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틀엔 하얀 눈이 쌓이고, 내 마음 한 켠은 그 날의 눈들로 덮여간다.
언제나, 몇 번이나 다시 꺼내보아도 기분 좋은 우리의 눈 내리던 날들.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겨울은, 무겁고 두꺼운 옷을 입는 계절, 눈이 내리는 계절,
그리고, 이진기의 생일이 있는 계절이었다.
내 생일은 가을이기 때문에 나는 항상 먼저 축하를 받았다.
내 생일 때마다, 진기는 매번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나에게 주었다.
여덟 살때는 곰인형을 받았었는데, 꼬질꼬질 때 묻고 어딘가 냄새가 나는 듯한 인형이었다.
선물을 받은 나는 기분이 좋았지만, 엄마는 불쾌하신 모양이었다.
엄마는 진기가 집으로 돌아간 후 나에게 말씀하셨다. 집에 뒹굴던 곰인형이 분명하다는 둥, 더러워 보이니 빨든지 치우든지 해야겠다는 둥 궁시렁 궁시렁.
"진기 생일 땐 선물 주지 마렴, 저 인형은 버려야겠다. 어쩜 선물도 저런 걸..."
하지만 엄마의 불만과는 달리, 나는 그 곰인형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진기 집에 놀러갔을 때 보았던, 진기의 침대 머리맡에 놓여져있던 그 인형을 나는 똑똑히 기억했다.
진기는 그 인형을 나에게 소개했었다.
"얘는 곰아워야. 얘랑 자면 무서운 꿈도 안 꿔! 대신에 아침에 '고마워'라고 말해줘야 돼. 왜냐면 날 지켜주느라 밤새 잠을 못 자니까...고마우니까. 그래서 고마워, 곰아워."
"우아..."
"너는 이런 거 없어?"
"웅.. 대신에 나는 공주님 인형 있는데."
"공주는 약하잖아, 공주는 지켜줄 사람이 필요해."
"하지만..."
나는 내 공주 인형도 나름 괜찮다는 걸 설명해 보려했지만, 진기는,
"이거 한 번 안아봐. 좋지."
하며 내 몸만한 인형을 덥썩 안겨주었다. 내가 엉겁결에 받아들자 진기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가와서 속삭였다.
'고맙다고 해야지.'
곰인형을 안아든 나, 그리고 배시시 웃던 진기.
같은 나인데도 진기가 참 똑똑하고 멋져보였다. 곰인형에 저런 멋진 이름을 지어주다니. 곰아워, 곰아워...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되뇌었다.
'저런 인형하나 있음 참 좋겠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기고 귀여울 따름이지만. 저 때나 지금이나 말장난하는 것도 같고, 귀여운 것도, 가끔 뜬금없는 상황에서 멋져보이는 것도 꼭 같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우리 둘의 관계랄까.
친구에서, 남자친구로.
아무튼,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그 '곰아워'는 정말 특별했다. 진기가 아끼는, 진기를 밤새 지켜주는, 진기 냄새가 가득 밴 그 곰인형. 엄마는 뭔지도 모르면서. 진기와 나만의 비밀인 그 곰인형을 나는 절대 세탁기에 빨리게 내버려두거나, 길거리에 버려지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진기 옆에 있던 그 모습 그대로, 그 냄새 그대로 남겨두고 싶었기에. 옷장 깊숙한 곳에 숨겼다. 그리고 그 날 밤, 엄마가 침대에 누운 내게 "잘자렴."하고 방 불을 끄고 나가신 후 곧장 꺼내어 내 머리맡에 올렸다.
'미안해,'
깜깜한 옷장에 가둬서 미안해,
진기에게 소중한 너가 나한테 오게 돼서 미안해.
그 이후에도 쭉, 진기의 '소중한' 선물들은 계속됐다. 남들이 보면 생일 선물로 그런 걸 주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진기가 주는 선물의 의미를 알기에,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값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진기에게 '선물'이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기꺼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오롯이 자기 기준에서 중요하고 값진 것을 매번 선물로 골랐고, 그것이 쓰던 것이든, 낡고 오래된 것이든 상관 없이 '소중하다'라는 기준만 만족한다면 '선물'의 가치를 충분히 가진다 생각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매 년 나에게 자기의 소중한 것들을 줬는데, 이제 그 애에게 추억이 깃든 소중한 것이 남아있기나 할까 싶다.
그리고,
스무 살 겨울의 첫 눈이 내렸다.
