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사막
w.그라탕
05.
"소장님!"
또다.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온다. 이번 주만해도 벌써 9번이 넘는다. 질리지도 않는걸까. 뭐가 그리 좋아서 저렇게 웃으면서 들어오는지.
몇년 전까지만 해도 웃지 않았던 녀석인데. 소장은 점점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신경이 쓰여 작업하던 것을 잠시 멈추었다. 어깨에 손이 올려졌다.
소장은 펜을 마음대로 놀렸다. 곧 빼곡했던 글씨위로 시커먼 구름들이 그려졌다.
"뭐하고 있으셨어요?"
뻔히 보이면서 장난치는건가. 한번 보면 몇초만에 다 알아맞힐수 있는 녀석이.
"새로운 설계도지."
에. 짧고 굵은 한마디. 눈 굴러가는 소리가 다 들린다. 또르르. 몇번 설계도를 훑은 성규가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틀리셨네요."
"음,어디?"
소장이 안경을 고쳐썼다. 자꾸만 코끝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소장은 연신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여기에 이런 공식을 쓰면... 다 망가져요."
성규는 천천히 소장의 손에서 펜을 뺏어 들었다. 그는 노란물이 든 낡은 설계도 위로 무언가 빠르게 써내려갔다.
새로운 공식이 풀어져 내려갔다.
"오. 그건 무슨 공식?"
성규가 그의 말에 배시시 웃었다. 저만 아는거에요. 아무도 몰라요. 그새 다 썼는지 딸칵 펜의 끝을 밀어넣어 책상위에 올려두었다. 만족한 듯 설계도를 내려본 그의 눈에서 순간
촛점이 사라졌다. 무슨 생각일까. 소장은 그런 성규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는 일어나 자신의 창고쪽으로 갔다. 커피를 타마시기 위해서.
"커피마실래, 성규야?"
"아니-오."
장난스럽게 끝말을 길게 늘어뜨린 성규가 퀴퀴한 먼지냄새가 나는 소파에 몸을 헝그러뜨렸다. 소장은 항상 커피를 태워다 주었지만 기계들이 만들어 준 것이라서
맛이 이상했다. 진짜 커피가루를 구할수 없는 기계들이 머리를 짜내서 만든 것이었다. 여러가지 종류의 철가루들을 넣어서 만든 커피에는 피맛이 살짝 돌았었다.
성규는 처음 그것을 한모금 마셔봤을 때 목구멍 끝까지 내려오는 비린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대더라. 마치 쇠파이프를 한입 삼킨 느낌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소장은 소파에 허물어져 있는 성규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니?"
"그냥. 항상 제 대답은 그냥이에요."
소장을 올려다 본 성규는 장난기있게 씨익 웃었다. 그의 눈이 휘어졌다. 이런 미소를 본게 벌써 2년째다. 겉으로는 웃고있지만 속은 텅텅 빈.
그런 사실을 성규는 알까. 소장은 컵에 입술을 갖다대며 쓰게 웃었다.
"니가 여기 놀러온지도 이제 2년이야, 정확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성규가 느즈막히 말했다. 그런가요? 이젠 기억도 안나요. 손톱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손끝을 감흥없이 내려본 성규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이젠 제 기억력도 슬슬 가는것같애요. 늙어서."
벌써 24살이라니. 깊게 한숨을 쉬자 소장이 너털스럽게 웃었다.
"그러면 나는 이제 할아버지겠네."
"소장님은 원래 할아버지셨어요."
이 녀석이! 소장이 주먹을 말아 때리려는 시늉을 하자 성규가 혓바닥을 내밀었다.
"저 때리시면 안되는거 알죠? 저 중요한 사람이에요."
"......"
"여기저기서 저를 찾아대죠. 똑똑한게 좋긴 좋나봐요?"
