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로맨스
w.챼리
“태형아.”
“응.”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거지? 나는 그렇게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김태형에게 잡힌 손을 슬쩍 등 뒤로 숨겼다. 왼 손에 든 아이패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앞도 보지 않고 걷는 김태형은 지금 우리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님 아는데도 모른 척 하는 것일 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내게 자의식과잉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단언컨대 나는 자의식과잉이 절대 없을 뿐더러 관종도 아니었다. 물론 캠퍼스 내에 우리 말고 손 잡고 돌아다니는 커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대학교 안에 커플이 얼마나 많으며, 심지어 우리 과에만 해도 과cc가 몇인데.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근방 500m의 사람들이 나와 김태형을 쳐다보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여차저차 이러쿵저러쿵 해서 김태형과 오늘부터 1일 하기로 한 건 정말 좋았다. 솔직히 아침에 일어나서는 김태형에게 일어났다고 메세지가 오기 전 까지는 꿈인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정말 좋았다. 그랬는데, 당분간은 교제 사실을 공공연하게 떠벌릴 생각이 없던 나와 다르게 김태형은 동네방네 소문을 내려고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내 자취방 앞에서 만나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까지 내 손을 잡고 놓지를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심지어 오다가 아는 사람도 몇 만났다. 죄다 경악스런 표정을 하고 말도 못 걸고 스쳐 지나가는 동안에도 김태형은 휘파람이나 불고 있었다.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관심에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끼는 건 아무래도 나뿐만인 모양이었다.
같이 듣는 수업이 없는 날이라 각자 수업이 끝나면 학생 쉼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김태형네 수업은 오늘 기말고사 전 주라 일찍 끝났다고 했고 세 시간을 꽉 채워 수업한 우리 교수님은 이번 주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적어도 B 이상은 나오지 않겠냐며 기말고사에 대한 기대감을 북돋아주시고 수업을 끝내셨다. 오늘 수업이 다 끝나면 도서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학생 쉼터에 들어갔는데 문에서 가장 먼 쪽의 테이블에 앉아있는 김태형 옆에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보였다.
“어, 저기 왔다.”
김태형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흔들었다. 나는 천천히 그 쪽으로 걸어가면서 김태형 옆의 사람을 쳐다봤다.
“…….”
“여기, 내 여자친구.”
“…….”
“됐지? 이제 좀 가. 여자친구가 싫어해.”
김태형의 말에 이민하-행정학과 여신 걔-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에서 분명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어려서 그런가 표정 관리 되게 못하네.
뻔한 상황이었다. 몇 번 거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들러붙는 이민하에게 여자친구가 있으니 이제 진짜 그만 하라고 김태형이 한 마디 한 모양이었다. 이민하는 썩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내가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며 옆에 앉자 곧 빨개진 얼굴로 쉼터를 나갔다. 이민하 덕분에 학생 쉼터에서 팔자에도 없던 사랑과 전쟁을 찍은 우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나는 애써 시선들을 무시하며 작게 말했다.
“그러게 진작에 좀 쳐내라니까.”
“나도 이렇게까지 질질 끌 줄은 몰랐어…. 그래도 이제 여자친구 있다고 말 할 수 있어서 좋다. 진짜 너무 좋아. 여주야. 진짜 진짜 너무,”
“알았어 좀! 알았으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자.”
계속 거기에 있다가는 행정학과 여신을 거절한 김태형이 김여주가 좋아 죽겠다더라 하는 소문이 날 것 같아서 김태형의 손을 잡아 끌고 나왔다. 좋다는데 왜 난리냐며 입술을 내민 김태형은 점심 메뉴 결정권을 자기에게 주지 않으면 과 단톡에다가 우리의 교제 사실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레드카펫이라도 앞에 깔아 줄 기세로 어디든지 너 가고싶은 데 가서 너 먹고 싶은 거 먹자고 말했다.
의도 한 것인 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유동 인구가 제일 많은 2학생회관 학생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온 우리는 앞에 설렁탕을 한 그릇씩 두고 마주 앉았다. 우리의 옆에는 내가 제발 와 달라고 사정해서 겨우 부른 박지민과 정국이가 앉았다. 둘은 떡라면을 시켰다.
“솔직히 난 비밀로 하려고 했어.”
“뭘? 우리 사귀는 거?”
“응.”
“미쳤어? 절대 안 돼. 지난주에 누가 박지민한테 네 번호 물어봤다고 했단 말이야.”
“너 진심으로 그런 것 때문에 내가 걱정 되서 이러는 건 아니지?”
“맞는데.”
