 지낸 사람이 없었기에 정도라는 것을 몰랐다. 이 정도면 친한 사이, 아닌 사이를 구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하, 장난이라오."

"..아, 예."

"그 서책은 선비가 읽는 것이오?"

"..이것 말입니까?"

 

경수가 손에 쥐고 있던 서책을 올려보았다. 경수가 고른 서책은 요새 젊은 층에서 한창 유행하는 문학이었다. 얼핏 사헌부의 동료 감찰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꽤 흥미진진하다고 하여 한 번 읽어볼까 하여 들린 것이었다.

 

"그 서책은 나도 읽은 것이라오. 헌데 패관소품체라 고상한 선비들은 별로 즐기지 않는 것일 터인데.."

"..그 쪽은 고상한 선비가 아니셔서 읽으셨습니까?"

"하하, 딱 봐도 그리 고상하게 생기지는 않지 않았소?"

 

경수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백현도 대답을 바라고 한 농은 아니였다. 다만 경수의 차가운 반응에 조금 당황했을 뿐. 백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문체를 가려서 서책을 읽는 편은 아닙니다."

"그렇소? 혹 기분 나빴다면 용서하시오. 그대의 용모가 워낙이 단정하고 출중하여 해본 말이었으니."

 

경수는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명 백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진심으로 하는 올곧은 칭찬이었다. 경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해서 당황한 것이었다.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경수였다. 어릴 적부터 영석은 경수에게 칭찬을 해준 적이 드물었다. 거의 잔소리와 쓴소리 뿐이었다. 이런 칭찬은 경수에게 낯선 것이었다.

 

"..고, 고맙소."

 

이 정도의 칭찬에 당황하는 경수를 보며 백현은 웃었다. 참으로 순진한 사내라고 생각했다. 얼핏 들으니 사내의 종이 서책을 빌릴 돈을 깜박한 모양이었다. 백현은 이렇게 마주치는 것도 인연이다 생각했다. 또한 경수에겐 이유없이 정이 갔다. 물론 백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부인을 참으로 닮은 사내. 백현은 물끄러미 경수를 바라보았다.

 

백현의 시선을 느낀 경수는 다시금 당황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과 마주하는 것도 오랫만이었다. 그래서 더욱 당황하는 것이었다. 당황하는 경수를 보며 백현은 사과했다. 경수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내저었을 뿐.

 

"내가 서책의 값을 치르리다."

"예? 그러지 않으셔도.."

"아니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질 않소?"

"정말로 그러지 않아도.."

"주인장, 내가 이 선비의 책값을 치르겠네."

"예, 그리 하십쇼."

"..감사하오."

 

경수는 감사를 표했다. 백현은 그럴 것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적당히 백현이 이야기를 끝내고 하던 것을 했으면 좋겠는데 백현은 계속해서 멀뚱멀뚱 경수 앞에 서있었다. 경수의 입장에선 단호하게 잘라내기가 힘들었다. 해서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오죽하면 둘의 뒤에서 둘을 지켜보던 세훈과 홍식마저 어색해질 지경이었다.

 

"..저, 그럼 인연이 된다면 다음에 뵙도록 하지요."

"아, 그러시오.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구려."

"..그럼 이만."

 

경수가 어렵사레 대화를 끝냈다. 백현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손을 흔들었다. 경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백현도 경수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경수는 홍식을 재촉하여 서사를 빠져나갔다. 그런 경수의 뒤통수를 백현은 빤히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상황을 지켜보던 세훈 또한 경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러모로 안주인 마마님을 닮은 사내였다. 해서 백현이 이토록 경수를 반가워 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세훈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백현은 경수의 뒤통수가 사라지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세훈의 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세훈을 보고 멋쩍게 웃는 것은 당연했고.

