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사막
w.그라탕
08.
머리가 아프다. 온 몸이 물 먹은 솜 처럼 무겁다. 축축한 습기때문인지 여기저기 찐득하지 않은데가 없었다.
성열은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팔이며 다리며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가만히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순간적인 두려움에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렸다. 다행이다. 익숙한 천장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엘의 방이다. 성열은 방안에 그가 있나 살피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아으. 온 몸이 부서질것 같았다. 손가락조차 움직이기 힘들다. 숨을 돌리기 위해 자신의 옆에 우뚝 선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 눈을 감고 몇초동안 가만히 있었다.
온 몸에 스며든 피로가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는듯 했다. 불현듯 머리에 떠오르는 '성규형'. 성열은 자신의 손목에 박힌 글자를 내려 보았다.
이성열[67]. 붉은색의 글자. 성열과 마찬가지로 성규의 손목에도 성규의 이름이 박혀있었다. 기계들이 자신에게 내려준 이름. 성열은 자신의 손목에 박힌 이것을
항상 파낼려고 애썼지만 불가능했다. 천천히 팔을 다리위로 끌었다. 한손에 잡혀오는 자신의 손목을 저주할듯이 쳐다보며 성열은 울먹거렸다.
"성규형...."
미안해. 용기없었던 나때문에.
성열의 눈에서 나온 눈물이 성열의 볼을 스쳐지나 턱끝에 매달렸다. 그것이 성열의 옷 위로 뚝 떨어졌을 때, 성열의 눈 앞에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커다란 발이 성열의 다리를 건들였다.
"꼴깞떠네." 그 말과 함께 엘이 성열의 허리를 잡아 끌어올렸다. 으윽. 멍이 든 상처에 손을 갖다대 짓누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성열은 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뿌리치고 싶었으나 그럴 힘도 없었다. 그가 할수있는거라곤 고작 엘의 어깨를 잡아 중심을 잡는 것 뿐. 성열을 가뿐하게 침대에 내려놓은 엘이 입을 열었다.
"없었지?"
조롱이 담긴 어투에 성열은 아무말없이 엘을 올려다봤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열은 너무나도 피곤해서 엘의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엘의 냄새가 진동했다.
거친 짐승의 냄새가 침대 여기저기에 배여 있었다. 성열은 엘의 냄새를 맡으며, 자장가듣는 아이처럼 편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자신의 행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열은 정신이 없었고, 엘은 그런 그의 행동에 피식 웃었다. 그가 성열의 뒷목을 잡아챘다.
"악!"
"건방지게 남의 침대에 얼굴을 부벼? 편히 누우라고 침대에 대령해줬으면 말귀잘알아먹고 행동해야지. 하나를 잘해주면 열개를 요구하네."
개도 알아먹겠다. 엘이 거칠게 손을 풀었다. 몇초 동안 성열의 머리를 침대에 꾹 누른 엘이 일어섰다.
"아- 내일 침대바꿔야지. 더러워서 쓰겠나."
어깨운동을 하며 엘이 방 안을 돌아다녔다. 구릿빛의 탄탄한 근육이 몸을 움직일때마다 솟아올랐다.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조금 더운 날씨때문에 엘의 상체 여기저기에
땀이 송글송글 돋았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며 눈을 감고있던 엘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어느새 얌전히 엘의 침대에 앉은 성열은 조심스럽게 그를 쳐다봤다.
"아오 썅!!!!!!!!"
갑자기 눈을 뜬 엘이 입술을 깨물며 방 안 여기저기 널린 벽돌을 들어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난 파편들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애초에 명수의 방은 이미 평범한 방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벽지가 벗겨진지 오래. 벽돌들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데다가, 사방팔방엔 벽돌과 돌덩이들, 파이프등이 놓여있었다. 아마 건물을 만들고 있었던 와중에 엘이 방을
차지한듯 싶었다. 하지만 엘은 그런 방의 모습에 오히려 만족했었다. 손만 대면 무기가 될수 있는 것이 널려있었으니깐.
엘은 자신의 입술을 이빨로 짓이기며 가까스로 분노를 참아냈다. 폭발해버린 엘을 본 성열은 겁먹은 강아지처럼 구석으로 몸을 끌고 가 되도록 엘의 시야에서 벗어나있었다.
지금 상태의 엘은 건들면 안된다. 가끔씩 미쳐버리는 엘의 모습을 봐온 성열은 그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알고있었다.
이미 수많은 광경을 봐왔던 성열의 몸은 자연스럽게 교육이 되어 있었다. 절대로 화가 난 엘은 건드리지 말자. 그게 가장 똑똑한 방법이다. 성열은 숨을 죽이며 엘을 살폈다.
온 몸을 덮은 끔찍한 피로는 사라진지 오래다.
"아오, 시발! 정말!!!!"
소리를 짐승처럼 꽥 지른 엘이 거칠게 방문을 열었다. 기다란 복도가 보였다. 엘이 또다시 괴성을 질렀다.
"이 개새끼들아!!! 아무나 올라와!!!!"
엄청난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지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계단을 다급하게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개의 발자국 소리. 곧 엘의 눈 앞에 건장한 사내들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들도 잔뜩 겁이 든 상태였다. 갑자기 왜 저러나, 모두들 엘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니들중 전투에 참여한 새끼는 내려가라."
