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기야, 안녕!" 또 남우현이다. 강의실에 들어오면 항상 혼자인 나에게 꾸준히, 그리고 끈덕지게 말을 거는 사람은 오직 남우현 뿐이다. 그런 남우현에게 나는 한마디조차 제대로 해준 적이 없다. "오늘 왜이렇게 이쁘게 입고 온거야? 우리 뚜기, 나랑 데이트 하려고?"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인 그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자발적 아싸를 유지하기 위해서일거다. 남우현은 우리과 인원이 대략 90명이 넘어가는데도 나를 제외한 동기들에게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고, 학생회 선배들까지도 그를 학생회에 넣으려고 할 만큼 그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런 사람이다. 처음에 그가 다가왔을때 그저 과에서 겉도는 동기를 챙기는 '척'하는 그런사람이라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틀렸다는걸 확인시켜주듯 남우현은 수업이 끝나면 나를 데려다주기위해 강의실 앞에서 내가 나올때까지 강아지처럼 기다리기 시작했고, 사람이 붐비는 걸 꺼리는 내가 학교 앞 버스정류장을 지나 두 정거장 전 정류장으로 묵묵히 걷기 시작했을때 나에게, "뚜기는 걷는걸 진짜 좋아하는구나?! 나돈데!"
라며 말과는 다르게 조금은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눈을 휘어 웃고는 내 발걸음에 맞춰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게 시작이었다. 그 후로 남우현은 나에게 일상으로 다가왔고 나는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또래 아이들과는 다르게 남자친구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누구든 들으면 비웃겠지만 버려지는게 너무나도 무서웠다. 부모님께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에게 버림받는 일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그런 두려움이었다.
추근덕 대던 남우현이 가고 다시 혼자 남겨지면 나는 그제서야 쳐박고있던 고개를 들어 동기들의 이야기를 듣고있는 남우현을 쳐다보면 내가 보던 남우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남우현이 자리잡고 있다. 눈을 휘어 웃는 남우현이라기보단 절제된 남우현. "여러분! 수업 전에 공지 한가지 하겠습니다. 단톡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오늘 이 수업 마치고 동기 단합을 위한 술자리가 마련될 예정이니 한분도 빠짐없이 참석 부탁드립니다." 저런 자리에 가본 적이 없는 나지만 오늘만큼은 빠지면 안된다는 듯 과대의 눈초리에 그저 고개를 다시 푹 숙여버렸다. 술자리에 대한 걱정으로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른채 수업이 끝났고 평소처럼 사람들이 다들 나가기를 기다리기 위해 괜시리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벽쪽으로 더욱 붙어 앉았다.
"김뚜기, 혹시 휴대폰에 내 사진 있는거 아냐? 뭔데 그렇게 열심히 보는거야?" 사람들 틈에 섞여서 장난치며 강의실을 나가던 평소의 남우현과는 다르게 오늘은 교수님이 나가시자마자 부리나케 내 옆으로 온 모양이다. 아마도 술자리에 어색할 나를 챙기기 위해 다른 아이들이 들러붙기 전에 온거겠지만.. "가.."
"어?!! 말했다!!! 와.. 우리 뚜기!! 목소리 왜이렇게 예뻐..?" 별로 좋은말도 아닌데 뭐가 그리 좋은지 함박웃음에 호들갑을 떠는걸보니 술자리에서 빠져나오긴 글러버린것같다. "그나저나, 우리 뚜기는 대학로 맛집. 뭐 그런거 안찾아다녀서 위치도 아무것도 모르니까 내가 같이 가야겠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는 동기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나에게 웃으며 손을 건내는 모습에 그를 기다리던 동기들은 전부 떨떠름하게 강의실을 떠나고 붐비던 사람들이 줄어든 강의실에 나도 일어나 강의실을 나서기 시작한다. "뚜기야, 너 술은 마셔봤어?" 걱정되는듯 물어오는 남우현에 대답은 말고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이내 표정이 굳어지나 싶더니 "그냥 내 옆에 있어. 니꺼는 내가 따라줄게" 나름 심각해진 그의 모습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아까보다 느려진 발걸음으로 술집을 향해 가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우리가 조금 늦게 도착한 탓인지 이미 술에 취한 동기들도 몇몇 보였고 그런 풍경이 익숙한듯 남우현은 동기들의 부름에 내 손을 덥썩 잡더니 자신의 자리에 나를 앉히고 그 옆에 간이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뿌듯하게 웃어보이는 그를 보니 사람이 많아 긴장했던 온몸이 조금 풀리는 것 같기도 하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테이블이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남우현에 대한 농담 뿐이었다. 자발적 아싸인 내가 다른 아이들을 알리가 없었으니까. 한참 떠들어대더니 과대가 건배제의를 했고 모두들 서로의 술잔을 채우기 바빴다.
