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제 어미의 양분을 모조리 빨아먹고 태어났다. 그래서 여주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아버진 제3금융권에 손을 댄 빚쟁이었다. 몸 약한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다가 그리 되었다. 사채업자들을 피해 아버지는 여주를 데리고 급히 시골로 숨어들었다. 허나 너절한 행색에 이미 그곳에 터잡고 살던 마을사람들이 고운 시선을 보낼리 만무했다. 시간이 지나 결국 사채업자들이 아버지를 찾아내 간헐적으로 마을을 들쑤시기 시작한 후로 눈초리는 더욱 심해졌다. 아빠, 친구들이 나를 싫어해. 걔네 엄마아빠가 걔네보고 나랑 놀지 말라고 그랬대. 여덟 살 여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유없는 미움에 매일 아버지의 옷소매를 붙잡고 울먹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작디 작은 이 마을에서는, 아무리 상급학교로 진학한다 한들 그 속의 구성원들은 그나물에 그밥인지라 한 번 미운털 박힌 여주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든다거나 하는 것들은 헛된 꿈에 불과했다. 시간이 흘러 예전의 그 코흘리개들과 같이 적대감은은 조금 더 집요한 형태로 자라났다. 고등학생쯤 되면 좀 철이 들만도 하건만 복도를 지나가기만 해도 여자애들은 여주를 향해 수군대기 일쑤였고 남자애들은 가끔가다 여주가 저들 눈에 띄면 어깨같은 곳을 실수인척 기분나쁘게 툭툭 건들며 킬킬댔다. 노트나 필기구가 발 달린 것 처럼 사라지는 건 예삿일이고 심지어는 하나뿐인 낡은 자전거까지 도둑맞아 이젠 꼼짝없이 편도로 한시간씩을 내리 걸어야 등하교를 할 수 있었다. 한 번은 그런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담임에게 옅게 토로해보기도 하였지만 젊은 남선생은 그저 웃으며 여주를 다독이기만 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촌구석으로 발령난 의욕없는 담임은 그저 사고 없이 무사히 도심으로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주는 생전 안 하던 공부를 시작했다. 불타오르는 열정같은 건 없었고, 그저 도피성으로 택한 것이기 때문에 성적이 처음부터 막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얼추 서울에 있는 대학 원서 정도는 넣어볼 정도가 되자 아무래도 점점 공부에 매달리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은연한 경멸속에선 가만히 있는 것보단 펜을 쥐는 게 속이 편했고, 성인이 되면 이 지긋지긋한 촌동네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날도 그렇게 낯선 도시에서 신분세탁하는 삶을 망상하며 싸구려 볼펜으로 선을 죽죽 그어나가고 있었다. 헌데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리 어수선했다. 누군가가 지나가듯 흘린 말 중 전학생이라는 단어가 귀에 박혔다. 이 작은 시골고등학교에서 전학생은 아주 보기드문 것이었다. 하여 남에게 애써 신경끄며 살던 여주도 마음이 잠시 동했으나, 흥미는 곧 사그라들렀다. 어차피 저 따위는 친해지지도 못할 것이 자명했기에.
전학생은 여주네 반으로 배정되었다. 하얀 피부를 가진 남학생. 어쩐지 좀 병약해보이는게, 눈길을 끈다. 전학생을 처음 마주한 여주의 감상이었다. 여자애들은 잘생긴 전학생의 얼굴 때문에 계속해서 은은한 추파를 던져댔고, 남자애들은 멀끔해보이는 전학생이 제 무리의 일원이 되길 내심 바랐다. 허나 전학생은 여주만큼이나 말이 없고 냉랭한 성격이었다. 2 주가 채 안 가서 여자애들은 지쳐 나가떨어지고 남자애들은 도시에서 온 전학생에게 이상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시비를 걸어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여주 자신을 괴롭히는 것 마냥 툭툭 건드리는 선에서 그치더니 점점 몸을 부딪히는 강도가 세졌다. 은연중에 전학생이 제 괴롭힘을 가져가주어 고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여주는 뒷자리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숨을 죽이고선 은은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금 간 찻잔마냥 불안불안하게 지속되던 나날은 결국 한 순간에 이르러 박살이 나버렸다. 누구한테 실컷 깨지고 오기라도 한건지 같은 반 질낮은 남자애 하나가 제 불편한 심기 한껏 드러내며 화풀이 대상을 찾고 있었다. 전학생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화풀이의 희생양이 되고야 말았다. 양아치는 지 분을 주체못하고 그 애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반동으로 책상이 엎어져 그 위에 있던 전학생의 필기구와 책이 모조리 바닥으로 추락했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말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공간에서 가장 태연한것은 멱살이 잡힌 와중에도 미동 하나 없는 전학생이었다. 고고한 태도가 그것을 바라보는 여주까지 숨이 막히게 했다. 저 멍청한... 알아서 수그리면 반이라도 가는데 전학생은 대꾸도 없이 미련하게 제 멱살을 잡은 양아치를 내려다보았다.
