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과 함께 읽으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수몰 지구
w. 랑데부
- 잠시 혼선의 오류로 전기가 차단 되었던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기억에 의존된 추억이다. 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추억을 지갑 속에 끼워두고 오늘을 살아냈다. 깜빡거리던 빛은 아무 일도 없었던 마냥 돌아와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온갖 더운 숨들의 존재를 무기력하게 했던 에어컨이 절실해질 즘, 그 절실함이 도를 넘어 목덜미 한 줄기의 땀과 짜증으로 흡수되어 흘러내릴 즘,
"아이,"
'씨'라는 억센 발음이 나오기 시작할 즘 전류는 돌아왔다. 이 짧은 혼선에 어딘가로 흩어졌다 돌아온 걸까? 의미 없는 궁금증을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죄송합니다"
이미 지하철은 만석이다. 더 살을 붙일 것도 없이 콩나물시루와 한참 비슷한 이 빼곡한 공간으로 또 다른 콩나물 대가리들이 밀고 들어오려니 이런 실수와 참사는 빈번했다. 나는 대강 고개를 숙인 것도 뻣뻣이 세운 것도 아닌 애매한 반응을 내놓고 떨어진 지갑을 주웠다. 요 며칠 영수증만 배불리 먹인 지갑은 결국 수그렸던 몸을 두 쪽으로 벌린 채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쓸데없는 내장들을 빼내라는 협박과도 같아 보였다. 좀처럼 잘 오무려지지 않는 지갑에 결국 이 낑기는 사람들 틈에서 영수증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엔젤리너스? 내가 엔젤리너스를 갔다고? 지난주 법카 영수증 제출에서 사라졌던 삼식 횟집 영수증이 왜 여기서 나와.
"..."
빼곡한 종잇장을 주머니에 쑤셔 박고 또 박았다. 그리고 문득 영양가가 존재할 리 만무한 이 의미 없는 영수증과 쿠폰들 사이에 끼워진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았다. 원서에 붙일 3X4 사이즈에 맞춘 사진 한 장. 나를 보고 웃고 있는 너. 다시 끔 지하철을 비추던 빛이 깜빡이고 사람들의 더운 숨으로 밀폐된 공간을 채운다. 한강을 끼고 이 혼선을 감당하지도 못한 채, 열차는 안과 밖이 뒤틀린 여름 속을 달리고 있었다.
내일 지구가 수몰(水沒)한다면 묻고 싶은 말이 있어.
-
그보다 전에, 우리가 좋았던 날의 존재 속 말이야.
1.
여름을 칭하는 수많은 문장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표현을 꼽아본다. 시작은 '바야흐로' 끝은 '여름이었다'일테다. 그 두 가지 표현을 여름에 투영하기에 이 나의 여름은,
"와아악!"
고역이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왁자지껄하게 여기선 주먹만 한 공을 보고 달려드는 남자애들의 목청이 창틈을 타고 넘어온다. 에어컨이 고장이 난 지 나흘째, 당분간은 활짝 연 창문과 선풍기에 의존해야만 하는 특별반에서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성적표까지 우편함에 다이렉트로 꽂히자 아이들은 자유를 향해 자꾸만 기어오르고 소리를 지르고 날아올랐다. 아 물론, 이 공간에 앉은 안경뱅이들과 나만 제외하고 말이다.
고삼이라는 타이틀을 목에 매자 더욱 치열해진 졸음과 피곤함을 눈꺼풀 위로 잔뜩 밀어 올렸다. 열두 시 이십오분, 진도를 상관할 바 없이 빨간펜과 답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맘때쯤 되면 꼭 기분 나쁜 소음을 내며 뒷문이 드르륵, 열렸다.
"너 일등 먹었더라, 밑에 등수 붙었어! 지금 애들 쫘악 깔렸거든"
땀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김원필이 다가와 또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여기서 아무도 반기지 않는 소식을 들고 오는 건 덤 같은 것이었다. 들고 있는 펜을 장난기 가득한 입술에 꾹 갖다 댔다. 조용히 해, 너. 오자마자 인상 찌푸린다고 저도 찌푸리는 김원필을 풀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간간히 머리칼을 간지럽히던 바람이 오롯히이 나를 향해 불어왔다. 앞에 있는 김원필의 긴 팔이 돌려놓은 선풍기를 바라보았다.
"아, 아야"
"왜?"
"눈에 뭐 들어간 거 같애. 아씨, 따가워"
"나 봐봐"
후우우.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물기 서린 엄지로 엹은 눈꺼풀을 밀어올린다. 입으로 솔솔 바람을 불어온다. 한 번이면, 그냥 확 떼어내려했다. 서너번 불어온 바람에 따끔한 통증이 가신다. 양볼을 그러쥐었던 김원필의 큰 손을 떼어내자 우리가 얼마나 가깝게 붙어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웅웅. 이상한 이명이 들린다.
"...못생겼어"
"야!"