이런 위치에도 오를수 있고. 소장은 그의 말에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입꼬리를 올린 채 얘기한 성규의 얼굴은 5살의 꼬마아이처럼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열의 사건이 발생하고 정확히 2년후, 성규는 다른 모든 천재들의 머리를 합쳐도 나오지 않을 뇌수치 결과가 나왔다. 상상할수 없을 정도의 높은 결과에 기계들은
곧바로 성규를 예비 과학자라고 칭하고선 '소장'에게로 그를 보냈다. 아침에 간략하게 사람들과 수업을 듣는 성규는 점심 이후로 항상 소장을 찾아갔다.
소장의 그때 나이는 48살. 반은 기계, 반은 인간의 형태로 되어 있는 그와 함께 성규는 2년 내내 연구를 했다. '컴퓨터'에 대해서.
처음엔 소장에게서 배우는 학생 처지였던 그는 이제는 '선생님'역할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런 관계를 가지며 소장과 성규는 엄청나게 가까워졌다.
성규는 소장과의 만남으로 애써 '무언가'를 잊어 갈려 했었고, 기계들 사이에 박혀 쓸쓸하게 지내던 소장은 성규에게서 '일상'을 되찾았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달래갔다. 사람과 사람의 정으로.
하지만 그것이 점점 뒤틀려져 갔다. 성규의 천재성을 인정한 기계들은 그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성규에게서 '기계들을 만들어내는 신'의 역할을 강요한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기계들을 몇개월 동안 미친듯이 만들어나가던 성규는 점점 자신도 기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번은 실험도중 자신의 손마디마디 사이에 나사가 박혀 있는 것을 성규는 분명히 보았다. 그 나사는 곧 풀어질것 같아서 성규는 드라이브를 가져와 꽂은 후,
미친듯이 돌려댔다. 피가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돌려대던 성규를 발견하게 소장이었다. 기겁을 한 채 뛰어와, 드라이브를 빼앗아 들었을 때.
소장은 아직도 성규의 말을 잊지 못했다.
나사가 빠질것 같애요.
그런 성규를 소장은 피곤하니깐 어서 가서 자라 라고 말한 뒤 뒷정리를 했다. 뒷정리 도중 떨어져 있는 피를 보고 소장은 두려워졌다. 성규에게서 자신의 옛날 모습을 잠시 봤기 때문이다.
천재의 수식어에 매달려 달려왔던 그는 자신이 인간이란 것에 큰 모멸감을 느끼며 자신의 몸을 자신이 직접 수술하고 말았었다. 그 당시엔 그는 실험의 성공과 자신의 모습에
한껏 취해있었지만 지금 그는 깨달았다. 그는 인간이고 사람이었다.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 하루하루 느껴지는 사소한 감정에 기뻐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는 항상 마음속으로 그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성규를 도와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웃고 있지만, 죽을 것 같다고 도와달라고 소리지는 그의 얼굴.
소장은 그런 성규를 자신처럼 되지 않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 성규의 뒤를 캤었다. 기계들이 모아 놓은 실험소에서의 일을 조사하던 도중 '성열'이란 이름과 그의 사건을 알게되었다.
솔직히 아무 관련이 없는 줄 알았다. 넌지시 찔러보기 위해 소장은 성규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성열이란 아이는 어떤 아이였니?
하지말았어야 할 질문이다. 성열 이란 말에 빠르게 반응이 왔다. 성규의 가면에 흠집이 생겼다.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만져보던 성규는 소장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소름끼치는 눈빛.
고요하고 검은 시선에 소장도 아무말 없이 성규를 쳐다봤다. 그렇게 몇분이고서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폭발했다.
그 새끼 얘기는 앞으로 제 앞에서 꺼내지도 마세요!!!!!!
본인이 얼마나 흥분했는 지를 보여주려고 한걸까. 곧 에너지를 받아 살아 움직이려는 기계의 목을 단칼에 내리쳤다. 자신이 들고 있던 실험기계로.
잔인하게도 기계의 목은 단번에 끊어졌다. 몇번 이상한 기계음을 내뱉은 기계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그런 광경을 보는 성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커다란 소용돌이 이후 잔잔한 파도가 몰려오듯이 성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앞으로 그 얘기는 하지 마세요.