"이 씨발새끼 눈깔 꼬라지 보소."
양아치가 전학생의 멱살을 거칠게 내팽겨치자 전학생이 교실바닥으로 쓰러졌다. 양아치는 대신 의자를 집었다. 맛이 제대로 간 낯짝을 보아하니 그것을 전학생에게 던질것이 분명했다. 철제로 된 의자 다리에 잘못 맞기라도 하면 최소 중상일 것이 뻔했다. 양아치가 의자를 든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몸이 제멋대로 튀어나간 것은 반쯤은 여주의 의지가 아니었다.
꺅-
어떤 여자애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의자가 전학생을 감싼 여주의 등을 스쳐 방향을 틀고 뒷편에 있던 사물함에 맞아 굉음을 내었다. 교실에 정적이 내려 앉았다. 아무리 평소에 짗궃게 굴었더라도, 자기가 던진 의자가 작은 여자애 등을 맞출 줄은 몰랐는지 양아치는 당황해서 두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단지 스친 것임에도 등이 알싸했다. 곧이어 여기서기서 웅성거림이 터져나오고, 멀리서 학주가 고함을 지르며 뛰쳐들어왔다. 전학생은 그와중에도 무표정하게 제 어깨를 감싼 여주를 내려다 보기만 했다.
보건 교사는 여주더러 등에 조금 크게 멍이 들고, 살짝 찍힌 상처가 났다고 했다. 적어도 2주정도는 계속 아플거라고. 여주는 뒤늦게 찾아오는 아픔에 몸을 배배꼬며 놀란 마음을 잠재우다가 그렇게 보건실 침대에서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오늘이 하필 야자 없는 수요일인 탓에 잠에서 깼어났을 땐 학교 전체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4시가 좀 넘어있었다. 시골의 한겨울은 유난히 해가 짧아 벌써부터 컴컴했다. 빨리 집으로 가지 않으면 꼼짝없이 무섭고 어두운 밤길을 걷게 생겼다. 급히 정신를 차리고 보건실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보건실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별안간 튀어나온 사람기척에 화들짝 놀란 여주가 말을 더듬었다. 누..누구세요. 그에 대답이라도 하듯 보건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여주의 책가방을 손에 쥔 전학생이었다.
"노크해도 답이 없어서 계속 기다렸어."
하도 말 수가 적기에 줄곧 속으로 말을 못하는건가 의심했던 여주는 태연자약하게 말을 꺼내는 전학생 때문에 되려 말문이 막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학생은 방금 전에 의자에 맞아 큰일날 뻔한 애가 맞긴 한지 멀쩡하게 여주를 재촉했다. 뭐해, 가방 안 매고.
"어? 어..."
전학생이 앞장서자 여주는 홀린듯이 전학생을 따라나섰다. 학교는 산에 있어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까지 내려가는 덴 시간이 꽤 걸렸다. 여주는 전학생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학생은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컸다. 아까 그렇게 교실바닥에 속절없이 내팽겨쳐진 애가 맞나 싶었다. 가방을 받은 이상 이제 더는 전학생과 같이 있을 필요는 없는데도 여주는 왠지 모르게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걷는 전학생을 따라잡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교문 앞에서 전학생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뒤에서 평소보다 빠르게 걷던 여주는 내리막길에 속도를 주체못하고 하마터면 전학생의 가슴팍에 코를 박을 뻔 했다.
"고마워."
전학생이 말했다. 반병신 되려던거 살려줬더니 고맙다는 인사가 저 한마디가 끝이야? 하마터면 나도 뒤질 뻔했는데? 안하느니만 못한 인사에 여주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전학생도 그런 여주를 알아챘는지 잘생긴 얼굴에 머쓱함이 묻어났다. 여주의 오해와 달리 말은 할줄 알지만 과묵한 것은 본 성격이 맞는지 전학생은 또다시 뒤돌아 한참을 아무말없이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전학생의 집은 저와 같은 방향인 것 같았다. 아니 잠만 이게 왜 다행인데? 여주가 한창 이상한 잡념에 사로잡혀있을때 전학생은 다시 입을 뗐다.
"나 이상한 새끼 맞아."
"...머..머가?"
