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八
황후의 손이 지민의 뺨을 뜨겁게 쓸었다. 손 아래로 여리게 들썩이는 움직임이 일었다. 지민은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환영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가지 않아서였다. 황후가 지민의 아랫입술을 감쳐 물었다. 전장을 밥 먹듯이 나다닌 터라 죽으면 그만, 살아도 그만이라 생각했던 지민의 평이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회오리쳤다. 그리 당황했음에도 마지막 남은 일말의 양심이기라도 한냥 지민은 닫힌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걸 살살 어르고 달래기라도 하듯이 황후는 뺨에 있던 손을 내려 지민의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제 그만 입술을 열어달라며 혀로 그의 입술을 쓸고 깨물었다. 뒷목에 열이 올랐다. 지민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황후의 고운 손이 닿는, 도포 아래로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었다. 곧장 혼절이라도 할듯했다. 대체 황후가 제게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몰라 지민은 당장 그녀의 어깨를 밀어내고, 그만 두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허나 황후는 애살 어린 목소리로 제게 반문할 때처럼 달큰한 숨결을 밀어 넣으며 익위사의 굳은 몸을 녹였다. 분명, 황제의 앞이었는데도.
지민이 감은 눈에 힘을 줬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힘이 들어간 주먹도 따라 떨려왔다. 붉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울던 황후의 얼굴이 겹쳤다. 당장 맞닿은 입술을 삼키고 여린 몸뚱이 안고 싶은 마음이 들어 제 스스로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
그럼에도 지민은 끝까지 입술을 열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입술만 맞추고 그녀를 놓아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그런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황후가 아쉽게 지민을 놓아주었다. 지민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멀어지는 황후의 얼굴이 신기루처럼 보였다. 지민이 처음으로 이 공간에 있던 황제를 의식했다. 황후역시 비소를 머금고 정국을 돌아봤다.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건 더없이 나약한, 지배자의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황후.”
황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붉게 물들어 어딘가 가엾기까지한 그의 눈이 황후를 오롯이 담았다. 무력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황제는 나약하고 고달팠다. 툭 치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사람처럼 정국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황후가 그런 정국을 비웃기라도 하듯 잠시 아무 말 없이 빤히 그 얼굴을 주시했다. 황후답지 않게 비정했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아직도 떨리는 눈동자가 허공을 전전하는 지민에게 다가가, 그의 턱을 치켜들었다. 지민은 곧이곧대로 따라갔다.
“황상의 충복이 따로 없구나.”
“…….”
“황상과 네 사이가 어긋나길 바랐는데, 왜 끝까지 입술을 열지 않지?”
매혹적으로 붉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황후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익위사와 황제의 신의가 박살나길 바랐다는 것처럼 진심으로 아쉬워하던 황후가 지민의 얼굴을 다정히 쓸었다. 지민이 그런 황후의 손 위를 포개 잡았다. 마디가 튀어나온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욕심대로라면 당신을 끌어안고 눕힐 수도 있었다. 입을 맞추며, 당신이 우는 모습을 상상했다. 황제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 제 손길에 울음을 터뜨릴 당신을. 이리도 난폭하고, 포악한 제 마음을 알 길도 없으면서, 가지고 논다 생각하는 것이 여전히 미련했다. 속에 있는 말을 전하기라도 하듯 지민의 답지 않게 성난 눈이 황후를 끝까지 주시했다. 황후의 손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생전 처음으로 무심하고 태연하던 지민이 제 본성을,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그런 지민의 손을 가까이 다가온 황제가 쳐냈다. 황후를 뚫어져라 주시하던 핏발 선 익위사의 눈이 그런 황제를 향했다. 정국은 느리게 숨을 씹으며 지민에게 고갯짓했다. 정국이 가지는 이 상실감의 대상은 지민이 아니었다. 익위사가 황후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매번 어떤 시선으로 그녀를 봤는지 황제는 알 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익위사는 이만 나가보아라.”
“…….”
차분하려 애쓰는 정국의 음성이 미약하게나마 떨려왔다. 잠시 그런 정국과 황후를 보던 지민이 발을 뗐다. 기어코 묵혀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오기 전에 황후를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허공에 남은 욕심의 잔상은 거짓이었던 것처럼, 제 뒤를 따르는 황후의 의심어린 눈초리를 외면한 지민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지민의 뒷모습까지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던 황후가 제 어깨를 거칠게 잡는 손길에 몸을 돌려 정국을 봤다. 그동안의 인내가 무색하게 정국의 얼굴에는 파도 같은 동요가 일었다. 황제의 가슴팍이 불안정하게 들썩였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 붉어진 황제의 눈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황후가 피식 웃었다.
“재미, 없군요.”
“도미가 죽은 건 내 실수라고, 예상치도 못한 변수였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변명이라도 하듯, 목이 메는지 꽤나 느릿하고 젖은 음성이었다. 황제에겐 이질적이었다. 작은 어깨를 쥔 손길이 떨렸다. 황후는 무심하게 그런 황제를 봤다.
“백야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 황상께서 제게 씌운 누명이라 하셨습니다.”
“그건, 그건….”
“제게 참형을 내리셨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황상과 제 사이에 이제 대체 무엇이 남았단 말씀이십니까?”
“…….”
“더 이상 연모를 구걸하지 않을 것입니다. 황상께서 그 손으로 신첩을 끊어내셨으니, 신첩 또한 황상을 버렸습니다."
“…….”
“황상이 도미를 죽였어요.”
정국을 보는 황후의 얼굴에는 예전처럼 벅차오르는 감정도, 일말의 기대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내걸었던 그동안의 시간들은 전부 거짓이었던 것처럼. 공허한 황후의 눈동자가 정국을 점점 더 나락으로 내몰았다. 정국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패악과 독기. 황후의 마음이 일렁거렸다.
“정적이라 하셨지요. 예, 연모를 거두고 보니 맞는 것도 같습니다.”
“…….”
“황상과 저는 적입니다. 제 모든 것을 앗아가셨으니, 저 역시 황상의 모든 것을 빼앗을 것입니다.”
“…연모를 거두었다?”
“황상이 처절하게 무너질 모습을 기대하지요. 황상도 보십시오. 신첩이 얼마나 간악하게 황상을 쓰러뜨리는지.”
황후는 몰랐다. 제 앞에서 이미 정국은 처절하게 무너졌다는 것을. 정국이 젖은 숨을 내뱉었다. 항상 옥좌에 앉아서 군림하던 황제였지만 이미 그의 삶은, 황제라는 자리는, 정국을 지치게 만들었다. 황제의 눈가에 꺼지지 않는 피곤이 겹쳤다.
“넌 몰라. 내가 얼마나, 얼마나 오래 참아왔는지…. 얼마나 내 속을 누르고, 마음을 그러안고 살아왔는지.”
“하.”
“이 황제라는 자리가 얼마나, 내 숨통을 죄여왔는지.”
“…….”
“그대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 손으로 그대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를 보면 눈물만 흐르는 뺨을 쓸어주고, 그 귓전에 황후가 아닌 그대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는 것도. 원망의 어조였다. 아니, 그건 원망보다는 투정에 가까웠다. 왜 내 마음을 모르느냐고 항의라도 하듯이 잔뜩 어린 말들뿐이었다. 황후가 허탈하게 숨을 뱉었다. 이제 와서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정국은 모질게도 끝까지 자신을 제 손안에 쥐고자 했다. 황후에게 정국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그의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의 진심 같은 건 이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신첩을 내치실 겁니까?”
“…….”
“황상의 앞에서 익위사에게 입을 맞추었으니, 그도 내치실 겁니까?”
황후가 태연하게 물었다. 정국이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가 손을 들어 차가운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며칠째 제대로 잔 적 없는 정국의 얼굴에는 잔뜩 피곤한 기색이 스쳤다.
“…그대에겐 그 말이 참으로 쉽구나.”
“황상께는 더 쉬운 일이실 텐데요.”
눈을 꾹 감고 눈썹뼈를 짓누르는 손길이 억셌다. 황후와의 언쟁이 이젠 숨막혔다. 곁에 있어도 손에 쥘 수 없고, 안을 수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다 벗어던지고 싶었다. 황제라는 신분도, 그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명분이라는 족쇄도. 헌데 황후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는 눈으로 자신을 보면, 그러면 신분을 버리는 일 따위로도 연모가 성사될 수 없다는 게 자꾸만 상기가 됐다. 정국은 조급했다.
“그대는 아직 날 사랑해. 그렇지?”
“하.”
황제가 황후의 앞전에서 저지른 그동안의 패악을 간과하고서라도 아주 뻔뻔하고 태연자약한 물음이었다. 허나 그 내용과는 달리 정국의 목소리는 자신이 없었다. 사랑, 이라 내뱉은 음성이 가냘프게 떨렸던 것도 같다. 간절하면서도 간악했다. 황후가 그런 황제의 말에 헛웃음 쳤다. 무어라 말해도 정국은 제대로 듣지 않을 것 같아 사기가 떨어졌다.
그래서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허공을 전전하던 황후의 눈에 방금까지 제 어깨를 쥐고 떨어졌던 황제의 손이 보였다. 도미가 처형되던 날 죽겠다고 칼날을 제 목 언저리에 내밀었을 때, 맨손으로 그 칼을 쥐었던 황제였다. 그 손에 여직 남은 상처가 낙인처럼 깊게 베여있었다. 황후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이젠 황상을 연모하지 않아요.”
“…….”
“신첩이 그동안 해왔던 건 연모가 아니라 구걸이었습니다.”
“…….”
“이리도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걸…, 그동안 왜 이리 미련하게 굴었을까요.”
황후가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런 감정도, 정말 제게 있었던 모든 미련과 연모까지도 다 게워낸 사람처럼 굴어서 그게 정국을 두렵게 만들었다.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녀를 몰아세우고, 왜 날 사랑하지 않냐고, 다시 날 사랑하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놓아 버릴 거면, 적어도 날 천치로 만들진 말았어야지.”
“…….”
“그대는 영원히 그 자리에 있어줄 줄 알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말로 대못을 박아도 날 기다려줄 줄 알았어.”
“그러지 못한 것이 신첩의 잘못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대의 그 기대감 어린 얼굴이 무너지는 걸 볼 때마다, 내 마음도 같이 무너졌다.”
황제의 음성이 형편없이 떨렸다. 항상 가슴을 얼게 만들만큼 차갑고 매정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게 정국 그 자체였던 것처럼.
“내가 얼마나 그대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데.”
“황상.”
“그걸 위해서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데.”
이럴 수는 없어. 마치 애원하듯 다시 황후의 손을 쥐고 눈을 맞추던 정국이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더 이상 황후의 손길이 닿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짓무른 그의 얼굴이 비참하게 헐떡였다는 걸, 그녀는 외면했다.
약한 황권에 꼭두각시처럼 대승상의 손아귀에 휘둘렸던 선황. 무능과 도태에 빠져 하루하루를 술독에 빠져 살아갔던 선황. 정국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 대승상이 황제인 제 아비의 면전에 상소를 던지는 꼴을 보고서도 주먹을 꽉 쥐었었다. 자신이 황위에 오르면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 다짐했다. 제 스스로 힘을 키울 때까지, 저렇게 무력하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몸을 웅크리고 숨을 참았다. 대승상이 제 아비의 숨통을 끊어 놓을 때도, 비참하게 쓰러진 황제의 시신을 발로 짓누를 때도 분노를 참고 또 삭혔다. 평생 들끓는 살기와 원망과 후회를 달고 산 삶이었다. 내 언젠간 대승상을 비롯해 아비의 죽인 온갖 척신들을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란 다짐을 하면서. 정국은 참는 것이 병이 되어 마음이 곪았다. 고질병이었다.
“황상.”