그리고 성규는 조용히 돌아섰었다. 항상 웃고 방실거리던 성규의 이성을 잃은 모습에 소장은 그 뒤부터 성열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후 다시 성규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계속해서 특유의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소장과 성규는 암묵적으로 약속을 하고 지내왔다.
지금까지.
"피곤하니?"
성규는 여기저기 작은 생채기가 난 손바닥을 자신의 눈 위에 올려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코와 입술만 보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성규의 버릇이었다.
"네."
"들어가서 쉬지 그래? 어차피 할일도 별로 없지."
시원한 대답이 곧바로 날라오지 않았다. 눈 위에 있던 커다란 손을 이제 배 위로 끌어내렸다. 성규는 말없이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소장님."
무미건조한 말. 수분기 없는 그의 목소리가 낡은 방안에서 울려 퍼졌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잔잔한 안개너머로 보이는 짐승의 눈빛과도 같은 성규의 모습에 긴장해버리고 말았다.
여전히 아무말도 없었다. 성규의 눈꺼풀이 몇번이고 내려왔다 올라갔다. 작은 숨소리 마저 느껴졌다. 천천히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의 배를 보던 소장이 다시 컵에 입을 대려던 찰나,
"몸의 반쪽이 기계면 어떤 느낌이세요?"
소장의 눈이 파르르 흔들렸다. 애써 침착하기 위해 커피를 몇모금 들이부었다. 피비린내가 온 몸으로 퍼지는 느낌에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안정되었다.
"좋지 않아."
"왜요?"
"반반이잖아. 아무것도 아닌거야."
인간도, 기계도. 소장의 꺼칠한 입술 사이로 말이 나오자 성규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
"혈액이 핏줄 사이로 달려."
이렇게. 소장은 천천히 자신의 오른쪽 손목에서 부터 팔, 어깨까지로 손가락을 그어올렸다.
"그런데 이 심장을 지나고 나면, 피는 순식간에 엉겨붙고 말아."
심장을 지나친 손가락이 오른쪽 어깨에 와있었다. 녹슨걸까. 녹색빛이 여기저기 멍든것처럼 난 팔. 그것을 움직이자 삐그덕 삐그덕 소리가 났다.
소리가 성규의 귀로 들어와 심장까지 파고 들었다. 사형수에게 다가오는 도끼날 같은 소리였다.
"예전에는 쌩쌩했지. 하지만 녹이 슬더라고. 인간도 녹이 슬긴 하지만 고철덩어리는 차원이 다르구나."
"........"
"나를 죽이려고 기다리는 독약같아. 천천히 반응을 보지. 혈액이 엉겨붙는 느낌에 괴로워 하는 나를."
"........"
"약이 있어서 다행이야. 혈액이 원래대로 열심히 달릴수 있게 해줘."
비록 내 몸은 이제 약물투성이지만. 소장이 어깨를 으쓱한 뒤 다시 커피를 마셨다. 아, 맛있다. 쩝쩝 다마신 커피를 바라본 그가 입맛을 다셨다. 성규의 얼굴이 저절로 찡그러졌다.
"사람보다는 낫잖아요."
"음?"
"기계가 사람보다 낫잖아요."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거지?"
성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에서 형체없는 반항심이 흘러나왔다. 그는 소장에게 반박하려고 하는것이다.
"기계는 아프지 않아요. 하지만 인간은 아프죠. 기계는 병들진 않아요. 설령 고장이 난다 하더라도 바로바로 고쳐낼수 있어요.
기계에겐 사소한 마음이 없어요. 우리를 괴롭히는 사소한 감정들 말이죠."
성규가 숨을 들이켰다.
"기계는 '잊혀짐'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요. 모든 걸 다 입력하고 기억해요. 그들은 똑똑해요. '컴퓨터'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망설인다. 성규의 미간에 자국이 깊게 패였다.