"장난이야, 장난"
정답 정답 정답, 틀렸고, 또 다시 정답. 기계적으로 정답을 골라내다 자각도 하지 못하고 김원필을 바라보았다. 사람 잠 다 깨워놓고 속 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럼 또 어제처럼, 엊그제처럼, 사실 오래 전과 같이. 힐끔 힐끔 도둑놈 심보가 되어 김원필을 바라보았다.이 곁눈질에도 도가 텄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한다. 코를 씰룩대면 오답노트 찾는 척, 이미 일곱 번 넘게 본 노트를 뒤적거렸다. 다시 힐끔, 이젠 고롱고롱 조용히 코를 곤다. 오늘 아침 이슬비가 내려 땅 위를 기어가던 지렁이보다 느린 속도로 검지 손가락을 오똑한 코 앞에 갖다 대었다. 옅은 들숨과 날숨이 규칙적으로 피부에 닿았다 흩어지길 반복했다. 깊은 밤을 침투할만큼 유독 비가 내린 후 더위가 막강해졌다. 목줄기에 흐른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김원필이 뒤척이자 급하게 형광펜을 쥐었다. 그것도 거꾸로.
"...허"
지금 내가 뭐하는 거지 싶었다. 결국 버석한 더위에 또 다시 뒤척이기 시작한 김원필 등짝 위로 체육복을 던지고 미적분 문제집을 폈다.
*
고삼은 그렇다. 꼬박 한 시간과 하루와 일주일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정도로 일정하고, 그정도로 일정한 감정의 지배가 일상으로 물들어 있다. 그래야만 한다는게 어른들의 사상이다. 그런데, 자꾸 김원필 때문에 모호했던 경계가 뚜렷해졌다.
일교시에 나눠준 장래희망과 희망대학 설문종이를 앞에 두고 김원필은 골몰해있었다. 펜을 물고는 있었지만 무슨 생각으로 골몰하는가까지, 거기까지 궁금해하면 진짜 이건 말그대로 '관심'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고 있는 펜이 형광펜인지, 볼펜인지 관심을 주지 않으려 동그라미 속에서 뒤틀린 공식을 꼬집었다.
"다 썼어?"
"아, 야!"
먼지가 풀풀 날린다며 당번이 떼간 선풍기 때문에 이젠 창문 밖에 남지 않은 고역 속에서 큰 동작 따위는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김원필은 날 그렇게 둘 위인이 못 됐다. 끝끝내 내 필통 안에 꼬깃하게 접힌 종이를 들고 교실 밖으로 튀어나갔다.
"내놔. 내놓으라고! 아직 다 안 썼어!"
"다 썼는데? 아- 여기가 가고 싶어? 어디냐면!!"
"야 김원필!"
쏟아지는 햇볕에 익어버린 복도를 가로질렀다. 오늘따라 더위에 뵈는 게 없어 보이는 김원필의 뒷꽁무니를 열심히 쫓았다. 쓸데없이 긴 다리가 이런데서 빛난다고?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가는 김원필의 하복 셔츠 자락이 잡힐 듯 손 안에서 쏙 빠져 나갔다. 다 읽었으면서 주면 뭐해줄건데 따위의 먹히지 않는 장난으로 나를 낚은 김원필은 체육관으로 내리 달리기 시작했다. 습한 공기가 목구멍에 까끌거리는 모래알과 뒤섞였다. 차오르는 숨을 턱턱 막아왔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김원필 몰래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저 애 기억 속에 존재하지도 않을지 모르는 순간이 나에겐 특별하니까.
"너, 허억- 진짜... 아후"
"물 마셔. 물, 여기"
"됐어"
바지 주머니에 건성으로 쑤셔 넣은 종이를 홱 낚아챘다. 물은 무슨 너나 많이 마셔라.
종이컵을 들고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김원필의 시선이 강당 밖 태양보다 부담스러워 곧장 돌아섰다. 시선에 의미를 부여하기 싫은데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김원필 것도 아닌데, 분명한 건 내 것은 정말 아니었다. 따뜻한 두 손이 양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훅 몸의 중심이 뒤로 쏠렸다.
"바람 좀 쐬고 가"
"뭐?"
"강당은 중앙제어 아니잖아. 고장도 안 났고"
김원필은 금방이라도 튈 내 몸을 한 팔로 끌어 안았다. 그리고 다른 왼팔로 에어컨 세기를 강으로 꾹 눌러 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홧홧하게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사실은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 이건 다행이 아니다.
"야 이거 좀,"
"너 계속 거기서 공부하면 쓰러져"
"제일 빵빵하잖아. 여기가. 아, 하나 더 있는데"
"..어디?"
"교장실"
거긴 내가 감당불가.
곧장 손사레치며 개구지게 웃는 김원필의 얼굴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뭐라고 말을 끄집어려다 그냥 달아오른 얼굴이 식을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얼굴은 금새 차가워졌지만 끌어안은 몸은 여전히 열대야였다. 내가 열대야로 죽던,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으로 죽던 상관 없는 김원필은 여전히 손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자꾸만 거센 풍속에 흩어지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또 다시 장난을 걸어오는 거였다.
"아 자꾸 만지지 말라.. 헉"
"왜? ...어,"
"뛰어!"
