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현이 이야기는 과거입니다!
리퀘스트
5년 사귄 전 애인 갑을로 재회하는 썰
w. 랑데부
1.
영현은 복학 이래 최고의 슬럼프를 겪었다. 모자란 등록금 때문에 한 기학를 더 휴학했기에 조급했다. 복학을 했을 땐 다들 어느정도의 내공으로 슬슬 공모전에 문을 두들기느라 바빴다. 영현 역시 그 흐름에 투입 되었다. 낮과 밤의 경계를 모르고, 삼시세끼가 아니라 한 끼나 챙겨 먹으면 대단한 놈이라고 불릴 정도로 숨 가쁜 흐름에서 헤엄쳤다.
"야. 김형완"
"어. 왜"
"강영현 연락 되냐?"
형완은 다크써클로 줄넘기를 하기 직전인 상태로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되겠냐. 걔 이번에도 또 떨어졌대.
"시발 나도 공무원으로 돌릴까..."
그 숨 가쁜 대열에서 나가 떨어지는 청춘들은 수두룩 빽빽 했다. 언제까지나 불명확한 미래에 목 메달고 있을 순 없으니까. 원필은 형완의 뒷통수를 미약하게 툭툭 치곤 동방을 떴다. 이 새끼 죽은 거 아니야?
벌써 나흘 째였다. 슬슬 멘탈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걱정이 되지도 않는 지 ㅇㅇ는 영현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원필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나라도 연락 해 봐야지.
*
영현은 침대 위로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옆에 위치한 협탁 위 휴대폰은 한 시도 조용할 틈이 없었다.
- 야 괜찮냐?
- 떨어질 수도 있지. 우리 다시 힘내서 해 보자!
- 술 먹을 사람 구함. 술이나 퍼 새끼야
- 괜찮아, 다음에 더 잘하면 될 거야. 난 너 믿어
온통 동기들의 카톡 투성이였다. 영현은 그 메시지들을 눈대중으로 살피고 뒤집었다. 일일이 답장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탈락에서 파생된 자괴감이 사그라지다가도 날아오는 위로들이 불씨를 살리곤 했다. 술이나 먹자. 술이나. 나흘 내내 혼자 소주를 깠으면서 결국 외투를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흔한 위로주를 배로 마시고 나니 속이 상하좌우로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계속 저와 비슷한 처지들의 한탄도 듣고 싶지 않아 영현은 먼저 일어났다. 이 길을 택했으니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들이었다. 의연함과 끈기를 갖자. 솔직히 다 개소리였다. 의연함을 갖기에 영현은 이미 스물의 치기를 부리기 민망한 나이였고, 끈기는 시발. 돈이 있어야 가능한 놈이었다. 자꾸 저 자신을 깎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걸 원한 건가. 불어난 두려움은 자꾸 포기에 발을 들이려 했다. 가서 잠이나 더 자야지.
"어?"
영현이 운동화를 벗다 주춤 했다. 우선 매트리스 옆 일열로 세워 두었던 패트병이 모조리 사라졌다. 플러스 팩소주도. 물이랑 술만 처마신 걸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울 기운도 없어 방치한 것들이었다. 도둑인가? 상식적으로 도둑이 청소를 하고 가진 않으니 영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영현은 나름 작업실로 둔 방문을 열었다. 결과가 나오자마자 꼴도 보기 싫어 잠궈 두었던 방이었다. 영현은 그제야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책상 위로 너저분했던 노력의 시간들이 파일에 차곡 차곡 끼워져 있었다. 며칠 째 방전 되었던 노트북은 전력을 먹으며 에너지를 채우고 있었다. 옆으론 영현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그가 원하는 방향에 맞춰진 책과 공모전 자료들이 꽂혀 있었다. 영현은 노트북 위에 붙여진 메모지를 읽어 보았다.
-열심히 살았다. 강영현
동글동글한 글씨 밑으로 나름 영현이라고 그려둔 뚱냥이가 보였다. 영현은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응?"
묘하게 억눌린 전화벨은 너무도 익숙한 틈새로 들려왔다. 영현은 조심스럽게 붙박이장 앞으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너는 거기에 있었다. 아니 ㅇㅇ는 그곳에 있었다. 무릎을 안고 기대 잠든 ㅇㅇ가 보였다. 영현은 ㅇㅇ의 조용히 다가가 앉았다.