"그들은 욕구가 없어요. 식욕도 없고, ........ 성욕도 없어요. 인간을 죽이는 심리? 그건 다 명령에 의한 것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아기들 같이 순수한 존재죠."
흥분한 꼴이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천재는 완벽하지 않다 라는 말은 성규를 보면 수긍이 갔다. 가끔씩 저렇게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리고 조그많게 흥분할때가 있었다.
바로 기계찬양론을 펼칠때.
소장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 됐어. 알았어. 너는 기계의 열렬한 팬이구나. 그럼 가서 기계의 몸이라도 닦아주렴."
먼지가 그득그득 쌓여있겠지. 놀리는 것같은 말에 성규는 불쾌했다. 그는 먼지냄새가 나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알겠어요. 기계들 몸이라도 닦아주고 오죠. 소장님도 몸 좀 닦으시지 그래요?"
먼지가 가득 쌓여있겠네. 곧 삐그덕 소리가 날것 같은 소장의 오른쪽 몸을 쏘아보며 성규는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애같은 심술이군. 소장은 저렇고 곧 돌아오겠지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낡은 설계도에 성규의 글씨가 깨알같이 써져있었다. 그것을 천천히 읽어 내려간 소장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풀라는거야. 소장이 그것을 푸는데 꼬박 2주일이 걸렸다. 그 시간이 넘도록 성규는 나타나지 않았다.
*
비오는 날이였다.
건물의 모든 기계들은 차오르는 습도에 도망가기 바빴다. 그렇게 어딘가에 자리를 찾아 기계들이 보이지 않던 날,
성규가 돌아왔다.
물에 빠진 새앙쥐꼴로 나타난 성규가 바닥에 쓰러졌을 때, 때마침 폭탄소리같은 번개가 울려 퍼졌다.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번개빛이 성규를 비췄다.
몸이 달달 떨렸고 이빨들이 세차게 부딪히고 있었다. 여기서 성규의 숙소의 거리는 꽤나 멀었다. 설마 걸어온 것일까. 이 비를 뚫고?
소장은 곧바로 성규를 소파에 뉘일려고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하지만 성규가 거부했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소장을 쳐다보며 온몸으로 거부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들이 아직까지 성규의 얼굴에서 쏟아져 내려왔다. 그것이 나무판자로 뒤덮인 바닥을 적셔나갔다. 성규의 떨림은 좀체 가라앉지를 않았다.
이내 포기한 소장은 낡은 담요를 가져 와 그의 어깨에 둘러버렸다.
살짝 노란빛이 도는 그의 갈색머리 끝에서 물방울들이 커졌다가,
낙하했다.
똑 똑.
빗물떨어지는 소리만 들린다. 썩은 풀잎같은 담요가 그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소장이 그것을 주으려고 할때 성규가 입을 열었다.
"맞았어요."
처량한 목소리.
생명의 불이란 불은 다 꺼진 목소리다. 그새 감기에 걸렸는지 목이 살짝 감긴듯 했다.
"내 예상이 맞았어요."
그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거칠어진 숨소리가 그의 얇은 입술 사이로 퍼져 나왔다. 새하얀 입김과 함께.
그의 눈 주위가 점점 빨개졌다. 코 끝도 빨개졌다. 가느다란 눈물 한방울이 그의 하얀 볼을 타고 내려왔다. 얇은 턱 끝에 애처롭게 매달린 눈물은 곧 다른 눈물에 밀쳐 떨어졌다.
"그 새끼가........."
이제 목소리까지 떨려왔다. 고장난 기계처럼 그의 얼굴이 덜덜 떨렸다.
"그 새끼가... 도망간게 맞았어요."
입에서 가녀린 흐느낌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인가 올라오는 것을 참으려는 듯 했지만, 그는 참을수 없는 듯했다. 가슴이 심하게 뛰고 있었다.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에 들린 노트가 저절로 구겨졌다.
"내가.... 내가 밤마다.....얼마나... 기도를 했는데.... 빌었는데..."
돌아와달라고.