니가 그렇게 생각하잖아. 전학생이 대답했다. 너 존나 이상해. 맨날 정색하는 거. 아무말도 안 하는 거. 다 이상해. 여주의 얼굴에선 그런 생각들이 훤히 드러났다. 정곡을 찔려 당황한 여주에 전학생의 입꼬리가 작게 올라갔다. 누가 보면 웃음이라고 쳐주기 민망할 정도로 아주 미세한 움직임. 그래도 여주는 항상 표정없이 뚱하게 지내던 애가 웃는 것이 신기하여 별다른 변명없이 옆에서 전학생의 얼굴만 올려다보았다. 냉하고 차갑던 인상이 언제부턴지 유들유들하게 풀어져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쩐지 능글맞아 보이기도 했다. 알고보니 좀 많이 실없는 새끼구만. 여주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이어지는 말은 전혀 실없지가 않았다.
"너만 알아라. 나 심장병 있어서 화내면 안 돼."
"......"
"그래서 일부러 애들이랑 말도 안 섞고 누가 시비걸어도 참으면서 지냈어."
"......"
갑자기 자기 치부를 드러내는 전학생덕에 여주는 애꿎은 입만 어버버댔다. 설마 이런 속사정이 있으리라곤 추호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벙찐 여주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는듯 전학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 진짜 어렸을 때부터 이러고 살아서. 이제 아까 그 정도로는 놀라지도 않아."
"......."
"근데 너가 나 안아줄 땐 솔직히 좀..."
심장이 뻐근했어.
전학생의 마지막 말은 뭣모르는 시골촌뜨기가 듣기에도 참 묘했다.
그후로 여주의 일상은 무언가가 많이 이상해졌다. 애들은 더이상 여주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워 하는 눈치였다. 의자로 전학생을 내려칠뻔한 그 양아치는 나태한 선생들이 보기에도 좀 아니었던 건지 그날 뒤로 모습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며칠 정학이라도 먹은건가 싶었는데 나중에 열심히 공부하는 척, 애들 하는 말을 엿들어보니 아예 강제전학을 가게 된 모양이었다. 여주는 그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가까이로 옮겨 대각선 앞에 있는 전학생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와 더불어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전학생이 국회의원 아버지랑 변호사 어머니를 둔 초초초금수저라는 것이었다. 특히 전학생의 아버지는 정치같은 것엔 관심없는 여주마저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을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애들이 뭔 사고를 치든 늘 시큰둥하기만 한 학교가 웬일로 답지 않은 과잉대응을 하나 했더니 이런 속사정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주는 뭔가 허탈해지는 기분이었다.
전학생은 그날 이후로 행동에 거침이 없어졌다. 아주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문제는 그 직진이 오롯히 여주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학생은 쉬는시간마다 여주근처를 맴돌다 곧 아예 자기 자리를 여주 옆으로 바꿔버렸다. 무려 원래 자리 뒤에 있던 애가 칠판이 안보여서 전학생더러 자리를 옮겨달라 부탁했다는 핑계까지 만들어내서 말이다. 전학생 뒷자리는 무슨 실기를 준비한답시고 허구한날 잠이나 퍼자는 학생이란걸 알고있던 담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전학생에게 자리를 옮길 것을 허락했다. 금수저 전학생과 만년왕따의 조합이란 가히 신선하여 여러사람의 관심을 끌기에 차고도 넘쳤다. 쏟아지는 시선이 무서워 여주는 자존심 다 버리고 자기는 찐따니까 같이 찐따새끼로 엮이기 싫으면 제발 좀 가만히 닥치고 있으라며 전학생을 조곤조곤 회유했다. 그러나 전학생은 그런 여주의 조용하고 다급한 역정만 못들은척 딴청만 피우다 쉬는 시간만 되면 여주 옆에서 실없는 농담 따먹기만 일삼았다. 이를테면 오리를 생으로 먹으면? 회오리! 으하하하.
뭐... 이런식인데... 전학생이 아재개그를 마무리하며 저 으하하하,를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한음절씩 끊어 읊는 모습은 정말이지 기괴하기 짝이없었다. 쟤 진짜 또라인가봐. 아냐 쟤 사실 장애인이래. 지나가던 학생들은 그런 전학생을 보고 제멋대로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처음엔 정말 어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진심으로 정색했건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같잖은 개그코드에 동화라도 되는 건지 여주는 점점 웃음을 참기 힘들어졌다. 전학생이 바흐가 울면 바흐흑까지 지껄였을 땐 이미 알고있는 인터넷 개그임에도 이를 깍 깨물어야했다. 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웃는 건 여주 자신 뿐이고 전학생은 하다못해 입꼬리에 1mm의 미동마저 없다는 점이었다. 그 뻔뻔한 모습이 또 웃긴 나머지 언젠가 여주는 결국 끅끅 웃음을 터뜨리며 백기를 들았다. 전학생은 그날 여주가 그리했던 것 처럼 여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마디 덧붙였다. 너 웃는 거 처음 봐. 여주가 대답했다. 지는.