그 말에 3명이 너나할것 없이 계단으로 뛰어갔다. 빨리 이 곳을 벗어나는게 상책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2명은 두려움에 떨며 서로를 쳐다봤다. 숨소리조차 내지못했다.
그때였다. 엘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한놈의 뒷통수를 잡아, 던져버렸다. 외마디 비명소리를 내며 방 안을 가로지른 사람이 정확히 벽에 퍽 부딪히고선 나가 떨어졌다.
바로 그 옆에 숨죽이고 있던 성열도 주저 앉았다. 엘이 폭발했다. 위험하다. 성열은 덜덜 떨며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야, 이 개새끼야. 너 어제 여기에 남아있었냐?"
남은 한놈의 멱살을 잡아올리자, 그 놈은 벌벌 떨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네.....네...ㄴ"
"너 어제 어디있었어?"?
".........방.......방.....문 ...앞에....앞에 ...계단에..."
"하루종일?"
고개를 끄덕끄덕. 울음을 터뜨릴 듯, 울상이 되었다.
"하루종일?"
엘의 되물음에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엘의 손등에 핏줄이 마구마구 섰다. 그가 한 손으로 가볍게 건장한 사내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사내의 뒷통수가 천장에 잠시 대였다.
숨이 막힌 듯 사내의 얼굴이 빨개졌고 고통을 호소하며 발버둥쳤다.
"하루종일 이란 말이지? 니 놈 새끼 눈깔은 그 자리에 있으면 안되겠군. 어제 내방에 쥐새끼가 한마리 들어왔었는데?"
쥐새끼? 사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졌다. 그는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젯 밤에 나머지 놈들이 전투를 하러갔을 때말이야. 정확히 내 방에 쥐새끼가 들어와서 도둑질을 하더군."
엘이 말을 마치자 마자 사내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꿍 하며 커다란 소리가 났다. 사내는 고통을 호소할 틈도 없이 바닥을 기어갔다. 두려움에 떤 나머지 사내는 자신의 바지에
실례를 하고 말았다. 민망한 소리와 냄새가 방안에 울려퍼지자 엘이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 이런 병신같은 새끼를 데리고 온 내가 병신이지." 엘이 발을 들어올렸다. 사정없이 사내의 허리를 내리찍자, 사내의 입에서 고통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억! 엘이 그를 뒤집었다. 정면으로 엘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사내는 경기를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다. 사타구니 안쪽을 엄청난 악력으로 짓이기자 사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너무나도 아파 목에서 아무런 소리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내가 말이야. 보초를 잘 서라고 계단앞에 니 놈 새끼들을 세워놨지. 난 누가 내 방에 들어오는거 싫어하거든. 알지않나?"
사내가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엘의 손은 사타구니 안쪽에 머물러있었다.
"그런데 시발.... 아! 다시 생각해도 화가나네. 어젯밤에 내 방에 누가 들어왔다고, 이 개새끼야!!!!!!!!!!!"
쾅! 주먹을 들어 얼굴을 내려치자 단번에 코가 박살났다. 피가 분수처럼 튀어나와 얼굴 전체를 순식간에 덮어갔다. 분이 풀리지 않은 엘이 몇번이고 내리쳤다.
"누가!! 내 방에!!! 들어왔다고!!!!!!!!"
얼굴이 아예 뭉개져버렸다. 코뼈와 광대는 함몰해버리고, 턱도 짓이겨졌다. 바닥 여기저기에 뽑혀나온 이빨들이 널려있었다.
여기저기 피범벅이다. 손에 묻은 피를 핥아먹은 엘이 사내의 얼굴이라고 할수 없는 얼굴을 잡았다.
"눈깔도 필요없는 새끼가 더럽게 축내고 앉아있네."
순식간이다. 엘이 사내의 눈에 자신의 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사내의 비명소리에 아랑곳 않고 엘은 두 손가락을 마구마구 휘저었다.
뽕 소리를 내며 뽑아져 나온 눈알들을 엘이 잡아챘다. 엘의 밑에서 사내는 경련을 일으켰다. 신생아처럼 서럽게 울며 그가 땅바닥을 기어다녔다. 충격적인 장면에 성열이 눈을 떼지 못한채
기둥뒤에 얼어붙어있었다. 손에 눈알들을 들어올린 엘은 그것을 자신의 낡은 책상위에 올려두었다. 그 옆에는 수많은 눈알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엘의 악 취미였다. 방금 뽑아올린 눈알을 가지런히 배열한 엘은 순간적으로 만족해 웃음을 지었다.
"깬 거 다아니깐 일어나라."
성열은 순간 자신에게 한 말인줄 알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가? 나인가? 성열이 겁에 질린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때 바닥에 널부러져있던 또 하나의 사내가 천천히 일어섰다.
아까 벽에 부딪혀 나가떨어진 사내였다. 그는 마침 엘이 자신의 동료의 얼굴을 짓이겼을 때부터 깨어있었다. 생중계로 그 광경을 들은 사내는 두려움에 떨며 바닥에 기절한척 있었는데,
엘은 그의 숨소리를 듣고서 알아챘다. 공포에 휩싸여 불규칙적인 숨소리. 엘이 가장 좋아하는 소리다.