그런 대승상의 여식이었다. 안 된다고. 그녀는 아니라고. 제 스스로 고개를 젓고 밀어내고 외면했다. 마음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버렸는데 자꾸만 감정을 짓누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고 성을 내었다. 말간 얼굴이 울음으로 흩어질 때까지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심장 어디 언저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가슴 뻐근한 고통. 그게 그녀였다. 아프고 참는 건 이골이 날 정도로 많이 해보았는데, 이상하게 그녀를 향한 마음을 참는 건 생전 처음 하는 일처럼 매번 새로운 생채기를 냈다. 그걸 어떻게 참았는데,
“거짓입니다.”
그녀를 볼 때마다 자꾸만 가슴이 뻐근해져서, 차라리 눈이 멀었으면 싶었다.
“당장 신첩을 버리긴 아까우니, 거짓을 뱉으시는 게지요.”
“…….”
“황상은 신첩을 조금도, 조금도 마음에 담지 않으셨어요.”
그럼 이건 무엇이냐 묻고 싶었다. 그대를 눈에 담을 때마다 죽을 만큼 아픈 이 통증은 무엇이냐고. 황제의 가슴팍이 거칠게 들썩였다. 거친 숨이 그의 난폭한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제발 날 알아달라고 황제가 숨죽여 울었다.
/ 皇后列傳
황후는 다시 대명전에서 황후전으로 향했다. 황제를 그 자리에서 무너뜨리고 나온 주제에, 여전히 꼿꼿한 발걸음은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황궁을 지나던 어떤 누구든 그런 황후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조아렸다. 다시금 대승상이 그리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황후는 영원히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걸, 느꼈기 때문일 테지. 바쁘게 돌아가는, 겉으로 보면 평화로워 보이기만 하는 황궁이었으나 그 안에 몸 담고 있는 자들은 모두 피부에 닿는 공기의 차가움을 느꼈다. 후궁시해라는 불명예를 탈피한 황후가 제 고생을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황후마마.”
그런 황후의 일행을 잠시 멈춘 것은 제법 그럴듯하게 치장을 하고, 그럴듯한 수의 나인들을 달고 다니던 후궁 둘. 연재인과 순빈이었다. 본래 황궁 밖에서 거처하는 그들은 무슨 일로 이 황궁에 다시 발을 들이던 참이었는지는 몰라도, 딱 황후를 발견하고 나서의 표정은 실로 참담했다.
특히 지난 번 황후에게 한 번 당한 바가 있던 순빈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썼지만 단단히 경직된 표정을 삼킬 수 없었다. 그들은 황후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했다. 익화궁에서의 독살사건을 직접 목격했던 이들답게 모두가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오랜만이군요. 어찌 자주 황궁에 들리시질 않고.”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반듯한 눈썹 사이를 정처 없이 찌푸리며 뱉어내는 목소리가 꽤나 서러웠다. 덕분에 후궁 둘은 뒷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허투루 맘에 없는 말을 잘 하지 않는 황후에게 저리 살가운 환대를 받으니 어색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당황으로 거짓 미소를 짓는 것이 어려웠다. 먼저 웃음을 띄우기에 성공한 연재인이 황송하다는 듯 살짝 읍을 했다.
“헌데, 오늘은 무슨 일로?”
자주 들리라 해놓곤 왜 왔냐 물었다. 뻔뻔해라. 순빈은 황후를 보고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허나 또다시 곧이곧대로 쏘아 붙이진 못했다. 한 번 데여본 적이 있었으니까. 황후의 물음에 잠시 당황해 서로 눈을 맞추던 후궁들 중 연재인이 입을 열었다.
“실은 백재인께서 저희 둘을 대청전으로 부르신 까닭에… 이리 입궁하게 되었습니다.”
연재인의 공손한 말에 황후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백야가 내명부의 수장인 황후를 제외하고 두 후궁만 제 처소로 불렀다. 그 어리고 겁 없는 것이 제 주제에 황후를 자극하기라도 하려는 심산인가. 아무렴. 황후에겐 백야가 선제로 무엇을 해온다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단단히 붙을 각오가 되어있었는데, 상대에서 반응이 없으면 오히려 재미없을 테니. 황후에겐 여전히 백야는 정국의 사랑하는 애첩일 뿐이었다. 허니 정국을 향한 칼날이 백야를 향하지 않으란 법이 없지.
“그렇군요.”
잠시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던 황후가 두 후궁을 보며 예쁘게 웃었다.
“헌데 내 진정으로 두 후궁 분들이 걱정이 되어, 한마디 하겠습니다.”
“…….”
그리곤 흰 손을 살랑이며 잠깐 다가오라는 신호를 주었다. 침을 꼴깍 삼킨 순빈과 연재인이 한 걸음 앞으로 가서 황후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황궁에선 줄을 잘 서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답니다.”
“…….”
“견고히 이 자리에 올랐고, 다신 추락하지 않을 나와, 곧 내 손아귀에 목이 졸려 죽을 백재인.”
“…마마.”
“둘 중 누가 더 좋을까요? 아, 이리 어려운 선택을 하라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인가?”
황후는 뻔뻔하게 저와 백야를 비교하며 끝으론 방긋 웃어버렸다. 황후의 그 한 마디에 선 그 자리에서 몸이 얼어버린 순빈과 연재인은 순한 그 눈동자를 혼란스럽게 굴릴 뿐이었다. 꼼짝도 못하는 그들 대신에, 황후가 먼저 물러섰다. 시간이 되면 저도 백재인의 처소로 찾아가지요. 하는 예고를 남기고선, 다시 천천히 황후전으로 걸음을 뗐다.
“가엾구나.”
황후는 걸음을 옮기며 아주 슬픈 표정으로 읊조렸다. 황제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황궁 밖에서 매일같이 독수공방할 후궁들의 신세도 제법 불쌍했기 때문이었다. 전엔 스스로가 너무도 가여워 직시할 수 없었는데, 마음을 비우니 이젠 그런 것들이 보였다. 황제에게서 마음을 버린 건 명백히 이득인 일이었다. 황후는 태생부터 어쩔 수 없는, 이 황궁에 살아야만 하는 여인이다. 그 일을 겪은 지 얼마 채 지나지 않아 저리 황궁 안을 활개를 치고 다니니 말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독하다. 황후가 아주 독해 빠졌다고. 허나, 한참을 여유롭게 걸음을 놀리던 황후를 다시금 그 자리에 멈춰서게 한 것은, 이미 황후전에 당도해 있던 한사람의 등장이었다.
“…….”
“황후마마.”
모두 허황된 가식과 애정으로 그 이름을 불러줄 때, 오로지 진실된 음성으로만 자신을 불러주던, 위해주던 이젠 유일한 사람. 황후가 황후전에 도착 해 본 것은 태형이었다. 잠시 제 곁을 떠나있었던 행방조차 찾지 못했던 태형. 여태껏 버텨왔던 것이 가상하게 황후는 정말 순식간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황후를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짓던 태형에 그에 놀라 빠르게 다가왔다. 못 본 사이 태형의 얼굴과 목 언저리에는 붉은 상처자국이 만연했다.
“괜찮으십니까?”
“너, 너….”
황후가 풀썩 주저앉자 놀란 뒤의 나인들이 그녀를 일으켜야 할지, 가만있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태형이 황후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금방 순빈과 연재인에게 무자비한 말을 한 사람은 마치 다른 이였다는 듯 티 없는 그 눈동자는 연신 혼란스럽게 흔들리며 태형을 담았다. 단순히 놀라서인지 아니면 눌러왔던 감정이며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터지기라도 한 것인지 황후도 알 수 없었다.
“소신이 많이 늦었습니까?”
오랜만에 들은 그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고 한결같았다. 덕분에 황후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해 손을 들어 태형의 손목을 꽉 쥐었다. 한동안 워낙 꿈만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나는 터라, 경황마저 없던 찰나 제 곁을 떠났던 태형의 등장은 그 꿈같은 현실의 절정을 찍었다.
“대체 어딜….”
황후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런 황후를 보며 피식 웃음을 뱉은 태형은 황후를 일으켜주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허나, 금방 그 혼란스럽던 눈을 굳힌 황후가 그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그 작은 몸에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나 놀랄 정도로 가차 없이. 그래서 얼떨떨한 얼굴이 되어버린 태형이 황후를 빤히 바라봤다.
“마마.”
달래는 듯한 그 부름에도 죽어라 태형을 노려보던 황후는 제 힘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를 일으키려던 태형도, 뒤에 서있던 상궁 궁녀들도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 황후는 그 시선을 홱 거두곤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따라오지 마라!”
새침하게 뱉어내는 말에도 가시가 가득했다. 그제야 놀란 얼굴에서 실소를 내뱉은 태형이 여과 없이 미소를 작게 지었다. 윤기에게 상황을 듣고 나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최고상궁이 이 황궁 안에서 그녀에게 전부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태형이었으니까. 헌데 황후는 그의 생각보다 꽤나 잘 버티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도미를 따라 자결할지도 모른다고, 황후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 걱정한 것 치고는. 넓은 보폭으로 걸어 벌써 처소 문을 확 열어젖히고 있는 황후를 따라, 태형도 달려갔다. 어서 빨리 그녀를 보고 싶다. 안고 싶다. 얼마나 못 보았다고 그리움은 배가 되어 태형을 절정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따라오지 말라하지 않았느냐!”
허나 처소까지 따라 들어간 태형은 문을 닫다 말고, 온 몸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자신을 돌아보며 소리치는 황후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기 가득하던 그 얼굴을 어느새 투정부리는 아이같이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새하얗고 티 없는 두 뺨 위로 눈물이 타고 내렸다. 태형은 문고리를 잡은 손도 놓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 그런 황후를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잘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후마마.”
“대체, 대체 어딜 갔던 거야….”
항상 황제에게 상처받은 얼굴로 침통해하고, 아파하는 게 다였던 황후가 이리 맨 얼굴을 드러내놓고 아이처럼 울자 태형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울자 세상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당장 달려가 눈물을 닦아주고, 원망을 뱉어내는 입술을 제 입술로 다정히 달래주고 싶은데 굳은 몸은 움직여지질 않았다. 순간 정처 없는 죄책감이 온 몸을 감쌌다. 혼자 두어선 안 되는 것인데, 절대 그녀를 혼자 있게 해선 안 되는 것인데… 자신이 무능하여 곁을 비웠다. 참을 수 없이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하.”
태형이 닫힌 문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내뱉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일에는 이제 치가 떨리는데, 다시금 되풀이 되는 현실이 잔인했다. 황후가 우는 게 죽는 것보다 싫었다.
“내가, 내가 얼마나….”
흐느끼는 황후의 목소리가 태형의 정신을 차리게 했다. 지금까지 혼자 두었으니, 이젠 절대 그녀의 곁을 떠나서는 안 됐다. 그걸 깨달은 태형은 우는 황후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한참을 울던 황후가 살짝 당황하여 제게 거침없이 걸어오는 태형을 올려다보며 뒷걸음질 쳤다. 황후의 등이 침상 협탁에 닿았다. 아, 하는 탄식이 황후의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마마.”
가깝다. 그의 키가 훨씬 커서 태형이 고개를 숙이고, 황후가 고개를 들자 노골적으로 시선과 숨결이 맞닿았다. 물러설 곳도 없던 황후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물 걸린 눈으로 태형을 당황스럽게 올려다보기만 했다. 태형의 곧은 어깨가 한 번 잘게 떨렸다. 입 맞추고픈 충동이 들어서였다. 허나 인내한 태형은 황후의 허리를 잡았다. 황후는 눈물로 멈추고 잠시 숨을 참았다. 태형이 황후를 들어 협탁에 앉혔다. 순간 몸이 붕 뜨자 눈을 동그랗게 뜬 황후가 협탁에 오르자 같은 높이가 된 태형의 눈을 가만히 쳐다봤다.
“들었습니다. 최고상궁님 일….”
한참 만에 어렵게 떨어지는 태형의 말이, 쿵쿵 뛰던 황후의 심장을 차갑게 굳혔다. 이성을 다시금 붙잡은 황후는 본능적으로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도미. 쓸쓸하게 갔을 도미를 생각하자, 또 태형의 앞이라 생각하자, 이젠 본능적으로 울음이 터지고 있었다. 태형이 손을 들어 황후의 두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딜 갔던 거야….”
