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지색의 시간 제2장.
낯선 공간의 익숙한 향기
"연이 왔느냐."
-예 마마.
"희동이는 있느냐."
-여기 있사옵니다 마마.
"그리고....... "
연이를 따라 온 곳엔 똑같은 복장을 한 여자들 수십 명이 있었고 그 앞에는 언뜻 보아도 높아 보이는 한 중년의 여성 두 명이 서 있었다.
연이의 말로는 여기 내 옆에 있는 수십 명의 여자들 모두 왕을 모시는 궁녀라고 했다.
그리고 저 앞에 출석부 비슷한 것을 들고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고 있는 저분은 궁녀 중에서 가장 높으신 '상궁(尙宮)'마마란다.
솔직히 처음엔 믿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도 그리고 난 생각하고 있다. 이건 분명 꿈일 거라고. 아주 깊은 잠에 빠져있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내가 사극 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지금 이 분위기가 낯설지마는 않다는 것이다.
'아니 내가 왜 역사수업을 따로 들어야 하냐니까?'
-그야 당연히 네가 이번 인현왕후 역으로 캐스팅됐으니까.
'그냥 대본 주는 대로 연기하면 될 것을 오빤 꼭 오바하더라?'
'괜히 이 오바를 하는게 아니다~ 오빠 말 믿고 현장 들어가기 전에 공부 빡시게 하고 가라~'
괜히 또 예전 생각이 났다. 기분이 묘해지는 걸 꾹 참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분위기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근데 나의 노력이 허용이 안된다는 듯, 상궁의 입에서 내 이름이 호명되자마자 주변에서 수군수군 거렸다.
상궁들도 마찬가지였다. 출석부를 한번, 내 얼굴을 한번 번갈아가면서 쳐다보더니 이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허, 참.
"해가 서쪽에서 뜬 게냐. 어찌 저 아이가 조회에 참석하느냐?"
-풋. 그렇습니다. 마마! 쟤는 항상 늦잠자서 혼나던 아이가 아니 옵니까?
-푸하! 도대체 무슨 일이람? 정말 오늘 무슨 날이기라도 한 건가?
"다들 조용히 하여라! 어찌 여인들의 입이 이리도 방정맞은 거야!"
아니 상궁 마마... 마마께서 먼저 시작하셨잖아요! 무척이나 당황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연이가 이내 남몰래 내 손을 꼭 잡았다.
깜짝놀라 연이를 힐끗 쳐다보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연이가 나를 향해 아주 예쁜 미소를 지어주었다.
배우생활 하면서 날고 긴다는 예쁜 사람들은 엄청나게 봤지만 연이같은 페이스는 처음이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 연아 네가 최고야!
그렇게 남몰래 연이와 희희낙락 거리고 있는데, 그 모습을 예리하게 알아챈 상궁마마가 나와 연이를 향해 말했다.
"감히 신성한 조회시간에 장난을 치는것들이 있구나!"
그 말에 깜짝 놀란 연이와 나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동그래진 눈으로 상궁을 쳐다보았다.
또 갑작스러운 상궁의 호통에 수많은 궁녀의 입이 누가 뭐라할것도 없이 빠르게 닫혔다. 내 생각인데, 저 상궁은 우리를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후..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을 때쯤, 상궁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희는, 오늘 하루 동안 궁녀들의 방과 무수리들의 방까지 싹 다 깨끗이 청소해 놓거라."
"마마!"
상궁의 말에 기겁한 연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상궁을 불렀지만, 상궁은 그 모습을 무시한 채 다시 출석부에 있는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옆에서 다른 궁녀들이 비웃음이 들리기도 했다. 아니 도대체 이 몸의 진짜 주인이었던 사람은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이렇게 미움을 받는 거야 제기랄.
배우생활하면서 그놈의 이미지 메이킹을 하느라 욕 같은 건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이곳에 온 지 하루 만에 욕이 아주 시원하게 나오고 있다.
힐끗 연이의 표정을 보자니 이 일.. 보통 일이 아닌듯싶은데.. 한번 나서봐?
예전 사극 연기할 때처럼 하면 되는 건가? 나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비웃고 있는 다른 궁녀들 그리고 저 얼음장 같아 보이는 상궁 마마.
에라이 모르겠다!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사극 연기할때 했던 것처럼 하면 되는 거잖아!
"마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네가?
순식간이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숨소리까지 멈추어진 건. 수십명의 궁녀가 하나같이 보면 안될 거라도 본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일 놀란 건 상궁인듯싶었다. 엄청나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당황하지 않은 척 나를 바라보았다.
연이가 다시 한 번 내 손을 잡았다. 분명 저 뜻은 '너 미쳤어?!' 라는 뜻이겠지.
"분명 저희가 마마께 무례를 보인 죄는 죽어 마땅하오나 나인의 신분으로 품계 낮은 무수리들의 방까지 청소하라는 벌은 지엄한 법도에 분명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이를 내명부의 최고수장이신 대비마마께서 아신다면 분명… … ."
"알겠다. 알겠으니 그만하거라."
상궁마마가 더는 듣지 못하겠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K.O.
내 말에 경직돼버린 연이가 입을 딱- 벌린 채로 나를 쳐다보았고 그런 연이에게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역사공부는 필수라던 매니저 오빠의 말이 생각났다. 다른 나인들도 연이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꿈인데.. 깨면 그만이지? 그렇지 연아?
*
내가 궁에서 맡은 신분은 지밀나인(至密內人) 이었다.
연이는 다행히 나와 같은 지밀나인이었고, 조회 때 모였던 수많은 궁녀들 중 몇 명은 수라간, 동궁 전, 소주방 등등.... 여러 개의 부서에 속한 궁녀들이었다.