"넌 특별히 살려줄게. 대신 저 새끼 끌고가서 지하에 쳐넣어. 몇 년이나 섹스도 못한채 갇혀있는 짐승들 많지 않나? "
엘이 만든 특별 감옥이였다. 가끔 말을 듣지 않는 짐승같은 놈들을 엘이 그 곳에 가두어 놨다. 가끔 엘은 약한 놈들을 그 우리 안에 던져주기도 했다. 순식간에 강한놈들이
약한놈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을 보며 엘은 즐거워했었다.
"지들 거시기 잡고선 많이 흔들었을거야. 오늘 특별히 만찬을 맛보게 해야지. 비록 눈도 없고 얼굴도 없는 병신이지만. 오히려 잘됬지. 오랜만에 엉덩이 잡고 열심히 운동하라고 해."
엘이 낄낄거렸다. 그 말을 들은 사내는 얼이 빠진 채 가만히 서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때 엘이 다가왓다. 위압적인 기를 뿜어내자,
사자 앞에서 쫄아버린 하이에나처럼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
"말귀 못알아들어? 아니면 너도 오랜만에 엉덩이 뚫리고 싶어서 시위하는건가? 나란히 쳐넣어줘?"
작아져버린 어깨를 잡으며 엘이 속삭였다. 사내의 귓가에 엘의 숨소리가 들려오자,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아니오! 사내는 엘에게 고개를 황급히 숙이고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상처투성이의 사내를 잡아 끌어올렸다. 그가 문을 열자 문밖에선 소란을 듣고 온 여러명의 사람들이 서있었다.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사내들은 상처투성이의 사내를 들어올렸다.
모두들 몰래 그를 돌봐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엘의 말이 곧 법이기 때문에, 그들은 곧바로 지하감옥에 사내를 던져 넣었다.
이제 방안에 남은건 성열과 엘 둘뿐이었다. 성열은 숨을 참고싶었지만 자꾸만 거칠게 새어나오는 숨소리에 어쩔줄 몰라했다.
"이성열. 있는거 다 알아."
화들짝! 성열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어떡해. 성열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엘은 자신의 책상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그가 꺼내든 몇장의 종이들. 빼곡히 써있는 글을 바라보며 엘은 자신의 다리를 긁었다.
"어제 다 들었어. 헛탕쳤다며?"
누그러진 그의 목소리를 들은 성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기어나왔다. 아직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말했지? 이미 뒈지고 없다고."
아니면 자살했거나. 그가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다. 엘은 자신의 말에 낄낄 웃었지만 성열은 웃지않았다. 하지만 따지지는 않았다. 만약 그 자리에서 목에 바람구멍을 뚫리고 싶다면야
말을 했겠지만.
"이젠 그 새끼 생각하지 마. 이미 없는 놈이야. 가뜩이나 지금 진도도 안나가는데 시발. 멍청한 새끼가 자꾸 딴데 빠져서는."
그 '멍청한 새끼'가 바로 자신이다. 성열은 아무말없이 계속해서 엘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성규형의 존재로 가득차있었다.
"내가 말했지? 니 머리 나한테 쓰라고. 이젠 방해물도 없겠다, 속시원하네." 그가 종이를 살펴나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단 말이야. 응? 시발, 다른 새끼들 다 잡아서 죽여야 하고
저 깡통새끼들도 다 찢어죽여야 하고 '컴퓨터'라는 좆같은 것도 없애야 하고.... 할일이 많다고!"
성열에게 가볍게 윽박질렀다. 성열은 엘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뜻이다. 엘은 만족한 듯 웃었다.
"세상이 바껴야 해. 좆같은 것들 다 없애고... 아, 시발. 진짜 어제 그 개같은 쥐새끼 생각하면 열이 차오르네. 하필 중요한 것만 빼갔어."
"... 쥐새끼라니?"
"몸뚱아리 짧은 좆같은 쥐새끼가 어제 내방에 나타나셨다. 병신같은게 눈은 밝아서 이거를 가져갔어. 이거를"
엘이 손에들린 종이를 흔들어보였다. 그의 말에 성열의 표정도 굳어버렸다.
"...잡았어?"
"아니. 놓쳤다. 비록 지금 반시체 상태로 만들었지만, 다리 하나 잡아서 더 뜯어놓을걸."
아쉬워 죽겠네. 엘이 혀를 차며 다시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하룻밤사이에 자신의 중요한 정보를 빼간 쥐새끼는 하필 엘이 읽지 못한 부분을 빼내어갔다.
마지막 한장, 엘은 갑작스러운 두통에 그것을 내려놓았고 잠시 쉬러간 사이 '쥐새끼'는 그것들을 몇장 빼내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발견한 엘은 짐승처럼 달려들어
커다란 상처를 입혔지만 놓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엘의 엄청난 두통때문에 엘이 기절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두통은 엘에게 가장 큰 '약점'이었다.
"NO.0말이야. 이 바로 다음 페이지에 이 놈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걸 들고갔어. 시발."
'-를 낳을수 있는 복합 시스템, NO.0의 이름은 -' 그가 들고 있는 종이의 맨 마지막에는 이렇게 글이 끝났고 그 다음 장은 없어져 버렸다.
