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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바람이 날 더 괴롭혔던 날이었다. 걸을수록 바람이 내 뺨을 더욱 할퀴었다. 분명 쉬자는 마음으로 출발한 여행이었는데, 홀로 오게 되어 그런지 괜스레 마음이 헐거웠다. 그럼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행이라 함은 마음에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무료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내게 꿈이라면 꿈이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갑판 위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주문만 하면 가져다주는 호화로운 조식, 밤마다 열리는 파티와 매번 같은 레퍼토리의 재즈 밴드. 그것 모두 내겐 새로움으로 다가와 설렘이 되었다.  






구름 뻐꾸기의 땅 애구(哀求) 시리즈, 하나.

[전정국/김태형/박지민] 궤도의 편린 02 | 인스티즈

2장 ; 퍼즐 모양은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







잠깐의 휴식이 필요했다. 머리털이 나자마자 시작한 방문 학습지부터 대학 예과에서 본과를 지내오기까지 쉴 틈 없이 무작정 달렸다. 군대조차 면제였던 나는 어떠한 걸림돌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오직 공부만 내게 물들였다. 그간 몸 하나는 끄떡없이 잘 간수했다 생각했건만. 막상 국가시험을 앞두니 온몸에 힘조차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나에 비하면 편히 학교생활을 해온 동기들은 졸업이 다가오자 앞다퉈 내게 조금 쉬고 오는 게 어떠냐며 속이 뻔히 보이는 조언을 뱉었다.



그 말들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내 삶엔 정말 잠깐의 텀이 필요했다. 어떤 틈도 벌어지지 않으려 노력했던 지난날을 떠올리자면 조금은 후회스럽기도 했다. 나조차 사람이었기에 일말의 놀고 싶은 욕구조차 없었다면 거짓이었다. 물론 워낙 숫기가 없는 성격이라 잘 놀진 못했겠지만. 대학 생활 내내 유일한 내 낙은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계획만. 막상 닥쳐올 일들이 아니었음에도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람이 다녀온 여행기를 보는 것만으로 벌써 내가 비행기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가야지, 조금 더 시간이 생기면 가야지 하며 미루다 결국 꽃다운 스물의 초반은 아쉬운 기억도, 더없이 환하게 웃었던 기억도 없이 사라졌다. 결국 난 외장하드의 여행 계획 폴더를 열었다.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그늘막 하나 없었던 내 인생은 20살이 되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과외와 학원 알바, 그리고 동기들 대리 과제까지 하게 만들었다. 국가에서 일거수일투족 다 지원해주던 중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돈이 많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살기 위해 버둥거릴 필요를 느꼈다. 돈 쓸 시간이 없었으니 잔고를 확인하지 않아도 여행 한 번 통 크게 다녀올 정도는 충분했다. 조금의 고민 없이 바로 출발하는 유럽 일주 크루즈 여행을 예약했다. 



배에서의 생활도 눈 깜짝할 새에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갑판 위로 발걸음을 옮긴 것도 탑승할 때를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실컷 바다나 보자는 요량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막상 떠나보니 온몸에 귀찮음병이 돋아 바다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광활한 바다를 보고 있자면 사람들이 흘리듯 하는 말처럼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았는데. 야외 바에서 칵테일 한잔을 받아들어 하염없이 바다를 쳐다볼 때였다. 스크류 드라이버. 오렌지의 시큼한 향이 코끝에 돌아 표정을 찡그릴 쯤, 그가 내게 다가왔었다.



- Bonsoir. d'où vous venez? 안녕하세요. 어디서 오셨나요?



아무렇지 않게 제게 다가와 말을 내뱉는 그를 한참 멍하니 바라봤었다. 한국계 프랑스인이지 싶었다.



- Vous voulez parler? 대화 괜찮으세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 답을 하지. 한국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크루즈를 예약한 게 잘못이었다. 한숨을 푹 쉬고 표정을 찡그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듯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가로저었다.



- I'm sorry, but I don't speak French well. 미안하지만, 난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해.



내 대답을 들은 그는 한참을 호탕하게 웃었다. 뭐지 싶었다. 발음이 그렇게 구렸나. 아무리 그래도 영어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기분은 나빴지만 나보다 훨씬 키도 크고 더군다나 외국인일지도 모르는 그에게 무작정 호통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그의 반응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 한국 사람 맞으시죠?

- 지민 쌤, 저 왔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의 말에 눈이 번쩍 떠졌다. 아니, 정국의 말에 눈이 번쩍 떠졌다. 또다시 귀찮음병이 돋는 아침이 시작됐다.




*




- 너 진짜 실수하기만 해.