어김없이 진기의 생일이 다가온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밤 까지 서울시내를 돌아다닌다. 눈은 잠시 그쳤지만 여전히 날은 춥다.
하지만 진기의 코트 속 마주잡은 내 손과 진기의 손까지 춥게 하지는 못할 만큼, 딱 그 만큼 춥다.
크리스마스는 한 달 정도 남았는데, 벌써 도시는 내일이 당장 크리스마스여도 맞이할 준비가 다 된 듯하다.
가게들의 창마다, 거리의 장식 마다 따뜻한 오렌지 색 조명이 스며나와 참 포근하다.
그렇게 걷다가 인형 파는 트럭앞에 걸음이 멈춰섰다. 트럭 뒤에는 인형이 종류별로 참 많이도 전시되어 있다.
옆에선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 아이가 엄마에게 하나만 사달라며 보챈다.
"공주 인형, 공주. 사줘, 응?"
"얘는, 집에 있으면서 뭘 또."
그 모습을 진기가 흐뭇하게 보고 있다.
인형을 쭉 보다가 곰인형을 발견한다.
그리고 떠오른 곰아워 인형.
트럭을 지나 다시 눈 쌓인 길을 걷다가 은근히 물어본다.
"진기야, 너 기억나?"
진기의 시선은 나를 향한다.
"응, 뭐가?"
"너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내 생일에 줬던 인형."
진기가 눈동자를 위로 굴리면서 '뭐였더라...'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다.
"자는 동안 날 지켜줘서 고마워,"
내가 여기까지 말하자 진기는 생각난 듯,
"고마워, 곰아워. 아 그 곰인형!"
"걔 아직도 있어, 내 방에. 맨날 같이 자."
"오, 진짜? 무서운 꿈 안 꾸지? 오랜만에 보고싶다. 곰아워 씨는 잘 지내셔? 많이 늙으셨을 텐데..."
"푸흡... 뭐래 암튼, 그 때 너가 그 인형 줘서 정말 놀랐었는데."
"왜?"
"너가 아끼는 인형이었잖아. 널 지켜주고..."
"그래서 줬잖아."
"아니... 보통 막 아끼는 건 잘 안주잖아 게다가 너가 쓰면서 정도 들었을 텐데..."
진기가 다시 생각하는 표정이 된다. 아끼니까 주는 게 당연하지,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너가 잘 갖고있으니까 난 좋아! 더!"
활짝 눈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머리를 숙여 내 어깨위에 파묻는다.
한동안 가만히 그러고 있는다.
"근데 넌 이제 소중한 게 남아있기나 하냐, 나한테 다 주고, 친구한테도 다 주고..."
진기가 고개를 들어 멀뚱멀뚱 나를 바라본다.
이내 푸흐흐... 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추워서 빨개진 내 코를 톡 치고는, 내 코트 모자를 올려 씌워주며
언젠가의 기억처럼 속삭인다.
"아직 많이 남아있지."
"아직 줄 것도 많은데."
진기가 모자를 씌워주자 함박눈이 한 송이 한 송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다.
끌러진 목도리도 다시 매어 준다. 코까지 둘둘 말아서.
이제 바람이 닿는 곳은 이마와 내 두 눈 뿐이다.
날 바라보는 진기의 눈빛이 너무나 따뜻해서 모든 눈을 녹여낼 것만 같다.
사람도 한적해진 거리,
오렌지 빛 전등 아래,
고요하게 떨어지는 함박눈,
그리고
이 겨울, 진기와 나.
이렇게 가까이서 볼 때마다 심장이 요동친다. 목도리로 가리지 않았다면, 지금이 환한 낮이었다면 분명
빨개진 내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을 거다.
진기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입김도, 목소리도 따뜻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한테 제일 소중한 게 남아있잖아."
"내 앞에."
나를 꼭 안아준다.
잠시 후에 몸을 떼어 이내 내 어깨를 잡고 말한다.
"공주는 약하잖아."
"그래서 내가 지켜줘야지."
"소중한 걸 소중한 사람에게 줘 나는. 근데..."
"넌 아무한테도 안 줄거야. 정말 정말."
"이진기..."
널 부르는 내 목소리에 너는 해사하게 웃는다.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따뜻한 숨을 뱉어내며 내 이마에 짧게 키스한다.
차가운 겨울에도 높아진 너와 나의 온도.
소중한 나의 겨울, 나의 남자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