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nadies-you and me song
여전히 20층에 멈춰서 있던 엘레베이터에 탑승한 경수는 억울한 심정에 또 다시 참았던 눈물이 나왔다. 시계를 갖다준 마당에 종인이 정말로 자신을 의심하면 어쩌나 하는 사실이 억울했다.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뺨을 맞은 건 아팠지만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종인은 그 상황에서 모르는 척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아니다, 모르는 척을 해도 따지고 보면 자신은 친구도 뭣도 아니었다. 눈물을 그치기엔 그 사실이 너무 명백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막차 안에서는 지친 사람들의 한숨 소리와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경수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그 소리를 위안으로 여기면서 휴대폰에 있던 종인의 연락처를 완전히 지워버렸다.'600만원'님의 연락처를 삭제하시겠습니까?이 한 문장이 경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Maid In Koreaw.아우디
"도경수 왜 지금 들어와.. 형 깼잖아.""나 오늘 야간 근무였어. 얼른 자..""눈이 왜 그래? 맞았어?""아냐."경수가 승수를 뒤로한 채 지친 몸을 이끌고 이부자리에 엎어졌다. 이불과 베개는 나무랄 데 없이 포근하고 부드러웠지만 경수의 마음만은 따갑고 아팠다.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숨을 쉬는 걸 의식하게 되고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 게 말로만 듣던 홧병인가 싶었다. 종인은 그 시계를 여자친구에게 다시 끼워줬을까? 사실은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무용지물인 의문과 기대는 경수의 밤잠을 방해했다."경수야. 자? 형이랑 오랜만이 같이 잘까?"평소엔 진상덩어리인 승수가 경수의 옆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경수의 눈치를 보니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경수는 형에게 시선도 안 두고 촉촉한 눈망울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팔로 경수를 툭 건들자 경수가 하지 말라는 듯이 돌아누웠다. 평소의 경수라면 오히려 다시 장난을 걸었을 것인데 예사롭지 않았다. 승수가 몸을 일으켜 돌아선 경수의 얼굴을 확인했다. 경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형제애가 불타올랐다."동생. 뭔 일이야. 말해봐.""형.""엉.""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가 나를 모르는 척했어.. 근데 그게 너무 슬퍼.""진짜 그거야?""응.... 화나서 잠도 안 와. 내가 화냈는데 연락도 안 와.""짜식. 뭐 그런 걸로. 역시 넌 예전부터 감수성이 풍부해."승수가 억지스러운 위로의 말대신 경수의 머리를 헝클고 등을 토닥였다. 이 순간만은 맛있는 거 잘 뺏어먹고 비꼬는 데 선수인 형이 고마웠다. 승수의 토닥거림에 귀를 기울이니 드디어 잠이 솔솔 왔다. 내일부턴 일 열심히 하고 씩씩한 도경수로 다시 태어날 거다."꼭 여기까지 따라와야겠어? 공부도 개뿔 안 하는 게..""야 누가 안 해? 해. 해. 한다고. 열람실 들어가선 범생이처럼 공부만 한다."막판 학점 관리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던 백현은 방학에도 대학 도서관에 출입하곤 했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주의인 찬열이 도서관에 따라온 건 순전히 백현 때문이었다. 방해될 걸 알고 처음엔 절대 안 된다고 말렸지만 박찬열을 막을 수 있는 건 자연재해 말고 없었다. 둘은 개방형 열람실에 자리를 잡았다. 찬열이 전공 서적도 아닌 처음 보는 영문 서적을 들고와 백현의 옆에 앉았다. 백현이 노트의 귀퉁이를 찢어 적었다.「공부할 책도 없어?」「왜 없어 여깄네」백현이 별 수 없다는 듯이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찬열은 고개를 백현 쪽으로 하고 책에 머리를 기댔다. 