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적당한 해석 05
w.규닝
05. 최전방과 접전
그 날 이후로는 무슨일이 있어도 우산은 챙겨 다녔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현관 앞에 우산을 가져다 놓는 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되어버릴 정도였으니까. 아직 끝나지 않은 장맛비에, 다시는 그 날처럼 단 둘이 정류장에 못 박힌 듯 서 있기 싫어서였다. 늘 그랬듯이 녀석과 엇비슷한 시간에 출근하고 나서는 녀석의 우산 옆에 나란히 내 우산을 꽂아두었다. 지겹지도 않은건지 남우현은 늘상 물었다. 오늘도 우산 챙겨왔네요. 그러면 나는 귀찮은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거리도 매일같이 챙겨먹기로 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학원 아래 카페에까지 발걸음을 한 나는 제일 간편한 샌드위치며 베이글을 내 책상 위에 보란듯이 올려두었다. 이렇게하면 녀석의 관심을 조금이나마 피해볼 수 있을까 해서. 물론 그것은 어느정도 만족스러운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남우현은 내가 들고 있는 샌드위치를 확인하면 슬쩍 웃었다. 오늘도 밥 챙겨 먹네요. 그에 나는 또다시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게 일상이 되었으며, 녀석은 내게 시덥잖은 칭찬을 돌려주었다.
잘했어요. 이제 혼자 잘 하네.
칭찬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녀석은 알까. 남우현의 앞에서 부러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물다가 생각했다. 너와의 대홧거리를 어떻게든 줄여보고자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서나 이렇게 웃어보이는걸까. 남우현은 내가 우산을 잘 챙겨 다닐 때에도, 밥을 잘 챙겨 먹을 때에도. 늘 제게 부탁하던 교재 복사를 이제는 내가 알아서 척척 해도 눈을 접어 웃었다. 뭣도 모르는 게. 나는 은근히 남우현을 노려보다가 마지막 남은 한입거리 빵을 입 안으로 우겨넣었다.
전보다는 약간 수고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어도 그 편이 훨 나았다. 녀석과의 대화를 간소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 비록 남우현이 내게 빤히 시선을 고정하는 날이 많아졌으며, 나를 보고 은근슬쩍 웃는 날이 많아졌어도 이 편이 정말 나았다. 진짜 해보자는거지. 녀석의 웃음을 보면 항상 약이 올랐다. 모든 걸 꿰뚫어보고, 또 그게 웃겨 웃는 놈 같아서. 저녁 시간이 끝날 때면, 일부러 소리나게 손바닥을 탁탁 털고 녀석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오늘도 우산 챙겨 왔어요?"
매번 같은 물음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어요. 열쇠는?"
방금 꺼내어 든 열쇠를 녀석의 눈 앞에 흔들어댔다. 남우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이어 열쇠로 잠금장치를 풀었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학원 문이 열렸다.
"이렇게 번갈아가면서 쓰지 말고 하나 더 복사를 할까봐요. 그게 더 번거롭지도 않을 거 같고."
내 뒤를 따라 학원 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남우현의 제안에 상관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멈추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발을 벗어 집어 들던 나는 허리를 펴는 순간 멈춰있던 남우현과 정확히 눈이 맞았다.
"열쇠 복사."
"……."
"해요, 말아요?"
남우현은 짐짓 짜증어린 투로 재차 물었다. 녀석에게서 먼저 시선을 거둬 신발장 안으로 신발을 구겨 넣었다.
"해요. 상관없으니까."
"이제야 말하네."
"……."
"원래도 밥 먹듯이 무시당하긴 했었지만 오늘따라 대답을 안 해서. 근데 목소리 왜그래요?"
그제서야 뒤이어 신발을 벗던 남우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일부러 대답을 유도했다는거지. 오늘도 녀석은 있던 정도 깎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답 없이 사무실 복도로 몸을 틀었다.
"잠긴 것 같은데. 감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남우현도 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가요. 그럴까봐 일부러 물도 미지근한 것만 마시면서."
"그러게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어제 미처 정리하고 가지 못한 채점 용지들이었다. 녀석의 눈을 피해 강의실로 가지고 들어가서 처리하는 게 낫겠다 싶어 흩어진 종이들을 주섬주섬 모으고 있을 때였다. 한 곳으로 겹쳐놓던 종이 한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짚어 고정시켜버린 다른 손. 뭐하는 짓이냐는 물음을 가득 담은 눈으로 녀석을 흘겨보았다.
"놔요."
"오늘 계속 그렇게 말 짧게 할 거예요?"
