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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사귄 전 애인 갑을로 재회하는 썰
w. 랑데부
1.
좀 이른 개화가 시작 되었다고 TV에서 떠들어댄지 일주일만에 꽃이졌다. 단순히 벚꽃이 졌을 뿐이다. 수많은 꽃 중 벚꽃 하나 졌을 뿐인데 온 봄이 시작도 전에 져버린 것만 같았다. 여전히 날은 추웠고, 겨울보다 더한 강풍이 외근 나온 머리칼을 때려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깜빡이는 가로등은 여전히 사람 손이 닿지 못한 채 깜빡거렸다. 내 하루 역시 누군가의 손길 하나 닿지 못한 채, 내 손길 역시 닿지 못한 채 깜빡이고 있었다.
5월은 대대적으로 창간 15주년 기념 행사가 잡혀있는 달이었다. 2020년이 시작됨과 동시에 이 5월은 창간이래 가장 완벽한 달로 시작하고 끝맺음을 보는 것에 혈안이 된 분위기였다. ㅇㅇ는 무르익은 봄 속에서 스카프를 단단히 둘러멨다.
"웬 스카프야?"
"아, 제가 좀 봄을 타서.."
는 개뿔. 그냥 환절기 취약체였다. 영현이 작품을 쓰다보면 한 번씩 크게 앓는 것처럼 ㅇㅇ는 환절기가 오면 크게 앓고 지나가는 것은 연례 행사였다. 바쁜 와중에도 트렌트를 따라잡기에 급급한 본사는 각 부서의 파티션을 봄색에 맞춰 리모델링 해주었지만, 그럴 시간이 있다면 섭외 리스트에 이름 하나 줄여주는 편의가 호감을 사는 축에 속했다.
"ㅇㅇ씨 내가 부탁한 대본 검토하고 있지?"
"네. 빠른 시일 안으로 보내드릴게요"
"아냐- 편하게 해. 편하게, 또 우리 ㅇㅇ씨 전공이잖아. 부탁하는 입장에 재촉하는 거 아니니까 쉬엄 쉬엄 해. 응?"
심과장이 등 돌려 나가자마자 ㅇㅇ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첫째, 입사 이래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글 하나 쓰게 한 적 없으며 이럴 때만 전공 드립 시전하기. 둘째, 부탁하는 입장인데 굳이 밑층까지 내려와 묻기. 셋째, 행사 직전에 맡겨 놓고 쉬엄쉬엄 압박 하기. 이정도면 회식마다 운운하는 진급의 문제가 이 문장에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러모로 ㅇㅇ는 바빴다. 대본 검토를 제외하고 창간 이래 판매율이 가장 높았던 호들을 정리해, 각 메뉴얼에 맞게 리스트를 뽑고, 그녀의 주업무인 작가 섭외 리스트를 따로 작성해 검토를 받아야했다. 승인이 되면 섭외, 그리고 섭외, 될 때까지 섭외. 3년 동안 그녀가 주업의 총망라이자 조촐한 실태였다.
*
결론은 행사 전 날까지 야근으로 대본을 검토하고, 행사 당일 ㅇㅇ의 손에 맡겨진 건 어린 아이였다. 이정도면 나 육아 휴직도 써줘야 하는 거 아니냐. 없던 애도 생기네, 부라보 DY. 엿 같은 원아워매거진!
"황작가 아들인데, 애 안 봐주면 행사고 뭐고.. 그냥 가버린대잖아. 우리가 보육단체도 아니고...이거 원. ㅇㅇ씨가 두 시간만 맡아줘. 응?"
애 보라는 말 참 한 번 길게 돌려 한다.
두꺼운 가면 속에서 얼마나 씹어댔는지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화려하게 터지는 폭죽과 공간을 둥둥 울리는 음악 뒷편에서 ㅇㅇ는 여섯 살 남짓한 어린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던, 샴페인을 나르던 어쨌든 둘 중 하나의 시종이 되어야 했다. 자신의 일은, 자신의 노력은 티끌같은 먼지가 되어 보이지도 않은 채.
"아 차가.. 진우야!"
순조로운 행사에 잠시 넋을 놓자마자 가슴팍 위로 차가운 주스가 흘렀다. 무의식을 파고든 찬기에 아이를 내려 놓자마자 도주했다. 블라우스와 살결 사이의 끈적함을 고려하기도 전에 ㅇㅇ는 달렸다. 행사장을 나오자 아이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뒷따라온 ㅇㅇ를 보고 매섭게 돌아선 아이의 도주는 눈앞 누군가의 충돌로 일단락 될 수 있었다.
"진우야! 진우야 잠깐ㅁ.. 어! 죄송합니다!"
행사 시작 후 꼬박 진우를 안고 있었으니 다리가 저렸다. 저린 다리로 예정 없던 달리기를 하니 전기가 찌릿 오르는 감각이 선연했다. 마치 이 불행을 인지하지 못하고 들이닥친마냥 근육은 놀라 굳어버렸다.
"어? 형이다!"
"진우 작가님 따라왔어?"