집중하는 변백현을 관찰하는 거였다. 하지만 인간의 특성상 백현의 시야는 옆쪽까지 훤히 미쳤고 찬열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많아 호통을 칠 수도 없었다. 억지로 다시 책을 붙잡고 늘어지는데 찬열의 손이 백현의 허벅지 위로 엉금엉금 올라왔다. 백현이 찬열에게 고개를 돌려 식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입모양은 손 떼라라고 말하고 있었다. 찬열이 턱짓으로 백현의 책을 가르켰다. 신경 그만 쓰고 공부나 하라는 뜻이었다. 나쁜 손은 점점 더 대담해져 허벅지를 천천히 주물렀다. 많이 해본 건지 제법 농염한 느낌이었다. 백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열람실에서 조금 떨어진 휴게실에선 마음 놓고 소리를 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야. 공부한다며.""오늘만 하지 말아봐. 날 두고 공부가 돼?""너가 가만히만 있으면 공부 아주 잘 돼.""난 너가 가만히 있으면 공부 더 안 되는데..""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 자리 바꿀래."백현의 협박이 먹힌건지 다시 열람실로 돌아가서 찬열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책을 보고 있나 했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숙면을 취하고 있는 거였다. 차라리 그 편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두 시간 동안 찬열은 깨지도 않고 잘 잤다. 졸린 눈으로 백현이 옆에 있나 없나 확인을 마친 찬열이 열람실 밖으로 백현을 끌고 나갔다."공부만 하면 머리 터져서 뒈져. 배 안 고프냐?""배고파야 공부가 잘 돼.""그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가자."캠퍼스는 여느때보다 한산했다. 아이스크림을 찾고 싶을 정도로 더운 날씨였지만 불어오는 산들바람 때문에 후덥지근함은 덜했다. 찬열은 백현의 손을 잡은 느낌이 왠지 새파란 하늘에 떠있는 뭉개구름을 잡은 느낌과 같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말도 없이 걷다 근처에 위치한 식당에 들어서서도 찬열은 백현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백현이 덥다고 투정을 하자 그제서야 손을 놓았다."그냥 밥이나 먹지 웬 스파게티야?""스파게티가 데이트 코스 필수 메뉴랬어.""누구 맘대로 데이트야."찬열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백현의 앞에 포크를 놓아주었다. 주로 여자 꼬시기에 동원됐던 습관적 매너가 백현에게 먹히길 바라면서 컵에 물도 따라주었다. 보통 감동을 먹기 마련인데 백현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파게티가 나와서도 포크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아까 읽은 거 이해가 안 돼서. 열역학 제 1법칙에 따르면 에너지의 창조나 파괴는 불..""야. 다물고 이거나 먹어."찬열이 떠먹여준-정확히 말하자면 처넣어준-스파게티 때문에 입 주위가 지저분해졌다. 백현이 식탁 밑에 가만히 있던 찬열의 정강이를 시원하게 차줬다. 찬열이 쳐다보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냅킨으로 입을 닦는 백현이었다."와.. 고딩 땐 너가 이렇게 폭력적인 애일 줄은 몰랐다.""니가 내 고딩 땔 어떻게 알아?""비밀인데. 너 그때도 혼자 살았냐?""등신. 미성년자가 어떻게 혼자 살아. 이모랑 같이 살았지. 지금은 이사 가셨지만.. 아 말 돌리지 말고 빨리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싫은데. 마저 먹어라."백현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찬열을 한 번 더 발로 찼다. 백현을 보고 반한 3월 2일의 이야기, 그날의 감동에 대한 고백은 오래 뒤로 미뤄둘 생각이었다. 장황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 느낌은 대화의 주제로 꺼내기엔 부담스러웠다. 찬열에겐 지금 앞에서 여전히 입가에 토마토 소스가 묻은 것도 모르고 입을 오물거리는 백현의 모습도 충분히 감동이었다. 찬열이 냅킨에 물을 묻혀 백현의 입가를 닦아주며 말했다."근데 너 오늘은 나 좋아하냐?""내일.""또 내일?"