이어폰 사이로 나오는 호석의 말엔 날이 서 있었다. 태형은 인산인해인 지하철역을 나와 방송국으로 향했다. 호석은 아무리 그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주선한 알바 자리에 태형이 혹시 잔뜩 혼이 나 기가 죽어도 문제고, 반대로 태형이 사고를 쳐 윤기가 화가 났다간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 진짜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면접 하나는 전문이잖아. 

- 윤기가 좀 무뚝뚝해. 화난 건 아니니까 차분히 얘기 잘 나누고 와.



호석과의 통화가 끝남과 동시에 태형은 방송국에 도착했다. 어릴 적 방송국 어린이 합창단 연습을 하기 위해 드나들던 것 말곤 방송국과 연이 없던 태형은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저마다 방송국 출입증 같은 사원증을 차고서 방송국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자신만 한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 로비에서 기다린다고 했던 거 같은데...



윤기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참을 프런트에서 서성이던 태형이 면접 보러온 사람이라 지레짐작했다.



- 김태형 씨?

- 아, 네. 안녕하세요.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 따라오세요.



윤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고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태형은 무뚝뚝하고 차분한 윤기의 표정과 말투에 기가 죽어 입술을 깨물었다. 윤기는 생각보다 엄숙한 분위기의 방송국을 뚫고서 큼지막하게 프로그램 이름이 적힌 문을 지나 회의실로 태형을 안내했다. 앉으세요, 라는 말에 태형은 긴장을 한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리에 앉아  제발 일을 하게 해달란 눈빛을 보냈다.



- 국문과 나오셨다고 들었는데. 교정 교열은 한 번도 해보신 적 없는 거죠?

- 제가 임용을 준비하느라... 그런 알바 경험은 한 번도 없어요.

- 기본적인 맞춤법 정도는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네요. 저희 프로그램 보신 적 있으세요?

- 네. 당연하죠. 이 유명한 프로그램을...



태형은 얼마 전 동생과 함께 본 한번을 제외하곤 살면서 단 한 번도 민 PD의 방송을 본 적이 없었다.



- 그럼 대충 프로그램 성격 정도는 이해하고 계실 거라고 믿을게요. 

- 네. 

- 교열 업무실은 따로 있고, 자세한 업무는 내일부터 다른 PD가 알려줄 겁니다. 차근차근 해보시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말에 태형은 마음속으로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무뚝뚝할 거 같던 윤기도 자신을 챙겨주는 듯한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알바이긴 했지만, 이렇게 체계화된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처음이었던 태형은 마치 취직을 한 것 마냥 기분이 들떴다.




*




석진의 진료실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간호사에게 환자가 있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던 석진이 문 쪽으로 눈을 돌리자 지민이 씨익 웃음을 지어 보이며 상담실로 들어왔다. 석진이 자신의 눈에 들어온 것이 지민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지민의 어수룩하게 헝클어진 머리와 통통한 눈매는 석진에겐 잊을 수 없는 무언가였다.



- 와, 이게 누구야. 박지민 아냐?

- 선배. 오랜만.



지민은 양손에 들린 커피와 샌드위치를 석진의 책상에 놓았다. 지민은 고맙다며 윙크를 하곤 샌드위치를 꺼내는 석진을 보고서 커피에 빨대를 꽂아 건넸다. 



- 나 저녁 안 먹은 건 또 어떻게 알고. 센스 봐, 정말.



석진은 입을 크게 벌려 샌드위치를 베어물었다. 석진은 괜히 오버스러운 행동과 함께 지민에게 치근덕거렸다. 지민은 석진의 과한 행동이 단지 2년 반 만에 찾아온 반가움,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민은 석진의 행동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샌드위치를 먹는 석진을 바라보며 웃음만 내비췄다. 



정신과 전문의인 석진은 지민의 선배였다. 직속 선배는 아니었지만, 모든 의과대학을 통틀어 행사할 기회가 많았던 학교에서 마당발이던 석진은 유독 지민을 챙겼다. 학과 생활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던 지민의 느지막한 캠퍼스 라이프의 시작점엔 석진이 있었다. 늘 혼자 있는 걸 즐기던 지민까지 결국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 석진은 그 성격 그대로 정신과를 전공으로 삼았다.



석진 역시 지민이 찾아온 이유를 모를 수 없었다. 지민의 진료 기록을 보니 마지막 상담 이후로 벌써 2년 반이 지났었다. 놀랄 법도 했다. 꾸준히 자신에게 치료를 받다 한순간에 연락 두절이 된 지민이 갑자기 평소 연락하고 지내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들고 나타났으니. 분명 무슨 일이 있어도 있을 거라 짐작했다. 한참 샌드위치를 씹으며 지민을 바라보던 석진이 샌드위치를 내려두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티슈로 입가를 닦던 석진은 조금씩 굳어가는 지민의 표정에 질문을 던졌다.