"응"
"근데 어디가"
뒤이어 들린 목소리에 비하면 이 놀란 근육은 그 축에도 끼질 못했다. 타인을 향한 다정한 목소리는 영현의 것이었다. 금새 진우를 안아드는 강영현. 영현이 이 곳에 오는 것에 놀랐다기보다, 이렇게 단 둘이 마주칠 상황은 예상한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ㅇㅇ씨 어디갔어? 15:22
-ㅇㅇ씨 강작가 봤어? 팀장님이 찾으시는데. 15:25
"...안에서 찾으세요"
영현은 할 일이 많았다. 윤팀장 곁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눠야하고 수상도 해야했다. ㅇㅇ는 휴대폰을 톡톡 확인시켜주고 영현을 오롯히 바라보는 진우의 손을 잡았다. 가자. 영현의 품에서 놀고 싶은 의지가 명확한 진우를 떼어내긴 힘들었다.
"황진우 사고치지 말고 잘 좀 있어, 형처럼 멋있는 사람 된다며?"
"그렇긴한데에.."
"형 금방 갔다 올게. 약속"
영현이 진우의 머리칼을 잔뜩 헤집었다. 작은 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은 영현은 ㅇㅇ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형처럼 멋있는 사람, 누군가에게 있어 멋있는 사람' 어쩌면 입 밖으로 튀어나온 단순하고도 아무것도 아닌 그 문장조차 입술을 깨물게 만들었다.
"..이거"
그렇게 뭣도 아닌 자격지심이 울컥 차올랐다. 우두커니 서있던 찰나였다. 불쑥 손수건 하나가 내밀어졌다. 영현이 내민 손수건이었다.
며칠 전 행사 때문에 신중히 골라산 3개월 할부 블라우스에 대해 묻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 블라우스에 무엇을 쏟았건, 그 쏟아진 액체에 끈적했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었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적셨으니까 닦아"
네 다정함이 내 자격지심에 칼을 꽂아.
나는 너보다 훨씬 뒤쳐져서 애인한테도 자격지심을 느껴고. 행복하게 해줄 자격을 갖추지 못해서 결국 이렇게 둘 다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 나는, 못나서, 네 다정함이 내 누린내 나는 자격지심을 후벼 판다.
*
"요즘 왜 이렇게 실수가 잦지? #ㅇ대리 얘기 해봐. 대체 뭐가 문제야?"
니가 좆대로 써 내려보낸 새 아이템이 문제다 이 새끼야. 를 외치며 당장이라도 가슴팍에서 있지도 않은 사표를 꺼내는 척 하며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뼈대 없이 쌓아올린 공상을 제 3자가 실현시키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가끔 이 현실은 집어던지고 싶은만큼 버거웠고, 그 버거움을 버티지 못하는 나를 자꾸 한심해 했다. 물론 당신이 싫은 것은 더한 일이지만.
"...죄송합니다. 다시 수정해 올리겠습니다"
"실망이 많아. 자네한테 어?"
"죄송합니다"
밥을 코로 먹는 것인지, 입으로 먹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꽤 나름 포커페이스 유지에 소질이 있다고 느꼈는데. 원필은 제 그릇 위에 있는 와플을 ㅇㅇ의 접시 위로 올려주었다.
"푹푹 좀 떠먹어. 푹푹"
"...어"
"..행사 때 강영현은 못 봤어?"
"어? 야야 나 들어가 봐야 돼. 너 알아서 이거 다 먹고 일어나. 나 간다?"
요새 내린 모든 선택은 후회의 연속이었다. 지칠대로 지쳐 돌아간 새 집은 쌓인 먼지와 냉골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외로 사소하게 잇따르는 모든 선택들이 마찬가지였다. 2분, 3분씩 늦어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기로 마음 먹은 날 폭우가 쏟아졌다. 덕분에 산 지 3일 된 흰구두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우산은 도난당했다.
영현의 다정함은 ㅇㅇ의 후회를 부추겼다. 영현을 위한 일이었는지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는지, 아니 그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제 마음이 제 것이 아닌 기분 속에 낑겨 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ㅇㅇ는 계약서를 정리하느라 출구문도 제대로 못 찾았다. 쟤, 정말 괜찮은 걸까.
*
여긴 대체 얼마만이야.
주점을 차릴 생각이 분명했다. 양손에 맥주를 주렁주렁 달고 옥탑으로 올라온 원필이 평상 위로 드러누웠다. 대학 내내 원필의 집이었으나 아마 두 사람의 추억이 배, 아니 그 이상으로 존재하고 있을 공간. 옥탑이었다.
"할 말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오라고 했을 거 아냐. 그 할 말은 뭐.. ㅇㅇㅇ?"
"귀신이네"
"귀신 만들어 논 놈들이 누군데"
안주 없이 그것도 혼자 소주타임이다. 원필은 알았다. 그만큼 하기 힘든 이야기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렴풋이 상처로 휩싸인 분위기는 싫었다. 그런 원필을 두고 영현은 여전히 말 없이 잔을 채웠다. 그래 먹고 뒤지시던가. 그게 편할 듯.
"너 나 처음 등단했을 때 기억 나냐"
"기억이 안 날 순 없지. 아마 그 날 여기서 두 마리 개가 되서 나갔지. 너랑.. ㅇㅇㅇ"
"그 전도 기억나?"
"기억이 안 날 수 없지. 그때도 여기서 두 마리 개가 되서.. 벌써 취해서 추억 팔이 하냐?"
영현이 피식 피식 웃으며 손사레쳤다. 그건 아닌데, 난 좀 기억이 나더라. 여기 오니까.
"너 등단 전에 엄청 힘들어했잖아. 나는 진짜 너 떨어질 때마다 술 먹고 안 뒤진게 신기했어. 그런 강한 간을 가진 놈은 처음 봐서"
"그때 ㅇㅇ가 옆에 있어줬거든"
"알지"
"네가 모르는 것도 많이 해주고"
"...자랑하냐?"
