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S#2
If my life was a movie, you're the best part.
[김정우]
-여주야담
-번호 저장했지?
-집에 잘 들어갔어?
당교수님께 졸업논물 관련 레포트를 제출하기 전, 레포트를 동기에게 공유하려고 들어간 피씨카톡에는 김정우의 카톡이 와있었다.
답장을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한 입 쪽 빨고 키보드 자판을 눌렀다.
[김여주]
-아, 레포트 쓰느라 핸드폰을 못봤네
-잘 들어왔어
-답장 늦어서 미안
[김정우]
-레포트 잘 썼어?
-엄청 오래 걸렸네ㅠㅠ
-그냥 뭐..
-4년동안 배운 거 좀 써먹었지
-오
-멋있다
-무슨 레포튼데?
-나 식품공학과라고 말했나?
-아 식공이구나
-응응
-아무튼 식품미생물 관련 자료정리 겸 졸업논문 주제 찾기 겸
-뭐 그런 레포트야
-김여주 완전 어른같다
-딴 세상 사람같아
-애기는 몰라도 된다
-애기라닠ㅋㅋㅋ
-니가 어른이면 나도 어른이지!
-더 커서 와라 애기야
.
.
.
"김여주!!!"
"너는 왜 맨날 만나면 내 이름을 그렇게 크게 불러?"
"왜, 그래서 싫어?"
"으유, 됐어. 그냥 막 불러."
"김여주김여주김여주"
"또 부르면 나 집에 간다?"
"아아! 안돼안돼 오늘은 진짜 안돼
노래 불러주기로 했잖아"
분명 그 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김정우에게 휘둘리지 말자며 수백번 다짐했지만 김정우의 연락은 차마 못본 척을 할수 없었고 그렇게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와중에 저번에 노래 들려주기로 한 거 오늘은 꼭 들어야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김정우에, 또 홀린듯이 김정우를 만났다.
"아 진짜 너무 민망한데?"
"고1이니까 몇년 전이지? 음...6년!
나는 이 노래를 들으려고 6년이나 기다린거야!"
"주접.. 진짜..."
"너 그거 알아?"
"응? 뭐?"
"우리 옛날에 그런 거 유행했었잖아
에스크!
하루는 누가 이상형이 뭐냐고 물어보는거야"
아... 정우야 미안하지만 그거 물어본 사람이 바로 나야... 라는 말은 차마 부끄러워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랬는데?"
"괜히 갑자기 나 혼자 진지해져가지고 엄청 고민하다가 내가 뭐라고 답했게~"
노래 잘하는 사람.
내가 한 질문의 답을 받았을 때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외적인 이상형을 물어봐서 참고하려는 거였는데 두루뭉술한 답변이 와서 정말 당황했었다.
"뭐라고 했는데?"
"갑자기 너가 노래 불렀던 거 생각나서 노래 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
"진짜 내가 그 정도로 니 팬이었다구우~
그러니까 얼른 코노 가자!!"
"뭐야.."
그래서 내가 진짜 이상형이라는거야 아니라는거야?
김정우가 내 어깨를 감싸고 들어간 코인노래방은 생각보다 더 좁았다. 1인실같은 2인실에서 우리는 서로의 다리를 맞대고 붙어앉을 수 밖에 없었다. 숨 쉬는 소리, 심장이 뛰는 소리, 심지어 눈알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은 과하게 가까운 거리에, 괜히 나 혼자 민망해져서 한 손으로 뒷 목을 주물렀다.
"와, 진짜 드디어 김정우 오늘 소원성취하는 날이네"
"뭐래.. 자꾸 주접떨지마"
"헤헿.."
"그러고보니까 나는 너 노래하는 거 본 적 없는데 불공평한 거 아니야?
너가 먼저 한 곡 불러줘"
미친듯이 떨리지만 인생 최애와 코인노래방까지 왔는데 최애의 노래를 못듣고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김정우가 노래를 못해도 어설픈 목소리로 나를 위해 노래를 해준다면 좋을 것이고, 노래를 잘해도 김정우의 또다른 매력 하나를 더 발굴했다고 좋아할 것이다.