- 요즘은 좀 어때.

- 괜찮다 싶으면 또다시 생각나고 그래요. 다람쥐 쳇바퀴 돌듯.

- 그 사람도?

- 그렇죠. 요즘엔 잠드는 게 무섭기도 해요.



석진은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년 반 전만 해도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지민에게 아무리 시간이 약이라고 한들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릴만한 힘은 없었을 것이다. 지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민 성격에 꺼내고 싶지 않을 그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든 검은색으로 가득한 과거를 떠올리자면 어디로든 감추기 힘든 법이니 말이다. 석진은 소파 옆 협탁 서랍에서 작은 병에 든 비타민C를 내밀었다. 



- 아, 저 약은 안 먹을래요.

- 김칫국 마시긴. 이거 비타민 사탕이거든?



지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언성이 높아졌다.



- 선배는 무슨 그런 장난을!

- 장난 아니고. 환자들 동심 일깨워 주자고 둔 거야. 이런 거 하나에도 마음이 뜨듯-해지거든.



석진이 가슴에 손을 얹고 특이한 억양으로 말을 뱉었다. 



-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픽하고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요. 모든 기억들과 생각이 나 자체를 뒤엉키게 만들면 저를 주체할 수가 없을 때가 와요.

- 인간은 참 외롭고 나약한 짐승이야.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순간과 찰나에 많은 것을 잃어버리지. 그럼에도 이렇게 자신을 부지하려 온갖 생각들에 다시 빠져들게 되는 거고. 너가 하는 생각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봐. 지금 널 괴롭히는 것들도 스트레스가 제일 큰 원인이니까.

- 평생 살면서 저라는 사람 하나도 알까 말까 할 거 같은데. 연애는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 나도 내가 종일 상담하면서 그런 생각해.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말이지.



석진은 졸업을 하자마자 부모님의 등에 떠밀려 병원을 개업했다. 서른이라는 나이에 원장 소리를 들으며 기세등등하게 의사 노릇을 했다. 그럼에도 석진은 늘 겸손하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진료보다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데에 더 주력하기는 했지만 나쁜 소리를 듣는 의사 선생은 아니었다. 



지민이 처음 상담을 받으러 왔을 때도 지민은 갑자기 찾아왔다. 지금이랑은 많이 다른 상태로. 지민이 아무리 쑥맥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가에 그리 초점이 없는 지민의 모습은 석진에겐 처음이었다. 아무 도움도 없이 홀로 상담실에 찾아왔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일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렇게 칠흑 같은 바다에 빠져있던 지민에게 손을 뻗던 와중에 지민은 무단으로 치료를 중단하고 잠적을 감췄었다.




*




태형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보기 좋게 면접에 합격하곤 얼른 호석을 만나 맛있는 밥 한 끼라도 얼른 사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일을 하려니 가슴이 뻐근했지만 그래도 한 달이 지나면 채워질 통장에 웃음이 절로 났다. 태형은 핸드폰을 들어 호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그래, 어떻게 됐어?

- 당연히 합격이지. 일은 내일부터 차근차근 알려준다더라.

- 하, 진짜 잘 됐다. 내가 진짜 가슴을 얼마나 졸였는지. 



호석이 숨을 내쉬며 진심으로 태형을 격려했다. 호석의 진심 어린 말투에 태형은 고마움을 숨기지 못했다. 



- 오늘 밥 한 끼 하자, 형. 진짜 내가 전부 다 쏜다. 

- 웃기고 있네. 이래놓고 또 2,000원 짜장면 가게 가려고 그러지.

- 진짜 나를 뭐로 보고. 장난 아니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태형의 어깨가 정국의 어깨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통화하느라

- 괜찮아요. 가던 길 가세요.



어깨를 부딪치자 마자 그 사람이 방송국 사원증을 차고 있는 것을 본 태형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연신 허리를 숙여대며 사과를 전했다. 혹시 자신의 일에 영향을 줄까 차마 정국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던 것이다. 태형은 가던 길을 가라는 정국에 얼른 그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사과조차 제대로 듣지 않고서 정말 갈 길을 가버린 정국의 향이 근처를 맴돌자 태형은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았다. 



- 뭐야. 뭔 일이야?

- 아니, 내가 통화하다가 어떤 사람이랑 부딪혀서. 

- 사과도 유별나게 한다.

-  방송국 사원증 차고 있길래. 내 얼굴 외우고 있다가 일하는데 마주치면 어떡해. 무섭잖아.

- 너도 참 별짓을 암튼 오늘 너한테 본전 제대로 뽑을 거니까 준비 제대로 해.

- 아, 진짜 걱정 마. 오늘은 고기든 뭐든 다 사줄게. 



태형은 그저 같은 향수를 쓰는 사람이겠거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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