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결혼의 법칙
"교수님, 저 교수님 좋아해요."
괜시리 목이 탔다. 아, 방금 나 목소리 좀 떨린 거 같은데.
"여주학생이 좋은 사람인 건 알아요. 미안해요."
"만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나 좋아해줘서 고마워요. 여주학생 예쁘고 귀여우니까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거예요."
싱그러운 여름날, 찬란하게 부서지는 햇빛 사이로 석진의 예쁜 입술이 제법 아픈 말을 한다. 목소리도 표정도 모든 게 다정하긴 한데 한자 한자 나긋하게 뱉어내는 그 말이 거절의 표본이라 그런가, 뭔가 묘하게 영혼이 없는 거 같기도 하다. 여주는 실망감, 제가 감히 기대를 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숨기려 일부러 더 밝게 괜찮다고 말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전 괜ㅊ"
-빰바밤밤바~바밤바밤밤바 빠바바바바바바....
아 시발 꿈.
여주는 밍기적대며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켰다. 7시 10분. 빨리 씻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가야하는 시간. 비척비척 일어나 끄트머리에 곰팡이가 핀 화장실 거울을 보니 꼴이 말이 아닌 거 같다. 그러게 왜 하필 그 날 꿈을 꿔가지고는. 여주는 괜히 생기란 생기는 죄 사그라든 거 같은 제 얼굴의 원인을 꿈에서 찾았다. 여름의 기운이 점점 스며드는 5월이라 작년 여름 일이 꿈에 나타나는 건지. 깡소주로 지새웠던 그 날 밤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래도 작년 여름은 좀 행복했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평범한 하루를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지금은 그 설렘조차 사치인 인생을 살고 있지만.
배여주. 나이 24살. 출신지 부산. 지금 살고 있는 곳 역시 부산. 딸만 셋인 딸 부잣집에서 막내딸로 자란 여주는 그야말로 집안의 강아지 같은 존재였다. 가만히 있어도 다들 귀엽다며 동그란 뒷통수나 말랑한 볼을 쓰다듬기 일쑤인. 사랑이란 사랑은 다 받고 자란 막둥이인 덕에 철은 조금 없었지만 받았으면 배로 줄 줄도 아는 맑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렇담 여주네 집이 딸 부잣집이기만 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부산경남지역에서 제법 잘 나가는 건설업계 사장이었던 아버지 덕에(중소기업이긴 했지만) 금수저까진 아니어도 은수저 쯤은 된다고 할 수 있는 집이었다. 여주는 그렇게 부모님,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착한 언니들과 함께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래, 인생이 쭉 그렇게만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살이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배여주 인생의 그림자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시작됐다. 그러니까, 부모님의 사업 부진으로 집안 분위기가 전처럼 화사하지 않았을 때 쯤부터. 딸들 앞에선 사업 얘기를 일절 하지 않던 부모님이 집에서도 사업 확장 때 쌓인 빚 얘기를 하고, 웃는 날보다 목소리 높여 싸우는 날이 많아졌을 때 여주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저라도 부모님께 걱정 끼쳐드려선 안되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점차 자기 앞날을 위해 공부하는 날이 많아졌다. 부모님은 당신들 노후 챙기기도 바쁠텐데 거기다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갖은 유혹을 이겨내고 공부에 전념하던 고3 배여주는 마침내 서울에서도 명문대로 꼽힌다던 연화대학교 경영학과에 합격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때쯤엔 서서히 부모님의 사업도 어느정도 다시 회복이 되었던 터라 여주는 주시는 용돈을 받으며 낭만 가득한 캠퍼스 라이프를 즐길 수 있었다.
다만, 남자친구는 없었다. 관심을 표현해오는 남자들이 없는 게 아닌데도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본 이유는 딱 하나.
배여주는 눈이 높아도 너무 높았다.
중학생 때부터 친구가 "이상형이 뭐야?"라고 물으면 "다정하고 어른스러운데 단정한 미남"이라고 한치의 망설임없이 단호하게 말했었다. 그때부터 형성된 배여주 천년의 이상형은 23살이 되는 시점까지도 유효한 것이었다. 주변 동기들이 네가 그러니까 남친이 없지라고 힐난하기라도 하면, 내가 왜 굳이 눈을 낮춰가면서까지 연애를 해야하냐고 맞는 말만 했기에 소개팅 제의도 들어오지 않았다. 쟤 이상형을 어떻게 찾냐는 게 동기들의 전언이다.
주변 친구들이 연애할 때 행복해 하는 걸 보면 그렇게 좋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호기심은 늘 호기심에서만 끝났다. 관심 가는 사람이 없는 걸 어쩌라고. 좀 괜찮다 싶은 사람들은 다 여자친구가 있단 말이다.
그리고 난, 연애 귀찮아.
그렇게 주로 시트콤으로 점철돼있던 배여주 인생 장르는 4학년 1학기, 따사로운 봄날에 절절한 짝사랑물로 변모한다.
