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무브!
A
W. 부재불명
일요일 저녁에 도운과 함께 KTX를 타고 상경했어야 했지만 오랜만에 이루어진 만남은 곧장 음주로 이어졌고, 취해서 잠든 하루를 두고 KTX는 애석하게도 도운만 태운 채로 창원을 떠났더랬다. 씨이파알, 자취하고 싶어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미리 싸둔 짐을 찾아 무작정 기차역을 향해 달렸다. 살면서 KTX 막차는 처음이었고, 혼기차도 처음이었지만 아직 술이 깨지 않은 하루는 무서울 게 없었다. 창가쪽 자리에 앉아 출발하길 기다렸을까, 도운에게서 카톡이 왔다.
ㅇㄷ 13:58
ㅇㄷ
ㅇ
ㄷ 14:25
ㅇㄷㄴㄱ 14:53
마 15:17
김하루 15:30
니 설마
자나 15:32
어딘데 15:37
전화는 왜 안 받는데 15:40
안 가나
미쳤네 이거 15:50
처자네 이거
엄니한테 얘기했다
내 먼저 간다 16:54
인나라
가스나야 21:15
[부재중 전화 ㅇㄷㅇ (12)]
왜 깨우지 않았냐며 도운에게 잔뜩 욕할 생각이었던 하루는 핸드폰에 쌓여 있는 부재중과 카톡들을 보며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내 기차 탔다. 톡톡, 카톡을 보낸 하루는 취기에 푸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도통 없어지지 않는 술 냄새에 양치라도 하고 와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덜컹, 하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하루는 가방에서 양치 도구를 챙겨 화장실로 움직였다. 양치하는내내 화장실 안에서 술 냄새가 풀풀 진동하는 기분이었다. 아오, 냄새.
"그러니까 왜 술을 일요일에 마셨니, 하루야."
적당히 기분 좋은 양치를 끝낸 하루는 잠깐이라도 잠들 생각이었다. 도착하면 한 시겠네, 싶은 생각에 인상을 팍 쓰고 선잠에 빠지고 있을 즈음 옆 자리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경유역에서 누가 탔겠거니 싶어 뒤척이며 몸을 안쪽으로 조금 틀었다. 아, 이건 예의상. 조금이라도 술 냄새를 전달하고 싶지 않은 의사가 들어간 행동이었다. 감사합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인사를 하다니, 하루는 퍽이나 친절하다고 느꼈다. 절대 목소리가 달달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아무튼, 아니다.
지잉, 지잉—
갑작스럽게 울리는 진동에 몸을 파드득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양치하느라 습관적으로 뒷주머니에 넣어 놓은 핸드폰에게서 울렸다. 좌석을 울리는 통에 옆자리에 앉은 사람 또한 하루에게 시선을 옮겼다. 와, 졸라 까리하네. 급하게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하루는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와."
"언제 내리는데."
도운이었다. 도운과 하루는 같은 대학에 합격했지만 둘 다 창원에서 통학해야 하는 신세라 같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같은 숙소에 묵을 생각이었다. 숙소의 위치는 도운만 알았고, 결정적으로 하루는 도운이 없으면 오늘은 서울역에서 노숙한 후에 등교해야 하는 신세였다.
"한 시?"
"뭐? 한 시? 내랑 장난하나."
"내라고 이래 늦을 줄 알았나."
"니 걍 거서 디비 자라."
"아, 아, 도우나! 내가 잘못했다, 미안타. 내 진짜 여서 자라고?"
"이칼 때만 도우나, 도우나~ 카나."
"그니까 같이 살,"
역에 있을 테니 내린 후 전화하라는 도운의 말을 끝으로 통화는 강제적으로 종료됐다. 사실 하루는 도운과 같이 자취할 생각이었다. 양가 부모님들의 허락도 다 받아내었으나, (조금 결혼 허락같은 느낌이 없진 않았다) 도운은 아주 강경한 입장이었다. 아, 남녀칠세부동석 아입니꺼?! 라는 무척이나 유교적인 사상을 양가 부모에게 들이밀었고, 도운에게 유독 약한 하루의 부모님은 이를 받아들여 하루의 자취 계획을 반려시켰다. 그래가 내 지금 이카고 있는 거 아입니까. 하루는 허공에 대고 말을 쏟아냈다. 하, 술도 다 깼네.