가진 게 머리 밖에 없어서 먼저 돌아간 내 사고회로는 달리라고 지시를 내렸다. 물론 먼저 뛰어도 김원필이 빨랐다. 시리도록 차가워진 김원필의 손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놓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참는다고 참았던 딸꾹질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입을 틀어 막았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태양의 기세는 가열찼다. 지독한 매미의 합주가 시작되었고, 동시에 따가운 모래바람이 일었다.
김원필은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이 운동장을 가로 질렀을다. 간간히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달려 붙잡힐 걸 알면서 너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2.
-"약 34년만의 이례적인 유성우의 밤으로 기록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시간은 오전 한 시경부터 시작될 것으로…"
"엄마! 나, 나 학교 가요!"
"너 양말! ㅇㅇㅇ!"
양말이 대수인가. 이번 버스를 놓치면 지각이었다. 꼭 일 년에 한 번 이런 아슬아슬한 아침이 예고없이 일어나곤 했다. 애매한 장마가 끝나고 장마보다 더 장마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발을 내딛는 모든 곳이 웅덩이일정도였다. 차라리 양말 없이 집 밖으로 나온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 정도였으니. 문제는 우산이었다.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입에 문 식빵 때문에 누군가를 붙잡고 부탁하지도 못했다. 온갖 수를 써도 우산은 접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빳빳하게 고집을 부리는 우산을 빗 속에 내팽겨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녕"
"..."
"이제 학교 가?"
"야, 그거"
식빵 반대편엔 내 이빨자국이 선연했다. 김원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가져간 우산을 접어 도로 건넸다. 방금 전까지 죽어도 접히지 않던 우산이 왜 이렇게 쉽게 접혔는지 모르는 일이다.
"야 자리 많잖아. 가로막지 말고 절루 가"
"째째하게 군다 또. 싫어"
앞에선 김원필의 뒷통수만 빤히 쳐다보았다. 버스는 제 시간에 도착했다. 물을 팍 튀기고 급정거한 버스에 올라탔을 때 비로소 김원필의 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흙탕물이 군데군데 묻어 얼룩이 져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달리는 버스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아니, 내 앞을 가로 막고 섰던 저 얼룩진 셔츠와 함께 말이다.
매주 금요일 다섯 시엔 특별반 정기 시험이 있다. 정규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리 고프지 않은 배를 무시하고 일찍 석식을 먹어야 했다. 자소서에 한 줄이라도 더 기입하려면 시험에 토를 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험이 끝나면 홱홱 걷어간 채 다시 지루한 시간의 연속이다. 끝났다는 안도감은 대학 합격의 순간 이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셔츠 안에 받쳐 입은 흰 티를 펄럭이며 피엠피를 꺼내들었다. 모의고사 핵심문제만 뽑아 제본한 노트를 찾으려 고개를 돌리자마자 교실 밖 시끄러운 소음이 수반 되었다. 소음만 날 뿐 아무도 없었다. 다시 불투명한 유리를 들여다보니 익숙한 손이 보였다. 플라스틱 통을 흔들어보이는 익숙한 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끄덕.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깨끔발로 교실을 나섰다. 역시나 김원필이었다. 급식으로 나왔던 수박을 어떻게 얻은 건지 작은 정사각형 모양으로 가지런히 잘라 플라스틱통 안에 담겨 있었다. 조용히, 조용히 따라와.
김원필 손을 붙잡고 재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어디가? 어스름한 복도를 달리다시피 걷자 등에다 대고 김원필이 자꾸 묻는다. 어제부터 출장으로 빈 보건실로 숨어 들었다. 김원필이 전학오곤 방과후 땡땡이에 도가 틀대로 터버렸다. 다 지가 가르켜준 거면서. 에어컨 버튼을 청테이프로 막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고장'이라고 쓰여있다. 대신 고정된 두 대의 선풍기 줄을 잡아 당겨 틀어놓고 커튼을 쳤다. 그리고 침대 위로 기어올라가니 무릎 위로 체육복이 덮혔다.
"내가 아줌마들한테 달라고 했어"
"그랬겠지"
사실 수박을 좋아하지 않았다. 달다고 집어먹는 김원필과 다르게 맹맹한 물맛과 비스무리하기만 했다. 그걸 모른다. 김원필은.
그냥 대충 맞춰 집어먹다 세 개쯤, 입에서 씨를 우물거렸다. 당연하게 입에 갖다내는 손바닥을 밀어냈다. 너같으면 뱉겠냐고 짜증낼 수가 없었다.
"야"
"왜"
"이것 봐"
"아 이것만 풀고"
후드득.
귀찮게구는 김원필을 밀어두고 삼십번 문제의 공식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지는 감촉은 이질적이라 반사작으로 머리칼을 털어냈다. 이거 뭐야?