"ㅇㅇ야"
"...ㅇㅇ야"
다리 저릴텐데. 목도 아플텐데.
영현은 조금 더 다가가 거리를 좁혔다. 곤히 잠든 ㅇㅇ를 깨우는대신 꼭 끌어 안았다. 불도 켜지 않은 좁은 골방에서 유일한 온기마냥 끌어 안았다.
"...응, 왔어"
그 유일한 온기는 다시 영현을 끌어 안았다. 너 안 와서, ...졸린데.
영현은 눈도 뜨지 못하고 웅얼대는 ㅇㅇ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어느새 함께 감내하고 있는 이 온기를 영현은 다시 끌어 안았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이 아픈 순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을 망각할만큼 행복한 순간도, 가끔은 꿈같다고.
"...어떻게 왔어"
너는 내 영원한 꿈이야.
2.
"갑자기?"
"보고싶어했잖아"
그렇긴한데 너 바쁘지 않아? 의심쩍게 표를 받아들면서도 좋은 티를 숨기지 못하는 것이 ㅇㅇ다웠다. 진짜 가? 그럼. 진짜? 진짜. 확답을 듣자마자 필기구와 책을 집어 넣었다. 야무지게 커피까지 챙겼으면서 차마 신난 발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중앙 도서관을 뛰쳐 나와버렸다.
"천천히. 천천히 가자, 아직 안 늦었어. 시간 많아"
"싫어. 빨리 갈래, 빨리 가자. 응? 가자아- 가자고오-"
강영현은 죽어도 ㅇㅇㅇ를 못이긴다는 모든 사람이 아는 공식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ㅇㅇ다. 지지난주 만개했던 벚꽃보다 화사하고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손을 붙들었다. 영현은 그 손을 꼭 쥐었다. 절대 놓치지 않게. 놓칠 수 없을 정도로 꼭 쥐고 정문을 향해 달렸다.
*
- 미디어북스 공모전 결과 확인한 사람 18:30
- 원아워는 결과 떴어? 18:33
- 그거 삼일 전에 떴어 병신아. 삼일 전에 웬만한 거 다 떴는데 확인 안 했지? 18:46
영현은 휴대폰을 뒤집어 버렸다. 더이상의 메시지는 자칫 잘못된 선택을 종용하고 말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은 전부 빼놓고 꼭 영현과 보고싶었던 연극을 손 꼭 잡은 채 집중하고 있었다. ㅇㅇ는 마치 영현의 손을 제 손에 꽂고 충전하는 사람마냥 잡고 있을수록 입가에 미소가 깊어졌다.
"...잠시만"
"응? 응"
비행기모드로 잠수타려던 속셈을 전부 꿰뚫고 있었다는듯이 전화가 쏟아졌다. 발신자가 한둘이 아닌 것으로 보아 받아야 했다. 놓는 손등에 입술 도장을 꾹 찍고 웃어보이는 ㅇㅇ의 행동에 잠시 움직임이 멈추었다. 순간이었지만 이 손을 놓는 것이 두려웠다. 해봤자 얼마나 놓겠다고. 그러나 그 얼마나가, 예상보다 길어질 것만 같은 불안함이 뱃 속에서 쑤셔왔다. 이 손을 놓는 순간 누리고 있던 행복을 기다렸다는듯이 수거해가고 지독하게 아플 것만 같았다. 나만? 여전히 자신의 손을 쥔 채 집중한 이 사람은?
"여보세요"
- "영현이니?"
끝끝내 연극이 끝날 때까지 영현은 다시 극장 안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번번히 떨어지는 실패에 몇 번 더 이름 올렸다고 국제 전화가 날아오고, 실망과 혼탁한 앞날을 상기시켜주었다. 사실 몇 번 더 이름 올린 상황이 언제 갈무리 될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고, 영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꼭 불안하게 만들었다. 선택한 길을 옳다고 말해주는 건 소수였고, 상황과 타인은 눈 앞의 실리의 편이었다.
