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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쨍한 아침, 빨간 카네이션으로 물든 꽃다발. 그리고 찡그러진 얼굴의 여인. 


 

"수녀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자기 연민이 싫다. 세상에 피붙이 하나 없는 상황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안 그래도 내 편 하나 없는 이 세상에 굳이 스스로를 불쌍한 놈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불쌍할 거면 조용히 불쌍한 게 낫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면 완전 이득이고. 굳이 얼굴에 온갖 그림자 다 드리우고 불행을 광고하는 건 이득될 게 하등 없다. 그래서 나는 겉으로 봤을 때는 고아인걸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로 밝다. 활기차다 못해 정신이 없다. 

"쓸데없는 사고나 치지 말아라, 이 놈아." 

그래도 내게는 가을보다 더 쓸쓸한 5월이다. 거짓말 할 필요도 없으니까 솔직히 말하는데, 엄마 얼굴도 모르는 내가 카네이션사는 것도 돈 낭비같다. 그래도 은혜는 안다고, 날 낳고 버린 친엄마보다야 훨씬 더 엄마같은 수녀님께 이 정도 감사 인사는 해야 도리인 것을. 


 

"수녀님, 사랑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는 당신의 119, 112, 111." 

"112랑 111은 뭐야? 나 간첩이라고 신고한다는 거야?" 

"수녀님~ 귀여운 장난은 패스~! 싸랑해요옹~" 


 

불쌍한 아이들의 유일한 장점은 이거다. 철이 빨리 든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엄마가 나를 이 곳에 두고 전력질주를 하며 달려갔던 던 뒷 모습만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엄마를 더럽게 미워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분노했다. 슬퍼했다. 그 후 몇 박 며칠을 잠도 못 자고 끅끅대며 울어댔다. 그러나 그러한 고아원 통과의례를 지나자 내가 한 일은 현실 직시였다. 내게 닥친 이 미칠듯한 고독감과 불안함, 그리고 외로움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해결책을 찾는 데 까지 도달했다. 바로 결혼을 하는 것이다. 내 가정을 꾸리고, 적당히 살 정도만 돈을 벌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이 지옥같은 외로움의 탈출구를 발견하니 나는 캔디마냥 씩씩해질 수 있었다. 

6년이나 사귀었던 내 여자친구 희아는 나를 더 씩씩하게 만드는 존재다. 아니, 그보다 더한 존재다. 그녀가 있어야 내 인생이 완성될 수 있다. 그래서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여겨줄 수 밖에 없는 애다. 나는 희아가 나와 달리 아주 사랑 받고 자란 집의 딸이어도 열등감같은 거 느끼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나의 고질적인 외로움에 공감해줄 수 없다는 것이 참 안타까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게 좋다. 우리는 서로의 결핍을 알고, 그 고독한 외로움을 알고, 텅 빈 만큼 많이 채워넣어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다. 서로에게 그렇다. 


 

"희아는 잘 지내?" 

"잘 지내죠. 종종 보시잖아요. 직접 물어보시지 맨~날 나한테만 물어봐." 

"일 년에 두어번 보는게 뭘 종종이야. 그리고 넌, 이런 카네이션보다는 초꼬렛 같은 게 더 환영받는 거 모르냐? 다 큰 놈이 이렇게 센스가 없어서는." 

"수녀님, 꽃파시는 분들도 먹고는 살아야죠. 됐고, 전 이제 학교 갑니다." 

"희아 오늘 만나면 연락 하나 해 달라 해라." 

"네!" 


 

희아는 4년 전에 입양을 가서 양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전학을 가 버렸지만, 경기도와 서울이니 못 만날 정도는 아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매번 얼굴을 본다. 학교가 끝나야 보는데, 오늘따라 시간이 길다. 


 

학교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를 타니 드문드문 낮 익은 놈들이 보인다. 초등학교때부터 지긋지긋하게 보는 놈들이다. 

"박지민 돼지새꺄 하이." 

김남준이다. 

"돼지는 누가 돼지? 어제 라면 처 먹고 잤냐? 얼굴 왜이래?" 

"이 새끼 얼굴 늘 이런데 뭘. 그러는 너는 왜 입에 귀에 걸리셨어요? 희아 만나냐?" 

민윤기다. 

"아 그러냐? 참나, 아무리 잘생겨도 표정을 숨길 수는 없구만. 어? 이게 다른 영역인가봐?" 

"아오 또 지랄 났네, 지랄 났어." 

김남준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말도 섞기 싫다는 듯이 폰을 꺼내다 인스타 몇 번 휘적거리더니 문득 희아 사진을 본다. 