"NO.0이 누군지도 모르고 어떻게 생겨먹지도 모르는데... 존나게 중요한 단서를 들고가버렸네."
"하지만... 거기에 적혀있었잖아. NO.0이라는 생명체의 목 뒤에 NO.0이라고 적혀있다고. 그래도 찾아낼수 있는거 아니야?"
"아씨! 그 많고 많은 새끼들 목덜미 꺾어서 검사하리?!"
안 꺾어도 되잖아... 성열이 조그맣게 말했다. 엘은 그런 성열의 말에 콧방귀를 꼈다. 그는 다시 글이 빽빽한 종이를 들어올렸다. 수많은 정보들, 이미 그의 머릿속에 잡혀 있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박사'. 이미 '박사'는 자신의 손으로 죽인지 오래다. '박사'의 글을 본 후 엘은 자신의 존재를 알게되었고 수많은 것들에 증오를 품었다.
인간, '컴퓨터', 그리고 자신을 낳은 '생명체'.
엘은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 놓은 이것들을 굉장히 싫어했다. 엘의 최종적 목표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자신의 편 제외)를 없애고 '컴퓨터','생명체' 를 박살내고선 제3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였다. 자신같은 괴물들만이 존재하는, 약육강식의 세계. 그것이 엘의 목표였다.
"일단은 말이지. 인간은 죽여. 보이는 대로 바로바로. 내 밑으로 들어올 새끼들 아니면 당장 죽여. 두번째는 이 '생명체'라는 새끼를 찾아서 고문을 해. 존나 괴롭게 말이야.
그리고 목을 잘라버리곤 '칩'을 꺼내서 '컴퓨터'도 박살내고, 그럼 자연스럽게 깡통새끼들도 없어져 버릴거아냐? 그때 내가 세상을 차지하는거지."
엘은 '컴퓨터'의 시스템을 그대로 옮겨 놓은 '생명체'의 칩. 그 두개가 서로 맞물리게 되면 톱니바퀴처럼 시스템이 얽혀 스스로를 파괴해버리고 만다.' 라는 대목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려갔다. 그러니깐 '생명체'와 '컴퓨터'를 동시에 없앨수 있는 좋은 방법이였다. 엘은 그 두개가 서로 파괴되는 장면을 상상하는것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웠다.
"개같은 것들. 다 없어져야 해."
엘이 느즈막히 말했다. 성열은 엘의 잔혹한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엘의 두 눈이 서글픔으로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탄생을 생각하던 엘이 곧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3살 지능이 엘을 지배한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성열은 당혹스러웠다. 엘을 안지는 몇달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를 봐도 적응이 안됬다.
그는 가끔 정말 잔인했기도 했고, 가끔 성열에게 들이대며 은근한 칭찬을 요구하기도 했고,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힘과 머리를 과시하기도 했고, 떼를 쓰기도 했으며
지금처럼 아이처럼 엉엉 울기도 했다. 성열은 엘의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진땀을 빼기 일수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딱 하나의 장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성열이 엘을 끌어안아도 엘이 아무말도 하지 않는 다는 것. 성열이 조심스럽게 엘의 뒷목을 끌어안았다. 엘은 아기들이 엄마를 찾는것 처럼 성열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성열은 떨리는 자신의 심장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엘의 뒷머리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열의 입술이 엘의 귀근처를 배회했다. 천천히 엘의
냄새를 맡은 성열은 조심스럽게 엘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엘은 더욱 거세게 울며 성열을 끌어안았다.
그는 말랑말랑한 성열의 배에 코를 갖다대며 부비었다. 어린아이처럼 엘이 칭얼대자 성열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좋은 냄새. 성열이 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성열은 제발 엘의 지금 이 상태가 오래갔으면 싶었다. 하지만 곧 엘이 원래대로 돌아올것을 알기에 성열은 아쉬웠지만 엘을 떼어냈다.
어느새 잠이 들어버린 엘을 의자에 기대게 만들었다. 혹시나 목이 아프지않을까 성열은 그의 자세를 제대로 잡아주었다. 엘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쓸어내린 성열이 그의 입술을 매만졌다.
까칠까칠하면서도 부드러운 입술. 성열은 무엇에 홀린 듯, 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두근두근. 주체할수없이 몸이 떨려왔고 얼굴에 뜨거운것이 쏠렸다.
성열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몸이 녹아내릴것 같았다. 성열은 아쉬웠지만, 천천히 일어나 방문으로 향했다. 만약 이 사실을 알면 엘이 자신을 바로 찢어죽일것이다.
소리없이 방을 나온 성열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
드디어 찾았다. 비록 실험소는 무너져버렸지만 성규는 하루종일 실험소 근처를 돌아다니며 안의 내부구조를 파악했다. 어떤 곳은 굉장히 위험한 상태라 들어가면 바로 붕괴해버리고,
어떤 곳은 건물의 기둥들이 지탱해줘서 공간이 넉넉했다. 성규는 들어갈 곳을 캐치하고선 스쿠터에서 내려섰다. 무거운 가방을 다시 한번 짊어지며, 입구로 들어섰다.
매케한 먼지냄새와 콘크리트 냄새가 가득했다. 하지만 성규는 신나보였다. 마치 보석을 발굴하러 가는 모험적인 10대소년이 된것같은 느낌이었다. 절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여기는 '박사'와 똘마니들의 연구소-."
