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D YOU #01 ------------------------------------------
첫눈이 제법 펑펑 내렸는데 그 이후로는 생각보다 눈은 별로 안 오고 춥기만한 겨울이 시작되었다. 첫눈이 온게 11월 중순이었던가? 온통 새하얘진 세상을 보며 신나서 사진도 찍고 마당에 눈사람도 만들고 트리도 만들면서 흰눈 가득한 예쁜 겨울이 되길 기도했는데, 그 이후로는 눈다운 눈이 온 적이 없었다. 12월에 들어선지 한참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올 여름 불지옥을 힘겹게 지나온 덕에 겨울도 춥고 눈이 많이 올거라는 아빠의 걱정과는 달리, 그냥 이번 겨울은- 기대했던 것보다 이쁘지도 않고, 겁먹었던 만큼 춥지도 않고 그냥 마냥 칙칙하게 지나갈 모양이었다. 마치 나의 지난 크리스마스들처럼. 그럴 순 없지. 이번에도 크리스마스를 솔로로 지낼 순 없어. 나는 한달 전 나를 뻥 차버린 전남친 새퀴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인간이 양심이 있어야지. 아니, 최소 크리스마스는 지나고 차야하는거 아니냐고.
나는 마음을 다 잡고 휴대폰을 꺼내 한 번 더 톡을 확인했다. 정문 앞 먹자 골목 윗쪽 주택가에 위치한 커피가게. 스웨이 그린티. 오후 3시. 창가에 흰색 라운드 티.
자주 가던 가게인데도 새삼 간판이 낯설어 보였다. 스웨이 그린티. 이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침에 확인한 오늘의 운세에서도 초록색과 흰색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했었는데- 가게 이름을 듣는 순간 확신했다. 거기다가 흰색 라운드 티라니. 이건 진짜 운명이 확실하다. 이번 크리스마스야말로, 반드시. 기필코!
"창가 쪽 흰색 라운드 티... "
맑은 종소리를 내는 초록색 가게 문을 열고 중얼거리며 들어서자마자 창가 쪽을 확인하는데 바로 흰색 라운드티가 보였다. 아, 저 사람인가. 그런데 뭔가 익숙하다. 흰색 라운티의 어깨모양도 그렇고- 동그랗고 검은 뒤통수와, 양쪽 귀 끝에서 달랑거리는 귀걸이. 아 뭐지. 진짜 익숙한데. 혹시 진짜 설마 리얼리 정말정말 나의 운명의 남자인가? 그래 원래 운명이 될 사람은 첫 눈에 알아본다고 했어. 등 뒤로 천천히 닫히는 가게문에서 다시 종소리가 났다. 이렇게 귓가에 종소리가 울리듯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거지. 내가 들어서는 소리를 들었는지 검은 뒤통수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귀 끝에 작은 링귀걸이가 달랑거렸다. 귀걸이 하는 남자 흔치 않은데. 날라리는 아니겠지. 얼마 전 취업한 직장인이라고 했는데. 나는 수줍게 한쪽 귀 뒤로 머리카랔을 넘기면서 고개를 까딱..........
"어? 누나 여기 뭔일이야?"
..........하려다가 익숙한 목소리에 얼음이 되었다.
"...........뭐야 너야말로."
올해가 삼재라더니, 그냥 삼재가 아니라 오늘의 운세도 빗겨가게하는 초강력 울트라 삼재인가보다.
"누군가 내게 저주를 내리는게 분명해"
"무슨 저주?"
"평생 크리스마스를 솔로로 지내게 하는 저주."
"누나는 그 미신 믿는거부터 고쳐라"
"야, 이게 근거가 있는 믿음이라니까."
