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팊 태환과 함께 연습을 하고, 또 밥을 먹고, 또 술을 마시고 그렇게 보낸 그 날은 절대로 평생 잊을 수 없을거 같다. 어쩌면 다시 오지않을 그런 날일테니까.
" [쑨양, 몸 좀 풀고 있어야지.] "
잠시 생각에 빠져 멍하게 있으니, 얼른 몸을 풀라는 감독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하고 짧게 대답하고는 입고있던 트레이닝 복을 벗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채 조용히 몸을 풀었다. 몸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거 같았지만, 특별히 몸이 안좋다던가 컨디션이 나쁘지는 않았다. 몸을 살짝 달군 후 선수 입장을 위해 다시 옷을 갈아입고 조금씩 경기장으로 걸어나갔다.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던 태환이 보였다. 아니, 형이라고 부르랬으니 그렇게 불러야겠지 이제부터. 지난 일이 생각나 작게 웃고는 헤드폰을 낀채 밖같만 바라보는 그를 나 또한 같은 헤드폰을 낀채 빤히 바라봤다.
그 날의 200m 경기는 왠지 모르게 두근거리고 즐거웠다. 금메달이 아니였다. 하지만 즐거웠다. 터치패드를 찍고 고개를 들었을때 나는 제일 먼저 형, 태환을 찾았다. 그 역시 나를 반겨줬고, 전광판을 확인하고서 나는 확하게 웃었다. 우리는 나란히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함께 사진을 찍고, 또 짧게나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후에 감독님에게 너무 들떠있다고 꾸지람을 된통 들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아무튼 어영부영 그렇게 시상식이 끝나고 훈련을 또하며, 시간은 흘렀고 1500m, 마지막 경기날이 되었다. 대기실에서 앉아있는데 한자리 떨어진 옆에 그가 앉아있었다. 오늘도 역시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뭐라 말을 걸고싶은데 그는 항상 노래를 들으면 시선을 누군가에게 주지않았다.
끙끙 거리며 눈치만 보고있자니, 그의 앞에 다른 선수가 지나갔다. 순간 형은 고개를 들었고 그 틈을 놓치지않고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아. 하는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헤드폰을 벗었다. 그리고는 내민 내 손이 무안하지않게 빨리 잡아주었다. 입꼬리를 올려 웃으니 그 역시 해사하게 웃어준다. " -200m 좋았어, 형. "
그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웃으며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자신의 뒷목을 쓸어내렸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불안했던 나는 연신 입술을 혀로 축였다.
" -오늘은 너의 날이될거야. " 기다리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였다. 눈을 꿈뻑거리며 고개를 기우렸다. 그는 특유의 예쁜 미소를 지어보이면서도 슬퍼보였다. 왜 그런 말을 하냐고 하자, 태환은 당연하다는듯 어깨를 으쓱였다.
" -1500m는 쑨양의 주종목이고, 내가 제일 못하는 종목이니까. "
" But‥ "
" -네가 금메달을 따는게 내가 덜 억울할거 같거든. " " -뭐? " 나의 되물음에 태환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수모를 쓴채, 수경을 챙겨서 헤드폰을 쓰고는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나는 한동안 그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감독님이 뭐하냐고 얼른 가라고 할때까지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선수입장을 하고 막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에도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자꾸만 멍하니 사고회로가 정지됐다. 그날따라 장내가 내 머릿속마냥 너무나 시끄러웠고, 결국 나는 사고를 쳐버렸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물에 들어갔던 나는 그대로 다시 올라왔다. 움찔거리던 선수들도 놀라서 다들 나를 바라봤다. 놀란 내 시선의 끝은 태환을 바라봤다. 그는 움직임 없이 그대로 있다가 역시나 시선을 내게 돌려서 바라봤다. 순간 울컥 눈물이 날거같았다. 심판이 나를 어서 물 속에서 빼냈고, 출발 신호가 나오지 않았는데 출발 해버린 난 분명 실격일거라 생각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급격히 목이 말라왔다. 다른 선수들 역시 수경 때문에 시선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실격일거라는 그런 눈일것이다.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물을 삼키려는데 심판이 나를 다시 출발대에 세웠다. " -준비. "
그렇게 다시 출발대에 선 나는 정말 아무런 생각도 없이, 대체 이건 무슨 일인가? 이런 생각도 할 틈도 없이 다시 출발해야했고, 오히려 멍한 머릿속은 내가 아무 생각없이 전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정말 필사적으로 본능에 충실했던 나는 터치패드를 찍고 수면 위로 올라와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어라? 하고 두리번 거리다가 전광판을 바라보니 세계 신기록이였다. 다시 한번 더 눈앞이 아찔해졌다. " [쑨양, 세계 신기록입니다! 기분이 어떠세요?] "
" [어‥, 그게‥, 저는‥.] "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숨이 차올라서? 아니, 벅차올라서, 가슴이 너무 벅차올라서 자꾸만 눈물이 터졌다. 가뜩이나 중국에 눈물이 많기로 유명했던 나는 또 이렇게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터진 눈물은 멈출 줄 몰랐고, 연신 울먹이던 나는 문득 내 곁에 다가오던 한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태환, 그의 모습을 보니 왠지 더 눈물이 날거같았다. 그는 울먹이며 정신 못차리고 인터뷰하던 내 어깨를 쓸어주며 토닥여주고 지나갔다. 그의 손길에 왠지 마음이 차분해져서 겨우 나는 인터뷰를 끝낼 수 있었다.
