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얘기가 너무 재밌어서 안되겠어요 그냥 쭉 쓸게요. 아주 처음 얘기부터 시작할게요. 여주가 법원으로부터 서류를 받고 학교를 휴학한지 한 달정도 됐을 때 였음. 여주는 그때 영어학원에 조교로 일하면서 재판 준비 하느라 집에도 잘 못 들어가는데 생전 연락 한번 해본 적 없는 동기에게서 톡이 옴. 경비실에 맡긴거 찾아가. 여주 학원 일 때문에 늦게 확인했음. 동기는 정오쯤 그걸 보냈고 여주가 확인한건 밤. 이게 대관절 뭔가 싶어서 톡을 보내니깐 읽지도 않음. 자정이 됐을 때 집에 도착했는데 경비실 아저씨가 짜증 내면서 커다란 케이지랑 커다란 캐리어 하나를 줌. 학생은 왜 개를 맡겨두고 가라고 했어!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케이지 안에 겁나 큰 셰퍼드 한 마리가 있음. 여주 그거 보고 뒤로 넘어갈 뻔. 케이지 안에 보니까 축 늘어진 셰퍼드가 눈치 보고 있는거 보고 마음이 안좋아져서 일단 데려옴. 적어도 10시간은 이 답답한 케이지 안에 있었다는 걸 자각하고 얼른 케이지에서 나오게 함. 입마개도 계속 하고 있어서 그것도 일단 풀어줌. 물리는 건 일단 그 다음 일로 미뤄둠. 캐리어를 열어 보니까 사료랑 간식, 장난감들로 꽉 차있음. 그리고 이미 색깔도 바래고 구겨진 편지도 들어 있었는데 셰퍼드에 대한 간략한 설명 말고는 영양가 있는 내용이 없었음. 이름: 휴닝카이, 생년월일: 02.08.14, 예방접종이나 병원 기록들(거의 없었음),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것도 거의 적힌 게 없었음) 등등. 카이는 일단 케이지를 나왔긴 나왔는데 여주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편하게 앉아 있지도 못하고 왔다갔다 거렸음. 머리가 복잡해진 여주. 그도 그럴게 머리털 나고 털 달린 생명체 한 번도 키워본 적 없음. 끽해야 장수풍뎅이 정도. 일단 데려온거니까 캐리어 짐을 다 꺼내서 정리함. 10시간 넘게 아무것도 못 먹었겠지 싶어서 캐리어에 있던 밥그릇 씻어서 사료 조금이랑(사실 얼만큼 주는지 모름) 물이랑 줌. 바로 코 앞에까지 밀어줬는데 안먹어서 어디 아픈가 싶음. 카이야, 먹어도 돼. 하니까 먹음. 훈련이 잘 되어 있구나... 싶은 여주. 카이 밥 먹을 동안 여주 인터넷으로 미친듯이 저먼 셰퍼드 찾아봄. 만약 보호소나 임시보호를 맡긴다고 쳐도 일주일은 본인이 케어해야 할 것 같아서. 사람들이 부담 없이 키우는 종이 아니다 보니 절대적으로 지식이 부족함. 노트북 앞에서 머리털 쥐어뜯는 여주에 카이 흠칫함. 여주 눈치 보면서 다시 케이지 안으로 들어감. 케이지 밖으로 머리만 내놓고 다시 여주 눈치 보는 휴카. 사실 원래 주인이던 윤선배는 카이한테 별 관심이 없었음. 저먼 셰퍼드 간지 나서 입양 했는데 입양 하고 한 번을 안놀아줌.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혼자 자람. 그러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뜨게 된 윤선배가 후배에게 이틀만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그대로 토낀 것. 후배도 한 달을 보살피다 다른 동기에게 카이를 보냈고 그렇게 떠돌이 생활이 시작됨. 눈치 보는 것도 윤선배랑 살 땐 그러지 않았는데 이집저집 옮겨다니면서 시작됨. 훈련도 받은 게 아니라 본인을 맡던 사람들이 세나개나 개훌륭 같은 프로그램 볼 때 옆에서 이것저거 주워들은 것. 