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티낼 것 같아? 자존심이 있지 3
쟤는, 진짜 뭘까?
여주가 할 말이었다.
여주는 당장이라도 정국의 카메라 렌즈를 깨거나 정국의 머리통을 깨거나 할 것 같았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돼서.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은 얼음을 씹어도 식지 않았다. 그저 제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알짱거리는 정국을 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이렇게 상현이도 데려갔나 봐?”
“뭐?”
“상현. 김상현. 기억 안 나?”
김상현. 이름을 듣자마자 핏기가 가시는 듯했으니까. 전정국이 걔 동기던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었지.
“네가 무슨 좆같은 생각으로 나한테 좆 같이 군 건지 잘 알겠으니까 놓으라고.”
그 대화를 끝으로 여주는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정국이 왜 저에게만 재수 없게 군 것인지. 융통성이나 눈치라고는 조금도 없이 제 맘대로, 기분대로 뭣 같이 굴었는지.
상현은 여주가 대학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사귄 남자친구였다. 과거형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지금은 헤어졌고, 과거형이라는 시제마저도 아까워 없었던 일로 해버리고 싶었고. 그런 여주 마음은 곪을 대로 곪았기에. 상한 속이 분노로 단단해진 것도 그다지 옛날이 아니었다. 태형이 그렇게 안 챙겨 다니는 도라이바로 어디 하나 구멍내버리고 싶은 마음은 활활 타올랐지만, 여주는 제가 그러지 못할 것을 알았다. 제 몇 년을 통째로 날리게 만든 장본인일지라도 제 몇 년을 통째로 바칠 만큼 당시 여주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신입생 때부터 상현이 군대에 갈 때까지 진득하게 사귀었던 사실은 태형도 지민도 알았지만 절대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었다. 둘이 헤어진 이유는 온전히 상현의 스릴을 즐기는 성정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간 큰 일을 저지를 리가.
교양수업에서 만나 연인관계로 발전한 둘은 꽤나 유명했다. 과CC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유명하냐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사진과와 패디과의 협동과제가 많았다. 상현과 여주는 각자의 과에서 꽤나 알아주는 인재였고, 그 둘이 사귀니 어딜 가나 말이 나왔다. 쟤네는 남자가 군대를 가도 문제 없을 거라는 말이 둘의 사랑에 더욱 결속을 거는 듯했다. 맞아. 우린 그럴 거야. 여주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군대에 가기 직전부터 상현은 여주보다 한 학년 높은 선배와 썸을 탔다. 다 알고도 썸을 탔다. 오르락내리락. 둘 다 스릴을 즐기는 편이었다. 어디 커뮤니티에나 올라올 법한 짓을 잘도 저지르면서 여주의 속을 시꺼멓게 태웠다. 연락이 잘 안 되고, 면회를 갖은 핑계로 못 오게 하고. 처음 몇 번은 믿었지만 갈수록 이유가 그게 아니라는 걸 여주도 알았다. 휴가 아니라더니, 겁도 없이 여주의 본가 근처 빙수 집에 있는 둘을 본 것이다.
그럼에도 안고 가고 싶어서, 온갖 방법을 썼지만 비참해지는 건 여주였다. 그런 여주에게 태형이 그만하라고 다독였고, 그 모습을 보고 도리어 바람을 피웠다며 몰아가는 상현에 여주는 지쳤다. 화낼 기력도 없어 지민과 태형에게 뒤를 맡겼더랬다. 군복을 입고 으레 겁주는 뒷모습이 퍽 웃겼던 것도 같다.
태형과 지민을 포함한 몇몇 동기 덕에 패디과에서는 올바르게 소문이 났지만 사진과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바람피웠던 그 선배는 소문이 나자 휴학해버렸고, 상현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여주를 희대의 X년으로 만든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 소문을 상현과 친분이 있던 정국이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정국의 그 태도가 상현 때문이라 생각하니 여주는 진심으로 누구의 머리통을 깨고 싶었다. 뭐? 이렇게 상현이도 데려갔나 봐? 대체 소문을 어떻게 내고, 어떻게 믿은 거야?
“와 김석진 잘생겼다!”
