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아이를 원한다.
美人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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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과 지민이 서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민이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부터였다. 정국의 정체는 내가 이곳에 오게 되었을 때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내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민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내게 말하지 않고 철저히 신분을 숨긴 채 내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왜 그랬었던 걸까, 자신의 신변이 위험해서?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한참을 매화나무 밑에서 여러 생각을 해봤던 것 같다. 개미가 내 발등을 밟고 지나가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그 개미의 가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개미들아, 너흰 뭘 위해 일하고 있는 거니?
네가 살아가는 이유를 알고선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거니?
그렇다면 나는 뭘 위해 이곳으로 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숙여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주변의 고요함 속에서 점차 이명이 울려왔다. 왕왕 울리는 이명에 인상을 쓰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귀쪽으로 옮겨 덮었다.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태형과 지민의 정체, 지민과 정국의 사이, 정국에게 들킨 내 정체, 윤기와 태형의 행방 등. 왜 신경 쓸 일은 한꺼번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걸까? 이 세상이 내게 빅엿을 주는 건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져왔고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피가 터질 정도로 꽉 깨무는데 갑자기 내 어깨를 건드리는 누군가의 손길에 깜짝 놀라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자 내 앞에 걱정기가 가득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정국이 서 있었다.
" 저하… "
" 왜 그러느냐? 혹 몸 어디가 많이 안 좋은 것이냐? "
울리던 이명이 뚝 끊기고 내 귀에는 주변 바람에 부딪혀 흔들리는 나무 소리와 풀 소리, 그리고 정국의 걱정기 어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정국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포근해 울컥했지만 겨우 참아내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 왜… 오셨습니까… "
" 왜라니. 당연히 내 벗이 걱정되니, "
" 벗이요? "
아무렇지도 않게 벗이란 단어를 꺼내는 정국의 말에 지민의 말이 겹쳐져 떠올랐다.
' 그 설이 사실이라면 과연 그대와 제가 좋은 벗이 될 수 있을까요? '
그 말과 함께 내게 보여줬던 지민의 웃는 모습들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민. 왜 절 속인 건가요? 처음부터 얘기해줬으면 제가 이렇게 제 마음을 스스로 찢고 있지 않았을 것인데. 그냥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해주지, 자신이 빈국의 왕세자다. 곧 적국의 주인이 될 정국에게 무참히 패한 본래 이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황자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줬으면 제가 지금 이리도 제 자신을 타내고 있지 않았을 것인데…
저는… 지민 당신과 벗이 될 자격이 없는듯싶네요.
" 일어나거라. "
" …… "
" 곧 해가 질 것이다. "
" …… "
" 빈국의 세자한테서 이미 고뿔에 걸린 상태라 들었는데 여기서 더 심해지고 싶은 것이냐? "
" 먼저 가십시오… "
" 어찌 내 너를 여기에 홀로 두고 먼저 간단 말이냐? "
" 괜찮습니다. 다 나았습니다. "
내 말에 정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내 모습이 답답하다는 듯이. 정국이 어떤 모습을 보이든 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금 민윤기가 보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본다면 이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쯤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날 계속 찾고 있을 텐데… 빨리 환국으로 가야 할 텐데…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을 때 정국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 민화백은 어디 있느냐? "
정국이 뱉은 말 중 민윤기의 이름이 들리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 저하도… 저희 스승님을… 알고 계셨습니까? "
설마 싶으며 물은 것이다. 석진과 윤기는 워낙 친하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태형과 윤기의 관계가 가까운 사이라는 것 또한 최근에 알게 되었다. 지민과 윤기의 관계는 서로 모르고 있었던 듯한 눈치를 보였지만 지민과 정국의 관계는 서로 알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내 질문에 정국의 대답이 긍정적으로 답한다면 다른 모든 이들의 관계가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지민과 태형
태형과 정국
정국과 석진
거미줄처럼 엮여있는 그들과 나의 관계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질 것이었다. 모두가 날 속이는 거라고 장담하지는 않을 것이다. 타계에 오게 되어버리고, 내게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줄 이 한 명 없는 이곳에서의 관계는 나 혼자가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수많은 문젯거리에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없던 나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을 겪기에 험난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국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아닌 부정의 대답이 나오길 기다렸다.