나는 들고 있던 바닐라라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나 초등학교 때 내 첫사랑이었던 짝궁이 겨울방학 시작하면서 나 뻥 찼거든. 이유가 뭔지 알아? 여름방학때 숙제 대신 안해줬다고. 아니 그걸 학기 내내 맘 속에 담아뒀다가 겨울방학 다 되고 터트리는 건 또 뭐니? 그래도, 그때는 꼬꼬마 때라그런가, 그 정도는 뭐 상처로 남지도않았어. "
"같은 중학교와서 너무 좋다고 나한테 고백하던 그 쉐끼는 첫 눈 오던 날에 나를 뻥 찼는데 이유가 뭔지 알아? 내가 자기보다 키가 너무 빨리커서 자존심 상한대."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점점 화가 났다. 그래, 초딩때 한 번. 그리고 중딩때 한 번은 그렇다치자. 내 파란만장한 크리스마스의 저주는 대학생이 된 이후로 점점 더 잔인하게 제 존재를 드러냈다.
"나 대학교 면접 같이 보면서 첫눈에 반했다고 운명이라면서 고백하던 그 쉐끼는 어떻고. 크리스마스 이틀 남겨두고 양다리 걸치다가 따악 걸렸지. 야, 와 진짜 양아취 쉐끼가 ...... 야 뭔놈의 운명이 2주를 못가냐고. 그게 운명이니? 그게 운명이야?! 아... 또 생각하니 혈압 올라."
어쩜 이런 남자들만 내 인생에 꼬이는 걸까. 아무리 내가 금사빠여도 그렇지. 점점 흥분하며 한쪽 손끝으로 이마를 짚자, 꾹이는 자신이 마시고 있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냉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한숨에 들이켰다.
"같은 동아리에서 썸타던 선배 오빠는 어땠는지 알아?"
"크리스마스 공연 얼마 앞두고 누나랑 젤 친한 친구 좋아한다고 고백했지. 그동안 그 애 때문에 친하게 지낸거라고."
"맞아, 그리고 신입생환영회 때부터 나 죽어라 꼬시던 그 복학생 오빠 쉐끼는 또 어떻고."
"그 쉐끼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알바한다고 거짓말하고 이미 취업한 전여친하고 고급호텔 예약해서 .......... 음. 거기까지. "
꾹이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로 내 하소연을 열심히 들어주면서, 마치 판소리에 덩기덕쿵더러러 추임새 넣듯이 맞장구 쳐주었다.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잘아냐?"
"하도 많이 들어서 다 외웠어. 그리고 그 쉐끼 잡으러 갈 때도 내가 같이 가줬잖아."
"맞아. 와 진짜 내가 그거 잡았을 때 뒤로 넘어가는 줄."
"그치. 그 때 내가 뒤에서 잡아주지 않았으면 누나 뇌진탕 걸렸을 수도 있지..."
".... 그리고 이번에 그 쉐끼는..."
"그 쉐뀌는?"
".....이유를 모르겠어. 내가 얼마나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그렇게 눈치보면 그게 연앤가. 사람 사귈려면 제대로 사귀든가. 맨날 어영부영하다가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금방 끝나면서."
"야ㅡ 일단은 크리스마스를 잘 지나가는게 중요하다고. 내 징크스를 깨부셔준다면 진짜로 내 운명의 남자인거지 확신할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잘됐다. 나는 그 인간 맘에 안들었다 전부터. "
"맘에 안들 건 또 뭐야. 오빠가 얼마나 ..."
....얼마나 별루였던가. 기대안하고 나갔던 소개팅자리가 훤해질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혹했지. 연영과라더니 역시. 눈 꾹감고 사귀어볼까 했는데. 밝히기는 얼마나 밝히던지. 오빠 이럴려고 나 만나?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 나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푹 쉬었다. 꾹이 말대로 이건 제대로 된 연애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하면 손 한번 잡아볼까, 어떻게 하면 입 한번 맞춰볼까, 어딘가 징그러운 모습에 쉬이 맘이 안내켜 맘 한켠이 불편했었다.
"쉐끼가 갑자기 오빠가 되는 건 또 뭐래"
"입에 붙어서 그렇다 뭐."
"한 살 차이가지고 오빠는 무슨..."
"너 처럼 예의 없는 녀석이나 누나한테 너너 하지. 남들은 안그래."
"시끄럽다."
내가 다 마셔버린 커피가 아쉬운 듯 꾹이가 얼음만 남은 잔을 빨대로 휘휘 젓더니 얼음 몇개를 건져 입에 물었다.