- 미안해. 먼저 가볼게 19:02
*
-헤어지자
뜬금없이 띡 보낸 네 글자가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이건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했다. 보낸 사람도, 받은 사람도 심장이 발 밑 그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영현은 휴대폰을 밀어두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 지구 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욕들이 자신을 뒤덮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ㅇㅇ와 자신 모두 망칠 것만 같았다. 그와중에 망칠 사람에 자신이 들어간다는 생각조차 거지 같았다. 더 망가질 수나 있고? 자조적인 헛웃음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영현의 예상과는 다르게 ㅇㅇ에겐 문자 한 줄 오지 않았다. 애써 학교에서 만나면 피하려는 노력의 다짐조차 물거품이 되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었고, ㅇㅇ는 그림자조차 비추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진짜 회생 불가네"
그리고 잘 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지겹도록 싫었다.
왜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연기를 흡입하고 사는 지 알기 직전이었다. 졸업 하고도 등단에 실패해 결국 영업 사원으로 뒤늦게 발 뺀 선배가 주머니에 처박은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았다. 한 번 빨고는 열린 온 구멍에서 물이 흘렀는데. 그 매캐한 기억이 차라리 이 지겹고 치졸한 감정을 잠식시켰다.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긴 해. 너"
"콜록, 콜록! 아, 컥, 켈록, ..너"
아무 생각 없이 붙인 담배를 한 모금 빨자마자 질식하는 것만 같았다. 막으려 해도 기침이 앞다퉈 내뱉어졌다. 한 손은 벽을, 다른 한 손은 목을 부여잡고 컥컥 거렸다. 깊게 한 모금 빨았다 한참을 쌩쇼를 한 뒤에야 영현은 철저히 자신을 가린 그림자를 향해 올려다 보았다.
"걔가 보냈어?"
"..."
"할 말 있음 하고 가"
누가보면 입에 돌덩이라도 거하게 올려둔 줄 알겠다. 영현은 어느새 꽁초가 된 담배를 바닥에 두고 짓이겼다. 그리곤 새 개비를 입에 물었다. 물자마자 불이 들어왔다. 세 번째는 할 만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논리가 여기까지 적용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때까지 원필은 말이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에 있는 무언가 치솟을 것만 같아 표정을 읽을 생각조차 무시했다.
"걔는 싫대?"
"자꾸 걔, 걔 거리지 마. 니 기억력이 거기까지여서 이름까지 잊어먹고 뒈져버린 거 아니면"
"그럼 왜 왔는데?"
결국 끓어오른 짜증이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폐부까지 들어찬 연기를 내뱉으며 원필의 눈을 보자마자 다시 숨이 턱 막혔다. 질식할 것 같은 연기에 막힌 것과는 다른 감각이다. 영현은 또 손에 있던 담배를 한번 빨아 들이더니 바닥으로 내꽂았다. 그리고 원필의 어깨를 거세게 치고 골목을 떴다. 과방에 두고 온 가방을 챙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무작정 자취방으로 걸었다. 과방으로 돌아가는 것도, 원필에게 사과를 하는 것도, 걸음을 멈추는 것도. 모두 목에 칼이 들어와 쑤신다한들 싫었다.
"..."
턱. 철문이 닫히자마자 영현은 얼굴을 감싸쥐었다. 주저앉은 현관 바닥에서 자꾸 시린 기운이 올라왔다. 이 시린 기운에 잠식해 얼어버렸으면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생각할 틈 없이, 숨 쉴 틈 없이. 얼어버려서.
원필의 눈동자는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구태여 숨기려하지 않았으니 더욱 선명했다.
누가봐도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올 수 밖에 없었다. 다 ㅇㅇㅇ 때문에. 다 ㅇㅇㅇ 보내서. 다, ㅇㅇㅇ가 힘들어해서. 다 ㅇㅇㅇ가 걱정해서.
밑도 끝도 없이 작아진 제 자신을 끌어안았다. 여전히 ㅇㅇ를 힘들 게 하는 순간들은 익숙하지가 않았다. 익숙하지 않아 차라리 이런 고통 없이 그 애가 관계를 끊어내줬으면 바라기도 했다. 불행을 함께 겸하기에, 너는 너무
- 내일 9시에 집 앞으로 갈게 16:47
- 영현아 16:48
*
"아씨, 쫌만 따뜻하게 입고 나올 걸"
춥지 않아야 하는 계절이 왔지만 여전히 밤은 시렸다. 1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대강 알림으로 읽었거나, 읽지 않았거나, 읽었지만 나오기 싫은 것 3가지 상황이다. 그 3가지 상황 중 바라는 것은 두 번째였고, 예상된 상황은 세번째 시나리오였다. 기다리다 골목 벽에 스치며 올이 풀린 스타킹 구멍 사이로 자꾸 찬 바람이 쿡쿡 찔러댔다. ㅇㅇ는 패딩을 너무 일찍 옷장 안으로 집어 넣은게 아닌가 후회했다. 골 사납게 입김까지 불어가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 강한 추위는 아니었으나 그 추위 속에 오래 있다보니 볼이 빨갛게 올라왔다.
