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여애모(只汝愛慕)
w.second
07
화류헌을 빠져나온 크리스가 뒷짐을 지고서 정원을 거닐었다. 조금 더 걷다보니 나오는 황태자비의 처소에 크리스가 눈길을 한번 주곤 뒤에 줄을 지어 따라오던 상궁 중 하나에게 물었다.
"황태자비는 지금 무얼 하고 계신가."
"지금 시각이라면 처소에 계실 것이옵니다."
"좋다, 황태자비의 처소로 들 것이다."
"예, 마마."
크리스를 선두로 한 길게 늘어진 행렬이 황태자비의 처소인 청경전으로 들었다. 크리스가 청경전의 정원에 들자 정자에 앉아있던 다나-황태자비-가 크리스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나가 정자를 내려와 크리스를 맞이하려하자 크리스가 이내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하였다. 그리곤 다나가 있는 정자로 올라와 다나의 인사를 받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시각에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그동안 어마마마일때문에 의금부와 집무할것이 많아 내 도통 비에게 신경을 쓰지 못한것같아서요."
"소첩에게 그리 마음쓰시지 마소서. 아직도 황귀비마마의 일때문에 심란하시지 않습니까."
"보내드려야 할 분은 보내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전 이제 괜찮습니다."
괜찮아진 이유의 8할이 저를 어설프게나마 위로해주던 사람때문이란 말은 끝내 하지않았다. 물론, 크리스가 다나에게 그걸 말한다고 해도 다나는 투기하지않을 것이다. 크리스와 혼인한지 3년가까이 되는 다나는 태평국의 좌상의 딸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 황태자에게 시집왔다. 좋은 아내가 되는 정석을 밟아온 다나였지만 크리스와 다나의 사이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해진 합궁일 빼고는 둘은 합궁하지않았으며 단지 밥을 같이 먹는다던지 다과를 같이 하는것뿐, 둘의 관계는 부부라는 말로 정의내릴것이 아니었다. 어릴때부터 같이 알고지냈던 그저 친구같은 사이, 서로서로를 잘 아는 벗같은 존재. 그런 둘이 결혼생활을 계속 해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더할 나위없이 좋은 짝이라는 것을 알기때문이었다. 다나는 외가쪽 세력이 없는 크리스에게 좌상집안이라는 좋은 뒷배경을 주었고 크리스는 다나에게 차기국모의 자리를 내주었다.
"의혜공주마마께서 돌아오신다 들었습니다."
의혜공주는 크리스의 여동생이었다. 의혜공주는 황제와 황후사이에서 난 아이었지만 여자라는 이유에서 태어나자마자 왕위에서 제외되었고 의혜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서 몸이 약했던 황후는 세상을 떠났다. 황제는 의혜를 어여삐여기긴 하였지만 여자란 이유에서 관심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을수 밖에 없었다. 어렸던 크리스는 넓따란 황궁에서 홀로 남겨진 그 아이를 도무지 무시할수없었고 둘은, 아니 크리스의 형인 레이까지 합해 셋은 마치 친남매처럼 지내었다. 황제는 성장할만큼 성장한 의혜공주를 다른나라와 화친의 목적으로 시집을 보내고 싶어했지만 의혜는 단호히 거절하고 학문을 좀더 갈고닦고싶다며 여러나라를 돌아다녀보고싶다 하였다. 그리고 이번달이 의혜가 돌아오겠다 약속했던 달이었다.
"예, 저도 마침 전해들었습니다. 아바마마께서 비께 환영회를 주최하라 이르셨다구요."
"그렇사옵니다. 내명부의 수장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혹여나 필요한게 있으면 제게 말하세요. 성심성의껏 도와드릴터이니."
정자주위를 따라 흐르는 잔잔한 물길처럼 그들의 대화는 물흐르듯 이어갔다. 자세히 들어보면 둘의 사적인 얘기는 거의 없었고 황실과 문무백관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국화꽃잎이 동동 띄워진 국화차가 거의 다 식어갈때쯤 다나가 크리스에게 조심히 물었다.
"화류헌에 거처하고 있는 사내말이옵니다. 이번 연회에 참석하게 하는것이 어떨까해서요."
"..준면이를요?"
"어느곳보다 소문이 빠른 곳이 궁 아닙니까. 화류헌에 마마의 남첩이 거처하고있다는 소문이 궐내에 자자합니다."
"남첩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비는 지금 그런 하찮은것들의 말을 믿으시는겝니까?"
"믿을리가요. 소첩이야 마마가 남첩을 들이셔도 상관은 없지만서도 다른 사람들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참에 정말로 첩의 직책을 내리는것도 나쁘지는 않을테지요. 후후,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시옵소서. 가벼운 농이옵니다. 마마는 진정 그자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으신겁니까?"