내가 알기엔 궁녀 중에서도 지밀궁녀가 좀 높은 편이라는데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 됐건 분명한 사실은 현대시대보다 이 꿈속 안이 마음이 더 편하다는 거 그거 하나다. 영영 깨지 않았으면.
그리고 언제 왔는지 모를 궁녀를 보좌하는 무수리들 여럿까지 있었다.
"어찌됐건 우린 그저 나인이고 상궁마마들 심부름만 하면 돼. 좀 하기 어렵거나 그런 것들은 다 무수리들 시키면 되고."
"그렇군요...."
"그리고 너 언제 나한테 말 놓을 거야?"
"..네?"
"우리 동갑인데.."
"아.... 어... 그러..게? 하하."
하룻밤 새에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연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하.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쨌든 우린 조회가 끝나자마자 왕과 왕비를 모시는 궁으로 걸어오는데 이건 거의 고역이었다. 궁녀들의 침방과 이곳까지는 걸어서 대략 1시간이었다.
평생 다이어트를 달고 살았던 내게는 한 시간쯤이야 껌이었지만 지금 이곳의 계절은 무더운 여름.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쏟아내리는 무더운 여름이다.
하지만 무척이나 더 당황스러웠던 건 날 미워했던 상궁마마가 맨 앞에서 걸어가면서 몰래 힐끔힐끔 내 상태를 검사하는 듯 해 보였다.
더워죽겠는데 시선들은 왜 자꾸 날 가만두질 않는 것인지...
이 순간만큼은 꿈에서 깨고 싶다는 생각이 날 지독하게 괴롭혔다.
***
"전하 아침상을 내어오라고 할까요?"
"아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배가 고프지 않구나."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찌 제가 편히 음식을 입에 댈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오늘 식사를 거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넌..."
금색의 봉황의 비녀를 꽂은 여인이 쑥스럽다는 듯 옆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이 나라의 주군인 민석은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그의 제 4 후 궁인 한비와 방에서 나올 줄 몰랐다.
원래 지금 시간이면 아침을 먹고 궁궐을 돌아다니며 산책을 할 시간이었지만 오늘따라 민석의 마음에서는 이 방을 나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한참을 한빈과 눈을 마주하던 민석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그의 짙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본 한빈이 이번엔 혀를 끌끌 차더니 민석에게 샘이 난다는 말투로 얘기했다.
"오늘도 세자저하는 전하께 문안오지 않으셨군요."
"……."
"아무리 두 살 터울 밖에 안 난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무례한 게 아니 옵니까…!"
"닥치거라."
그의 날카로운 말에 입을 놀리던 한빈가 고개를 돌렸다. 한빈는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다.. 전하의 10명의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는 자신이었다.
뒷방신세인 중전, 하룻밤의 실수로 왕의 여자가 된 후궁들. 자신도 궁녀출신으로 왕에게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된 지 어언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왕은 저를 제일 많이 불렀고
저와 제일 많이 정사를 나눴다. 이 나라의 국모만 할 수 있다는 '봉황 비녀'도 왕이 자신에게 하사했단 말이다.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여인은 중전도 아닌 자신이고 모두가 자신의 발밑에서 기었다. 하지만 딱 한 명 저를 거슬리게 하는 건 세자였다. 왕의 이복동생인 세자는 고작 왕과 두살터울밖에 나지 않는 형제였다. 하지만,
세자 얘기만 꺼내면 정색하는 저 왕에게 더군다나 절대 저를 어미 취급할 수 없다는 세자에게 무척 단단히 화가 난 한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전하."
"한빈."
"전하께서도 더는 세자의 문안을 기다리지 마세요. 그이는 전하와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습니다."
"말조심해."
"저도 세자에 대한 얘기를 전하와............"
"박귀인이 독을 먹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지."
민석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 모습의 방금까지도 기세등등했던 한빈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한빈을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다 이내 반쯤 걸쳤던 용포를 억지로 입은 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안 보고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빈은 급하게 민석을 불렀지만,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는 '어서 문을 열어라.' 라고 소리친 다음 내관과 궁녀들의 보좌 아래 방을 빠져나갔다.
한빈의 눈가가 빨개졌다. 한참을 민석이 떠난 자리만을 바라보던 한빈이 손을들이 자신의 머리에 있는 봉황비녀를 만지작거렸다.
'절대 뺏기지 않아.'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한빈이 조소를 띄었다.
*
-주상전하 납시오!
"어서 고개를 숙여!"
저려오는 다리를 남몰래 주먹으로 내리치며 몇 시간을 가만히 서 있었는데 저 앞에서 한 남자의 큰 목소리가 궁 안에 크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모두가 짜기라도 한 듯 고개를 숙였다. 신분이 낮은 궁인들은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내 쾅- 하며 거칠게 문이 열렸고 그곳에서 빨간 용포를 입은 한 남성이 나왔다.
남몰래 왕의 얼굴이나 보자는 심성으로 고개를 올렸지만 거의 맨 뒤에 서 있는 내가 왕을 볼 수 있을 리가 있나. 도대체 왕은 뭐하다가 지금 나온 거야. 순 지 맘대로네. 이곳에 온 지 한 두 시간이 되어서야 모습을 보인 왕에게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지만, 분위기가 엄선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쥐가 날 것만 같은 다리를 몰래 주먹으로 툭툭 두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뭐지 이 느낌... 갑작스럽게 드는 싸한 느낌에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설마....... 안좋은 느낌에 숙였던 고개를 조심히 올렸고 그곳엔...
낯선 얼굴의 익숙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