"됐어, 지나간 사람 이야기하면 뭘 하냐. 자꾸 생각하면 스트레스만 는다고. 그런 건 금방 털어내야 좋다."
통통하게 부풀어오른 볼을 한 채로 웅얼웅얼 거리며 나름 열심히 충고해주는 모습이 귀여웠다.
"좋겠다, 너는 그렇게 금방 훌훌 털어낼 줄도 알고. 우리 애기도 잘 하는걸 왜 나는 못할까"
"에이 씨 손 치워..."
"왜 귀여워서 이뻐해주는 건데"
내가 한 손으로 볼을 잡아 늘리자 꾹이가 인상을 찌뿌렸다.
"야 아무리 그래도 크리스마스 한 달도 안남았는데 사람을 뻥 차는게 말이 되니?"
"그런 인간은 하늘이 알아서 빗겨가게 해준거다 고마워해야지."
"왜- 그래도 좋은 구석도 있었지. 연영과라고 맨날 와서 도와주고 가르쳐주고..."
"그게 문제다. 연영과가 왜 관련없는 학과 동아리와서 까부는데"
"왜 관련이 없어- 우리 동아리가 연극동아리인데."
"그게 다 얼굴 반반한 거 믿고 이쁜 여자들 우루루 있는데 찾아간 거다. 끼부릴라고."
"야 연기를 얼굴로 하니? 우리 동아리가 좀 미모들이 출중하긴 하지만..."
"그렇지. 누나 한명 빼고."
"이 새뀍....."
내가 다 마셔버린 빈잔이 미안해서 뭐라도 한 잔 더 사주려고 했더만 먹을 복을 제가 차는구만. 꾹이가 자리를 정리하면서 벗어두어던 겉옷을 다시 입었다.
"왜, 한 잔 더 사줄께. 내가 다 마셨는데 "
"됐어. 세탁기 돌리고 온 거 깜빡했다. 가서 빨래 널어야한다."
"뭐 다시 돌리면 되지."
"누나 너는 진짜... 우리집 하숙생들이 불쌍하다 불쌍해."
"너는 아닌 것 처럼 말한다?"
"내가 어딜 봐서 하숙생이야, 가정부지. "
나는 민망해져서 녀석을 따라 주섬주섬 일어섰다.
"야 근데 너는 소개팅 나오면서 옷이 그게 뭐냐? 저번에 우리 아빠가 사주신 거 그 코트 입고 나오지."
"됐다. 대타로 나온거라서 금방 일어서려고 했다"
"왜 여친도 없는게"
"됐다"
"아 맞다 너 과에 썸타는 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개랑 잘 안됐나? 그래서 나왔니 너도?"
"아 난 그냥 대타라니까..."
"이 자식이 왜 말을 안해. 누나한테 다 털어놓으라니까..."
"됐다고요-"
집으로 가는 골목 입구에 들어서자 오랫동안 비어있던 가게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뭔가 하고 보니 가게 안에 이것저것 늘어진 가운데 꽈배기가 잔뜩 쌓여있는게 보였다. 정리가 안된듯 어수선한 모양이 임시로 파는거 같기도하고. 정식으로 차린 건 아닌거 같기도하고. 사람은 안보이고.
"어 몇달 비어있더니 분식가게 들어올 건가봐, 잘됐다!"
"이런 골목에 분식집이 될라나. 슈퍼나 들어오지. 장보기 편하게."
"주인 없나? 야 우리 기다렸다가 저거 사먹고 가자!"
"시간 없어. 집에 가서 밥 먹자 그냥."
"아직 저녁시간 멀었는데 뭔 밥이야."
"나 얼른 나가봐야한다. 알바 면접 있어서..."
"알바? 무슨 알바? 서점에서 하는 알바로는 부족해?"
"응. 돈이 좀 필요해서."
"무슨 돈? 뭐 필요한 거 있어?"
"돈이야 항상 필요하지... 빨리 가자."
후다닥 종종 걸음으로 나를 뒤로 두고 골목을 앞서 가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뭐지? 알바한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누나, 나 누나네 학교 가고싶다.