"내가? 와.. 진짜 너무 떨리는데 노래 어떻게 부르지?"
"나도 딱 그 기분이니까 너 긴장된다고 안부르는 거 반칙이다?"
"으아.. 알겠어! 내가 먼저 부르면 너도 이제 빼는 거 안돼"
김정우의 선곡은 버스커버스커의 정류장이었다.
"와.. 나 이 노래 진짜 좋아하는데"
"진짜? 아 더 떨리는 거 같아
너무 집중하지는 말고 너무 집중안하지도 말고 적절히 집중해줘"
김정우는 떨린다는 말도 어쩜 이렇게 귀엽게 표현할 수 있는 걸까 싶다. 무뚝뚝한 나는 그냥 '아, 떨려.' 하고 말았을텐데 정우는 참새처럼 조잘조잘 말도 예쁘게 잘한다.
해질 무렵 바람도 몹시 불던 날
집에 돌아오는 길 버스 창가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 어쩌지도 못한 채
난 그저 멍할 뿐이었지
난 왜 이리 바보인지 어리석은 지
모진 세상이란 걸 아직 모르는 지
터지는 울음 입술 물어 삼키며
내려야지 하고 일어설 때
저 멀리 가까워 오는 정류장 앞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알 수도 없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그댈 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댈 안고서 그냥 눈물만 흘러
자꾸 눈물이 흘러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만 있다면
워 그대여 그대여서 고마워요
낙엽이 뒹굴고 있는 정류장 앞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까치발 들고 내 얼굴 찾아 헤매는
내가 사준 옷을 또 입고온 그댈 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댈 안고서 그냥 눈물만 흘러
자꾸 눈물이 흘러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만 있다면
워 그대여 그대여서 고마워요
대화를 할 때 목소리와는 조금 다른 미성이었다. 원곡과는 다른 느낌이 나서 오묘하고 더 좋았다.
사실 김정우가 노래까지 잘할줄은 몰랐다. 앞서 말했다싶이 나는 김정우가 노래를 못했어도 좋아서 심장이 터져버렸을 것 같은데 정말 노래까지 잘해버리니까 바짝 옆에 붙어 앉은 김정우뿐만 아니라 옆 방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들까지 내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이 심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와... 너 노래 잘하네?"
"나 잘했어? 괜찮았어?"
"노래도 잘하는구나.."
"노래도? 나 또 뭐 잘하는 거 있어?"
"음..아.. 아! 나도 노래 불러야겠다! 하하!"
"와아아아아~ 박수박수~"
교실 창문에서 흘깃 본 운동장에서 네가 축구 골대에 공을 차는 모습을 보고 아.. 김정우 축구 잘하네.. 라고 예전에 생각했었다.
머릿속의 생각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급하게 말을 돌리고 김정우의 신청곡을 예약했다.
High dive into frozen waves where the past comes back to life
지난 삶의 기억들로 얼룩진 얼어붙은 파도 위로 다이빙을 하고 있어
If I fear for the selfish pain, it was worth it every time
이기적인 아픔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건 언제나 가치 있는 일이야
Hold still right before we crash cause we both know how this ends
우리가 충돌하기 직전에 멈추자, 둘 다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잖아
A clock ticks 'till it breaks your glass and I drown in you again
너의 잔을 깰 때까지 시간은 흘러 그리고 난 다시 너에게 빠지지
Cause you are the piece of me I wish I didn't need
왜냐면 너는 내가 필요 없었으면 하는 나의 일부니깐
Chasing relentlessly, still fight and I don't know why
끈질기게 추격하고, 여전히 싸우지만 난 그 이유를 모르겠어
If our love is tragedy, why are you my remedy?
If our love's insanity, why are you my clarity?