"반갑습니다. 이번 학기 현대사회와 기업경영 수업을 맡게 된 김석진입니다."
지금 귀에서 자동 재생되는 이 노래는 리베라 합창단 상투스가 분명하다. 아직 벚꽃 필 시기가 아닌데 왜 교수님 뒤에서 꽃잎이 흩날리죠?
반 정도 깐 단정한 흑발, 너른 어깨와 대비되는 얇은 허리, 갓지컬을 더 돋보이게 하는 핏 좋은 정장,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가지런하고 짙은 눈썹, 그림도 저렇게는 못 그릴 거 같은 수려한 이목구비까지. 존버는 승리한다고 했던가. 막연히 생각만 했던 여주의 이상형을 현실로 끄집어낸 거 같은 사람이 지금 눈 앞, 교단에 서 있었다. 믿기지 않는 미모와 아우라에 종교도 없는 배여주는 온갖 아는 신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얼굴만 봐도 축복받는 기분이야...! 그러나 김석진 교수는 여주의 눈에만 남신이 아니었던지 강의실은 순식간에 웅성대는 소리로 가득찼다.
저 존잘은 뭐야..? 이 수업 방교수님 아니었냐? 엄청 젊은 거 같은데 조교도 아니고 교수님이라고? 웅성웅성 수군수군.
"방시혁 교수님의 개인 사정으로 제가 이 수업을 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해요. 오늘은 첫날이니까 가볍게 오리엔테이션만 하고 끝낼게요."
웅성대던 학생들은 곧 속으로 방 교수님께서 복받으시길 염원했다. 덕분에 살면서 저런 용안을 뵙습니다.
곧 깔끔한 ppt와 함께 차분하게 한 학기 계획을 안내하는 석진의 목소리에 언제 떠들었냐는 듯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솔직히 간단한 내용에다 강의 계획서에 다 있는 건데도 나긋한 그 말투는 숨죽인 채 새겨듣고 싶게 만들었다. 여주는 난생 처음으로 빠져들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가슴 속에 깃털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간질거리는 게, 낯설었다. 낯선 느낌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은 구름떼처럼 석진에게 몰려들었다. 반면 여주는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강의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대놓고 관심을 티낼 정도의 깡이 없었으니까. 복도 앞 자판기에 서서 식혜나 하나 뽑을까, 하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 여주도 있었어? 출석을 안 부르셔서 몰랐다야."
"선배도 이 수업 들어요?"
"4학년이잖냐. 전공학점 채우는데 이거 만한 게 없다드라. 이번에 교수 바껴서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그래도....교수님 좋으신 분 같던데..."
"뭐야, 너 교수님한테 관심있어?"
"ㄱ,관심은 무슨. 뭐 얼마나 봤다고."
"근데 얼굴은 왜 빨개지냐. 교수님 얘기하자마자 빨개지는디."
"저 원래 홍조있어요."
오~그래애~~?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같은 과 선배 호석은 이미 건수 하나 잡았다는 얼굴이다. 핫쉬. 하필 저 인간한테 걸려서는. 호석은 밝고 친절한 선배였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는 들켜서 좋을 게 없었다. 오지게 놀림 당하는 제 앞날이 눈에 선한 거 같다. 엮어주겠답시고 교수님 앞에서 이상한 소리만 안하면 다행이었다.
"배여주가 관심갖는 사람이 드디어 생기네, 드디어 생겨."
"아, 아니라고여."
"야, 걱정말어. 선배 좋다는 게 뭐냐. 입에 지퍼 단 거 마냥 한 마디도 안해불지, 내가. 우리 여주한테 첫사랑이 왔다는데."
"아악!!아니라고!!!!"
"ㅋㅋㅋㅋㅋㅋ근데 너 진짜 눈이 높아서 안 만난 거구나?저 정도는 돼야 우리 여주 눈에 드는구만."
"(체념)"
쓸데없이 눈치는 빨라서. 그런데 호석도 호석이지만 여주는 지금 자기자신한테도 어이가 없었다. 나 지금 30분 남짓한 동안에 반한거야?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다 개뿔이라 생각했던 지난날을 참회하며 여주는 새삼 자신이 진성 얼빠임을 깨달았다. 아직까진 쩔쩔 맬 정도로 반한 건 아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상대가 교수님만 아니었다면 낯가림이고 뭐고 대놓고 들이대 보기라도 했을텐데. 하필 학생과 교수로 만난 게 좀 아쉬울 따름이었다.