싸우고 헤어질 때마다 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자랑질인데. 그건 연애할 때도 실컷한 거잖아?
영현은 나머지 술을 목 열어 넘긴 뒤, 원필을 바라보았다. 내가 제자리걸음일때 걔는 나한테 아무 재촉도 안 했어. 재촉은 무슨, 진짜 옆에 있어주는게 뭔지. 걔는 알았거든.
"그게 여기 와서 생각이 나더라. 걔는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불안해서 미치려 할 때, 안아줬는데"
"..나는 다그쳤더라"
우리 생각한다면서 걔한테 한 일이 결국 나를 위한 일이었던 거 알았을 때. 걔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나는 또 내 생각만 한 거 알았을 때. 죽을만큼 힘들었어.
"...맨날 아다리가 맞는 연애하면 그게 연애냐, ...그런 실수도 하는 거지"
"ㅇㅇ가 헤어지자고 한 거, 그거 최선이었을 거야. 난 그 최선을 이해 못 했던 거고"
"강영현"
"혹시 ㅇㅇ가 후회하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된 거 후회하면. 얘기해줘"
최선이었다고? 원필은 두 사람의 생각을 꽤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최선이었다고 인정하면, 이 이별을 인정하는 꼴 밖에 안 된다. 아직도 분명히 사랑하는데. 순순히 인정하겠다고?
"또 짧게 본다"
"헤어지고 내내 생각한거야. 우리이기전에 걔는 걔고 나는 나야. 내가 그걸 모르고 있었어. 자신보다 중요한 건 없어, 내 상처 헤아리고 우리 관계 헤아리지 말고 자기가 한 선택이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고 무조건, 다독여줘.
"네가 하겠다는 건 뭔데. 너 지금 헤어진 거 인정하고 이제 진짜 영영 안 보겠다는 거야"
"나는 ㅇㅇ가 괜찮아진다면 뭐든 할 거야. 그 다음에 우리 관계 생각할 거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주고 싶어"
영현의 모든 말을 이해했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어느정도는 알겠다. 우선 두 사람의 관계보다 서로, 저 자신의 재정비가 먼저다. 원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땅을 치고 후회하는 거 같으면 말해줄게.
"힘내"
"난 오래 걸려도 준비돼있어"
"좋겠다. 멘탈 존나 단단해서"
다시 한 번 헛웃음이 나왔다. 영현은 원필의 맥주캔에 통- 잔을 치고 내려 놓았다.
"헛소리 말고 옆에서 잘 있어줘. 그리고 답답하면 여기 오라고 해"
"오고 싶겠냐? 그리고 너 설마 여기.."
"응"
"티 내지 말고 도와줘. 요즘 매입이 취미야? 버는 족족 쓰는 맛이 쏠쏠해 미치겠지?"
"..니가 알아서 거짓말 해. 아는 형이 쓴다고. 그리고 나 아니어도 ㅇㅇ가 여기 좋아했어"
더이상 대꾸는 불필요했다. 결국 이 모든게 사랑인 것을 대꾸를 하랴. 원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새삼 동의했다. 강영현이 아니어도 ㅇㅇ에게 이곳은 원필처럼 청춘이라 기록될 시간 속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 곳이겠지. 굳게 닫힌 옥탑의 문을 바라보던 원필은 웅웅대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야야야, 나 가야돼"
"이 시간에?"
"어. 너보다 훨씬 중요해. 나 거기 가디건 좀, 너 향수 없냐?"
허, 참.
영현은 가방을 뒤적여 향수와 함께 원필의 가디건을 품에 던졌다. 몇 마디만으로 누구에게 달려가는지 퍽도 티가 났다. 어쩐지 술도 많이 안 마신다했더니.
"여보세요? 응, 들어가 있어요. 밖이 많이 춥네"
뒤도 안 돌아보고 계단을 내려가 달리는 발걸음이 동네를 울렸다. 영현은 재빠르게 뛰어가는 원필을 보고 다시끔 웃었다. 평상에 이렇게 누워 있으니 꽤 찬 바람에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새삼 여전히 쌀쌀한 밤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직 춥구나. 환절기가 맞긴 맞나보네.
"아,"
영현은 자연스럽게 연락처에서 ㅇㅇ를 찾아 눌렀다. 급히 찾은 통화 버튼을 차마 누를수가 없었다.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원필의 말이 맞다. 티내지 않고, 우리가 재정비 할 수 있도록. 알아 줄지도 모를 무한한 노력이 필요한 시간이다. 영현은 그 앞에서 까득까득 손톱을 갉아먹었다. 그러다 통화 목록 가장 위를 터치했다.
- 네 여자친구 데려다주고 ㅇㅇ한테 전화 한 번만 해봐 12:33
지독한 환절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2.
"애인 생기더니 눈치도 생겼네"
"독약을 줄 걸 그랬네. 고도의 돌려까기야 뭐야. 그리고 아직 애인 아니거든?"
협탁에 놓인 티슈각을 교체하던 ㅇㅇ는 크게 재채기를 하고 크흐흐, 웃었다. 그정도면 눈치 생긴 거 맞네. 통화 목소리가 영 별로였다. 최대한 목소리를 내려 하지 않는 건지, 나오지 않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아 다음 날 집에 들이닥치자마자 상황이 빠르게 읽혔다.
