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로맨스
w.챼리
“복학 한다더라. 김태형.”
주어 없는 문장에 누가? 라고 묻기도 전에 박지민의 입에서 나온 생소한 그 이름에, 방금 입에 털어넣었던 소주가 밖으로 뿜어져나왔다. 그러면서 입에 남아있던 소주가 코로 넘어가는 바람에 얼굴이 시뻘개져서 켁켁거리는 나를 쳐다보며 혀를 한 번 쯧 찬 박지민이 물을 따라 건내며 말을 덧붙였다.
“왜 그렇게 놀래. 너도 김태형 좋아했냐?”
그게 무슨 개잡소리야? 나는 물 한컵을 전부 들이키고는 얼얼한 미간을 짚으며 물었다.
“우리 과 여자애들 다 한 번씩은 좋아했잖아.”
실제로 고백 했다는 사람만 열명이 넘는데. 돌아온 박지민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으나 가만 생각해보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신입생이었을 때,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동기들이 태반이었던 사이에서 김태형은 확실히 눈에 매우 띄는 잘생긴 외모였다. 이해는 가지만 재수없네. 나는 박지민이 따라놓은 술을 또 한 번에 털어넣었다. '너도' 김태형을 좋아했냐는 질문에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고 생각했는데, 대답이 되질 않았던 건지 내 다음 말을 기다리는 박지민에게 괜히 신경질을 냈다.
“난 관심 없었음. 전혀. 네버. 싫었으면 싫었지, 뭘 좋아해.”
“반응 보니까 좋아했던 것 같은데.”
그러면서 호탕하게 웃는 박지민의 낯짝에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무래도 웃는 낯엔 침 못 뱉는다는 건 너무 구시대적이다.
“아, 아니라고. 진짜 관심 전혀 없었어. 말도 별로 안 섞어봤는데 좋아하기는 무슨.”
“하긴. 둘이 유독 안 친하긴 했지.”
박지민의 말대로 우리는 과 동기들 사이에서도 유독 친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으나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도 그럴것이 김태형이나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딱히 모나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 둘 역시 대놓고 서로에게 으르렁거리지는 않았으나 웬만하면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더랬다. 우리가 그러는 걸 다른 동기들이 다 눈치 채고 있었다는 사실은 김태형이 군대에 가고나서야 안 것이었다.
그나저나 군생활이 생각보다 길었네. 내 착각인가.
“해병대라도 갔다 왔대?”
“누구. 김태형?”
“어. 제대가 왤케 늦었담.”
“뭔 소리야. 진짜 해병대였대도 진즉 왔지. 걔 제대는 한지 꽤 됐어. 한 2년쯤? 한 학기 하고 바로 갔으니까.”
“그래? 근데 왜 이제 복학한대?”
“그거야 나도 모르지. 제대하고도 휴학을 1년 반이나 더 하더라고. 듣기로는 더이상 휴학 기간 연장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복학하는 거라던데. 뭐. 과가 적성에 안 맞나.”
“뭐야. 걔한테 관심 있는 건 너 같은데? 뭘 그렇게 세세하게 다 알아?”
주변에서 다 걔 얘기만 하니까. 박지민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소주를 마저 마셨다. 하긴. 그 김태형이 복학한다는데 난리가 나지 않을리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김태형은 군대에 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더러는 아쉬워했고, 더러는 눈엣가시가 사라졌다는 듯이 좋아했다. 하여튼. 쓸데없이 존나 잘생겨서는. 김태형도 참 기구한 운명이다. 역시 너무 잘생긴 것도 별로야. 암.
“아. 그리고, 이번에 개파도 온다더라.”
팔자에도 없는 김태형의 잘생긴 외모 걱정이나 하고 있는데 박지민이 툭 던진 말에 팔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돋았다. 뭐?! 왜? 아니 왜? 왜 온대? 갑자기? 휴가 나와서도 한 번을 안 나오던 애가? 내가 침까지 튀어가며 열변을 토하자 박지민이 창피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곤 속삭였다.
“있었네, 관심.”
“…아니라고 했다.”
