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 성동혁, 1226456
사랑이 지겨웠다.
현대는 태초가 잉태한 끔찍한 감정을 갈망하고 강권하는 시대였다. 자신을 사랑하세요. 가족을 사랑하세요. 이웃을 사랑하세요. 우리 모두 사랑합시다. 사이비 성서는 에로스, 아가페, 플라토닉을 갈긴 활자로 해묵은 서점 모퉁이를 채우더니 훗날 영화와 드라마 형태로 21세기 스크린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그깟 ‘사랑’이 없으면 창작도 못 하는 세상이었다.
혀끝에 날을 세워 그들을 조롱한다. 그깟 ‘사랑’ 없이도 잘만 살아온 내게 주저하거나 꺼릴 것은 없었다. 낡은 원룸 싱크대 배수구에서 역류한 찌꺼기만 제외하면 오늘도 사랑에 죽고 못 사는 사이비 광신도들을 이긴 삶이었다.
변기에 고개를 처박고 누런 신물을 토한다. 들어간 것이 없으니 나올 것도 없다. 게워내려 할수록 탁한 수조에 물이 찼다. 사각형 타일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린다. 끝내 엉기는 조소는 한때 나도 그들처럼 사랑했었다는 부끄러운 증거.
떨어지는 눈물. 검게 스며드는 악취. 사이비 집단이 칭송하는 참혹한 감정은 내게 이 악취와 같았다. 내가 했던 모든 사랑은 막힌 배수구에서 역류한 찌꺼기와 다를 바 없는 썩은 것들이었으니까.
언제나 일이 우선인 엄마에게 사랑을 갈구하던 아빠가 도망쳤다. 자신을 학대한 부모에게 사랑을 구걸하다 자살한 열여섯 은수의 장례식을 치렀다. 내가 사랑한 그들은 까맣게 탄 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을 잃고도 파렴치한 나는 지훈을 사랑했다. 열아홉이었다. 불안과 불행으로 점철된 마음은 끝을 생각하면서도 지훈을 놓아주지 못했다. 스물은 그렇게 졌다.
내 사랑은 피워내지 못하고 죽은 꽃. 수면으로 침전하는 이물질. 해진 거름망이 들어 올린 검은 이끼들. 매립지 파이프 속으로 들어온 잔재와 찌꺼기. 악취. 그 악취였다.
지훈의 손을 놓았던 그 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소중한 그는 반드시 고결하고 향기 있는 사랑을 맞이해야 했다. 애초에 버렸어야 할 욕심을 거두고 당연한 한 발을 물렀을 뿐이다. 코를 찌르는 과욕과 고통은 철저히 내 몫이었다. 또다시 자의적 고립.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밴쿠버 엘리자베스 정원을 수놓은 프리지아는 매년 겨울에 핀다. 절정기 2월이 되면 러시아제 트래퍼 햇을 쓴 관광객들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혹한기는 유독 해가 짧았고 이른 저녁에도 별이 보였다. 아파트 테라스에서 고요한 정원을 응시한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7년, 애석하게도 단 한 걸음조차 나아가지 못했다.
그때 그 마음 그대로.
당신이 없는 이곳에서.
내 안에 숨 쉬는 단 하나의 프리지아를 생각한다.
값싼 동정과 연민을 들먹이며 상처냈던 그날까지도.
떨리는 손끝.
울먹이는 두 눈.
버린 반지.
당신의 프리지아.
‘사랑해.’
……
‘내일 또 만나.’
사랑이 지겨웠다.
미치도록 싫었다.
* * *
여름은 습도가 없었다. 밴쿠버는 그랬다. 한낮 35도를 웃돌아도 그늘에서 땀이 말랐다. 더위에 지친 여행객들은 스타벅스 로고 박힌 컵을 들고 나무 아래서 부채질을 했다. 다운타운 한가운데 울창하게 솟은 수목은 천 년 전 네이티브 인디언이 심은 거라고 했다. 웬만한 건물을 가리는 높이는 정확히 Green-age 잡지사 빌딩 옆에서 한기를 뿜었다.