계속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다행히 지하로 가는 계단부터는 어디 하나 무너진데 없었고 안전했다. 기둥들이 다 막아준 덕이다. 하지만 칠흙같은 어둠에 성규는 앞을 한치라도 볼수 없었다.
성규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몇번 눌렀다. 시계에서 손톱만한 네모난 판이 나왔다. 그것은 빛을 보관해둔 작은 파일같은 것이였다. 성규가 그것을 2번 터치하자 곧 사방을 빛으로 가득 매웠다.
"역시 과학이 편해."
옛날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성규는 항상 어릴적부터 그것이 궁금했다. 살기 불편했겠지? 성규는 발장난을 치며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수도가 터졌는지 기다란 복도에는 물이 흥건했다. 금이 간 벽에는 초록색 물이 가느다란 선을 이루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하가 완전히 성한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악취에 성규가 코를 감쌌다. 아씨, 냄새. 발을 옮기자 찰박찰박 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성규는 자신의 발목까지 적시는 더러운 물에 불쾌해졌다. 천천히 자신의 바지를 걷어올렸다.
엉거주춤한 상태로 기다란 복도를 계속 걸은 성규는 드디어 보이는 커다란 방문에 반색을 하며 뛰어갔다. 그 바람에 얼굴이며 옷이며 더러운 물이 다 튀었다.
에퉤퉤. 입에 물이 들어갔다. 성규는 입술을 닦아내며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손잡이가 없어서 두리번거리던 성규는 곧 부끄러워졌다.
"터치페이스(Face)네."
나 과학자 맞나? 성규는 부끄러운듯 웃어보이며 터치페이스에 손을 갖다대었다.
푸른 빛을 띄며 페이스가 작동했다. 문이 자동적으로 열렸다. 그 바람에 더러운 물들이 순식간에 빈 공간으로 흘러들어갔다.
성규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라고 하얀 공간에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여기가 실험소? 성규는 이럴리 없다며 주위를 꼼꼼하게 살폈다.
곧 성규는 문의 반대방향의 벽에 무엇이 있는걸 발견했다. 정확히 자신의 코높이였다. 손바닥만한 투명한 판이 있었다. 성규가 그것을 누르자 순식간에 벽이 없어졌다.
액체가 공기로 증발하듯이 벽도 천천히 사라졌다. 성규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며 벽이 사라진 곳을 지나쳤다. 어차피 저런거 나도 만들수 있어. 성규는 중얼거리며
또 다른 방으로 들어섰다.
이제 정말 성규가 찾던 곳이다. 들어온 방은 정말 새하얗고 의외로 좁았다. 방의 중앙에는 커다란 수술대가 있었고 그 주위에 기계가 가득했다.
수술대가 있는 곳 바로 근처에 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몇개의 비커, 기다란 관, 네모난 상자, 마스크 몇개와 수술용 장갑 몇개가 널부러져 있었다. 그 책상 바로 옆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푸른 하늘빛 색깔의 문. 조그만 유리창이 달려있기에 성규는 다가가 안을 살폈다.
"!"
안에 누가 있었다. 성규의 머릿속에 '이성종'이란 존재가 연기처럼 빠르게 확산됬다. 틀림없이 '이성종'이다. 성규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뼈를 뚫는 차가움에 소스라치게 놀란 성규는 재빨리 성종을 살폈다. 깨끗한 상태. 성규는 성종을 끌어 안아 올렸다. 너무나도 가벼운 느낌에 성규는 하마터면 성종을 떨어트릴뻔 했다.
꽤나 무거울거라고 예상했는데, 마치 쿠션을 드는 듯했다. 여자처럼 가녀리고 얇은 성종을 가볍게 들어올려 성규가 보관소에서 나왔다. 성종을 조심스럽게 실험대에 눕히고 천천히
관찰했다.
"아- 이렇게 생겼구나."
하얀 피부에 작은 얼굴. 갈색 머리에 갈색 눈썹. 눈은 감고있어서 모르겠고, 코는 오똑했다. 입술은 약간 통통했다. 키는 생각외로 조금 컸다. 물론 무게는 별로 없었지만.
남성의 겉모습과 신체적 구조로 되어있다 라는 '박사'의 말에 성규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생각한 성종은 꽤나 굵직굵직하고 어깨도 넓고 피부도 검고 딱 봐도
건강한 남자구나 라고 느껴질 줄 알았다.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존재이니깐, 엄청나게 강하게 생겼을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조금의 과장을 덧붇히면 성규는 성종이 구릿빛피부에, 대머리에, 엄청난 근육을 가진 험악한 인상의 사내를 생각했었다.
물론 성규는 그 사내가 아이를 임신해 배가 부른 상상을 하며 몇번 구역질을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성종'이란 생명체를 보니 꽤나 여성적인 외모였다. 자신도 순간 '이쁘다'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하얗고 피부도 말랑말랑하고 머리카락도 사람의 머리카락이였다. 성규는 정신없이 성종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와-진짜 잘만들었네.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작거리던 손은
성종의 입술로 향했고, 성규는 조심스럽게 성종의 입을 벌려봤다. 하얀 이빨들이 가지런했다. 성규는 신기해하며 성종의 입안을 관찰했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혀를 만져보니
사람의 것과 똑같았다. 새로운 장난감을 만지는 아이처럼 성규는 성종을 살폈다. 흰색의 원피스 같은 실험복을 입은 성종의 팔과 다리를 구석구석 살피던 성규는 순간적으로
호기심이 발동했다. 혹시 박사의 실험이 잘못되었나? '남자의 겉모습과 신체구조로 이루어졌다'는 말이 잘못된게 아닐까? 혹시 '여자'가 아닐까?