여주 일단 휴카 밥그릇 치워주고 장난감을 보는데 다 헐고 낡아서 다 버려야 할 것 같은 거 밖에 없음. 그나마 쓸만 한 건 공 정도. 공 들고 이리저리 굴려보는 데 카이 고개 돌아가는거 보고, 놀래? 놀고 싶어?하고 소심하게 던짐. 카이 느릿하게 일어나서 공 물어옴. 사실 이런거 처음 겪어보는 여주 되게 신기함. 자기 앞에 공 내려놓는 휴카가 기특해서 막 칭찬해줌. 휴카도 칭찬 받으니까 기분 좋아서 한 번 더 던져달라고 콧잔등으로 툭 밈. 그렇게 30분동안 던지고, 가져오고, 칭찬하고, 의 무한 루프를 반복하다가 팔이 빠질 것 같은 여주가 마무리 시킴. 본인이 쓰던 담요랑 방석 꺼내서 거실에다가 침대 만들어주고 혼자 자는데 외롭지 말라고 인형 뽑기로 뽑은 인형 줬음. 여주 방에 자러 들어 갔을 때 휴카 바디 체인지 하고 여주가 준 인형 만져봄. 처음 느껴보는 몰랑몰랑한 느낌에 꼭 끌어안음. 인형이랑 여주랑 놀던 공 안고 잠듦. 여주는 임시보호이긴 하지만 그래도 되게 잘해주려고 애씀. 늘 우울했는데 카이랑 지내면서 그런 게 조금 줄어들어서. 그리고 카이가 말을 잘 알아듣는 게 너무 신기해서 우울할 틈이 없음. 저녁에는 학원을 나가니까 아침하고 낮 시간에 최대한 카이랑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 그 사이에 카이는 새로운 장난감도 많이 생기고 새로운 간식도 먹어봄. 여주랑 지내는게 지금까지 지낸 사람들 중 제일 좋은 휴카. 여주가 본인을 다른 곳으로 안보냈음 좋겠음. 하루종일 여주 뒤를 졸졸 쫓아다님. 여주가 노트북 보고 있으면 옆에 붙어있고, 물 마시러 갈 때, 택배 받으러 갈 때도 보디가드처럼 따라가고, 여주 샤워하러 가면 화장실 문 앞에 앉아서 기다림. 여주가 매트리스 위에 엎드려서 재판 서류 보고 있으면 그 옆에 똑같이 엎드리고, 여주가 기분이 안좋아보이면 애교 부리고, 정말 드물지만 놀자고 몸 숙이면서 보채기도 함. 눈치보는 것도 이젠 없어짐. 여주가 학원 일 때문에 늦으면 빨래통 엎어서 다 쏟아버리고 그 위에 올라감. 카이가 지금까지 부린 가장 큰 말썽임. 이렇게 매번 좋았다면 좋겠지만, 여주 마냥 좋을 수가 없음. 지금 겨우 멘탈 붙잡고 있는 중.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한 달 정도 진짜 힘들었는데 바로 법원에서 편지 날아오고 지금 변호사 구하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음. 엄마랑 이모, 할머니랑 지금 백방으로 뛰어다니는데 역시 힘듦. 여주 학교도 쉬고 일도 구해서 어떻게든 비용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잘 안됨. 거기다 할머니랑 엄마, 이모가 서로 의견 충돌이 너무 잦아져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미친듯이 쌓이고 있음. 원래는 성격이 엄청 밝고 통통 튀었는데 지금은 눈 뜨고 감는 순간이 괴로움의 연속. 맨처음엔 스트레스로 미친듯이 먹다가 스트레스가 어느 지점을 딱 찍는 순간 미친듯이 살이 빠져서 지금 몸도 죄다 만신창이. 카이 앞에서 우는 날도 허다해짐. 카이한테 막 쏟아내는데 그것도 너무 미안함. 책에서 보니까 보호자의 감정 상태를 따라간다는데 카이는 그러면 안되거든. 정말 엄마, 이모, 할머니랑 대판 싸운 날 여주 집에 돌아와서 커터칼 상에 올려두고 한참을 바라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자는 게 제일 쉬웠는데 불면증까지 생겨서 더 예민하고 날카로워짐. 