" 알고 있었다. "
하지만 정국은 복잡해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눈빛으로 말해왔다. 아니면 알면서도 그런 대답을 내뱉는 것일까. 왜? 정국은 윤기, 지민과 아는 사이였다. 그렇다면 석진과의 관계도 알고 있을까? 황자 태형과의 관계는? 사실은 처음부터 서로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 장국의 전하도 아시는 겁니까? "
" 그래. "
" …… "
" 그분은 내게 있어 친형주 같으신 분이시다. "
" 그랬군요… "
그래. 본국의 국왕과, 타국의 세자는 서로 알고 있을 확률이 높은 거겠지. 왜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물었던 걸까. 아마도 급작스럽게 닥친 이 모든 상황에 쉽게 정의를 못 내려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정국은 태형을 모르는 걸까? 현재 가장 강대국인 환국의 황자를? 예전에 한번 만난 적도 있는데 설마 못 알아봤던 건가?
윤기와 태형 스스로가 그의 신분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듯 은밀히 얘기했던 것이 떠올라 정국을 향해 직설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혹시 몰라 살짝 떠보기로 했다.
" 또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
" 누굴 말하는 것이냐. "
" 타국의 사대부라던가, 아니면 동궁이시라 하던가… "
내 질문에 묘하게 표정이 바뀌는 정국의 얼굴이 보였다. 정말로 내가 생각했던 대로 정국은 원래 태형을 알고 있었던 걸까?
" 갑자기 그런 걸 왜 묻는 게냐? "
" …그냥 지금 모든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
" 타국의 누굴 말하는 거지? "
" … "
" 환국의 황태자를 말하는 게냐? "
" … "
" 아니면 혹… 환국과 관련된 다른 황자를 묻는 것이냐? "
다른 황자냐고 묻는 정국의 말에 불현듯 태형이 떠오르며 동시에 머리가 무거워졌다. 정말로 정국은… 태형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태형의 진짜 신분이 황자라는 걸 알고 있기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걸까… 나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다는 사실같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제풀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 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정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찾고 있는 자가 있다. "
" …… "
" 다년 동안 종적을 감춘 자이기 때문에 찾아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
어느 날 선국의 전하가 날 따로 불러내셨고 그곳에서 나는 칙명을 받았었다. "
" … "
" 바로, 환국의 6황자를 찾아내라는 명이었다. "
정국의 입에서 6황자라는 단어가 들려오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보고도 정국은 무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 현재 강대국인 환국의 황제가 직접 선국의 주상께 위탁을 하셨다. 자신의 사라진 차기 황제가 될 6황자를 찾아달라는 위탁이셨지. 그 위탁은 곧 내게 하명하시게 되셨고. 그 이후 나는 다년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황자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에 난… "
" … "
" 장국에서 우연히 널 만나게 되었다. "
정국의 말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그의 얼굴을 다시금 마주했다. 마주한 그의 얼굴은 고요했다. 고요한 와중에도 그의 미간은 가끔 미세하게 움직이곤 했다. 지금 나의 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이.
" 너는… "
그와 눈을 마주하자 정국은 살짝 입술이 떨리며 물어왔다.
" 나와 벗이 된 것이 마음에 차지 않은 게냐? "
" … "
" 나는… "
잠시 한참을 얘기하지 못한 정국은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마주했다. 그리곤 이내 살짝 웃으며 말해오는 정국이었다.
" 널 만나게 되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연일 드는데. "
예상치 못한 정국의 말에 당황했다. 눈을 마주하며 말하는 정국의 시선에 심장이 조금씩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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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로 두문불출이었던 나는 한 번도 벽에서 등을 뗀 적이 없던듯싶다. 정리할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라 생각이 꽤 깊어졌다. 지민과 정국이 번갈아가며 이곳에 몇 번이나 들렸지만 둘 다 문 너머로 목소리만 들려올 뿐 이곳에 발을 들이지는 않았다. 하긴, 둘 다 머물 집이 있는데 굳이 이곳에서 지낼 필요는 없겠지.
며칠째 거의 부동의 자세로 있던 나는 몇 번이고 생각을 곱씹어대기만 했다. 석진과 윤기는 둘째치고, 지민과의 관계는 꽤 많이 놀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나라를 파국 위기까지 가게 만들었던 선국의 왕세자 정국을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까지 했던 지민이다. 그런 지민을 보며 오히려 정국이 경각심을 보이며 대했더라지.
