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째 연애중 完 계절이 바뀌고 겨울이 되었다. 민윤기도 나도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기에 우리는 둘다 겨울을 싫어했다. 그래서 예전부터 겨울에는 우리의 이렇다 할 추억이 별로 없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위해 밖에서 만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우리 둘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냥 누구집에서 귤을 까먹으며 영화를 보거나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게 다였다. 아, 나는 대신 겨울에 면허를 땄다. 어느 날 한가롭게 티비를 보며 툭 턴져진 아직도 면허를 못 땄냐는 민윤기의 도발에 참지 못한 나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 하지만 불타던 그 도전의식으 생각보다 빠르게 나태해졌고 나는 첫 시험을 보기좋게 탈락했다. 당연히 붙을 거라고 당당히 말하던 내 예상과 달랐던 결과에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시무룩해진 나는 면허를 포기하려했었다. 그런데 옆에서 자기는 한번에 붙었다며 어쩜 면허 시험을! 다른 것도 아니고 면허 시험을 떨어질 수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내 속을 긁어대는 민윤기때문에 나는 다시 한 번 이를 갈았다. 밤낮이 따로 없이 면허 공부를 했고 결국 나는 내 노력의 결실을 맺었다. 물론 합격소식을 듣자마자 민윤기에게 분노의 헤드락을 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실전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기에 엄마의 차를 빌려서 연습을 하려했고 민윤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흔쾌히 받아줄 거라고 예상했던 내 생각과는 달리 민윤기는 단칼에 거절했다. 의아해하는 내가 이유를 물었을 때, 민윤기는 연인끼리 운전을 알려주면 꼭 싸우게된다며 그건 안된다고 했다. 자기 형도 그러다가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싸우고 티격태격하는건 민윤기와 내 일상의 일부였다. 곧 풀어지기는 했지만 그만큼 자주 싸웠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민윤기는 두려웠나보다. 전에 없던 큰 싸움이 일어나고 그 끝이 평소와는 다르게 안 좋을까봐. 내심 그런 민윤기가 기특하고 귀여워 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면허를 땄다는 뿌듯한 성과가 따르며 나름대로 의미있었던 겨울을 보내니 어느새 쌓였던 눈이 모두 녹았고 새로운 생명의 싹이 태어나는 봄이 되었다. 봄이 되면서 민윤기도 나도 나이를 한살씩 더 먹었다. 드디어 대학교에 간다던 그 설렘과 긴장감에 밤잠을 설치던 날들이 엊그제같지만 나는 어느새 졸업을 바라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민윤기도 나도 많이 바빠졌다. 조금은 현실적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치만 우리는 예전처럼 멀어지지 않았다. 서로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아껴주려고 애쓰고 이해하기 위해 소통했다. 아팠었고 그 상처를 치유하며 많이 성장한 우리는 행복했다. 봄이 되어 모두들 싱숭생숭해질 시기였다. 그것은 김태형에게도 마찬가지인듯 했다. " 무용과. " " 헐. 혹시 아이유 닮았다는 그 신입생? " " 응. " 김태형은 썸을 타기 시작했다. 그것도 엄청 무지 무지 예쁜 애랑 말이다. 김태형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것이 다 드러났다. 숨겨지지 않고 온전하게 보여지며 전해지는 진심. 김태형에게는 그런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 와, 우리 태형이 능력 좋네? " " 이 오빠가 좀 그렇지. " " 사귈거야? 고백은? 응? 언제 할거야? " " 아, 몰라. 묻지마. " " 왜, 얘기 좀 해봐. " " 지금은 안돼. 나 가야해. "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김태형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카페에서 이렇게 얘기한게 얼마만인데 이대로 가는건가. " 에? 어디? 나랑 오랜만에 밥 먹는거 아니었어? " " 다음에 먹자. 오늘 걔 만나기로 했어. " " 와, 완전 대박. 이제 나보다 걔가 더 중요하다 이거지? " " 또 뭐가 그래. 