우리의 사랑이 비극이라면 왜 네가 나의 치료제일까
우리의 사랑이 광기라면 왜 너는 나를 더 선명하게 하는 걸까
Walk on through a red parade and refuse to make amends
붉은 행진을 통과하면서 보상하기를 거부해
It cuts deep through our ground and makes us forget all common sense
그건 우릴 깊숙이 상처 내서 모든 상식적인 것들을 잊게 해
Don't speak as I try to leave cause we both know what we'll choose
내가 떠나려고 할 때 붙잡지 마 우리 둘 다 무엇을 선택할지 알잖아
If you pulled and I push too deep then I'll fall right back to you
네가 날 당기면 난 세게 밀쳐 그리곤 머지않아 난 다시 너에게로 돌아가겠지
보잘것 없는 나의 노래를 들려주고 고개를 돌려 김정우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의 눈은 별처럼 빛나고있었다.
"김정우.. 너 울어?"
"엇.. 들켰어?"
"왜..?"
"여주야김
정우 말고 정우야, 하고 다정하게 불러줘"
"어어.. 정우야 왜그래.."
소리없이 보석같은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김정우의 눈물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김정우를 꼭 안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다."
"....부끄러워..."
"뭐가 부끄러운데?"
"운 거 들켜서.
나 민망하니까 한 곡만 더 불러줘."
뭐가 그렇게 슬퍼서 운 건지 궁금했지만 질문을 목구멍으로 삼켜 넘기고 인기순위에 있는 노래 중 아무것이나 골라 그가 바라는대로 그냥 노래나 불러주었다.
"나 오늘 진짜 생일인가? 김여주의 김정우를 위한 단독콘서트~ 너무 좋았다!"
"그래 덕분에 내 목은 다 쉬었지만... 정우 니가 좋았으면 됐다!"
김정우의 한곡 더, 하나만 더, 진짜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소리에 삼십분정도 나 혼자 노래를 주구장창 불렀고 김정우는 언제 울었냐는듯이 기분좋게 활짝 웃으며 내 오른팔에 팔짱을 끼고 코인노래방에서 나왔다.
"다음 데이트 코스는!"
"데이트는 누구 마음대로 데이트야!
"아무튼 다음 데이트 코스는~ 닭발 데이트!"
하여간에 김정우는 정말 엉뚱하다. 노래를 불러줬더니 울지를않나, 막무가내로 데이트라고 이 만남을 정의를 내린다. 근데 또 데이트랑 정말 안어울리는 닭발이라는 말을 앞에 붙여버린다.
"닭발이랑 데이트가 썩 잘 어울리는 단어 조합은 아니지?"
"너 닭발 제일 좋아하잖아. 제일 좋아하는 거 먹이려고 그러지~"
"내가 닭발 좋아한다고 말했었나?"
"얘기 했었어~ 아무튼 그래서 싫다고?"
"아니? 좋아!"
"내가?"
"아니? 닭발이!!"
김정우는 뭐랄까 그냥 거절할 수 없는 그런 아우라가 있다.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어린아이처럼 홀린듯이 김정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게된다.
Movie S#2
If my life was a movie, you're the best part.
포차 알바생이 테이블에 내려주는 무뼈닭발을 바라보며(국물닭발을 먹고싶었지만 김정우 앞에서 차마 닭의 발가락 뼈를 발골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저번에는 떡볶이, 이번에는 무뼈닭발. 다음에 만나면 또 어떤 빨간색 음식을 먹으려나 잠깐 생각하는 와중에 김정우가 소맥을 말며 말을 꺼냈다.
"여주야여주야 너 그거 알아?"
"김정우야, 뭔가를 물어볼 때 주어를 생략하는 사람이 어디있니"
"남자반에서 니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
"어휴... 뭐였는데"
"바로바로~
급식요정!!"
"그게 무슨 뜻이야?"
"급식실에서만 보이는 예쁜애 있다고 막 소문났었어"
"야, 뻥치지마
학교 다니면서 나 좋다는 애 한 명도 없었어"
"연결고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그렇지
너 학교에 친한 남자애도 없었잖아"
"그럼 동아리는?"
"아, 동아리 애들은 내가...