대부분의 사랑은 관심에서 시작된다. 배여주의 첫사랑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가볍게 스쳐지나갈 것만 같았던 여주의 관심은 머지않아 짙은 짝사랑으로 진화했다. 김석진 교수의 수업이 있는 화요일과 목요일은 세상 제일 즐거운 날이었으며 석진이 부르는 "배여주" 란 이름은 그순간 세상에서 제일 설레는 말이었다. 석진에겐 출석 부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여주는 석진이 종종 안경을 쓰는 날이면 안경을 올릴 때마다 엘레강스하게 손목을 한바퀴 돌린다는 것도 알았고, 이미지에 어울리지않게 필체가 동글동글 귀엽다는 것도 알았다. 강아지를 좋아하는지 연구실 책상에 놓인 강아지 사진을 볼 때 미묘하게 웃는 것도, 그 강아지 이름이 지니인 것도 알고있었다. 이 모든 건 관찰력과 눈물겨운 노력, 그리고 지출의 대가였다.
석진은 늘 앞자리를 사수하는 호석과 여주에게 주로 심부름을 부탁했는데, (주로 호석에게 시켰다. 이 수업 반장 역할을 부탁한다며 호석의 번호를 따갔는데 여주는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그 날은 호석에게 연락해 제가 급한 일이 많아 좀 늦을 것 같으니 연구실에 와 유인물을 가져가서 미리 나눠달라고 했다.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배여주. 이걸 놓칠쏘냐. 석진의 연구실이 궁금하긴 했지만 딱히 찾아갈 명분이 없던 차에 이건 천금같은 기회였다.
20xx년 4월 xx일 x요일
선배 저한테 넘겨요
어차피 선배도 연구실가기 귀찮자나여
호석선배
에헤이, 교수님이 나 여자애한테 일 떠넘기는 양아치로 보시면 어떡하려구
아아아아아아아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제발....호석님....세상 귀엽고 멋진 호석님....
호석선배
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 어쩔수 없다
너 교수님 연구실 어딘지는 아냐?
당근빠따 아임니까
호석선배
응..내가 괜한 걸 물었네 김교수님 처돌이한테...
그럼 학식3번으로 딜?
솔지키 3번은 양아치다
아니 선배는 손해볼 거 읍자나여
내가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해도 글치
호석씨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운 사람이었네
호석선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케 그럼 한 번만 사
ㅇㅋㅇㅋ복받으실 겁니다 호석님
대충 사연은 이렇다. 그렇게 애걸복걸해서 들어갈 기회를 얻었건만 여주는 '김석진 교수님 연구실' 이라 적힌 현판만 봐도 심장이 나대는 통에 힘들었다. 왜 이 분은 이름마저 설레는걸까. 후하후하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여주는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늘 그랬듯 적당히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문너머로 넘어오자 살짝 상기된 여주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오..."
"어, 여주 학생이 웬일이에요?"
"아 유인물 가져가서 나눠주라고 하셨다고.."
"그거 호석학생 시켰는데. 바쁘대요?"
앗쉬. 어떡하지. 선배의 이미지를 지켜야 해. 일 떠넘기는 양아치로 보시면 어떡하냐는 호석의 카톡을 떠올린 여주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금방 생길 수 있는 일이어야 하고 누구라도 납득할 수밖에 없을 만한...! 아,
"호석 선배 지금 화장실이 급하다고, 빨리 안 끝날 것 같으시대요."
"ㅇ,아이고오..그랬구나."
망했어. 선배 미안해요. 이럴 때 생각나는 게 겨우 급똥 뿐이라니. 여주는 제 입을 매우 쳐버리고 싶었다. 방금 교수님 동공 흔들리는 거 다 봤다고.
"그런 거까지 다 얘기할 정도면 호석학생이랑 여주학생은 많이 친한가 봐요?"
"네에.."
이 와중에 별로 안 친하다고 하면 호석은 진짜 이상한 놈이 되는거라 못내 친하다고 했다. 실제로 친한 사이에 가까우니까, 뭐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직 인쇄가 다 안 됐는데. 미안해요, 여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요."
"넵."
나이솨!!!!! 여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열일하시는 교수님 옆에 앉아서 연구실을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다니. 왜인지 성덕이 된 기분이다. 천천히 둘러보는 연구실은 석진을 표현한 것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있고 은은하게 좋은 향도 났다. 일이 정말 바쁘긴 한 모양인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하나 서류를 검토하는 석진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진다.
어쩜 집중하는 것도 멋있을까. 역시 자기 일 몰두할 때 사람은 제일 멋있다니까, 라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눈을 돌리는 데 두꺼운 책과 서류철, 파일들이 즐비하게 나열된 딱딱한 책상 속에서 혼자 포근하고 귀여운 사진 하나가 띄었다. 아마 석진이 키우는 강아지인 모양이었다. 동그란 눈이 사랑스러운 갈색 푸들을 보던 여주는 자기도 모르게 귀여워, 하고 작은 소리를 내버렸다.
"응? 여주야 뭐라구요?"
"네?아, 아니 그게."
여주야? 방금 그냥 여주야라고 하신건가????
