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장미새
"야, 그래서 그냥 한마디도 안하고 왔다고?"
"응."
"어휴, 이 답답아. 넌 화가 안나니? 보살이야 뭐야."
앞에 앉아 본인의 가슴팍을 퍽퍽 쳐대던 수정이는 몇 안되는 대학 친구이다. 내성적인 나와 달리 시원시원한 매력이 넘치는 수정이는 팀플때 과제를 홀로 하던 날 대신해 책상을 뒤엎어 버렸을 정도로 다혈질적이긴 하나 나를 많이 아껴준다. 근 3년, 내 연애를 지켜 본 수정이의 눈에 최근 김재환은 천하에 몹쓸 놈이고 나쁜 놈이었다.
"아니, 김재환 진짜 설마 다른 여자라도 생긴거 아니야?"
"수정아,아냐. 그래도 재환이 나 많이 사랑해줘."
"너 많이 사랑해준다는 놈이 2주만에 만난 여자친구 내팽겨치고 홀라당 가?"
"친구가 휴가 나왔대잖아."
"얼씨구."
수정이는 테이블 위 마저 남은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들이켜 잔을 비워냈다. 속이 탄다 속이 타. 내 몫까지 열을 내며 화내주는 수정이를 보며 씁쓸히 웃었다.
"수정아."
"왜?"
"혹시 재환이가 막, 나 살도 많이 찌고 예전보다 못생겨지고 그래서 마음이 식은건 아니겠지?"
조금은 비참한 내용의 질문 내용과 달리 애써 웃으며 장난끼를 담아낸 나의 말에 수정인 빈 커피잔을 말없이 노려보기만 할뿐이었다. 괜히 말했나 싶다.
"여주야.너 예뻐. 너 충분히 예뻐. 만약 그런 이유로 김재환이 이러는거면 그땐."
"그땐?"
"니가 헤어지자 말했으면 좋겠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머리가 순간 어질하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상상만해도 싫다. 내 반응을 보던 수정이는 눈치 빠르게 손을 휘둘러 호탕하게 소리쳤다.
"야!에이!!!김재환이 너 잘먹는게 제일 좋다 했잖아! 그럴리가 없지 당연히!!요즘 재환이가 너무 미운짓만 해서 내가 심술 좀 부려봤어! 짱여주! 걱정말고 니네집 가서 맥주 콜?"
괜히 오버하며 말하는 수정이 모습에 조그맣게 웃음이 터졌다. 그래 재환인 늘 나만 바라봐주었고 또, 착하니까. 믿어야지. 내가 안믿으면 누가 믿겠어.
대로변을 지나 네캔에 만원 하는 편의점 맥주를 가지고 자취방으로 향하는 도중 길 건너 고깃집 앞에 나와있는 두명의 남자와 눈이 마주친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어? 저거 김재환이랑 강의건 아니야?"
그럴리 없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심지어 재환이 과 동기인 의건이 손을 들어 인사까지 하는데, 그냥 휙하고 들어가버린 재환이 모습에 멍때릴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자리에 남아있어 당황한 의건이가 안절부절하다 손을 한번 더 들어 인사를 한 후 황급히 고깃집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김재환 우리 본 거 맞지?"
"그냥..못 본 걸 수도 있지."
"저걸 못 봤다고? 강의건이 분명 손 흔들었는데 못 봤다고?"
"그냥 의건이 아는 사람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잖아. 그냥 집가자.. 나 좀 쉬고 싶어."
조금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에 수정이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주었다. 마음속과 머리속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실타래 같다. 풀려고 잡아 당기면 더 엉키고 꼬이기만 할 뿐.
재환아, 난 정말 니가 변한게 아니라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냥 잠깐 쉬어가는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은데 계속 이러면 어떡해... 양 눈가가 뜨거워지고 코끝이 시려왔다. 눈치 빠른 수정이는 일부러 내 앞을 가로질러 조금 떨어져 걸어갔고 결국 내 입에선 눈물 젖은 소리가 터졌다. 한참을 앞서 걸어가던 수정이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