 



 
독자1
라넬이에욘 드뎌백도가 대화를 좀 길게했네욬ㅋㅋㅋ배켜나 경수를 보듬어줰ㅋ 흑 사람이 그립다니ㅠㅠ
12년 전
독자2
헐.. 무려 고전물이라니.. 개인적으로 고전물 좋아라하는 저로선 재미지고 좋네여..S2 백현이랑 경수가 다음엔 또 어떻게 만나게 될지 궁금궁금!
12년 전
독자3
희귀한 백도를!!!! 그것도 고전물로!!! 볼수있게 해주신 작가님께 정말 감사드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 좋네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2년 전
독자4
ㅠㅠㅠㅠㅠ백도!!!사랑합니다ㅠㅠㅠ
12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돼요!
 

혹시 지금 한국이 아니신가요!?
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분류
  1 / 3   키보드
필명날짜
정해인 [정해인] 무뚝뚝한 남자친구 짝사랑하기_0213 1억10.10 00:05
기타 [김재욱] 아저씨! 나 좀 봐요! -021 유쏘10.16 16:52
기타[실패의꼴] 국민 프로듀서님 투표해주세요! 한도윤10.07 00:01
      
      
기타 영화관에서남의팝콘먹어본적있냐긔ㅋㅋㅋㅋㅋ78 팝콘이 07.29 23:40
엑소 [EXO/카디] Maid In Korea <5>40 아우디 07.29 23:19
기타 게이친구 실화 47 친구1 07.29 23:11
인피니트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12 갤티이 07.29 22:53
인피니트 망상속에 쌓여잇는 우현쌤사수하깋 55555555555555555552 또르르 07.29 22:36
인피니트 [수열] 러브 에볼루션(Love Evloution) 00334 수열앓이 07.29 22:14
기타 게이친구 실화35 친구1 07.29 21:58
인피니트 [인피니트/우현X성규/현성] Loving My Baby - Episodes 0176 애교 07.29 21:27
기타 세서 0위 류하연 남장하다¿! -1318 고교생 07.29 20:44
기타 요즘 실화가 대세인 거 같아서 나도 실화 품22 친구1 07.29 20:35
엑소 현실카디 일화 (게이 남징어들의 연애 일화) - 잠깐 내 독자들 이리와봐218 07.29 20:24
샤이니 [샤이니/호현] 얘 선배맞음? - 번외63 불금인데걍심해.. 07.29 20:20
인피니트 망상속에 쌓여잇는 우현쌤사수하깋444444444448 또르르 07.29 20:16
엑소 [EXO/종인X경수/카디] 폭염 0430 에그 07.29 18:49
엑소 [백현/경수] 화홍(花紅) 024 07.29 18:22
기타 TO. 오빠에게7 또룡 07.29 17:33
기타 우리는남남개그커플4 -여름휴가갔다옴5 ㅋㅋ 07.29 17:28
기타 세서 0위 류하연 남장하다¿! -1245 고교생 07.29 17:02
엑소 [EXO/카디찬백] To. 런던, From. 태릉 Season 2 ~0180 깡총깡총 07.29 16:56
인피니트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61 크리넥스 07.29 16:43
엑소 현실카디 일화 (게이 남징어들의 연애 일화) - 9편!159 07.29 16:17
기타 오빠 개새끼야11 키보드더럽다 07.29 15:58
기타 요즘 실화가 대세인 거 같아서 나도 실화 품6 친구1 07.29 14:54
기타 나보다 키큰 내친구랑 썸타는이야기 13화 (동성/실화)9 고라파덕 07.29 14:50
기타 남고생의 짝남이야기 -3313 팀탐 07.29 14:41
인피니트 [인피니트/현성] 여름안에서 015 CHI 07.29 14:01
엑소 [EXO-K/다각/조직물] Le Bien qui fait Mal (고통을 주는 선) 맛보기 (Prol..126 푸딩 07.29 13:21
팬픽 인기글 l 안내
1/1 8:58 ~ 1/1 9:00 기준
1 ~ 1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