"……."
"누가 보면 싸운 줄 알겠네. 표정도 좀 풀어요."
나만큼이나 못마땅한 표정이 한숨쉬듯 말을 꺼냈다. 그제서야 은근히 굳혔던 입꼬리를 풀고 남우현의 손목을 쥐고 옆으로 밀었다. 의외로 순순히 밀려난 손은 밀쳐낸 그대로 허공 위에 놓였다. 기분 안 좋은 거 아니예요. 목소리가 안 나와서 말 아끼려고 하는거니까. 눈은 종이들에 고정한 채 딱딱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신경쓰지마요. 그에 남우현은 파티션 위에 두 팔을 얹어 턱을 괴었다.
"나 잠긴 목소리 좋아하는데."
나도 모르게 녀석을 변태 취급하듯 쳐다보았다. 남우현은 멀뚱히 눈만 뜨고 내 안색을 살피다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이상한 뜻이 아니라.
"매력있잖아요. 듣고 싶으니까 말 아끼지 말고 계속 해요."
그렇게 말하며 남우현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기분 좋게 웃었다. 말에 말을 거듭할수록 경악스러워지는 내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남우현이 내 반응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제 기분 내키는대로 웃던 남우현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그토록 변태스러운 발언을 꺼내놓고도 태연자박한 남우현은 뻔뻔했다. 나는 그저 뜨악한 얼굴로 종이를 집어 들려 바쁘게 손을 놀렸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거북한 말을 했어요."
"그렇게 생각 안해요? 되게 매력있는데. …아, 물론."
시종일관 해맑은 얼굴이 일순간 굳었다. 천진난만하게 매력을 운운하던 남우현이 파티션에서 고개를 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품에 종이를 안아 들고 복도를 나가려던 내 팔을 급하게 붙잡은 남우현이 그제서야 머쓱한 얼굴을 해 보였다.
"미미씨가 엄청 그렇다는 건 아니고.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어요."
"아,네. 알겠어요."
"그냥 보통 사람들이…감기 걸리면 목소리가 그러더라는 뜻이예요. 예를들어 전 여친이…"
"얼굴 너무 가까워요."
붙잡힌 팔보다 더욱 당황스러웠던 건, 쩔쩔매며 구구절절이 변명을 늘어놓던 남우현이 나와 눈을 마주치려 고개를 가까이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눈살은 찌푸려졌다. 조금만 더 오면 이마라도 부딪히겠네. 하지만 내 타박에도 남우현은 뒤로 물러서지 않은 채 결백해 뵈는 눈을 마주쳐왔다.
"오해하지 마요. 어?"
도대체 뭘 오해하지 말라는 건지. 감기 걸린 목소리가 매력적이라고 했던 거? 그것도 아니면 그 목소리를 계속 듣고싶다고 했던 거? 전자나 후자나 기분이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있는대로 인상을 찌푸린 내가 지레 고개를 뒤로 뺐다. 남우현은 그저 뚱한 얼굴로 내게 대답을 촉구하고 있었다. 녀석에게 잡힌 팔을 바깥쪽으로 돌려 빼내었다.
"해석은 들은 사람 몫이죠. 내가 멋대로 오해를 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에요."
코너를 돌아 강의실로 들어가려다, 뾰루퉁하게 선 남우현을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변태스러운 발언은 삼가세요."
첫만남 때도 그렇고, 녀석의 이미지를 결정지었던 바로 그것과 같은 이치. 아마 남우현의 팔자에는 말조심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 내가 부러 쏘아붙이는 투로 말하자 남우현은 금방 울상이 되었다.
녀석의 눈꼬리는 내려가있었다. 남우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대로 강의실 문을 닫아 나의 공간에서부터 녀석을 차단했다.
*
제 섣부른 발언을 의식하고는 있는 모양인지, 남우현은 하루종일 살금살금 내 눈을 피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항상 능글맞게 치대기나 할 줄 알던 녀석이 내 눈치를 살피며 설설 기는 모습이 웃기기도 했고. 남우현은 인쇄기 앞에 서서 프린트물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내 옆에 나란히 서서 헛기침을 하기도 했다. 무언가 말을 붙이려고 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오다가다 마주친 남우현이 묻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게 아닌, 디테일한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면 아예 대답을 하지 않으려 입을 다물었다. 정상수업이 끝나가기 전 즈음, 수업 중에 모르는 문제를 들고 나온 학생은 나와 문 쪽을 번갈아보다가 내 앞으로 포스트잇을 슬쩍 붙이고 사라졌다.