"이제 좀,"
"..이거,"
"예쁘다"
오늘 점심 특별반에 오지도 않고 어딜 그렇게 쏘다녔나 싶었더니. 머리 위로 흩뿌린 꽃잎이 주범이었다. 오해의 주범. 여름에만 볼 수 있는 한 철의 향들만 머리와 어깨에 내려 앉았다. 이건 파란 수국잎이 눈꺼풀을 지나 툭 떨어진다. 소매로 굴러 떨어진 분홍색 야생화를 주워 숨을 들이 쉬었다.
"오늘 유성우 떨어진대"
"응"
"같이 보자. 여기서"
"학교에서?"
"어"
나랑?
어.
눈 하나 깜빡 하지 않고 고개까지 끄덕였다. 알아채지 못해 안도하면서 동시에 삐뚤어지곤 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입이 삐죽 나왔다. 집어 넣으려 해도 튀어나온 입은 들어가지가 않았다. 그냥 겁쟁이라, 그랬다. 저무는 노을이 침대까지 들어와 앉았다. 조금 선선해졌을까 싶다가도 잠깐 연 창에서 더운 바람이 훅 끼쳐왔다. 같이 볼 거지? 또 물어오는 질문에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의 부정이다. 너를 좋아하지만 좋아하고 싶지 않고, 밤하늘에 새겨진 모래알을 같이 보고싶지 않지만 보고 싶었다.
*
열한 시.
벽에 바짝 붙어 몸을 움츠렸다. 문 틈새로 들어오던 손전등 불빛을 거두어갔다. 들킬까봐 선풍기도 틀지 못하고 버티던 교실 내부는 손톱만큼 열어둔 창을 통해 꽤 쌀쌀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언제 가는데.."
"이번이 마지막이야. 딱 다섯 번만 순찰 돈다니까?"
"너 세봤어?"
"어?"
"남아서 세어봤냐고"
"어? ...어, 아니 뭐"
긍정도 부정도 아닌 끄덕임과 동시에 김원필이 내게로 쏟아졌다. 안갔어 진짜. 진짜야.
급하게 가까워진 거리로 심장이 헐떡이기 전에 들킬까 조바심에 심장이 뛰고 있었다. 복도 밖으로 희미하지만 운동화를 질질 끌며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김원필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그 소리를 집중해 듣는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두 눈을 마주하고 있다간 뛰쳐나가기라도 할까봐서였다.
첫 번째로 숨어든 곳은 음악실, 두 번째는 특별반이었고, 마지막으로 여긴 옥상 바로 밑 삼층 교실이었다. 별을 보자고 한 건 본인이면서, 방금 전 까딱했다간 무엇이든 닿을 뻔 했던 거리가 무색하게 김원필은 까무룩 졸고 있었다. 눅눅한 바닥을 손으로 짚고 창을 바라보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바닷마을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일찍이 불도 꺼지고 가끔 학교 앞을 지나가던 트랙터들도 모두 제 집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뜨문뜨문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이 졸고 있는 김원필의 콧잔등을 간지럽히고 나 콧잔등 위로 미끄럼을 탔다.
떠나온 서울은 어땠을까. 이 바닷마을 여름 밤과 닮은 점이 있는지, 묻고 싶었는데. 사실 이 질문 말고도 묻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었는데. 그냥 거두었다. 뒤로 마주한 산에서 바닷바람과 잎의 마찰로 가끔 부스럭대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이게 전부였다. 풀벌레 하나 울지 않았다. 이게 전부였는데, 자꾸 이 전부를 잊게 만드는 김원필이 신경쓰였다.
"...너 안 잤어?"
"응"
힐끔대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작스럽게 체육복을 몸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어깨에 고개를 기대는 것이다. 혹시라도 바라보았던 시선을 들킬까 얼어붙은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뭐했는데?"
"별이 얼마나 떴나"
"보고있었지"
김원필이 눈을 끔뻑끔뻑 뜨며 느리게 말한다. 그러면서 또 옅게 웃었다. 마음을 몰라줘서 고마운데 또 좀 얄미워 어깨를 팍, 쳤다. 그 얕은 고통이 아픈지 제 팔을 부비는 김원필이 또 조금 좋았다. 조금. 진짜, 조금.
3.
여름 방학을 일주일 앞두고 날뛰는 고삼들을 잠재우기 위해 단 하루를 할애하기로 어른들은 결정한 모양이었다. 근처로 간다. 이 다섯 글자의 의미는 두 가지로 갈렸다. 십 오분 가량을 버스 타고 갈 수 있는 바다거나, 십 오분 가량을 등산해 갈 수 있는 뒷산이거나. 제발, 제발. '제발'과 'please'를 번갈아 입 밖으로 꺼내며 양 손을 모았다. 출발 십 분 전부터 모으고 있었으니 대강 통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으로 모은 두 손을 내리려던 찰나 다른 손이 이 양손을 가볍게 쥐었다.
"..."
"..."
"..미,미,미쳤어억?!"
"아악! 야 아퍼! 아프다고!"