다음에 내가 진짜 맛있는거 사줄게. 오늘은 민윤기랑 먹어. " 어느새 가방을 다 챙긴 김태형은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바쁜 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알 수 없는 허탈함? 이 내게 물밀듯이 밀려왔다 " 그래서 내가 오늘 김태형한테 바람 맞았다니까? " " 무슨 바람씩이나. " 카페에서 커피를 두 잔 사들고 민윤기를 만났다. 해야할 과제가 있다길래 오늘은 그냥 집으로 가기로 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나는 김태형에 대해 민윤기에게 투덜댔고 민윤기는 무심하게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 그게 바람이지! 예전에는 나랑 한 약속이 제일 먼저였는데 이제는 쌩하게 가버리잖아. " " 나참, 김태형이 몇 년만에 연애 좀 하겠다는데 친구가 되서 그 연애 사업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무슨 투정이야. "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있는 족족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민윤기와 김태형은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나 모르게 둘이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 마신듯 했다. 상극이라서 전혀 안울릴 것이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둘은 생각보다 코드가 잘 맞았고 급속도로 친해졌다. 물론 김태형의 미친 친화력이 한 몫 한 듯했다. 둘이 친해진 그 시점은 민윤기가 김태형이 이제 내게 마음이 없다, 라고 완전히 생각한 이후부터였다. " 투정은 무슨.. 좀 섭섭한거지. " " 아니, 네가 왜. " " 그냥... " " ... " " 이제 김태형이 나보다 그 애가 먼저인거 같고 앞으로 나랑 밥도 같이 안 먹고 놀아주지도 않으면 어쩌나 싶고... " " 놀아주긴 뭘 놀아줘... 너가 애야? " " 아, 몰라! 친구 뺏긴 기분이란 말이야! " 괜시리 터져나오는 울분에 민윤기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내 외침에 민윤기는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민윤기에게 말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이건 김태형에게 화를 낼 일도 아니었고 내가 서운해할 일도 아니었다. 조금의 침묵 끝에 집에 거의 도착했다. 발걸음이 멈추었을 때 민윤기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느릿하게 두 팔을 뻗었다. 안아달라는 소리였다. 어느새부터인가 민윤기와 나 사이에 또 하나의 암묵적인 룰이 생겼다. 안아주기. 그러니까 서로 집에 들어가기 전에 민윤기와 우리집 사이에서 꼭 한번 안아주기였다. 기분이 좋을 때는 한참을 안고 있었고 싸웠을 때도 안고있다보면 저절로 화가 풀리는 날도 있었다. 민윤기의 그런 행동은 오늘도 마찬가지로 안아달라는 말이었다. 하긴 싸웠을 때도 매번 그래왔으니 오늘도 그러는게 맞았다. 하지만 조금 토라져있던만큼 내 포옹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민윤기에게 한번 형식적으로 안겼다가 다시 몸을 떼려고했다. 그런데 왠일인지 나를 꽉 안고 놓아주지 않는 민윤기때문에 그대로 안겨있어야 했다. " ...뭐해. " " 야. " " 응. " " 앞으로 내가 다 해줄게. " " 어? 뭘? " " 너랑 제일 친한 친구도 내가 해주고 밥도 내가 같이 먹고 너 심심하면 놀아도 줄게. " " ... " "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나한테 제일 먼저, 1순위는 너야. " 내가 첫번째라는 말, 분명 유치하다는걸 알면서도 기분 좋아지는 말이었다. 괜히 꽁하게 삐져있던 기분이 풀리고 입가에 스르륵 미소가 걸렸다. 알겠다며 민윤기를 끌어안는 나와 그런 나를 더 꽉 끌어안는 민윤기의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이 까만 밤 속에서 유난히 더 밝게 빛났다. " 빨리 안 나오냐. 차 막히면 어쩌려고. " " 미안미안. " 운전석에 앉아서 나를 달달 볶기 시작하는 민윤기때문에 정신없이 차에 올라탔다. 정말 늦은건지 민윤기는 내가 타자마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오랜만에 양복을 차려입고 운전대까지 잡은 민윤기에게서 제법 남자다운 매력이 느껴졌다. 