- 어디야? 12:16
- 너 설마 아직도 기다려? 01:33
- 강영현한테 전화한다. 나 02:04
이, 미친 놈이.
가끔 쓸데없이(전혀 쓸데없는 걱정 아님) 걱정을 한다. 꽁꽁 언 손으로 다급하게 타자를 쳐댔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말라고옥- 하지말라,
답장에 심취해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도 듣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은 가디건이 어깨를 감싸안고, 그 누군가의 온기가 ㅇㅇ를 끌어안았다. 쥐고 있는 휴대폰이 아우성이었지만 답할 수가 없었다. 끌어안은 힘조차 미약해 섣부르게 그 어떤 것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좀 걸을까? 밖에 시원하지"
가디건에 도는 열기로는 걷는 게 맞았다. 답이 없는 영현의 손을 꼭 잡고 발걸음을 돌렸다. 동네 공원을 두고 자꾸만 걸었다. 어딘가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입을 열어야 할 것 같았고, 영현은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문득 시린 바람이 불면 자신의 손을 주머니 속으로 넣는 ㅇㅇ를 내려다 보았다. 이 순간마저 다신 아침이 오지 않을만큼 어두운 하늘을 비추는 달을 닮았다. 앞이 보이지 않은 삭막하고 찬 어두움 속에서 아침이 길을 잃을까, 이 시린 어둠이 조금이라도 환해지기를 원하는 달을.
"ㅇㅇ야"
"어? 추워?"
춥냐고 물으면서 금방 시선이 땅으로 향한다. 아니, 땅에 꽂힌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을 제공하는 건 나다. 자꾸 환한 달빛이 밤구름에 잠식된다. 환하다 못해 부신 빛이 시야에서 자꾸만 사라진다. 어둠은 자꾸 그 부신 빛을 좀먹는다. 그 좀먹는 게, 어둠인지 나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니, 분간이 아니다. 그건 나였다. 부신 너를 자꾸만 사라지게 하는 게.
문득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영현은 생각했다. 그럼 ㅇㅇ의 봄은 시리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본래 계절 속에서 본래 밤 속에서, 너는
"행복해?"
행복하지 않았을까.
3.
"나 양치만 하면 안돼?"
"같이 해"
영현의 등짝에 거북이 등껍질처럼 ㅇㅇ가 달라붙었다. 어쩔 수 없다. 영현은 ㅇㅇ를 업고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거울에 나란히 붙은 칫솔을 뽑았다. 입에 물려주니 한 손으론 목을 꼭 끌어안고 한 손으론 열심히 윗니 아랫니를 오가며 칫솔질을 했다. 그러면서도 자꾸 감기는 눈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몇번이고 영현의 등에서 흐물대다 떨어지려는 위기를 반복했다.
"안되겠다"
영현은 칫솔을 물고 변기커버에 앉았다. 제 허벅지 위에 ㅇㅇ를 앉히니 좀 더 안정적인 자세를 잡고 졸았다. 목적이 불투명해진 채로 영현의 목을 끌어안은 것은 놓지를 않았다.
"많이 졸려?"
"..아니아니"
"가서 좀 더 잘래?"
"..아니아니"
"나 사랑해?"
"..아니아, 응. 사랑해"
참을 수 없어 칫솔을 빼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 거품! 거품이 이마에 자국을 남겼다. 뽀글뽀글 올라오던 거품이 사그라들때까지 꼭 끌어안고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 ㅇㅇ야.
"느어 여깅서 미앙하다고 하기만 해"
(너 여기서 미안하다고 하기만 해)
"입 헹굴까?"
"저아"
(좋아)
*
행복을 물었던 밤, ㅇㅇ는 이렇게 답했다.