가볍게 내 양손을 쥐었던 그 큰 손의 주인과 두 눈이 마주쳤을 때 엄청난 파동이 느껴졌다. 아니라해도 이건 둘 모두 그랬다. 먼저 어색하고 묘한 기류를 박살낸 건 나였다. 요즘 좀 마른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치자 김원필이 활어처럼 팔딱대기 시작했다. 미안, 미안하다고! 미안해! 아아악! 기류를 박살내느라 버스가 출발하는지도 몰랐다. 역한 기름냄새를 잔뜩 뀌어대며 털털 대는 버스가 학교를 벗어나고 있었다.
"...짜증나 진짜"
"벨트나 매"
괜히 툭 던진 말을 피해 김원필이 내 쪽으로 쏟아졌다. 찰칵. 고작 십 오분 가는 거리에 벨트를 채우고 혀를 죽 내미는 김원필의 뒷통수를 갈겼다. 내가 뭘 또! 억울하게 뒷통수를 부여잡고 올려다보는 눈망울이 다람쥐 같다고 생각한 나는 중증이 분명했다.
김원필은 가는 길 내내 심심함에 몸서리쳤다. 재작년일까, 전학 온 지 얼마 안돼 놀러간 비디오방에서 <내 여자친구를 부탁해>를 본 적이 있다. 김원필은 긴 생머리를 자유롭게 흩날리는 전지현 언니한테 취해서 피쳐폰 배경화면까지 점령한 전적이 존재했다. 언니의 긴생머리를 보고 내리 기른 언니보단 짧은 머리칼을 잡고 김원필은 세 갈래로 땋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하지마"
"예쁘게 해줄게"
"아 한 쪽만 파마 된단 말이야!"
"반대쪽도 해준다니까?"
그게 아니라 그냥 바짝 붙어 머리칼을 매만지는 김원필 때문에 불편한 건데. 그런 걸 알면 김원필이 아니다. 결국 들고온 문제집을 더 바짝 안고 고개를 수그렸다. 어쩌면 좋지. 애초에 이런 심장 박동이 거센 감정을 학기보다 먼저 졸업하면 되는 것을. 그게 안 되고, 무엇보다 김원필은
"..아퍼?"
특별했다. 오롯히 두 눈을 들여다보고 고통을 읽으려는 김원필의 얼굴을 문제집으로 가렸다.
완성하지 못한 머리칼을 쥐고 씩씩대는 김원필의 새끼 손톱이 보였다. 내 검지만한 새끼 손톱. 묘하게 붉었다. 여름이 시작될즈음 해준 봉숭아물이었다. 잘 유지하고 소원 하나만 들어달라는 고백 구실. 그 구실을 눈치 채기 전까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내 마음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전까지 나는 침묵해야 했다.
*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과 까끌거리는 모래알이 전부다. 이 완전한 더위 하나 피신할 곳 없어 한 손으로 그늘을 만들고 열심히 조개 껍질을 주웠다. 괜히 넘실거리는 파도에 매료되어 이미 흠뻑 젖은 저 애들처럼 됐다간, 돌아가는 내내 후회할 게 뻔했다. 조개껍질을 주워 대단한 걸 만드리라.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매일 보는 바닷가를 이렇게 오래 들여다 본 적은 신기하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악! 야 내려놔. 옷 안 가져왔어, 안 가져왔다고!!"
새하얗고 반질반질한, 흠집없는 것들만 골라내다보니 뒤에서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지 알 새가 없었다. 강제로 안겨 점점 억센 파도가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런 트집도 통하지 않았다. 이미 발목을 적신 바닷물은 칠월의 초입에 다다랐지만 차가웠다. 힘껏 던져지나싶어 얼굴을 꽉 감쌌다. 적어도 짠 바닷물이 코로 들어가 매운 맛을 잔뜩 들이쉬는 불상사를 막고 싶은 마음이 절절했다.
"어?"
이 순간적인 방어와 동시에 내동댕이 쳐질 줄 알았던 내 몸은 너무도 멀쩡했다. 수면에 내쳐져 바닥으로 꽂히긴커녕 오히려 몸은 더 높이 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이, 싱겁게!"
와아아악. 하나같이 깔깔대며 주변으로 모여들었던 인파가 기대했던 상황에서 틀어지자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이 물 위에 막 놓아준 조그만 물고기처럼 헐떡이며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를.
"..."
"..그,"
"..어"
"너 무거워"
"야!"
허리를 꼭 끌어안고 올려다보고 있는 건 다름아닌 김원필이었다. 손 틈새로 본 김원필은 또 개구진 얼굴로 나를 끌어안은채 철벅철벅 파도를 갈랐다. 내려달라고해도 주위에 박힌 수십개의 눈알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 시켜준채 고쳐 안았다. 좀 높은 곳에서 갈매기가 울어댔다. 흩어진 아이들은 여전히 타깃을 잡아채 바다의 먹이로 던져주며 물 먹은 솜들이 되어갔다. 모래사장에 내려줄 때까지 끌어안았던 김원필의 목이 뜨거웠다.