"아프면 말을 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일도 없어"
"어제도 먹고 잤어.."
"그렇겠지. 어제도 맥주를. 공갈 안 받는다"
술을 먹을거면 어? 뱀술, 인삼주 그런 거 많잖아. 뭐 몸에 좋은 거라도 챙겨 먹어야지 독감에 맥주? 이거 의사 선생님이 보면 요절로 먼저 가실 장면이다. 알아?
한 걸음당 하지 못한 잔소리의 향연이다. 귀를 틀어 막고 싶었지만 참았다. 귀를 틀어막았다간 그 손까지 떼고 더한 데시벨로 쏘아댈 게 분명했다. 원필은 ㅇㅇ를 부축해 침대에 눕히자마자 주방으로 향했다.
"...장래희망이 요정이야?"
그래서 저기 죽어가는 화초에 맺힌 이슬만 뽑아 먹고 산 거야? 이게 사람 냉장고야? 너 이렇게만 하면 지구 최악 방구석 자취러 이런 거 밖에 못한다니까?
3절이 시작됐다. 잔소리가 한 쪽 귀로 들어와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가면 또 들어왔다. 장대한 잔소리의 결론은 다이소 쿨패치를 이마에 붙여주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죽은 불낙죽 시켜주라고 했다가 속 안 좋을 수도 있으니 삼계죽으로 번복해서 그거로 시켜줬다.
"너 안 가?"
"어. 안 가"
"어제 야근 했다며?"
"개뻥이야. 약속 있었어"
뜨끈하게 보일러를 틀고 방바닥에 자리를 잡은 원필이 짧게 답했다. 내가 어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네가 알면 아마 고대로 까무러칠 거다. 차마 이 말은 목구멍으로 쑥 삼켰다. 이번에도 크게 관여 없이 영현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여전히 어느정도 개입이 필요한, 이리저리 참 많이도 흔들리는 연인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중심을 잡아가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그만 자. 원필은 죽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한없이 처진 눈빛을 쉬게 해주고 싶었다.
"..좀만 이따가 가"
"알아서 해"
"나도 알아서 해"
"넌 입만 살아서 안 돼"
힘없이 웃음이 새어나왔다. 영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인지 이리저리 뒤척였다. 원필은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두고 다가왔다. 툭. 툭. 성의가 짙진 않지만 노력이 꽤나 묻어난 손길이었다. 토닥토닥이 아니라, 약간 때리는 거 같은데? 잠자코 자라고. 잠에 들 때까지 원필은 멈추지 않았다.
"힘내"
"난 오래 걸려도 준비돼있어"
"좋겠다. 멘탈 존나 단단해서"
새삼 생각했다. 이렇게 누군가를 토닥이고 있어줘야하는 순간들을 ㅇㅇㅇ는 묵묵히 해줬구나. 준비가 되었다는 영현의 표정을 떠올렸다. 다만 영현이 오래 버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오랜 시간이 걸려 버티고 있는 영현에게 ㅇㅇ가 다시 찾아갔으면 좋겠다. 어느 순간 눈을 꼭 감고 열기에 취해 깊은 잠에 빠진 ㅇㅇ를 보며 원필은 생각했다.
*
"나 진짜 거기 써도 된다고?"
"어어. 아는 형이 매입했는데 갑자기 일 생겼다고 꽤 오랫동안 지방에 있는다네? 너 거기가 회사랑 더 가깝잖아. 웬만한 거 다 있다고 하니까 그냥 여기랑 거기랑 왔다갔다 해. 야근도 많다며"
"..그렇지. 근데 이렇게 꽁으로 써도 돼? 진짜 뭐 해드려야 하나?"
"아, 아 야아. 뭘 해줘, 나랑 엄-청 친한데. 그리고 형 바빠서 연락도 잘 안 돼. ㅂ, 바뻐! 엄청"
"근데 여기 커튼은 좀 해야겠다. 그정도는 해도 돼?"
말 그대로 최소한의 가구와 생필품만 들여둔 상태였다. 언제가 마지막 인적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찬기가 돌았다. 전과 많이 달라진 내부라지만 기억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 시절 줄기차게 이 곳에 발도장을 찍어내던 시간들은 곳곳에 물기처럼 남아 흐르고 닦을 수 있을만큼 흐릿하다 선명하길 반복했다.
"..어?"
방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을만큼 환했던 창문 옆은 보지 못한 것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꽤 담백한 아이보리색 커튼 에 속커튼까지 꼼꼼하게 달려 있었다. 분명 커튼을 달아도 되냐고 물어보겠다 했는데. 물어보는 대신 배째라는 식으로 달아버린 건가? 답지 않은 섬세함과 또 막무가내의 모습이었다. ㅇㅇ는 속커튼만 쳐둔 채 일인용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졸려?"
"...오픈북 하다가 죽은 사람이라고 묘비명에 새겨줘"
"많이 힘들었어?"
"응. 엄청"
"고생했어"
지쳤겠다. 푹 자고 일어나, 일어나서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ㅇㅇ는 고개를 좌우로 털어냈다. 유일한 단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영영 가지고 가야 할 지도 모른다. 다신 뜨지 않을 것처럼 두 눈을 꼭 감았다. 가끔 머리 속 기억을 저장하는 공간에 구멍을 내고 싶을 때가 있다. 밑 빠진 장독처럼. 그러면 그 틈새로 이런 기억들만, 줄줄 새버려서 그리고 바닥에서 다 마르고 증발해버려서 찾을 수 없게.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그래야지만 내가 살 것만 같은, 그럴 때가
존재한다.