"난 한 번도 널 빼놓고 행복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
"그래도 빼놓고 생각하라고하면 노력해볼게"
"미ㅇ,"
"근데 그때까진. 너 없이 행복해지기 전까진"
"나 진짜,"
다급하게 ㅇㅇ의 뺨을 감싸쥐었다. 걷잡을 수 없을만큼 차오른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다. 눈가가 짓무를정도로 세게 눈물을 닦아내도 소용 없었다. 영현에게 부담이 되기 싫었지만, 동시에 떠나기 무서웠다. 살점이 뜯어지게 물어 뜯고, 그 살점이 돋아날 때까지 끌어 안았으니까. 그 밖의 시간 속에서 너는 항상 존재했으니까.
"아플, 아플 거 같,은데"
"ㅇㅇ야"
"네 옆에 있으면서, 네가 힘들 때도 불행하다고 느낀 적 없는데"
네가 없으면 불행해질 거 같아.
*
"...뭔 술을, 축하파티 제삿상으로 만들려는 새끼 누구야. 너야?"
"쟬껄"
공식적인 등단은 아니었지만 꽤나 큰 공모전의 수상이었다. 미약한 성공이라도 좋으니 그 미약함에 목말라 까끌한 갈증에 시달리던 찰나였다. ㅇㅇ는 영현이 결과를 전해주기 전까지 묻지 않았다. 괜히 꼬치꼬치 묻는 것은 자신도 미치도록 싫었고, 성공이든 실패든 영현의 입에서 듣고 싶었으니까. 매번 들려오지 않던 간절함이 그 누구보다 간절한 사람의 입에서 듣는 순간 엄청난 중력이 끌어당긴 기분이었다. 좀처럼 일어서질 못했다. 겨우 한 계단 올라온 것처럼 보였지만 그 계단이 절벽만큼 날카롭고 치솟았다는 사실을 ㅇㅇ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만 마셔. 그만, 애 죽어"
"나 많이 안 마셨는데?"
"아니 강영현. 이거 시바, 등단하기 전에 황천길 먼저 올려보내고 싶어? 야야 일어나!"
"으엉, 나 속 답답해. 밖에 나갔다 올래"
"내빼지 말고 강영현 좀 일으켜봐. 야 ㅇㅇㅇ!"
"흐엉 안 들린다. 안 들려. 이제부터 아무것도 듣지 않기로 했어. 시끄로우니까 니가 잘 챙기구 이쏘-"
강영현과 제가 동시에 손 잡고 이 세상 뜨기 전에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와야 할 것 같았다. 비틀비틀 주점을 나서자마자 보인 건 형완이었다. 술집에서 종일 술만 퍼먹더니, 이 새끼 데리고 갔다 와야지.
"뭐해. 편의점 가자"
"야"
"엉"
"너 강영현이랑 결혼이라도 약속하고 그러냐?"
이 새끼도 거하게 취했고만.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주정법일까.
"너도 같은 과 동기 아냐? 너는 이미 앞길 안 보이니까, 강영현 졸라 푸쉬해서 뭐 둘이 살림이라도 합치게? 그래서 뭐 존나 먹여 살려준대? 라인 한 번 기똥차게 만들어 타네"
어딜가나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허우적 거리는 놈들이 있다. ㅇㅇ는 격앙된 형완의 말을 듣고 손짓했다. 응 더 해봐.
"솔직히 너도 네가 이 바닥에서 못 벌어 먹을 거 잘 알아서 이런 거 아냐- 존나 속 보이네. 시바알. 질투 같은 거 안 하지? 그런 거 할 시간에 네 라인 앞길이나 잘 닦아야 하니까. 어?"
"어. 질투 안 해"
핏대가 설 정도로 제 감정에 못 이겨 말을 내뱉는 형완을 ㅇㅇ는 그저 바라보았다. 아, 아이스크림 사가야 하는데. 강영현 곧 죽을 것 같았는데.
"그런 생각은 딱 너같은 놈이나 하는 거야. 지가 얼마나 열등감에 쩔어있는지, 지가 얼마나 좆도 안 되는 실력으로 비비는지 관심 개나 줘버려잖아. 그리고 남들이랑 같은 속도에만 맞춰서 가려고 아등바등 집착하는 놈. 그런 놈들이 하는게 질투야"
"시바알, 너 말 다 했냐?"
