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3 보컬 입시생이다. 현재 보컬입시를 위해 실용음악학원을 다니고 있다. 학교와는 거리가 조금 있지만 그래도 유명한 학원에 다니기 위해 번화가로 나와 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얼마 전부터 대학생 보컬쌤이 새로 온다는 이야기가 학원 내에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학원에 쌤들이라면 거의 대학원생들이던지 졸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여자아이들은 더욱 호들갑이다. 띠링- "안녕하세요" 학원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소와 같이 데스크에 앉아있을 알바언니를 향해 인사를 했는데
돌아오지 않는 인사에 의아해 데스크를 쳐다보니 처음보는 남자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폰만 하고 있는게 보였다. 이게 새로온 보컬쌤 김성규와 나의 첫만남이었다. 어차피 내 담당 선생님도 아닌데 눈에 띄어서 뭐하나 싶기도 하고, 인사 씹히는거 정도야 눈 감고 넘어가는거 어려운 일 아니니까.. 그대로 문 옆 정수기에서 물을 떠 남아있는 연습실을 찾아 들어가려고 연습실 한바퀴를 슬쩍 돌아보는데 오랜만에 학교에서 저녁을 먹고 온 탓인지 연습실 자리가 없다. 그 말은 지금 내가 데스크 옆 의자에서 연습실 자리가 날 때까지 대기를 해야 한다는건데.
다시 데스크로 돌아와 성규쌤 옆 의자에 앉았는데, 아까와는 다른 저 모습은 뭐지..? 슬쩍 보니 쿠키런을 하다가 죽은 모양이다. 되게 심각해보였는데.. 뭔가 웃겨서 살짝 웃었더니 그제서야 내가 옆에 앉은걸 알았는지 "큼, 안녕? 이름이 뭐냐?"
약간 머쓱해 보이지만 뭐 그럴만 하지. "김뚜기요." "아아 뚜기.. 내 학생은 아니네, 고3?" "네." "왜 여깄어? 연습실 풀이야?" 물어봐놓고는 대답도 안듣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개미굴'연습실 이라고 불리는 공간으로 간다. 우리 학원에는 연습실이 많은데 그만큼 학생도 많아서 늦게오면 자리가 없는 일이 다반사다. 그런데 '개미굴'이라고 불리는 연습실쪽은 굉장히 일찍 와야 차지할 수 있는 자리다. 이름답게 굴처럼 데스크 왼편으로 들어가면 울림이 좋고 건반과 벽사이가 넓어서 연습하기 가장 좋은 공간이다. 개미굴에는 연습방이 6개가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3번 연습실을 가장 애용한다.
"뚜기야, 이리와봐." 어느새 데스크앞에서 나를 부르는 성규쌤에 의아해서 따라가봤더니, "원래 나 오늘 레슨때문에 잡아놓은건데 아까 애들이 오디션때문에 레코딩수업 들어가서 안쓸것같아. 너 여기 써, 비켜줄게." 웬일이야, 이시간엔 택도 없을 '개미굴' 3번방이다. "감사합니다!!" 너무 신나서 큰목소리로 인사했더니 토끼눈으로 쳐다보면서 웃는다.
"깜짝이야, 연습이나 열심히 해라." 웃는건 또 되게 귀엽네. 그렇게 짤막한 인사를 하고 가버린 성규쌤과 나는 그 후로 학원에 오는 시간이 잘 맞아서 그런지 급속도로 친해지기 시작했고, 내 마음에 김성규가 쌤이 아닌 남자 느껴지기 시작했다. 띠링- "안녕하세요." "응 어서와~" 익숙하게 인사를 받아주는 알바언니를 지나쳐 연습실에 가는데 일찍와서 그런지 연습실이 아직은 여유롭다. 나는 자연스럽게 개미굴 3번 연습실로 들어갔고 짐을 내려놓고는 물병을 가지고 카운터로 나갔다.
"오, 김뚜기 맨날 굼뜨더니 오늘은 왜이렇게 일찍왔냐?" "쌤은 왜 안어울리게 사탕을 먹고 있어요. 애같아." "아오 이게 까불어." 물을 뜨고있는 내게 다가와 장난을 치는 성규쌤. 까분다며 먹고있던 사탕으로 이마를 치는 흉내를 내는 성규쌤에 웃음이 터졌다. "쌤 오늘은 레슨 몇개에요?" "나 아까 끝났지. 오늘은 취미반 대학생들이어서." "오 잘됐다. 쌤 저 좀 도와주세요." 성규쌤 의사야 어떻든 이번에 입시곡에서 자꾸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새롭게 들어갈 곡을 카피해야하는데 카피를 해도 자꾸만 턱턱 막히는 느낌이라 도움이 필요했다. 성규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손목을 잡고 연습실로 데려가는데 "와 김뚜기 부끄러운줄 모르고 쌤 손을 막 잡네." "손 아니고 손목이거든요?" 괜히 사심이 들어간게 들킬까봐 까칠하게 성규쌤을 쳐다보는데 "쌤..귀 왜 빨개요?"