성규는 주체할수 없는 호기심에 슬쩍 성종의 옷을 걷어올렸다. 신기하게도 속옷도 입고있다!
눈이 커다래진 성규는 자신이 굉장한 변태가 되버린것 같았지만 이것도 하나의 관찰이라고 치부했다. 조심스럽게 성종의 속옷을 끌어내렸다.
"아.... 남자맞네."
그리고 다시 조심스럽게 올렸다. 옷도 내려줬다. 무릎까지 오는 흰색의 실험복을 내려준 성규가 아무말없이 성종을 눈에 담았다.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다.
지금 내가 뭐하는거야? 성규는 이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웃겼다. 여자였으면 어떻게 하려고? 꽤나 짖궂은 상상을 하던 성규가 순간적으로 놀라 자신의 시계를 쳐다봤다.
성종을 꺼낸지 20여분이 지났다!
"헐!"
여기서 2시간 40분이 지나면 성종은 파멸해버리고 만다. 성종에 대한 설명서를 떠올리며 성규가 침착하게 움직였다. 지금 바로 성종에게 생명체의 '피'를 넣어주고
바로 칩을 꽂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규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꾸욱 눌렀다. 조그만 칩이 툭 튀어나왔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수술대 옆 기계위에 올린 성규가
성종의 '피'를 찾아나섰다. 책상 위를 뒤지던 성규는 네모난 상자를 발견했다. 그것을 열자 금색의 네모난 고체가 들어있는것이 보였다.
"뭐야, 이게."
손가락으로 툭 건들자 순식간에 고체가 연분홍빛의 액체로 변했다. 이게 성종의 에너지구나. 성규는 재빠르게 성종의 곁으로 걸어왔다. 수술대 옆에 있는 여덟개의 바늘이 보였다.
그것들을 연결한 수많은 줄들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보이는 네모난 입구. 그 안에 넣어야 했다. 성규는 성종의 피부에 8개의 바늘을 꽂았고 연분홍빛의 액체를 쏟아부었다.
천천히, 하지만 느리지 않은 속도로 액체들이 성종의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성규는 마지막 한방울까지 들어간것을 확인하고선 칩을 집었다. 성종의 가는 목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린 그는 성종의 목 뒤의 네모난 구멍에 칩을 넣었다.
딱! 소리가 나자마자 정체불명의 은은한 빛이 성종의 피부근처에 나타났다. 그것들은 몇초 후 성종의 몸 안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고,
성종이 눈을 떴다.
성규는 떠진 성종의 눈을 보며 걱정반, 기대반인 마음으로 성종의 반응을 살폈다.
천천히 자신의 두 손을 올리며 성종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그만 발가락도 움직였다. 상체를 천천히 일으킨 성종이 팔에 꽃힌 8개의 바늘을 빼내었다.
그리고선 성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움찔. 성규는 순간적으로 움츠러 들었다. 그래도 성종은 자신이 이때까지 접하지 못한 신기한 '생명체'라는 존재이니깐, 성규는 조심스러워졌다.
"고마워요."
미성의 목소리. 귀를 감싸는 따뜻한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성규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성종에게로 움직이는 발걸음.
이제야 완벽하게 성종의 얼굴을 볼수 있었다. 커다란 눈에 자리잡힌 갈색의 눈동자. 꽤나 예뻤다. 성규는 성종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깊은 호수같이 드넓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반짝이는 빛들. 사랑에 빠질것만 같은 눈이다. 성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이런 존재를 '박사'가 만들었을까?
대단해. 중얼거리며 성종의 뺨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성종도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려 성규의 손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무서웠어요."
성규는 성종이 말하는것을 지켜봤다. 대꾸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계속 성종이 말하기를 은연히 요구했다.
"외로웠어요."
"...."
"힘들었어요."
"...."
"눈이 감겼지만 저는 볼수 있었어요. 모든 상황을 볼수 있었어요. 제 눈이 감기자 제 몸이 눈이 되었어요."
감각시스템을 말하는건가. 성규는 다시 성종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성종이 눈을 감아도 감각시스템을 끄지않는 이상 온 몸으로 볼수있다고 분명 '박사'의 글에 적혀있었다.
그것이 켜진상태였다는 말인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잔인한 시간이였을까, 성종에게.
"건물이 흔들렸어요. 제 몸도 흔들렸어요. 계속 아무도 와주지 않았어요. 계속... 계속... 엄청난 소리가 울렸어요. 제 바로 위로 수많은 발자국 소리들이 울렸고,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대포소리같앴어요.
"....."
"'박사님'은 와주지 않았어요. 어디계세요? 또, 그대는 누구세요?"
눈물에 흠뻑 젖은 눈으로 쳐다보자 가슴쪽이 아파왔다. 왜이러지. 성규는 자신의 가슴을 쓸어올렸다. 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박사'는 없어."
