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3층에서
01
"저는 사장님이 아니고, 이재윤입니다."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걸까. 여태 전화 받고 방 안내해줘 놓고 사장님이 아니라니. 궁금하던 이름을 알려줘서 고맙긴 한데,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 직원이라는 건가?
"네, 이름이 이재윤이시구나. 직원이신가 봐요."
"비슷해요. 저녁 시간 되어 가는데, 얼른 장 보셔야죠."
이재윤. 사장도 직원도 아니라는 남자는 자기 손가락에 걸린 열쇠를 흔들어 보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를 따라 도착한 곳엔 꽤 많은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고 나에게 건네 준 열쇠고리에 적힌 번호에 맞는 자전거를 찾았다.
"헬멧은 여기 있어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가는 길이 이렇게 오르막 내리막이라고는 말 안 해줬잖아요, 이재윤 씨. 이렇게 험난할 수가, 그냥 버스 탈걸. 장을 보고 나오자 어느새 어둠이 내렸고 눈앞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도 희미해 한 치 앞도 잘 안 보이는 길에 나는 엉엉 울며 페달을 굴렸다. 집 나오면 정말 개고생이구나.
저질 체력에 지쳐 자전거를 세우고 길바닥에 주저 앉아 한숨 돌리던 순간 저 멀리서 사람으로 보이는 형상이 가까워졌다.
"왜 코앞에서 이러고 있어요."
"...사장님."
"사장 아니라니까. 일어서요, 눈 오잖아요. 출발한 지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길래, 혹시 눈길에 자전거 타고 미끄러지신 건 아닌가 했는데. 울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걸어서 30분이라면서요, 자전거 타고 30분이잖아요..."
"자전거 제가 끌고 갈 테니까 우산 쓰고 오세요."
남자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내 손에 우산을 쥐여 주곤 자전거를 끌고 언덕배기를 올랐다.
나는 열심히 남자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눈물 콧물 생각은 못 한 채, 그의 뒤를 따라 걸었고 남자는 그런 나를 보며 고맙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여기요, 장바구니. 1층 안내 사항에 적혀 있긴 한데, 요리는 지하에서 하시면 돼요. 식사도 거기서 하셔도 되고 아니면 방에서 하셔도 되고. 편 하신 대로 하세요."
"사장님은 안 들어가세요?"
"저는 이 자전거 정리하러 창고에 들려야 해서요, 들어가세요."
"...사장님! 혹시, 같이 저녁... 안 드실래요? 혼자 해서 먹으면 남을 것 같고... 또 술도... 많이 샀는데."
"어......"
"아, 손님 계셔서 안 되려나. 죄송해요, 들어 가볼게요. 아까는 감사했어요."
바보 같았다, 거기서 술 얘기는 왜 해. 그냥 밥 얘기만 했어야지. 몰려오는 민망함에 나는 방으로 달려 들어와 눈 맞은 옷가지를 대충 정리하고 늦은 저녁 준비를 시작하려 금방 방을 나왔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향하던 중, 계단을 올라오는 남자와 마주쳤고 붉어지는 낯빛이 느껴진 나는 괜히 고개 숙여 인사를 던지며 도망치듯 빠르게 발을 내디뎠다.
"쉬세요!"
"잠시만요."
"아까 한 말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와인, 좋아하세요?"
"...와인이요?"
"같이 술, 마시자면서요."
"손님 계실 텐데, 괜찮으세요?"
"다행히 딱 한 분이신 손님이 먼저 같이하자고 말씀해주셔서 괜찮아요."
"...저요?"
"먼저 내려가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와인 챙겨서 금방 내려갈게요."
"저 와인, 안 마셔 봤어요. 저 소맥... 좋아해요!"
얼버무리길래 같이 밥 먹기 싫은 줄 알았더니. 그나저나 이 커다란 건물에 둘 뿐이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 한편이 간지러워졌다. 난 몰라, 어떡해.
계단을 재빠르게 달려 내려 온 나는 허겁지겁 장바구니를 풀어 헤치고 음식 준비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그럴싸한 거로 사 올 걸. 겨우 토마토 스파게티가 뭐야.
면을 삶을 물을 올려 둔 채 나는 이제야 한숨 돌리며 유태양에게 연락을 남겼다. 나 도착. 너 울면서 자전거 타봤어? 나 괜히 왔나 봐.
"아, 사장님. 저 스파게티 하려는데, 좋아하세요?"
