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the voice - altogether alone
경수는 톨게이트에 닿을 때까지 국토 대장정을 하는 줄 알았다. 히치하이킹이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경수의 무한한 상상력은 인신매매단의 봉고차에 탑승하는 장면까지 생각해냈다. 땡볕 아래에서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고, 땀은 쉬지도 않고 뻘뻘 흘렀다. 어느덧 해는 벌써 저만치 졌다. 이를 박박 갈았지만 종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 속도라면 내일 아침이나 돼야 집에 도착할 것 같았다. 결국 찬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대로 말할 여력도 없던 경수가 찬열의 이름만 연신 웅얼댔다.
"찬.."- 뭐?"찬열아.."- 뭐냐?"나 구해줘..... 여기는..."- 아 왜 나한테 장난질이야."내 말을 들어봐... 여기는.."- 끊는다."안 돼!! 여기는 동서울 톨게이트라고!! 데리러 오라고!!!!"
Maid In Korea
w. 아우디
경수는 찬열을 기다리면서 근처 풀밭에 주저앉아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봤다. 밤공기에 기분이 좋기는 개뿔 풀벌레들이 팔뚝을 물어뜯는 기분이었고 식은땀은 몸에 한기를 돌게 했다. 종인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사실 돌아오는 것까진 안 바랬다. 어떻게 사람을 버려두고 전화 한 통 없을 수가 있는가? 경수 주위의 애꿎은 풀들만 쥐어뜯겼다. 이 순간 엄마가 간절히 보고 싶었다. 경수가 자리를 잡고 앉은 지 1시간이 지났을까, 요금소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경수에게 다가왔다.
"저기, 여기서 노숙하시면 안 돼요.""노숙 아니에요. 친구 기다려요.""친구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으셨나봐요. 안쓰러워서 어쩌나... 보호자분 어디 계세요?""아 저 정상인이거든요? 마침 저기 왔네."
여자의 말에 경수가 발끈했지만 경수의 몰골은 충분히 오해를 살 만했다. 경수가 보란듯이 엉덩이를 탁탁 털고 찬열의 차쪽으로 다가갔다. 찬열도 경수의 좁은 어깨와 키를 알아채지 못했다면 경수를 지나칠 뻔 했다. 헤드라이트로 인해 비춰진 경수의 얼굴엔 구정물로 세수한 것처럼 거뭇거뭇한 때가 껴있었다. 찬열은 경수가 납치 도중에 탈출이라도 한 줄 알았다. 경수는 맥아리 없이 차문을 열어 조수석에 탑승했다. 차 안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시원했다. 지상낙원이 있다면 여기일까 싶었다. 찬열이 성급히 경수의 턱을 잡고 제쪽으로 돌려 얼굴 상태를 살폈다. 눈에 초점을 잃은 게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묻지 마. 집에 보내줘...""경찰에 신고할까? 씨발. 말해라. 내가 있는데 뭐가 무서워. 말해.""나중에, 나중에. 나 진짜 힘들어서 그래."
경수가 의자를 뒤로 젖히고 발라당 누웠다. 찬열은 경수의 행동에 오히려 궁금증이 증폭됐지만 군말 없이 경수를 바래다 주었다.
삼 일이었다. 삼 일째 경수 아닌 다른 청소부 아줌마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줌마는 경수보다 청소도 신속하게 하고, 티끌 한 점도 없이 깔끔한 청소 신공을 갖고 계셨지만 그 사실들은 종인을 기쁘게 하지 못했다. 경수에겐 연락도 없었다. 원성의 문자 메세지라도 한 통 올 줄 알았는데 그날 그렇게 경수를 두고 온 뒤론 아무 연락이 없었다. 처음엔 경수를 정말 버릴 마음까진 아니었으나 가운데 가드레일이 떡하니 자리잡은 고속도로에서 유턴을 할 수 없는 노릇이라 그냥 갔다. 경수는 알아서 택시를 타고 잘 갔을 것이다. 혹시 일을 그만둔 걸까? 다음 날이 되서야 전화를 걸어봤지만 무미건조한 신호음만 흐를 뿐 경수는 받지 않았다. 온갖 신경이 쓰였다. 종인은 오랜만에 만난 세훈을 마주하면서도 자꾸만 휴대폰에 눈이 갔다.