회사 망하면 다 저것들 때문이야. 굿판 벌여야 돼. 중국계 캐네디언 부편집장이 한국어로 연이어 말했다. 오늘따라 작두에 올려보낼 놈들 많아 보이네? 하루로는 안 되겠지? ‘커피프린스 1호점’이 인생 드라마인 명예 한국인이 창밖을 가리킨다. 천 년 묵은 나무 아래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본투비 블론드 무리가 빈 컵을 날려 차는 중이었다. 호랑말코 없는 시민의식이 버린 플라스틱 용기로 하계 올림픽이 열린 것이라.
작두는 또 어떻게 아셨어요. 오프 때 한국 드라마 좀 그만 보시라니까. 직장 내 유일한 코리안인 내가 답한다. 주변의 푸른 눈동자들이 힐끔 위로 향하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코끝에 걸린 안경이 매력적인 부편집장이 물었다. 돼지 목 어디서 구하지? 그는 굿판에 꽤 진심인 편이었다.
무선 이어폰이 장악한 21세기에 부편집장의 빳빳한 정장 주머니에서 블랙베리가 튀어나왔다. 확고한 마이너 취향이었다. 사무실 밖에서 통화를 마친 그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까운 차이나타운 정육점에서 운 좋게 돼지 목이라도 구한 듯싶었으나 이번엔 은밀한 손가락이 나를 불렀다.
「일은 할 만해? 직원들이 칭찬 많이 하더라.」
「누가 꽂아 주신 건데요. 잘해야죠.」
「내가 보는 안목이 있지?」
빌딩 20층 외관에서 트인 바람이 불었다. 부편집장은 담배를 귓등에 걸었다. 그러니까 꼭 돛대 있는 아저씨 같네요. 매사 긍정적인 나의 멘토는 자신을 가리키며 하얀 붓을 단 화가라고 사람 좋게 웃었다. 북미의 따가운 자연광에도 이맛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 그가 물었다.
「한국에서 여기까지는 왜 온 거야? 정말 캐나다 스타벅스 취직하고 싶어서?」
부편집장과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다. 공립대학 졸업 후 취업난에 허덕이던 시절이었다. 파트 타임이라도 뛸 요량으로 4성급 호텔 소속 스타벅스에 이력서를 낸 다음날이었다. 호텔 관광객들이 조식을 먹는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인도계 매니저는 내 이력서를 토대로 어떻게 살아온 인간인가를 캐물었다. 전날 잡지사 두 곳에서 고배를 마신 터라 말투나 의지에 강단이 없었다.
학교에서 기자 활동 했구요. 칼럼으로 상도 받았어요. 학사모 날릴 때 같이 날린 것 같긴 하지만. F&B 경험 없어도 배우면 잘해요. 제가 그 유명한 한국인이고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만 닳아있는 빨리빨리 문화에서 왔거든요. 손이 두 개에서 네 개로 변하는 마법. 성수기 라인업 걱정 안 해도 될걸요?
반 나간 정신으로 나불댔던 것 같다. 바 테이블에서 지루한 아이스 라떼나 마시던 남자가 거하게 사레들린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면접이 끝나자 매니저는 연락을 주겠다는 형식적인 말만 되풀이하고 자리를 떠났다. 파트 타임도 주워 먹지 못하는 능력 제로 반 사회적 인간이라 자책하고 있을 때였다. 다 마신 음료 컵을 테이블에 둔 남자가 내 앞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바 테이블에서 커피를 뱉던 남자였다.
나도 좋아해. 한국인 빨리빨리. 글도 빨리빨리 쓰면 더 좋아해. 안경인지 코경인지 모를 은색 테두리가 빛났다. 이내 연갈색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돌아섰다. 캐나다 잡지 업계 Top3, Green-age 부편집장 디에잇이었다.
기존 직원들은 학력만 높은 동양인을 캐나다판 낙하산이라 쏘아 댔다. 시간이 바뀐 업무 회의에는 번번이 내가 없었다. 뒤늦게 회의실 문을 열어도 어지러운 테이블과 빈 스크린만 나를 반겼다. 점심은 혼자였고 뒤통수가 늘 아렸다.
며칠 후 사내 인트라넷 게시판에 칼럼 하나가 떠돌았다. 이민자 나라의 아이러니함을 담은 인종, 언어차별의 괴로움이 적나라하게 묻은 내 글이었다. 부편집장의 솜씨였다. 외로운 사투 끝에 내 교정을 보는 푸른 눈들이 생겼다. 반절은 그의 덕이었다.