"좋아해요. 남은 건 제가 할게요, 자전거 때문에 많이 힘드셨을 텐데. 앉아 계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 온 남자는 오자마자 내가 쥐고 있던 프라이팬을 뺐어 들더니 나를 테이블 앞에 앉혔다. 어쩐지 요리하는 모습이라곤 상상이 되지 않는 남자는 흰옷 위로 분홍색 앞치마를 걸어 묶고 능숙하게 요리를 해 보였고 금세 완성된 스파게티를 예쁜 접시에 담아 테이블을 세팅하더니 맥주잔 두 개를 들고 내 앞에 앉았다.
"제가 술자리는 좋아하는데, 술은 잘 못 해서. 저는 맥주만 주세요."
"사장님, 요리 잘하시네요. 주로 식사는 직접 해서 드시나 봐요."
"사장님 아니라 이재윤이라고 알려 드렸는데..."
"아, 이재윤 님."
"되게 제가 손님 같네요-"
"이재윤 씨...?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요, 사장님도 직원도 아니라는 건 대체 뭔 말이에요?"
"아버지가 사장님이에요. 그렇다고 여기서 직원으로 계속 일해온 것도 아니구요. 부모님 잠깐 해외여행 보내드리는 동안만 있는 거라."
"아, 아들이셨구나... 얼마나 계시는데요? 그럼 하시던 일은 어떻게 하고 오신 거예요?"
"여주 씨, 저한테 궁금한 게 많으신가 봐요."
오랜만에 마신 술이라 그런가, 피곤해서 그런가. 금세 술기운이 올라왔는지 나도 모르는 새, 브레이크도 없이 이 남자에게 마구 다가가려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면전에 대놓고 궁금한 게 많다고 되물을 줄이야. 반짝이는 눈으로 그렇게 물어보면 어떻게,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저는 아마, 여주 씨랑 비슷하게 더 머물 것 같아요. 부모님 여행 3주 보내드렸거든요, 저는 여기서 오늘까지 일주일 정도 있었고."
"그렇... 구나."
"원래 하던 일은 동생이랑 같이 카페를 운영하고 있어서, 동생이 혼자 열심히 일하고 있을 거예요."
"아... 카페."
"근데 여주 씨, 혹시... 어디 아파요?"
"저는... 먼저 올라 가 볼게요. 뒷정리는 두세요, 제가 내일 아침에 할게요. 그럼, 주무세요."
민망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술기운에 피곤함까지 몰려와 더는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되묻질 말던가, 대답을 정성스레 해주질 말던가. 사람 설레게. 짧은 순간 마주하고 앉아 있었음에도 마치 롤로코스터를 여러 번 타고 내려온 기분.
방에 들어와서 무슨 정신으로 화장을 지우고 씻고 잤는지 모르겠다. 분명 두 눈을 뜨고 있는데도 몸에 아무런 힘이 안 들어간다. 코도 좀 막히는 게, 나 감기인가. 생각하던 찰나 휴대전화 액정이 번쩍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전화는 왜 이렇게 많이 했어. 나 항상 무음인 거 알면서."
"니 얼굴 잘났다 이거지, 아침부터 영통 거는 심보는. 보여? 내가 2주 동안 지낼 곳."
"너도 예쁜데 왜 그래. 근데 오션뷰 잡는다더니 웬 산 뷰야?"
"응- 감사. 급하게 예약한 거라 오션뷰는 못 잡았어. 그냥 나무만 보여."
"방에서 바다 보면서 그림 그리고 싶다며."
"다행히 1층에서라도 잘 보이더라. 아, 나 너무 배고파. 끊는다."
"몸조심하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연락 좀 잘해."
유태양은 나를 친구가 아니라 딸내미 정도로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집착 할 수가, 친구가 나밖에 없어서 그런가.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대충 세수를 하고 후드 모자를 뒤집어쓴 채 방을 나섰다. 문을 열자 무언가 덜컹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와서 문 뒤를 살펴보니 감기약과 글이 적힌 포스트잇이 담긴 봉다리가 놓여 있었다.
-어제 눈 맞으셔서 감기 기운이 오신 것 같아서요. 근처에 병원 없으니까 조심하세요!
아무래도 나, 이 사람 사랑하게 될 것 같다.
-
다른 술은 맛 없지만 달달한 와인은 좋아하는 알쓰 재유니를 상상하며 글을 써두었는데, 맛맛에서 와인을 못 먹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습니다
샹그리아를 시작으로 앞으로 맛 난 와인을 섭렵해보지 않으실렵니까,,,,,,,,,,,,,,
업로드 주기는 정해 두지 않고 천천히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날이 너무 덥네요 모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