"오세훈 너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지.""미안하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너네 아버지가 좀 무섭냐.. 솔직히 나만큼 너랑 친한 애도 없잖아? 그럼 백퍼센트 내가 너 있는 곳 안다는 건데 어떻게 숨겨.""그렇지..""듣고 있긴 한 거야? 뭐 약속 있어? 왜 자꾸 휴대폰을 만지작거려.""아니야. 아무튼 넌 나한테 그럼 안 되는 거였어.""이거 안 들었네. 뭐냐? 너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게."
김종인을 안절부절 못하게 만든 장본인 도경수는 집에서 악성 감기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자고 눈을 떠보니 열이 펄펄 끓고 목은 퉁퉁 부은 상태였다. 매니저는 삼 일이 지나도록 경수에게 연락이 없자 가차없이 그만 나오라는 문자 한 통으로 경수를 해고했다. 경수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변명할 힘도 없었다. 종일 온몸에 이불을 꽁꽁 감싸고 천장만 바라봤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처지가 불쌍했다. 간간히 원망스러운 종인의 얼굴이 떠오르면 아주 볼따구를 쥐어뜯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몸뚱아리론 밥 한 수저도 제대로 못 들었다. 누가 밥을 떠먹여줬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경수가 소원을 성취하기에는 집에 승수와 엄마 둘 중 아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경수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한참 얕은 잠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이마를 짚는 감촉에 다시 잠이 깼다. 승수 형이 열을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경수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혀엉. 물 좀 가져다줘.."
순간 경수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승수와 엄마는 오늘 외가댁에 가서 자고 온다고 했다. 그럼 지금 가위에 눌리는 걸까? 피 뚝뚝 흘리는 새하얀 귀신이 머리 위에 있을 생각에 눈을 뜨기가 꺼려졌다. 몇 초를 몇 분처럼 눈을 뜰까 말까 고민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에 뿌리기 전에 일어나서 마셔."
싸가지의 음성이었다. 경수는 자신이 너무 아픈 나머지 정말 정신이 나간 줄 알았다. 헛웃음을 지으며 눈을 떴는데 정말 옆에서 종인이 물컵을 들고 있었다.
"뭐야!!!! 우리집 어떻게 알고 들어왔어요?""우편함 뒤졌어.""...집 문은 어떻게 열었어요?""아주 들어오라는 듯이 활짝 열려져 있던데.""어찌됐든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요."
경수가 종인을 밀어내려 몸을 일으켰지만 힘이 쭉 빠져버려 반도 못 일으키고 맥없이 드러누웠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짜증이 머리 끝까지 찼다. 화풀이를 하기 위해 발로 이불을 뻥 찼다. 하지만 곧 몸에 오한이 들어 섣부른 행동을 후회했다.
"저기요.. 이불 좀 끌어올려 주세요..""물 마시면."
경수가 겨우 고개를 들어 종인이 주는 물을 냉큼 받아먹었다. 물을 다 마시고 벽쪽으로 돌아누웠다. 지금 상태에서 경수가 종인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거부 표시였다.
"이제 가요.""싫어.""대체 왜 온 거예요?""그냥 죽었나 살았나 궁금했어.""진짜 말하는 꼬라지 하곤...""언제 나을 예정이야?""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어요?""청소 아줌마가 마음에 안 들어."
경수는 종인이 일부러 자신을 약올리는 거라 생각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찬열에게 싸움의 기술을 배워놔야 할 것 같다. 평소처럼 소리를 빽빽 지르고 싶었지만 오늘만은 힘없는 목소리가 경수의 심정을 대변했다.