하긴 여자는 아니니까 당연한데 말이다. " 오늘 좀 차려입었네? " " 그럼 결혼식 가는데 평소 학교가듯이 입을 순 없잖아. " 그렇지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주섬주섬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냈다. 급하게나오느라 화장도 좀 덜했는데 잘됐다. 한창 화장을 하고 있는데 민윤기가 그런 나를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 어제 나랑 전화 끊고 바로 안 잤지." " ...바로 잤어! " " 거짓말. " " ...응, 미안. " 민윤기가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걸까. 어쩜 그렇게 사람 마음을 꿰뚫어보는지 그 앞에서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서툰 거짓말은 오늘도 민윤기 앞에서 들켜버린다. "뭐하느라?" " 드라마 보느라... " " 내가 미쳐. " " ... " " 애들이 빨리 오라 했잖아. 강서연 또 삐지겠네. 안그래도 우리 벼르고 있는데. " " ... " " 우리 늦었다고 걔가 뭐라고 하면 나 솔직하게 말해도 돼? " " 야야야야, 미안해. 다음부터는 안 늦을게! " " 진짜? " ' 응! '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확신같은건 없었다. 이렇게 말하고도 다음에 또 늦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또 늦겠지. 그냥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평소에는 잘 나오지 않는 애교도 게다가 눈웃음까지 지어보이며 민윤기에게 꼬리를 내렸다. 오늘은 고등학교 동창 둘의 결혼식이 있다. 강서연이라는 아이는 오늘 결혼식의 신부였고 나와 같은 중학교를 나와 고등학교 3년내내 같은 반이었으며 민윤기와도 역시 같은 중학교를 나와 오래 알고 지냈다. 신랑은 민윤기와 친한 친구였고 나의 유일한 합반이던 고3시절 같은 반이던 남자애였다. 접점이라고는 딱 한번 같은 반이었던 두 사람이, 심지어는 앙숙처럼 그닥 사이도 좋지 않았던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소식은 모든 친구들에게 상당히 쇼킹한 소식이었다. 게다가 아직은 결혼하기에는 이른 나이였기에 더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였기에 더욱 신경이 쓰인 나는 열심히 화장을 시작했고 민윤기는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 와, 어떻게 달리는 차안에서 화장이 가능해? " " 다 방법이 있습니다- " " 그런데 뭘 그렇게 열정적으로 화장을 해. 너가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 " 오바는. 아 근데 오늘 화장 좀 잘 받는다. 나 이러다가 신부보다 예쁘면 어떡하지? " " 에이, 그건 아니다. 강서연이 얼마나 예쁜데. " 민윤기의 말에 동작을 멈추고 민윤기를 찌릿 노려보았다. " 야, 강서연이 예뻐? 그래? " " 에? 어... 예쁘긴 예쁘지? " " 예쁘다고? 뭐가 예쁘, 긴 하지. 그래 예뻐. 근데 나보다?" " 어? " " 나보다 강서연이 더 예쁘냐고. " " 왜 또 그래. " " 너 걔 좋아했어? 혹시 나랑 사귈 때 바람핀거 아니야?"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부려본 투정이었다. 내 말에 당황하는 민윤기의 반응이 재밌어서 쓸데없는 꼬투리까지 잡아서 삐진척을 했다. " 뭔 소리야. 나한텐 너가 제일 예쁘지. " 요새 나는 민윤기 놀리기에 아주 맛들려 있었고 그래서 그런 나에게 당하는 민윤기는 삐지지도 않은 날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친구들과 뒷풀이 장소로 향했다. 다들 간만에 만나서 그런지 할 얘기가 넘쳐나 분위기가 시끌벅쩍했다. 본격적으로 술집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화기애애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 아무튼 진짜 쇼킹이었지. 둘이 결혼한다는 것도 의외인데 보통 사람치고는 빠르잖아? 쟤넨 뭐가 그리 좋다고 벌써 결혼이야. " " 그건 그래. 내 주위 사람들도 다 결혼은 최대한 늦게 하라고 난리던데. " " 너도? 나는 심지어 우리 부모님도 그러신다. " 다들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면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한 친구가 나와 내 옆의 민윤기에게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 근데 너네 만난지 몇년째지? 한 10년 됐지 않아? " " 응, 10년. " " 와, 진짜 대단하다. 요즘 10개월도 못 가는 커플들이 수두룩한데... 