과연 지민은 정국을 보며 어떤 생각과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혹시 그가 내게 실망하지는 않을까. 멀리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대로 지민과의 사이가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나는 이렇게밖에 대할 수 없는 것일까. 나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한심하기 짝이 없고 원통스러운데 지민은 오죽할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내 자신이 남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을 세워 두 팔로 감싸고 그 위로 고개를 숙여 얼굴을 파묻었다. 정국은 그렇다 치고 지민의 얼굴은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떡해야 하나, 편지 하나 남기고 이대로 떠날까. 혹시라도 윤기가 먼저 환국에 도착해서 날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한참을 침묵 속에 파묻혀가고 있는데 때마침 익숙한 목소리가 방문 너머로 들려왔다.
" 화시… "
지민이었다. 다른 날보다 유독 목소리 톤이 낮은 지민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 잠시 저와 얘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
" … "
" 절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
" … "
" 이대로 또 소리 소문 없이 떠나려는 겝니까? "
" … "
" 왜 자꾸 제게서 멀어지려 하십니까… "
" … "
" 우린…… "
" … "
" 벗이 아니었습니까… "
마지막에 조금 떨리게 들려온 지민의 목소리에 고개를 파묻은 상태로 힘겹게 입을 떼어냈다.
" 아직도… "
" … "
" 절 벗으로 생각하십니까? "
" 그렇습니다. "
" 그렇다면… "
" … "
" 지금부터 그저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 생각해주십시오. "
" 그것이 무슨..! "
내 말에 다급하게 들려온 지민의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니, 전 그렇게 생각 못 합니다! "
" 송구하옵니다. "
" … "
" 저하… "
" 그렇게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
" … "
" 그렇게 부르니까 우리 사이가 괜히 더 멀게 느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래서 본색을 일부로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 … "
" 멀게 느껴지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숨긴 것입니다… "
멀게 느껴져서 일부로 정체를 감춘 거라고?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왜 나와 친구가 되려고 한 거지? 지민의 행동에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왜 굳이 저와 벗이 되고 싶으신 겁니까… "
" … "
" 그저 스쳐 지나갔으면 될 인연, 왜 굳이 그 인연을 붙잡고 싶으셨던 것입니까… "
" … "
"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
내 말에 묵묵히 듣고만 있던 지민은 잠시 침묵을 이어갔다. 우리 사이에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다시 찾아온 침묵뿐만이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들어놨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지민이 들릴지 말지, 그저 홀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 혼자 있게 해주십쇼… 생각하고 싶습니다… "
내 말에 지민은 어떠한 대답도 해오지 않았다. 정말 내 말을 들어주는 것인지, 아니면 못 들은 것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이미 지민이 다른 곳으로 간 건지 아님 궁으로 돌아간 것인지, 그런 생각이 아주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침묵 속에 묻혀가는데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인지 지민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 줄곧 같은 꿈을 꿔왔습니다. "
천천히 들려오는 지민의 목소리에는 조금씩 슬픔이 배어 나오는듯싶었다. 나는 그런 지민의 목소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 곱디고운 색의 한복을 입은 한 여인이 늘 나타났는데 그 여인은 다른 여인들과 조금 달랐었죠. 여느 여인들처럼 침선을 한다거나, 의대차를 들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의 손에는… "
" … "
" 붓과 지물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
지민의 말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 덕분에 저는 꿈속의 그 여인으로부터 연심이라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죠, 그저 허몽일 뿐이라고. 하지만 저는 결코 그 꿈이 녹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만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지. "
" … "