-안돼. 우리 학교는 운동부 없어.
-그래두 누나랑 같은 중학교 가고 싶은데ㅠㅠ
-너 태권도는 어쩌고. 우리학교는 예술학교라서 안돼. 너 운동 그만둘거야?!
-운동 그만두면 누나네 학교 갈 수 있나?!
-큰일 날 소리하네. 애가.
윤가진 껌딱지였던 전정국. 내 교복이 이쁘다고 같은 중학교 가고 싶다고 떼쓰던 녀석이. 이젠 다 컸다고 숨기는 것도 생기네. 서운하게스리...
"아, 누나 저번에 서점 들렀더니 없던데? "
"다른 파트로 옮겼어."
"왜- 제일 편한데로 소개해준 거구만. 어디로 옮겼는데?"
"카페테리아 쪽으루. 그래서 커피 내리는 거 배워야 해 ㅜㅠ"
"거기 힘든데. 왜 나한테 말 안했어?"
"너는"
"응?"
"너도 지금 알바 또 구하는거 말안했잖아. 다 컷다고 비밀 만드는 건 너면서.. 나는 좀 말안하면 안되냐"
맞아. 그러고 보니 그 때도 아무 말도 안하고 갑자기 나타나서 깜짝 놀랐었다. 알바하던 서점의 홈페이지 영상을 만든다고 외주업체가 광고를 찍으러온 날.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갑자기 카메라 들고 나타난 것도 너가 먼저다.
"그냥 하숙집 관리하면서 연극연습이나 좀 더 하지. 왜 알바를 하겠다고 해?"
"휴학하고 나니까 너무 심심해서..."
"심심하면 집에서 요리 연습이나 좀 더 하든가."
"이게...."
오픈 때부터 일하기 시작한 멀티플렉스 서점에서 일하던 녀석이 내게 소개시켜 준 알바. 처음엔 대타로 몇 번 나갔다가 주말 자리가 나자마자 운좋게 꿰차고 들어갔다. 이제 겨우 한달 딱 채웠는데- 전문 서적 파트라 확실히 손님이 덜 붐비고 일도 쉬운 편이라 꿀 같은 자리였다.
홍보 영상 찍는 다고 하루 문을 닫았는데 붐벼보여야 한다고 주말알바까지 추가수당을 챙겨준다며 다 불러서 평일에 일하러 나간 날. 우리 탈의실에서 함께 직원 옷, 손님 옷으로 갈아입던 메인 모델들이 있었지만 배경으로 우리 서점 직원이랑 알바들도 몇몇 배경으로 나오기는 한다고 했다. 물론, 모델료는 두둑히 주시겠다고 했고 처음 일할때부터 온갖 아양과 귀척으로 이쁨받던 여우같던 알바생이 하기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같이 배경으로 찍히기로 한 꾹이가 직원 옷을 안입고 뜬금없이 카메라 가방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 쪽 직원 한 명이 사고가 나서 급하게 도와주게 된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촬영 보조업무를 보던 녀석을 신기해하다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아 맞아 이녀석 영상학과였지. 그런데 몇번인가 모델들이 서점에서 책사가는 장면을 찍고 나선가, 녀석이 피디님과 대화를 하면서 구경하고 있던 무리들 속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내가 그 여우를 제치고 모델들의 배경이 된 것이다.
"다 너 때문이자나!"
"내가 뭘 어쨌는데;;"
"그냥 그 여우지지배 찍지 왜 나로 바꾼다고 해가지고... 아주 기냥 그 여우가 날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잖아."
"광고 영상 잠깐 스쳐지나가는 거고 메인 모델들도 따로 있는데 거기다 카메라 의식하면서 얼굴 들이밀고 이쁜척하면 되냐. 서점 홍보인데 일하는 거 찍어야지. 소리도 안나오는 배너영상인데 목소리는 왜 또 그렇건데. 혀 반토막 씹어먹고. 무슨 인스타 동영상 올리는 줄 아나. 누나 네가 훨 나아서 찍어보고 쓴건데. "
"아 몰라 주임님 히스테리까지 합쳐져서 아주 둘이 짬뽕으루 날 괴롭혀서 죽는 줄."