" [쑨양! 잘했다, 넌 이제 중국의 영웅이야!] "
" [과찬이에요.] " 감독님은 크게 웃으며 내 등을 팡팡 때리듯 토닥였다. 아프기도 했지만 마냥 기분이 좋았다. 갑자기 또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미소가 보고싶었다. 나는 아직 물이 뚝뚝 흐르는 모습으로 수건을 목에 걸친채 선수 대기실을 헤집고 다녔다. 좀처럼 그의 모습이 보이질않는다. 곧 시상식하러 나가야하는데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도저히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경기 진행스탭에게 물어물어 겨우 마지막으로 태환이 발견됐다는 곳에 닳을 수 있었다. 그곳은 선수들이 우글거리는 선수대기실과는 조금 떨어진 복도였다. 왠지 적막함이 흐르는 복도는 조금전까지의 시끄러운 경기장과 별개의 장소 같았다. " 태환형? " 나는 복도를 걸어가며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대답이 없었다. 문득 대기실 하나를 지나가는데 문이 열려있었다. 멈칫하고는 문을 살짝 열어보니 의자에 기대앉아 고개를 푹 숙인 그의 모습이 보였다. 왜저리도 또 한없이 슬퍼보이는걸까.
. . . . . . . . . . . . . . . . . . . . . . 태환은 끼익 거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천천히 들었고, 그 문앞에 서있는것이 그라는걸 알았을때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내 다시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 -무슨일이야? 시상식은? " " -아직…. " " -머리도 좀 말리고 시상 할 준비를 해야지 "
" 형 " 쑨양은 전날 밤과는 다른 또렷한 발음으로 태환을 불렀다. 태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섬주섬 돌아갈 준비를 하다가 움찔하고는 그대로 굳어섰다. 쑨양은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태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않고 살짝 구부정한 자세로 굳어있었다. " -울었어? " " No. "
아니라고 말하는 태환의 눈은 이미 발갛게 부어 충혈되있었다. 쑨양은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고, 입술을 꽉 깨물다가 미동도 없는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경기가 끝난 후 바로 이리로 온건지 태환의 몸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 -울었어? "
쑨양은 다시 한번 물었고, 태환은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고서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 -왜? 놀려주려고? " " -그럴리가 "
" -너한테 지고, 나혼자 질질 짜고있으니 얼마나 웃기겠어 "
" 형 " " -웃겨죽겠지? 어때, 이제 만족해? " " 형! "
" 난 니가 싫다고 했잖아 씨발! "
태환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고, 그대로 미친듯이 쑨양의 손길을 피해 날뛰기 시작했다. 쑨양은 아예 두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잡은채 놓치않으려 했지만 태환의 힘 역시 만만치않았다. 두사람은 한참을 씨름했고, 이내 먼저 지친 태환이 숨을 헐떡이며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쑨양은 그제서야 그의 어깨를 살짝 놓아주었다.
" ‥I hate you "
태환은 계속해서 같은 말만 반복했다. 쑨양은 그때마다 가슴이 콕콕 바늘에 찔린듯 따가웠지만 애써 외면했다. " [형은 너무 이기적이야.] "
" -뭐라는.. "
" [나는 여지껏 당신의 뒤에서 당신의 등만을 보면서 그렇게 훈련하고 무너지지않고 버텨왔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뒤를 따르는 나를 당신은 견제하고 멀리하고 밀어냈어. 그럴때마다 나는 다시 한발 물러서고, 다가가려다 다시 한발 물러서고, 나는 당신을 절대 라이벌이라거나 꺾어 넘어야할 상대라고 생각치않는다고.] "
쑨양은 조금은 화난듯 낮은 목소리로 따박따박 말했다. 태환은 중국어를 알아 들 을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못했다. 왠지 꼭 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쑨양은 하고싶은 말은 많은데 그에게 전할 수 없어서 가슴이 답답해왔다. 자신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손으로 얼굴을 다 가렸다. 그리고 아마 쑨양의 어깨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 I want‥ I… " 쑨양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온다. 태환은 그를 달래 줄 수 도, 도망 갈 수 도 없었다. " just… friend‥ " 쑨양은 그렇게 얼굴을 가린채 서있었고, 태환은 손을 내밀듯 말듯 움찔거리다가, 푹 숙인 그의 머리 위에 조금은 차가운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머리를 쓸어주었다. 아무말없이 그렇게 조용히 쓸어주었고 쑨양은 그런 손길에 금새 안정되는듯 보였다. 태환은 자신을 추월해버린 이 큰 사내가 자신보다 어리다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 -sorry‥, I'm sorry 쑨양 "
그러나 모든것을 받아들이기에는 태환 역시 어렸다. 그런 태환의 맘을 쑨양은 다 이해 할 수 는 없지만 이해하려 애썼다. 떨어지는 것이 두려운것은 꼴등이 아니였다. 1등을 해본 사람만이 그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태환이 그러할것이라고 쑨양은 생각했다.