" 그리하여 저는 전국을 순행하여 타국의 국왕과 그의 자손들을 직접 만나러 다니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선가 그 여인을 만날 것 같다는 예각이 들었었죠. 그런 예각이 들었던 이유는 또 다른 꿈 덕분이었습니다. 그동안 붓과 지물을 들고 있는 모습만 보이던 그 여인이 이번 꿈에서는 어딘지 조금 달라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꿈속에서 그 여인이 한 송이의 꽃을 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이 들고 있던 꽃은 다름 아닌 백일홍이었죠. 이곳 빈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아니었기에 그 꿈은 뭔가 각별하다로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백일홍의 화사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
" … "
" 바로 인연입니다. "
지민이 내게 어떤 말을 꺼내는지 가늠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지민, 자신의 꿈 얘기와 과거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지민이 말하는 상대가 혹시 본인의 과거에 존재하던 그녀가 아닐까,라고. 하지만 이어지는 지민의 말을 들을수록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그 꿈 때문에 그 여인을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연일 들었죠. 그래서 저는 순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날은 폭우로 인해 한 치 앞도 선명히 보이지 않던 날이었습니다. 비가 조금씩 그치고 나라를 떠나기 전 전하를 대신하여 잠행을 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그 집 마루에 앉아있는 어떤 자를 봤었던 기억이 나네요. 먼발치에서 본 것이지만 저는 확실히 느꼈었죠. 꿈속의 그 여인일 거라는 느낌이. "
익숙한 내용에 떠오르는 지난 기억에 문 너머에 앉아있을 지민의 그림자를 쳐다봤다. 정국에 이어 지민까지 아는 것일까 불안했다.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상일뿐이라고 홀로 다짐하며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 첫 만남 때에는 그것도 꿈인 줄 알고 깨기 싫어 이성보다 감정이 너무 앞섰던 것 같습니다. 결국 결과는 최악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죠. 그 이후 저는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결코 내게 있어 그 꿈은 허몽이 아니었다는 것을. 실제이니 더 이상 조급해하지 말자. 그 이후 화시 그대와 제가 재회하던 날이 바로 매화나무 밑이었죠. "
지민의 말에 잠시 잊고 있던 추억이 떠올랐다. 매화나무 밑에서 마주쳤던 지민과의 첫 만남. 친해지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분위기는 화기애애로 흘러갔었지. 지민을 알면 알아갈수록 참 착하고 바르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고.
" 혹시 그때 제게 물어보신 거 기억나시나요? "
" … "
" 제게 연모하였다던 여인에 대해서. 어찌하다 헤어지게 된 거냐고 물으셨죠? "
" … "
" 꿈에서 잠깐 만났다 사라졌으니 헤어진 것이 맞다고 제가 그리 말했었죠. 그리고 그 후에 했던 말 생각나시나요? "
잊었을 리가 없다. 지민이 내게 해줬던 얘기.
" 그럼 한 가지만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
" 무엇입니까. "
" 그 여인과는 어찌하다 헤어지게 된 건가요? "
" 헤어졌다라… 그렇겠죠. 잠깐 봤다가 금세 사라져버렸을니까 헤어진 것이 맞겠죠. "
" … "
" 저는 그래도 다시 만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절대 못 이루어질 것 같던 꿈이 현실이 되기도 했으니까요. "
" 저는 그래도 다시 만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했습니다. "
" … "
" 제가 그토록 기다리고 그리워하던 여인은 바로… "
지민의 애절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저 침묵만을 유지하려 했다. 훌쩍. 내 이름을 낮게 부르며 우는소리를 애써 짓눌러버리려는 듯한 지민의 그림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우는 건가? 뭐 때문에? 왜 지민이 우는 거지?
어느새 벽에서 등을 떼고 문 앞에 서있던 나는 보면 안 될 것을 보게 되었던 것 같다. 밤하늘에 떠있는 달빛에 의해 창호치 위로 지민의 그림자가 짙게 새겨져 있었다. 고개를 떨구었다가 다시 들어 문을 올려다보는 지민의 행동 밑으로 무언가가 투둑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괜히 심장이 쿵, 해진 느낌에 문 앞에 무릎 꿇고 앉았지만 문을 열지는 않았다. 그저 문 손잡이 주변으로 손이 허공에 떠 있었을 뿐이었다. 안과 밖의 분위기는 천차만별로 달랐다. 지민이 있는 곳은 달빛이 비치어줘서 주변이 밝고 환했지만 내가 있는 방 안은 빛 한줄기 제대로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주변은 온통 암흑에 잠식되어 있었다. 차마 손잡이를 잡지는 못하고 창호지 문 위로 그려진 지민의 그림자 위를 손으로 조심히 쓸어내릴 뿐이었다. 그때 지민의 머리 그림자가 떨구어지는 동시에 다시 한 번 더 투둑, 거리며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 화시, 그대입니다. "
지민의 말에 순식간에 주변이 얼어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잠시 후 지민 그 역시 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공허함을 느끼며 들고 있던 손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손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듯 고개마저 숙여지게 되었다. 지민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와 지민 사이에 정적이 이어지고 잠시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로 나였다.