"..얼른 자자. 자자 ㅇㅇㅇ"
텅 비어 있는 몸 위로 이불을 덮었다. 느끼고 있는 게 미약한 추위인지, 이가 덜덜 떨릴 정도의 추위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머리도 좀만 더 텅 비어 버리면 이게 좋은 걸까? 그 어떤 것도 확답을 주지 못했다. 진실과 솔직함을 망각해버린 것만 같았다.
3.
초봄부터 이리저리 들어갈 곳이 많았다. 각 잡고 앉아 휴대폰 계산기를 두드리고 두드려 나온 답은 노답이었다. 말 그대로 답이 없다. 쥐꼬리로 먹고 살 길 바란 것부터 허상이었다.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것부터 세어보자. 월세 사십 오만원, 관리비 삼만 원, 식비, 교통비, 적금, 주택 청약, 학자금, 경조사비 플러스 삼월 휴대폰 청구서. 별도로 들어가는 것이라곤 가끔 원필과의 만남 혹은 영현과의 데이트 뿐이었다. 이제 하나 뺀다고 해도, 그니까 자의로 나가는 돈보다 타의로 나가는 돈 구멍이 블랙홀이라는 거다. 나머지는 세기도 귀찮아 어쩌고 저쩌고. 아니 일 년 동안 연락 한 번 안 하고 살다가 나가는 돈은 뭐 오만원, 육만원이야.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내 자신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ㅇㅇ야 거지가 꿈이야?
아침부터 지끈대는 계산을 중단하고 나온 ㅇㅇ는 벌써부터 지치는 것 같았다. 손잡이는 잡아도 잡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 틈에 낑길대로 낑긴 ㅇㅇ는 혹여 화장을 앞 사람 코트에 문대기라도 할까 고개를 더 빳빳이 들었다. 이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차 사고 싶다"
이래서 다들 차를 사나 봐요.
"전세 대출이 돼?"
"어머니가 좀 보태주셨어. 야 나도 간신히 가는 거야"
누가 그걸 모르냐. 존나 부러워서 다시 한 번 물어본 거야.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콩나물국이 썼다. 나는 언제 오피스텔 가보냐. 아니 원룸 탈출 가능이나 한 거냐. 휴지나 왕창 사서 보내줘야지. ㅇㅇ는 다시 한 번 콩나물국을 떠먹었다.
"너 또 전화 와. 니네 팀 또 야근이야? 밥은.. 하긴 그게 밥이냐. 내가 치울게 얼른 가"
"미안미안.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게. 나 간다!"
얘 또 지갑 두고 갔네. 원필은 간의 테이블 위에 고스란히 올려져 있는 지갑을 들어보였다. 후두둑. 명함과 빽빽한 메모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꼭 어디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곁에서 보는 모습이라곤 가끔 태워주는 차 안에서 쪼그려 잠들거나, 밥을 국처럼 마시거나, 전화를 받는게 다였다. 그, 이번에 올려보낸 기획서는 어떻게 됐지? 까먹은 거 아냐?
*
슬슬 더워지기 시작한다. 추운 밤을 보낸지 얼마나 되었다고 날씨는 부럽도록 변덕스러웠다. 뜨거운 햇살에 잎은 녹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점점 계절은 풍성해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워졌고, 다양한 행사가 압축된 달일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환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제외하고 이 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섞여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다, 나 빼고.
"은희씨는 꽤 까다로워. 꽃색깔도 레드계열은 싫어하고, 작업실에 드라이 플라워 들이면 아마 우리랑 영영 계약 안 할껄. 칼럼니스트 중에 탑이잖아. 원래 탑들은 좀, 그런 가봐"
열라 까다롭고. 까지는 덧붙이지 않았다.
꽃향기가 향기롭기는커녕 어떤 향인지 구분도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강 고를 수는 없어 제 뒤를 쫄래쫄래 쫓아오는 인턴을 붙잡고 메모를 읊었다. 서당개가 이것보단 핵심도 더 잘 짚을텐데. 핸드폰을 들어 목록을 체크한 ㅇㅇ는 코트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강작가님은요?"
"어?"
"강작가님 것도 보내야하지 않아요? 7월호 계약 때문에"
"..그렇지"
회사는 신예소리에서 이제 꽤나 대우 받는 위치로 향해가는 영현의 눈치를 보곤 했다. 가끔 타 잡지사와의 단독 인터뷰나, 신작 발표회가 잡히면 팀원들을 달달 볶아대기 바빴다. 그렇기에 영현의 행보에 발빠르게 꽃이나 뿌리고 싸바싸바 해야 한다고.
"헐"
큰일났다.
주머니에 없으면 아마 원필에게 가있을 것이다. 털릴 것도 없어 큰 문제가 제기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용할 법카가 거기에 있는 것은 관자놀이를 욱씬거리게 만들었다. 나 요즘 진짜 왜 이러냐. 특별히 문제가 되는 상황이 존재한다고 하기 뭐한, 평범한 하루가 버거웠다. 영현에서 벗어나도 이건 고질적인 문제였다. 그 문제의 원인이 나인걸까? ㅇㅇ는 고개를 털어내고 휴대폰을 찾았다.
