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란 어항 속 나란 인어 이년 전, 갓 고등학교를 입학한 신입생 시절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이동혁의 복잡한 여자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그와 사귀었다 헤어지는, 혹은 그에게 어장을 당한 여럿 여자아이들이 방과 후 소각장 쪽에서 그와 대화를 하던 중 울면서 뛰어가는 장면은 분리수거를 하러 자주 그 쪽에 가던 나만이 볼 수 있는 명장면이었다. 그때의 나는 드라마 속에서나 흔히 있을 법한 그런 장면을 보며, 울면서 뛰어가는 여자아이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그 여자아이가 뛰어가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곧바로 휴대전화에 시선을 내리꽃는 이동혁을 보며 절대, 절대로 저런 남자와는 말도 섞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런데, 그런데 도대체 왜. "여주야." 현재 지금 나는 왜 너란 어항 속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지. 미끼를 무는 순간, 물고기들은 자신이 그물망에 걸려 들어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다 이윽고, 마침내 자신이 그물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는,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는 사실 또한 인지해 버린다. 나 또한 이동혁이 흘린 미끼를 문 순간, 그의 복잡한 그물망에 얽혀 들어갔다는 사실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그의 어항 속에 갇혀 있게 되었다. "어? 소각장?" 시작은 간단했다. 새학기 첫날, 처음으로 멀리서가 아닌 가까이서 본 그는 참 잘생겼었다. 동그란 눈, 동글동글 하면서도 부드럽게 쭉 뻗은 콧날, 눈 코 입이 다 들어가는 것이 신기한만큼 작은 얼굴. "너 소각장 그 여자애 맞지? 옆에 앉는다?" 와, 잘생겼다. 옆에 앉는다며 싱긋 웃는 그를 나는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새학기 특유의 봄 향기에 얹혀진 너의 미소는 너에 대한 나의 편견을 조금씩 묻어 버리기 충분했다. 근데, 그거 뭐야? 나 줄려고? 멍하니 자신에게 머물러있는 나의 시선에 잠시 머물던 너의 시선은 이내 계속 내가 만지작 거리고 있던 분홍색 복숭아맛 마이쮸로 향했다. 너도 새학기 첫 날이라 마이쮸 챙겨왔구나? 나도 짝꿍 주려고 챙겨왔는데. 나를 보며 공통점을 찾았다는 듯 신나하며 자신의 자켓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그였다. "자, 여기." 난 포도야. 넌, 복숭아네? 아마 우리 3학년이라 반 학기동안 그대로 짝일텐데, 잘 부탁해. ...그래. 그가 나에게 건넨 마이쮸 하나를 시작으로 내 마음속에서는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거친 파동이 일으켜지기 시작했다. 그 날이, 내가 그에게 복숭아맛 마이쮸를 건네고, 그가 나에게 포도맛 마이쮸를 건네었던 그 새학기 첫 날이 파동의 시발점이었다. '집중 해.' 오후 2시, 식곤증 때문인가, 하필이면 창가 쪽인 자리 때문인가. 따사로운 봄 볕을 이불 삼아 희미하게 들려오는 선생님의 말씀을 자장가 삼아 턱을 괴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의 교과서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쓰여졌다. 너무 졸려. 반쯤 눈이 감긴 채로 그를 쳐다보자 이런 내가 많이 웃긴지 피식, 웃음을 짓는 이동혁이었다. "으어어." "이따 깨워줄게. 쌤 몰래 좀 자. " "으허, 그럼 나 15분만..." "알겠어." 그렇게 숙면을 취해 버렸다. ...망했다, 진짜. 어떡하지, 쌤이 뭐라 하셨을 것 같은데.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잠에서 깬 내가 들은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가뜩이나 수업 태도 중요시 여기는 쌤인데.. 내 생기부... 이동혁에게 왜 안 깨워줬냐고 따지려 감고있던 눈을 번쩍 뜬 찰나, "...어." "...." 나를 바라보며 책상에 엎드려 있는 이동혁에 심장이 놀라 자빠질 뻔했다. 어, 깼다. 두 뼘도 안되는 거리에 놓여진 이동혁의 얼굴에 나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라져가는 순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알만 굴리고 있던 나를 본 동혁이 느릿느릿하게 말을 뱉었다. 야, 왜... 부끄러움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쌤이 너 깨우라고 하는데,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너 아프다고 했어." 왜 안 깨워줬냐는 내 의도를 충분히 파악한 이동혁이 여전히 느릿느릿, 대답했다. .. 어, 고마워.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밖에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어느 덧 일주일,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정신차려 보니, 나는 너에게 빠져 허우적 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소각장의 명장면이 자꾸 되풀이되며 그에게 빠지면 안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이미 나의 마음 속을 차지해버린 동혁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는 불가항력이었다. 빠져 나가야지 하고 아무리 다짐해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없다. "김여주, 오늘도 독서실 같이 갈거지?" "나 오늘 청소인데." "기다리고 있을게, 밖에서." 그러든가.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다르게 어느 새 내 광대는 올라가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이씨, 좀 내려가라. 뭐 해? 방긋, 올라가는 광대를 애써 내리자, 이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지, 뭐 하냐며 물어오는 그였다. 어, 아니... 괜히 그에 대한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져 말끝을 흐리자, 살풋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였다. "기다리고 있을게, 천천히 하고 와." "이동혁." 어, 다 끝냈어? 복도 창가에 비스듬히 걸터서서 핸드폰을 하고 있던 동혁이 저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고개를 들으며 핸드폰을 교복 바지 뒷 주머니에 넣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가자, 김여주. 순간 훅 끼쳐온 이동혁 특유의 향에, 순식간에 잃어버린 정신을 애써 차리자, 어느 새 내 오른 손을 이동혁의 왼 손이 감싸쥔 후였다. "...어." 응? 왜? 아니, 아니야. 왜? 무슨 일 있어? 눈에 띄게 당황한 나였다. 그런 나는, 정말 순수한 낯빛으로 물어오는 그에게 차마 손을 놔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였고 말이다. ...아니, 정정하자면, 이동혁과 잡은 손이 너무 따뜻해서, 나에게 진심이 아닌 이동혁인 걸 알지만 그와 손을 계속 잡고싶어서, 내가 그를 너무 좋아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였다. ...아니야, 아무 일도. 혹시 교실에 뭐를 놓고 왔냐는 둥, 혹시 어디가 아프냐는 둥 지례짐작을 하며 걱정하는 이동혁에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이런 마음 없는 행동 하나에도 설레여, 동혁아. 혹시, 만약 혹시라도 너가 나한테 하는 이 행동이 어장이라면, 내가 지금까지 너의 그 어항 안에 있었던 다른 사람과는 달리, 단지 너의 어항 속 물고기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특별한, 인어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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