내 말을 듣고는 자기 귀를 가려버리는 성규쌤. 아 내 광대가 승천한다. "아 보지마!!! 더워서 그래!!!!!!" "어휴 귀청 떨어지겠어요 쌤. 앉아요 얼른." 괜히 큰소리를 내는 성규쌤이 귀여워서 얼른 앉으라고하니 건반위에 올려놨던 내 악보를 가져가서 보는데,
"아 빨리 말해. 어디가, 어떻게 안되는데" 아직도 부끄러운지 괜히 까칠해진 성규쌤에 나도 더 놀리면 혼날것같아 진지하게 펜을 들고 성규쌤에게 어느부분인지 체크해주니, "불러볼래?" 하더니 내 대답은 듣지도않고 반주를 시작한다. 얼떨결에 시작하게 된 노래에 나도 집중을 하는데 아까 성규쌤에게 체크해줬던 그부분이 나오자 역시나 음이탈이 났다. "봐봐 뚜기야, 여기 벌스에서 싸비로 넘어갈때 호흡이 끊기거든? 여기서 '우린 헤어진거야~' 부르고 들이마실때 피치가 떨어지면 안되고 '집에 오는길에 홀로~' 이부분까지 연결이 되서 이어져야해. 알겠지?"
진지하게 알려주는 성규쌤은 처음이라서 괜히 더 떨린다. "네." 길게 대답하면 떨리는게 들킬까봐 간결히 대답하자 다시 반주를 해주는 성규쌤에 오히려 더 설렌다. 그렇게 한참을 내 연습을 봐주던 성규쌤과 나는 나란히 학원을 나오는데 자꾸만 연인사이같다고 생각되서 부끄러워질 찰나에 성규쌤이 나에게 자기 휴대폰을 내민다. "왜요? 쿠키런 깨줘요?" "너보다 내가 더 잘하거든? 번호 좀 알려줘." "죄송합니다. 제 스타일 아니세요."
"또 까불어 이게" 어이 없는지 웃으며 팔을 툭툭치는 성규쌤에 못이기는척 번호를 주니 "나 오늘이 여기 쌤 마지막날이야." "네?" 이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 "원래 여기서 일하려고 했던건 아닌데 아는형이 자기 입원하는 동안만 대신 해달라고 해서, 근데 생각보다 빨리 퇴원해서 이제 내일부턴 그 형이 나온대." "아.. 쌤 그럼 우리 이제 못봐요?" 안돼... 우리 성규쌤이 내 하루의 활력소 같았는데.. 이대로 성규쌤을 놓칠수는 없다. "아니, 그래서 내가 너 번호 물어본거잖아. 종종 연락하자." 종종 연락하자는 말이 왜이렇게 서운한지 모르겠다. 이것도 감지덕진데. 풀이 죽은 내가 신경쓰였는지 자주 연락하겠다고는 하지만 아무사이도 아닌 나한테 자주 연락해봤자 얼마나 자주 연락하겠는가.. 그래, 이왕 이렇게 된거 연락 안올지도 모르니까 질러놓고 기다리자싶은 마음에 터뜨렸다. "쌤, 아니다 이제 쌤 아니랬으니까 오빠죠? 성규오빠, 저 오빠 좋아해요. 그러니까 괜히 종종 연락하고 그래서 나 착각하게 하지말고 오빠도 나 좋아하면 연락해줘요." 라고 말하고 성규쌤의 반응은 보지도 않고 내 앞에 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와버렸다. 번호라도 받아놓을걸 그랬나..? 나만 번호를 준게 내심 안타깝다. 올거라고 생각도 안했지만 정말 김성규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았고, 나의 입시는 성공적이었다. 연습하는 동안 김성규가 생각나지 않도록 더욱 더 열심히 연습했고, 남자에 눈을 팔 시간도 없이 연습에만 매진한 결과였다. 나는 여전히 김성규를 잊지 못했지만 입시는 잘 마쳤냐고 연락조차 오지않는 김성규가 약간은 미워지려고한다. 시간은 흘러 졸업식날이 다가왔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둔 나는 한껏 꾸미고 집을 나서는데.
"쌤..?" 우리집은 어떻게 안거지?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나? 괜히 부른것같다고 후회하며 얼른 뒤를 돌아 가려는데, 타악- 내 손목을 잡고 홱 돌려 자기 품으로 안아버리는 김성규에 놀라 밀치자 "김뚜기. 남자친구 생긴거 아니지?" 라며 살짝 웃으며 물어보는 김성규에 그동안 보고싶었던 것과 연락이 안와 뒤척이던 날들에 서러워져 울기시작하자 당황했는지, "야,야 왜울어!! 울지마 임마!" 서툰거 티내는것도 아니고 내 얼굴을 잡고는 어쩔줄모르는 김성규다. "왜 연락도 안했어요.."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어보자, "입시생이 연애하면 입시에 도움이 되냐, 그리고 좀.. 도둑놈같아서.." 처음엔 크게 말하다가 도둑놈같다는말은 나보다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다. "푸흣, 뭐야 우리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사실 너 그렇게 택시타고 가버린 날, 대답해주려고 나도 바로 뒤에 오는 택시타고 너 따라갔었는데 따라가는 동안 생각이 바뀌어서 너 집에 잘 들어가는것만 보고 나도 집에갔어." 어쩐지 허탈해지는 대답에 그냥 그날 마무리 지었어야했나. 싶을 즈음에 조심스러운 성규쌤의 말이 이어진다. "혹시.. 남자친구 생겼어..?" 놀려주고싶은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오래 기다렸다. "..아니요."
내 대답을 듣자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는, "가자, 데이트하러." 부끄러움에 땅만보고 따라가려는데
"김뚜기, 옷 갈아입고 나와라." 아까 한껏 꾸미느라 허벅지 반도 안오는 치마를 입은게 눈에 거슬렸는지 나를 대문쪽으로 밀어대는 성규쌤이다. 어쩐지 이 연애.. 좀 힘들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