" 제가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네요… "
" … "
" 언제부터였습니까? "
" 그 꿈을 꿨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
지민의 말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석진, 정국에 이어 지민까지 내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태형과 윤기마저 내 정체를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한결 편했을지도 모를 텐데…
" 화시를 만나기 전에는 그저 연모하고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감정도 들게 되었습니다. "
" 다른…감정…? "
" 그대와 벗이 되고 난 후 우애란 심정이 들게 되었답니다. "
" … "
" 화시가 부담되신다면 저는 지금처럼 벗의 관계가 이어져도 상관없습니다. "
지민이 말을 꺼내면 꺼낼수록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오르면서 조금씩 눈물이 차올라왔다. 눈을 깜빡이면 당장이라도 툭, 하니 떨어질 것만 같은 눈물의 무게감에 함부로 감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눈물은 더해져 갔고 이내 결국에는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툭하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지금 왜 울고 있는 걸까, 뭐 때문에… 뭐가 그리 슬퍼져서…
" 화시… 그대는… "
" … "
" 저와 벗으로도 있기 싫으신 겁니까…? "
" … "
" 알겠습니다.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 말만 하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
눈물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입술 사이에서 흐느낌이 흘러나올 것만 같아 두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눈을 뜨고 있으면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아 꾹 감아보지만 그건 역효과였던 듯 눈물은 더욱더 차올라 감은 눈 사이로 새어 나왔다.
" 다 좋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절 욕해도 상관없습니다… 죽으라 하면 지금 당장 자결할 수 있습니다…! "
지민의 발언에 놀랐지만 말은 나오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좌우로 젓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정작 지민은 막힌 벽 하나 때문에 이런 내 행동을 보지도 못하는데…
" 하지만… "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지민. 울고 있다는 것을 최소한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려는듯한 지민이었지만 그의 떨리는 목소리는 차마 잡아내지 못하는 듯 보였다.
" 제발 절 미워하지만 말아 주십시오… "
마지막 말을 힘겹게 꺼내던 지민은 그 이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보여주기 싫다는 듯 그대로 자리를 떠난듯싶었다.
그 이후 또다시 정적이 흘렀고 결국 혼자가 된 나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서 흐느껴울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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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있던 자리를 뜨고 성으로 돌아가던 지민. 고개를 숙여 눈물을 훔치던 지민의 앞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앞에 누군가 있다는 걸 직감한 지민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보였다.
" 한심하기는. "
지민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정국이었고, 정국의 얼굴을 확인한 지민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보였다. 눈물진 얼굴을 확인한 정국은 지민을 향해 타박하였고 그런 정국의 얼굴을 마주하는 지민이었다.
" 네가 이런다고 그 아이가 널 봐줄 거라 생각했던 것이냐. "
" 다 보고 계셨습니까. "
" 너는 그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
" 무슨 말을 하고자 하시렵니까. "
" 나는 그 아이를 원한다. "
" 세자도 알고 있었군요. "
지민의 말에 정국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정국을 보던 지민은 천천히 시선이 내려가더니 정국의 손에 쥐어져있는 검초를 발견하게 되었다.
" 그 칼로 절 어찌하시려는 겁니까? "
" 으름장을 놓으러 왔다. "
" 으름장이라 하셨습니까? "
정국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으며 되묻는 지민.
"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그 아이와의 연을 끊을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
" 저하께서 화시의 어느 자격으로 그런 말을 제게 하시는 것인지요? "
" 그 아이를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자나, 또는 힘겹게 만드는 자가 있다면 내가 전부 다 가차 없이 죽일 것이다. "
" 저하가 왜? "
" 내가 그 아이의 벗이자, "
" … "
" 장차 나의 빈이 될 여인이니. "
정국의 말에 지민의 몸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빈? 빈이라 했나? 그 말은 화시도 동의한 것일까?
지민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지나다녔다. 그런 지민을 보며 정국은 검초에서 칼을 빼어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지민의 목을 향해 겨누는 정국이었다.
" 선택해라. 어쩔 것이냐? "
" 만일… 제가 화시와의 연을 끊겠다면 어쩌실 겁니까? "
" 그렇다면, 우리 선국이 이곳 빈국을 도와주도록 하지. "
"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요? "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잇는 지민을 보던 정국은 피식 웃어 보이더니 이내 곧 표정을 지우며 말을 이어나갔다.