"주임님은 또 왜?"
"그 우리 서점 광고 찍은 피디님있잖아. 그 잘생긴 피디님."
"김피디형이 왜?"
"피디님한테 꽂혀가지고 엄청 들이댔는데 저번에 여친이랑 서점에 왔더라. 겁나 이쁜 여친이랑. 와 ...난 뭐 연예인인 줄. 끼리끼리가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어. 솔직히 좀 쌤통이더라. 누가 좋아하니 그런 성격을. 암튼 덕분에 요새 주임님 상태가 완전....세상 모든 핑크빛이 핏빛으로 다가오는 거 같아. 겁나 전투적이야."
"그래서 많이 스트레스 받았나."
한참을 종알대다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나는 마당에 있던 작은 향나무에 꾸며놓은 트리가 맘에 안들어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알록달록한게 너무 촌스러운데. 다시 꾸며볼까. 그런 나와 달리 꾹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바로 세탁실로 향했다.
"누나 옥상에 어제 널어놓은 빨래 안 걷어놨어?"
"앗차;"
나는 다시 꾹이 뒤를 쫓았다.
"일 안할래?"
"알바 시작했더니 정신없어서 그랬어 미안;"
"그러게 차라리 하숙비를 올려 받으라니까."
"진짜 그럴까보다. 야 말도 마. 그 여우가 저번주에는 어땠는 줄 알아?"
"뭐 어쨌는데"
"일을 겁나 안하는 건 그렇다고 쳐. 시킨 것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거야. 분명 가르쳐 줬는데 몰랐으면 지가 정신 안차리고 일 대충 한건데 미안해해야지. 겁나 당당해. 분명 가르쳐 줬는데 해맑게 웃으면서 어머 전 몰랐는데요?하고 사람 복장터지 게 하는거 있잖아. 완전체야 완전체."
"아직 일 한지 얼마 안되서 모르는거 아니야?"
"아씨... 어쩜 주임님하고 토씨 하나 안틀리고 똑같이 말하냐?! 야 내가 걔랑 나랑 비쓰하게 들어갔거든? 지금쯤이면 모르는거 미안해해야 정상이란말야. 그리고 야, 못하는 거랑 안하는 거는 다르다고. 못하는 거면 도와주고 가르쳐주지. 노오력이 없다니까. 아예 할 생각이 없는거 있잖아. 사람 부려먹고 여우짓하는데 도가 튼 애라고. 애교부리면서 앵앵거리잖아? 바로 나 나쁜 년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니까. 사람들이 왜 그걸 모를까..."
"걍 그러려니 해라. 아까 말했잖아. 신경쓰면 누나 너만 스트레스 받는다."
"그래, 그래서 내가 피한거잖아. 무서워서 피하니? 더러워서 피하지. 그런 애는 멀리 하는게 좋아."
"잘했네."
꾹이는 세탁기에서 빨래들을 꺼내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빨래바구니에 담긴 세탁물들을 탁탁 털자 익숙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옥상 가득 퍼졌다.
"아우 냄새. 야, 아주 섬유유연제를 들이부었구나. 들이부었어."
"좋은 냄새 나면 좋지 뭐."
"야 섬유유연제 너무 써도 피부에 안좋다고 했어~ 그거 피부 여드름 유발한다고 했단말야"
"어 정말!? 안돼는데..."
꾹이가 눈이 똥그래져서 심각하게 젖은 빨래를 털다말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넌 왜 그렇게 향기에 집착하냐? "
"습관돼서 그렇다. 운동할 때 부터. 땀냄새 날까봐."
"너 이제 운동 안하잖아."
"그래도..."
"왜 미련남아?"
꾹이가 킁킁대던 빨래를 다시 툭툭 털어 널기 시작했다.
"아니. 난 지금도 좋다. 뭐. "
뒤돌아서 조신하게 빨래를 너는 꾹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진짜?"
"진짜다. "
"그럼 됐고."
"누나는?"