발이 닿지 않는 곳까지 끌려들어갔었다. 나를 안고 나온 김원필의 교복 반바지가 짙은 색으로 젖어 모래들이 덕지 덕지 붙어 있었다. 찝찝한 기색 한 번 없었다. 김원필은 가방에서 꾸깃하게 구겨진 체육복을 집어들어 내 발의 물기를 닦아냈다. 발목을 쥔 왼 손도 뜨거웠다 간지러운 행동에 발을 빼낼 생각도 못했다. 어느새 물기가 날아간 오른 발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김원필은 언제 물기에 모래가 엉겨붙었냐듯 뽀얘진 두 발에 슬리퍼를 신겨준 다음에야 몸을 일으켰다. 김원필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별안간 물기가 날아간 손으로 젖은 내 앞머리를 왼쪽으로 슬쩍 넘기는 것이었다.
"뭐, ..왜!"
"아무것도 아니거든"
고맙다는 말 대신 퉁명스럽게 엇나간 말만 튀어나왔다. 참, 마음과는 다르게 이리저리 튀는 나를 나도 묶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심정을 죽어도 김원필은 모른다. 모를 것이다. 여전히 묘하게 웃고 있는 표정으로 내 앞머리를 슥슥 넘겨준 김원필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안에서 두 개의 심장이 동시에 뛰는 것만 같았다. 딱 그만큼의 속도로, 심장이 뛰었다.
*
선착장과 꽤 떨어진 곳까지 걸어왔다. 거의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바닷바람에 끈적해진 손이 자꾸 스치고 부딪혔다. 상황이 반복되자 둘 다 입을 합 다물었다. 어디까지 갈 거야? 이 단순한 질문도. 몰라, 이 단순한 대답도 없이 자꾸만 걸었다. 석양이 지며 열대야가 깔렸다. 이 공백을 메우는 것은 부서지는 파도 뿐이었다. 파도소리가 없었다면 나는 반대편으로 도망갔을 것이다. 붙잡긴할까? 김원필이?
"..근데 아까부터 그거 뭐야?"
"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
이대로가다간 바닷길까지 끊겨 둘 다 심해로 들어갈 것 같아 버스 안에서처럼 기류를 깼다. 계속 뭔가 불편한 모양인지 주머니를 매만지길래 물었더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돌아가야하는데, 가고싶지 않았다.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자 바닷바람과는 이질적인 바람이 분다. 김원필의 손바람이었다. 어느새 저를 내려다보고 그 큰손으로 이마 위에 바람을 일으켰다.
"대학은 어디갈지 정했어?"
"아니"
김원필한테 미래를 잘 묻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처음에 몇 번 물었던 미래의 질문은 모두 뭉텅뭉텅 답도 없이 잘려나가서, 그때부터 질문 선상에서 미뤄두었었다. 여전히 김원필의 손바람은 내 앞머리칼을 흩뜨렸다. 됐어. 그리고 그 손을 치웠다.
내린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앞서 걸었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김원필만 걸었다. 너랑 같이 가고 싶다는 말이 다물린 입술 새로 튀어나올까봐 입술을 깨물자 발걸음은 상관도 없이 떨어지지 않았다. 석양의 끝물이다. 좀 더 거세게 부서져 잔해를 남기는 파도소리가 다시 이 여백을 메운다.
"왜 안 와?"
꽤 먼 거리를 앞서고나서야 그림자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김원필이 뒤를 돌아보았다. 내년 여름 이 자리엔 너와 내가 없을 것 같아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김원필이 나를 보고 있는 얼떨떨한 표정.
"아 내놔"
"싫어"
"흔들렸을걸"
"알거든"
"마음대로 해라"
어이없게 김원필의 미소가 흩어졌다. 그리고 어느 부분은 꼬불거리고 어느 부분은 너무나 빳빳한 내 머리칼을 흩뜨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개구지게 웃는다. 휴대폰을 쥔 손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저 웃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니 없을지도 모르면서. 얼굴이 홧홧해지는게 느껴져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후덥지근한 바람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한참을 돌아서 있었다. 정말, 한참을.
*
참 별이 없었다. 그 날 밤 본 별이 우리의 전부였다는듯 말이다. 어두운 밤은 모래알처럼 흩뿌렸던 빛들을, 몇 광년의 시간을 달려 날아오던 그 찰나의 순간을 단숨에 수거해 유독 깊고 까만 밤이었다. 오직 몇 발자국에 한 번씩 나오는 가로등에 기대어 걸었다. 풀벌레가 우는가 싶더니 조용하다. 아직 씻지 못한 버석한 손을 어색함과 함께 털어내고 김원필을 향해 물었다.
"너 집 안 가?"
"갈 거야"
교복에 밴 풀냄새가 밤공기에 섞여들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은 정반대였다. 학교에서 딱 반으로 갈라 헤어지곤 했던 길을 김원필은 자전거를 끌고 따라왔다. 기름칠이 필요한 자전거는 대뜸 끼륵거렸고, 체인이 턱 걸려 페달이 돌아가는 것을 가로막기도 했다. 그런 자전거를 끌고 기어코 동네 끝자락까지 옆에서 걸었다.
"ㅇㅇㅇ"
"응"
"손 펴봐"
가로등의 수명이 거의 다해 김원필이 머금은게 웃음인지, 아님 다른 무언가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자꾸 손바닥을 오므리자 김원필은 그 손바닥 위를 겹쳐 내 손을 쫙 폈다.