모처럼 늦잠을 잘 수 있는 주말 오후 경수는 시끄러운 벨소리에 눈이 떠졌다. 종대의 전화였다."졸려.."- 그만 자. 엉아랑 영화 봐야지. 두 시까지 강남역 9번 출구로 안 나오면 이 영화표는 쓰레기가 된다. 빨리 준비 실시."아... 알겠어."전화가 뚝 끊겼다. 경수가 찌뿌둥한 몸을 겨우 일으켜 샤워를 하고 준비를 마쳤다. 옷장엔 여전히 뜯지 않은 쇼핑백이 처박혀 있었다. 종인의 생각이 났다. 돈만 많고 싸가지없는 김종인. 경수는 쇼핑백을 한 번 노려보고 옆에 있던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집어들었다. 서둘러 나선 집 앞엔 번호판이 없어도 알아볼 수 있는 페라리가 주차돼 있었다. 경수가 본 척도 안 하고 가던 길을 가자 차는 옆으로 따라붙었다. 경수가 걸음을 더 빨리 하면 차도 경수를 따라 속도를 빨리 했다. 아주 짜증 제대로인 거였다. 결국 경수가 멈춰서서 차창을 노려봤다. 삐까번쩍한 선팅 때문에 종인의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차라리 안 보이는 편이 나았다. 곧 창문이 내려갔다."도경수 씨.""누구세요? 제 이름은 어떻게 아세요?""일단 좀 타지."경수가 다시 돌아서서 걷자 종인이 차에서 내려 경수의 팔을 붙잡았다. 팔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경수를 억지로 잡아끌어 조수석에 앉히는 데까지 성공했다. 경수가 툴툴거리며 차 문을 열면 종인이 닫아버렸다. 결국 탈출을 포기한 경수는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종인을 열심히 노려봤다."어디 가는 길이었어?""반말하지 말라고요. 모르는 사람이잖아요~""어디 가는 길이셨습니까?""와 진짜..""이런 식으로 할 거야? 이런 윈윈 없다며.""먼저 모르는 척한 게 누군데?""내가 경솔했어. 누구 편든다고 나아질 상황 아니었잖아. 사과할게."경수는 종인의 무미건조한 사과에 더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대답을 안 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누나한텐 내가 시계 챙겼는데 까먹고 있었다고 했어. 그리고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친구 아니야.""뭔 상관이래."종인이 뒷좌석에 손을 뻗어 작은 쇼핑백을 집어 경수의 무릎 위에 올려줬다. 경수가 그것을 흘끔 보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종인이 직접 내용물을 꺼내줬다. 베이지색 가죽케이스 안에는 딱 봐도 값이 제법 나가보이는 메탈 시계가 있었다. 종인이 경수의 팔을 자신에게로 당겨 왼쪽 팔목에 시계를 채워주었다."뭐예요?""없어보이게 하고 다니니까 괜한 오해를 받는 거 아냐.""흥. 그쪽도 청소부 옷 입으면 없어보이는 건 똑같거든요. 그리고 뭐 이런 거 주면 좋아할 줄 알아요? 육백이나 입금시켜요."속으론 시계의 고급스러운 자태에 흐뭇해하고 있는 경수였지만 이 상황에서 굳이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경수는 갈등했다. 이 정도 선물이라면 용서해줘도 되지 않을까? 곧 시계가 가르키는 시간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1시 55분이었다."이 시계 맞는 거예요?""맞네. 55분.""빨리 강남역까지 달려요!""뭐야. 택시비 내.""빨리!!"종인의 페라리는 마하의 속도를 따라잡을 기세로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곧 교통 체증에 걸려 경수가 발을 동동 굴렀다. 두 시가 조금 넘어서 종대에게 전화가 왔다."종대야... 내가 제 시간에 나왔는데 차가 너무 막혀. 어떡하지? 영화 먼저 보고 있을래?"- 괜찮아. 세 시 영환데 늦을까봐 두 시까지 오라고 했어 임마. 천천히 와."헉. 얼른 갈게. 미안해."경수가 전화를 끊자마자 종인이 질문을 던졌다."생거진 줄 알았는데 팔자 좋네. 영화도 보고.""검소한 게 장점인 거지 생거지 아니야.""누구랑 보는 건데?""뭐 말하면 알아요?"수많은 차들 사이에 끼어 거북이처럼 힘도 못 쓰던 페라리가 겨우겨우 9번 출구에 도착했다. 보기 드문 차의 등장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경수는 문을 열고 나가기가 뻘쭘했지만 저만치에서 손부채질을 하며 기다리는 종대를 위해 종인에게 인사도 않고 차에서 내렸다. 종인이 그 뒷모습을 쫓아 종대에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인사하는 경수를 보고 말았다. 괜히 열이 받았다. 어찌됐든 종인도 약속이 있어서 출발해야 했다. 세훈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잠깐 경수의 집 앞에 들린 거였다. 오늘 세훈은 답지 않게 삼청동 카페로 종인을 불러냈다. 오늘 같은 날엔 좀 사는 아줌마들의 수다 장소로 딱인 삼청동이 내키진 않았지만 죽마고우의 호출 앞에서 어쩌겠는가.비교적 조용한 곳에 자리잡은 카페 앞엔 아직 주차된 차가 없어 다행이었다. 종인이 차를 주차하고 카페 안에 들어섰다. 손을 마주잡고 닭살을 떠는 커플, 누구라도 저절로 눈길이 갈 만큼 예쁜 여자 한 명 말고는 손님이 없었다. 