다시금 자리에 돌아온 하루는 옆자리 까리남에게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건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까리남 또한 괜찮다는 말과 함께 짧은 눈웃음을 건넸다. 아, 이건 반칙이지. 하루는 티 나게 올라간 본인의 심박수에 놀라 딸꿀질을 해댔고 덩달아 놀란 까리남은 생수병을 따 건넸다. 물을 받아 마시던 하루는 조금이 지나자 딸꾹질이 멎었음을 느끼고 까리남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걸로요. 저 때문에 놀라신 거 아니죠?"
"아, 아입니다, 아입니다!"
"어, 사투리 쓰시네."
나름 서울말에 익었다고 생각했지만 당황했을 때나 도운과 있을 때, 집에 있을 때는 유독 사투리가 심하게 나왔다. 티 많이 나냐며 서울말에 익숙하지 않다고 전하자 괜찮다며 까리남은 본인에 대해서 소개하기 시작했다. 까리남의 존함은 강영현이라더라. 이름도 존나 까리해. 그 시점을 이후로 갑작스러운 통설명이 이어졌다. 까리남, 아, 아니, 영현은 짧게 여행을 갔다가 개강 시기에 급하게 맞춰 서울로 가고 있다고 전했고 하루 또한 비슷한 사정이라고 전했다.
보통이라면 도운에게 온몸을 기댄채 지루한 상태로 서울을 향해 달렸다면 오늘은 달랐다. 얼굴만 봐도 재미가 있는데 목소리마저 유잼인 영현과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고, 기차가 움직이는 것도 모르고, 재잘재잘 얘기를 나눴다. 처음 본 사람과 그렇게나 많이 얘기해 본 것은 초등학교 시절 도운을 따라 파주 영어마을을 방문했을 적을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떠들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고 있었다. 하루는 꽤나 아쉬웠다. 씁, 번호라도 물어보까.
"저는 얘기하면서 즐거웠는데."
"예? 아, 저, 저두요!"
"계속 연락하면서 지낼까요?"
홀리, 엄마, 윤도운아. 나 계 탔다.
번호를 교환한 후에는 출구까지 같이 나갔다. 지금 시간의 서울역은 위험한데 일행을 있냐며 걱정해 주는 게 너무 서윗해서 하루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녹아가고 있었다. 멀리 캐리어에 앉아 있는 도운을 본 하루는 영현에게 친구가 데리러 나왔다며 고맙다고 꾸벅 인사를 건넸다. 영현은 알겠다고 웃으며 손인사와 함께 연락할게요! 라고 하루의 심장을 두어번 팼다. 하루는 참아지지 않는 웃음을 흘리며 뒤를 돌아 도운에게 다가갔고 도운은 그닥 좋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뭔데."
"뭐."
"점마."
"아, 그니까 뭐."
"점마 뭔데. 닌테 와 연락한다 카는데."
하루는 당장이라도 기차에서 있던 일들을 도운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하고 싶었지만 기차에서도 잠을 자지 못한 터라 피곤한 상태였다. 그닥 부지런하지 않던 둘이었지만 여느 신입생들이 그러하듯 아홉 시 등교가 개껌이라고 생각하여 월요일 1교시 강의를 신청했다. 지금 숙소에 들어가서 바로 잔다고 한들 여덟 시간 이상 잘 수 없다는 걸 안 하루는 일단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자고 청했고, 도운은 한숨을 푹 쉬며 하루의 가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어 캐리어 위에 올렸다. 도우나. 와. 내 업어도. 미칠라믄 곱게 미치라. 개새끼가. 작게 실랑이를 벌인 둘은 택시에 나란히 앉아 출발했다.