“아무튼, 그래서 원래 안 온다고 했던 애들도 싹 다 모인다더라. 김태형 얼굴 보러.”
김태형이… 진짜 온다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쩌면 나는 김태형을 거의 4년만에 다시 보게 될 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어쩌다 로맨스
w.챼리
“오랜만.”
“켁.”
역시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주인공처럼 등장한 김태형은 갑자기 머리가 돌기라도 한 건지 별안간에 내 옆자리에 털썩 앉는 것이었다. 놀라 사례가 걸려 켁켁거리고 있는 내게 휴지를 뽑아 건낸 김태형은 고개를 갸우뚱 하고는 괜찮아? 라고 물었다. 이게 진짜. 갑자기. 미쳤나. 나는 휴지를 빼앗아 대충 입을 닦으며 부러 그 시선을 피했다. 김태형이 언제쯤 오려나 전전긍긍 하며 손톱을 뜯고 있던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김태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졸업 했을 줄 알았는데.”
“…….”
김태형은 무표정이었지만 목소리에는 분명 웃음기가 어려있었다. 근데 이게 4년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왜 아직도 졸업을 못했어?”
역시 김태형은 사람 속 뒤집어 놓는 데엔 도가 텄다. 이번 학기 하면 졸업이거든….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상하게 내가 변명을 하고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였다. 그러는 지는. 엄청 길게 휴학 한 주제에. 나는 김태형이 내 옆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매우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김태형은 내가 불편해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었다. 역시 기분이 영 별로라 소주나 마시자 하고 소주병을 들자 김태형이 내 손에서 소주병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말 없이 내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는 것이었다. 근데 얘가 진짜 왜이래. 나는 무슨 꿍꿍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꾹 참고 소주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잘 마시네.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 얼굴이 화끈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테이블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김태형 효과였다.
“김태형. 웬일이냐? 니가 술자리를 다 나오고.”
“그냥, 뭐. 이제 복학하니까 얼굴 좀 비추려고.”
“니가? 야. 진작에 좀 나오지. 다들 너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했는데.”
“맞아. 너 도대체 뭐 하고 살았어? 제대하고 바로 복학 안하고.”
그냥. 알바도 하고. 여행도 가고. 그랬지. 김태형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옆을 보니 신입생들부터 선배들까지 거의 전부가 김태형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김태형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른한 표정을 하고 턱을 괸 채 내 쪽을 쳐다봤다. 왜. 왜 츠드브(왜 쳐다봐).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복화술로 말했다. 김태형이 다시 웃었다. 이번엔 모두가 느끼도록 생각보다 크게 웃어서 다들 당황한 것 같았다. 얘가 진짜 왜 이러지.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오른쪽 볼을 슬쩍 쓸어보았지만 묻어나오는 건 없었다.
“근데 둘이 친한 줄 몰랐는데.”
한 학번 선배이자, 눈치가 지지리도 없는 내가 알고있을 정도로 김태형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세연선배가 은근히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에서 의문 섞인 말들이 튀어나왔다. 그러게. 오히려 사이 안좋다는 소문 있지 않았어? 맞아. 맨날 한 사람이 오면 한 사람이 가고. 그래서 다들 둘이 싸운 거라고 말 많았었는데. 맞아 맞아. 어쩌다 마주치면 엄청 냉골이었잖아. 하나 둘씩 터져나오는 목격담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랬나요. 그러면서 슬쩍 본 김태형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그러는 것이었다.
“우리 되게 친한데.”
내가 똥씹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김태형은 표정없이 입모양으로 뭐. 하고는 오징어를 집어 물었다. 느 즈금 무슨 큰습은드(너 지금 무슨 컨셉인데)? 이번에도 복화술로 말했지만 김태형이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또 어색하게 웃으며 괜히 테이블을 팡팡 쳐댔다. 맞아요~! 우리 되게 친한데. 하하. 싸우기는 무슨. 하하하. 김태형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무표정을 하고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사귀었어요.”
순간 그 시끄럽던 술집 안이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들릴 것 처럼 조용해졌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3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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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첨이라 넘 떨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