"없어요? 어디에요? 어디에 '없다'는 말이에요?"
"..... 지구상에서.."
"지구상에서 '없다'구요? 죽었나요?"
성종의 커다란 눈이 흔들렸다. 눈물이 또르르 흘러나올것 같았다. 성규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가져다 닦아주었다. 자신의 손가락을 타고 내려오는 성종의 눈물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응. 죽었어."
"그대가 죽였나요?"
"아니. "
그가 쏜살같이 고개를 흔들었다. 성종이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성종의 눈을 보고싶다는 아쉬운 마음에 성규가 다시 성종의 볼을 건드렸다.
성종이 다시 눈을 떴다.
"그대는 누구세요?"
"나.. 김성......아니, 이성규야."
"이성규? 처음 들어요. '박사'님의 곁에 계셨나요?"
"아니. 나는 그와 같은 '과학자'야. 하지만 '박사'의 옆에 있지는 않았어."
"저를 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대. 성종이 성규를 껴안았다. 모성적인 면이 더 강했기에 스스럼없이 성규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누군가의 '품'이 그리웠기에 그는 간절하게 성규를 끌어안았다.
처음느껴지는 감정에 성규의 얼굴이 붉어졌다. 성종의 정수리가 보였다. 가지런히 정리된 머리카락에 손을 얹은 성규가 그만 성종을 품에서 떼어냈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이곳은 이제 폐허야."
성규의 말에 성종은 아무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종의 손을 잡고서 지상으로 천천히 올라온 성규는 성종이 다치지 않게 굉장히 배려를 했다.
자신의 손을 잡은 성종의 작은 손. 애완동물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만지고 싶었고 쓰담아주고 싶었고 보듬어 주고 싶었다. 성종의 볼을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성규는
자신의 스쿠터로 향했다.
"이게 뭔지 알아?"
"아니요. 몰라요. 동물같애요."
성종의 말에 킁 하고 웃은 성규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만든거야. 너는 위험하니깐 이걸 쓰도록 해."
자신이 개발한 핼멧. 수억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져 있어, 단단하게 보호해주기도 하지만 시원한 공기를 그대로 느낄수 있다.
그것을 조용히 쓴 성종을 성규는 자신의 뒤에 앉혔다. 가만히 자리를 잡은 성규는 혹시 성종이 위험해지지 않을까 자리를 바꿨다. 자신이 뒤, 성종이 앞.
성종이 한품에 쏙 들어왔다. 성규는 스쿠터의 손잡이 부분을 건드렸다. 그것이 성규가 잡을수 있게끔 길어졌고, 성종이 떨어지지 않게 버팀목이 되어줬다.
"성종아."
"네?"
"지금부터 누구를 만나던, 무엇을 마주치던 너 내 동생이라고 말해, 알았지?"
"동생이요?"
"절대 네가 '생명체'라는 것에 대해 말하지마."
"네."
"'이성규'의 동생이라고 말해."
"네."
"내가 널 지켜줄게, 알았지?"
"네."
끄떡거리는 성종의 뒷통수가 보였다. 거짓반, 진실반인 자신의 말. 아무도 성종은 못건드린다. 왜냐하면 그는 중요한 존재였고, 또 위험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아무도 건들수 없었고 성규는 그를 지켜낼것이다. 만에하나 누군가에게 뺏겨 '컴퓨터'를 파괴하는 일이 발생할수도 있으니깐.
성규는 그를 '실험'할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치워버렸다. 너무나 사람과 똑같고, 사람보다 더 사람같은 성종의 모습에 그런 생각이 굉장히 잔인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제가 '생명체'라는건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알수가 있지."
나는 천재니깐. 성규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스쿠터는 출발했다. 혼자였던 여행이였는데, 한사람이 더 느껴지자 이 기분도 꽤나 나쁘지 않은 성규였다.
그들은 붉은사막을 향해 달렸다.
끝없는 목적지를 향해.
*
"이성열."
엘이다. 엘이 자신의 방에 왔다. 정확히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완전하게 열린 문으로 그가 서있었다. 꽤나 깊어진 밤인데 왜 왔을까.
"엘...!"
반가웠다. 잠에서 지금 깬걸까, 성열이 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어둠을 뚫고 흐르는 그의 냉서린 시선에 멈출수 밖에 없었다. 짐승처럼 그의 눈이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건드리면 죽인다고 했지?"
"!"
알아차렸다. 엘이 알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성열은 변명을 할수도 없었다. 그저 아무말없이 땅바닥만 쳐다봤다.
긴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 침묵을 깬건 엘이였다.
저벅저벅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성열의 고개가 더 숙여졌다. 무서웠고 두려웠고, 창피했다.
엘이 우악스럽게 성열의 턱을 잡아올렸다. 그리고 벽으로 밀쳤다. 자신을 압박해오는 엘의 몸에 성열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죽이려는건가.
그때였다. 말없이 한참을 노려본 엘이 성열의 턱을 잡아채 거칠게 입술을 부딪혀 왔다.
"!"
자신의 입술에 닿인 느낌에 성열은 충격을 받고 뿌리쳤다. 하지만 엘의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거칠게 성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빈 엘은 아무런 배려도 없이 혀를 들이밀었다.