김태형은 제 설렁탕의 얼마 있지도 않은 고기를 모아서 내 그릇에 덜어주며 대답했다.
“기만자.”
“뭐가.”
“김태형 진짜… 기만자.”
이건 정말이지 명백한 기만이었다. 거울을 못 본지 너무 오래 돼서 자기 외모가 어떤지 모르고 이러는 게 아니라면 김태형은 지금 나를 놀리고 있는 거였다. 누가 내 번호를 물어봤다는 건 보나마나 박지민이 장난 친 걸 테고, 아니 장난이 아니라고 쳐도 나한테 그런 건 몇 개월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김태형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잘생긴 김태형은? 도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 지 모르겠는 거였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학교 커뮤니티에 '글쓰기 수업 듣는 경영학과 16학번 김xx씨 여자친구 있나요'하고 묻는 글이 올라왔는데 누가 봐도 김태형을 지칭하는 글 이어서 나는 그걸 보면서 500미리 페트병을 손으로 구겼다.
내가 수저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먹을 생각을 하지 않자 김태형은 그릇에 덜어놓은 고기를 집어서 내 입가에 들이 밀었다. 그 와중에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들을 느끼며 나는 그걸 받아 먹었다. 그 순간에 누군가 헛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나 토 쏠려서 못 먹겠어서 그러는데 먼저 일어나도 돼?”
“형. 저도여.”
아무래도 박지민이나 정국이를 껴서 같이 다니면 주목을 좀 덜 받을까 해서 부른 거였는데, 사실 별로 소용도 없었다. 내가 가지 말라고 붙잡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정말로 먼저 일어날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지 박지민이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질을 했다. 여주한테 라면 국물 튀겠다. 김태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박지민의 라면 그릇을 옆으로 조금 밀었다. 참다 못한 박지민이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다 내려놓았다.
“그냥 둘이서 먹지 우린 왜 부른 거야? 자랑하려고? 아님 염장 지르려고? 아니다, 혹시 다시 사귀는 거 알려주려고? 그런 거라면 이미 오늘 아침에 김태형이 단톡에다 말해서 이미 알고 있었는데.”
“저는 솔직히 톡 보고 오렌지 주스 마시다가 뿜었어여.”
“그럼 오지 말지 그랬냐. 우리 다시 만나는 거 알았으니까 이럴 것도 예상 했을 거 아냐.”
맞는 말인데 뭔가 재수없네. 박지민은 김태형의 논리적인 말에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하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사실 진짜 논리적인 게 아니라 단지 논리적인 말투를 사용한다는 걸 아직 파악 못한 박지민은 늘 김태형의 아래에 있었다. 둘이 싸우든지 말든지 설렁탕을 퍼 먹는 나를 보는 김태형의 눈이 가늘게 접혀있었다. 부드럽게 말아올려진 입꼬리는 아까서부터 내려올 줄을 몰랐다. 간간히 내 숟가락에 깍두기를 올려주는 김태형은 꼭 연애를 처음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김태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도대체 그동안 어떻게 숨긴 거냐?”
“뭘?”
“얘 좋아하는 거. 김여주는 졸라 티나서 전부터 알고있었는데 난 당연히 일방통행인 줄 알았지.”
“일방통행 이었던 적 없어. 나는 스무살 때 헤어지고도 쭉 좋아했으니까.”
순간 누가 심장을 잡고 쥐어 짠 것 처럼 정말로 통증이 살짝 일었다. 왜 설레는 감정을 심쿵 한다고 하는지 알 것도 같네… 심장께에 손바닥을 대고 얼굴을 찡그리는데 박지민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면서 뭐 씹은 표정을 했다. 박지민은 더 이상 뭘 묻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식사를 마친 박지민과 정국이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식당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걔네가 그러든지 말든지, 이럴 거면 식당에는 왜 왔는지 설렁탕에 손도 대지 않고 있던 김태형은 내 앞의 뚝배기가 바닥이 보일 즈음이 되자 천천히 설렁탕을 조금씩 퍼 먹기 시작했다. 내가 마지막 한 숟가락을 퍼 먹자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김태형은 반도 넘게 남은 설렁탕을 버렸다. 나는 조금 앞서 걷는 김태형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너 설렁탕 좋아하잖아.”
“응.”
“근데 왜 안 먹었어?”
“너무 설레서 먹다가 체할 것 같아서.”
그렇게 대답한 김태형은 입을 네모지게 만들어 웃었다. 아, 나는 되게 잘 먹었는데, 얘가 이러니까 갑자기 체할 것 같네.
