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울었어?"
"어, 어......"
다 울고나니 금세 어색해졌다. 성규의 품에서 얼굴을 떼어 안긴 상태 그대로 성규의 눈과 나의 눈을 마주하니 서로 어색함에 미칠 것 같다는 눈빛만 오고 갔다. 성규는 왜인지 굳어선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 결국 내가 먼저 성규의 품에서 떨어졌다. 짐을 챙기고 빙수 그릇을 갖다 놓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눈이 마주치고 몇 번이나 손이 맞닿았지만 난 그 상황에서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데려 준다는 그의 말에 손사레를 쳤다. 내 집을 내가 어딘지도 기억하지 못 하는데 성규를 데려갔다간 무슨 의심을 살 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대로 헤어지고 성규를 보냈으면 참으로 좋았으련만, 나는 생각없이 손사레를 치다가 더 생각없이 아무 말이나, 그것도 오히려 내가 데려다주겠다는 병신같은 말을 꺼내버려 더 큰 사단이 났다. 성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고개가 왼쪽으로 가면 내 심장도 왼쪽으로 쿵, 그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가면 내 심장도 오른쪽으로 쿵,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성규는 이내 바보마냥 해맑게 웃어보이며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가로등만이 비추는 밤 골목을 걸었다.
"근데, 집에 혼자 갈 수 있겠어?"
"응, 당연하지!"
"여주야, 너"
"응"
"집 기억 안 나지?"
"집 기억 안 나지?"
시발.
아니라고 바로 둘러댔으면 끝났을 일을 망치로 머리 맞고 정신 못 차리는 동안 그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아, 벌써 들킨 건가? 하고 울적해졌는데 성규가 말을 덧붙였다. 아니, 아까 너 우리 반도 기억 못 하고 나이도 기억 못 하고 하길래,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그냥 웃어보이자 성규가 갑자기 나의 손목을 잡고 지금까지 걷던 곳 과는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어디가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냥 참았다, 난 지금 물어보고 따질 상황이 아니지... 암, 그럼. 그렇게 계속 따라가고만 있는데 성규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어디가냐고 왜 묻지 않냐며 물어왔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멍청하게 또 쳐다만 보고 있으니 성규가 한숨을 내쉰다. 괜히 내가 잘못한 것만 같아 개미만한 목소리로 미안하다 중얼대니 그걸 또 어떻게 들었는지 미안할 일이 아니라며 되레 화를 낸다.
"미안하라고 한숨 쉬는 게 아니야! 남자가 이렇게 데려가면 의심 안 해봐, 넌?"
"어?"
"너 혹시 내가 남자로 안 보여?"
"뭐, 뭐라고?"
"아, 답답해. 됐어. 지금 네 집 가는 길이야. 여주야, 네 집 알아, 나는."
아, 내 집을 아는 구나. 그렇구나...... 아니, 잠시만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럼 지금 우리 집 가는 거라고?"
"응, 이제 이해 했어?"
"넌 집 안 가고 우리 집을 간다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는데?"
8시라 당당히 적혀있는 휴대폰 화면을 그의 눈에 들이미니 성규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이 싹 굳는다. 괜히 또 화라도 낼까봐 맘 졸이고 있는데 넌 여자고 난 남자잖아, 그리고 지금 늦은 시간도 아니야. 두 마디의 말만 하고는 다시 고개를 픽, 돌려버린다. 별 것도 아닌데 두 볼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났다. 잡힌 손목이라도 떼려 꼬물꼬물 손을 움직이니 거의 다 풀렸을 즈음에 성규가 다시 손을 꽉, 잡아왔다. 그 이후론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대화도 오가지 않고 나의 집에 도착했다. 집은 현실의 나의 집과 똑같았다. 그럼 부모님도 같은가? 뭐가 뭔지 혼란스러웠고, 앞에서 조심히 들어가라며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흔드는 성규가 귀엽다고 느껴진다기보다 그 역시도 혼란의 한 요소가 되었다.
"학교 가는 법도 모르지? 내일 아침에 네 집 앞에서 기다릴게, 여주야 잘 자!"
정말 애인을 사귀는 느낌이 들어왔다. 찬 밤 공기가 봄바람이 되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
.
.
.
"잘 잤어? 여주야, 얼른 뒤에 타."
어떻게 잠을 잤는지 모르겠다. 집에 들어가니 부모님은 없었고 나 혼자 뿐이었다. 피곤했지만 억지로 발 길을 화장실로 돌려 씻은 후에 침대로 올라가 곧바로 잤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상태로 일어 나 벗어 던져뒀던 교복을 입고 나오니까 성규가 있었다. 성규의 얼굴이 전 날보다 반질반질한 게 뭔가를 바른 것 같았다. 꼴에 머리도 어제에 비해 많이 정리해서 온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모르면서 어젠 타지 않았던 자전거도 끌고 왔다. 이렇게 성규는 나에게 한 번 고백한 적이 있었고, 까였었다, 하지만 아직도 난 널 좋아한다, 의외로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며 우울해하던 그 모습들이 사실임을 확실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타라는 성규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역시나 어제 신발장 위에 놓여있던 막대사탕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두 개를 무작정 주먹으로 그러쥐고 밖으로 다시 뛰어나갔다. 자전거 위에서 중심을 못 잡고 자꾸 쓰러지려 하는 모습이 귀여웠지만, 한 편으론 우습기도 했다. 그에게 주먹을 펴 막대 사탕 한 개를 내밀었다. 그가 다시 팔자 눈썹을 만들고선 의아한 표정으로 날 봤다.
"왜? 까서 입에 넣어 줘?"
"응."
"미쳤어, 김성규."
무작정 아무 사탕이나 들이밀고는 자전거도 타지 않고 앞질러 걸었다. 뒤에서 야, 야! 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자전거 위에서 중심을 못 잡고 휘청이는 성규가 보였다. 으휴, 한숨을 한 번 쉬고 성규에게 다시 달려 가 자전거를 옆으로 뉘여 성규를 내리게 했다. 뒤에 타. 하니까 성규가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이 괜히 재밌어 깔깔, 웃었다.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버버, 하고 있는 성규를 보고 웃고만 있다가 문득 휴대폰을 보니 등교 시간에 임박해있었다. ㅡ사실 등교 시간이 현실하고 같은 진 모르겠다ㅡ 성규의 등을 퍽퍽, 치며 뒤에 타라고 하니 성규가 울상을 지으며 뒤에 탔다. 나도 자전거에 올라타고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아, 김성규 무겁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성규가 학교는 이 쪽으로 가는 거라며 알려주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하는데 뒤에서 성규가 자꾸 중얼거렸다.
"내가 태워주려고 했는데......"
"내가 태워줘야 되는데......"
"나 무거운데......"
이 상황마저 너무 재밌다. 그래서 나는 또 웃었다. 그렇게 속으로나마 계속 깔깔대다가 학교에 도착했다. 선도부들의 눈길이 시원치만은 않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 다 신경쓰고 고개를 나의 등에 파묻는 것은 성규였다. 자전거를 세워두는 곳에 도착해 성규에게 얼굴 좀 치우고 내리라고 하니 성규가 깜짝 놀라서는 자전거에서 내렸다. 내가 중심을 잡고 있으니 그나마 수월했는가보다. 나도 내리고 자전거 자물쇠를 받아 잠궈두었다. 이제 길도 다 외웠으니까 성규한테 오지 말라고 해야지.
"성규야, 이제 네 반 가. 잘 가!"
"야...... 너 나랑 같은 반이잖아."
"아, 맞다."
학교에서만은 모른 척 하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