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 맘에 들어?"
성열이 어이없다는 듯 명수를 돌아봤다. 그런데 명수를 쳐다본 건 성열만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모양새와 평범하지 않은 얼굴. 지나가는 여성들이 얼굴을 붉히며 환하게 웃는 명수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에 비해 늘어지고 얼룩덜룩한 티셔츠에 후리한 추리닝, 거기에 퀭한 맨얼굴까지. 구질구질한 제 모습에 비해 명수는 너무나 빛났다. 자신에게 꽂히는 그리 좋지 않은 시선들에 성열은 얼굴을 감쌌다. 이래뵈도 인기 아이돌인데. 아, 못알아본게 다행인가? 성열이 갑자기 얼굴을 감싸자 놀란 명수가 성열의 앞에 서 물었다.
"왜울어, 내가 뭐 잘못했어?"
"쪽팔리니까 빨리 가지?"
성열이 이를 악물며 말하자 그제서야 이해한 듯 명수가 성열의 어깨를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거울을 통과해 집으로 돌아온 성열이 명수를 노려봤다. 그리곤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성열이 욕실 안에 있던 가운을 입고 나왔다. 검은 뿌리가 보인지 오래 된 갈색 머리를 터는 성열의 발에 뭔가 닿았다. 내려다 보니 가지런하게 개켜진 연분홍 색 옷 한 벌이 있었다. 옷에 붙은 흰색 포스트잇을 떼 읽었다.
『잠옷이야 옷장에 니 옷 많이 넣어놨어 내일은 같이 일할 친구 보러가자 잘자』
아기자기한 글씨체에 성열이 피식 웃었다. 텅 빈 거실에 대고 고맙다고 외친 성열이 방으로 들어가 잠옷을 입었다. 잠옷을 입고 거울을 본 성열은 다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아동용 잠옷을 사이즈만 성인용으로 늘인 듯 한 귀여운 무늬에 성열이 한참을 웃었다. 가게 간판도 그렇고 여러모로 귀엽다는 생각을 한 성열이 머리를 몇번 더 털고 침대에 누웠다.
아침에 일어난 성열이 잠옷을 보고 웃고,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보고 웃고, 식탁에 자기가 어제 말한 계란후라이와 카레, 그리고 하늘색의 똑같은 잠옷을 입은 명수를 보고 한참을 웃었다. 귀가 살짝 붉어진 채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명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귀여운 짜식. 중얼거린 성열이 밥 위에 놓인 계란후라이를 뒤집으며 물었다.
"내가 왜 분홍색이야?"
"내가 분홍색 입으면 웃기잖아."
"그런가? 그러네."
성열이 밥을 우물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친구들은 어떤사람이야?"
"글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 좀 시끄러워."
성열이 다시 숟가락질을 하려 고개를 숙였다. 성열의 정수리를 본 명수가 말했다.
"염색 새로 해야되겠다."
"염색할 줄 알아?"
"내가 나이가 몇인데. 안해본게 없어."
밥그릇을 비운 그들은 그릇을 씽크대에 놓았다. 아동용 잠옷같은 잠옷을 입은 성인 남자 둘이 나란히 씽크대에 서있는 그 모습이 웃겨서 성열이 또 한번 웃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며 양치를 하며 또 웃었다. 성열을 'H'방에 데리고 간 명수가 문을 열었다. 미용 관련 방인지 예전에 샵에서 본 의자들과 도구들이 보였다. 성열을 의자에 앉힌 명수가 물었다.
"손님, 무슨 색으로 해드릴까요?"
"글쎄요, 저한테 잘 어울리는 색 하나 골라서 해주세요."
"손님 얼굴엔 무슨 색이든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아 그래요? 하긴 제가 잘나긴 잘났어요. 너무 잘나서 팬한테 납치도 당했지 뭐에요?"
"정말요? 그분이 잘해주시던가요?"
명수가 검은 천을 성열에게 두르며 물었다.
"그럼요, 너무 잘해주시더라고요. 근데 그분 취향이 좀 독특해요.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어떤데요?"
"뭐라 설명할 수가 없죠. 잘생기긴 잘생겼는데."
"그분, 좋아요?"
"처음엔 좀 미웠는데 몇일동안 봤다고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귀엽다 싶기도 하고. 제가 적응이 빠른건지 몰라도 뭔가 되게 익숙한 분위기가 있어요."
"좋아요?"
"왜 그렇게 물어보세요?"
"좋아요, 싫어요?"
성열이 의자를 돌려 명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 좋아하세요?"
"응. 엄청."
"나도 좋아."
성열이 씩 웃으며 일어나 양 손을 명수의 어깨에 올렸다. 그리곤 명수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진한 눈과 눈썹, 깊은 눈동자, 오똑한 코와 어쩐지 장난스러워 보이는 입술. 이상하게 너무나도 편안하고 친근한 얼굴.