 

"희아는 요새 통 안뵈네? 사진 보면 엄청 잘 사는 것 같긴 한데. 나 안 보고 싶대? 좀 오라해봐." 

"널 왜 보고 싶어하냐? 나 정되는 되야 우리 희아가 보고 싶어하지." 

"뭐라는거야 또라이야. 희아 요즘 아주 소홀해, 아주 그냥. 지 남친만 챙기고. 여우같이. 동창 사랑 정신이 없어." 

"원래 토끼같은 자식 여우같은 마누라란 말이 있잖냐~ 네가 뭐 연애를 해 봤어야 알지~" 


 

주먹다툼 몇 번 오가다 문득 희아가 요즘 들어 통 이 쪽으로 온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는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왔었는데. 지금은 정말 통 안오는 것 같긴 하다. 

뭐 사정이 있었겠지, 고등학생이니까 공부도 해야하고. 공부는 영 놔버린 나와 달리 희아는 예전부터 늘 모범생이었다. 

민윤기가 불쑥 얼굴을 내밀며 툭 던지듯 말한다. 


 

"희아 걔 바람 피는 거 아니냐?" 


 

어이 없는 개소리다. 


 

"또또 질투한다. 민기야. 우리 희아랑 나는 그런 얄팍한 연애가 아니에요~?" 

"아니. 어제 걔 인스타스토리, 웬 남자 올라와있던데?" 

"남자? 누구? 희아 아빠?" 

"아빠같으면 말 하겠냐? 븅신아? 걍 남자애. 교복 입고 있더만." 


 

어휴. 하나만 알고 구십구는 모르는 새끼들. 남자랑 사진 좀 찍었다고 저러니. 불알은 잘 붙어있나 모르겠다. 


 

"친구지, 븅신아." 

"희아 여고라매." 

"그게 뭔 상관? 그리고 뭐 사촌일 수도 있고." 


 

김남준이 멍청한 얼굴로 말한다. 

"어, 희아 스토리 업뎃됐다." 


 

모두의 눈이 김남준 폰에 쏠렸다. 

김남준의 손에 들려있는 폰에는 희아와 그리고 희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오. 근데 얘 존나 잘생겼다. 어, 잠깐만. 뭐야? 어깨 뭐야? 어깨 손 뭐야?"
 

김남준이 소리친다. 순간 머리가 잠깐 멍하다. 그러나 순간일 뿐이다. 나는 이내 코웃음을 친다. 


 

"사촌이네." 

"뭐?" 

"사촌 아닌 이상 저렇게 사진 안 찍지. 우리 희아가." 

"흠.."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하지말고 인스타나 그만 해. 어. 아주 그냥 SNS가 삶을 파괴하고 있어요. 자연, 대자연 몰라? 어?" 


 

일말의 의문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희아한테 미안한 일이다. 우리 관계는 그렇게 얄팍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고작 이깟 사진으로 마음 졸이면 여태껏 6년동안 쌓아왔던 신뢰는 재보다도 못하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다. 서로의 미래에 서로가 있다. 사촌이 아니고 친구 나부랭이던 뭐던 상관 없다. 만약 저 새끼가 희아한테 마음이 있어도, 우리 희아가 선택하는 건 결국 나일테니까. 아니면 뭐, 남자새끼가 게이일 수도 있고. 곱상하게 생겼으니 게이일지도 몰라. 그리고 게이이건 나발이건 상관 없고 우리 희아는 아무튼 바람 같은거 절대 안펴. 


 


 


 

[희아공주님 어디야?] 

[나 지금 1번 출구 거의 도착] 

[너 학교 늦게 끝나서 힘들겠다 ㅠㅠ] 

[아니 괜찮아] 


 


 

그냥 조금 이상했다.
 

평소 그렇게 많이 쓰던 이모티콘 하나 없는 것도. 늦었는데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것도. 

한참 입시니 뭐니 스트레스 받는 건 아니까 굳이 뭐라하고 싶지는 않다. 남자친구 답게 듬직한 모습 보여야지. 미래 남편이니까 말이다. 


 

1번 출구 옆 대리석 건물에 기대고 하늘을 봤다. 밤 하늘은 원래 어둡지만 뭔가 더 우중충하다. 기분 탓이겠지만. 


 

"지민아." 

"아, 왔구나. 만남 뽀뽀!" 


 

으레 그래왔듯 껴안으려고 하는데 뒤로 물러난다. 


 

"지민아." 

"어?" 

"나 할 얘기 있는데." 

"어?"
 