정처없이 걷다보니 다시 개찰구 앞이다. "ㅇㅇ씨는 뭐 의견 없어?"라는 질문에 어물쩍 넘기려다 콕 찍혀버렸다. 진짜 하고 싶은 말도 생각도 없는 걸 어떡해.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모르겠다는 윤팀장에 말이, 비난이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수긍했다. 나를 향한 비난에 수긍한다. 나는 나에게 비난을 꽂았다.
-"어디야?"
"어? 어. 여기, 옥탑 가려고"
-"근처인데. 잠깐 봐"
"그럼 나 옷만 갈아입고 근처에서 봐"
쌀쌀한 밤바람에 가디건을 다시 여몄다. 좀처럼 한결 같은 날씨를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끔 날은 먹구름을 잔뜩 몰고왔다. 옥탑으로 가는 동안 빗방울을 맞지 않을 수 있을까. 피하고 싶은 마음마저 흐릿했다. 또각또각. 생각보다 일찍 고요의 틀에 담긴 골목이 조용했다. 또각거리는 힐과 비스무리한 소음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소나기인 것 같았다. 한 바가지를 그대로 부어버리는 것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굵은 빗방울은 자꾸만 ㅇㅇ를 때리고 옷깃 안으로 젖어 들었다. 꾸역꾸역 올라가는 언덕길이 오늘따라 벅찼다. 필히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집에 도착하면 쓰러져 잠들고 싶은 욕구가 그득했다.
-다음에 볼래? 22:43
현관 불이 깜빡거리다 이내 점멸했다. 오래가지 못할 것 같더니만, 버텨내는 것도 어제가 마지막이었나보다. 새삼 꺼져버린 전등에 얼굴이 비쳤다.
아무리 지쳐도 스위치를 켜면 눈을 떠야 하고 오늘을 살아내야한다. 다가오는 내일의 기대 대신, 지난 오늘의 따뜻한 마무리 대신 그저 살아냈다는 의의 하나로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러모로 파삭 꺼져버린 전등이 자신을 투영했다. 어쩌면 이 시기에 혼자라는 사실만이 유일한 다행이다. 동시에 불행이었다.
***
"ㅇㅇ야"
"응?"
"아"
입 안으로 쓰다못해 팔짝팔짝 뛰어야 할 정도의 아린 맛이 감돌았다. 나 혹시 너한테 뭐 잘못했어? 며칠 전 졸업한 선배에게 빌린 블라우스를 입다가 자취방을 뛰어다녔다. 풀떼기를 입 안 가득 먹은 듯 쓴 맛에 놀란 ㅇㅇ보다 더 놀란 영현이 금방 손에 들린 바나나 우유를 입에 물려 주었다. 미안, 미안해.
"아직도 써?"
"써!"
"미안해. 데우면 더 쓰다고 했는데, 내가 깜빡했어"
"쓰다고오- 강영현, 씨이.."
청심환 하나 먹이기가 이토록 힘들었다. 첫 면접이라고 온갖 두려움이란 두려움에 꽁꽁 메인 ㅇㅇ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몇 존재하지 않았다. 영현은 ㅇㅇ의 입에 마카롱을 물려준 다음에야 안도할 수 있었다. 입가에 묻은 가루를 엄지로 털어내고 두 눈을 마주 보았다.
"괜찮아. 잘할 거야"
"망치면?"
"그래도 돼"
"..진짜 별,"
간신히 차분해지려던 차였다. 가라앉은 호흡으로 떨림을 잠재우고 집을 나서려다 끼어든 원필만 빼면 완벽했다. 저걸 콱.
"아니. 왜 연애질을 또 내 집에서 해. 안 꺼지냐? 안 꺼져? 나 진짜 세 받을거야. 오만원씩 꺼내 놓고 가. 오픈 하고 오자마자 이게 무슨 추태야"
"오늘 첫 면접인데 말을 꼭 그렇게 해야 돼?"
"싫음 나가. 여기 내 집이라고!!!"
따뜻한 양손이 귀를 막았다. 최대한 오늘은 좋은 것만 들으라는 손길이었다. 그런 영현을 올려다 보니 씩 웃어준다. 김원필이 하는 지랄이 한 두번이냐고. 단내 풀풀 날리는 연애질에 말라 죽어가는 것은 원필이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는 꼭 폭파 시킨다. 짜증나 시발.
"진짜 안 데려다줘도 돼?"
"같이 가면 나 진짜 떨려서 제대로 못할 것 같단 말이야"
"계단까지만"
"싫어"
면접장으로 진짜 출발해야하는데 내내 쫓아다녔다. 물가에 내놓은 자식도 아니면서 안절부절하는 영현을 앉혀두고 옥탑을 뛰쳐나왔다. 쏟아지는 햇살은 여름을 불러와 등딱지가 뜨끈했다. 뭐 어때. 진짜 망치기야 하겠어?
지독하게 암울하다고한들 눈 앞에 닥치지 않는다면 부정적이고 싶지 않았다. 이 시기는 불안감만으로도 감당해야할 게 너무 많다. 헐떡거리는 신을 다시끔 고쳐 신고 계단 앞에 서자 아찔했다. 첫 걸음이라는게 이런 거구나.
패기있게 마음을 먹었지만 계단을 내려가기가 겁났다. 갑갑한 정장이 자꾸 목을 조인다. 1차가 붙었다고 2차까지 손쉽게 붙여준다면 이 자국의 취업난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사라졌을테다. 바늘구멍 안으로 목을 비집어 넣을 수 있을까. 손톱을 까뜩까뜩 물어뜯는 ㅇㅇ를 불러 세운 영현이 말했다.