"너, 나 알아?"
"그럼 알지. 인기 그룹 인피니트의 성열이잖아."
"아니, 그런거 말고."
"갑자기 왜?"
"넌, 그날 처음 봤다고 하기엔, 뭐라해야하지? 전에 봤었나?"
명수가 순간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살짝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성열은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내가 흔한 얼굴인가보지."
"그건 아닌데."
다시 유심히 그 얼굴을 살펴보던 성열은 장난스레 웃으며 명수의 눈을 가리고 입술을 짓뭉개듯 갖다댔다. 토마토가 입술을 누르며 뭉개지는 듯 한 느낌과 시야를 가리던 성열의 손이 사라지며 성열의 얼굴이 멀어졌다.
"나 옷갈아입고 온다"
두르고 있던 천을 의자에 걸친 성열이 방 밖으로 나갔다. 성열이 나간 문을 한참 바라보던 명수가 한번 웃고 자기방으로 갔다.
옷장 문을 연 성열이 헛웃음을 지었다. 옷장의 반은 수트로, 나머지 반은 모조리 어두운 계열의 옷으로 차있었다. 그나마 남색과 진갈색을 빼면 몽땅 검정이었다. 어지간히 검정 좋아하는구나. 어째 와이셔츠 하나 흰색이 없지? 고민 끝에 아무거나 골라 입은 성열이 문을 열고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명수가 성열을 의자에 앉혀 머리를 이리저리 만져주었다. 성열이 거울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검은색 진짜 좋아하나봐?"
"맘에 안들어?"
"뭐 눈에 안띄는건 좋긴 한데."
이건 정도가 심하지 않나. 중얼거린 성열이 검어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하긴, 빨강으로 다니면 더 눈에 띄긴 하겠지. 동양쪽은 검은머리가 더 어울리기도 하고. 거울을 쳐다보던 성열이 이내 만족의 미소를 보였다.
"이제 갈까?"
"니 친구들 보러?"
"응."
성열이 튀어나온 바지 주머니를 안으로 집어넣으며 명수를 따라갔다. 거울을 통과하자마자 들리는 소리에 성열이 움찔했다.
"안서? 그걸 다 태우면 어쩌자고!"
"미친 그걸 던지면 어떡해!"
소리를 꽥꽥 지르는 목소리와, 무언가 깨지고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타는 소리와 냄새. 성열이 명수를 쳐다보자 명수가 자연스레 그를 이끌었다.
"또 싸우네."
"안말려?"
성열을 이끌고 소파에 앉은 명수가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게 싸움구경이야. 앉아서 구경이나 하자."
소파와 좀 떨어진 곳에서 물건들이 날아다녔다. 명수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저기 저 물건 던지는 조그만 애 보이지? 걔가 서경종. 저기 날아오는 것들 다 태우는애가 김하진."
"쟤네들도 평범한 애들은 아닌것 같다."
성열이 하진의 손에서 나오는 불과 경종의 손을 거치지 않고 날아가는 물건들을 보며 말했다.
"그렇지."
"김하진은 알것같은데, 쟤 누구지?"
"경종이."
"그래, 경종이. 쟤는 공중부양같은거야?"
"아니, 그냥 공기. 공기로 물건을 받친다던가, 공기를 차게 한다거나. 여러가지 할 수 있지."
성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그지깽깽이새끼야! 내 머리카락 어쩔거냐고!"
"아 미안해. 언젠간 자랄거야."
"니 일루와. 니 머리도 확 잘라버리게."
경종이 말하자 어디선가 가위가 날아와 경종의 손에 잡혔다. 경종이 명수를 흘깃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인 명수가 가만히 하진의 뒤로 가 양 손을 주먹쥐게 해 잡아 뒤로 교차시켰다. 놀란 하진이 펄쩍 뛰었다.
"뭐야 이거!"
"나야 나. 보아하니 니가 또 경종이 머리 태워먹은거 같은데 그냥 한번 잘라라. 어차피 지금도 길잖아?"
명수가 하진을 잡고 있는 동안 경종이 걸어와 하진의 머리 한쪽을 숭덩 잘랐다. 이제야 후련하다는 듯 경종이 낄낄대며 말했다.
"괜찮아, 언젠간 자랄테니까."
대충 사태가 수습되고, 명수가 성열을 그들에게 소개시켰다. 성열을 위아래로 쭉 훑어본 하진이 말했다.
"어디서 찾았냐?"
"그냥 우연히."
"신기하네. 반가워, 난 김하진. 얘는 서경종. 편하게 말 놔."
"그럴 생각이었어."
성열이 하진이 내민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이들하고 잘 지낼 수 있을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근데 너도 검정?"
성열은 경종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걸 보았다.
"아니, 얘 취향이지."
성열은 옷장을 새로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