「치사해요.」
여학생 치고 삐뚤빼뚤한 글씨에, 어딘가 의심쩍어 쳐다본 문 밖에는 낯익은 인영이 서둘러 문 옆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조금 꾸깃해진 종이를 손으로 살살 펴 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앞으로는」
「오해의 소지 좀 없게 하세요.」
금방이라도 진동이 울릴까 핸드폰 전원은 꺼 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 * * * *
잘 보면, 남우현의 옷 어딘가에는 항상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
야간 자율 시간으로 넘어가기 전, 저녁식사 시간의 끝자락이었다. 끼니를 해결하러 자리를 비운 교실 안은 조용하고 한적했다. 이 시간이면, 나는 항상 녀석의 눈을 피해 미리 준비해두었던 샌드위치로 한 끼 식사를 채웠을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깜빡하고 베이글을 챙겨오지 않은 탓에, 기다렸다는 듯이 남우현은 찾아왔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남우현의 손에는 가까운 베이커리에서 사 온 빵이 버젓이 들려 있었다. 많이 사왔으니까 같이 먹자구요. 그랬던 남우현은 정작 빵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게서 뒤돌아 화이트보드에 낙서를 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흘깃 뒤를 돌아봤다가 발견한 것은 남우현의 어깨 근처에 하얗게 묻어 있는 분필 가루였다. 다른 강의실에 비치되어있는 화이트보드와는 다르게, 남우현이 사용 중인 강의실만은 학교에서처럼 분필을 사용하는 녹색 칠판이 비치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쉬는 시간 종종 마주치는 남우현의 손에는 늘상 판서를 하느라 분필 가루가 빈번히 묻어 있었다. 오늘은 어깨였다. 누가 일부러 찍기라도 한 것처럼 선명하게 그어진 분필 자국은 남우현이 팔을 들어올려 무어라고 한 글자 한 글자 쓸 때마다 미묘하게 움직였다. 은근히 거슬려 털어주고도 싶었지만 굳이 자리에서까지 일어나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서 뭐라고 떠들어대던 남우현은 그렇죠?하며 내게 대답을 요했다. 네. 그래요. 질문은 듣지도 않았지만 녀석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쳐 주었다. 남우현은 쓸데없는 낙서를 그리다 고개만 돌려 웃었다.
"은근히 순수하더라구요. 머리만 커서 대들고, 그럴 줄 알았는데 전혀 딴판이기도 하고. 솔직히 아르바이트 하기 전까지 고등학생에 대한 인식은 그랬거든요. 뭐, 내 학창시절이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요. 남자애들도 조금 까칠하기는 하지만 하라는 숙제는 다 해오고, 여자애들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아, 네."
"수능 끝나면 뷔페 가자고 얼마나 난리들인데."
미미씨 반은 안그래요? 남우현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네. 별로요. 등 뒤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남우현은 무언가를 썼다가 지웠다를 반복하면서 꽤나 시끄럽게 마카를 놀렸다. 에이, 미미씨가 애들하고 잘 안 놀아줘서 그래요. 난데없는 타박과 함께 유하게 웃은 남우현이 내 성격은 좀 풀어질 필요가 있다며 참견했다.
"애들이 김성규씨 얼마나 좋아하는데. 정작 선생님은 딱딱하고. 그러니 애들이 미미씨를 어려워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적어도 남우현씨처럼 만만해지고 싶지는 않은데요."
"이건 만만한 게 아니라 친근한거죠."
남우현은 의외로 지지않고 말했다.
"미미씨한테 매일 캔커피 갖다 주던 걔네. 그 쪽이랑 얼마나 친해지고싶어하는지 모르죠. 그렇게 남의 눈은 배척하기만 하고 있으니 뭘 모르지. 가끔씩은 남 눈치도 살펴주고, 주위도 좀 둘러봐주고 그래요."
"…지금 나 가르치는거에요?"
"응. 그럴수도."
미미씨는 가르침이 좀 필요하니까요. 남우현은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마카 뚜껑을 닫았다. 아! 맞다. 부산스럽게 제 주머니를 뒤지던 남우현은 핸드폰 액정을 이리저리 누르는 듯 하더니 내 얼굴 앞으로 그것을 들이밀었다. 반사적으로 뒤로 고개를 뺀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게 뭔데요? 남우현은 조금 더 핸드폰을 뒤로 떨어트려 액정을 보여주었다.
"내 옆에 여자애 보여요?"
녀석이 보여준 사진은 어쩐지 낯익었다.