거칠게 성열의 입안을 여기저기 탐하던 엘이 성열의 혀를 자신의 혀로 감싸았다. 아팠다. 성열은 너무나도 아팠다. 이건 아무것도 아닌 '폭력'이었다.
성열은 울면서 엘에게 놓아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엘의 입이 계속해서 들어와서 말할수 없었다. 어두운 방안에 민망한 소리만이 울렸다.
엘의 어깨를 사정없이 밀어냈다. 마지막으로 성열의 입술을 한번 빨아들인 엘이 입을 땠다. 기다란 은색의 선이 그들의 입을 이어주고 있었다.
엘이 성열에게서 물러섰다. 부어오른 자신의 입술을 만지며 성열이 조그맣게 울었다. 무슨 뜻이야. 성열의 머리가 복잡했다.
"너는 꽤나 머리가 멍청해서 못 알아듣는 것 같더군."
"...."
"한번만 건드리면 정말로 죽여버린다고 했는데도 나를 건드렸어."
"...."
"모를줄 알았나보지. 내가 멍청하게 보이나 보지?"
성열이 고개를 저었다. 엘이 거칠게 성열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윽. 성열이 엘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엘의 손엔 강한 힘이 들어섰다.
"죽인다고 했는데도 안 통해."
"....이거 놔, 엘."
"그만큼 나를 원하는거야 뭐야?"
".....이거 놔."
"지금 여기서 해? 니가 원하는게 그거야? 한번 해주면 떨어질래?"
"..이거 놔!"
"지금 니 침대에서 섹스라도 한판 하자는거야? 그걸 원해? 네 엉덩이에 내가 비벼줬으면 해?"
이거 놔!! 성열이 울부짖으며 몸부림 쳤다. 지금 엘은 자신을 정말로 죽이고 있었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엘이 거칠게 성열의 몸을 끌어 잡았다. 그리고선 침대로 내동댕이쳤다. 짐승처럼 성열에게 달려들어 그를 짓눌렀다.
무릎으로 성열의 사타구니 안쪽을 압박하고선 성열의 두 손을 포박했다. 도망칠수 없는 상황에 성열이 울부짖었다.
"이성열. 미안한데 말이야, 한번 더 경고할게."
"....흑.......흐흑..."
"네가 다른놈이면 지금 바로 갈가리 찢겨서 짐승밥이 되었을거야. 내 말을 안들으니깐. 근데 너라서 봐주는거야."
".......흑......왜 그래.."
"네 '머리'가 아까워서."
충격. 성열의 가슴에 커다란 칼이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성열은 울었다. 뿌리치고 싶은데 뿌리칠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하고싶으면 해줄수 있어. 그럴 힘은 넘쳐나거든."
"......싫...어..."
"정말 하고싶어? 하고싶으면 얘기해. 나도 몸 좀 풀어야지?"
안그래? 엘이 성열의 귓가에 짐승같이 속삭이자 성열이 고개를 돌렸다. 싫어. 성열의 대답에 엘이 웃었다.
"그러면 제발 들이대지 말고 니 할일이나 해. 정말 몸을 섞고 싶으면 찾아오던가. 제발 그 덜떨어진 감정으로 좆같이 다가오지 말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이 일어섰다. 성열을 한심하게 내려본 엘은 뒤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엘의 손자국이 벌겋게 난 자신의 손목을 만지며 성열이 울음을 삼켰다. 행여나 복도에 울릴까, 성열은 배게에 얼굴을 쳐박고 울었다.
"성규형...."
엉엉 입에서 서럽게 울음이 튀어나오자 재빨리 배게로 막았다.
외로워.
정말로 외로워.
성열은 젖어드는 배게를 느끼며 서서히 잠들었다. 악몽이다. 성열은 잠이 들자마자 악몽에 빠졌다.
수천개의 가시덩쿨이 있는 숲을 지나가던 성열의 앞에 짐승이 나타났다. 늑대의 모습을 한 그 짐승은 성열에게 달려들었다.
짐승의 발은 손으로 변해있었다. 짐승의 얼굴은 엘의 얼굴로 변해있었다.
자신의 쓰러뜨린 짐승이 소리쳤다.
원해?
성열이 대답할 틈도 없이 짐승이 들어왔다. 아악! 엄청난 고통에 성열이 땅바닥으로 고개를 쳐박았다. 짐승은 아랑곳않았다. 계속되는 행위.
순간 수천개의 가시덩쿨이 성열에게로 달려들었다. 너나할것 없이 성열의 살점들을 떼어갔다. 성열이 울부짖으며 뿌리쳤지만 가시들이 자신의 몸에 더욱 깊게 박혔다.
하지만 여전히 짐승은 자신의 뒤에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원해?
또 짐승이 속삭였다. 아니! 성열이 재빠르게 대답했지만 짐승은 말을 되풀이했다.
원해? 원해? 원해? 원해? 원해? 원해? 원해? 원해?
아니!
원하고 있잖아!
아니야!
성열의 대답에도 계속되는 행위.
성열은 하루종일 똑같은 악몽에 시달려야했다. 깨어나고 싶었지만 깨어날수 없었다.
그렇게 지옥같은 악몽속에서 성열은 괴로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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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언뜻보면 규종인듯하네요 ㅜ
여러분, 열심히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