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四端). 중국 유교에서 시작된 것으로,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단서가 되는 네 가지 마음을 뜻한다. 의에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에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에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으며, 인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정국이 중얼거리다 픽 웃었다. 교양에서 주워들은 내용이었지만 두유를 보며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것도 담배 피우다 여주에게 받은 두유를 보면서는 더더욱.
“야, 너 발이 왜 이래?”
“몰라. 술 마시고 그런 것 같던데.”
“…….”
여주가 내내 울다 정국의 발을 보고 기겁했던 것도 측은지심.
“하…… 다음에는 진짜 욕해야지. 아니, 만날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
“너랑도 계속 이러는 거 보면 걔랑도 언젠가 만나게 될 것 같단 말이지.”
흘깃대는 여주의 등을 계속 쓸어준 것도 측은지심.
“아 왜 이렇게 자꾸 쓸어대. 누구 소화불량이야?”
“위로해도 난리야.”
“셔츠나 가져가. 상영회에서 두고 갔더라.”
그리고 약간의 죄책감.
정국은 제 감정을 그렇게 정의 내렸다.
그럼 두유는?
“아, 복잡해.”
받은 두유를 먹지도 버리지도 않고 창가에 둔 건? 이것도 측은지심이라 할 수 있을까. 정국은 벌떡 일어나 뚜껑을 땄다. 경쾌한 소리가 울리고 다 식은 두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유통기한 따위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날이 차서 썩진 않았을 테다. 정국은 입가를 닦으며 생각했다.
“이건 그냥 귀찮았던 거.”
라고.
내가 티낼 것 같아? 자존심이 있지 6
좋은 사이도 아니었지만 이제는 나쁜 사이도 아닌 그냥 그런 사이. 옆에 있어도 저 새끼 또 나한테 뭘로 갈굴까 전전긍긍 하지 않아도 되고, 저 새끼한테 어떻게 엿 먹일까 궁리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그런 둘의 관계를 감지한 태형과 지민이 석진을 끼워 과제 팀 뒤풀이 자리를 만들었다. 곧 기말고사니 간단하게 밥만 먹자던 말은 쉽게 흐지부지 되었다. 기전마술(기말고사 전 마지막 술)이라며 태형이 술을 시킨 것이다.
얼마 전에 마셔 놓고 또 무슨 술이냐며, 이번 달에만 몇 번 마시는 거냐는 여주의 면박에도 소용없었다. 밥집 겸 술집이라 분위기는 쉽게 2차가 되었다. 지민은 자포자기 상태로 안주를 시켰다. 석진은 여주에게 도와줘서 고맙다며 술을 따랐고, 여주도 흔쾌히 모델이 돼줘서 고맙다며 술을 따랐다. 촬영 회식자리에서는 여주가 정국에게 소주세례를 퍼붓느라 못 나눴던 이야기를 나누게 되자 지민이 턱을 괴고 물었다.
“그래서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응? 우리?”
“형은 연영과에서 유니콘 같은 존재라서, 그때 처음 봤었거든요.”
지민의 물음에 앉아있던 모두가 석진과 여주에게 시선을 뒀다. 묻진 않았지만 다들 궁금하던 차였다.
“그냥 여주가 다짜고짜 날 찾아오던데?”
“제가 언제 그랬어요.”
“그랬잖아. 갑자기 강의실 문을 벌컥 열더니, 여기 김석진 씨가 누구죠? 하고.”
마치 이 반 짱이 누구야, 하는 것처럼. 석진의 말에 여주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이에 태형이 크게 웃었다. 졸업하지말까? 하고 물었으면서 누구보다 졸업이 절실했던 게 분명했다. 그 잘생기고 훤칠하다는 김석진 씨가 여기서 강의를 듣는다 이거지? 어디선가 주워듣고서는 확인도 않고 타과 강의실 문을 벌컥 연 것만 해도 그랬다. 물론 석진의 과제를 돕는 걸로 품앗이를 하긴 했지만 무모했던 건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정국이는 그럼 누가 데려온 거야?”
“태형이가요.”
둘은 같은 동아리에서 만났다고 했다. 태형은 과제 때문에 금방 유령회원이 되긴 했지만, 그때의 추억들을 이야기할 때는 꽤나 즐거워 보였다. 한참을 과제와 동아리 이야기로 만담을 나누고 있을까,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말 안 해도 어디 가는지 알고 있었다. 정국이 자리를 비우자 태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너희 둘이 잘 풀어서 다행이다.”
“풀어? 싸웠었어?”
“형 그때 못 느꼈어요? 둘이 엄청 살벌했었는데.”
석진은 사진 찍힐 때 분위기가 이상한 건 감지했지만 그 정도인줄은 몰랐었다. 알았다면 여주와 정국을 동시에 상영회에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석진이 다시금 아싸라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여주는 그런 얼굴로 신빙성 없는 말 하지 말라 하고 싶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부정은 안 했지만 여주는 확신이 없었다.