물론 나도지만. " " 우리도 제대로 사귄지는 얼마 안 됐어. " 내가 쑥쓰러움에 그렇게 답하자 민윤기도 머쓱한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 그래도 10년이나 만났는데 나중에 둘이 결혼할거지? " " 어? " " 뭐, 나중에 둘이 결혼하자, 라던지 이런 얘기 안했어? " " 야, 얘네가 유치원생이냐. ' 이 다음에 꼭 결혼하자. ' 유치하게 그런 얘기를 하고. " " 그러게, 게다가 민윤기가 어디 그럴 사람이야. " 친구의 말에 옆에서 뭘 묻냐는 듯한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민윤기는 슬쩍 웃으며 잔을 들었고 나는 붉어지는 얼굴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꿋꿋했던 친구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물어왔다. " 둘이 결혼 생각 안 하고 있던거야? " " 아니,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우리 둘 다 아직 졸업도 못했고 취업도 못해서 떳떳한 직장도 없고 아직은 그런 생각 하기에 이르다... 이런거지." 내말을 들으며 민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논리 정연했던 내 말이 먹힌건지 친구는 그제야 말을 멈추었다. 어느새 즐거웠던 만남이 정리되고 다들 집으로 향했다. 민윤기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살짝 술에 취한 나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들뜨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며 민윤기는 황당한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걷다가 갑자기 민윤기가 나를 불러세웠다. " 왜? " " 그게... " 민윤기답지 않게 말이 나오기까지 꽤나 망설였다. 뭐 중요한 말인가 해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터져나온 말은 망설임에 비해 조금은 뜬금없고 놀라운 말이었다. " 어떤 집이 좋을까? " " 에? " " 너는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 " " 나? " " 그러니까 나중에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 마당 있는 집이라던지 부엌이 큰 집이라던지... " " 아, 그런거? " 예상치 못했던 뜬금없는 질문이었기에 나도 대답을 건네기까지 꽤나 오랜시간이 걸렸다. " 나는 큰 창문이 있는 집. 그래서 햇빛이 많이 들어오는 집이었으면 좋겠어. 거실은 나중에 애들이 많이 뛰어놀 수 있게 넓으면 좋겠고 또 마당도 있어서 꽃도 기를수 있으면 좋겠어! " " 아, 마당... " " 근데 왜? " " 아니야, 그냥. " 돌아가는 내 질문에도 민윤기는 아니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모습이 좀 의아했지만 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민윤기의 손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밤이었는데도 내 기분만큼 날씨가 좋았고 민윤기가 좋아하는 것처럼 하늘에는 별이 많은 밤이었다. " 민윤기! " 약속도 수업도 없어서 집에만 틀혀박혀있다가 심심해져서 민윤기네 집으로 향했다. 당연히 집에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전화하지 않고 찾아온 것이 실수였는지 민윤기네 집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인터폰을 눌러도 대답없는 반응에 결국 핸드폰을 눌러 민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 너 지금 밖이야? " [ 나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나왔다가 다시 집으로 가는 중인데. 왜? ] " 아니아니, 나 심심해서 너희 집 왔는데 아무도 없길래... 너 금방 오면 나 들어가 있는다? " [ 그래. 뭐 먹을거 사갈까? ] " 너 먹고싶은거 있으면 사와! 이따봐. " [ 응. 아 야야, 그 책상 위에 있는거, 보지마. 알겠지? ] " 어? 아, 알았어. " 전화를 끊고 비밀번호를 눌러 민윤기의 집으로 들어갔다. 아니나다를까, 내가 며칠 집에 안왔다고 예전처럼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성격은 깔끔하고 섬세한데 그 성격이 이런 집안일에는 해당되지 않은 모양이다. " 못 살아, 진짜. " 나도 깨끗하고 아기자기한 집에서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자인지라 민윤기보다는 정리를 잘 하는 것 같았다. 주섬주섬 온 집안에 널부러진 것들을 치우다가 정말 우연히도, 거실 한 구석을 차지하는 민윤기의 책상에 시선이 닿았다. 