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규빙의글] 이 밤이 지나 잊혀지기 전에 (+빙의글 메일링 합니다)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b/a/f/baf66b60d5dbe2a1a0a3d3b58c27866d.jpg)
(BGM: 2011 신라의 달밤) (BGM: 끝나지 않은 이야기) ※취향대로 골라 들어 주세요! :) * 연한 빛깔의 데님셔츠에 옅은 선홍빛 반바지. 밖으로 나서기 전에 얼핏 본 거울. 파란빛이 잘 어울리는 나와 붉은 빛이 잘 어울리는 너. 그렇지만 나는 붉은 빛을 동경했고 너는 파란 빛을 동경했다. 그리고 너는,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며 웃으며 투덜대던 데님셔츠를 내 집에 두고 떠났다. 우리는 정기적이고 서로에게 엮매이는 사이는 아니었다. 연인. 우리는 연인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처럼 자주 만나지 못했다. 나는 타국에 유학생의 신분으로 머무르고 있었고, 너는 내가 현재도 머무르고 있는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 인기 있는 아이돌이었으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네가 스케쥴로 이 땅에 머무르는 잠시 중에서도 아주 잠시. 그것도 우리 집 주변에서 몰래 만나곤 했다. 자주 만날 수 없던 우리. 그만큼 애틋했다. 그렇지만 우리 둘 다 너무 철 들었던 것이었을까. 그것을 너무 슬퍼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 들였다. 너는 말할 것도 없고, 너보다 어린 나도. 네가 나에게 미안해 하지만 애써 그런 티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린 성숙하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주기적으로 만나진 못해도 우리의 관계는 변함없었다. 연락이 닿는 날보다 간신히 연락이 닿는 날을 세는 쪽이 빨랐던 우리. 만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너는 내 안에서만 숨쉬는 그런 존재 같았지만, 사랑했다. 그건, 변함없이 사랑이었다. 늦봄과 초여름의 경계, 놀이터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주변 주택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 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TV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네에 앉아봤다. 바람이, 기분 좋았다. * 울지 마. 너는, 아니, 나보다 몇 살이나 위니 당신, 이라 부르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래. 당신, 은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키고 있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눈물 때문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고개를 숙여 내 얼굴 가까이. 응? 그만 울자.
나를 달래고 있었다. 성적을 망쳤다고 했다, 나는. 세미나 수업에서 예기치도 못한 실수를 연발하는 바람에 이번 학기 성적을 완전히 망쳤다고, 그 수업이 어떤 수업인데, 라며. 애도 아니고 왜 울고 그래.
당신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내가 그 수업을 얼마나 듣고 싶어했는지, 얼마나 좋아했는지. 실은, 성적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지만, 그저 내 욕심이었다. 좋아하는 거고, 열심히 하고 싶고, 기왕이면 성적까지 잘 받고 싶다. 당신은 떼쓰는 아이 같은 나를 그대로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한 집안의 막내로 나고 자라 은근한 애교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지만, 어른이었다. 철이 일찍 들고, 남들에 비해 어린 나이에 한 팀을 이끌어가야 했기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당신 같은 사람일 수록 내가 기댐목이 되어 주어야 했는데, 안식처가 되어 주었어야 했는데. 이제와 후회해본들 부질없는 짓이었다. 당신은 기어코 세수까지 시키고 나를 재워주었다. 그만 울고, 푹 자자. 내일 또 아침부터 수업이라며. 당신의 달콤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 그 언제였던가. 7월 말이나 8월 초순 쯤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산책을 하고 있었다. 오후 8시. 해는 거의 다 넘어가고 달이 떠 있었다. 가로등이 거의 없는, 강변을 걷고 있었다. 내가 강가 쪽에 있었고, 유독히도 달이 밝은 날이었다. 그 먼 옛날, 달빛으로도 책을 읽었다는 말이 가능한 얘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달빛에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가 앞으로 어슴푸레하게 늘어섰고, 수면은 달빛을 받아 거울처럼 빛났다. 원래 그런 것에 마음이 동하기 쉬운 나는, 그 상황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온 감각을 쏟아 그 상황을 두고두고 기억하려는 노력.
"내 말, 듣고 있어?" "응."