"잠깐만 그러고 있어"
담장 밑에 자리잡은 귀뚜라미 몇 마리가 다시끔 울어댔다. 매미보단 미약한 소리로, 잠깐의 기다림을 채웠다. 여름 밤을 오랫동안 누비다보니 추위가 스멀스멀 올라와 바싹 팔을 부벼 열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펴보인 손바닥 위로 김원필은 사진 한 장을 쥐어주었다.
"버리지마!"
딱 이 말 한 마디만 쏠랑 외치고 김원필은 자전거에 올라탄다. 그리고 재빠르게 이 가로등 밑에서 퇴장해버렸다. 방금까지 찬 기운을 잔뜩 실었던 바람이 앞머리를 살살 간지럽힌다. 용기를 내어 좀 더 환한 빛에 사진을 비추어 보았다. 원서에 붙일 3X4 사이즈에 맞춰 렌즈를 보고 있는 김원필. 아니,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김원필.
알음알음 모은 김원필의 사진들이 있었다. 찍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지우라고 하지 않아서, 그렇게 알음알음 모았던 사진들. 대부분 몰두의 주제가 있었다. 그게 책이든, 뻥뻥 밖에서 차던 공이든. 단 한 번도 내가 몰두의 주제가 된 적은 없었다. 이 사진도 그렇겠지. 그렇지만 렌즈가 아닌 나를 보고 웃고 있다고 지나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쏠랑 자전거에 올라탄 김원필의 해사한 입꼬리가 자꾸 아무것도 없는 담장 위에 그려보았다.
4.
여름 방학 내내 김원필은 보이지 않았다. 학교로 이어진 모든 길목으로 등교했다. 그리고 길어진 태양의 그림자를 쫓아 돌아온 집 앞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렸다. 기다리며 발에 채이던 돌멩이가 전부 내리막 그 어디로 튕겨져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쯤, 개학이 다가왔다.
꽤 길었던 여름방학을, 그 길고 텁텁한 혼자의 시간을 마무리 짓고 교실로 돌아왔다. 여기엔 있을 줄 알았다. 우산을 접어주고 입에 물었던 빵을 뺏어먹던 정류장에도 없고, 파도가 잠들 때까지 걷던 선착장에도 없고, 바닷마을 끄트머리 하나뿐인 연두색 지붕. 김원필 집에도 없었지만 이 교실 안에서 김원필을 만날 거라고 나는 그 텁텁한 시간을 애써 달래곤 했다.
"..지금 간다고?"
"응"
이 바닷마을 안에서 최선을 다해 피해 다녔다면, 끝까지 그러라고 악을 쓰고 싶었다. 다시 김원필을 마주한 건 이층 신발장 앞이었다. 곧 수업종이 울리는데 여전히 운동화를 꺾어 신고 있었다. 그리고 갈아신고 뛰어들어와야 할 슬리퍼를 쇼핑백 깊숙히 밀어 넣었다. 나 전학 가. 대뜸 영문 없는 네글자를 어거지로 나에게 안겨주었다.
"...미안"
창을 넘은 커튼이 스칠만큼의 소리였다. 아니 물끼 남은 손가락으로 창에 낙서를 할만큼이었을까.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네글자에 덧붙인 말은 사포처럼 마음을 문댔다. 다시 얼굴을 마주하는 날이 우리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나는 김원필의 여백에다가 김원필을 그렸다. 원망을 내비쳤다간 결국 갈 곳 없이 까무룩 뒤덮일 마음이 들통날까 입술을 깨물었다.
"가서, 잘 지내"
"응"
"얼른 가"
미워하기엔 김원필을 너무 많이 좋아했다. 의심을 거두고 나선 이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단지 처음이라 이 감정을 어떻게 달래야하는지 나도 모를 뿐이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네 글자의 안녕을 듣고나서 내 손끝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김원필의 새끼 손가락에 물든 봉숭아물처럼 말이다. 겨우 골라낸 말이 '안녕'이 아니었던 이유는 우리가 지겹도록 내뱉었던 말의 무게를 그제야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ㅇㅇㅇ"
"ㅇㅇ야"
"ㅇㅇ야"
김원필이 많이 연습했을 사진 속 표정이었다. 지어낸, 꾸며낸 그 표정. 불안정한 심호흡이 어깨 너머로 흩어진다. 호선을 그린 입꼬리와 살짝 휘어진 두 눈. 김원필 역시 작별인사라 할 만한 말 하나 건네지 않았다. 저 미소에게 건네는 안녕은 영영 작별과 동일선상 같았으니까. 지어낸 웃음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꺼내 보일 수 없었다. 김원필의 표정 또한 원망할 수 없다. 나는 처음부터 너의 모든 것을 원망할 권리를 갖지 못했다.