"내 쫌만 눈 좀 붙여도 대나."
"니는 그래 자고 또 잠이 오드나."
"온다, 온다. 와? 불만이가?"
"됐다, 디비 자라."
도운에게서 허락 아닌 허락을 받은 하루는 도운의 무릎에 머리를 대었다. 안 불편하나. 딱 좋다. 짧게 이어진 대화 뒤로는 네비게이션 소리와 하루의 숨소리만 크게 들릴 뿐이었다.
인나라, 가스나야. 덜컹거리며 과속방지턱을 넘는 기분이 몇 번 들고나서야 도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는 비몽사몽 몸을 일으켜 도운이 택시비를 계산하는 동안 트렁크에서 캐리어와 본인의 가방을 꺼냈다. 예, 감사합니다. 하는 도운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도운은 잠이 깨지 않아 비틀거리는 하루의 어깨를 감싸안고 캐리어를 끌었다. 봄이었지만 아직 차가운 바람에 하루의 잠이 서서히 깨고 있을 즈음 도운이 얘기한 숙소에 도착했다. 도운은 당황했고, 하루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 윤도운이. 숙소라매? 여 모텔 아이가, 모텔."
"여, 여, 뭐꼬. 뭔데."
도운의 사정을 듣자하니 숙소는 도운의 부모님이 잡아주신 걸로 보였다. 이제와서 숙소를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둘은 제3자가 보기엔 그저 하룻밤 푹, 아주 푹 자고 갈 커플로 보였기에 체크인 과정에서는 문제가 없었으나 아주 큰 문제는 객실 내부였다. 침대에 가득 뿌려진 장미꽃잎은 정갈하게 하트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며 화장실과 욕실은 관음증 환자들의 명소인지 아주 투명하게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루는 관음증 욕실은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본인보다 더 당황스럽고, 턱이 빠질 것처럼 놀란 도운을 보자니 그냥 웃음밖에 안 나왔다.
"윤도운이! 니 이래 로맨틱한 남자였나."
"아, 하지 마라."
"니 내한테 프로포즈 하는 기가, 이거?"
쿵쿵거리며 다가온 도운이 하루의 뒷목을 잡아 침대로 끌었다, 디비 자라, 하면서 하루를 침대를 향해 밀었다. 뒤로 넘어지는 느낌에 하루는 급히 도운의 멱을 잡았고 둘은 곧 로맨틱한 침대로 같이 넘어졌다. 어, 이 뭔데. 하트를 빼곡하게 채웠던 꽃잎들이 침대의 탄력에 의해 휘날렸다. 분명히 꽃잎들이 떨어지는 소리는 후두둑이었거늘 둘의 귓가에서는 샤랄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저리 굴리던 눈들이 마주쳤다. 하루는 곧 터질 것 같은 도운의 얼굴을 훑어내리다 다시 도운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도운은 멱을 잡고 있는 하루의 손을 잡아 살살 빼내었고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뭐하는데."
"니 먼저 씻어라. 내는 나갔다 오께."
"와, 걍 있어라."
"아, 싫다. 남녀칠세부동석 모르나."
이미 남녀칠세부동석은 글렀는데요, 윤도운아.
도운이 자리를 비워준 덕에 하루는 편안하게 씻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도운이었다. 하루가 본인도 자리를 비워주겠다며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갈 기세였지만 도운이 이를 뜯어말려 침대에 꾸역꾸역 눕혀놓았다. 상반신만 보여 괜찮으니 잠이나 디비 자라면서 도운은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하루 또한 예의상 욕실을 등지고 알람을 맞췄다. 도운이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땐 이미 꿈나라행 티켓을 끊고 있었다.
"하, 낸테 진짜 왜 이래요..."
도운은 끝끝내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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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전 제 첫 글이었던 작전명은 조금 뒤로 미루고 이 작품 먼저 풀어나갈까 합니다.
메모장 가득 여러 글들이 있지만 차근차근 천천히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