그대로 다시 고개를 돌렸으면 될 걸, 아까 마지막에 들었던 책상 위에 것을 보지말라는 민윤기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차라리 말하지를 말지, 그럼 무심코 넘겼을 텐데. 사람이란게 그렇지 않나. 하지말라면 더 하고싶은 그런 청개구리 심보. 쓸데없는 그런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된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건축 도안 같은 거였다. 과제라도 했던 모양인지 꽤나 디테일하게 기록된 도안이었다. 그래도 역시 건축학과는 건축학과구나. 새삼 민윤기가 멋있게 느껴져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민윤기가 감출만한 특별한 것은 없는 듯 했다. 뭐가 더 있나하고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딱히 무언가 찾을 수는 없었다. 책상이라고 예외는 아닌 것처럼 너저분한 종이더미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서도 책상 왼쪽에 쌓여있는 종이더미들 위쪽에 놓여있는 파일이 눈길을 잡아 끌었고 나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 ...유학 안내? " 멍하니 보이는 그 글씨를 따라 읽었다. 내 목소리로 읽은 말인데도 믿기지가 않아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그렇지만 눈 앞에 보이는 글씨가 달라질리 없었다. 이게 뭐지... 유학이라니? 넋이 나가버린 나는 그저 멍하게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굳어버린 내 얼굴 위로 어느새 눈물이 떨어졌다. 손이 떨렸고 몸이 경직되었다. 애써 그런게 아닐거라며 부정하던 내 생각보다 빠르고 솔직했던건 내 본능이었다. 지난번에 민윤기가 물었던 말들이 생각났다. 어떤 집이 좋겠냐며 뜬금없이 물었던 그 말. 떨리는 손으로 아까 무심코 넘였던 건축 도안을 다시 집어들었다. 두개의 파일을 같이 보다가 아까는 보지 못했던 건축 도안 위에 조그맣게 적혀있는 글씨를 보았다. 꿈. 미래. 방울로 떨어지던 눈물이 주르륵하고 쏟아져내렸다. 그 글씨를 보자마자 인정해야했다. 억지를 부린다고 바뀔 사실이 아니었다. 민윤기는 자신의 꿈이자 미래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런 사실을 말하기 위해 내게 말을 꺼냈지만 쉽사리 말하지 못하고 대신에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게 힘들지만 내린 내 결론이었다. 흐르는 눈물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있었다. 말하지 않은 민윤기에 대한 서운함, 갑자기 알게 된 사실로 인한 충격과 혼란.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었다. 왜 몰랐을까. 남자친구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 왜 전혀 몰랐을까. 더 많이 신경쓰고 아껴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이나 모자랐던걸까. 윤기는 내게 말하지도 못하고 얼마나 끙끙댔을까. 어쩌면 나는... 아직도 민윤기에게 한참이나 모자란 사람이 아닐까. 터져나오는 눈물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대로 펑펑 울고 있는데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고 민윤기가 들어왔다. 정말 뭔가 사왔는지 양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든 민윤기는 펑펑 울고 있는 나를 보자마자 짐을 던진채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 왜... 왜 울어? " " ... " " 어?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 흐르는 내 눈물을 닦아오는 민윤기의 다정한 손길과 목소리에 그대로 민윤기에게 안겨버렸다.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자 민윤기는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민윤기... " " 응. " " 윤기야... " " 응, 왜. " " 기다릴게. " " ...어? " " 어디 안가고 기다릴게. 나 기다릴 수 있어. " " 뭐? " " 그동안 몰라서 미안해. 나 아직도 한참 모자란가봐. " " ... " " 나 안 변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윤기야. " 내 말이 끝나자 민윤기가 나를 제 품에서 떼었다. 