석진이 큰 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며 들어오지 않았다면 여주는 무시무시한 생각으로 정국을 씹고 뜯을 뻔했다. 이어 태형과 지민이 의상을 갈아입고 들어와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다듬었다. 카메라 렌즈를 닦던 정국이 물었다.
“어디서 찍을 건데?”
“6층! 과제실 앞에 배경 죽이는 데 있어.”
태형을 선두로 조로록 계단을 탔다. 주말이라 텅 빈 복도에 발소리가 울렸다. 여주는 난간을 붙들고 천천히 내려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각을 면하겠다고 들소처럼 계단을 뛰어오른 건 기적이었다. 게다가 태형을 들쳐 매고 자취방으로 끌고 간 것도. 전정국이 그 새끼 이름만 입에 안 올렸어도 끝까지 써먹는 건데. 여주가 이를 바득 갈았다. 미안한 걸 아는 것인지 태형은 선두로 있다 걸음을 늦춰 여주 옆에 나란히 섰다.
“김태형.”
“어엉?”
“어제 기억 나?”
태형은 눈을 크게 떴다. 하도 크게 떠서 눈동자 굴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여주네 집에서 눈을 뜬 태형은 여주가 깨기 전에 빠르게 본인의 자취방으로 돌아갔더랬다. 바로 아래층에 사는 것이 이득인지 손해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정국이랑 같이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과제실에서 만난 여주의 표정이 어마무시 해서. 태형은 전날 기억이 없는 것보다 여주가 화내는 게 더 무서웠다.
“전정국이 너네 집 모른다고 전화 왔었어.”
“어? 정국이가?”
“목소리 낮춰.”
지민과 정국, 석진이 저 앞에 가는 걸 확인한 여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네 집 쓰레기 밭이라고 우리 집 간다니까 너 무겁다고 데려다준다는 거야.”
“으응.”
“그러고 택시에서 뭐라는지 알아?”
걔 이름을 꺼내더라.
“김상현.”
“…….”
태형은 놀란 나머지 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정국과 상현이 동기라는 사실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설마 그래서……
“걔한테 헛소리 듣고 나 싫어하는 거 같던데.”
“헐…….”
“야, 빨리 와! 얼른 찍고 가게.”
지민이 저만치에서 태형과 여주를 불렀다.
“일단 모른 척하고 있어.”
“어떻게 하게?”
“뭘 어떻게 해. 이미 헛소문 믿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놈한테.”
우린 과제나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여주가 태형의 등을 떠밀었다.
모른 척하고 있으랬지만 태형은 그럴 수 없었다. 여주가 그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가만히 있는 건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과제제출 당일. 태형은 카탈로그 완성본을 들고 사진과 과방으로 향했다.
“국아.”
“어, 형?”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묻기도 전에 태형이 카탈로그와 유에스비를 내밀었다.
“벌써 완성했어? 진짜 빠르네.”
“지민이가 수고해줬지. 이거 관련해서 할 얘기가 좀 있는데 잠깐 나갈까?”
듣는 귀가 있어 태형이 밖으로 불러냈다. 잠깐 얘기하자더니 점점 과방과 멀어지는 탓에 정국이 고개를 갸웃할 때쯤, 태형이 자리에 앉았다. 매점 휴게 공간이었다. 여기 왜 왔냐고 묻기 전에 어디선가 지민이 나타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아, 고마워.”
“아이스 잘 마시네?”
“어?”
“못 마시는 줄 알았는데. 커피도 못 마신다 그러지 않았어?”
“지민아. 그만.”
“아니. 괘씸해서 그러지, 괘씸해서.”
지민이 턱을 괴며 말했다. 오늘따라 묻기 전에 뭘 보여주는 사람이 많네,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과제에 문제 생겨서 그래? 그런 거라면 이런 식으로 말 안 해도 알아듣는데.”
“아니. 과제는 아주 잘 했어, 덕분에. 카탈로그 퀄리티도 상상 이상으로 만족스럽고.”
“그럼 왜 이러는 건데? 정여주가 뭐라 그래?”
“아니.”