「한국 지사 파견 생각 중이야.」
강렬한 볕이 내리쬔다. 부편집장님의 파견이냐고 물었다. 그는 나라고 했다. 상황 파악되지 않은 고개를 얼결에 위아래로 끄덕였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어째 시큰둥하네? 그가 담배를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라이프 스타일 팀. 자격 요건은 한국어로 심층 인터뷰 가능한 멀티 태스킹 경력자. 케이팝 좋아한다고 강남스타일 말춤 추는 애들 보내는 건 동방예의지국에 대한 매너가 아니잖아?」
……
「기간은 6개월. 그 후에 고국에 남든, 내 옆으로 돌아오든 선택하는 건 오로지 당신 몫이고.」
정 가기 싫으면 허니콤보 먹고 싶다는 데이비드 보낼게. 그쪽 팀장 엄청 지랄맞다던데 내가 꾹 참고 감수해야지. 페이스 캠으로 한국 욕 먹을 생각하니까 내일부터 휴가 가고 싶다.
건물 아래 혼잡한 교통과 클락션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머리 위로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동그란 선글라스를 걸쳐 쓴 부편집장이 금빛 테두리 박힌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딱 한 장.」
……
「기회도 딱 한 번.」
고층 펜스 밖으로 흔들리는 레터 용지를 잡는다. 무슨 용기였을까. 아주 작은 순간에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파견 신청서를 응시하는 내게 부편집장이 말했다.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걸 오래 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그곳이 어디든 소중한 걸 두고 오면 내내 마음에 걸리더라고.」
……
「그 사진들 말야.」
삭막한 사무실 한켠을 차지한 오래 된 사진들. 애틋한 고등학교 졸업식. 순수했던 A대 벚꽃 길. 빛이 어린 63빌딩 전망대. 찬란했던 여름 분수대와 광화문 거리. 잃은 돈만큼 승부욕이 넘쳤던 인형 뽑기 가게. 밤 하늘의 그 불꽃놀이까지.
각각 다른 배경을 뒤로 한 채 맞잡은 손.
내내 마음에 걸리는 소중한 당신과.
― “해피엔딩인 거지?”
쓰레기봉투를 들고 건물을 나섰다. 천년 묵은 인디언 나무를 돌며 일회용 컵과 플라스틱 빨대를 주웠다. 먹다 버린 빵과 과자 부스러기를 쫓는 비둘기 떼도 물리쳤다. 어떤 인디언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운타운 중앙에 뿌리를 심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맨손으로 남이 버린 쓰레기를 줍는 이유는 명확했다.
굿판은 제대로 못해도 기분만큼은 산뜻하게 해드립니다. 한 달 뒤에 한국 가거든요? 제 뒤에 캐나다 달걀귀신 붙게 하지 마시고, 미국 출장 가서 연락 없는 울 엄마 건강 챙겨 주시고, 예쁜 트래쉬 블랙베리 망하지 않게 해주시고.
「Hey pretty, you wanna hang out tonight?」
― “개새야, 쓰레기통 저쪽이라고.”
「What the heck?」
― “작두 라이딩 콜? 피그 넥 쌈빡하게 오케이?”
Oh My Rainbow
; The Finale
01. 부재의 농도
리무진 버스가 공항로 빗길을 달렸다. 낯선 장마에 와이퍼도 소용없는 긴 폭우였다. 실내에 설치된 미니 TV에서 전국 집중 호우 주의보가 내렸다. 창밖 빗방울이 요동쳤고 안개 속으로 아파트촌과 재개발 공사장이 마구 뒤섞였다. 부옇게 탄 가로등마저 점멸한 바깥세상은 인정 없는 회색의 도시. 고속도로를 벗어난 버스가 출근길에 시달리는 수십만 대의 차량을 빠르게 지나친다. 눈앞에 서울이 있었다.
대한민국은 나 없이도 잘만 돌아갔다. 인당 GDP는 몰라도 서울 한복판 돈 먹은 쌔삥들은 알아봤다. 대우증권 증축 빌딩과 신식 건물들. 교차로 리저브 스타벅스 빨간 지붕 두 개. 아니다. 드라이브 뜨루까지 셋. 현대가 신세계 자리 먹고 에르메스와 구찌가 판을 치는 곳. 누가 갈비뼈 팔아서 디지게 돈 벌었나 보다.