그리고 몸을 낮추어 나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나는 그 눈을 마주하며 앞으로 이렇게 눈을 맞출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했다. "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야? " " 어? " " 내가 가긴 어디를 가. 뭘 기다린다는거야? " 미안하다던지 금방 오겠다던지 그런 말을 예상했지만 민윤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오는 당황스러움에 눈물이 뚝 멈추었고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민윤기에게 말했다. " 너... 유학, 가는거 아니었어? " " 뭐? " " 아니, 책상에, 보지 말랬는데 봐서 미안... 그런데 책상에 이거랑 이거... 유학 안내... " " 허- " " 나한테 유학 준비하는거 숨기려고 그래서 보지말라고 한거... 아니야? " 조심스러운 내 질문에 민윤기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헝클이며 다시 나를 안았다. " 미치겠다. 내가 보지 말라고 한거 그거 아닌데. " " ...그러면? " " 유학 그거, 그냥 버리려던 쓰레기야. 책상 정리하는데 언제 받은건지 있더라. 그래서 버리려고 한 쪽에 모아놨는데 어떻게 그걸 보냐. " " 뭐? " " 나 유학 같은거 안가. " 민윤기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안고 있던 몸을 떼었다. 아니 이게 뭐람. 뭐 어떻게 되고 있는 상황이야. 당황스러움에 눈만 굴리고 있는 내게 민윤기가 건축 도안을 가져가며 말을 이어갔다. " 내가 보지 말라고 한건 이건데. " " 그래 이거! 여기에 꿈, 미래라고 써있잖아. 이거 유학가는데 쓰려고 만든 도안, 아니야? " " 으유, 둔팅아. 자세히 좀 봐봐. " " 어? " " 이거 네가 살고 싶다고한 집이잖아. " 민윤기의 말에 다시 도안을 뺏어들어서 확인했다. 그래, 맞아. 큰 창문, 넓은 거실 그리고 화단이 있는 마당까지 영락없이 내가 말한 집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지? 나는 도무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서 그저 어버버할 뿐이었다. " 그럼 뭔데 이게? " " 나중에 너랑 내가 살 집. " " 어? " " 아, 진짜 비밀로 하려했는데 이렇게 오해를 하고 울어버리니까 내가 어쩔 수가 없잖아. " " ... " " 나중에 너랑 내가 결혼해서 살 집, 내가 만들어줄게. " 민윤기는 내게 두 눈을 맞추며 말했다. 오늘 정말 왜 그러는지, 진짜 예상치 못했던 말에 놀라 그런 민윤기를 또 멍하게 바라보고 있자 민윤기가 나를 잡아당겨 다시 제 품에 안았다. " 우리 결혼하자. " " ... " " 나는 사실 결혼같은거 안하려고 했거든. 정말 그러려고 했었는데 요즘 너랑 이렇게 행복하다보니까 마음이 바꼈어. " " ... " " 너라면 하고싶어. 상대가 너라면, 너랑 결혼 하고싶어. " " ... " " 물론 지금은 말고. 네가 한 말대로 나도 떳떳한 직장이 생기고 내 가족이라는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을거 같을 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너랑 결혼 하고싶어. " " ... " " 그러니까 기다려줘. 내가 내 자신에게 떳떳해질 때까지, 지금까지처럼 날 믿어줬던 것처럼 조금만 더 기다려줘. " 나는 드라마에서 프로포즈를 받은 여자들이 울 때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유부녀가 되는건데 뭐가 그렇게 행복하고 좋다고 우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데 이게 직접 받아보니까 내가 그 여자들처럼, 아니 그보다 더 펑펑 울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고백을 받고 안 울수가 있겠는가. 나는 대답을 하기 위해 흐르는 눈물을 멈추려고 애쓰며 말했다. " 아니. " " 응? " " 싫어. " 뭐? 민윤기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떼었다. 그리고는 얼굴 가득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두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나는 그런 민윤기 때문에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덤덤한척 말을 이어갔다. " 내가 너랑 연애하는 10년동안 얼마나 힘들었는데. " " ... " " 근데 나보고 10년이나 더 기다리라고? " " ... " " 그렇게는 못해, 아니 안해. " 민윤기는 단호한 내 대답에 적잖이 놀란듯 했다. ' 어... 