 

이상하게 우중충하다. 밤 하늘은 원래 우중충한게 당연한데. 이상하게 더 우중충하다. 

그리고 희아의 표정도 그렇다. 밤 하늘 처럼 어둡다. 


 

"우리 헤어지자." 


 

그리고 희아가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희아는 질린다는 듯이 대답했다. 


 

"헤어지자고... 나 임신했어." 

"그게 무슨소리야.. 왜 헤어져.. 임신했다고? 무슨 말이야.." 

"나 결혼할거야. 임신했어.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도 정말 이게 최선이었어." 

"뭐? 제발, 제발 알아듣게 얘기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지민아. 이해해달란 말 안할게. 근데 진짜 어쩔 수 없었어. 나 임신했어. 그리고 나 지금 행복해... 너한텐 정말 미안하지만." 

"아니,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봐." 


 

희아는 나를 뻔히 쳐다보았다. 감정 없는 두 눈으로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이 집에서 탈출해야 해." 

"뭐?" 

"새아빠가 나 계속 때려." 

"뭐? 왜... 왜 말 안했어?" 

"말하면, 달라져? 너나 나나 뭘 하겠어?" 

"희아야. 왜그래 왜 무섭게 그래.. 우리 결혼하기로 했잖아. 우리 그동안 정말 서로.." 

"난 고아 싫어... 너 돈 없는 것도 싫고... 너 졸업할 때 까지 기다리는 건 더 싫어." 


 

희아가 울기 시작한다. 울음이 메이는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는다. 


 

"얼마 전에는 내 몸에 손 댔어. 새엄마는 날 질투해. 미친 거지." 

"왜... 왜 말 안했어! 내가 도와줄 수 있잖아. 내가... 왜 말 안했어?" 

"말하면 달라져? 너도 나같은 시궁창 인생인데 네가 날 도와줄수나 있어?! 왜 널 더 비참하게 만들어? 그냥 헤어져! 나 임신했어. 나 다른 남자 있어. 이러면 다 끝난거잖아!" 

"아니. 아니. 어떻게 끝내.. 이거 못 끝내. 이거 그냥.. 너.. 너 많이 힘들어서.. 너 실수한거야. 나 그정도 실수 이해해줄 수 있어. 아이도 낳고 싶으면 괜찮아. 진짜 괜찮아. 우리 애처럼 키울 수 있어." 


 

나도 내가 내 입으로 뭔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그 전에 내 귀가 듣는 말조차도 의심이 된다. 


 

"박지민... 웃기지도 않아. 너 지금. 현실파악 해."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나오지 않는다. 딱 죽을 것만 같다. 

그렇게 다정하고 예쁘던 너는 어디갔는데? 그렇게 울면서도 왜 나를 비웃는거지? 


 

"나 만난 애. 알아주는 졸부 아들이야. 돈 몇 십억쯤은 아무렇지 않게 받을 수 있어." 

"뭐?" 

"넌 그렇게 해줄 수 있어?" 

"김희아.. 희아야." 

"나 이해해달라고 안 했어. 그리고 안 할거야. 그냥, 그냥 이렇게 끝내줘. 네가 나 진짜 사랑하면.. 이렇게 끝내줘." 


 

희아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다만 나를 협박하듯 노려보았다. 


 


 


 


 


 

온 몸에 구멍이 난 것 같다. 그 사이로 칼바람이 들어와 속을 사정없이 찢어낸다. 파고들고 또 파고든다. 희아는 갔다. 나는 이 곳을 벗어날 수도 없다. 

네가 서울에 가던 날, 그때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걸로 걱정할 만큼 우리 사이 얄팍하지 않다고. 

거짓말이라고 왜 말해주지 않았지? 왜 나만 진심이었지? 진심이었던 적은 있었어? 

우리가 했던 수많은 약속 중에 성년의 날 내가 너에게 장미꽃을 사주고 넌 내게 향수를 사줘서 같이 밤을 지새자고. 그렇게 수줍게 말했던 건 네가 아니었던가? 

마치 누군가가 내게 못된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다. 

너무 못돼서 사탄마저 슬퍼할 못된, 아주 못된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온 몸의 감각은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는데 내 직감은 이것이 끝이라고 했다. 

다 제각기로 다른 말들을 한다. 

무언가 하나가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넌 다른 남자를 만났고. 임신을 했고. 결혼을 할 거고... 

나는? 


 

나한테만큼은 솔직할 수 있다는 네가.. 양아버지한테 그런 일을 당할 걸 숨겼고. 

나는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가늠도 할 수 없고. 


 

희아야. 어떡해? 

나 어떻게 해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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