택시로 갈아탄 흥분을 이기지 못했다. 잠자리 선글라스 기사가 허옇게 김 서린 창문을 곁눈질했다. 팔뚝으로 눈치껏 벅벅 닦았다. 깨끗하죠. 맑고. 자신 있고. 하여 미터기는 곱절로 뛰었다.
카나다에서 왔다드만. 쯧쯧. 뒷좌석에 눕다시피 앉아 의심의 시선을 피했다. 말마따나 마리화나 합법 국 카나다에서 왔지만 도가 지나친 흥분에 결코 하지 않았음을 증명할 길은 없었다.
택시는 오피스텔 골목에서 멈췄다. 성질 급한 기사는 한 차례의 후진만으로 순식간에 멀어졌다. 한 블록 건너 우비를 입은 중개인이 물 찬 슬리퍼를 신고 뛰어왔다. 무단횡단. 허공에 던져지는 키. 발밑으로 떨어진 열쇠를 줍기도 전에 그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격정적인 환대에 넋 나간 몸뚱이가 차가운 원룸 바닥에 엎어진다. 캐리어 밑으로 할 말 많은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늘은 여전히 장마를 핑계로 화를 냈지만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오랜 유배를 보상해주듯 베란다 밖으로 흐릿한 남산타워가 보였으니 뭐든 이만하면 됐지 싶었다.
가장 먼저 바닥을 쓸고 선반을 털었다. 걸레질까지 되었다 싶으면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정리했다. 라면 받침대로 쓰일 세계 7대 미스테리 전집과 각종 잡동사니를 서랍에 쑤셔 넣는다. 두꺼운 니트 안에 말린 원목 액자는 닦고 또 닦아서 테이블 위에. 카메라를 독식한 만세 승관과 눈을 감고 웃는 나.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훈까지.
앳된 교복.
그 어느 날의 우리.
‘사랑해.’
……
‘내일 또 만나.’
알람은 밤 11시에 울렸다. 개켜둔 검은 정장을 입었다. 단추는 품이 작아 그냥 뒀다. 장시간 비행에 퉁퉁 부은 발을 단화에 구겨 넣는다. 새끼발가락이 당겼다. 캐리어까지 무릎으로 기어 대일밴드를 챙겼다. 다리를 좀 더 뻗어 여분으로 가져온 마른 우산도 챙겼다. 현관문을 두 번 확인하자 콜택시가 왔다.
― “세브란스 장례식장이요.”
* * *
네 아빠 장례식.
한국 가면 들러.
엄마는 월마트서 산 $5.99짜리 칫솔 패키지를 실수로 빠트린 고객처럼 말했다. 그러게 술이나 줄였으면 좀 좋아. 재혼이라도 하던지. 스탠딩 거울 앞에서 진주 귀걸이를 차면서. 자신 때문에 결혼이 불행했던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동정, 연민, 값싼 후회일랑 모르는 목소리로.
운명은 어떻게 할 수 없잖아. 엄중한 신의 일이겠지. 한국 잘 다녀와. 엄마 잊지 말고. 카랑카랑한 음성이 높은 목조 천장에 메아리쳤다. 얇은 하이힐이 카펫 밖으로 사라졌다. 소음에 예민한 그녀가 남긴 낮은 라디오 볼륨을 최대치로 키웠다. 시리얼 밖으로 튄 우유 방울이 카펫을 적셨다. 식사는 거칠었고 난장 자체였다. 무교면서 엄중한 신이란다. 미사포 두르고 나 몰래 성당이라도 가는 모양이었다.
자정이 되어도 조문객 줄은 끊이지 않았다. 반평생 블루칼라 노동자로 살면 마지막 길만은 외롭지 않나 보다. 다행이었다. 웃고 있는 사진 속 아빠가. 다닥다닥 붙은 앉은뱅이 상에서 육개장을 퍼먹으며 사람들은 아빠 얘기를 했다.
고아에 부모 형제 없이 아등바등 살았잖수. 임자 만나 결혼해서 예쁜 자식 낳고 잘살 줄 알았더만. 뭐 그리 급해 빨리 갔나. 일만 고되게 했어. 죽기 직전에도 그리 일만 하면서. 그러면서.