"나 잘렸단 말이에요... 그쪽이 책임지세요.""내가 왜.""그날 나 두고 그냥 가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어떻게 사람이...""그래서 책임지러 왔잖아.""책임 좋아하시네..""뭐라는 거야.""아.. 진짜.. 사람이 돼서.."
경수는 다시 몰려오는 약기운에 자기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도 몰랐다. 종인의 말소리는 흐릿한 자장가처럼 흩어졌다. 몸이 바닥에 녹아내릴 듯이 노곤했다. 경수가 잠든 동안 종인은 집 안을 둘러봤다. 정리정돈을 잘해놔 인테리어는 깔끔했지만 종인의 눈엔 후진 건 후진 거였다. 집 안엔 에어컨 한 대 없어 후덥지근한 열기가 숨도 제대로 못 쉬게 했다. 방 안에 누워있는 경수가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종인이 선심을 쓴다는 듯이 주방에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사실 요리란 걸 제대로 해본 적은 없었지만 죽이 밥을 끓인 것이란 상식 정도는 있었다. 첫 번째 시도엔 냄비를 태워먹어 탄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물을 넣었다 뺐다, 소금을 넣고 또 넣고를 몇 번이나 반복한 뒤에야 모양은 그대로지만 맛이 염려되는 종인의 처녀작 죽이 완성됐다. 경수를 흔들어 깨웠다.
"대체 이게 무슨 냄새야? 불났어요?""이거 먹어."
종인이 다짜고짜 경수의 입에 죽을 쑤셔넣어 줬다. 일어나자마자 봉변을 당한 셈이었다. 죽의 맛은 마치 바닷물의 맛과 흡사했다. 경수는 삼킬 엄두도 못 내고 켁켁대며 바로 죽을 뱉었다.
"물!!""왜 성의를 무시하지? 여기.""아, 아 진짜 맛없어. 이거 먹으라고 만든 거예요? 빨리 나 좀 일으켜세워봐요."
냄새만 맡아도 주방 상황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종인이 일으켜준 덕에 간신히 일어난 경수가 아픈 몸을 질질 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바닥이 새까맣게 탄 냄비 두 개가 경수를 반겼다. 철수세미를 동원해서 박박 긁어내야 겨우 제 모습을 찾는다는 탄 냄비. 엄마한테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이리 와봐요."
경수가 종인의 양손에 고무장갑을 끼워주고 오른손엔 은색 철수세미를 쥐어줬다. 그리곤 냄비를 닦는 시늉을 했다.
"뭐 어쩌라는 거야.""설거지 안 해봤어요? 이렇게 이렇게 하라구요.""내가 왜 이걸 해.""안 하면 엄마한테 혼나요. 그리고 나 아픈데..?"
결국 종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설거지를 해야 했다. 경수는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에 열중하는 종인의 모습이 통쾌했는지 식탁 의자에 앉아서 다리까지 흔들며 재촉했다.
"빨리요, 빨리! 박박 긁어요!""좋아?""좋은데~ 재밌어 죽겠는데~"
종인이 싱크대 한가득 담긴 세제거품을 손에 담아 얄밉게 구는 경수에게 튀겼다. 거품이 눈에 직빵으로 들어갔다. 발동 걸린 경수도 손에 한가득 거품을 담아 종인에게 투척했다. 남들이 봤다면 덜떨어진 두 사람의 몸부림 정도로 여겼을 거품 전쟁이 벌어졌다. 경수가 거품이 들어간 눈을 부비면서 종인을 잡으려고 악을 썼다. 종인은 좁은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용케도 경수를 따돌렸다. 둘이 한바탕 난리를 친 뒤 집 안은 온통 거품 투성이였다. 아픈 것도 까맣게 잊은 경수가 종인의 손을 저지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힘들어. 졌어. 졌어요. 이제 그마안."