세훈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종인이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찰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던 예쁜 여자가 종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옆에 놓아두었던 명품 클러치백을 챙겨들고 종인이 앉은 자리 앞에 앉았다. 귀에는 영롱한 진주귀거리를 하고 긴 생머리는 우아하게 반묶음이 돼 있었다. 쌍커풀이 없는 큰 눈은 보편적인 남자들의 이상형과 일치했다. 그녀가 종인에게 손을 내밀었다."이유진이에요."유진은 악수를 받아주지 않는 종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뒀다. 종인은 세훈에게 또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유진이 종업원을 불러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먼저 입을 뗀 것도 유진이었다."만나기가 쉽지 않네요?""아버지가 보냈어요?""아버님이 보낸 게 아니라 제가 부탁 드린 거예요. 만나주시지도 않구 숙녀한테 너무 무례하세요."아메리카노가 나오고 유진이 찻잔을 들어 커피향을 음미했다. 무척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태연하게 자리를 즐기는 유진과 다르게 종인은 똥이라도 한 움쿰 씹은 표정을 하고 자신을 여전히 어린 애 취급하는 아버지 생각에 분해 죽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지금껏 반강제적인 아버지의 요구에 맞추며 살아왔지만 성년인 종인에게 만나야 할 사람까지 정해주는 건 절대로 피하고 싶은 속박과 같았다. 유진이 종인의 눈을 직시하며 살며시 눈웃음을 쳤다."대답도 않으시는 거예요? 이것도 무례해요.""한 번만 더 무례할까요. 그만 일어나시죠. 커피 좋아하는 거 같은데 마저 먹고 가시든지.""종인 씨 정말 너무하세요. 우리 둘이 약혼식만 올려도 주주들한텐 엄청난 홍보라구요. 약혼. 결혼. 합병이란 말보다 더 결속력 있구 얼마나 좋아요? 어차피 지금 아버님 회사 자금 부족한 건 주식시장 개미들도 다 알걸요? 거품 빠지는 건 시간 문제예요. 그리고, 난 다른 남자들이 못 만나서 안달인 여자예요. 굳이 질색할 필요까진 없지 않나요? 몇 번만 만나봐요. 네?""다행히 머리 빈 여자는 아니네. 그럼 내가 하는 말 똑똑히 알아듣죠? 당신이 어떻게 생겼든, 이름이 뭐든, 어느 집 자제든 죽어도 약혼 같은 건 안 합니다.""다음 토요일에 코엑스 컨벤션 센터에서 인수합병 간담회가 있어요. 끝난 뒤엔 만찬도 있구요. 같이 가서 부모님들 뵈야죠. 다른 인사분들도 뵙구.""부디 혼자 가서 보세요.""아이 참. 나중에 종인 씨한테 튕기는 법 한 수 배울래요.""더 말하면 입 아플 거 같으니까 이만 저 먼저 일어날게요, 그럼." "오늘은 종인 씨 꼬시기 완전히 실패야. 피부 관리나 더 받을 걸 그랬어요. 커피도 다 식어서 맛없구, 혼자 남겨지면 창피니까 먼저 일어날게요. 다음에 또 봐요!"조목조목 종인에게 잘도 따지고 늘어지던 유진이 자리를 떴다. 종인의 눈에도 그녀는 집안 좋고, 똑똑하고, 청순하고, 인내심까지 좋아 한 마디로 완벽해 보였다. 명찰 떼고 클럽에서 만났다면 하룻밤을 같이 보냈을지도 몰랐겠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끝까지 제 고집을 부리는 아버지가 못마땅했다. 세훈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회사만 알고 이익만 생각하는 아버지. 물론 한 기업의 수장으로써 당연히 가져야 할 태도였지만 그걸 자신에게까지 강요하는 건 싫었다. 한창 사춘기였던 중학생 때, 종인의 어머니는 늦은 새벽 아들의 이불을 덮어주며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아들은 꼭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해야 한다. 상처 주지 말고 항상 아껴줘야 해. 엄만 우리 종인이가 꼭 그런 멋진 남자로 자랐으면 좋겠어. 어머니의 말에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자는 척을 해야 했다. 어머니의 말들은 끝내 그런 남자를 못 만나 당부하는 애달픈 하소연이었다. 어머니의 말을 따라서라도 약혼은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 호텔로 돌아가 이른 저녁부터 혼자 술을 진탕 마셨다. 분노가 사그라들 때까지 마시려고 했지만 알콜은 오히려 부추길 뿐 종인의 진정을 돕지 않았다. 양주 반 병을 비우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종인이 비틀대며 침대 위로 엎어졌다. 겨우 잠을 청하려는데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발신인은 공교롭게도 아버지였다.- 나다. 전화 받는 걸 보니 벌써 들어갔나보구나. 유진이는 어땠어."아버진 제가 우스우시죠? 제가 우스워서 죽겠어요?"- 쓸 데 없는 말할 거라면 끊는다."아버지가 한 번이라도 나랑 어머니 입장 생각하신 적 있어요?"- 네 녀석 취했구나."내가 당신 뜻 못 꺾을 것 같죠. 두고 보세요."종인의 아버지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화가 날 대로 난 종인이 휴대전화를 저만치 던져버렸다.