-띵
당황하는 새에 인쇄가 다 된건지 커다란 프린터는 수치플 그만하고 이거나 갖고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ㅈ,저거 갖고 가면 되는거죠?"
"네, 부탁할게요."
"네에, 안녕히 계ㅅ,"
"아, 여주학생."
"네?"
"혹시 공부하다 모르는 거 있으면 질문하러 와요."
"네, 감사합니다아..!"
탁. 연구실 문을 닫음과 동시에 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여주야라니, 여주야라니...!!!(감격)
매번 모든 학생들에게 "학생"이라는 호칭을 꼬박꼬박 붙여서 부르던 석진이었기에 이름만 친근히 불러준 건 여주에게 꽤 감동적인 일이었다. 일한다고 워낙 정신이 없었으니 석진 본인도 자각못하고 부른 이름이었겠지만. 머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도 심장은 조절이 안 돼서 문제였다.
아무튼 배여주는 학식 3500원이라는 싼값에 아주 많은 것을 얻는 효율적인 행보를 한 셈이었다. 우선 석진에게 여주야, 로 불렸으며 그가 강아지를 키운단 사실을 알았고, 다시 연구실에 찾아갈 명분을 얻었다. 질문할 게 없었어도 억지로 만들어 찾아가면 그만이었을텐데 여주는 이런쪽으로 영 융통성이 없었던 거다. 그걸 왜 생각 못 했지. 그래도 이제라도 그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모쏠이었다.
여주는 한 학기동안 자주 석진의 연구실을 들락거렸다. 간간히 수업과 상관없는 이야길 하기도 하고, 석진이 주는 차도 마시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석진으로 물든 날이 많아질수록 여주의 마음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밥나무처럼, 석진을 좋아하는 마음은 여주의 심장이 견디기에 너무 크고 견고한 것이라서 도저히 숨겨지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벅찬 사랑을 견디다못한 여주는 시험이 끝나면 석진에게 고백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당돌하게 고백을 생각한 것치고는 또 천성이 쫄보였던지라 마음을 말로는 다 못할 것 같아서 시험 준비로 바쁜 와중에 편지도 썼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다들 종강의 기쁨에 취해있는 그 여름. 여주는 석진을 불러냈다. 아니, 사실 불러내기엔 깡도 없고 석진도 바쁠 것 같아서 건물 옆을 지나가던 석진을 운좋게 붙잡았다.
"교수님!!"
"어, 여주학생. 시험은 잘 봤어요?"
"네에, 그럭저럭... 아,아니 이게 아니고! 저 교수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가지구..."
"응, 말해요."
"저기..제가..."
햇빛이 곱게 부서진다. 때이른 매미소리와 푸른 잎사귀를 스치는 산들바람의 소리가 아득하다.
"저 교수님 좋아해요."
결국 말했다.
심장이 쿵쿵. 안 그래도 땀이 잘 나는 손은 이미 한강이 됐다. 교수님 얼굴을 봐야 하는데,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근데 이 공기의 흐름은 뭔가,"미안해요,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 역시 거절의 느낌이었.... 롸???? 따로 만나는 사람? 여자친구? 한 학기 내내 눈치 못챘는데. 그 흔한 커플링도, 여자친구 사진도 못봐서 당연히 없는 줄 알았다.
아닌가...그냥 내가 별론데 상처 안 주려고 만나는 사람 있다고 하시는 건가..? 왜인지 이게 맞는 거 같았다. 여주는 두 뺨이 통통해지도록 시무룩해졌다.
"여주학생 좋은 사람인 건 알아요. 나 좋아해줘서 고마워요."
"네에..."
"여주학생은 예쁘고 귀여우니까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날거예요."
미남유형 중에서도 정석미남에 가까워보이는 석진은 거절도 정석으로 했다. 예쁘고 귀엽다고 해주면 뭐하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예쁘게 안 봐주는데!!! 턱끝까지 치솟은 말을 고3때 키웠던 강한 인내력으로 참은 여주는 머쓱하게 고개를 숙인채 대충 끄덕였다. 괜히 지금 눈을 마주친다거나 이 이상의 다정한 목소릴 듣는다면 울어버릴 것 같아서. 고백 안 받아줘서 울다니, 그거만한 추태는 또 없을 것이었다.
"여주학생..."
"이,이거요!"
"응? 편지? 내 거예요?"
"네. 거절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냥 받으세요. 어차피 교수님한테 쓴 거니까.."
"고마워요."
"ㄱ, 그럼 전 가볼게요. 괜히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어, 여주학생!"
편지를 내밀고 도망치듯 사라진 여주는 그길로 바로 호석과 윤기를 만나러 갔다.
호석 선배, 오늘 나랑 술 마셔줘요. 윤기 선배? 괜찮아요, 같이 마셔요 그냥. 술도 잘 못마시는 주제에 여주는 그 순간처럼 소주가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차이고 술 마시는 거 되게 꼴사납다 생각했는데, 막상 겪으니까 술 생각이 나네. 쒸익."어, 여주 왔냐."