이야기에서 소외된 나지만 꽤나 잘 버티고 있었던 탓인지 한동안 남우현은 나를 잊어버린듯 무리속에 섞여들었지만 모두들 술잔을 채우기 시작하고 옆에 이성열이라는 친구가 나에게 잔을 채워주겠다며 웃으며 술병을 들이밀자 그제서야 나를 힐끔 보더니 자신의 술잔을 채운다. "고마워." 이성열이 웃으며 따라준 잔을 쳐다보고 멍하니 있으니 이내 남우현은 내 술잔을 가져가 자신의 술잔과 바꾸고는 모르는 척 신나게 친구들과 소리를 치며 건배를 한다. 나도 그 속에 섞여 대충 건배를 하고는 술잔에 있던 술을 들이키고는 분명 쓸거라고 예상해 숨을 참고 마신 술이 아무런 느낌이 없자 숨을 쉬어본다. 괜시리 허탈해져 남우현을 쳐다보자 아까처럼 슬쩍 나를 보고는 피식 웃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질것만 같아 고개를 숙였다. 내가 행여나 술을 마실까 물로 채운 자신의 잔을 쥐어준 것이다. "나 화장실 다녀올게. 술 마시지 마." 그런 나에게 살짝 말을 하고는 화장실에 가는 남우현을 쳐다보고 있자니 아까부터 나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했던 이성열이 나에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술을 냉큼 따르고는 "뚜기야 좀 마셔!! 지금이야!!" 하고는 억지로 손에 잔을 쥐어주는 상황에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던 다른 동기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힌다. 아까 남우현이 술대신 물을 준것을 알고있었는지 뿌듯한 표정으로 술잔을 받은 나를 바라본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선 그냥 이것만 마시고 끝내버리자 싶은 마음에 벌컥 들이켜버리고는 옆에 사이다 잔에 있던 물을 빠르게 들이키는데, "어어, 뚜기야 그거 술이야!!" 켁켁, 더 써져버린 입안에 이성열이 진짜 물을 가져와 나에게 전해준다. 연거푸 세잔을 들이킨 꼴이 되어버린 상황에 이성열은 남우현 눈치를 보듯 화장실쪽을 쳐다보고는 쉿-이라며 다른테이블로 도망을 가버렸다. 아마도 화장실에 갔다가 다른 테이블에 붙잡혀 놀고있을 것 같은 남우현을 찾아보는데 아까와는 다르게 몽롱한 머리와 자꾸만 실실거릴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용히 비틀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술집을 나왔다. 자꾸만 풀릴것같은 다리도 문제였지만 골목으로 들어온 술집에 어디로 가야 정류장이 나올지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다. 그저 발이 가는 대로 살살 걸어가던 중이었는데, "김뚜기!!!! 뚜기야!!!" 저 멀리서 남우현이 허겁지겁 달려오는게 여러개로 보인다.
달리기가 빠른건가..? 저 멀리에 있던 남우현이 어느새 눈앞에 있는데 어쩐지 화가 나 보인다. "왜 먼저가, 술도 마셨다며!" 처음보는 남우현의 모습에 당황하긴 했지만 오히려 이번일을 계기로 나에게 등을 돌리지 않을까.. 그토록 바래온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걱정이 앞선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감정이 숨겨지지가 않는다.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막을 도리가 없어 꾸역꾸역 삼켜내고 있자 나보다 더 걱정이 많은 얼굴로는 "왜? 뚜기야 왜그래? 김뚜기 속 안좋아? 머리아픈거야? 화내서 미안해 너 걱정되서 그랬어. 업어줄까? " 핑핑 도는 머리에 걱정 가득한 남우현의 말이 들어오자 감정이 복받쳐오른다. 소리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내가 안쓰러운지 연신 자신의 손으로 내 볼을 어루만져주면서 다른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을 불편해할까 자신의 품으로 나를 가려주는 남우현때문에 울음을 멈출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나니 술이 다 깬것같아서 챙피한 마음에 우현을 밀어내곤 뒤를 돌자 "술 다 깼어? 괜찮아?" 라며 내 몸을 돌리기보단 어깨를 감싸며 옆에 선 남우현.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휘감았던건 좀 된것같다. 하지만 극복하지 못한 두려움에 밀어내던 남우현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온 오늘, 아마도 남우현도 내 마음이 열렸다는걸 느낀듯 입을 열었다. "뚜기야 더 로맨틱한 상황에서 말해주고 싶었는데 나 너 좋아해. 오티때 처음 보고 그뒤로 계속 쫓아다닌거 단순한 호기심도 아니고 괜한 오지랖도 아니었어. "
긴장한듯 보이는 얼굴로 말하는 남우현을 보자니 괜시리 웃음이 날것만 같아 땅을 보고는 살풋 웃었다. 그런 나를 발견한 듯 더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네가 나를 밀어내도 나는 너랑 함께하고 싶어. 그치만 네가 나로인해 다른사람들에게 피해를 보는건 싫어서 조심했어. 아까도 너한테 고백하기전에 사람들 입에 가볍게 네가 내 여자친구라고 소문나는건 원치않아서 덤덤한척 했던거야. 뚜기야 나랑 연애..해볼래...?" 어쩌면 술이 충분이 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남우현에게 마음을 연지 오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어쩌면 나는 남우현을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응" 간결한 나의 대답이지만 너는 웃었다. 항상 웃어왔지만 제일 따듯하게 웃었고, 나에게 너는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