"ㅇㅇ야"
"어?"
발 앞에 놓인 건 블랙 펌프스였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놓여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눈속임이라던가, 아님.
"...마음에 들어?"
"마음에 안 들어도 든다고 해. 저거 처음 신으면 까진다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 아아악! 입 막지마!"
곁에 서있는 두 사람이 준 선물일 거다. 그중 아마 괜히 허공에 시선을 두고 목을 가다듬는 영현일 확률은 거의 전부였다. 사회를 앞둘수록 손을 벌리거나, 용돈이라는 보상없는 돈을 요구할때 등에 식은땀이 한 줄기씩 늘어나는 나이가 되었다. 보상 없이 남의 돈 받아먹으면서 밥벌이 문제로 전전하는게 그 누구보다 서럽다. 그 서러운 매일 속에서 아끼고 아껴 샀을 구두를 앞에 두고 망설였다. 받아도 될까. 보다못한 원필은 발목을 쥐고 신을 신겼다.
"다치잖아. 막 넣지마"
"시간 없어. 얘 진짜 가야 된다고"
"끝나면 전화해"
"..응"
"망쳐도 전화해"
"너 지금 악담해?"
"괜찮다고"
"어?"
엎어져도 괜찮다고. 너 엎어져도 나 여기서 기다리다가 데릴러 갈 테니까.
"잘 하고 와"
알겠지?
영현은 끝으로 ㅇㅇ를 안아주었다.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을 모두 받아내며 꼭, 안아주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원필이 보지 않는 사이에 얼굴에 많은 입술 도장을 찍은 것은 영영 비밀이다. 이거 알면 아마 우리 여기에 발 못 붙일지도 몰라. 알지?
***
어쩔 수 없다. 이 공간에서 잠에 들기 바란다면, 떠오르는 잡생각들도 견뎌야 한다. 감수해야 하는 그리움이 저도 모르게 발걸음으로 나타는 것 같았다. 오늘처럼 늦은 퇴근이 아니어도 자꾸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영현을 포함한, 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관계에서 지쳐간다는 걸 느낄수록 영현이 그리웠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만나면 안 된다.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자격을 잃었으니까. 자꾸 연회장에서 보았던 강영현과 내 모습은 까끌거리는 이질감으로 휩싸였다.
목이 갑갑해졌다.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헤어지면서 영현과 제 자신 둘에게 너무 큰 구멍을 내놓고 후회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헤어진 뒤 강영현의 모습이 얼마나 지쳤는지, 힘들어하는지 알기 때문에 더 아팠다. 마주칠 때마다 입을 뻐금거리는 것마저 인식하고 싶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후으,"
크게 목 놓아 울고 싶었다. 목구멍과 가슴에 부은 콘크리트 때문에 울음조차 쉽사리 터지지 않았다. 아무리 두드려도 부서질 것 같지 않았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제자리 걸음이 끝나지 않으면? 이마저 제자리 걸음인 걸 모르게 된다면. 똑똑. 먹구름이 좀처럼 거치지 않는 옥탑의 문을 누군가 두들겼다.
"뭐야?"
"뭐긴 뭐야"
김원필이지.
젖은 가디건의 물기를 털어내며 봉지를 흔들어 재꼈다. 돈 좀 써서 곱창볶음도 사왔는데, 상 좀 펴지? 백날천날 질소 과자만 사들고 오던 장족의 발전을 또 칭찬해줘야지 내가.
원필은 조그만 상 위에 여전히 김이 나는 곱창 볶음과 맥주를 세팅했다. 강영현이 술은 맥이지 말라고 했는데. 말릴 새도 없이 이미 한 캔 시원하게 따서 넘기고 있는 ㅇㅇ를 바라보며 원필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오지 말라고 하면 걱정이 배가 된다. 영현보다 원필은 조바심이 강했다. 그저 영현처럼 지켜보기엔 탁해진 두 눈이 잠을 방해했다.
"천천히 좀 마셔라.. 누가 쫓아와?"
"알았어. 알았어"
"술 먹다 체하고 싶어? 야야"
보다못해 잔을 뺏자 뺏기는 악력조차 힘이 빠져있는게 느껴졌다. 목이 뜨거웠다. 평소에 먹던 거 뺏으면 재빠르게 젓가락이라도 집어던지더니. 이렇게까지 걱정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맥아리 없는 그림자가 자꾸 시선을 잡아 끌었다.
"여기 있는 건 좀 괜찮아?"
"원필아"
"응"
"나 아파"
"어?"
아픈 거 같애. 강영현도 보고 싶고, 나는 걔 없어서 아픈데 걔는 내가 없어서 아플까. 사실 내가 아파도 이런 거 따지면 안 되는데. 이런 거 따져서 뭐하려고. 내가 자신이 없어서 상처준게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나 요즘 이상해. 막, 그 막, 있잖아. 다 텅비어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원필아.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뚫린 구멍 사이로 무언가 들어왔다 나가는 것 같은데, 그마저 느꼈다가 감각을 상실하고 만다. 그 누구보다 지친 사람 앞에서 속상한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원필은 텅 빈 맥주캔을 정리하는 척 시선을 피하고 입을 뗐다.
"그 순간에서 넌 최선이었던 거야"
"응?"