"여주 왔네...."
"윤기 선배. 이 선배 왜 이래요? 뭐야, 벌써 상태 무슨 일이야."
"이 새끼 차였댄다. 두 달 만난 여친한테."
"야, 아니 들어보라니까? 어떻게 내가 세컨드였을 수가 있냐고...어?"
"헤엑, 그 언니 양다리였어요? 와 사람 그렇게 안봤는데 쓰레기였네."
"아냐...우리 희주 쓰레기까진 아니어쒀..."
"뭐야. 선배 기껏 편들어줬더니 빡치게 하지마요."
"야, 여주야 니가 참아. 이새끼 찐사랑이었잖냐. 충격이 커서 오락가락해."
"...오락가락하는 건 인정. 나도 대차게 까이고왔슴다, 지금.(호록)"
"머야, 우리 여주 김교수님이랑 그린라이트 땅땅아니여쒔냐???"
"나도 시발 그런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숴요...만나는 사람 있대...(호로록)"
"야, 배여주. 적당히 마셔라, 뭔 오자마자 병나발을 불려고 하고있어.(식겁)"
"뮴기 선배는 암것뚜 모르자나요. 선배가 뭘 알아.."
"너 뭔데 벌써 나 뮴기 선배라고 부르냐(소름) 야, 야 적당히 마시랬다? 나 너네 책임 안 질거야, 진짜로."
-2시간 후
"희주야아아아ㅠㅠㅠㅠ 너 왜 나 버려부렀냐ㅠㅠㅠㅠㅠ내가 모자란 거시 뭐였어ㅠㅠㅠㅠㅠㅠ"
"겨슷님 나빠써ㅠㅠㅠㅠㅠㅠ여친도 있으믄서 왜 나를 설레게 하고ㅠㅠㅠㅠ잘생기긴 왜그르케 잘생겨서ㅠㅠㅠㅠ고소하꺼야ㅠㅠㅠㅠㅠㅠ"
"내가 너네 고소하기 전에 닥쳐 좀. 제발."
"민뮴기 니가 몰알아!!!!!몰 아냐구!!!! 차여본 적도 없는게 몰 안다구ㅠㅠㅠㅠㅜ흐어ㅠㅠㅠㅠ"
"너네 시발 다신 나한테 술먹자고 하지마라."
윤기에게 손절당할 뻔 했지만 그래도 덕에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엄청 마셔댄 거 같다. 눈을 떴을 때, 밤새 누가 제 머리를 심벌즈 사이에 마카롱 필링처럼 끼워놓고 겁나 쳐댄 거 같은 고통을 느꼈으니까.
미자 딱지 처음 뗐을 때도 이렇게 마셔본 적은 없었던 주량 소주 4잔 알쓰 배여주는 새삼 자신이 술이랑 진짜 안 맞다는 걸 깨달았다. 덕분에 실연의 아픔이 그래도 좀 사그라든 것 같긴 하지만.
그런데 말이다. 누군가 그랬었다. 자고로 시련이란 건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안타깝게도 배여주는 그 지랄맞은 법칙을 피해가지 못했다.
"어어 엄마... 아냐, 안 아파. 방금 일어나서 그래요. 어..? 뭐라고?"
속을 한 바탕 게워내고도 아직 숙취의 늪에서 못 빠져나오던 여주는 체내 알콜 농도가 순식간에 0이 되는 것을 느꼈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물기어린 목소리는 청천벽력 같았으니.
괜찮아진 줄 알았던 아빠 사업이 결국 부도 났단다. 세상 참 거지같기도 하지. 하필이면 오늘.
어쨌거나 그 말인즉슨 배여주는 여기서 슬픈 사랑 노래 따위를 틀고 눈물을 질질 짤 상황이 아니라는 거였고 부산으로 컴백홈 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며 졸업까지 단 한 학기만을 남겨두고 휴학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리 애지중지 키운 막내딸이라도 서울 사립 대학의 비싼 등록금과(국가장학금이 나오기는 했지만) 비싼 월세, 생활비를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았던 부모님은 조심스럽게 부산으로 다시 내려오길 권했다. 굳이 권하지 않더라도 그럴 생각이었던 여주는 신속하게 방을 빼고 휴학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나름 친했던 학교 사람 몇 명에게만 이승기의 '나 군대 간다'처럼 아련하게 '나 휴학 한다'라는 말을 남기고서 고속버스에 올랐다. 무슨 일로 휴학하냐, 취직 때문이냐, 혹시 차여서 그런건 아니지?(정호석) 하는 질문에 그냥 그럴 일이 좀 있다는 식으로만 대답하고는 창밖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아, 아니지, 시벌 알바 구해야 하는데. 감상에 젖을 틈도 사치인 배여주는 이사갔다는 본가 근처에서 가까운 알바 자리를 탐색했다. 오랜만에 찾은 부산은 푸르고 시원했지만, 여주의 마음은 그 청량감과는 반비례하게 헬스장 바벨을 매단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다행히 새로 이사한 낡은 아파트 근처에는(이것도 자취방 계약금 받은 거까지 끌어 모아서 마련한 집이었다) 편의점이 있었고, 알바 경력도 없는 배여주를 고용해주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빨리 돈 모아서 한 학기 학비 마련도 해야하고 집안에 보탬도 되어야 하고 취직 준비도 해야 해서 마음이 급한 여주는 우선 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전에는 편의점이었고 오후에는 태권도장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을 보살피거나 도장을 정리하는 일을 했다. 태권도장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오빠인 지민의 도움으로 하게 된 알바였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던 도중 우연히 만난 지민은 한 마디로 구세주 같았다고나 할까.