" 죽일 수밖에. "
그들의 주변에서 정국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인지 지민의 호위무사가 그들 사이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내 칼을 빼어들어 정국을 겨누는 호위무사였다.
" 오랜만이네, 율. "
" 칼을 거두어주십시오. "
" 한낱 호위무사인 주제에 한 나라의 세자를 향해 칼을 겨누는 것이냐. "
" 제게 있어 상전은 빈국의 세자 저하뿐입니다. "
" 충견이 따로 없군. "
들고 있는 칼을 그러쥐며 당장이라도 팔을 휘두를 듯 그들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묘하게 흘러갔다. 그런 그들 중 입을 연 건 다름 아닌 지민이었다.
" 비키거라 율아. "
" 저하. "
" 비키라고 했다! "
지민의 호통에 호위무사는 잠시 갈등해 보이다가 이내 칼을 거두며 자리에서 비켜났다. 하지만 지민에게서 멀어지지만 않고 옆에 비켜서있을 뿐이었다. 그런 호위무사를 향해 손을 내미는 지민.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지민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호위무사다. 그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던 호위무사는 아무 말없이 자신의 칼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칼을 쥔 지민을 보던 정국은 웃음을 지었다.
" 맞서겠다 이건가? "
" 과거지사 한번 전쟁에 패했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은 다르죠. "
"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
" 결과야 치러보고 나면 알게 되겠지요. "
" 참으로 안일한 세자군. "
정국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 사이에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한참을 팽팽한 실력으로 싸우던 그들 사이에서 누군가 칼에 스치게 되었고 결국 둘 사이의 싸움은 잠시 멈추게 되었다. 거친 숨을 내쉬는 지민과 정국. 그들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정국이었다.
" 꽤나 실력이 늘었군… "
"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지요… "
" 하지만 여전히 실력을 따라오기는 먼듯싶은데? "
정국의 말에 지민은 칼을 잡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오른눈을 감싸 쥐었다. 지민의 오른쪽 눈두덩에서는 칼에 베여 살이 찢어져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눈에서 손을 떼고 정국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지민이다.
" 그럴 리가요. 저하께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신 겁니까? "
" … "
" 왼쪽 볼에 상흔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
지민의 말에 정국은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만져보았다. 자신의 손가락에는 지민과 마찬가지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들어 지민을 쳐다보는 정국이었다.
" 역시 한때 강대국이었던 이국의 세자다운 실력이구나. 하지만 지금 제일 상처가 심한 것 같은 자는 바로 너인 것 같은데. "
정국의 말에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서서히 사라져가는 지민. 그런 지민을 향해 손에 잡고 있던 칼을 꾹 쥐며 그대로 달려가 그의 오른팔을 베는 정국이었다.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던 지민은 정국의 칼을 피하려 했지만 발을 헛디딘 바람에 넘어지며 다행히 스치는 정도만 되었다. 바닥에 넘어진 지민을 향해 호위무사가 달려갔고 그런 지민을 내려다보던 정국의 입이 열렸다.
" 단번에 베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나, "
" … "
" 그 아이를 생각해서 최악의 상황만은 만들지 않았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더 말하겠다. 그 아이와 연을 끊어라. "
" …… 전정국… "
" 지금의 이 으름장을 도외시하면 그때는 정말, "
" … "
" 전쟁이다. "
그 말을 끝으로 정국은 등을 보이며 그 자리를 떠났다.
유난히도 달이 밝던 어느 날의 밤. 그 달 아래에는 서로 상처만 남긴 자와 울고 있는 자만이 남아있었다.
꽃을 그리는 세상, 미인도(美人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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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에 온걸까요?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요즘 경기가 많이 안 좋잖아요...
여러모로 걱정밖에 안 늘어나네요ㅠㅠ
다음편은 또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용 꽉꽉 채워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보시다가 오타가 있으면 알려주세용~
호옥시나 어느 블로그에 미인도가 있다? 싶으면 알려주세요.
미인도를 블로그에 옮기고 그 외 새로운 글들도 거기서 연재할까 고민중입니다.
아!직!은! 블로그를 열지 않았어요. 글도 올리지 않았구요.
혹시나 블로그가 생긴다면 공지를 따로 내겠습니다.
공지가 있기전까지 저는 이곳에서만 미인도를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비오고 더워서 찝찝하겠지만 오늘은 꿀잠 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