카이는 그냥 여주가 걱정됨. 그리고 본인을 다른 곳으로 보낼까 불안해짐. 여주 밤에 너무 못 자니까 차라리 그 시간동안 카이 잘 때까지 옆에 있어줄까 싶어서 카이 침대를 본인 매트리스 옆으로 옮김. 카이 쓰다듬어주고 어설프지만 어디서 배워온 마사지 해줌. 그리고 자장가 불러주는데 맨날 똑같은 노래임. 카이는 그거 제목 모름. 근데 부르라고 하면 바로 부를 수 있음. 여주가 본인 쓰다듬어 주면서 엄마가 섬 그늘에, 하면 눈 감음. 근데 신기하게 그러다 여주도 잠에 듦. 짧지만 점점 시간도 늘고 있고 덜 피곤함. 진짜 카이 없으면 안되겠다 싶음. 사실 이미 온 집안 천지가 카이로 인해 돌아감. 소파에는 이미 카이 전용 자리가 있고, 집 안 곳곳에 인형하고 장난감이 포진해 있음. 카이 산책 시간에 맞춰 아침을 먹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카이 생각에 요즘은 밤에 술도 안마심. 카이를 진짜 데리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함. 옆에 딱 붙어서 간식 뜯고 있는 카이한테 여주가 갑자기 말함. 카이야, 그냥 나랑 쭉 살래? 카이는 다 알아들었지. 그리고 날 잡고 카이 병원 데려가려고 하는데(예방접종이나 건강에 이상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그동안은 보호자가 아니어서 딱히 명분이 없다고 생각.) 얘가 하네스 차고 안가겠다고 버팀. 이런 적이 없어서 의아한 여주. 사실 카이는 병원 가서 수인인거 다 밝혀지면 안되니까 병원에 학을 땜. 결국 여주 겨우겨우 카이 질질 끌어서 병원에 갔고, 의사쌤이 카이 정밀 검사 하다가 보호자분 잠깐 나가 있어달라고 함. 여주 완전 패닉. 무슨 문제 있나 싶어서. 그리고 다시 들어와주세요. 소리 들리자마자 들어갔는데. 어떤 남자애가 파란 병원 담요 둘둘 두르고 앉아있음. 카이에요. 그동안 계속 숨기고 있었나봐요. 의사쌤 말 듣고 정신이 혼미해진 여주. 일단 캄다운 하고 카이한테 어떻게, 왜 그런건지 물음. 카이 여주가 본인 버릴까봐 다시 눈치 보기 시작함. 학대로 신고하려고 하는 간호사 제지하는 여주. 왜냐하면 신고해서 접수됐다 해도 방치했다는 증거가 없음. 신고했다 괜한 일에 카이 휘말릴까봐 걱정됨. 보니까 윤선배가 수인 보호자 등록도 다 취소하고 가서 사실 카이 오갈데 없는 신세. 여주 일단 정밀검사 마무리 해달라고 함. 다행히 건강한 카이. 아무 이상 없답니다. 여주 너무 혼란스럽지만 일단 동사무소가서 본인 이름으로 카이 보호자 등록하고 옴. 여주보다 큰 키의 남자애가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음. 카이는 이때 이 기억 때문에 여주가 사람인 본인의 모습을 별로 안좋아한다고 생각. 누가 싫대액!!!! 여주 카이를 집에 데려와서 차분하게 얘기함. 난 너가 필요하고 너무 좋아. 버린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한 적도 없어. 그러니까 카이야, 너무 불안해 하지마. 카이는 고개만 끄덕끄덕. 우리 잘 지내 보자.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 미안. 여기서 카이가 아니라고 충분하다고 말하는 거 들으면서 여주 카이는 목소리가 예쁘구나 이런 생각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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