말이 입밖으로 나오자 마자 성규가 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2주사이에 더 말라진 듯 했다. 젖은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얇은 어깨의 뼈가 더 도드라져 있었다.
성규의 몸이 한차레 떨려왔다. 그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었다. 몇번이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갈라진 틈 사이로 피가 새어져 나왔다.
소장이 그런 그를 위로해 주기 위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다시 담요를 씌어줬다. 성규의 얼굴은 굉장히 창백했다.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새하얀 그의 얼굴에
눈과 코, 입술만 빨갰다.
"그 새끼가.... 나를 이용했어요."
"그 천재 같은 놈이...."
"나를 이용했어요........."
연거푸 말을 쏟아냈다. 그의 가슴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를 이용했어요!!!! 그 새끼가... 그 자식이 나를 이용했어요. 내가... 내가..."
손에 쥐고 있던 노트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죽일듯이 노려보던 성규는 눈에서 다시 흘러내려오는 눈물에 눈을 감았다.
소장은 말없이 그것을 주웠다. 검은색의 칙칙한 노트. 이미 비에 반쯤 젖어있었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쳐 든 소장은 단번에 이 노트가 누구것인지 알아냈다.
"내가..... 내가 전에 가르쳐 준 공식있죠? 아시죠? 그거 제가 만든거에요..."
내가 만들었어요, 그거. 아무도 몰라요, 그거.
근데 그 놈만 알아요. 왜냐면 제가 알려줬거든요?
알려달래요, 저보고. 알려달래요.
똑똑해서 금방 외웠어요, 내 앞에서 자랑했어요.
칭찬해줬어요. 내 동생, 잘하는 구나.
근데 그 새끼가.... 그걸.......... 자기 실험에 써먹었어요.
자기 기계만드는데 썼어요, 그걸.
도망가려고!!!!!!!!!!!!!!!
성규의 눈이 돌아갔다. 갑자기 자신의 이마를 바닥에 찧어대기 시작했다. 노트를 빠르게 훑던 소장이 놀라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성규는 소장의 팔을 밀쳐내려고 했다. 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그의 모습에 소장은 괴로웠다. 몇 분의 사투끝에 소장이 그의 팔을 잡는데 성공했다.
잡힌 자신의 팔을 하염없이 보던 성규가 또 울었다.
"자기 탈출하려고.... 나를 이용했어요...."
난 몰랐어요. 전혀 몰랐어요. 이젠 비명을 질러댔다. 성규의 말에 소장은 노트의 글이 생각났다. 기계에 대한 설계도였다. 아주 완벽하고 깔끔한 설계도는 자신의 주인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성규의 글씨처럼 작고 바른 글씨가 눈에 띄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던 글짜.
'탈출'
어찌나 완벽하고 치밀하던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어디가 경비가 허술하고, 감시기계들의 약점이 뭔지, 조금 더 성능을 올릴 수 있는 부품들이 뭔지.
그래프까지 그려가며 기록된 노트는 보란듯이 성규의 마음을 짖밟아버렸다. 기대따윈 없어! 노트가 소리질렀고, 성규는 괴로워했다.
"그래도..... 그래도... 언젠간 오겠지, 언젠가는 나를 데리러 오겠지 하고선 내가 지금 4년을 기다렸어요. 근데 오지않았어요. 그리고 저 노트가 나한테 말해주네요.
병신같은 새끼. 천재라고 해도 인간이니 어쩔수가 없네! 그 더러운 미련한 감정에 휩쓸린 꼴이라니! 우습다, 우스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자조적인 웃음. 낄낄낄 거리며 성규가 미친듯이 웃었다가 곧 잦아들었다.
성규의 온 몸에 모든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기계들의 습격이 있었던 날, 그 여자 그리고 성열을 만났던 날, 자신의 손목에 새 이름이 박히던 날, 수많은 놈들에게 짓밟히고
더러워졌던 날.....