“마마. 신이 잘못했습니다.”
“무서웠다.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는 이가 없어서, 도미를 살려야 하는데 내 말을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 서러웠어….”
황후는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울음이 터져나와 헐떡였다. 서러움을 토해내는 아이처럼 뭉개진 목소리가 정처없이 일렁였다. 황후의 눈물걸린 눈이 태형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실은 도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제 자신이 원망스러운 것인데도, 어리광 부릴 수 있는 것이 태형뿐이라서, 하필 그의 앞이라서, 떨리는 목소리로 태형을 향해 내뱉었다. 헌데도 태형은 나직하게 황후를 향해 사죄했다.
“마마.”
“흐으, 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못 했어… 받은 것 밖에 없는데,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해주지 못 했어….”
발갛게 흐려진 눈동자로 태형의 눈을 좇으며 우는 황후. 태형은 마른침을 삼켰다. 문하시중에게도 이미 들켜버린 것. 자신을 온전히 믿고 제 바닥까지 드러내는 황후에게 미치도록 죄의식이 들었지만 이미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를 달랠 수 있는 게 자신뿐이었으면 했다. 이리 발개진 눈동자도, 상기된 두 뺨도, 저항 없이 우는 모습도 다…. 뒷목에 훅 당겼다. 이리 가까운데, 손만 당기면 우는 그녀를 안아줄 수 있는데. 흐느낌이 새어나오는 입술을 머금고 살살 울음을 달래주고 싶었다. 그것을 참느라 꽉 쥔 주먹에서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소소.”
“얼굴은 또 왜 이 모양인 게야….”
붉은 상처가 가득한 태형의 얼굴을 황후가 손을 들어 쓸었다. 분명 제대로 치료도 하지 않아 피딱지가 굳은 상처였는데도, 마치 방금 생긴 것처럼 그녀의 손길 한 번에 아릿한 고통이 잇따랐다. 태형이 숨을 씹었다. 제 얼굴을 살살 쓸며 눈물 흘리는 황후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흰 뺨을 따라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허나 태형이 할 수 있는 건 황제가 입에 담을 수 없는, 그 온전한 이름을 불러주는 것뿐이다. 깊이 안아주는 것이나 다정히 혀를 섞는 것 따위로 황후를 위로할 수 있는 건, 그녀의 마음을 가진 황제뿐이니까. 마음을 참으며 제 감정을 애써 숨기는 태형을 황후는 배려해주지 않았다. 애초에 그를 사내로 보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을 위해 철저히 인내하는 태형의 뒷목을 먼저 와락 끌어안으니 말이다.
“앞으론, 앞으론 아무데도 가지 마라.”
“소소.”
“내 옆에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내가 너를 이용만 한다 해도 내 곁에 있으란 말이야.”
“미안해요.”
이 사죄가 그대를 탁하게 눈에 담는 내 욕정 때문이라는 걸 그대는 알까. 태형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손길은 다정하게 황후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난도질 난 마음은 더없는 목마름을 갈구했다. 모진 황후는 죽어도 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사내의 품에 안겨, 젖은 목소리로 제 곁에 있으란 잔인한 부탁을 속삭였다.
/ 황 후 열 전
황후는 예전처럼 황궁 깊은 곳에 자리한 황후전에만 박혀있지 않았다. 이제 눈치보고 몸을 사리는 건 황후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몫이다. 활개를 치고 다녔다. 그래서 백야가 자신만 제외하고 다른 후궁들을 불러 모았다던 대청정으로도 행차했다. 그 누구도 황후를 초대한 적 없었지만 그녀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태형이 뒤따랐다.
“황후마….”
대청전 문 앞의 상궁이 황후를 발견하곤 놀란 눈으로 보아도, 그까지 것쯤은 염두도 하지 않은 황후는 그녀를 유유히 지나쳐 대청전 처소 문을 활짝 열었다. 당황한 백야의 상궁들이 황후를 말리려 따라왔지만 모든 손길은 태형과 황후전 나인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다. 황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무단침입치곤 고상한 얼굴을 하고서 저벅저벅 걸어 등장하는 황후에, 그 안에 앉아있던 백야와 순빈, 그리고 연재인은 다들 아연질색한 얼굴을 했다. 특히 백야는 황후를 보자마자 당황한 동그란 눈으로 신분고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째려보았으니까.
“황후께서 어쩐 일로.”
증오스럽다. 아비의 신분 때문에 그 자리에 오른 주제에 마치 원래 제 자리인냥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황후가. 고귀한 핏줄도, 신분도, 황제의 마음마저도 다 가진 황후가. 그래서 백야는 겁도 없이 황후의 등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황후는 눈이 시리게 붉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밝게 웃었다.
“주 황실의 후궁들이 이곳에 모인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내명부의 수장인 내가 어찌 빠지겠습니까?”
태연자약한 말을 내뱉으며 황후는 차례대로 순빈과 연 재인의 눈을 맞추었다. 마치 내가 아까 경고했지 않느냐고 라고 말하듯이. 덕분에 두 후궁은 절망을 느끼며 눈을 곤히 감을 뿐이었다. 얼마 전 황후가 독살을, 아니 독살 모함을 받은 익화궁에 있었던 장본인으로써 황후와 백야의 관계가 얼마나 극적으로 치닫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혹여라도 괜히 이 일에 말렸다가 해라도 보는 것은 아닌지, 이쯤에서 곤란한 암투에 휘말리기 전에 퇴수사로 다가야하는 것인지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황후는 그런 후궁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유롭게 걸음을 옮겨 빈자리에 착석했다. 여전히 막무가내인 황후의 침범에 뒤에서 안절부절한 상궁들을, 백야는 대충 눈짓을 해 내보냈다.
“그저 모여 다과상을 즐기는 것뿐인데, 이리 황후께서 친히 행차를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느새 황궁 말씨가 입에 붙은 백야는 괘씸하게도 잘도 저런 말을 지껄였다. 적당히 예의는 지키는 척 하며 가시 박힌 그 말에, 순빈과 연재인은 속으로 기함을 내질렀다. 허나 황후는 여전히 살풋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저런. 미안해서 어쩌나. 헌데 내 백재인이 쓰러진 이후 처음 보는 것이라 걱정이 되어 말이야. 한 번은 대청전에 들리려 했네. 어찌 몸은 좀 괜찮은가?”
말끝이 미묘하게 짧다. 태후를 제외하곤 내명부의 모든 여인들이 서로 공대를 하게 되어 있는데, 황후는 마치 태후마냥 가벼운 어조로 백야를 대했다. 허나 또 미묘하게 공대와 섞이기도 해서 함부로 반문을 제기했다간 속 좁은 사람이 되기 쉬웠다. 자연스레 백야의 미간이 좁혀졌다.
“황후마마의 염려 덕에 신첩 이리 빨리 완쾌한 듯 하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야가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 때에는 세상 누구보다 가련한 표정, 그 얼굴로 황후를 유심히 쳐다봤다.
“황후께서도 애꿎은 모함 탓에 심기불편하셨지요? 어쩌다 천박하고 뭣 모르는 상궁년 때문에 괜히 죄를 뒤집어 쓰셨으니 말입니다.”
그리곤 뱉어지는 백야의 말에, 처음으로 황후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 백야는 지금 의도적으로 황후의 신경을 긁어내는 중이었다. 백야도 대충 황후와 황후전 최고상궁 사이를 잘 알고 있었으니, 도미의 죽음이 황후에게 가볍지 않다는 것쯤은 파악하기 쉬운 일이었다. 예상처럼 이미 죽은 상궁을 까내리는 말에 황후가 미묘하게 반응한다. 신이 난 백야가 열린 입을 다시금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웃전이 홀대 받는다 해도 그리 경솔한 짓을 벌려선 아니 되는 것인데… 역시 천박하고 못 배운 것들은 그리도 멍청한가 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백야가 맑은 눈을 크게 뜨며 황후를 향해 질문했다. 그 예쁘게 웃는 모양새가 워낙 꼴사나워 황후의 뒤에 서있던 태형은 제가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태형은 황후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다. 또다시 아까처럼 울음이라도 터뜨린다면, 이 후궁들 앞에서 황후의 처지가 아주 우스워질 수 있었으니까. 잠깐의 정적이 일었다. 황후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천천히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반 이상 채워진 찻물이 일렁였다. 황후가 의도적으로 손을 놓쳤다. 덕분에 허공에서 떨어진 찻잔이 처소 바닥을 뒹굴었다. 찻물이 바닥을 천천히 적셔왔다. 백야의 뒤에 있던 상궁 하나가 서둘러 닦을 것을 가지고 황후의 자리로 다가왔다. 허나 그런 상궁을 황후가 나긋한 손길로 저지했다.
“백야에게 주어라.”
“예?….”
백야의 망발에 숨을 죽이고 황후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순빈가 연재인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당장 달려와 황후의 자리 바닥을 닦으려 하던 상궁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그 자리에 멈춰 멍청한 소리만 입 밖으로 내었다. 황후는 충분히 심기가 상할만했던 백야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알 수 없는 말만 할 뿐이었다.
“수건을 백야에게 주라 하였다.”
“허, 허나….”
상궁이 백야의 눈치를 보며 떨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백야역시 황후가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표정관리를 못하고 인상을 굳혔다.
“백 재인.”
“…예, 황후마마.”
“네가 닦는 것이 어떠니?”
“…….”
“후궁이 되기 전에 대명전 항아였다지? 아, 감찰상궁의 눈에 띄어 항아가 되기 전엔, 세답방 무수리였다고?”
“…….”
“허면 누구보다 네가 더 잘 닦을 것이 아니냐.”
황후의 나긋한 목소리에 백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가 분노로 인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백야는 세답방에서 하루종일 빨래를 하고, 염료를 붓던 과거가 떠올라 치욕스러웠다. 최고상궁 도미를 더러 천하다 폄하한 것이 무색하게, 백야는 제 과거가 끔찍했다. 치맛자락 위에 얹힌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런 백야를 빤히 쳐다보던 황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이런 것은 하기 싫은 것이냐?”
“……마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네가 이리와 닦아라.”
황후가 부드럽게 웃으며 찻잔을 주워 다시 탁상 위에 올렸다. 그리곤 아까부터 수건을 손에 쥐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망설이던 상궁을 불렀다. 다시 한 번 백야를 힐끔 보던 상궁이 서둘러 다가와 찻물을 닦아냈다. 그리곤 당장 이 곳을 벗어다고 싶다는 듯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 번 적막이 찾아왔다.
“사실 태후마마를 제외하곤 내명부 여인들과 시간을 보낸 적이 없어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방금까지의 일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황후는 화두를 바꾸었다. 눈을 맞추며 말을 걸어오는 황후에, 순빈과 연재인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반가의 부인들은 모여서 시짓기나 난 그리는 것을 한다지요?”
“예, 그리 들은 것도 같습니다….”
“예, 예.”
“그럼 우리도 그걸 해보지요. 여봐라, 종이와 붓을 가져오렴.”
지금 당장 이 불편하고 숨막히는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작은 핑계라도 대고 빠져나오려 했는데, 그런 후궁들의 결심은 황후의 한마디에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뭐 좋은 사이들이라고 모여 시짓기나 할까 싶었으나 황후는 예쁘게 웃으며 나인을 시켜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했다. 후궁들의 앞에 새하얀 화선지와 벼루, 그리고 먹이 놓였다. 먼저 붓을 손에 쥔 황후가 후궁들을 향해 고개를 빼 시선을 맞추곤 물었다.
“무엇에 대해 하는 것이 좋을까요?”
“황후께서 좋을 대로….”
“곧 봄이 다 지나가니, 봄에 대해 짓는 것이 어떻습니까?”
황후가 제 앞의 종이에 春자를 작게 적으며 물었다. 순빈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연재인도 어색하게 웃으며 붓을 잡았다. 헌데 백야만, 제 앞에 놓인 붓과 벼루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씹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글자를 새기던 황후가 그런 백야를 보곤 짐짓 호기심어린 얼굴을 했다.