툭. 툭. 빗방울이 거세게 창을 때리기 시작한다. 영현이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말을 해줘야 할 시기였다.
"넌 최선의 선택을 한 거라고. 네가 강영현한테 헤어지자고 한 거, 그 판단"
"ㅇㅇ야"
"강영현 중요하지. 네 인생에서 아마 가장하는 사랑하는 사람일테니까. 근데, ㅇㅇㅇ 너만큼 네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강영현도 아니야. 너야. 그러니까 그 순간에, 네가 다치고 있는 것 같은 순간에 너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 속에 강영현이 없더라도"
"넌 최선의 선택을 한 거고, 넌 널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 거야. 어떤 사람도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 시키는 선택을 하는 걸 바라는 사람은 없어"
그 관계에서 너도 상처 받았잖아. 준 것만 생각하고 후회하지마. 그리고 지금 네가 아무것도 못 느끼는 이 시기도 후회하지마. 넌 기억 못 할수도 있는데,
"사람은 속도가 다 다르다고. 그거 네가 말했어. 안 좋은 상황들만 영원한 거 아니야, 참기 힘들면 좀 쉬자. 후회도 그만하고, 생각도 그만해. 안 되면 나한테 다 쏟아"
인정하자. 지금은 뭐가 뭔지 모르겠고, 하는 일마다 잘 되지도 않고, 힘들다고. 인정해버리자. 그리고 우리 좀 여기 앉아있자.
미처 바라보지 못하던 두 눈은 그렁그렁한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이 방법이, 제발 조금이라도 통했으면 좋겠다. 영현이 전하고 싶었던 말들이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게 해줄 수 있었으면,
"무서워"
"알아"
"돌아올까? 모든 게 다 전처럼"
"안 돌아와도"
너 행복할 수 있어.
이건 확신이었다. 섣부르게 가질 수 없는 확신을 원필이 주었다. 가능해.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마. 될 거라고 행복회로 돌릴 것도 아니잖아. 잃을 게 없으면 상관 없잖아, 가능해. 너 분명 행복해질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은 다 인정해버리자.
그제야 막힌 숨과 울음이 터졌다. 조용했던 공간이 울음으로 차올랐을때, 웬지모를 시원함도 끼쳐왔다. 꼬르륵. 터진 울음보가 멈추질 않아 진짜 옥탑이 물바다로 잠겨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조용한 바다가 되도 괜찮을 것 같아. 정말로.
-
실컷 울고 옥탑은 잠들었다. 막무가내로 들어닥쳐 마주한 얼굴보단 꽤 후련한 얼굴로 두 눈을 꼭 감고 잠들어 있었다. 이젠 새근새근 숨을 쉬며 고요를 만들어가는 ㅇㅇ를 두고 원필은 옥탑을 나섰다. 여전히 비는 세차게 쏟아졌다. 에이씨 우산도 없는데.
"뭐야?"
머리를 탈탈 털며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마주한 건 익숙한 차량이었다. 썬팅도 짙지 않아 운전석 창에 기대 잠든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똑똑. 조용한 공간에 노크를 하자 쥐죽은듯 박힌 고개가 들렸다.
"왜 왔어?"
"우산 없을 거 같아서"
"나?"
"아니 ㅇㅇ가"
지금 내가.. 하 참, 기가 막혀서. 원필은 후딱 문이나 열라며 손짓했다. 금새 쫄딱 젖어버린채 조수석에 올라탔다. 뒷자리를 보니 거짓말은 아닌지 새로 산 우산 두 개가 놓여져 있었다. 원필이 팔을 뻗어 우산을 들었다. 설마 가져다주게?
"아니. ..내일도 비온대서, 평상에 놓고 오려고"
"또 내가 가져다 놨다고 뻥까고?"
"잘 아네"
이 허접한 짓을 눈치 채지 못하는 ㅇㅇㅇ도 ㅇㅇㅇ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적어도 강영현은 정상이 아니다. 저렇게 좋을까? 물론 좋을 수 있지만, 저렇게? 두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랑을 한 걸까. 정말 궁금하지 않다가도 간혹 이런 스트레이트를 보면 순간 궁금했다.
"네가 해주라는 말, 했어"
"응"
"물론 너네 문제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더라. 나도 막 네가 해주란 말 말고 이것저것 말하긴 했는데.. 괜찮을까?"
담담하게 말을 하는 동안 원필 역시 얼마나 수많은 감정을 억눌렀는지 모른다. 곁에 있어주면서 티를 낼 수 없지만, 원필은 여전히 영현이 곁에 있는 게 맞다는 판단에 힘을 실은 입장이었다. 영현은 조용히 원필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도, 초조해보이지도 않았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영현은 오랜 시간을 끈 뒤에야 침묵을 깼다.
"지금은 내가 없는 게 맞아"
"좀 더 나아지면, 우리가 서로를 만나도 부담이 아닌 순간이 오면. 그때부터 내 역할 할게. 지금은 조금만 더 자주 옆에 있어줘"
그래. 그렇게 해.
원필은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창을 때리는 빗소리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안 좋은 상황만 영원한 삶은 없다. 꽃밭 같은 말이라고 해도, 분명했다. 다만 이 버거운 상황이 거센 비에 조금이라도 빨리 씻겨가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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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주셔서 감사드리고, 또 오랜 기다림에 지치셨을 분들께 죄송합니다. 길이 상 가독성을 고려해 나누어 올리려고 합니다. 2/3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