종인도 함께 주저앉아 가쁜 숨을 골랐다. 스물 둘이나 먹어서 유치하게 물장난을 하다니 자신을 이해하려 해도 참 별꼴이었다.
"아프다면서 순 엄살이었지?""아니거든요?""몇 시야, 지금? 가봐야겠어. 문 좀 잠가. 집이 후져서 도둑도 안 들어오겠지만.""뭐요? 후져? 야!!"
종인이 벗어던진 고무장갑이 경수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경수의 윽박과 함께 현관문은 쾅 닫혔다. 장난을 치느라 미처 끝내지 못한 냄비 설거지는 경수의 몫으로 남았다.
습관이 베어 출근 시간에 맞춰 눈을 뜬 경수는 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모두가 분주한 평일 아침 경수는 한낱 실직자였다. 개강까진 아직 한 달이나 남아있었다. 감기가 다 나아도 어차피 방콕할 바엔 건강 따윈 무의미한 것이었다. 엉금엉금 기어 티비를 틀러 가는데 경수의 휴대폰이 반갑게 울렸다.
"여보세요."- 경수 씨. 나 호텔 매니접니다. 내일부터 다시 일 나오세요."네? 저 나오지 말라면서요."- 인사과에서 전화가 왔어요. 청소부를 복직시키긴 나도 처음이네. 대신 앞으로 아줌마들 있는 곳 말고 호텔 수영장 의무실로 출근해요. 경수 씨가 연속으로 빵꾸낸 게 걸려서 방 청소엔 못 꽂아줘."진짜요..? 그럼 저 구조요원 하는 거예요?"- 그거 자격증 없으면 못하는 거 몰라요? 수영장 청소하는 거지. 끊어요.
수영장 청소든 구조요원이든 복직이었다. 부당한 처우를 받는 게 당연지사라고 여겨지던 비정규직 알바생이 복직을 하다니, 자신은 알고 보면 행운의 사나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집에 막 들어온 승수와 경수의 엄마는 경수가 바닥에 몸을 구르면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고 발작을 일으킨 줄 알았다.
"아들! 아들 왜 이래!!""엄마. 형. 우리 로또 살까?""엄마. 무시하고 들어가서 쉬세요. 얘 가끔 미치는 거 아시잖아요."
비꼬는 승수의 말에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경수는 이게 다 신의 뜻인 줄 알았지만 종인은 경수의 복직을 위해 세훈을 협박해야 했다.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저번에 카지노에서 3000만원이나 날린 걸 너희 아버지에게 꼰지르겠다, 네가 끌고 나갔다가 박살난 아버지 수입차의 행방이 어떻게 된 건지 밝혀버리겠다 등등 협박할 거리는 다양했다.
"내 부탁 들어줄 거지?"- 야, 씨. 호텔이 아버지 꺼지 내 꺼냐?"그럼 어쩔 수 없이 말해야겠네. 세훈이가 아버님 차를 폐차장에 갖다 버렸습니다. 유감입니다."- 아. 미쳤냐? 걔가 누군데 그래? 청소부 친구라도 만들었어?"들어주는 걸로 알고 끊는다."
몇 시간 뒤 세훈에게 부탁대로 했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종인은 얼른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음 날엔 종인의 기대와 달리 경수가 오지 않고 어제와 같은 청소 아줌마가 왔다. 오늘까지 이 아주머니를 뵌 지 오 일째였다. 종인은 염치를 무릅쓰고 아주머니께 말을 걸었다.
"혹시 여기서 일하던 남자애 아십니까?""남자애? 아아, 경수 총각!""아세요?""알지. 오늘 아침에도 봤는디? 아침서부턴 수영장 청소해야 된다구 징징대믄서 저짝으루 갔어. 뭐 볼 일 있는겨?""아뇨. 그냥 요즘 안 보이길래."