"어, 여주야?"
"헉, 오빠! 뭐야 진짜 오랜만이네."
"너 이 시간에 여기서 알바해?"
"응? 으응, 뭐."
"밤에 취객들도 많이 와서 위험한데..."
"그냥, 나 알바 처음 한다고 하니까 받아주는 데가 여기 밖에 없드라고."
엄마들끼리 친했으니, 대충 여주 집안의 사정을 알았던 지민은 섣불리 뭐라 말하기가 힘들었다. 어릴 때 제게 여주는 진짜 귀여운 꼬마 아가씨였는데, 야밤에 이렇게 일하는 걸 보니 속이 좀 쓰린 것 같기도 했다.
"여주야, 너만 괜찮으면 여기 관두고 우리 도장 와서 알바할래? 우리집 알바 구해야 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다."
"어, 오빠네 아직 태권도장해?"
"어. 요근처 초딩들 다 우리 도장 다니는데, 시끄럽긴 해도 귀여워. 어려운 건 안 시킬거고 그냥 간단한 청소 정도?"
"나...나 그냥 이렇게 고용해도 돼?? 아무것도 안 보고? 마 후회 안할 자신 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후회 안해. 너 성격 야무진 거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지인 프리패스로 고용된 여주는 도장에서 꽤 열심히 일했다. 애들이 귀찮게 굴긴 했지만 은근히 성희롱하는 취객 아저씨도 없고, 야외 테이블에 토하고 가는 새끼도 없고, 누가 봐도 본인 아닌 신분증을 내밀며 자기 맞다고 던힐 하나 달라는 고딩놈도 없었기에 도장은 아주 평화롭기 그지 없는 꿀알바였다. 시급도 더 짱짱했고.(중요함)
부러 지민이 신경써 준 걸 모를 리 없는 여주는 시키지 않은 일도 척척 해냈다. 힘겨운 상황이지만 도장에 있을 때는 다 잊고 마냥 해사하게 웃을 수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초딩 때부터 붙어다녔던 정국을 다시 만난 것도 태권도장에서 청소를 하던 와중이었다.
"배여주...? 맞지."
"어... 뭐야, 전정국 너 왜 여깄어."
"나도 여기서 알바하거든? 넌 뭐 청소 알바하냐?"
"어. 이것저것 잡일."
"학교는 어쩌고 여기 와있...."
거기까지 말하던 정국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말실수 했다는 눈빛이었다. 여기저기 우리집 망해서 나 휴학한 거 아주 다 소문났구만. 하긴, 정국의 집과도 꽤 친하게 지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야, 그게,"
"됐어. 넌 체대생이니까 뭐 애기들 태권도 가르쳐 주냐?"
"... 그냥 대충 관장님 도와주는 수준이지, 뭐."
"왜애 예전에 지민 오빠가 엄청 잘한다고 칭찬했었던 거 기억 나는데. 너 어릴 때 국대 할 뻔 했잖아."
"무릎을 다쳐서. 국대까진 못하고 그냥 나중에 이런 도장 차릴까, 생각 중."
"아..무릎... ㄱ,근데 왜 다친 거 말도 안했냐... 난 몰랐네."
이건 뭐 탈룰라 배틀인가. 아니 근데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말을 안 해주고. 여주는 서운한 감정이 얼핏 들었으나 곧 그럴만 했다고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까진 같은 동네 산다는 이유로 학교도 달랐으면서 매번 함께 다녔지만, 졸업 이후로는 딱히 만난 적이 없었다. 가끔 여주가 방학 때 내려오면 술이나 가볍게 한 잔 하는 정도였지 크게 연락을 주고 받지도 않았고 서로의 인생을 살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 무릎 다쳤어, 하며 연락하는 것도 정국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겠다 싶었다.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잘 안 맞더라. 아무튼 오랜만에 보니까 좋네."
"응, 나중에 지민 오빠랑 밥이나 먹자."
"형이랑도 먹고 나랑 둘이서도 먹어. 오래 못 봤잖아, 우리."