부잣집 자식이라는 세간의 소문에 걸맞게 전학생이 싸오는 도시락은 정말로 맛있었다. 전학생은 복잡한 곳을 극도로 혐오했는데 얼마 되지 않긴 해도 전교생이 복작거리는 급식실은 그중에서 최악의 장소였다. 그래서 전학생은 늘 도시락을 싸왔다.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도시락이 무슨 말이야, 하고 놀리면서도 여주는 급식실에서 눈치밥 먹는 것을 그만 두고 대신 텅 빈 교실에 남아 매일 착실하게 전학생의 도시락을 야금야금 빼앗아먹었다. 전학생의 도시락 메뉴는 날마다 바뀌었다. 어머니가 솜씨가 무진장 좋으시네. 여주가 기름에 잘 볶아진 문어소세지를 하나 집어먹으며 중얼거렸다. 짭짤한 맛이 입 전체에 퍼졌다. 전학생의 표정은 살짝 굳어졌다. 그거 내가 한거야. 전학생은 제발 저린 사람처럼 작게 웅얼거렸다. 전학생은 가족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도 미움만 받고 자란 탓에 타인의 아주 사소한 감정변화도 단번에 알아채는 여주는 그 뒤로 전학생의 부모님에 대한 궁금증은 접어두기로 했다. 돈만 많은 줄 알았더니 사연까지 가졌구나,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어느순간부터 전학생은 여주의 몫까지 도시락을 챙겨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시락 하나 두 개 열 개 스무 개 까먹다가 겨울이 훅 지나갔다. 대체 거길 어떻게 기어들어간건지 전학생은 마을에서 제일 큰 집인 예전 이장댁에 자취를 했다. 부모님은 바쁘셔서 서울에 계시고 전학생만 혼자 이 깡촌 시골바닥에서 전전하는 것이다. 심장병이면 가족이 같이 살아야 되는 게 아닌가? 여주는 의문이 들었으나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내가 잘 챙겨주면 되겠지 뭐. 어쩌면 생각한 것보다는 전학생의 심장이 멀쩡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장이 식구들 데리고 도시로 상경한다는 소리는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나지만 이렇게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떠나버릴줄은 정말 몰랐다. 여주는 대단하신 전학생 부모님이 또 한 번 힘을 쓰셨겠거니하고 지레짐작했다. 이장댁 딸래미는 여주를 제일 심하게 괴롭히던 애들 중 하나였다. 때문에 평소에는 무표정하게 달라붙는 덩치가 징그럽다가도 넓은 이장댁 마루에 배부른 맹수마냥 늘어지게 터를 잡은 전학생을 볼 때면 여주는 절로 아량이 넓어짐을 느꼈다. 박힌돌 밀어낸 굴러온 돌이 기특한 격이었다. 여주가 베개를 베고 엎어져 옆을 보고 누운 전학생의 턱을 강아지 예뻐하듯이 간지럽혔다. 전학생이 성가시다는 듯 여주를 떼어냈다. 좋은 말 할때 손 치워라.
전학생은 흐릿하고 뽀얬다. 그런데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사나운 구석이 있었다. 작정하고 표정을 굳히면 전학생의 원 안으로 발을 들이민 여주마저 등골이 서늘했다. 지금이 딱 그짝이었다. 쟿은맬 햴떄 샌 치애라아-. 상황파악 못하고 요상한 발음으로 전학생의 말을 따라하며 계속해서 전학생을 간지럽히던 여주는, 전학생이 어정쩡하게 쭈그리고 있던 그것의 손을 확 낚아채는 바람에 나무마루에 양 무릎을 쿵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자기가 당겨놓고도 적잖이 놀랐는지 전학생이 다급하게 퍼질러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여주는 무릎보다 전학생이 쎄게 그러쥔 손목이 더 아린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빨갛게 부은 무릎과 손목을 살피는 전학생의 얼굴에 실금이 갔다. 그것은 해일처럼 장대한 변화였다. 그러게 김여주,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 느릿하게 떨어지는 전학생의 음성이 여주를 책망했다. 별안간 손목을 낚아채며 놀래킨 자기 잘못이 더 큰 데도 불구하고 전학생은 여주 탓만 하는 것이다. 헌데 여주는 그런 전학생에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럽게 품으로 쏟아지는 그 애가, 제 귓가에 대고 밭은 숨을 헐떡이는 그 애가, 너무도 공포스러워서. 기어코 온 몸을 여주에게 기댄 전학생의 너른 등이 뭍으로 떠밀린 아가미처럼 비정상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여주는 그런 전학생을 차마 밀어내지도 끌어안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다만 아주 찰나임과 동시에 영원한 순간 속에서 여주는 쓰러지는 전학생의 눈동자가 징그러운 죽음의 색깔을 띠고 있음을 목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