지민이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네가 오해하고 있는 게 있어서 바로 잡아주려고.”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남느냐는 물음도 없이 이야기는 시작됐다. 그리고 듣는 내내 정국은 그런 걸 묻지 않은 둘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제가 정여주에 알고 있는 모든 게 잘못된 것이라는 게 쉽게 이해된 만큼.
나는 재수해서 걔보다 한 살이 많은데, 학번이 같으면 반말 하는 거 아니냐면서 먼저 말을 놓더라고. 상현의 말은 항상 이렇게 시작했다. 관심 있는 사람들한테 음료수 사주는 걸로 호감을 표현하는데 그게 한두 명이 아닌 여러 명을 동시에 공략하더라. 가 두 번째였고, 술자리에서는 묘하게 행동해서 결국 오해하게 만든다. 가 세 번째였다. 그러니까 종합해보면 여주는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그게 한 명이 아니라서 문제인 사람이었다. 사귀는 동안에도 이런 저런 의문들이 드는 바람에 마음이 떠났다고 떠드는 상현의 말은 정말 그럴싸했다. 여주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그렇다고 믿을 정도로. 정국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현은 매번 과제할 때마다 과제 파트너가 사줬다며 음료를 들고 왔고, 여주와 사귀는 동안 유명해진 둘 사이를 부담스러워하는 걸 봐왔으며, 가끔씩 본 여주 근처에는 동성보다 이성이 많았다. 게다가 정국은 선배든 후배든 초면에 반말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며, 술자리에서는 맺고 끊음이 확실한 편이었기에.
“나한테 반말한 것도 다 걔의 계획이었던 거야.”
자신과 정반대의 사람에게는 반감이 쉽게 들기 마련이다. 들은 말이 있으니, 본 것을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들은 말을 얹어서 봤다. 그게 정국의 실수였다. 상현을 너무 믿은 것도.
“나 걔랑 과제해.”
“누구?”
“형 전 여친.”
“아~ 정여주?”
“아는 형이 부탁해서.”
“재밌겠네~”
“너 괜찮아?”
“괜찮지 그럼. 언제적 일인데.”
근데 정국아.
“너도 조심해. 넌 나처럼 되지 마라. 뭐, 너야 눈이 높으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난 나 같은 놈이 또 생기진 않았으면 좋겠다.”
상현의 체념한 듯 아련한 표정도 정국이 실수하는 것에 한몫했더랬다.
태형을 만나러 예대 8층 과제실로 갔을 때. 정국은 여주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약속시간도 안 지켜? 저도 모르게 삐딱하게 생각하면서. 태형이 잠시 자리를 비운 거라 말했지만 이미 삐딱하게 시작된 선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부딪친 사람에게 예의 없이 말했고, 이를 인식하고 뒤 돌아봤을 때 그는 과제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 쟤구나. 정국은 직감했다.
그 후 정식으로 만난 여주는 정국에게 존댓말을 썼다. 하지만 태형과 지민에게 그냥 반말도 아니고 스스럼없이 야, 혹은 이름을 부르는 걸 보고 고개를 저었다. 음료를 사는 것도 상현의 말과 일치했다. 그래서 거절했는데도 사왔다. 아무 핑계나 댔더니 또 사오고 또 사왔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안 좋아한다는데 왜 자꾸 사와? 물어보고 사오든가. 몇 번 거절하자 저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변했다. 이런 사람이랑 어떻게 같이 다니는 거지. 그래서 태형에게 냉큼 물었다.
“걔는 원래 그래?”
그리고 들은 건 여주가 마음고생 했다는 것이었다. 의외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태형이 만취했고, 택시를 타고 가기까지 지금껏 했던 행동과 다른 여주의 행동에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도 얼마 안 가 삐딱선을 탔지만.
“이렇게 상현이도 데려갔나 봐?”
“뭐?”
“상현. 김상현. 기억 안 나?”
정확히는 형이지만. 정국은 찔리라고 일부러 말을 놨다. 그랬는데.
“너 엄청 실수한 거야 정국아.”
이 모든 게 상현의 말에 구슬려진 제가 멋대로 생각한 거라니. 정국은 얼음을 다 녹일 것처럼 컵을 붙들었다. 상현의 말에 구멍을 찾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태형과 지민에 죄인은 정국이 돼 있었다. 말없이 앉아 있는 정국에 태형과 지민은 잠시 서로 눈을 맞추더니 정국을 일으켰다.