어렴풋한 목소리를 떠올리다가. 멀어지는 등을 보다가. 그리운 꿈을 꾸다가. 뿌연 눈으로 잠이 깨다가. 아려오는 눈가를 난장 된 식사처럼 아무렇게나 닦아낸다. 거칠어지는 눈물. 커지는 사람들의 울음소리.
아빠, 왜 그렇게 웃고 있어. 뭐가 즐거워서. 뭐가 행복해서. 난 징그럽게 커버렸는데 당신은 왜 주름살 하나가 없어.
상주는 절친했던 부 씨 아저씨가 봤다. 침통한 얼굴로 날 보며 엉엉 울었다. 어떡하냐. 네 아빠 어떡해. 어깨를 붙잡고 서럽게 운다. 동료들이 그를 부축했다. 벽에 쓰러지듯 기댔다.
순간 뒤쪽에서 숟가락과 국그릇이 바닥에 튕겼다. 남은 건더기도 제멋대로 튀었다. 엉겁결에 음식물을 뒤집어쓴 조문객들이 짧게 탄식했다. 빨간 국물을 닦는 그들을 지나쳐 빠르게 다가오는 발걸음. 가까워질수록 보폭을 크게. 눈이 마주치면 더 크게.
― “나쁜 년.”
그대로 포옹하는 둥근 어깨. 뒤로 밀려난 몸을 당겨 강하게 끌어안는다. 습도 때문에 포슬포슬한 뒤통수가 가엽게 흔들렸다. 온몸 구석구석 흐느끼지 않는 곳이 없었다.
아마존 와이파이가 너보단 빠르겠다.
내가 은수한테 얼마나 기도했는 줄 아냐.
너 살려 달라고.
죽을 거면 뭣도 없는 땅덩이 말고 내 옆에서 죽으라고.
찾기만 하면 사지 꽁꽁 묶어놓고 콧구멍도 못 파게 할 거니까 한 번만 보내만 달라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제발 한 번만 보여달라고 죽어라 빌었는데.
왜, 왜 이제 와…….
승관의 말투는 거칠고 따뜻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녀석에게 마음이 울컥 뒤집힌다. 너 바보네. 아마존에 와이파이 같은 거 없거든. 뉴스 좀 보고 살아. 울먹이는 등을 한 손으로 가볍게 친다. 승관은 그럴수록 더 서럽게 울었다.
아빠를 그리워하다가.
녀석 때문에 웃다가.
아빠가 보고 싶다가.
녀석의 품에 안심하다가.
영정 속에서 웃는 남자가 작별의 손을 흔든다.
승관은 당연한 듯 그 자리를 메웠다.
잘 왔어.
정말 잘 왔어.
* * *
FM 89.9 부승관의 카스테라.
작명 죽이지.
다음 주가 3주년.
7년 만에 본 승관은 훤칠했고 턱도 날렵했다. 학교 다닐 땐 순 젖살이었지. 이게 진짜 나야. 딱 봐도 알지 않냐.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까는 인기 라디오 디제이. 민망해서 바로 웃어버리는 반달 눈. 한 마디로 나 없이도 잘 큰 부승관.
라디오 디제이 공고 기억나냐. 엉, 네가 보내준 메일. 결과 뻔해도 면접이나 보고 울자 했는데 어쩌다가 합격해서 여기까지 와버렸다. 내일 당장 사람 앞길 모른다는 말이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솔직히 안 될 줄 알았거든. 원래 꿈은 꿈으로만 남는 거잖아.
장례식장 비상구 계단에 앉아 띄엄띄엄 말을 잇는 녀석이 말한다.
― “고맙다.”
……
― “내 꿈 기억해 줘서.”
괜히 시선을 뒤로 뻗다가 다시 발밑으로. 엉뚱한 코를 훌쩍거리면서. 부승관 너 비염 있니. 어색한 건 지금 네가 다 해요. 승관이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편도냐 왕복이냐. 편도면 목숨은 살릴 거고 왕복이면 진짜 꽁꽁 묶어 놓게. 이번엔 내가 코끝을 만진다.
6개월은 있어야 하니까 시간 되면 술이나 사. 이내 처음의 녀석처럼 턱을 치켜든다. 눈은 차마 내리깔지 못하고 민망한 고개만 숙였다. 사실은 웃음을 참지 못해서. 갈 길이 멀었다는 녀석의 기분 좋은 타박을 듣는다.