이내 장내에 메달리스트 선수들을 불러 모으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한참 그렇게 서있던 쑨양은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태환은 웃고있었다. " 형, I'm… "
태환은 쉿. 소리를 내며 검지손가락을 제 입술에 가져다댔고, 쑨양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여주고는 그렇게 그를 지나쳐서 그 텅빈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쑨양은 잠시 그가 나간 문만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상식을 하기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시상식은 금방 끝났다. 국기가 올라가고, 국가가 울려퍼지고, 쑨양은 아까 하도 펑펑 울어서 눈물은 더 나오지 않는듯 하였다. 그는 금메달을 목에 건채 선수단들의 축하를 받으며 유유히 경기장을 빠져나갔고 숙소로 돌아가는길은 중국 선수단의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쑨양은 즐거웠지만 뭔가 마냥 즐거워보이지않았다. 모든 경기일정이 끝난 쑨양은 그 날 하루 선수단과 양껏 놀고서 녹초가 되어서 침대에 쭉 뻗었다. " [‥보고싶다….] " 쑨양은 그렇게 깊게 잠이들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내 경기일정은 모두 끝이났다. 이번 올림픽의 끝은 아무런 느낌도 들지않았다. 메달을 땄지만 즐겁지않았고, 마냥 얼른 집으로 가고싶었다. 각종 인터뷰들이 끝나고, 나는 간간히 내 골머리를 썩혔던 선수, 쑨양을 볼 수 있었지만 그는 금메달리스트 였다. 쏟아지는 관심속에 엄청 바빠보였고 그저 나는 조용히 눈에 띄지않게 움직였다.
올림픽은 끝까지 나를 힘들게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한국에서의 귀국이 거절되었다. 당황한 나는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 그렇게 입국이 지연된 선수단들이 항의를 했고, 결국 먼저 귀국을 할 수 있도록 승낙되었다. 그 사이에 중국선수단들은 먼저 귀국을 했다고 들었다. 문득 비행기에 타서 하늘을 바라보다가 나는 마지막 우리의 대화가 생각났다. ‘ just… friend‥ ’
추한 모습을 보인거 같아서 갑자기 무안해졌다. 다음에 만나면 사과해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모른다. 2년 뒤 인천아시안게임에 그는 참여하겠지만, 내가 참가 할지안할지 모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였다. 아니, 우리의 만남은 이 런던 올림픽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오는거 같았지만 애써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마지막 인사라도 할걸 그랬나 하고 계속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더이상 생각을 하고싶지않았다.
" 박태환선수, 이번 올림픽은 어땠나요? "
" 실격 논란이 있었는데요, 심경이 어떠세요? "
" 아쉽게도 2연패에 실패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
제 기분은 좆같습니다. 자꾸, 이런걸 묻는 당신들 때문에 내 기분이 지금 더럽고 좋다구요. 입이 간질간질했다. 애써 나는 웃어보였다. 여기서 생각대로 말했다가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겠는가 그래, 웃어야지. 화내는 놈이 지는거다. " 이번 런던올림픽도 최선을 다했지만, 국민 여러분들의 관심에 보답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다시 웃으면서 돌아섰다. 은메달을 따오고도 죄송하다고 해야하는 내가 불쌍해졌다. 세계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하고 2위, 은메달이라는 대업을 이뤘지만 금메달이 아니고서는 금의환양이 아니고서는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없었다. 왠지 웃고있는 입꼬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조용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가족들은 나를 끌어안아주며 수고했다고, 최고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또 웃었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 쉬라는 배려에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와 내 침대에 누우니 익숙한 향이 느꼈다. 아‥ 여기가 내 집이였지. " 좋다‥. " 피로가 몰려왔다. 이렇게 누워서 잠이들었다가 깨면 다시 런던 올림픽 전이였으면 좋겠다. 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봤다. 이내 나는 눈을 내려감은채 그대로 잠들었다. 아주 깊게, 푹 잘 수 있었다. 나는 그 날 꿈속에서 그를 봤다. 우리가 함께 연습했던 그날의 수영장에서 우리는 함께 웃고있었던거 같다. 정말 친구처럼 서로 웃고 떠들며 수영도 하고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은채 함께 있었다. 왠지 꿈 속에서도 꿈이라면 깨고 싶지않은 런던의 추억이였다. ![[쑨환/태양] 런던의 추억 05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9/1/7/917ede80be0b4554aa3f585bb2b465d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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