“헌데 백재인은 왜 글을 쓰지 않습니까?”
황후의 순진한 목소리에 백야가 놀라 고개를 팍 들곤 황후를 봤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백야의 눈동자가, 아까 그 태연하고 또 독기도 어렸던 것과는 다르게 멍청하게 흔들렸다.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게, 그게 아니라….”
시를 쓰는 것은 썩 많이 해보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봄에 대해 생각하고 구상하며 연재인과 순빈은 뭐라도 써내려가는 중이었다. 허나 백야는 아직 붓을 손에 쥐지도 않았다. 그건 백야가 글을 몰라서였다. 백야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는 것이라곤 제 이름에 쓰인 글자뿐이라 무엇도 쓸 수 없었다. 아무런 말도, 행동도 못한 채 눈만 굴리는 백야에 열심히 시를 지어내려가던 다른 후궁들도 그녀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백야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신, 신첩이… 사실….”
“흐음, 아무래도 시 짓는 건 너무 따분한 일인가?”
“…….”
“아니면 혹시, 재인께선 아직 글을 깨치지 못한 것입니까?”
악의 하나 없어 보이는 천진한 목소리에 백야가 눈을 번뜩 떴다. 황후의 말에 순빈과 연재인이 놀라 붓을 내리며 백야의 눈치를 살폈다. 생전 겪어보지 못했던 치욕이 온몸을 휘감아 심장이 알싸했다. 당장 입을 열면 목소리가 격앙될 것 같았다. 아까 무수리였던 제 과거를 들먹이는 것부터, 글을 모른다는 걸 짐작이라도 한 사람처럼 일부로 시짓기 따위를 하려 하는 황후가 죽을 만큼 얄미웠다.
“그렇다면 제 실수군요. 모두가 다 할 수 있는 것을 했어야 했는데.”
“…….”
백야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드린 황후가 붓을 놓았다. 그녀를 따라 다른 후궁들도 종이를 물렸다. 다가온 나인들이 종이와 벼루를 다시 가져갔다. 끝까지 백야의 종이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새하얀 백지였다.
“재미없는 건 이쯤하고, 이제 그냥 차만 마시지요.”
“…….”
“아, 내가 백재인에게 한 잔 따라주고 싶은데. 몸도 회복한 겸 해서요.”
창피함과 수치스러움의 여운이 그치질 않아 여전히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백야에게 황후가 말했다. 대체 또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백야의 눈이 흔들렸다. 황후가 제 치맛자락을 주섬주섬 가누며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너무도 다정하게, 백야에게 차를 따라주고 싶다며. 황후는 정말 단순히 차를 따라주려는 심산인지 탁상 중앙에 놓인 차와 찻잔을 가지고 건너편 백야에게 다가갔다. 백야가 의문스럽고 기분 나쁜 시선으로 제게 오는 황후의 움직임을 좇았다. 황후의 고운 손이 백야의 앞에 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리곤 병 안의 국화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종이와 벼루를 가져간 상궁이 다시 내온 펄펄 끓는 찻물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그림과도 같아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자.”
한 잔 가득 채워진 잔을 든 황후가 백야와 눈을 마주치며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잔을 건네면서, 앉은 백야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한다.
“너 역시 비천한 주제에, 감히 도미를 욕하려 들어?”
조용히 속삭이는 그 말은 역시나 나긋하고 다정했다. 백야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다. 그럼 그렇지. 저 사악한 황후가 다정히 차만 건네줄 리가. 백야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황후의 귓전에다 대고 읊조렸다. 아까 받은 수모를 되갚아 주기라도 하듯이 잔뜩 독기 어린 음성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든 황후를 동요시키고 물 먹이고 싶었다.
“제 수족을 잘라내고 신분을 유지하신 분이, 이리 함부로 구셔도 되겠습니까?”
“그럼 뭐하니. 난 여전히 황궁의 안주인인 황후고, 넌 후궁 나부랭이 그치지 않는데.”
“그래봤자 참형까지 받았던 황후십니다. 황제에게 버려진 주제에!….”
그 말을 내뱉는 백야마저도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정국의 진심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황후를 낮추고 싶어 멋대로 지껄였다.
“두고 보렴. 내 언젠간 널 이 황궁에서 내쫓을 것이다.”
“…….”
“내가 널, 다시 웃전의 수발이나 드는 무수리로 만들고 말 게야.”
황후의 말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래서 백야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다신, 돌아가지 않아. 내가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온갖 수모와 고생을 다 겪으면서 그 모진 일을 어떻게 견뎠는데. 절대 돌아가지 않아. 백야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폐하가, 폐하가 계신데 당신이 어떻게…!”
“내가 황후인데, 못할 것이 무에 있겠느냐.”
황후는 그런 백야의 부정을 구경하며 여전히 말을 하면서, 손은 뻗어 찻잔을 들었다.
“천박하다 했니? 천한 항아였던 년 따위에게 그딴 소리를 듣다니, 도미가 죽어서도 억울하겠다. 얘.”
“…당신이 지금 감히.”
“감히? 감히라고 했느냐?”
황후는 조곤조곤 비수를 날리며, 분노에 치를 떠는 백야의 말에 진심으로 웃기다는 듯 웃었다.
“아가. 감히, 라는 말은 너 같은 것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
“그건 말이야.”
황후가 손에 든 찻잔을 높이 들었다. 펄펄 끓던 찻물이 든 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후가 그걸 백야 쪽으로 내밀었다. 백야의 두 눈이 두려움에 물들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럴 때 쓰는 거란다.”
찻잔이 기울었다. 동시에 그 안에든 찻물이 쏟아졌다. 백야가 아닌 황후의 어깨로.
“꺄악!”
“네 년이 감히.”
백야는 순식간에 제 눈앞에서 펼쳐진 상황을 눈 뜨고도 받아드릴 수 없었다. 황후가 제 어깨에 스스로 뜨거운 차를 부었다. 그리고 손에서 일부로 찻잔을 놓치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자신이 직접 부어놓고서, 하는 말이 ‘네 년이 감히’라? 백재인은 어깨에 찻물을 뒤집어쓰고 주저앉은 황후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철컥-
설상가상.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데, 거기다 문이 열렸다. 등장한 사람에 백야는 더욱 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다. 잔뜩 굳은 얼굴의 황제가 고아한 용포를 입고 등장해, 무정한 시선으로 저를 본다. 그리고 그 시선은 움직여 바닥에 주저앉은 황후를 담았다. 황제의 그 쓸쓸한 두 눈이 잔뜩 놀란 듯이 팽창되었다.
“객기를… 하아, 부리는군.”
정국은 넓은 보폭으로 황후에게 다가오며 당황스럽고 피곤한 듯 읊조렸다. 그 말이 백야를 향하는 것인지, 황후를 향하는 것인지 모호해 백야는 손을 달달 떨었다.
“아니, 이게 지금….”
“어찌 감히 황후인 내게 차를 들이 붓는단 말이냐!”
이 상황에서 황후의 열연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백야는 어이가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폐하! 아닙니다! 황후마마께서 멋대로!”
백야는 이 순간 정국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미치게 거슬렸다. 하필. 그래서 의자에서 일어나 주저앉은 황후의 곁에, 황제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에 등장한 정국에 자리에 앉아 이 거짓말 같은 상황을 관망만 하던 순빈과 연재인도 의자에서 일어나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황상, 아픕니다….”
마치 아까 제게 잔인하게 속삭이고 갔던 여인은 다른 사람인 것처럼 황후는 무릎을 굽힌 정국의 품에 몸을 기대며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잔뜩 곤란한 얼굴의 정국이 황후의 어깨를 살짝 그러쥐자, 기다렸다는 듯이 황후는 아, 하는 탄식을 내뱉으며 새하얀 미간을 좁혔다. 그에 화들짝 놀란 정국이 어깨에 닿은 손을 떼고 제 관자놀이를 꾹꾹 짚었다.
“전 정말 안 그랬습니다. 황후마마께서 혼자….”
서둘러 변명을 하는 백야의 뺨을, 황후는 한 치의 거짓말도 없이 후려쳤다. 짝-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대청전 안을 가득 울리고, 백야의 고개가 돌아갔다. 맞은 뺨이 얼얼할 정도로 아주 가차 없는 손길이었다. 허, 너무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이런… 미안하구나. 나도 모르게….”
그리곤 황후는, 정말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인냥, 미안하다는 듯 다가가 백야를 끌어안았다. 다시금 백야의 귓가에 내려앉는 황후의 예쁜 음성.
“내가 네 밑바닥을 나 혼자 볼 줄 알았니?”
“하, 하하….”
“자, 감히 라는 말은 언제 쓰는 것인지 이제 알겠느냐?”
황후의 말이 폐부를 찔렀다. 이 상황이 미치도록 치욕스럽고 억울해 황후를 죽이고픈 심정이었다. 황제도 황후가 불러들인 것이었다. 처음부터 제게 제대로 물 먹이려고 작정을 한 게야. 바닥을 짚은 백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한나라의 여치처럼 네 년을 인간도 짐승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이 황궁에서 내보내 줄 테니.”
그 경고를 끝으로 황후가 제 품에서 백야를 떼어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넋을 잃은 사람처럼, 그렇게 백야는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황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정국을 바라봤다. 황제의 피곤하고 지친 눈동자가 어여쁜 황후를 눈에 담았다. 마치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하나도 모르는 듯한 천진난만한 얼굴에 잔뜩 혼란스런 얼굴을 하는 정국은 황후의 다친 어깨에 다시금 손을 뻗었다.
“…아파?”
제가 다친 것처럼, 닿는 손길 한 번에 정국의 미간도 같이 좁혀진다. 황후는 살풋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十九
태형의 표정이 굳었다. 황후는 더 이상 그가 예전에 알던 황후가 아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말갛게 웃는 얼굴로 황제를 향해 독한 비수를 던질 수도 있었고, 제 신경을 긁는 황제의 애첩의 뺨을 내리칠 수도 있었다. 허나 누구보다 강한 척, 독한 척 하고 있지만 그 속은 더 새카맣게 타들어 갈 것이라는 걸 태형은 알았다. 황제의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황후의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망설임 가득했다.
“아….”
황후의 앓는 소리 한 번에 몸을 움찔하던 정국은 잠시 고민하는가 하더니 이내 황후를 안아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제 자리였던 것처럼, 황후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황제의 뒷목에 손을 감고, 금인자수가 수놓아진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폐하!”
그대로 황후를 데리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정국을, 무릎 꿇고 있던 백야가 애타게 붙잡았다.
“신첩을 믿어주십시오! 신첩은 정말….”
“놓아라. 황상의 눈과 귀를 흐리지 말렴.”
허나 떨어지는 것은 황후의 느릿한 충고뿐이었다. 가만히 서서 백야를 내려다보는 정국은 아무 말이 없는데, 그 품의 황후는 이 세상과 관련 없는 사람처럼 고고하게 안기어서, 깔아보는 눈빛과 말투로 백야를 대했다. 백야의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모멸감과, 수치심 그걸 안겨준 이가 황후여서 더더욱 자존심이 밟히고 뭉개지는 것 같았다. 잔뜩 분기가 차올라 누군가를 당장 찢어발길 듯한 백야의 눈동자가 황후를 똑똑히 노려봤다. 본래 분노란, 대상이 그 감정을 두려워할 때 증폭되는 법이다. 허나 황후는 백야의 분노가 사그라들 정도로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백야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황상, 가시지요.”
결국 황후와 세 호흡 이상 눈길을 마주하던 백야가 먼저 고개를 떨구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떨어지는 황후의 말에 그제야 정국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철저히 황후의 말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황제가, 말이다.
혼잡스럽던 대청전을 빠져나와서 정국은 곧장 자신의 처소인 대명전으로 향했다. 황후전과 정반대인 행선지에 정국의 뒷목을 그러쥔 황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만 발걸음을 멈추란 소리였다.
“이제 됐습니다. 신첩을 내려주세요.”