건성인 내 대답을 충분히 눈치챈 당신은, 더 이상 내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계속해서 조곤조곤, 당신의 얘기를 했다. 그러다, 내 손을 턱, 하고 낚아채 듯 잡았다. 놀란 내가 당신을 말갛게 바라보자, 그저 소리 없이 웃었다. 나도 미안한 마음에 그저 웃었다. "나츠메 소세키, 알아?" "어어... 아니."
당신은 솔직하게 모른다고 답했다. "일본의 대문호야. 일본인의 마음적 지주라더라." "응." 우리는 손을 맞잡고, 앞만 보며 천천히 걸었다. 달을 등지고. "그 사람이 영문 번역도 했는데, 어느 날, 제자가 와서는 'I love you'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겠냐고 물었대." "으응." "그래서, 나츠메 소세키는, '달이 참 아름답군요'라고 번역했대." "달?"
당신의 의아하다는 듯이 목소리 톤을 조금 높였다. 나는 응, 달, 하고 간단히 답했다.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달이 참 곱네. 그치?"
그저 웃었다. 그 옛날, 근대의 일본에선 남녀가 달이 떠있는 밤에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만난다면, 부부나, 연인. 지금처럼 남녀 사이가 개방적이지 않았던 그 시절, 달을 매개로 해 수줍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던 게 아닐까. *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헤어진 건 아니었다. 우리는 연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도 헤어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상황은 변한 게 없었지만, 심리적인 것이었다. 무언가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싸우고 연락이 끊긴 것도 아니었다. 당신이 우리 집에서 있다가, 시간이 되어 떠나고, 며칠 후에 당신이 입고 왔던 데님 셔츠를 두고 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몰라 곱게 세탁해 따로 분리해둔다는 것이, 어느 새 내 옷들과 섞여 내가 종종 입었다. 전에, 당신은 갑자기 나타나곤 했다. 내가 혼자 동네를 걷고 있다 거나, 장을 보고 돌아온다 거나 할 때에, 당신은, 쨘, 하며 발랄한 효과음까지 직접내며 내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웃음을 주었다. 어쩜 연락도 한 번 없다가 그렇게 나타날 수 있는 건지. 당신이 보고 싶었다. 당신을 꼭 끌어 안고, 사무치게 그리운 당신 특유의 향을 맡고 싶었다. 우리 집에서 자고 나면 당신의 향에 약하게 내 향이 배어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철이 들었던 게 아니라, 철이 든 척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의젓해야 했으니까. 당신은 한 팀의 리더였고, 나는 아이 많은 집의 장녀였다. 바닥부터 팀을 이끌어 올려야 했던 당신과, 풍족하다곤 말할 수 없는 집안에서 해외 유학을 떠나온 나. 우린, 힘이 들어도 의젓해야했고, 꺾여선 안 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책임감은 어느 새 자존심과 의무감으로 변해, 그 어떤 상대에게도 의젓해지고 싶었을 거다. 그리우면서, 애틋하면서도 애써 아닌 척. 실은, 서로가 서로의 그런 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 아닌 척, 모르는 척. 달이 밝았다. 그 날보다도 더 밝은 것 같았다. 그리고, 당신이 사무치게 그립다. 저 주택가 골목을 돌아, 당신이, 김성규가 쨘, 하고 어설프게 웃으며 나타날 것 같았다. 감정을 억누르려 하늘을 보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다시 고개를 바로 했을 때, 정말로, 김성규가, 울 것 같은 표정에 어설프게 웃으며 쨘, 하고 나타났다.
* 우리는 의젓하지 읺았다. 정말 유치했다. 그리고 어리석었다.
"... 달이 참 아름답네."
엉엉 우는 나를 겨우 달랜 당신과, 그 품에 안겨 그렇게 중얼거린 나. "... 너 몇 학년이었지?"
못 들은 척, 다른 얘기를 꺼낸 당신에게, 4학년, 하고 답해주었다. "졸업논문 잘 쓰고 있어?" "응. 나츠메 소세키로 쓰고 있어."
당신은, 웃으며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나츠메 소세키는, 죽기 직전, 자신을 간호하던 아내의 귓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달이 참 아릅답군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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