앞으로 얼굴 볼 일은 없지만 언젠가 한 번 미안했다고 말이라도 한 번 하라고, 그렇게 결론난 술자리는 더 이어질 이유가 없는데도 셋은 콸콸 부어댔다. 태형과 지민은 과제를 제출하던 날이었고, 정국은 그들의 텐션에 휩쓸려서. 사실 이유라면 얼마든지 붙일 수 있었다. 충격적인 전말을 알아버렸으니 술을 마시는 것이다.
“김상현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웠냐? 앙?”
지민이 시비조로 묻었다. 발그스름해진 볼로 묻는 게 꽤 웃겼지만 정국은 저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태형은 이미 휴지를 조각내며 갯수를 세알리고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 말을 더 믿을 수밖에 없지…….”
정국은 형이 상현이형이 말하는 얼굴을 봤어야 했다며, 그 얼굴을 보고 어떻게 안 믿겠냐며 토로하고픈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 얼굴로 여주를 속인 것을 알았으니 해선 안 될 말이었다. 조금 생각하니 화도 났다. 구멍이 숭숭 난 논리를 덥썩 믿고, 괜찮냐 물으며 위로와 걱정까지 했던 제가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까. 남을 속이는 사람을 친구랍시고 애먼 사람에게 틱틱댄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다. 화가 날수록 잔을 채우는 속도가 빨라졌고.
“아…….”
눈을 뜨니 처음 보는 천장이 정국을 반겼다.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정국의 집은 아니었다. 태형이형 아니면 지민이형 집인가. 이미 나간 것인지 아무도 없는 집을 둘러보고 욕실로 향했다. 얼굴이나 헹구고 가야겠다 싶었는데 새 칫솔이 세면대에 놓여 있었다. 마치 쓰란 듯이.
“…….”
정국은 아무렇지 않게 포장을 뜯었다. 반쯤 쓴 치약을 짜내고 물을 묻혀 이에 거품을 냈다. 양치하는 동안 휴대폰을 확인해야겠다 싶어 제가 누운 자리로 향했다. 아직 비몽사몽한 채라, 이를 닦으면서도 절로 자리에 앉게 됐다. 어젯밤부터 쌓인 연락을 슥슥 넘겨보다 태형의 [국아 어디양] 문자에 멈칫했다. 본인의 집에 있는데 어디냐고 묻지는 않을 터였다. 지민의 연락도 함께 와 있는 걸 보면 둘 다 깨 있을 텐데, 언질이 없다는 건 지민의 집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 이곳은 어디인가? 정국이 한껏 잠이 묻은 얼굴로 인상을 썼다. 그제야 주위를 더 꼼꼼히 둘러봤다. 그리고 행거에 걸린 과잠을 보자마자 입에 든 것을 뱉을 뻔했다.
서둘러 욕실로 가 입을 헹구고 평소보다 빠르게 세수를 했다. 내가 잠이 덜 깼나. 하지만 다시 봐도 과잠에 적힌 글자들과 학번은 같았다. 정국은 겉옷과 휴대폰을 챙겨 신을 신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나온 태형이
“어? 국아. 왜 거기서 나와? 여주 만나고 왔어?”
라고 확인시켜주자 부정은 시도조차 못하고 불발해버렸다. 그렇다. 정국이 술 먹고 뻗어버린 여기는.
“진짜 정여주 집이잖아.”
앞으로 얼굴 볼 일은 없지만 언젠가 한 번 미안했다고 말이라도 한 번 하라고, 결론 내렸던 술자리의 주인공. 여주였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육일삼입니다. 쓰자마자 올리는 건 처음이에요. 나중에 보면 오타도 많고 퇴고하고 싶을 것 같지만 일단 올립니다.
그리고 정국이 저 짤 너무 귀엽지 않나요 ㅋㅋㅋㅋㅋ 꼭 쓰고 싶었어요 ㅋㅋㅋㅋ
저는 이제 자러 갈게요... 망해버린 생활패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