방금까지 다정하게 제 품에 고개를 기대고 고분고분 있었던 것은 전부 백야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는 듯이, 황후는 한 치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말했다. 정국이 입술을 달싹였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나온 목소리였다.
“대명전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가거라.”
“황후전에서 할 것입니다.”
“최고상궁도… 없지 않느냐.”
감히 자신이 도미의 이름을 꺼낼 자격이라도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정국의 음성이 떨렸다. 황후가 그런 정국에 헛웃음 쳤다. 황제가 참으로 뻔뻔하고 이기적이라 느꼈기 때문이었다.
“도미는 없지만 별감이 돌아왔습니다.”
황후의 말에 정국이 고개를 들어 대청전에서부터 따르던 황후의 일행을 보았다. 맨 앞에 서있는 태형의 얼굴이 보였다. 분명 익화궁 연회 때는 황후가 그를 데려오지 않았었는데. 어느새 그녀의 옆에 다시 자리하고 있었다. 왠지 모를 초조함에 정국이 느리게 숨을 씹었다. 손끝이 아릿했다. 황제의 탁한 눈을 태형역시 똑똑히 바라봤다. 총명하고 굳은 눈동자가 여전히 거슬렸다. 그래서 황제는 제 품안에 황후를 더더욱 놓아주기 싫었다.
“별감이 돌아온 게, 무슨 상관이지?”
정국은 답지 않게 투정을 부렸다.
“제 사람입니다. 별감에게 상처를 보이면 되니 이제 그만 놓아주십시오.”
오른쪽 어깨를 전부 적신 찻물이었다. 그럼 저 별감의 앞에서 의복을 걷고 어깨를 곧이곧대로 보여주기라도 하겠단 말인가. 정국이 짙은 눈썹사이를 일그러뜨렸다. 황후의 말을 듣고 그에게로 다가온 태형이, 이만 그녀를 내어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눈앞에 황후가 신기루처럼 태형에게 가려고 준비했다. 정국의 얼굴이 북풍한설처럼 차갑게 굳었다. 그가 손짓해 제 뒤에 있는 익위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에 순식간에 다가온 이들이 황후에게 다가가는 태형의 손을 포박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살짝 놀란 황후가 짐짓 얼굴을 구기며 정국을 봤다. 허나 황제는 그런 황후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아직 얼굴과 몸에 상처를 달고 있는 태형인데, 익위사들의 거센 손길을 벗어나려 인상을 찡그리며 힘을 썼다. 그러자 뒤에서 검의 등으로 태형의 다리를 세게 툭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황제의 앞에서 무릎 꿇은 태형이 단말마의 신음을 뱉었다.
“황상, 지금….”
“별감주제에 짐의 앞에서 함부로 나서지 마라.”
“하.”
“이거 놓으십시오!”
거세게 저항하는 태형에 그를 붙잡은 익위사 하나가 그의 뺨을 쳤다. 순식간에 돌아가는 고개와 거친 파열음에도 황제는 끄떡도 하지 않고 가만히 태형을 내려다봤다. 품안의 황후가 몸을 달싹이며 제게서 벗어나려했지만, 황제는 그녀의 어깨와 허리와 다리에 감은 손을 놓지 않았다.
“황상!”
어느새 상처 가득하던 태형의 얼굴에 생채기가 더 늘었다. 터진 입술로 빨간 피가 흘렀다. 다른 하나가 가차 없이 태형의 복부를 걷어찼다. 두 팔을 포박당한 탓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태형이 나가 떨어졌다. 정국은 그런 태형을 묵묵히 지켜봤다. 다시 말을 하지도 별다른 행동을 하지도 않았지만 모든 것은 황제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의 품에서 안절부절하던 황후가 제 두 눈을 가렸다. 태형이 다치는 게 아팠기 때문이었다.
“대명전으로 가겠습니다.”
“…….”
“별감을 놓아주세요.”
황후전으로 가겠다던 고집이 무색하게 황후가 백기를 들었다. 그게 태형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정국은 이유 없이 화가 났다. 입안 여린 살을 짓씹었다. 그래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일었다. 정국이 황후를 안고 뒤돌았다. 황후의 앞에서 얼른 태형을 치우고 싶었다. 황후를 데리고 정국이 들어오자 대명전 앞 항아들이 서둘러 처소 문을 열었다. 그래서 막힘없이 걸어 처소 안까지 당도한 황제가 그제야 황후를 품안에서 내려주었다.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돌아선 황후가 황제를 매섭게 노려보며 곧장 손을 뻗어 황제의 뺨을 때렸다. 전장에서 칼에 베이는 것이면 모를까, 생전 누구에게 맞아본 적 없을 정국의 고개가 돌아갔다.
“…….”
제 손이 얼얼할 만큼 힘을 주어 때렸다는 사실에 황후가 잠시 미미한 탄식을 내뱉었다. 황후역시 정국에게 손을 올린 건 상당히 우발적이었다는 듯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허나 정국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리고 황후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나의 것을 빼앗는다 해놓고,”
“…….”
“그대가 이리 다쳐오면 어떡하나.”
태형처럼 입술이 터지진 않았지만 황제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황후가 떨리는 눈길로 그의 담담한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허나 정국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황후의 어깨를 걱정했다.
“다시는, 다시는 제 사람을 함부로 대하신다면 참지 않을 것입니다.”
허나 별감을 감싸는 황후의 말에는 심기가 뒤틀렸다. 다시금 황후전 안에서 태형과 입을 맞추던 발칙한 잔상이 떠올랐다. 속이 뒤집혔다. 다른 사내의 손길이 닿는 황후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황제의 얼굴에 치기어린 분노가 자리했다.
“그 자가 그대에게 무엇이기에.”
“전부입니다.”
“뭐라?”
“이젠 도미도 없으니…, 신첩을 믿어줄 유일한 사람이 태형입니다.”
정국이 표정을 구겼다. 알 수 없는 미련이 속을 가득 채우는 통에 명치 끝이 아렸다. 요즘 들어 항상 모든 게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황후는 항상 저 입술 제게 연모의 말만 달싹였는데. 이젠 태형을 더러 제 사람이라 칭하고, 황제를 향해서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말만 내뱉었다. 황후는 제가 하는 말이 하나같이 정국의 속을 새까맣게 태운다는 걸 몰랐다.
“거짓말.”
치기 어린 얼굴, 치기 어린 목소리. 죄다 서러움이 가득해 따지는 듯한 어투였다. 황제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일렁였다.
“그대의 전부는 별감, 그가 아니야.”
“…….”
“내게 연모한다 말했잖아. 짐이 황제라서도, 그대의 부군이라서도 아니라… 그냥 나이기에 사랑한다 그리 말했잖아.”
헌데 왜 이제와서 이러느냔 투정이었다. 황후가 무감하게 고개를 달싹였다. 그런 미련하고 순진한 마음을 가지고 먼저 희망고문한 건 황제였다. 매번 비수가 되는 말로 저를 쳐내는 황제에 숨죽여 울었던 기억만 수두룩했다. 백야에겐 필부가 된다는 사내가, 제겐 정적이라 말했다. 자신은 죽어도 여인이 아니라고, 저를 연모하게 될 일은 죽어도 없다고 그리 말하던 황제가 우스웠다.
“…그대의 전부는 나야.”
“…….”
두 눈이 붉게 번진 황제가 황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여린 살결에 입술을 찍어 누르며 비수가 되는 모진 말 같은 건 이제 그만하라고 속살였다. 황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말을 해도 정국이 들을 것 같지 않아 포기했다. 고개를 안긴 품에 기대어서 황후의 반대편 옷깃이 살짝 내려갔다. 그 안으로 보이는 뜨거운 찻물에 데여 붉어진 어깨가 보인다. 다시 한 번 심장이 화끈거렸다. 그리 화가 났더라면 차라리 제게 차를 들이 부었으면 되었을 걸. 정국이 작게 욕지기를 뱉으며 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태의를 불러와라.”
황제의 부름에 서둘러 처소 안으로 들어온 내시백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정황을 살피다가, 그의 품에 안긴 황후를 보았다. 그리고 황제가 황후전 나인의 부름을 받고 간 대청전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조금만 참거라. 태의가 오면 상처를 살피라 하겠다.”
정국이 황후를 침상에 조심히 앉히자, 황후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정국은 한 쪽 무릎을 꿇고 황후와 시선을 맞춘 채, 잠시 고통을 참으라는 말도 미안하다는 눈길을 했다. 황후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그런 황제를 쳐다보기만 했다.
“태의가 왜 이리 늦는 것이냐?”
그 무표정한 시선이 더욱 재촉이 되었던 듯, 정국은 다시 일어나서 호통을 치며 처소 안을 서성였다. 덕분에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은 문 밖에 서 있는 내시백이었다.
“금방 태의를 부르러 갔으니 곧 올 것입니다, 페하!”
내시백은 아무 죄도 없다는 걸, 태의원과 대명전 사이 거리가 꽤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국은 속이 탔다. 한참을 애타게 문 밖을 쳐다보다가 들려오는 발소리에 반색한 정국이 뒤돌아 황후를 보았다. 이제 어의가 왔으니 괜찮다, 말할 작정이었는데 정국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정면으로 앉혀 놓았는데 어느새 황후는 자신을 등지고서 침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침착한 손길로 제 몸에 걸쳐진 의복의 매듭을 풀고, 그 붉은 옷자락을 끌어 내렸다. 걸리적거리는 머리는 앞으로 넘겨, 하얀 어깨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부드러운 어깨선에 금방 시선이 닿은 정국이 곧장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내외가 된 지 3년이 넘었어도 황제가 번번이 합방을 피하는 바람에 몸을 섞은 적이 없었다. 눈앞에서 황후가 제 어깨와 하얀 등을 드러내는 적 역시 처음이란 소리였다. 정국의 얼굴이 혼란스럽게 물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황제는 첫날 밤 사내처럼 제 입을 틀어막았다.
“…뭐하는 것이냐?”
“약을 받아오셔서 황상이 직접 해주십시오. 태의에게 신첩의 어깨를 보일 순 없습니다.”
“뭐?”
황후가 흘긋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뱉어내는 기가 막힌 말에 정국이 당혹스럽다는 티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폐하! 태의 들었사옵니다!”
“잠깐,”
밖에서 내시백이 아주 반갑게 고하였다. 허나 정국은 선뜻 그 문을 열어줄 수 없었다. 황후의 말대로 태의에게 저 꼴을 보일 순 없었으니까.
“싫으시면… 황후전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럼에도 잠시 고민의 기색을 보이는 황제에, 황후는 결국 쐐기를 박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황후전’이라는 말에 정국의 표정이 완연히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분명 황후전엔 별감이 있으니 괜찮다 했다. 태형은 황후에게 사내였다. 헌데 그런 자를 의지하고 믿는 것도 모자라 선뜻 맨살을 보이겠다 말하는 황후에 속이 뒤집혔다. 황제가 짜증스럽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다, 밖을 향해 소리쳤다.
“태의는 돌려보내고, 내시백은 가져온 약을 들고 들어와라.”
뜬금없는 명에 내시백과 어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깐 빨리 태의를 불러오라고 소리치더니 이젠 돌려보내란다. 대체 무슨 심보인지 여쭙고 싶었으나 천자의 명이니 토를 달 수 없었다. 내시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태의의 등을 떠밀어 돌려보냈다. 그리곤 어의에게서 전해 받은 작은 옥빛 용기에 담긴 약과, 헝겊을 가지고서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
문을 열자마자 바로 눈앞에서 황제가 등장했다. 살짝 놀란 내시백이 흠칫 뒷걸음질 쳤다. 정국은 내시백이 처소 안을 보지 못하도록 막은 뒤,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뺏어 들었다. 그리곤 다시 처소 문을 벌컥 닫았다.