재출근. 윤이 반짝반짝 나는 호텔 수영장 시설에 경수는 한숨부터 나왔다. 이 넓은 델 어떻게 청소하냔 말이다. 곧 개장하면 사람까지 바글거릴 게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의무실엔 경수 또래의 남자가 몇 있었다. 그중 수영복을 빼입고 열심히 준비운동을 하던 한 사람은 웬만한 여자라면 다 반할 정도로 훈남이었다. 몸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경수가 말도 못 붙이고 멀거니 서있자 남자가 다가와 경수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 새로온 거야? 원래 있던 아저씨 잘렸나보네.""네...""호구 조사 좀 하자. 이름? 몇 살?""도경수요! 스물 셋이요.""동갑이니까 말 놔. 김종대. 나 여기 라이프가드야. 딱 보면 알겠지. 남자가 봐도 졸라 반하겠지?"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김종대라고 소개한 남자는 유머러스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청소 생각에 절망적이었던 경수는 종대의 농담에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곧 수영모를 쓴 체격 좋은 남자가 둘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김종대 너 오늘만 오전 타임 나랑 바꿔주면 안 되냐? 안전 교육인가 뭐시긴가 받으래. 어? 이 귀여운 건 뭐야? 있는 줄도 몰랐네.""귀엽지. 키도 대걸레만한 게 여기 청소로 왔댄다. 일하다 쓰러지면 형들이 구해줘야겠네."
종대가 웃으며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싸가지와 마주해야 하는 방 청소와 달리 이런 좋은 분위기 속에선 일이 잘 될 것 같았다. 차라리 수영장 청소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욕 만땅이었다. 하지만 노동의 현실은 가혹한 현실이었다. 엄청나게 큰 사이즈의 대걸레가 벽에 비치돼 있는 걸 보고 저걸로 수영장을 다 휩쓸고 다닌다고 해서 얼마나 빨리 청소를 마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물이 다 빠진 수영장 바닥을 솔로 박박 닦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다. 수영장 청소가 더 낫다는 말은 취소다. 풀에 무거운 호스 열댓개를 질질 끌어서 집어넣고 나서야 좀 쉴 수 있었다. 개장 시간이 돼서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여름에 특히 인기 있는 호텔 야외 수영장엔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 많이 보였다. 수영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온 종대는 경수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오늘 수질에 대한 평가를 늘어놓았다.
"오늘은 물이 안 좋아. 몸매는 굿인데 얼굴이 테러블 호러블이야.""여기서 일하면 번호 얼마나 따여?""질문이 너무 어렵잖아. 너무 많아서 못 센다.""부럽다..""이야. 저기 저 새끼 뭐 흑인이냐? 존나 대물이다."
종대가 가르킨 쪽엔 선글라스를 끼고 삼각 수영복을 입은 한 남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수영복 위에 자리한 치골근은 조각상의 그것을 빼다박은 것처럼 예술적이었다. 남자는 수영장 사이드에 위치한 선베드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쬐는 태양이 그의 구릿빛 피부를 더 빛나게 했다. 경수는 종대와 그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자신이 왜 지금껏 여자친구를 못 사귄 건지 알 것도 같았다.
"근데 저 새낀 자리 선택을 잘못했어. 웬 호박 같은 여자 옆에 눕다니.""저게 호박이야? 저 정도면 예쁜데?""경수야. 넌 눈이 너무 낮다. 야, 야 좋은 생각 났어. 너가 저 여자 번호 따오면 오늘 술 살게. 명목은 첫 출근 축하 술자리라 치고. 솔직히 저렇게 생겨서 번호 안 주면 죄인 아니냐? 이건 그냥 거저야.""헐. 진짜?""남자가 수영장에 왔으면 비키니를 위해 칼을 뽑아야 하는 거다?"