어디선가 한 번 본 적 있는 사진이었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남우현 옆으로, 꼭 그만큼이나 밝게 웃고 있는 긴 머리의 여자. 괜히 익숙한 사진이라 생각해 짐짓 진지한 눈을 하고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기를 한참. 문득 남우현의 프로필 사진이 기억났다. 스치듯이 본 적 있던 화사한 프로필 사진. 멍청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얘가 미미씨 되게 좋아해요. 친해지고싶다고 나한테 맨날…."
"학원생이예요?"
말하느라 흔들리는 화면 액정을 더욱 자세히 보려 남우현의 손을 붙들었다. 남우현은 하던 말을 잠시 멈췄다.
"여자친구 아니라, 학원생이냐구요."
"…미미씨?"
"학원생이랑 밖에서 따로 만나고 그래요?"
내 물음에 남우현은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가끔. 녀석의 대답과 동시에 내 입에서는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남우현씨."
"네."
"진짜 미쳤어요?"
"네?"
"애들이랑 밖에서 만나면 어쩌겠다는건데요. 적어도 다섯살은 어린 애들인데."
"…그게 왜 미친거에요?"
"그게,"
저질이 아니고 뭐냐구요. 고등학생이랑, 제대까지 마친 학원 선생님인데. 그렇게 말하려던 입을 중간에서 꾹 다물어버렸다.
남우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은 괜히 나만 더 답답하게끔 만들어왔다. 액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느라 힘껏 붙들었던 남우현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남우현은 느린 동작으로 핸드폰 액정을 끄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왜 화났어요?"
"이건 화난 게 아니라, 남우현씨가 여러모로 변태라서."
어이가 없는거에요. 나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또 다시 들은 '변태'라는 수식어에 남우현도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을 때 녀석의 등을 떠민 나는 강의실 문을 소리나게 닫았다.
불투명한 유리 밖으로 당황스럽게 내쳐진 남우현의 실루엣이 드문드문 비쳤다. 나는 혹시라도 녀석이 문을 열고 들어올까 한참동안이나 문고리를 손으로 힘을 줘 닫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발소리가 들렸다. 언뜻 내다 본 바깥에는 비로소 남우현의 그림자 같은 것은 사라져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다가 자리로 옮겨 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하릴없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사무실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말이 되는 소리냐고. 자꾸만 능글맞은 남우현의 모습과, 마치 여자친구처럼 다정해 보였던 여학생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양심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수가. 앞으로는 정말로 상종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정의의 사도같은 성격도 아니었건만 유난히 마음 속에 불길이 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텀블러에 담긴 미지근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다가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다시금 생각해봐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시 시작된 수업시간 내내 못내 께름칙한 마음은 떨쳐낼 수가 없어 불편했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이 유난히 킥킥대며 화이트보드를 몇 번 가리키는 것도 일찍 캐치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조용했던 아이들마저 웅성거리며 앞을 쳐다보고 있는 게 이상해 녀석들에게 혼을 내려던 참이었다.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해? 제일 앞에 앉은 여학생은 싱글벙글 웃으며 칠판 앞 쪽을 가리켰다.
미미씨 목상태 안좋으니까 건들지 말기. 떠든사람은 남쌤한테 죽음.
낮에 봤던 포스트잇에서처럼, 지독히도 못생긴 글씨 옆에는 나름대로의 웃고있는 이모티콘까지 따라붙어 있었다. 저녁시간 내내 뭔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더니, 고작 저런 거 하나 써 놓으려고. 무슨 초등학생들 훈계하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써 놓으면 누가 쫄까봐. 아니나다를까 학생들은 피식피식 웃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미미쌤, 아까 정훈이 떠들었어요! 남쌤한테 가서 이를까요? 맨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 하나가 맨 뒤쪽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무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웃었다. 급속도로 피곤해져오는 마음에 이마를 짚었다.
"칠판엔 눈도 돌리지 마. 문제에 집중해. 저 뒤쪽 집중 안 해?"
별 것 아닌 말이었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하자 저들끼리 킥킥거리던 무리가 금세 조용해졌다. 싱글벙글 웃기도 잠시, 칠판에는 흥미가 떨어진 아이들이 다시금 문제집에 코를 박고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기 전에, 다시 한 번 화이트보드 구석에 눈길을 돌렸다.
미미씨,하고 삐뚤빼뚤하게 써진 글씨가 이상하게 약이 올라 마음 한 켠이 쿡쿡 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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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1인칭 시점으로 연재하는 건 처음이라는 거 알고 계세요? 결론은 이게 더 어려워요 근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