― “사람 구실은 하고 사는 거냐.”
― “공과금 열심히 내고 살았어.”
― “이제 병원은 안 가도 돼?”
― “치료 상담 끝났고 약도 줄이는 중.”
― “가서 뭐 했냐.”
― “열심히 공부하고 일했지.”
― “밥값 했네.”
― “삼시 여섯 끼라 많이 벌어야 돼.”
― “농담이 퍽도 나오겠다.”
― “표정 좀 풀라고.”
의사 쌤이 그만 오래. 나한테 ‘댓츠 오케이’ 하는데 진짜냐고 열 번은 물어봤다니까. 응, 진짜로. 오버를 보태 승관의 눈치를 살살 달랜다. 녀석은 어쩐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아예 거기에 눌러살지 왜 왔냐. 버터나 평생 잡수시지. 내 7년의 부재를 녀석은 나름의 방식대로 묻고 있었다.
―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 “…….”
― “너무 늦어버렸지만.”
길고 긴 터널을 지나 언젠가 돌아오겠다고. 그땐 직접 봄과 여름엔 따뜻한 차를, 겨울엔 목도리를 지훈에게 선물하겠다고. 승관은 길게 뻗은 다리를 접어 무릎을 감쌌다.
앞에 ‘너무’는 빼. 시간은 상대적이잖냐. 난 그렇게까지 늦었다고 생각하진 않아. 존재하지 않는 아마존 와이파이로 열을 낼만큼 무작정 오래 기다렸다던 마음속에는 이미 희끗한 백발의 노인이 들어앉아 있었다. 생불로 무장한 녀석이 지훈과 사이좋은 티를 냈다.
이지훈 걔는 사계절 내내 감기 걸리는 꼴을 못 봤어. 겨울에 맨발에다 슬리퍼나 신고 다니던 새끼가 털 운동화도 신고 다닌다니까. 나이 드니까 골병들까 무서웠나 보지? 참내, 영양제는 또 오죽 먹냐? 엔간히 좀 챙겨 드셔야지 누가 보면 홉킨스 종합 병원이여. 정한이 형한테 약물 남용 피디에프 딴다고 그러니까 그거 다 형이 준 거래. 뭐든 정한이 형이 문제야. 사촌끼리 한패지 뭐.
의사의 체면을 앞세워 자신의 딸꾹질은 멈춰주지 않았다는 승관의 헛소리에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한의 근황까지 얹은 녀석은 기세를 몰아 최근까지 나아갔다.
너 이지훈 알지. 할 거면 아싸리 각 잡고 제대로 조지는 거. 특혜 없이 블라인드 면접으로만 아버지 회사 들어간 거 믿겨 지냐? K건설 면접만 5차야. 그걸 뚫고서도 혈연 버프 받았다고 걸고넘어질까 봐 가족 사항에 연고 없다고 적었단다. 미친 새끼. 나중에 걔 자소서 좀 봐라. K건설은 다음 생 스펙까지 들이밀어도 모자란다는데 올해 신입 이지훈이란다. 머리 좋고 지독한 새끼 어디 가겠냐.
한풀 꺾인 숨이 흩어졌다. 안도의 호흡. 이어지는 수긍. 지훈의 손을 먼저 놓아버린 순간을 후회로만 남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평생 시달릴 죄책감이 반이나 줄어든 것만 같았기에.
하나도 안 변했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계속 옆에 있었다고 생각해 봐. 끝을 정해 놓고 사랑하는 사람은 끔찍하지. 미래가 없는 사람은 방해만 됐겠지. 떠나길 잘했던 거야. 앞으로도 이렇게 생각할 거고.
자조적인 웃음이 아프게 떠다녔다. 내 자학은 밟힌 깡통처럼 처절한 소리를 냈다. 승관도 비슷하게 일그러졌다.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 “이지훈은 네가 전부였잖아.”
― “…….”
― “기분 엿 같게 이제 와서 왜 모른 척하냐.”
네가 그리 말하면 안 된다고. 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다그침이었다. 녀석은 답답한 듯 넥타이를 풀었다. 깊은 한숨이 뒤이었다. 그것은 신호탄처럼 불구덩이를 들쑤셨다.