“폐,하?…”
그 문 사이로 내시백의 당황한 말소리가 들려오지만, 정국은 그대로 문을 잠그고 황후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황후는 정국을 등진 채 가만히 앉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국의 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황후가 등진 맞은편에 걸터앉아 옥빛 용기를 열었다. 그 안에든 약을 살짝 손에 덜고 시선을 들어 올리자, 화상을 입어 잔뜩 붉어진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약을 바르는 손이라도 닿으면 아플 것 같아서, 황제는 잠시 망설였다.
“신첩이 객기를 부린다고 생각하십니까?”
“뭐라?”
그러던 차에 황후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제게 오시면서, 그리 말하셨잖습니까. 객기를 부린다고.”
“…….”
대청전에 스스로에게 찻물을 부어 주저앉은 황후를 향해 걸어오면서, 정국은 그렇게 뇌까렸었다. 생각이 난 것인지 정국은 입을 다물고, 황후의 어깨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복수를 한답시고 어찌 제 몸을 상하게 한단 말이야. 이왕 할 것, 백야에게 차를 끼얹지 그랬느냐.”
상처에 닿는 뜨거운 손길이 화끈거렸다. 황후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무엇보다 조심스러웠지만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상처럼 황제는 이미 황궁의 모든 추악한 일에 통달한 사람이었다. 황후가 꾸미는 깜찍한 간교조차 천자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
“신첩이 백야에게 차를 끼얹었다면, 황상의 마음이 더 아팠을까요? 그걸 몰랐군요.”
태연하게 이어지는 말에 약을 바르던 정국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네가 다치는 것엔, 왜 의연할 거라 생각하지?”
그리고 떨어지는 황제의 음성은 잔뜩 불만스러웠다. 황후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려 정국을 보았다. 정국이 곧장 따라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제발… 움직이지 마라.”
황후의 팔을 움켜쥐며 더 이상 움직이지 말라고 말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맨살에 닿는 차가움에 그제야 제 차림을 인지한 황후가 아, 하는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내일 재녀(才女)선발이 있는 날이군요.”
정국역시 다시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이후 황후가 꺼낸 말은 그저 일상적인 황궁얘기였다. 다음날 황궁에서 궁녀와 항아, 상궁 혹은 무희가 될 여인들은 선발하는 재녀선발이 이뤄질 것이다. 꽤나 규모가 큰일이었지만 황후는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국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황후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리고 나서야,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건넸다.
“그리고 내일입니다. 합방 일.”
“…….”
어깨에 맴도는 손길이 아주 집요하게 이어졌다. 그저 그 손길뿐이었는데도, 황제의 큰 손이 제 몸을 만지는 게 지독하게 어색해서 황후는 잠시 숨을 참았다. 다시 숨을 뱉을 때엔, 정국의 난향이 깊게 들어왔다. 황제는 지독하게 매혹적인 사내. 그래서 적으로 두기엔 상당히 위험하고 불리하다. 황후가 손을 들어 정국의 손을 붙잡았다.
“약은 다 바르신듯 싶습니다.”
제 손목을 붙잡은 그 작은 손을 정국은 놓치지 않고 깍지를 껴왔다. 황후가 살짝 놀라 어깨를 달싹였다. 정국은 그대로 황후의 어깨에 고개를 살짝 걸치고, 깍지 낀 손을 앞으로 보내 허리를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
“대승상의 욕심이건, 정계의 문제건 신경 쓰기 지친다. 피하기도 지쳐.”
“…….”
“네게, 네 복수에 합방이 필요하다면 그리할 것이다.”
“황상은 어찌하고 싶으십니까?”
애끓는 정국의 음성과는 달리 황후는 단순한 선택지를 고르는 냥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정국이 대답 대신에 깊은 숨을 내쉬며, 황후의 맨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뱃속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황후가 매캐한 속을 숨기고 의연하게 웃었다.
“황상. 신첩의 마음은 더 이상 황상께 없습니다. 단순히 떠나는 절 붙잡기 위해 합방이란 핑계를 대시려 하신다면… 신첩은 괘씸해서라도 그걸 피하고 싶어질 테지요.”
정국이 황후의 어깨에서 고개를 뗐다. 힘이 풀린 손은 황후가 깍지를 풀자 금방 떨어진다. 황후는 태연하게 옷을 끌어올리고 매듭을 지으며 말했다.
“허면, 그 마음에 이젠 다른 이가 있는 것이냐? 내가 아닌, 다른 사내를 연모하기라도 하느냔 말이다.”
격양된 정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매듭을 갈무리 했다. 침묵은 긍정을 의미한다. 그건 만고의 진리가 아니었던가. 순식간에 불안감에 휩싸인 황제가 답지 않게 이성을 잃고, 초조한 눈길로 황후의 행동을 기다렸다.
“신첩은 더 이상 황상을 사랑하지 않아요.”
“…거짓이다.”
정국이 한 손으로 지친 얼굴을 쓸어내렸다. 건들이면 곧바로 무너질 듯한 표정을 하고서, 그가 팔을 뻗어 황후의 작은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그대로 제 심장 부근을 짚었다. 쿵쿵 거세게 뛰는 심장이 흉폭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이런데, 난 이제 그대가 아니면 아무 것도 없는데….”
황제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애절한 말이 진실이기라도 한 듯이, 벅찬 떨림이었다. 의복 아래로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느껴졌다. 황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마주하자 정국이 미간을 조이며 신음처럼 괴롭게 말을 내뱉었다.
“제발, 이러지 마….”
황후가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국의 시선도 황후를 따라 일어났다. 황후가 정국을 향해 돌아섰다. 그 티 없는 얼굴에 어색하고 예쁜 웃음이 자리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
“신첩과 황상은 이미, 악연인 것을.”
슬픈 미소가 적막한 허공에 천천히 흩어졌다. 나락이었다.
/ 皇后列傳
“이제 황제가 우리가문을 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
“황후께서 운 좋게 살아남으셨다 해도, 황제는 결코 내 사병과 자금을 좌시하진 않을 게야.”
대승상은 고상한 목소리로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으며 찻잔을 들었다. 독박을 쓴 최고상궁이 처형당한 후, 황후전 누명이 풀리는 덕에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으나 아직 걸리는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고충을 짐작하는 윤기는 대승상과 함께 긴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내일이 마마의 합방일이 아닙니까. 마마께서 회임만 하시면….”
합방. 두 글자를 뱉는 것이 힘겨웠다. 연심을 품은 여인을 다른 사내의 품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현실이 이제는 허탈했다. 고비를 넘겼다. 황후가 잘 견디고 있을지 심히 염려가 되었다. 윤기는 타는 속에 차를 부으며 걱정을 삭혔다.
“아니, 아니야. 황상이 우리가 사병을 키우는 걸 알지 않았느냐?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돼….”
황후가 황제의 아이만 회임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는 건 다 옛날 일이었다. 황제가 그리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대승상이 몰래 군사를 키우고 있음을 안다고. 황제는 시한폭탄 같은 자신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명분만 생긴다면, 아니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역모의 불씨를 처단하려 하겠지. 이렇게 되면 태부와 백재인 세력 뿐 아니라 황제 또한 그들의 적이 된다. 황후의 회임만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었다. 허나 회임을 하지 못한다면 무심코 반란을 일으킬 명분이 없었다. 정치와 건국, 그리고 정계와 관련된 그 모든 것은 명분과 대의로만 움직인다. 게다가 대승상의 사병 규모가 상당하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황궁을 치긴 부족했다.
대승상의 말에 탁상을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겨있던 윤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길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게 무엇이냐?”
대승상이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건황적. 진나라 유민인 그들을 끌어들이면 됩니다.”
“건황적?”
그들이라면 대승상도 생각지 못한 바가 아니었다. 수많은 숫자의 유민들, 허나 나라가 패망한 탓에 오갈 데 없는 그들은 사병으로 두기에 최적이었다. 허나 그걸 빌미로 건황적의 뒷배를 자처하기도 했었으나 오랑캐 짓을 하는 몇몇 빼고는 모든 유민을 통합하기엔 힘이 들었다. 단순히 주나라의 귀족인 대승상만 믿고서 그 뒤를 따르려는 이는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태부의 세력이 건황적을 한 번 소탕한 적도 있었으니 수도 많이 줄었을 터였다. 대승상이 의문스러운 눈길로 윤기를 봤다.
“허나 모든 진나라 유민을 통합시키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만일 패망한 진나라를 복위시켜준다 한다면? 그럼 어떻습니까.”
“뭐라?”
윤기의 눈이 더 이상 태연하지도, 여유롭지도 않고 날카롭게 굳었다. 놀란 대승상이 탁상을 치며 서둘러 윤기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들의 나라를 되살려 주겠다고만 한다면 목숨까지 바칠 이들이지요.”
“…해서, 정말 진나라를 복위시키기라도 하겠다고? 허나 패망한 나라의 유민들만으로 어찌 복위가 가능하겠느냐. 진나라 황제는 이미 전쟁 때 죽었고….”
맹점이 많은 계획이다. 허나 치밀한 윤기가 그런 것조차 신경 쓰지 않고 대승상에게 말을 꺼내었을 리는 없다.
“있습니다. 존재 자체가 명분이 되고, 역모가 될 사람이. 다만 그 자가 우리 손을 잡아줄 지는 의문이지만.”
윤기가 손에든 찻잔을 느릿하게 굴렸다. 맴도는 찻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넘실거렸다. 머지않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 자는 제가 내민 손을 잡을 것이다. 반드시 그리 될 것이야. 인간은 누구나 연정에 약한 법이니까. 다시 찻잔을 내려놓던 윤기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 황후열전
“어깨는 괜찮으십니까?”
“응.”
고개를 끄덕이는 황후에 태형은 안심하고 너울을 둘러주었다.
“허면 지금 이러는 것도 정말 괜찮으십니까?”
이번에는 대답을 망설였다. 태형역시 오늘이 합방 날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목욕재계와 몸단장을 하고 오늘 하루 동안은 처소에서 자중해야할 황후가, 어째서 황궁 담을 넘고 있는 것일까.
“오늘은 황궁의 재녀(才女)선발이 있는 날이다. 다들 분주해서 들키지 않을 것이다.”
“허나, 오늘 마마의 합방이….”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태형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황후였다. 하는 수 없이 ‘합방’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태형의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되도 않는 고집을 부리는 아이같이 작은 손으로 무작정 제 입을 막고 보는 황후에 태형은 하는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가실 곳은 정하셨습니까?”
태형이 황후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며 다정하게 물었다. 황후는 들켜버린 표정을 지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긴 날이 밝자마자,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자신을 데리고 외진 담으로 왔으니 계획이든 작정이든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단지 황후는… 황제를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황제의 진심을 아는 게 두려운 거야.
태형이 안타까운 눈으로 황후를 내려다보았다.
“황궁 밖에 끝내주는 장관이 있는데, 가시겠습니까?”
한 번 져줄 수밖에 없다. 아니 애초에 태형은 죽어도 황후를 이기지 못한다. 본래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것이라 했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황후에 다시금 녹고 마니까.
“먼저 올라가십시오. 잡아 드리겠습니다.”
태형이 뒤에서 다리를 받쳐주고, 황후는 열심히 뻗은 팔에 힘을 주며 담벼락을 타고 올라갔다. 본래 정문과 먼 담까지 경비가 서 있지만 오늘은 재녀선발이라는 황궁의 큰 행사가 있지 않은가. 덕분에 황궁 보안이 아주 허술했다. 태형의 도움을 받아 담 위에 오른 황후가 약간의 두려움이 깃든 눈으로 태형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넘어간 후에 오십시오.”
태형의 저 굳건한 눈은 없던 신뢰도 마구 피어오르게 한다. 이젠 태형이 저 눈을 하고서 무슨 말을 하건 맹목적으로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태형은 황후보다 훨씬 가볍게 담에 올랐다가, 아주 가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곤 아직 담 위에 있는 황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심해서 뛰어내리십시오. 절 믿고.”
“응.”