특별하다고 믿었던 존재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닷마을에서 특별했던 건 매년 돌아온 짧고 깊은 여름 밤과 김원필 두 가지였다. 문득 바닷가에서의 기억이 습한 더위와 함께 코끝을 스쳤다. 이번 여름이 마지막일지 몰라. 기억은 스친 코끝을 시큰하게 했다.
"이거 네 꺼야?"
"아니? 네 꺼 아냐? 한 번 열어봐"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주인을 잃은 책상을 창가 자리 반대편 벽면까지 쭉 밀었다. 억누른 얄미움과 원망, 형용할 수 없는 서운함은 남아있는 책상의 몫으로 돌아갔다. 가뜩이나 복잡하게 엉킨 마음을 갖다 버리고 싶었다. 그 마음에 쓰레기 하나 얹는다고 서운할 것은 없었다. 배려없이 빨간 종이 상자 뚜껑을 열어젖혔다. 거친 손길에 찢어져도 돌아갈 주인에게 미안해할 마음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 ..."
기억에 의존해 더듬어보면 마음을 담아두었던 시간은 이 년 남짓했다. 이 년 동안 세차게 뛰었던 심장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훅 꺼진 것 같았다. 목이 콱 틀어막힌 것마냥 아무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대신 소리를 틀어 막은 울음만 멈추지 않고 쏟아졌다. 투두둑. 끝난 장마가 찾아왔다. 장마처럼, 불어난 눈물이 자꾸만 뻣뻣한 교실 바닥을 적시고 고였다.
흠집 없이 깨지지 않은 예쁜 조개 껍질만 담긴 상자. 이름도, 편지도 없지만 나는 수신자를 알았다. 비눗물에 삼일 간 넣어 두었다가 방 안에서 말리면 은은한 비누향이 난다는 사실을 아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마음 속에 거대한 파도가 일렁인다.
떠나는 여름 자락에는 맡을 수 없는 라일락향이 시큰한 코끝에서 머문다. 새하얀 조개 껍질을 쥐고 솟구치는 울음을 토해냈다. 너의 전부가 내 마음 속에서 떠내려간다. 오랫동안 침수가 이어질 걸 안다. 이 수몰된 시간 너머 무엇이 있을까. 저린 다리로 서 더이상 네가 없는 창 밖을, 상자를 쥔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수많은 인파에 떠밀려 열차 밖으로 밀려 나왔다. 열차는 가끔 떠나온 바닷마을 거센 파도를 닮아 있었다. 불필요할정도로 지나치게 많은 쓰레기와 오물들을 토해냈다. 동시에 그 사이서 어디서부터 쓸려온지 모를 추억들도 함께 토해냈다.
특별하다고 믿었다. 김원필은 나에게 특별함이었다. 스스로를 설득할 필요도 없이 나는 그 애를 좋아했다. 그 언젠가 그 애가 주었던 조개껍질처럼 하얀 배를 타고 우리의 마지막을 찾아 거슬러 올라갔을 때도 존재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웃었던 그때의 마지막이 비소로 영영이었다는 사실만을 안고 건조한 육지로 돌아왔다. 더이상 그 어느 곳에도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알아도 알지 못해도 돌이킬 수 없는 여름의 결말이었다.
"팔천 이백원입니다"
"네, 잠시만요"
미터기에 찍힌 숫자를 되네이며 지갑을 열었다. 팔천, 이백원. 손바닥에 올려진 차가운 감각을 떠나보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강바람의 비린내가 엷은 가디건을 통과한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수많은 사람들이 물가를 찾아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고소한 치킨 냄새가 바람과 섞이기도 하고, 비틀거리는 자전거 두 대가 내 앞을 쌩 지나치기도 했다.
지폐를 꺼내느라 열었던 지갑을 문득 다시 들여다 보곤 그 애와 마주한다. 많이 연습했지만 어색한 미소는 꼭 그 날 마지막 표정 같았다. 지갑 속에 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여름을 넘어서 이제는 정말 편안함의 지대에 들어섰을까. 건네지 못했던 안녕이라는 인사의 미련을, 나 역시 줄까 망설였던 3X4 사이즈의 사진에 대한 고민을,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조개껍질의 기억을 지운걸까. 아님, 나는 끝내 넘어서지 못한 채 물에 쓸려 사라진 지난 날 기억의 잔해를 보고 이 질문을 하려는 것일까.
내일 지구가 수몰(水沒)한다면 묻고 싶은 말이 있어.
원필아 널 많이 좋아했어.
너는 나를 좋아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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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는 가사를 인용한 문구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말
3X4을 듣고 여름의 향이 나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문득 여름의 증명에 이어 도운이를 담아볼까,하다가 섬소년은 그대로 남겨두기로 하고 새로운 인물로 여름을 써내려갔습니다. 이전에 읽어본 글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참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려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마음들이 죄송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부족함이 자꾸 앞을 가로막아 전보다 느린 속도로 업로드가 진행 중이지만, 멈추지 않고 남은 계절도 열심히 걸어가겠습니다.
읽어주셔서 모든 마음을 다해 감사합니다.
+파불 문제 문제가 심각해 재업로드했습니다. 두 장은 복구가 안 되는 것 같아 속상하지만,,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