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때 내가 먼저 연락할걸 그랬다.
오늘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 알았더라면.
"어, 김한빈이다."
나는 이제 교실에 쳐 박혀 녀석을 기다리던 짓을
관두고자 마음먹었다.
사랑한다 말도 못 해주는 애를,
연락도 안하는 애를 내가 왜 기다려?
하는 생각에 매점에 가자는 윤아의 말에
오랜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친구들과 교실을 나오자마자 윤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야 뭐야, 뭐야. 쟤 지금 여자애랑 같이 다니는 거야?"
‘헐 대박’ 이라며 내 팔을 흔드는 친구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친구가 이토록 놀라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녀석과 헤어질 때마다
다시 사귀게 될 때까지는
그 텀이 길어봤자 1개월 이하였다.
그 사이에도 녀석은 한번도
다른 여자와는 말도 섞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애들 사이에서 녀석은
철벽남이라고 소문이 났었다.
나 빼곤 아무도 건들일 수 없는.
그래서 우린 학교에서 꽤 유명했다.
그런 녀석이 지금 나 말고
다른 여자랑 같이 있다는 거다.
그래, 사실은
오늘 아침 학교에 도착하니
얼굴을 알고 지내던 김한빈 친구들의
알 수 없는 표정들이,
교실에 들어서자 내게로 쏟아지던 시선들이,
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었다.
내 친구들은 다들 지각을 하는 바람에
나와 마찬가지로 영문을 몰랐고,
그저 이 묘한 분위기를
이해 할 수 없어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들이
지금 이 상황을 내게 말해주려 했던 것이었다.
그냥 말로 해주지.
이런 드럽게 착한 친구들 같으니라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기로 했지?
뭐 먹을까? 역시 콘이 좋겠지?"
울음을 삼킨 채 김한빈에게서 고개를 돌리고선
억지로 웃음을 만들며
심각한 얼굴로 뭐라 중얼거리던
친구의 팔을 잡고 끌었다.
"그래! 매점이나 가자! 내가 쏠게!"
웃어보여야하는데,
얼굴 근육이 덜덜 떨려서 표정관리가 잘 안된다.
그런 나를 본건지 친구가 큰소리로
일부러 밝게 말하는게 느껴졌다.
"응..."
그날 밤 야자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울지 않고 꿋꿋이 버틴 나는 집에 와서야
미친년이 되었다.
“흐어어어…김한빈 이 나쁜놈아!!어어엉!!”
“시끄러 이 기집애야!”
“어허어어어어엉!!!”
엄마의 면박에 더욱더 크게 소릴 쳐대며
목이 쉴 정도로 울어댔다.
한빈이가 있었다면,
'목 아프잖아, 그만 울어.'
하고 위로 해줬을텐데.
평소엔 무뚝뚝해 보여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안해도
그렇게 다정하던 그였는데…
난 욕심쟁이인가 보다
그래도 그가, 누구보다 내게 다정한 그가,
지금 내게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줬음 좋겠다.
*
며칠째 녀석은 그 여자애와 매점에 나타났고,
난 이제 매점조차 가지 못하게 되었다.
교실에선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수근대기 일쑤였고,
나는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뭐가 폭발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뭐든 이 답답함을 쏟아내 버리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렸다.
그 어느때보다 견디기 힘든 점심시간,
그때 마침 녀석의 친구들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왜 불렀어.”
“...어이, 김한빈이 여친아.”
구석진 곳으로 날 부른 녀석들에게
퉁명하게 말하자,
녀석들 중 한 녀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만 하는게 어떠냐?”
“뭐?”
“너 왜 그러는지 대충 알겠는데,
그냥 화해해라. 어?“
“...니네가...뭘 안다고...”
알긴 뭘 알아.
왜 이렇게까지 되어버린건지
니네가 알아?
왜 이렇게 되게 만들어버린건지
나도 날 모르겠는데
너네가 뭘 알아. 어떻게 알아.
쏟아내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참았다.
엄한데 화풀이하지말자.
“우리 이제껏 너네 헤어질때마다 아무 말 안했다.
남의 연애사이기도 하고
언제나처럼 단순한 싸움이고,
언제나처럼 다시 붙어다닐거 뻔하니까.
근데, 이번엔 상황이 다르잖아.
너도 그렇고, 녀석도... 그, 아... 그러니까.
좀 이상하잖아.
그러니까 서로 오해가 쌓인거 같은데...
니가 먼저 시작한거
먼저 숙이고 들어가 줘라.“
아아...
제발 그만 좀 해.
나도 알아, 안다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안다고
충고질이야?“
나 성질 더러운 거 인정한다.
지금 얘들한테 하는 거
엄한데 화풀이 하는 거 라는 것도
잘 안다.
근데 나도 모르게 폭발해 버렸다.
서러운 거, 억울한 거, 화나는 거, 슬픈 거, 짜증나는 거 다.
나도 모르게.
“내가 왜 너네한테 그런 소릴 들어야 돼?
나한테 그딴 녀석 얘기 꺼내지마!“
두 눈 질끈 감고 소릴 치고 나자
우릴 둘러싼 정적에
머릿속이 차갑게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뭐 하는거지 나...
지금 얘들 엄청 벙져있겠지.
뭐 이런게 다 있나... 싶겠지.
그 녀석 친구들인데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아아, 다 짜증나
고개를 들고 녀석들을 봐야하나 어쩌나 잠깐 고민하는
사이 뒤에게 인기척이 느껴져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서있었다.
“거기서 뭐해? 종쳐. 가자.”
녀석은 날 보지도 않고
친구들을 데리고 반으로 가버렸다.
가는 동안 녀석의 친구들이 나와 녀석의
눈치를 보는 것이 보였지만,
녀석은 한번도 내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젠 오기도 뭐도 아니였다.
그냥 이렇게 끝나 버린 거였다.
멍청한 김여주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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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똥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하편은 주말에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