그렇게 두 사람과 함께 한 생활이 벌써 1년이 다 되어갔다. 정국은 아직 학교를 다니는 중이라 도장에 오는 날보단 안 오는 날이 조금 더 많았고, 그 사이 공기업에 취직한 지민은 저녁 때쯤이나 잠깐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주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달라진 것 없는 '슬기로운 노동생활'을 반복했다. 원래 부산 사람이었으니 따로 적응할 것도 없었고 어차피 이전에 살던 곳 근처 동네에 이사한 거라 모든 게 익숙한 생활이었다. 낯선 거라고 하면 매일 같이 몰아치는 아르바이트 정도? 지긋지긋한 알바는 해도해도 익숙해 지지가 않고 늘 힘겨웠으니까. 씻고 누워있으면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싶어 괜한 새벽 감성으로 눈물 한방울 또르륵 하는 건 안 비밀.
지민이나 정국이 걱정할 것 같아 말은 안했지만, 돈이 급한 여주는(이미 결혼한 언니들이 집을 도와줄 수 있는 건 어느정도 한계가 있었고 여주는 한 시라도 빨리 학교로 돌아가 졸업을 하고 싶었다) 사실 태권도장 아르바이트가 끝나도 쉬지 않고 고깃집 알바를 했다. 이놈의 사람들은 밤중에도 고기를 먹는 건지(본인도 그랬었음) 이제는 기름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쳇바퀴 돌리는 일상을 하는 여주는 오늘따라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영 딴 곳에 가 있었다. 하필이면 그 날 꿈을 꿀 게 뭐냐고. 처음은 꽤 달았지만 끝맛이 썼던 첫사랑을 생각하자 여주는 괜히 누가 명치를 찌르는 것처럼 아렸다. 뒷목이 좀 쓰린 것 같기도 하다. 아, 이건 그냥 근육통인가. 아무튼... 교수님은 잘 지내시려나..? 잘 지내시겠지..? 만난다던 분이랑 결혼도 했...(왈칵)
솔직히 1년 가까이 보질 않았으니 예전같이 들끓는 마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석진은 제게 봄 같은 사람이었기에 떠올리면 괜히 눈빛이 아련해지곤 했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왜 이렇게 아련해지는 거지. 누가보면 사귀다 헤어진 줄 알겠네~~누가 보면~~~ 퍼뜩 정신이 든 여주는 괜히 민망하기도 하고 덥기도 해서 달아오른 뺨을 챱챱 때려 마음을 다잡았다. 주책이다, 배여주 라고 중얼거리면서.
"여주 어디갔노. 아, 저 있네. 여주 오늘은 손님 많이 없으이까 지금 가도 된대이. 저번에 성주이 대신에 몇 시간 더 했었다이가."
"아, 네, 그럼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예쓰. 평소엔 12시였던 퇴근이 무려 9시로 앞당겨지자 언제 심란했냐는 듯 여주는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여주는 세상 단순한 사람이었다.
집에 가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밤이라 그런지 바람도 기분 좋게 불고, 오랜만에 일찍 끝났으니 혼자 카페가서 좋아하는 스무디라도 먹을까 하다가 스무디 한 잔이 1시간 시급에 맞먹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곧장 집 쪽으로 방향을 틀려던 참이었다. 최근엔 거의 시계나 다름없던 핸드폰이 오랜만에 가디건 주머니에서 본업을 하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하는 그 진동에 아무 생각 없이 폰을 끄집어 냈던 배여주의 얼굴은 곧 사색이 되고만다.
'김석진 교수님'
화면에 보이는 여섯 글자가 믿기지 않아서 눈을 깜빡였다. 뭐지. 아직도 꿈인가. 그래 어쩐지 일찍 마친다 했어. 이 교수님은 왜 계속 꿈에 나오ㅅ....
위잉- 위잉-
"...실환가. 진짜로..?"
애써 이건 꿈이야, 하고 있는 여주에게 현실을 자각시키기라도 하듯 손의 진동은 일정한 간격으로 빨리 받으라며 보챘다. 휴학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지도교수도 아니었던 교수가 갑자기 연락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급한 일일까 싶어 심호흡을 한 여주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여주 학생. 작년에 현대사회와 기업경영 수업했던 김석진 교순데... 혹시 기억 나요?"
"네? 네, 기억나죠 당연히..."
어떻게 기억을 못할까. 오늘 꿈에도 나왔었는데. 아, 물론 이건 무덤까지 들고 갈 비밀이지만... 그나저나 교수님 목소리 진짜 오랜만에 듣는 것 같다.
"여주 학생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연락했어요. 전화로 할 말은 아닌 거 같아서 얼굴 보고 얘기했으면 싶은데."
"네??지금요???"
"갑작스럽죠. 미안해요, 상황이 좀 그렇게 됐어요. 혹시 지금 만날 수 있어요?"