어... ' 얼빠진 소리를 내는 민윤기의 두 눈에서 규모가 7.0은 될 듯한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그냥 이대로 두었다가는 민윤기도 울 것 같아서 나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 딱 절반. " " ... " " 앞으로 딱 그 절반, 5년만 더 기다릴게. " " ... " " 그래도 내가 너랑 10년을 연애했는데 고작 5년 더 못 기다리겠어? 그정도야 껌이지. " " ... " "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빨리 와. " " ... " " 빨리 와서 나 데려가. 다른 놈이 확 낚아채가기 전에. 딱 5년만 기다린다? " 내 말이 끝나자 그제서야 민윤기는 굳었던 얼굴을 풀고 나를 따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다시 나를 품에 안은 민윤기가 말했다. 오늘만해도 벌써 몇번째 안기는거였지만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참 좋았다. " 진짜 사람 심장 떨리게 하는데 뭐 있어. " " 그렇게 놀랐어? " " 진짜 하늘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래, 딱 5년, 그 안에 할게. 조금만 기다려줘" " 응응. " " 지금까지 기다려줘서 고마워. " " ... " " 그리고 이 말을 5년 후에 너한테 또 말할 수 있어서 좋다." 서로가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민윤기와 나 사이에 더이상 빈틈이란 것은 없었다.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심장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민윤기에게는 내가, 나에기는 민윤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이제는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오후였다. 날씨는 좋았고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햇빛은 따뜻했다. 정말 평소와 다름없이 그저 평범하던 날이었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하루 속에서 민윤기와 나는 조금은 특별한 10년째 연애중이었다.
태꿍입니다:)
정말 끝이에요.. 끝이라니(울먹)
진짜 끝이라니까 참 여러 감정이 교차하네요... 후련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뭐랄까 제 이야기는 얼마 후에 다시 찾아뵐게요 제 마음과 다음 이야기에 대한 것들..? 그냥 주저리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완결까지 달려오는데 여러 분들이 많이 도와주신 거 알고 있습니다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참 많은 힘이 됐어요
암호닉 분들, 그 외에도 읽어주셨던 독자 여러분들 참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끝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윤기랑 여주는 행복하게 살겠죠? 여러분들도 늘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조금 정리가 되면 곧 찾아올게요~
[암호닉] (정말 감사했습니다!) 슈웁 / 석진센빠이 / 샘봄 / 루리 / 수대 / 윤기부인 / 부릉부릉 / MSG / BBVI / 전정ㄱ국 / 전정국부인 / 충전기 / 밤열한시 / 슙 / 달달 / 초딩입맛 / 설날 / 꾸탱 / 슙슙 / 넠넠 / 반딥 / 두둥 /슈나무 / 윤여 / 깜냥 / 단미 / 남준시 / 콩 / 자몽 / 계피 / 딸기 / 워킹 / 하이쭈 / 메로나 / 소녀 / 짝꿍 / 청춘 / 후니 / 강강수월래 / 나도 / 예지앞사헕 / 은하수 / 융기융기 / 아카시아 / 슙쓰 / 화양연화 / 아가야 / 태태 / 깇 / 0530 / 누텔라 / 전국정국 / 미융 / 푸랑푸 / 쵸니 / 소금 / 월하 / 윤기나는윤기 / 짱구 / 김성규 / 민빠답없 / 윤기야 / 탄뚱탄뚱 / 오만원 / 쿠키 / 토마토마 / 손가락 / 알비노포비 / 작가님사랑해요 / 원 / 민트 / 민빠답없 / 현지 / 금붕어 / 리베 / 앵무새 / ☆요다☆ / 슙끼슙끼 / 민슈가 / 들레 / 연꽃 / 플로 / 태굴태굴 / #두근 / 음향 / 데빌 / 39 / 미늉이 / 김망고 / 홈매트 / 린슈가 / 토끼시러 / 끄앙 / 망망이 / 딱풀 / 츄파춥스 / 사말어는윤기 / 됴종이 / 센빠이안녕 / 두두둔 / 위험한슈가 / 쿠룡 / 짐니 / 색시 / 어만군이 / 라일락 / ♥민슈가♥ / 팩실 / 누나 / 핫초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