아니다! 믿기 싫음 믿지 말아라~"
"뭐야.. 왜 얘기를 하다말아?
됐다 됐어. 그리고 나 뭔가 뒤에서 내 얘기 하는 거 싫어"
뒷얘기..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상관없이 그냥 나는 누군가 내 뒤에서 나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싫다. 태어날 때부터 싫었던 건 아니고 아주 큰,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 이후에는 그렇다. 아, 그러고보니 그 사건에 대해서 김정우가 완전한 제3자는 아니다. 물론 김정우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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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나는 나를 외적으로 꾸미는 것과는 조금 동떨어져있었는데, 하루는 친구들이 소꿉장난 하듯이 내 얼굴에 이것저것 발라주며 뷰티유튜버마냥 메이크업에 대해서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재수가 없으면 뒷걸음질 치다가도 똥을 밟는다고, 하필이면 그 시간에 복도를 지나가다 창문으로 교실을 보고계시던 담임선생님께 걸려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교무실로 끌려갔다. 선생님은 '여주 니가 다른 애들보다 얼굴에 뭐 잘 안바르고 하는 거 선생님도 잘 아는데...여주 고삼이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화장실 가서 세수하고 와."라고 하시며 손에 클렌징 폼을 쥐어주셨다.
제 짝꿍 지영이는 아이라인에 마스카라까지 하는데 왜 걔는 안잡으시고 저만 잡으세요.. 라는 말을 정말 해버리고싶었지만 뭐.. 담임이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는가, 싶어서 그냥 그대로 교무실 근처 화장실에 들어가 선생님이 손에 쥐어준 싸구려 클렌징폼으로 얼굴을 벅벅 문대며 혼자 궁시렁궁시렁 중얼거리기만 했다. 모든 고등학교 화장실이 그렇듯이, 휴지는 차고 넘치게 많지만 수건은 없었다. 수많은 학우들이 들락날락하며 오염된 화장실 공기 속에 몇 시간, 아니 며칠이나 방치되어있었을 휴지뭉치를 바라보다가, 얼굴의 물기를 닦는 것을 포기하고 두 손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친 뒤 화장실을 나왔다.
"여주야!"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마주친 사람은 김정우였다. 타이밍이 정말 최악 중에 최악이었다. 해결되지않은 페메사건 그리고 잔뜩 젖어 엉망일 것이 뻔한 내 얼굴..
"저번에 페메하다가 너 갑자기 사라져서 나 너무 놀랐잖아. 무슨 일 있어 여주야?"
"아.. 음...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괜찮은데... 나 얼른 가봐야돼서 먼저 갈게! 미안해."
김정우와 오해를 푸는 것도 중요했지만 사춘기 소녀였던 그 시절의 나에게는 물이 뚝뚝 흐르는 내 맨얼굴을 김정우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나는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렇게 급하게 김정우를 지나쳤다.
"아... 지영아... 나 진짜 망했어...."
"뭐, 또 김정우 얘기야?"
"내가 세수하고 나오는데 김정우랑 딱 마주친거야. 걔가 막 저번에 페메 어쩌구 하는데 대답도 잘 못하고 또 도망쳤어..."
"너도 참 답답하게 산다."
"나도 막 그렇게 하고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 어떻게 거기서 마주치지?"
"야. 니 그 잘난 얼굴 좀 써먹으라고. 니가 맨날 김정우 얘기 하는 거 들어주다가 내가 속터져서 죽을 거 같아."
"아... 내가 걔 얘기 그렇게 많이 했어..?"
"많이 하든, 적게 하든! 답답해서 듣기 싫다고!"
"뭐야... 왜그래...."
"야. 김여주 내가 니 와꾸였으면 하루에 남자 100명씩 만나고 다녔어. 알아?
그렇게 쓸 거면 나 주라고."
"지영아아.. 미안해"
탁-
"혹시 모르지. 학교에서는 김정우에 절절매서 남자 못만나는 척 하다가 밖에서는 몸 굴리고 다닐수도..."
