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여자친구? 디제이!
W. 부재불명
제형은 익숙하게 담뱃불을 붙이고 타이트한 민소매를 입은 하루 위로 본인의 자켓을 걸쳐주었다. 하루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윙크를 건넸다. 제형은 화답하듯 왼쪽 가슴 부근을 손에 쥐고 죽어가는 듯한 시늉을 보였고 둘은 한참을 마주보며 웃어댔다. 아, 귀여워. 제형은 담배를 털어내며 곁눈질로 하루를 쳐다봤다. 꽤나 두근거리는 듯한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올려 묶은 머리와 시원한 이마, 짙은 갈색의 눈동자. 아, 마주쳤다. 제형은 급하게 말을 꺼냈다.
"하루야, 그 사람은 누구야?"
"누구?"
"아까 같이 있던, Brian 말고."
"아까 얘기했잖아!"
너 보느라 못 들었어. 꽤나 당당한 말투에 어이없는 건지 하루는 제형의 어깨를 주먹으로 살짝 때렸다. 아, 아파! 괜한 엄살을 부리는 제형을 밉지 않게 째려보던 하루가 다 피운 담배를 발로 지져 끄곤 제형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제형은 혹여나 하루에게 닿을까 급히 피우다 만 담배를 버리고 하루를 끌어안았다.
"밥 먹으러 가자."
"하루 배 많이 고파?"
"응, 나 배고파. 제형이 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어."
너, 또 제형이라고! 제형은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는 하루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다는 생각에 하루를 가득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 아, 항복! 항복! 나 항복 뭔지 몰라. 박제형 이 바보야! 한참을 그렇게 서로 티격태격하다보니 하루의 배꼽 시계가 격렬하게 울려댔다. 제형은 이제 정말 밥 먹으러 가자며 하루를 본인의 차로 이끌었다. 하루는 가는 내내 무엇을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며 재잘거렸고 제형은 그런 하루가 참새같다고 느꼈다. 내 아침을 알리는 내 참새.
둘은 결국 제형의 오피스텔에서 라면을 끓였다. 하루가 얘기한 가게 세 군데를 모두 들렀지만 열두 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라 열린 곳은 없었고, 마지막으로 들린 가게가 마침 제형의 오피스텔 근처라 둘은 라면을 먹기로 정한 것이었다. 하루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사이에 제형은 라면을 끓였다. 둘 다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제형은 라면을 한강으로 만들지 않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라면을 끓이는 건 항상 제형의 몫이었다. 배가 많이 고팠던 것인지 하루는 삼십 분도 되지 않아 라면을 클리어했고,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제형의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캔을 꺼내왔다.
"아, 나는 안 돼."
"왜?"
"너 집에 가야지."
운전해야 돼.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에 맥주를 가져다 놓으려고 했다. 하루는 제형의 손목을 잡아 앉히며 태연하게 다리를 모아 앉았다. 나 자고 갈 거야. WHAT? 제형은 손에 들린 캔맥주를 놓쳤다. 나 오늘 자고 갈 거라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듯 오히려 더 어이없어하는 하루의 모습에 제형은 이마를 짚었다.
Are you serious?
제형은 볼 안쪽을 짓깨물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몇 번이고 깨문 흔적들을 타고 비린 피의 향과 맛이 느껴졌다. 제형은 하루와 본인 사이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있었고, 하루 또한 모르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허나 제형은 본인의 마음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떠한 근거는 없었지만 제형은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그렇게 믿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너무 한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제형은 영화를 보다 잠든 하루를 침실에 눕히고 다시 거실로 나와 남은 영화를 마저 시청했다. 주인공이 울부짖는 장면과 옛 연인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Shit... 제형은 곧장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려던 제형은 침실쪽을 바라보다 곧장 일어나 베란다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마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제형을 덮쳤다. 꽤나 오래 담배를 피운 제형이 다시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주인공은 어느새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연인과의 미래를 약속하고 있었다. 또 비린 맛이 났다. 제형은 한껏 푸석해진 머리를 매만지다 냉장고에서 새로운 맥주캔을 가지고 왔다. 이미 영화는 끝나 크레딧이 보였지만 제형은 따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턱을 괴고 앉아 계속해서 생각했다. 미래를 약속하던 장면에 본인을 대입하였지만 턱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실없는 웃음을 흘려댔다.
"That's... that's so ridiculous."
영현은 제형의 말에 먹던 부대찌개를 흘렸다. 뭐라고요? 안 사귄다고. 하루랑? 응.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건지 영현은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제형은 건조해진 입술을 대충 손으로 뜯어내며 영현의 행동에 집중했다. 잠시만을 연발해대며 머리를 굴려대는 통에 제형에겐 영현의 머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지레 짐작했던 건 저들이었거늘 고통받는 건 제형이었다.
"아니, 그럼 둘이 왜 그래요?"
"뭐가?"
"아메리칸 마인드, 뭐, 그런 거야?"
"음, 비슷해."
이 형이 드디어 미쳤네. 영현은 이어 잔 가득 담긴 소주를 원샷했다. 제형 또한 소주를 들이켰다. 이걸 왜 먹는 거야. 제형은 영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본인은 그렇게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영현은 햄을 집어먹으며 원필에겐 얘기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형의 마음이 가벼웠다면 진작 원필에게 얘기했을 테지만 영현이 느끼기에 감정의 깊이에 있어서 제형이 한참 깊다고 느꼈다.
"어떻게 하려고요?"
"I don't know."
제형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영현 또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영현은 제형이 해바라기 같다고 느꼈다. 형한테 하루는 해인 거지. 하루와 같이 있지 않은 지금은 한껏 고개를 숙인, 그런 해바라기. 영현은 빈 제형의 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근데 갑자기 왜 얘기했어요?"
"그냥."
이게 맞는 건지 궁금해서. 제형은 소주와 함께 턱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대답은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영현의 입에서 정리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지만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냥,
그냥 이대로 지낼 순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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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필이랑은 새삼 다른 분위기의 제형이를 표현하고 싶었는데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다음 글도 빠른 시일 내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