다나의 말에 크리스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찻잔을 살며시 내려놓은 크리스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아니, 하지 못한것이리라. 그도 그의 마음을 잘 몰랐기에. 마음, 마음이라. 준면이 괜히 걱정도 되고 타오와 붙어있는 꼴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게 과연 그 사람에게 마음이 있어서 일까. 어릴적부터 결핍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그에게서 찾고있는것은 아닌가. 깊게 생각을 하려하니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는듯 했다. 크리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크리스가 깊게 생각할때 미간이 찌푸려지는것을 아는 다나가 크리스 몰래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 냉하던 사람이 마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기는 하는가보구나.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꼬.
"답을 바라고 물은것은 아니옵니다. 그 분을 연회에 참석하게 하여 왕가에서 인정한 사람이란 것을 문무백관에게 알리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 의견을 전한것뿐이니 부디 차분히 생각해주시옵소서."
"..좋습니다. 내 생각을 해보고 내일까지 사람을 시켜 전해드리리다."
말을 마친 크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나가 그를 따라 일어나 인사의 뜻으로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정자를 내려온 크리스가 향한 곳은 자선전의 침소가 아닌 연못을 끼고 있어 경치가 좋고 바람이 시원한 회향루였다. 날이 저물어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별이 어두운 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았다. 마마, 아직 밤바람이 차가우니 이만 침소로 드시지요. 뒤에서 들리는 주환관의 말에 크리스가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한시도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군.
"되었다. 나 혼자 있고싶으니 그만 물러들가라."
"하지만.."
"되었다는데도! 썩 물러가거라."
크리스의 강경한 태도에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주환관이 한숨을 폭 쉬었다. 그럼 소인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주환관이 그대로 물러가고 비로소 완전한 혼자가 되었을때 크리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준면, 김준면. 하얀얼굴에 담갈색의 영롱한 눈. 눈을 떠도, 감아도 그 모습이 어렴풋이 눈 앞에서 맴돌았다. 크리스, 하며 자신에게 화사하게 웃던 모습이. 분명 전에는 준면을 생각하면 제 형인 레이가 덩달아 생각났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렇지가 않다.
"내가 드디어 미친게로군."
생각이 끝을 모르고 파고들어가 정착한 곳은 결국 준면이었다. 생각의 시작도, 끝도 준면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멸망시킨 나라의 조그만 왕자에게 마음을 흔들릴 수는 없었다. 제가 그에게 마음을 준다면, 그와 사랑을 나눈다면 그건 정말 안될 일이었다. 가령 그와 서로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자신은 그의 나라에 망친것에 대한, 그의 가족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져야 할 것이고 준면도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제 사랑은 완전해야했다. 티끌없이 순수해야했으며 고귀해야했다. 온전한 두개의 마음이 만나 완벽한 하나가 되어야했다. 아직 새싹도 자라지 않은 이 마음은 서로에게 손해만 될 것이 불보듯 뻔하였다. 크리스는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다지며 자라나오려고 꿈틀거리는 새싹을 발로 짓눌렀다.
침소로 든 크리스가 당의를 벗으며 나인하나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마마. 고개를 숙이며 들어온 어린 나인 하나가 크리스의 당의를 받아 들었고 크리스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채로 말을 이었다.
"화류헌으로 가서 나흘 뒤 있을 연회에 참석하게 될 터이니 채비를 하라고 전하거라."
"예, 마마."
"네에? 연회라뇨. 그게 무슨.."
"나흘 뒤 의혜공주마마께옵서 그간의 여정을 마치시고 궁궐로 환궁함을 맞이하는 연회이옵니다. 말씀을 모두 전했으니 소인은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나인이 물러가고 준면은 어안이 벙벙해져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말인가. 연회라니, 그 말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보인다는 것이 아닌가.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비록 자신이 지금 태평국의 궁궐의 한 부분에서 살고, 화류헌소속의 몇명 궁인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자신은 절대 이 궁에 속해있지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라를 잃은 왕자의 마지막 긍지였으며 가족을 잃은 아들의 자그마한 자존심이었다. 준면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세게 깨물어서인지 빨간 입술이 잠시나마 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크리스의 말을 거역할수 없다는 것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크리스, 잠시나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바보였나. 이건 딱 봐도 자신에게 불리한 패였다. 벌써부터 연회장에서 사람들의 담화거리가 되어 시선을 정착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채 두리번거리는 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에 준면이 뒤로 벌러덩 누웠다. 젠장, 젠장. 최대한 적은 사람들과 엮이려고 노력했는데, 문무백관이 다 모이는 연회에 가는 이상 그 노력은 물거품이다. 으어어, 준면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푹신한 이불위를 뒹굴었다. 이리저리 뒹굴었을까, 옷 안에서 계속 걸리적거리는 느낌에 준면이 손을 집어넣어 휘저었다. 곧 준면의 손에 잡힌 무언가. 낮에 장터에서 샀던 나자르본죽과 세반고리모양의 장식품이었다.
"둘 다 주는걸 깜빡했네.."