"야!!! 너... 어떻게 그런 말을해?"
"뭐, 큰 소리 내는 거 보니까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나봐?"
나는 그때 생각했다.
아아, 나는 죽는 순간까지도 이 장면을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다.
큰 소리가 나자, 교실에 있는 60여개의 눈이 나에게 쏠렸다.
"뭐야? 나 쟤 소리지르는 거 처음봐."
"헐, 김여주는 착한 줄 알았는데 진짜 끼리끼리는 끼리끼리인가봐."
"쟤네 지금 왜 싸우는거야?"
수많은 시선들과 나더러 들으라는 건지 큰 소리로 수근거리는 소리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이 차올랐다. 그 자리에 더 있을 자신이 없어서 보건실로 무작정 뛰어갔다.
보건실에 두 시간정도 누워서 내가 그 아이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라도 있었는지 생각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그 아이에게 그런 상스러운 말을 들을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다음 수업이 시작할 타이밍에 맞춰 교실로 돌아갔다. 내 옆자리에는 이미, 지영이가 아닌 다른 친구가 앉아있었다.
내가 없었던 두 시간동안 이 교실 안 30명이 뭐라고 떠들었을지는 안봐도 뻔했다. 반의 절반은 곧 다가오는 수능스트레스를 다른 친구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풀어냈고, 나머지 절반은 본인의 성적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치질은 이미 끝났고 나쁜 건 나라고 이미 낙인찍혔다. 그렇게 나는 수능 3달 전에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졌다.
졸업까지 무슨 낯빛으로 학교를 다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나를 불쌍히 여긴 다른 친구들 몇 명이 나를 챙겨줬지만 자격지심에 내가 쉽게 마음을 온전히 열지 못했고 그냥 혼자 꾸역꾸역 학교, 학원, 집을 왔다갔다 하다가 수능을 치고 얼렁뚱땅 졸업을 했다. 졸업식에는 해외여행을 간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고, 가끔 연락을 해오는 동창들은 전부 밀어냈다.
끝이 좋지 않았기에, 나에게 학창시절은 그저 잊고싶은 기억이었다.
한때는 잠깐 김정우까지 원망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누구의 잘못이라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저 혼자 남아 마음을 정리하고 모두 잊어버린 채 살았다.
다 잊은 것 같았지만 눈 앞에 짠 하고 갑자기 나타난 김정우는 설레고 좋았던 첫사랑의 기억 뿐만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상처로 남은 기억들까지 쿡쿡 찔렀다.
.
.
.
"여주야! 김여주! 너 또 다른 생각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왜 갑자기 표정이 안좋아졌어"
"음... 술을 너무 오랜만에 마셨나?"
"속 안좋아? 나가서 좀 걸을까?"
"그 정도는 아니야! 우리 무슨 얘기 하고있었지?"
"내가 김여주 좋아한다는 얘기?"
김정우의 농담 섞인 말투에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내 첫사랑이 나를 좋아한다.
분명 기분이 좋아서 펄쩍펄쩍 뛰어 마땅한 일인데, 하나도 기쁘지않다.
괜한 심술이 났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근 몇 년 동안 악을 쓰며 괜찮아지기 위해, 괜찮아보이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노력했는가. 나에게 네가 어떤 의미인줄도 모르면서 어떻게 너는 그렇게 좋아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야, 너 자꾸 헛소리 하지마"
"이게 왜 헛소리야? 진짜 김여주 너무 좋은데?"
"우리가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함부로 좋다고 말을 해?"
"여주야."
"......"
"여주야. 장난처럼 말해서 미안해. 그런데 나 너 진짜 좋아해. 진심이야."
"정우야
나는... 누굴 만날 상황이 아니야.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이 아니더라도 너는... 내가 못만날 것 같아."
"....내가 너 다시 만났을 때 내가 무슨 마음이었는지 너는 절대 모를거야."
하나도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표정, 그런 말투로 말하는 걸까. 나는 네가 좋다면 그냥 질질 끌려가야만하는 사람인가?