꽤나 높은 담벼락에 잠시 머뭇거리던 황후가 눈을 감고 그대로 몸에 힘을 풀었다. 몸이 허공 위를 뜨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이내 중력에 의해 바닥위로 떨어지는 느낌도 들었다. 허나 아프지 않았다. 황후를 받아들면서 허리를 부딪친 건 태형이었으니까. 황후가 뛰어내리면서 태형을 바닥에 깔았다. 태형은 황후의 몸을 끌어안으며 최대한으로 보호했다. 덕분에 태형의 가슴팍에 황후의 이마가 닿았다. 황후가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아…. 동시다발적으로 고개를 들던 태형과 시선과 얼굴이 코앞에서 멈춰 섰다. 태형이 정면으로 보이는 황후의 얼굴에 말도 못 잇고 있을 때, 황후는 태형이 아닌 그 너머의 풍경에 시선이 꽂혀 있었다. 관상감과 황청이 위치한 곳은 황후전과는 꽤 멀었지만 이 또한 황궁 구석에 숨어있는 기관들이었다. 그러니 이리 외진 곳을 고사하고 아예 황궁 밖에 나가본 적이 손에 꼽히는 황후가 이곳을 알 리 없었다. 항상 높은 담에 가려져 푸릇한 색깔만을 어렴풋이 내보이던 괴오산(魁五山) 앞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다.
“마마….”
태형의 부름도 뒤로하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황후가 주섬주섬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바닥에 깔린 태형의 몸을 마구 짓눌러 태형은 가끔가다 윽, 하는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황후는 뭐에 그리 넋이 나간 것인지, 태형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굴었다. 황후가 일어나 아주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태형도 몸을 털고 일어나, 대체 황후가 뭘 보고 있는 것인지 따라 고개를 돌렸다.
삼십 보도 채 안 되는 곳에 펼쳐진 푸른 죽림(竹林). 푸른 대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황궁 안에서는 언뜻언뜻 보이던 그 대나무 숲이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일랑 분다 싶으면 귓전이 다 시원한 소리를 내뱉으며 울창하게 빛나는 세계. 황후는 그것에 홀린 듯이 취해 눈길을 못 거둔 것이었다. 태형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황후의 뒤로 다가왔다.
“들어가시겠습니까?”
그리곤 다정하게도 물었다. 허나 황후는 태형이 묻지 않아도 당연히 들어갈 것이었다는 듯 대답도 하지 않고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었다. 햇빛이 반짝여 반사되는 것조차 푸른색이다. 단 1리도 되지 않았지만 황궁과 너무도 대비되는 이 세상이 황후에겐 더없이 새롭고 신기할 것이다. 맹목적으로 걷는 황후를 따라 묵묵히 가던 태형이 잠시 멈춰 서서 대나무에 매달린 푸른 잎사귀 하나를 뜯었다. 입가에 떠다니는 웃음이 그가 무얼 할지 예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황후마마.”
그걸 들고 태형이 황후를 불러 세웠다. 황후는 가던 걸음은 멈추었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대신 태형이 달려가 황후의 앞에 선다. 그리곤 파란 잎사귀를 황후의 귀에 꽂았다. 그 흔한 꽃송이도 아니고, 그냥 심심한 잎이었을 뿐인데도 황후의 깨끗함과 맞물려 제법 잘 어울렸다. 평소 같았으면 이게 대체 무엄하게 뭐하는 짓이냐. 하며 궁시렁 댔을 황후가 이번에는 말이 없었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태형이 무릎을 굽히고 황후의 안색을 살폈다.
“마마?”
“…….”
실컷 잘 대나무 숲을 감상하던 황후의 입가가 입자가 되어 실룩였다. 대체 왜, 뭘 했다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두 눈이 젖어든단 말인가. 태형의 눈이 놀란 듯 팽창되고 황후의 두 팔을 그러쥔 손이 갈피를 못 잡았다.
“마마, 왜 그러십니까? 잎을 거둘까요?”
태형은 자신이 지금 황후를 울렸나 싶어 수많은 이유를 찾아 댔다. 허나 묵묵부답인 황후는 억울한 듯 일렁이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기어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말았다.
대체 왜 계속 저만 보면 우십니까. 마음 아프게.
기어코 엉엉대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번에 자신이 돌아왔을 때 황후전에서 울었던 것보다 훨씬 더 서럽고 크게. 태형의 두 눈이 아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초조하게 요동쳤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갈수록 황후의 울음은 점점 크게, 점점 서럽게 숲을 울렸다. 이젠 아예 주저앉아 우는 황후덕분에, 태형의 머릿속은 새하얀 백짓장 그 자체였다. 지금은 그 연유를 몰라 더더욱. 황후를 따라 태형도 주저앉았다. 다급한 손길로 두 뺨에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보아도 멈추질 않았다.
“대체 왜 우십니까, 예? 마마.”
“…….”
“소소.”
울음 때문에 말소리가 다 먹혀서 알아들을 수도 없다. 태형이 답답함에 그 이름을 부르자, 소소라는 이름이 증폭기가 된 듯 황후는 더 엉엉 울었다. 하는 수 없이 태형은 황후의 울음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연모하는 이의 울음소리가 태형에게 고문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황후는 마음 놓고 한참을 울었다. 격한 눈물은 거의 멎어가고 끅끅대는 후유증만 남자, 한숨을 내쉰 태형이 다시 황후의 눈을 마주치며 입을 뗀다.
“왜 우십니까?”
“내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왔던 곳이다….”
황후의 모친이 죽기 전에, 황후가 이 구중궁궐에 발을 들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함께 있던 곳이 죽림이었다. 막 입궐을 앞두고 있던 황후라 모든 것이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찼던 몸 약한 모친은 끝까지 제 걱정만 하다 가셨다. 마치 도미처럼. 참으로 오랜만에 찾은 이곳이 그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어머니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병상에 누워만 계셨다. 주변사람들은 대승상이 죄악이 많아 그 벌을 아내가 대신 받는 것이라 수군거렸다. 황후는 어릴 때부터 외로웠다. 어머니의 방 근처에선 기침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대승상은 하인들을 시켜 황후가 제 어미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어린 황후는 매일 밤 어미가 보고싶어 이불 속에서 숨죽이고 울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마침내 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공기 좋고, 조용한 죽림 한가운데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황후를 데리고 잠시 나와 있었다. 황후는 처음으로 약 보름동안 제 어미와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낮에는 시냇가에서 물소리를 듣고, 밤에는 반딧불이 구경을 하면서, 황후는 마냥 어미와 함께하는 시간이 꿈만 같고 좋았다. 그게 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여직 몰랐다. 어머니는 항상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수심 깊은 얼굴로 저 담벼락 넘어 황궁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소소.’
어미의 음성이 곧 흩어질 것처럼 여리고 미약했다. 황후가 동그란 눈으로 어머니를 보며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버지를 너무 원망하지 말렴.’
그때는 어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제 여식을 황궁으로 밀어넣은 대승상. 이 지옥불 날 남겨 둔 아버지. 황후는 어미가 자신을 보며 힘없이 웃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제가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제 곁을 떠났다. 아무도, 영원히 저를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던 도미마저도 제 곁에 남지 않았다. 황후는 두려웠다.
그제야 갑작스런 오열의 진상을 파악해낸 태형이 말을 다 채 하지 못하고 다시 우는 황후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렸다. 그 손길에 황후는 간신히 울음을 삼키며 그 따뜻한 시선과 손길로 자신을 대하는 태형을 바라보았다.
“너….”
황후가 울다말고 대뜸 태형의 멱살을 잡아 제 앞으로 당겼다. 태형의 칠흑 같은 눈이 놀란 듯 팽창되었다. 분명 힘은 상대적으로 태형이 훨씬 셌지만 황후의 손길 한 번에 딸려가는 것이 태형이었다. 얼굴이 코앞에서 멈췄다. 황후가 눈물은 걸렸지만 아주 곧은 눈으로 태형을 뚫을 듯이 노려다보았다.
“넌 절대 내 곁을 떠나면 안 돼….”
제 사람을 잃는데 신물이 난 황후다. 모친에, 도미에 태형까지 잃게 된다면 자신이 박복(薄福)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어질 테니. 잠시 놀란 눈을 하던 태형이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아무리 모진 말을 해도, 설령 네게 상처를 주어도.”
“예.”
황후는 알고 있다. 자신은 태형에게 상처만 될 것이라는 걸. 놓아주어야 한다는 걸. 허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태형이 겪을 비참함도, 외면도 알지만 이기적이게도 자신은 태형이 곁에 있어야 살 수 있으니까. 이제 제 곁에 남은 것은 태형밖에 없으니까.
“내가 널 이용만 한다 해도.”
“곁에 있을 것입니다.”
“네게 마음 주지 못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신이 있어 갈라놓을 지라도 황후의 곁에 있겠다 그리 다짐하는 태형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그게 더 서러웠다.
“넌… 왜 이리 착해 빠졌느냐.”
“…….”
“그렇게 물러서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가려고.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데, 이용만 할 거라는데도 예, 예. 네가 무슨 성인군자니? 부처야? 왜 그렇게 무모하게….”
미안함이 너무 가득해서, 황후는 애꿎은 태형에게 자신이 화를 내었다. 태형은 눈물에 실려 황후의 얼굴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떼어내고, 황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웃었다.
“당신에게만 무른 것이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등신….”
나직한 황후의 말에 태형이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 앞에서만 약해지고 한없이 인간적이게 변하는 황후가 좋았다. 맹목적이고, 너무도 단순하게 그냥 황후가 좋았다.
“헌데 정말 황궁에 돌아가지 않으실 겁니까?”
그리곤 제 옷소매자락으로 눈을 닦으며 겨우 진정시키는 황후를 보며 태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내 눈물을 훌쩍이며 깊게 심호흡을 하던 황후가 잠시 굳은 얼굴을 했다. 입궐한 이후 손꼽아 기다리던, 매번 거절당하고 뿌리쳐지던 합방이었다. 허나 오늘은 피하고 싶었다. 황제에게 입을 맞추고, 그의 몸을 끌어안으면, 제 모든 감정들이 다 까발려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손에 남은 감각이 생경했다. 정국의 뺨을 치던 것도, 용포 아래서 거칠게 뛰던 그의 심장소리도. 대승상의 오랜 염원이자 자신의 염원이기도 했던 합방이 단지 정국을 맨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없다는 것 때문에 무서워졌다.
“…황상께 널 연모한다고 했다.”
“소소, 당신이야 말로 무모한 짓을 하셨군요.”
태형의 부드러운 질책에 황후가 고집 센 아이 같은 눈을 하곤 태형을 바라봤다. 마치 넌 내가 뭘 하든 내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잖아, 하고 말하는 것처럼.
“최고상궁이 돌아가신 것이 폐하의 탓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것이야.”
“소소.”
“황상이 내게 누명을 씌웠다. 애초에 날 폐위시키고, 죽일 심산이셨어…. 내가 그리 애원했는데….”
“…….”
“더 이상 황상을 연모하지 않아.”
황후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려왔다. 태형이 마지막으로 황후의 눈에 달린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한 음성을 내뱉었다.
“거짓말.”
“네가 정말… 오냐오냐 해주었더니.”
“예,예.”
죽어도 이기겠다고 달려드는 황후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황후를 일으켜 세웠다. 너무 울어대서 정신이 하나 없을 황후는 태형의 손에 의지해 찬찬히 발을 내딛었다.
“이리 좋은 곳에 와 울기만 하셔서 되겠습니까.”
태형은 그런 황후를 데리고 숲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바위로 향했다. 태형이 먼저 그 바위 위에 몸을 기대고 누웠다.
“뭐하는 것이야?”
“마마께서도 누워보시지요.”
태형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던 황후는, 태형이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자 미심쩍게 바위를 찬찬히 살폈다. 한참의 탐색 끝에 별다르게 지저분하지 않은 것 같아 바위 위에 앉고서, 조심스럽게 태형의 옆에 몸을 뉘었다. 강한 햇살에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하늘 끝에 닿을 것 같은 대나무 잎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기분 좋게 내리쬐었다.
“푸르구나.”