다시 돌아온 평일에 경수는 종대와 함께 민규에게 이번 영화가 어땠는지 평가를 늘어놓았다. 경수는 자긴 별로였다는 종대의 말에 발끈하며 열변을 펼치고 있었다."아냐아냐. 스케일은 작지만 그래도 심도 깊은 영화였어.""야 근데 너 저 사람이랑 원수 졌냐? 아까부터 계속 노려본다."민규가 가리킨 쪽을 돌아서자 종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경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종대가 경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뭐야.. 시계 때문에 저래?""아니!! 나 얘기 좀 하고 올게."경수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종인의 앞에 섰다. 종인이 경수의 손에 제법 큰 쇼핑백 쥐어줬다. 또 선물 공세로 화해를 요청하는 건가 했더니 여전히 싸가지없는 명령조로 경수에게 말했다."토요일에 시간 비지. 이거 입고 딱 정오에 너네 집 앞에서 만나. 이번만 도와주면 남은 돈 입금 약속할게.""이게 뭔데요?""집에 가서 보든지."경수는 종인의 말을 어기고 의무실에 돌아가자마자 겉포장을 뜯었다. 내용물의 정체는 검정색 나비 넥타이와 수트였다. 도대체 이걸 입혀서 어딜 데려가겠다는 건지 궁금했지만 알아낼 길은 없었다. 문제는 눈대중으로만 봐도 수트가 몸에 안 맞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실제로 집에 돌아가서도 경수는 거울을 보며 짧은 몸뚱아리로 인한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바지단이 남아도 한참 남았다. 늦은 저녁 수선집에 옷을 맡기면서 종인이 일부러 큰 사이즈를 고른 건 아니었을까 의심했다.
"야. 넌 주말마다 어딜 그렇게 가?""형도 여자친구 좀 만나고 그래. 결혼은 해야지.""와. 저 차 또 왔네. 설마, 너 여자친구 생겼어? 저거 니 여자친구 차야?"
그 말에 경수가 시계를 확인하고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었다. 수선을 마쳤지만 여전히 헐렁한 수트는 경수에게 완벽하게 어울린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승수가 미심쩍은 표정을 하고 경수를 훑었다. 동생이 캐주얼에서 시상식 패션을 즐기는 이상한 취향으로 전향했다면 말리고 싶었다.
"형, 저번에 면접 본다고 엄마가 사준 구두 어딨어?""그거? 신발장 구석에 있겠지. 너 근데 옷이 왜 그래?""몰라도 돼~"
신발장에서 겨우 먼지 낀 구두를 찾아냈다. 처음에 살 땐 광택도 나고 멋있었는데 역시 방치는 물건을 볼품없게 한다. 신발까지 다 갈아신은 경수가 현관에 있는 전신거울을 한 번 보고 나비 넥타이를 매만졌다. 거울은 너 영화배우 하세요라고 말해줬지만 순전히 경수 혼자의 생각이었다. 종인은 경수가 차에 타자마자 미용실을 향해 차를 몰았다. 이 더운 날씨에 정장조끼에 붉은 색 넥타이까지 갖춘 클래식수트를 입고 있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니 머리. 어떻게 좀 해야겠어.""내 머리요?"
경수가 고개를 오른쪽 한 번, 왼쪽 한 번 돌리며 사이드미러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말린 뒤로 빗기만 한 내츄럴한 머리가 옷과 안 어울리긴 했다. 손으로 머리를 띄워보고 넘겨보고 별 짓을 다 해도 머리는 그대로였다. 경수가 다시 머리를 흐트렸다.
"그만 만져. 떡진 머리 만지기 불쾌할 미용사 생각도 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