"너도 그 때 내가 무슨 마음이었는지 모르잖아."
"그럼 알려줘. 나는 여주 니가 나한테 너에 대해서 다 직접 말해줬으면 좋겠어."
"고집 부리지마. 너 지금 그냥 무작정 떼 쓰는 어린애같아.
너는 살면서 힘든 일 하나 없이 곱게 자라서 지금 거절당하는 게 억울한 것 같은데, 다들 너 좋아해주고 어화둥둥해주니까 아주 온 세상이 니꺼같지?"
방금 그 말은 실수다.
내가 무의식 속에서 김정우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고있었나?
지금 나는 내가 극도로 원망하고 혐오하는 기억 속의 임지영과 다를 게 없었다.
내 맘대로 사람을 평가하고 질투하고 편견에 사로잡혀있었다. 너를 깎아내린다고 내가 너보다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닌데.
"아.... 내가 미안해. 잠깐 말이 헛나왔어. 다 거짓말이야. 나 정말 한 번도... 너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김여주"
지금 김정우는 어떤 표정을 짓고있을까? 사과를 한다고해도 이미 내 손으로 엎질러버린 관계를 주워 담을 수는 없겠지.
많이 달라졌다고,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전에는 등신이었고 지금은 정말 최악이다.
"응..."
"너 지금 나한테 많이 미안하지"
"응..."
"그럼 나랑 영화 5편만 같이 봐줘"
"어...?"
나는 김정우가 어떤 말을 해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나랑 영화데이트 5번만 더 해줘. 그 뒤에도 너가 나 싫다고 하면 나도 너 더 안괴롭힐게. 어때?"
차마 김정우 얼굴을 볼 수 없어 숙이고있던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올려다보니, 일그러져있거나 눈물이 고여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김정우는 그저,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그리고 나도 니 마음 생각도 안하고 밀어붙여서 미안해."
김정우는 바보다. 자격지심에 찌들어서 어떻게든 상처를 주려고 악을 쓰는 내 손을 붙들고 먹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같은 미소를 준다.
그런 김정우때문에 눈물이 터져나왔다.
"너는 내가 심한 말 했는데 진짜 속상하지도 않아?"
"거짓말이니까 괜찮아"
"너 진짜 바보구나?"
"바보때문에 우는 김여주가 더 바보아니야?"
"아! 너도 아까 울었잖아! 그냥 우리 둘다 눈물 퉁쳐. 잊어버려."
"그래그래 잊어버릴테니까 얼른 뚝! 그치자."
몇년만에 터진 눈물은 쉽게 그쳐지지 않았고,
김정우는 자리를 옮겨 내 옆자리에 앉아 오래도록, 내 울음이 그치고 난 후에도 내 등을 따뜻하게 토닥여주었다.
작가의 말(캐릭터 해석을 위해 읽어주세요♡) |
김여주가 왜 첫사랑 정우에게 다가가면서도 가까워지면 도망갈 수 밖에 없었던 과거 이야기가 나왔네요. 눈치를 채셨을지 모르겠지만 고등학생 김여주와 대학생 김여주는 성격이 완전 다르죠? 그 이전까지 평탄한 삶을 살았던 고등학생 김여주는 믿었던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배신을 당하고 마음의 문이 완전히 닫혔어요.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겉으로는 괜찮아보이지만 속으로는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할뿐더러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 자체를 아예 회피하려는 자기방어가 생겼습니다. 좋다, 싫다 하는 감정표현도 무뎌진 김여주는 자기 감정표현이 확실한 김정우를 동경하면서도 못난 마음에, '내가 상처주면 쟤도 똑같이 변하겠지'라는 생각을 정말 아주 잠깐!! 했습니다. 과거의 큰 사건들은 다 서술이 끝났습니다!! 다음주부터는 밝게!! 정우가 영화데이트를 하면서 여주의 마음을 어떻게 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사실 2화까지가 줄거리 상 프롤로그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애교쟁이 정우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여주 치유물 Movie ♡ 앞으로의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