한차례 한차례 기억들이 지나갈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
곧 무서울만큼 평온해졌다. 성규의 반쯤 잠긴 눈 너머에는 단 하나의 일렁임도 없었다. 남아있던 조그만 빛도 사라졌다. 그것은 파괴되어 성규의 가슴속 깊이 침전해버렸다.
"인간이란건 말이에요. 너무 약한거같지 않아요? 힘들어 죽겠어요. 4년의 기다림이... 이것봐요, 한순간에 터졌잖아? 응? "
자신의 가슴을 꾹 눌렀다. 말랑말랑한 느낌이 전해지자 성규의 눈이 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가 미련을 버리지 못한채 계속 온 몸을 꾹꾹 눌렀다.
소장님. 그가 미친듯이 눌러댔다.
"전 왜 기계가 아닐까요?"
기계였으면 애초에 이러지도 않았을텐데. 성규가 읖조렸다. 칼을 갖다대기만 해도 새빨간 피가 나올것같은 연약한 그의 피부. 사람의 피부.
꾸욱 누르자 처음엔 새하얗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붉은 자국이 생겼다.
이번엔 소장의 오른쪽 팔을 눌렀다. 꾸욱 눌렀지만 들어가는 느낌도 없었고 자국도 생기지 않았다.
성규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소장이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저는요, 여기와서 제가 천재라는 거에 한번도 후회나 그딴 감정 느낀적 없었어요."
"......"
"느끼기 싫었어요. 천재이고 싶거든요. 그래서 살았으니깐. 근데 내가 여기와서 당한게 너무 많아요. "
"..........."
"그러니깐 저도 모르게 제가 천재인게 후회가 됬어요. 왜 이렇게 태어났지? 근데... 그러면 저를 부정하는거잖아요. 그런 생각 안할려고 애썼어요.
발악했어요. 그래서 변명거리를 찾았어요. 해답을 찾았어요."
"..............."
"나는 이렇게 항상 가만히 있었는데 나를 건드린 건 인간들이다. 그것들이 나를 괴롭히고 배신했다.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어요."
"...................."
"그게 제 결론이에요."
이젠 아무도 안 믿을거에요. 더럽고 유치한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도 않고, 그런 놀음도 하기 싫어요. 성규가 조그많게 속삭였다.
참새처럼 몇번 조그많게 짹짹 거리던 성규의 고개가 푹 꺾어졌다. 젖은 그의 머리칼들이 가녀린 목을 감싸고 있었다. 너무나도 소름끼치게 하얀 그의 목덜미였다.
소장은 그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조금의 힘만 줘도 부러질것 같았다. 위대한 머리를 가진 그였지만 너무나도 약했다.
성규를 소파에 조심스럽게 눕힌 소장은 그를 몇 분동안 살펴보았다. 이마에 피는 멎어있었다. 손으로 쓸어내렸다가 그는 뒷걸음질쳤다.
몇 걸음 후, 무엇인가 그의 발꿈치에 걸렸다.
검은 노트.
주어올린 소장은 다시 그것을 펼쳐 읽어보았다. 몇장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빨간 글씨에 눈길을 사로잡힌 소장이 한참동안 그것을 보고 기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성규가 자신에게 써줬던 공식이었다. 그것을 보자 울컥함을 느꼈다. 다 읽어 내려가자 그 끝에 한줄의 글이 있었다.
성열이 적은 것일까.
소장은 그 부분을 엄지손으로 쓸어보았다. 무엇인가 손끝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다.
소장의 코끝으로 무언가 흘러내려왔다. 이번엔 안경이 아니었다.
[죽을때까지, 항상, 나에게 위대한 성규 형!]
-----------------------------------------------------------------
늦었습니다 ㅜㅜ
죄송합니다. 그리고 성규의 글이 길어지네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직 과거라서 ㅜ 어엉
글을 쓰다가 굉장히 무섭더라구요. 재미가 없으면 어떡할까. 저는 제가 쓰는 스타일이 있어서 ㅜ 아마 지루해하실꺼에요
곧바로곧바로 멤버들을 내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