황후가 이 정취에 더없이 어울리는 나긋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태형이 싱긋 웃는다. 자신과 닮은 것을 좋아하는 분이니, 이 또한 좋아하실 줄 알았다. 이 모든 걸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이라, 태형은 행복했다.
한참을 누워 있었다. 햇살이 다 그쳐가도 마냥 그 자리가 좋아서, 그 순간이 좋아서 다른 일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황후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태형이 살짝 고개를 돌려 황후를 보다가 아주 길었던 정적을 깨고 말을 건넸다.
“제게 마마와 닮은 누이가 있었습니다.”
“누이?”
태형은 그 정취에 잠겨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 옆에 있는 사람이 황후이기에. 처음 내뱉은 그 이야기가 무겁고, 다정했다.
“예.”
“흐음, 누이가 아주 어여뻤나 보구나.”
황후의 뻔뻔하고 태연한 말에 태형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작게 노려보는 황후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애써 모른 척 하고 하늘을 계속 주시했다.
“어여쁘긴 했지요. 허나 말은 죽어라 안 듣고 아주 고집이 셌습니다.”
“허, 그게 날 닮았다는 것이냐?”
“워낙 제가 하고 싶은 것만 고집해서, 부모님이 시집은 어찌 보내냐며 누이 걱정이 이만저만도 아니셨지요.”
“…….”
“술도 좋아하고 마마처럼 이야기 하는 것도, 가끔은 빛나는 장신구도 좋아했습니다.”
처음엔 장난스러웠다가 점점 잠겨 들어가는 태형의 목소리에 황후는 태형이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헌데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데?”
황후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며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이 황후에게 나직한 시선을 준다.
“자기 마음가는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
“누이는 자기 마음 숨기는 법을 몰랐습니다. 연모하면 하는 대로, 떠나고 싶으면 또 그런대로. 정말 제 발길이 이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
태형이 상체를 일으키고 말한다.
“소소.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다른 누구도 아닌 태형이 제게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한다. 황제를 향한 그 마음을 속이지 말라고. 정작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텐데. 저더러 황제에게 가라 한다. 그리 말하는 태형의 속은 얼마나 상하고 있을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황후는 태형이 너무도 가여웠다. 생각해보면 태형은 늘 제게 힘이 되어주었는데, 저는 태형에게 어리광만 부린 것 같았다. 황후가 조심스럽게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란한 태형의 눈동자에 온전히 자신이 담겼다.
“그러는 너는,”
“…….”
“너는 왜 네 마음에 충실하지 못하는 거야?”
“소소 저는… 당신에게 잘못한 게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그 어떤 일에도 총명하게 반짝일 것 같은 태형의 두 눈이 마치 죄책감에 휩싸인 사람처럼 위태로웠다.
“그 어떤 누가 그랬니? 너는 내게 한 치의 티도 없는 사람이다. 세상 가장 고마운 사람이야.”
추악하고 더러운 비밀을 숨긴 채 연심을 지껄이는 제게, 황후는 티 없는 사람이라 속삭인다.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도 없는 자신에게 세상 가장 고마운 사람이라 읊조린다. 제발 스스로를 폄하하지 말라는 듯한 여물은 시선은 당장이라도 입 맞추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허니 제발 너도, 네 마음 가는대로 살렴.”
“…….”
“남을 위해 참지도 말고, 너 스스로를 희생하지도 마.”
“…….”
“너는 내게… 유일해. 태형아.”
제 이름을 나긋하게 부르는 황후의 음성은 이성을 놓게 만들기 충분했다. 대나무 향이 너무 깊어서, 곧 떠오를 밤이 깊어서, 그래서라고 치부하기로 한다.
“허면….”
“…….”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황후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저를 봤다. 태형의 눈길이 저릿하게 내려앉았다. 태형이 손을 들어 황후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저를 더러 유일하다 속삭이는 그 입술에 제 입술을 다정하게 맞대었다. 이 공간엔 적어도 당신과 나 뿐이니까. 그거면 된 거다.
허나, 죽림의 한순간 정취를 깬 것은 이곳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말발굽 소리였다. 다정히 입을 맞추다말고 고개를 뗀 태형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태형의 입맞춤에 놀라 아직 눈을 감지 못한 황후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굳어지고 말았다. 지민과 몇몇의 익위사를 대동한 황제가 말 위에 올라, 타고난 지배자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황후열전
“황상.”
“닥쳐.”
바로 귓전에 내려박히는 목소리가 마치 화난 짐승의 것처럼 그르렁 댔다. 그 마음을 대변하듯 황후와 정국이 탄 말은 아주 빠르게 돌진하고 있었다.
“별감을 놓아주세요. 신첩만 입궁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한 번만 더 지껄이면, 별감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들키고야 말았다. 분명 황제에게 상처 줄 것이라고, 자신이 느낀 것의 몇 배로 갚아줄 것이라고 다짐했는데, 태형과 입맞춤 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 당하자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온 몸을 휘감았다. 황제는 합방 일에 처소에 없는 자신을 찾아 나선 것일까? 그리고 결국 태형이 제게 입 맞추는 걸 본 것일까? 분명 당돌하게도 황제의 앞에서, 그의 익위사에게 먼저 입맞춤을 했던 황후였다. 허나 이상하게 심연에서부터 감정을 적셔오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건, 황후 자신이 그 상황에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태형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원해서 한 입맞춤이었다.
허나 정국은 생각보다 이성을 잘 유지했다. 화가 난 목소리와 행동에는 틀림없었지만 제게 소리치거나 그 자리에서 절 헤치진 않았으니까. 대신에 정국은 친히 내려서 황후를 제가 탄 말 위에 올렸다. 제 허리를 감싸듯 고삐를 잡고 거칠게 말을 모는 정국의 모습에 황후는 익위사에게 끌려가던 태형을 떠올렸다. 혹여 그가 다치진 않을까. 염려가 태산이었다. 허나 그걸 입 밖으로 뱉은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정국은 별감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주 잔혹한 음성으로 제게 말했으니까.
그리고 그걸 응징이라도 하듯 뒤에서 황후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부드러운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허리를 감은 커다란 손이 얄팍한 배를 파고들 듯 만졌다. 의복 넘어로 느껴지는 손길이 저릿했다. 뱃속이 뜨거웠다.
황궁에 도착하자, 정국은 어떤 변명도 들을 새 없이 황후를 대명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별감을 제외하고 모두 물러가라.”
북풍한설 같은 황제의 목소리에 대명전의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서둘러 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수발을 들기 위해 따라왔던 내시백을 비롯한 상궁들이,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였다. 황제의 구겨진 표정이 곧장 누구 하나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황제가 남겨둔 것은 태형. 그뿐이었다. 황제의 손에 이끌리어 처소 안에 들어온 황후가 태형의 눈을 애타게 쳐다봤다.
“황상! 별감을 돌려보내세요!”
“…….”
황후가 거짓은 걷고 온 진심을 드러내며 소리쳤지만, 정국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합방을 앞둔 대명전 처소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태형은 그 문 밖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그 허탈하고 아픈 눈이 황후의 심장을 옭아맸다. 정국은 문을 닫고 갑갑하게 조이는 황룡포 자락을 풀어 헤쳤다. 황후와 단 둘이 남자, 잔뜩 피곤해 보이는 그 눈이 아주 황후를 가득 담았다. 그가 차가운 손으로 지친 얼굴을 쓸어내렸다.
세 번째였다. 눈 앞에서 그녀가 다른 사내와 입맞추는 걸 본 적은. 허나 이번은 달랐다. 처음 태형과 입을 맞췄을 때도 태형이 먼저 그녀의 작은 얼굴을 쥐고 다가왔다. 그녀가 그를 밀어내지 못한 것은 단순히 당황하고 놀라서였다. 두 번째 지민과의 입맞춤 역시 의도적으로 제게 상처주기 위한 겉치례에 불과했음을 알았다. 허나 방금 전 그것은 명백히 달랐다. 그녀의 붉게 상기된 얼굴이, 제게 연모를 속살일 때처럼 잔뜩 달아오른 것을 보았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제게서 마음이 떠났다던 그 말이 정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진실 되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정국은 황후의 그 얼굴을 보자마자 열이 올랐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의 조각이 파편처럼 속을 갉아먹어 온 몸에 떨림이 일었다. 태형의 앞에서 무너지던 황후의 얼굴이, 이젠 제 앞에서 두려움을 잔득 집어먹고 있었다.
천자(天子)는 그대로 직진했다. 큰 손으로 그런 황후의 뺨을 움켜쥐고, 아까 보았던 태형과의 입맞춤을 지워버리려는 심산인 냥 거칠게 입을 맞췄다. 황후가 흉폭하게 들썩이는 황제의 가슴팍을 짚었다. 힘을 주어 밀어내려했지만 순식간에 입안을 침범하는 정국의 입술과 혀에 무력하게 떨어졌다. 그의 입 안에 담긴 채 힘없이 달싹이는 제 입술에 정국이 성마른 신음을 내뱉었다. 숨이 막힐 만큼 혀를 섞으며 손을 내린 정국이 그녀의 허리를 쥐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들자 황후의 몸이 붕 뜸과 동시에 등에 차가운 벽의 감촉이 느껴졌다. 황후가 놀라 정국의 허리를 다리로 감았다. 여전히 노골적인 소리를 내며 맞물리는 입술을 거두지 않은 채, 정국이 손을 올려 황후의 의복을 걷었다. 치렁치렁한 매듭을 풀고, 다른 손으로는 달래듯 황후의 허벅지 안쪽을 살살 쓸었다. 바르작 놀란 황후가 힘을 주어 정국의 상체를 밀어내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국과 눈을 마주했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고 탁해진 눈동자에 황후는 숨을 참았다. 정국이 고개만 숙이면 닿는 황후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대었다. 온 몸이 저릴 만큼 뜨거운 입술이었다. 목 언저리에 고개를 묻은 정국이 황후의 귓볼을 뭉근히 쓸면서 살결에 입을 맞추었다. 지난 번 황후가 제 목에 칼날을 가져다 대 생긴 생채기에 눅진하게 닿았다. 하얀 목과 대비되게 붉디 붉은 상처였다. 그걸 핥으며 말했다.
“아팠어?”
“황상 별감을….”
뜨거운 숨을 뱉으며 말하는 황제에, 이 틈을 타 황후는 태형을 보내 달라며 말했다. 아. 외마디 비명과 함께 황후가 침상에 넘어갔다. 그녀를 따라 정국역시 침상에 몸을 가누고 아까 멈추었던 입맞춤을 계속했다. 황후가 버겁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런 표정하면 더 참기 힘든데.”
나직한 목소리가 귓전에 파고들었다.
“원래도 참을 생각은 없었지만.”
황후는 태형이 있을 처소 문을 애타게 바라보느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덕분에 훤히 드러난 그 목 언저리에, 상처를 따라, 황제는 세상 가장 다정하게 천천히 입술을 가져다 댔다. 계속해서 태형을 신경 쓰는 황후를 무시하고서. 한참을 그러던 정국이 고개를 들고 황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런 눈 하지 마“
“…….”
“소소….”
분명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울고 있는 황제의 눈이, 황제의 두 손 사이로 흐릿하게 보였다. 아아…. 황후는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진정한 복수는, 정녕 이것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뱉어내는 황제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무너졌다.
문 밖에 있던 태형도 자신을 바라보던 황후의 마지막 눈동자를 떠올리곤 그대로 벽을 타고 스르륵 주저앉았다. 달이 찬란한 긴 밤이었다.
흑화는 황후만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태형이도 하고..
이 극악의 연재텀을 견디시는 독자님들도 곧 하실듯..ㅠㅠ
정말 면목 없지만 앞으로도 느리게 굴러갈 것 같습니다
그래도 무조건 완결은 내겠다는 다짐으로 쓰고 있으니,,
느긋하게,,봐주세요,,(머리박기)
황후열전의 기승전결 중 '전'이 아마 다음화 부터 진행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늘 정성스런 코멘트 달
아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ㅠㅅㅠ 여러분 사랑해요..
저는 빨리 덕질하러 갑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