― “아버지랑 은수처럼 지훈이도 똑같이 떠날까 봐, 네가 겨우 지킨 사랑인데 결국엔 걔도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웠던 거 알아. 누구는 계속 위로 올라가는데 꿈도 목표도 없이 쳐다봐야만 했던 비참함도 알아. 그게 네가 사랑하는 이지훈이라서, 네가 걸림돌이 될까 고민했던 무지한 시간도 난 다 알아.”
……
― “그래, 난 다 이해해.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미래의 너를 위해서, 걔를 위해서 떠날 수밖에 없었겠지. 근데 이 생각을 수백 번 뒤지게 생각해도 결과는 하나야.”
……
― “같은 상황이었으면 걘 절대 너 두고 혼자 안 떠났어. 그 새끼는 너 알아. 자기 없으면 과학실에 너 또 혼자 갇혀서 반성문 쓰고 있을 거라고. 남들처럼 약아빠지지 못해서 시키는 거 다 하다가 열병 걸려도 꾹꾹 참으면서 울고 있을 거라고. 너 업고 뛰어줄 사람 자기밖에 없다고 이기적인 새끼가 맨날 네 생각만 했어.”
……
― “떠나길 잘했어? 하나도 안 변했다고? 가장 가까이 있었으면서 이미 알고 있었잖아. 걔한테도 너 없으면 매일, 매 순간이 죽으라고 등에 칼 꽂는 거랑 같았어. 방이 몇 개인지 세보지도 못한 궁궐 같은 집보다 도서관에서 네가 춥다고 덮어준 옷이, 그 냄새가 너무 좋았다고 술 처먹고 미친놈처럼 울어. 정한이 형 결혼식에서 너 꼭 지키겠다고 다짐했는데 정작 지킬 네가 없어서 매일을, 매 순간을 울었다고.”
……
― “그렇게 몇 년을 별 지랄 다 하더니 애가 갑자기 변하더라. 네가 아는 이지훈, 이제 없어. 잘 웃지도 않고 사람 같은 거 믿지도 않아. 정한이 형이 그러더라.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거라서 사랑하는 사람이 준 상처가 너무 깊으면 죽을 때까지 평생 남는다고.”
승관은 머리를 헝클었다.
― “이번엔 내가 부탁 좀 하자.”
……
― “율무차든 털 장화든 네가 먹이고 네가 신겨.”
……
― “그 새끼 좀 살려주라.”
홀로 남은 비상구. 꺼진 센서 등과 숨 쉴 때마다 스미는 축축한 향내. 쉬이 그치지 않는 소나기와 차가운 바람. 무릎을 모아 그 위로 얼굴을 묻는다.
― ‘떠나길 잘했어? 하나도 안 변했다고? 가장 가까이 있었으면서 이미 알고 있었잖아. 걔한테도 너 없으면 매일, 매순간이 죽으라고 등에 칼 꼽는 거랑 같았어.’
……
― ‘정한이 형 결혼식에서 너 꼭 지키겠다고 다짐했는데 정작 지킬 네가 없어서 매일을, 매 순간을 울었다고.’
죽은 별이 떠 있는 검은 바다를 삼키고 까만 시체가 되어가는 밤. 날 사랑한다는 당신의 목소리가 영원히 반복되던 세계에서는 끝내 비극을 감춘 당신의 껍데기만 남아있었음을.
― ‘네가 아는 이지훈, 이제 없어. 잘 웃지도 않고 사람 같은 거 믿지도 않아.’
……
― ‘사랑하는 사람이 준 상처가 너무 깊으면 죽을 때까지 평생 남는다고.’
깊은 부재의 농도가 쌓인다.
내가 모르는 이지훈, 그 7년의 공백이 터질 듯이 몰려온다.
― ‘이번엔 내가 부탁 좀 하자.’
……
― ‘그 새끼 좀 살려주라.’
내 안에 숨 쉬는 단 하나의 프리지아를 생각한다.
값싼 동정과 연민을 들먹이며 상처냈던 그날까지도.
떨리는 손끝.
울먹이는 두 눈.
버린 반지.
당신의 프리지아.
‘사랑해.’
……
‘내일 또 만나.’
사랑이 지겨웠다.
미치도록, 그가 그리웠다.
+ 읽지 않은 메시지 1통 4:40 am
이지훈 번호 안 바꿨어
마음 정리되면 연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