"아... 제가 지금 부산에 있어서요... 뵙는 건 어려울 거 ㄱ,"
"아 그건 걱정 안해도 돼요. 나도 부산이니까."
...? 교수님이 부산에 왜 있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여주가 되물으려던 찰나, 석진의 목소리가 입을 다물게 했다.
"호석 학생한테 들어서 부산에 있는거 알고 있었어요. 여주 학생 만나려고 온 거고."
"..."
"아... 혹시 좀 스토커 같았어요...? 내가 지금 마음이 급해서. 불쾌했으면,"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 때문에 이까지 오셨다는 게 좀 신기해서...! 어디쯤이세요?"
"시간 늦었으니까 여주 학생이 편한 곳으로 갈게요. 어디에요?"
근처 카페 위치를 말하고 전화를 끊은 여주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그제야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급하다고 하셨으니까 뭔가 논문 관련된 일인가? 아님 공모전? 근데 나를 왜 찾아? 나 휴학했는데? 학교 다닐 때도 그렇게 엄청 성적이 좋은 건 아니었는데??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일단 기다려 보자는 거였다. 아무래도 직접 말을 듣는 거 아닌 이상 석진이 이까지 올 이유에 대한 어떤 짐작도 가지 않았다. 먹고 싶었던 스무디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창가에 자리를 잡은 여주는 탁자에 손가락을 톡톡 거리며 초조하게 석진을 기다렸다. 20분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했으니 그리 오래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시간이 아주 더디게 가는 것 같았다.
"교수님!"
"아,"
카페 안에서 저를 찾는 석진과 눈이 마주친 여주가 벌떡 일어났다. 근데 뭔가, 묘하게 달라지신 것 같은데. 오랜 기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여주는 작년의 석진을 오롯이 기억했다. 차가운 인상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다정한 분위기였던 석진은 지금 온몸으로 예민함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굳이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살이 조금 빠졌는지 턱선이 더 날렵해지고, 눈빛은 온기 하나 없이 모든 게 귀찮다고 시니컬하게 말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한 일 년 만인가."
"네. 교수님은 잘 지내셨어요?"
예민한 분위기와 다르게 목소리는 이전처럼 낮고 나긋하다. 그에 여주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그냥요. 근데 오랜만에 교수님 소리 들으니까 좀 어색하네요."
"..?"
"교수 그만둔지 좀 돼서."
석진도 의례적인 답을 해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지금은 교수가 아니라는 폭탄발언을 해온다. 이게 무슨 일이람. 진짜 혼란의 카오스, 카오스의 혼란이었다.
"집안 사정으로 그만 두게 됐어요. 지금 여주 학생..아니, 여주씨 보러 온 것도 이거 때문이고. 여주씨가 필요해서요."
"정확히 어떤.. 사정을 말씀하시는 건지..."
"설명이 좀 길텐데,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줘요. 너무 놀라지도 말고."
꿀꺽.
뭔데! 무슨 일인데! 이게 뭐라고 괜히 긴장ㄷ,
"넴, ㄱ,푸ㅇ,ㅋ,켘"
결혼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따라 말하려던 여주는 입안에 잠깐 머금었던 스무디를 거의 뿜었다. 입술에서 뚝뚝 떨어지는 음료에 분홍빛으로 젖어 들어가는 무릎이 차가웠다. 그러니까 차갑다는 건...
아 시발 꿈이 아니었다. 이 차가움은 지극히도 현실세계의 그것임에 틀림없다.
배여주 인생장르가 시트콤과 절절한 짝사랑물을 거쳐 하루아침에 울지 않는 캔디가 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진부한 계약결혼물이 끼어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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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코레입니다 ㅎuㅎ 반가워여
석진이로 로맨스물을 써보고 싶어서 질러버리긴 했는데 제가 봐도 이게 뭔가싶고 노잼이네여
제목이 계약결혼의 법칙인 이유는 이 글은 클리셰 가득한 뻔한 글이 될 것이기 때문임니다... 네 선전포고 같은거예요....아마 모두가 다음 장면을 예상할 수 있는 글이 될듯...(눈치)
어줍잖은 신데렐라 조금, 후회 조금, 달달함 조금이 들어간 흔한 로맨스물 남주인 으른석진이를 너무 보고 싶었어요....엉엉
근데 다 쓰고나니 왠지 글도 글이지만 브금 선정 능력이 심각한 거 같아요 갑자기 먼가 안 어울리는 거 같음(물론 노래는 다 좋아여!)..제가 노래는 방탄노래 아니면 피아노곡을 주로 들어서 아는게 많이 읍서요..혹시 좋은 곡 아시는 분 브금추천해주시면 그랜절해드립니다... 물론 그냥 댓글만 달아주셔도 정말 압도적 감사.. 엉성하고 그냥 마음가는대로 쓴 글이지만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구요 다들 건강 유의하시고 아프지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