어쩌다 로맨스
w.챼리
“내일도 데리러 올게.”
도대체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거였다. 이렇게 갈 거면 왜 둘이서 있고 싶다고 한 거야…?
수업이 다 끝나고 도서관에 가서 공부 하겠다는 나를 만류한 김태형은 분명 둘이서 있고 싶다는 말로 나를 꼬셨으면서 내 자취방 앞에 오자마자 내 손을 놓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 행동이 오늘은 여기서 빠빠이라는 걸 완강하게 표현하는 것 같아서 나는 어이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웃는 김태형을 쳐다보면서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곧 결론이 나왔는데, 해석이고 자시고 이대로 김태형을 보낼 수는 없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들렀다 가.”
“너 집에?”
“응. 아직 7신데.”
김태형은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인상을 잔뜩 쓰고 고민했다. 나는 김태형이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쩐지 빈정이 상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아니 집에 들어가면 누가 잡아먹는대 뭘 한대. 참 나. 솔직히 잡아 먹을 생각이 단 일 퍼센트도 없었냐고 하면 양심상 그렇다고는 못 하겠다. 그건 쿨하게 인정. 그렇다 쳐도, 사귀는 사이에 집에 좀 들어오라는 게 뭐 엄청 못 할 짓인가. 김태형은 내가 빈정이 상하다 못해 슬슬 화가 나려고 할 때 즈음 작게 대답했다.
“그래. 대신 잠깐만 있다가 갈게.”
얼씨구. 내 피해 의식인 것 같긴 하지만 마치 나에게 경고를 하는 듯한 목소리에 괜히 오기가 생기는 것이었다.그래. 네가 잠깐만 있다가 갈 수 있나 보자. 나는 김태형보다 조금 앞서 걸으면서 적어도 오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김태형을 집에 보내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물론 수치만 보자면 오늘 사귄지 1일이긴 했다. 하지만 전에 사귀었던 3년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그 3년을 포함해서 3년 1일로 치자는 건 아니었지만, 우리가 이렇게 내외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스무 살도 스물 한 살도 스물 두 살 스물 세 살도 아닌 스물 넷이고…
집에 들어온 김태형은 여자 집에 처음 오는 사람처럼 겉옷도 벗지 않고 침대 끝에 걸터 앉아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도 왔으면서 왜 저러는 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냉동실 문을 열어 쭈쭈바 두 개를 꺼냈다. 하나를 받아 든 김태형은 쭈쭈바 꼭지를 따 버리고는 몇 번 주물주물 하다가 내게 건넸다. 와중에 그러니까 진짜 남자친구 같고 좀 설레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쭈쭈바를 빨면서 집을 천천히 둘러보던 김태형의 시선이 닿은 곳은 그 때 그 앨범이었다.
“나 뭐 물어봐도 돼?”
“이제 그런 거 안 물어보고 물어봐도 돼.”
내 대답에 김태형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으며 알겠어. 했다.
“내가 사진 달라고 했을 때, 왜 안 준 거야?”
“너랑 찍은 사진 그거 하나 남은 거라.”
“다 버렸어?”
“당연히 버렸지… 넌 뭐 남아있어?”
“나는 하나도 안 버렸는데. 다 본가에 있어, 아직.”
헤어졌으면 흔적은 지우고 사진 같은 건 버리는 게 당연한 수순인데 어째 내가 매정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김태형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 좋았으면서 사진을 다 버렸다는 내 말에 금세 입이 뾰로통하게 나왔다. 쭈쭈바를 먹고 있던 중이라 그런지 입술이 촉촉하고 반들반들했다. 나는 거기에 저절로 시선이 가는 걸 꾹 참고 아무 말이나 던졌다.
“나 그거는 사실 안 버렸어. 그거, 뭐지, 만화책. 니 거.”
김태형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끔뻑거렸다. 다리를 삐걱거리며 일어나 책장 한 구석에 숨겨두었던 만화책을 가져와 건넸다. 김태형은 감동받은 건지 슬픈 건지 모를 표정을 했다. 슬픈 건 아닐테니 감동을 받은 듯 했다.
“…이제 와서 말하는건데, 나 이거 일부러 놓고간 거다. 너 보고 싶어서 진짜 죽을 것 같을 때 마지막으로 한 번 보러오려고.”
그런데 진짜 감동을 받은 건 나였다. 누구라도 김태형이 이런 얼굴 이런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진짜로. 지나가는 사람 열에 아홉은 넘어갈 거라고 자신한다. 나는 감동도 받았고 그 때 그 시절의 김태형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근데 결국 안온 거 보니까 죽을 것 같지는 않았나봐.”