경수는 연애 세포가 다 죽었는지 여자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술을 사준다는 종대의 말에 솔깃했다. 종대는 계속해서 '사나이라면 한 번 쯤은'을 내세우며 경수를 구워삶았다. 결심을 내린 경수가 머리를 대략 열 번 정도 정돈하고 가까스로 선베드쪽으로 다가갔다. 사나이로 태어나 가진 용기를 쥐어짜 누워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죄송한데 번호 좀..""어머, 저요?"
여자는 번호를 따인 게 처음이었는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경수를 바라봤다. 경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핑크빛 수줍은 입술이 공일공을 외치며 다음 번호를 읊으려는 찰나, 옆에 누워있던 미스터 대물이 선글라스를 내리고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오늘 내가 찜한 여성분인데 그냥 가지."
오 마이 갓. 선글라스를 벗은 남자의 정체는 싸가지였다.
찬열은 늦은 밤 담배를 사러 동네 편의점에 들렸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백현을 잊은 것 같았으나 편의점에 오니 다시 백현이 생각났다. 이 장소, 이 시간에 백현과 입을 맞춘 뒤로 둘은 연락을 하지 않았다. 몇 일간 일어난 일은 효진의 연락을 모조리 씹고 칩거 중이던 찬열이 결국 뻥 차였다는 일밖엔 없었다. 아무런 소통이 안 되는 찬열과 백현. 모든 게 고등학생 때처럼 제자리였다. 찬열이 착잡함에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백현이 가게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생수가 떨어져 물을 사가려던 참이었다. 당황한 둘은 눈을 마주치고 얼어버렸다. 백현이 다시 고개를 돌려 들어가려고 하자 찬열이 백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얘기 좀 해.""싫어.""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물 사올 때까지 기다려."
곧 검은봉다리를 들고 나온 백현이 껄렁한 자세로 편의점 의자에 앉았다. 저번에 사단이 났던 자리에 다시 앉으니 기분이 묘했다. 찬열이 다시 키스를 하려 들면 물통으로 머리를 내려칠 심산이었다. 찬열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맨정신에 들어도 될 것 같냐?""말해.""솔직히 난 좋았어.""뭐가?""그때 한 거. 아무래도 너 좋아하는 거 같다."
백현은 찬열이 하는 말에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싶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얘기를 경청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너 좋아해서 기분 엿같으면 지금 쌩까자.""싫은데? 그럼 이제부터 어쩌게? 일단 지금까지 나 괴롭힌 거 미안하다고 사과해.""싫어.""그럼 나도 너 싫어. 쌩깔래.""미안해서 뒤지겠다. 무릎 꿇을까?""비꼬지 말고 제대로 해.""미안해. 아, 이젠 쪽팔려 뒤지겠네."
백현은 키스든 뭐든 별 감정이 안 들었지만 분명한 건 찬열이 자신에게 쩔쩔 매는 게 재밌다는 점이었다. 이 쪽팔림을 해소할 길 없던 찬열이 담배 한 대를 다시 꺼내 물었다. 백현이 찬열의 입에서 뿜어지는 매운 담배 연기에 기침을 했다.
"담배 좀 꺼라. 비매너야.""아, 너 담배 싫어하냐?""당연히 싫어."
평소에 효진이 그렇게 끊으라고 잔소리를 해도 절대 끊을 수 없던 담배인데 백현의 한 마디에 처음으로 금연 욕구가 샘솟았다. 백현도 과에서 소문난 골초 찬열이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내던지는 걸 보고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진짜 내가 좋아?""어, 아무리 생각해도.""좋으면 앞으로 나한테 잘해.""야 근데.. 키스 한 번만 더 하면 안 되냐?"
백현이 봉지에서 꺼낸 물통으로 찬열의 머리를 강타함으로써 방금 전 구입한 생수의 용도가 하나 더 늘었다. 정신 가출한 박찬열 구타하기용.
***
오타나 이상한점 발견되면 꼭 제보해주세요 ^.^♡
저번에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분한분 꼭 기억할게요
드디어 금요일이에요 독자님들 모두 남은 금요일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