"말 다 안 했다. 십새꺄. 너는 인정을 죽어도 못하는 거야. 걔랑 나랑 속도가 다른 거라는 걸. 누가 잘 나고 못나고 그런 거 없어, 걘 걔의 속도가 있고 나는 내 속도가 있고, 길이 다를 수도 있다고. 근데 왜 걜 미워해야 돼? 그리고"
잠시 잊고 있던 파이터 본능으로 ㅇㅇ는 입을 털었다. 나의 청춘을, 그리고 강영현의 시간을 그딴 식으로 밖에 서술하지 못하는 거지?
영현은 영현의 속도에 맞춰 너무도 잘 해내고 있었다. 분명했다. 이렇게 가다보면 분명 영현이 흔들린 시간에 대한 보상은 따라올 거라고. 아무도 믿지 않아도, 영현이 믿지 않아도 ㅇㅇ는 믿었다. 함께한 모든 순간 속에서 증명할 수 있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비록 영현처럼은 아니어도 펜을 잡은 곳에서 일할 거였다. 펜을 잡을 것이고, 프로젝트를 기획해 잡지에 수록할 것이고,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 나갈 것이다. 가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데 그거 믿는다고 지구가 뒤집히진 않잖아? 우리는 다른 길을 가도, 영현이 좀 더 앞선 것 같아도 사실 자신의 속도에 맞춘 것이다.
"어떤 새끼든 네 기준에 열 뻗쳐서 잡아 족치고 싶으면"
"상대를 잘 골라"
"한 평생 남 뒷꽁무니만 바라보고 사는 새끼가 얼마나 대단한 새끼를 잡아 족칠 지 나도 기대가 된다. 어? 형완아"
힘내. 나 간다.
ㅇㅇ는 형완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입을 탈탈 털었더니 술도 깨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영현이 죽고 못사는 와일드바니가 있는 편의점이 어딘지 기억이 났다.
아이스크림을 한봉다리 사 들어왔을 땐, 이미 자리를 파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술이 깨보이는 영현은 ㅇㅇ가 오자마자 안고있던 과잠을 입혀주었다. 가자. 술은 같이 마셨으면서 영현은 자꾸만 떨어져서 걸었다. 술냄새 난다고. 술이 깨고 있는 것이지, 안 취한 건 아니어서 약간 맛이 간 것 같았다.
"한 개 더 먹을래?"
"괜찮아"
거리를 벌리던 영현은 급기야 ㅇㅇ의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등 뒤에서 오면 뭐가 달라지나. 터벅터벅. 봉다리 하나만 손에 쥐고 잘 따라오고 있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잘 따라오는 것 같더니만 컴퍼스화가 질질 끌리던 소리가 멎어 있었다. 그 소리에 뒤를 돌자 영현은 우두커니 골목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속 안 좋아?"
"ㅇㅇ야"
"응"
거대한 품은 따뜻했다. 뜬끔없는 포옹이었지만 만족할 때까지 안고 있었다. 그러면서 영현의 등이 떨리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모를리가 없다. 술냄새 난다고 쌉소리 하는 것마저 이유가 있는 걸, 365일 중 300일 이상을 붙어 있는 사람이 모를까봐. 당사자가 아닌 이상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순 없다. 타인이 해줄 수 있는 것, 곁에 있는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건. 공감도, 위로도 아니다.
"...잘했어. 수고했어"
"너 진짜, 수고했어"
그냥 그 시간을 알아주는 거다.
숨을 헐떡이도록 우는 등을 끌어안았다. 네 눈물을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으니까. 네 모든 시간을 함부로 재단하고 싶지 않으니까. ㅇㅇ는 영현의 등을 쉼없이 쓸어주었다.
수고했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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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인만큼 다 보여드리고 싶어서 3편으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여러가지 상황에 지친 여주를 믿는 영현이의 이유를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분명 꽁냥꽁냥 행복한 리퀘스트를 바라셨을텐데, 제가 생각한 두 사람의 미래는 과거처럼 불안정하기도 하고 또 단단하기도 한 모습이라 이렇게 풀어내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이번에 데식이들 앨범에 공감 되는 이야기가 많아 수정에 수정을 거쳐 이제 정말 下편 3/3편만 앞두었습니다. 오랜 시간 기다림이 지치셨을텐데 밝지만은 않은 이야기라 우려가 되기도 하네요. 긴 호흡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3/3편과 함께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모두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플챙유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