풀어? 그것도 ‘잘’, 풀었나? 물론 전보다야 베베 꼬이진 않았다. 그러나 아직 풀지 못한 실타래가 있었다. 정국이 그토록 제대로 하고 싶어 했던 사과도 받지 않았고, 여주 집에 쳐들어왔던 그날 일을 자세히 설명하지도 못했으며, 상현 때문에 우는 모습까지 보였다. 상현 때문에 얽혔던 사이가 다시 상현 때문에 오묘해진 것이다.
앞서 ‘그냥 그런 사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존심 어쩌고 하면서 울다가도 발에 멍 든 것을 봤을 때 식겁했던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진 빚이 상쇄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여주는 화장실 간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이 따로 있어 밖으로 나가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의심이랄 것도 없어서 여주는 쉽게 근처 약국에 들렀다. 편의점에 아이스크림이나 사러 가다가 약국을 다 오네. 멍 빠지는 약을 산 여주는 고민하다 밴드도 샀다. 꽤나 서늘한 날씨에도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다니면서, 발가락부터 발등까지 든 멍을 무시하기란 어려웠다. 닫으려던 문에 발을 끼운 건 순전히 정국의 잘못이었지만.
“…….”
“…….”
“…….”
“……왜?”
앞에서 마주친 정국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 잡아 세웠지만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 여주는 정국을 옆 건물의 계단으로 데려갔다.
“앉아.”
“뭐?”
“앉으라고.”
또 슬리퍼 신고 왔네. 여주가 툴툴대며 정국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정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여주가 하는 걸 보고 있었다.
“이거 내가 그런 거야.”
“네가? 언제?”
“뭐, 정확히는 쌍방이지.”
“그러니까 언제?”
여주가 연고 포장을 뜯다 말고 정국을 올려다봤다. 정국은 순간 “염병하네.” 하는 여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가 그렇게 궁금해 하던 그날 밤.”
아. 정국이 숨을 삼켰다.
“별 일 없었어. 그냥 네가 김태형 집인 줄 알고 우리 집 왔고, 꼬락서니 보니까 김태형도 똑같겠다 싶어서 그냥 우리 집에 재웠고. 이게 다야.”
“그럼 발은?”
“내가 문 닫으려니까 네가 발 끼우던데.”
“…….”
별 일 없었다고 하는 게 맞나. 정국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차가운 촉감에 사라졌다. 여주가 연고를 발등에 얹고 있었다.
“너는 집도 가까우면서, 뭐가 멀다고 김태형 집에서 잔다고 그랬냐? 생각해보니까 어이없네.”
“걸어가면 꽤 멀어.”
멀다기보다는 귀찮은 게 맞았다. 계단 타고 내려와서 몇 분 걷다가 언덕을 올라야 하고, 모퉁이를 돌아서 또 계단을 타고……. 매일 오가던 길이지만 알콜이 몸과 정신을 점령했는데 그게 상쾌하고 깔끔히 해낼 일일 순 없었다. 정국은 연고가 발리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그거 그렇게 바르는 거 맞아?”
“그럼 어떻게 발라?”
“아니. 그게 원래 그렇게 덕지덕지……”
“말이 많네.”
“…….”
“꼼꼼히 바르는 거잖아 꼼꼼히.”
“…….”
“알았어, 얇게 펴줄게. 참나.”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딱히 고쳐 말하진 않았다. 커피를 마시니 마니, 싸가지가 있니 없니 하다가 면봉으로 뭉친 연고를 펴 바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이렇게 순순히 발을 내주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때 고마웠어.”
“뭐가?”
“그 새끼.”
“아아.”
“자존심 어쩌고 하고 질질 짜긴 했지만 지금 이러고 있는 게 부끄러워 뒤질 정도는 아니야.”
“…….”
“아무튼…… 울고 욕하기만 했지 고맙다고는 안 한 거 같아서.”
여주가 밴드를 까며 말했다.
“미안해.”
“엉?”
“김상현 말 믿고 함부로 했던 거 미안하다고. 그날 밤에 멋대로 찾아간 것도.”
“……그래.”
“정여주.”
“왜.”
“나 찬 거 잘 마셔.”
“뭐?”
“단 것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순간 정국은 생각했다. 두유. 연고. 밴드.
“탄산도 마셔.”
“…….”
이거 전부 측은지심인가?
“그러니까 소주만 주지 말라고.”
아니. 알 수 없었다. 연고와 밴드는 오롯이 여주의 감정이었기에 함부로 추측할 수 없었다.
“근데 이거 원래 밴드도 붙이는 거 맞아?”
“너 진짜 짜증난다.”
어쨌거나 둘 사이에 애매함은 사라진 게 분명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정국은 속으로 되뇌었다.
안녕하세요, 육일삼입니다.
다른 화에 비해 짧네요. 약국에 멍 빼는 약 파는지 아는 사람한테 물어봤다가 걱정만 한가득 들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
다음 화부터는 현생으로 인해 조금 늦게 나올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드려요!
아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