“매일매일 죽을 것 같아서 하루만 더 참아야지 하루만 더 참아야지 하다가 결국 못 왔어.”
김태형은 웃고 있었지만 나는 따라서 웃을 수 없었다. 참았던 눈물이 콧물로 흐르려고 해서 코를 흡 하고 들이마셨다. 김태형은 그런 내 기분을 눈치 채고 내 손을 잡아 끌었다. 김태형의 품에 안겨 본격적으로 코를 훌쩍이기 시작하자 내 뒤통수를 얹혀진 손이 부드럽게 머리를 매만졌다.
그 손길이 너무 부드러웠고, 김태형의 냄새가 너무 좋았고, 마침 내가 적당히 감성적이었고, 해가 넘어가면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보라색 빛이 예뻤다. 나는 김태형의 허리를 조금 세게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키스해줘.”
김태형의 반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표현이 딱 적당하게 들어 맞았다. 뭘 그렇게까지 놀라 또…. 괜히 부끄러워서 김태형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짓을 잠시 멈추었던 김태형은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천천히 내 볼을 양 손을 잡아 들었다.
입술이 맞닿았다. 따지고보면 올해 첫 키스는 아니었지만 그 날의 그 입맞춤과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피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끊임없이 빠르게 돌아서 정신이 몽롱해 질 지경이었다. 흘러내리려는 나를 단단하게 붙잡은 김태형은 고개를 조금 틀어 입술이 떨어진 틈으로 간간히 숨도 쉬었다. 뭐야, 왜 이렇게 능숙해? 그런 생각이 1초 정도 들긴 했지만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사고를 이어 갈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시간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한참동안이었다) 떨어지지 않던 우리가 펄쩍 놀라며 떨어진 것은 어느 샌가 김태형의 위로 올라 탄 내가 나도 모르게 김태형의 허리춤에 손을 댔을 때였다. 정말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라 놀란 건 김태형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파드닥거리며 나를 피해 방 구석으로 도망 친 김태형은 빠른 동작으로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 나 너무 오래있었어.”
“간다고?!”
갑자기 소리를 내서 그런지 쇳소리가 났다. 민망함에 목을 잡고 가다듬는 동안 나갈 채비를 마친 김태형은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현관 앞으로 가 섰다. 나는 조금 고민했다. 이렇게 김태형을 보내느냐, 붙잡느냐. 물론 키스를 한 걸로 애초에 목표했던 것은 이룬 셈이었지만 솔직히 그걸로는 아쉬운 게 사실이었다. 눈 딱 감고 김태형의 손을 붙잡았다.
“…오늘 자고 가면 안 돼?”
내가 이렇게 저돌적인 사람이었나.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에 신발을 신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김태형이 천천히 뒤를 돌아 나를 쳐다봤다. 괴로운 표정이었다.
“여주야… 오늘은 그냥 갈게.”
“…나랑 같이 있기 싫어서 그래?”
“…….”
한숨을 길게 내쉰 김태형은 입술을 깍 깨물고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곧 내게 잡힌 손을 빼냈다. 내가 어버버 하는 사이에 현관문을 연 김태형은 뭐 어쩐다 말도 없이 집을 빠져나갔다.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히고 삐비빅 하고 도어락이 잠길 때 까지도 나는 어리둥절했다.
설마 이렇게 간 건 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나는 휘청거리며 걸어와 침대 끝에 걸터 앉아 생각 해보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뭐라고 했더라. 나랑 같이 있기 싫냐고 물었었나. 김태형이 뭐라고 했더라. 아니,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대로 집을 나갔을 뿐이지. 혹시 밖에 서있을까 싶어서 문에다 대고 태형아~ 불러봤지만 당연히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진짜 간 모양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혹시 키스가 별로였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어이가 없어서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허허 웃었다.
천장을 보고 누워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번쩍 일으켜 앉았다. 내 예감이 맞다면 이건 김태형이 계단으로 뛰어오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도어락 비밀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활짝 열렸다. 바깥의 찬 바람이 김태형을 타고 들어와 내게 닿았다.
“자고 갈게.”
내게 시선을 고정 한 채로 김태형이 집 안으로 들어오며 천천히 가방과 겉옷을 벗었다. 김태형의 손에 들려있던 편의점 봉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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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었죠ㅠ 사정이 있어서 아예 글을 쓸 짬이 나질 않았어요ㅠㅠ 죄송합니다. 제가 없는 사이에 많은 분들이 보고 가주셔서 너무 행복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