준면이 나자르본죽을 손으로 높이 쳐들고 불빛에 비추어보았다. 청색의 영롱한 원석이 노란 불빛을 머금어 오묘하게 빛났다. 나자르본죽을 협탁위에 조심히 놓아두곤 고리장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오한테나 가야겠다. 타오가 못 움직이면 내가 가면 되지, 뭐.
안된다며 으름장을 놓는 환관을 단단히 입막음한 준면이 홀로 타오의 처소로 건너왔다. 타오, 타오오. 준면이 미닫이문앞에 쪼그려 앉아 혹여나 누구라도 올까싶어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불렀다. 이상하네, 타오 귀 밝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준면이 문을 살짝 열어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안을 휙휙 살피고는 슬그머니 발을 들이민 준면이 작은 소리도 들리지않게 문을 닫고는 몸을 안쪽으로 돌리자 침상에서 자고있는 타오의 모습이 보였다.
"자네.. 하긴, 많이 피곤했겠지."
남자다운 생김새와는 달리 쌕쌕거리는 아기같은 숨소리를 내는 타오를 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잠버릇이 얌전하지는 않은지 이불을 멀리 차둔걸 보고는 준면이 다시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아직 밤은 추운데,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쩔려구 이러나. 고향동생을 챙겨주는 듯한 기분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보드랗고 하얀 손으로 타오의 앞머리를 정리하곤 들고왔던 고리장식을 머리맡옆에 살며시 두었다. 잘 자. 어린 마녀가 주문이라도 외우는듯 조심스럽게 속삭이고 자리에서 일어난 준면이 문을 열었다. 드르륵, 그리곤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
"마마."
"어어, 타오 안잤어?"
"..무례한 청이지만 돌아보지 마시옵고 그저 제가 하는 말을 들어주세요. 혼자 앉아 생각하였습니다. 황태자마마의 말대로 제가 호위무사의 자격이 있는지. 제가 마마의 안위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그건 내가 잘못한것이지, 타오가 잘못한것이 아니야. 타오도 알잖아. 타오는 내게 충분한 사람이야."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할 말이 고갈되어 생기는 것과는 본질부터 다른 어색하지 않은 침묵. 충분한 사람이라. 준면의 과분한 말에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나왔다. 당신이, 당신이 내 이 마음을 알고도 그렇게 말 할 수있을까. 당신은, 내게서 너무 먼 당신은.. 슬픈 남자의 눈으로 한참동안 준면의 작은 등을 바라보던 타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마, 알고계십니까. 마마는 저의 미래이십니다."
이는 바로 나의 미래는 당신으로 가득하기 때문이고,
"또한 마마는 제 현재이시고"
이는 당신이 있음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의미있어지기 때문이고,
"그리고 마마는 제 과거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이는 당신으로 인해 저의 지난 과거가 고마워지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저는 완전히 마마에게 속하여 평생 충(忠)을 다할 것을 맹세하니,"
그리하여 나, 황쯔타오 김준면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평생 마음을 바칠 것을 맹세하니
"마마는 그렇게 그자리에 계셔주소서."
내게 오지 않아도 좋으니 당신은 그렇게 봄처럼 어여쁘소서. 그저 내게 봄향기만 살짝 닿을 정도로, 그렇게 향기롭게 있으소서.
"..그거 되게 과분한 말이네."
"과분하다뇨, 하나도"
"나, 이만 가볼게. 환관들과 상궁들이 걱정하고 있을거야. 대충 둘러대고 나왔거든."
"..."
"잘 자. 타오. 좋은 꿈 꿔."
"..물러가시옵소서."
준면은 뒤를 돌아 살짝 미소를 남겼다. 긴 옷자락이 그의 향을 방에 묻히는 것인지 어느새 그의 상쾌한 향이 방안에 가득해졌다. 준면의 작은 발이 문지방을 넘었다. 탁, 그리고 문이 닫혔다. 향기는 아직도 방안에 남아있었다. 타오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향이 사라질때까지, 호흡을 했다.
작가왈 |
몇달만의 지여애모인지 흨흨 타오가 준면이에게 소심하게나마 마음을 고백했네요. 저..저거 타오나름대로 고백이에요. 후, 소심한자식. 글올리려는데 브금이 갑자기 안넣어져요ㅠㅠㅠ제글은 브금빨인데ㄸㄹㄹ 어쩌겠어요 쿨하게 포기해야지 뭐..흡 새벽에 필받았을때 확 적은거라 이번편은 특히나 좀 매끄럽지 못하고 내용도 좀 두서없는것같도..ㅠㅠ마음에 안들어요ㅠㅠ 나중에 수정할수있으면 수정하려고요ㅠㅠㅠㅠ 참, 그리고 암호닉 리셋합니다! 신청 처음부터 다시받아요! 휴, 잠온다. 그럼 독자분들 굿밤~,~ 룰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