"음?"
"누나는 왜 연영과 안갔냐"
"나는 안간 게 아니라 못간거지요..."
말하다보니 울컥. 아니 멀쩡히 대화하다 말고 갑자기 뼈를 때리네 이 놈이?
"못가긴. 내 다 안다."
"알긴 뭘..."
"누나 그때 이모 병간호하다 못간거지 뭐. 충분히 갈 수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야기가 또 그리로 튀어.
"아니. 뭐. 솔직히 내가 뭘. 엄마는 핑계고. 내가 자신이 없는거지."
"왜, 잘하면서."
"잘하긴 뭘. 맨날 동아리 선배들한테 말 듣는데."
"처음부터 잘하는게 어딨어. 뭐 아직 행인1, 배경2, 이런 것만 하고 포스터 붙이고 청소하는게 주 역할이지만."
꾹이는 말해놓고 아차싶었는지 내 눈치를 살폈다.
"아 맞다. 저번에 주인공 친구도 하고 제법 무대 올랐었지 참. 잘하더만. 누나는 꼭 잘 될거다. 연극 계속 할건가? "
"하고 싶은데. 지금은 그냥 동아리에서도 맨날 배경인데 뭐. 나 다음번 연극에서도 이름이 없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하숙집 계속 하면서 취미로 하면 되지. "
"난 그냥 연기하는게 좋은 건데. 졸업하면 어떻게 해야할지 슬슬 걱정되긴 하고... 취업해야할거 같긴하고..."
"이왕 하는 거 꿈 크게 가져라. 저번에 광고 찍을 때도 보니까 잘하더만. 그 여우보다 훨 나았다. 진짜로."
"피...집은 어쩌고. 하숙생들 다 내보내고? 끼니 챙기는게 얼마나 힘든지 너 아니?"
나는 말을 꺼내놓고 아차 싶었다. 빨래를 너는 꾹이의 얼굴은 안보여도 쿡쿡대며 웃고 있는게 다 느껴졌다.
"아니, 그러니까.... 너도 도와주니까 알거 아냐. 얼마나 힘든지..."
"잘알지, 아주~~~~~~ 잘알지. 아마 누나 너 보다는 내가 훨~~~씬 더 잘알껄?"
"야, 이게 밥하고 설겆이하고 그게 다가 아니야. 마음을 쓰는거,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 우리 하숙생들 어떤가 다~ 보살피고 보듬고. 가족이라고 가족. 그런 마음으로... 내가 오죽하면 연애도 제대로 못하잖니. 늘 집안일이 신경쓰여서 제대로 데이트도 못하고, 외박 한번을 못해봤다."
"됐고 거기 집게 좀 줘봐."
"응? 응."
"다들 오래 살아서 가족같은데 뭘. 솔직히 말이 하숙이지 그냥 월세지. 누나 밥값도 거의 안받잖아."
"그거야 엄마가 없으니까 아무래도... 그래도 다들 안나가고 계속 있는게 신기해. 나야 가족 많은 거 같아서 좋지만."
"암튼 연극도 하고 연기도 하고 하고 싶은거 다 해. 내가 도와줄께."
"네가 뭘 도와, 네 앞가림이나 하세요. 울 집이 너 없으면 안돌아가..."
..............는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말하면서도 양심에 찔리지?"
꾹이는 빨래바구니를 내 머리에 푹 씌우고는 툭툭치더니 다시 옥상을 내려갔다.
"에이씨, 저게..."
운동 때문에 꼬맹이 때 부모님 품에서 떨어져 서울까지 올라와 우리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던 엄마친구의 아들. 녀석과 함께 산 세월이 벌써 만으로 10년이 넘었다. 둘다 꼬꼬마시절.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났는데, 여자애들은 남자애들보다 빨리 자란다고 했던가. 저 아래서 나를 쳐다보던 커다랗고 동그란 눈동자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내 눈에 비치는 꾹이는 언제나 그 귀엽던 모습 그대로였다. 물론, 지금은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조곤조곤 나에게 조언도 해줄 정도로 ㅁㅏ음도 커버렸지만.
몇살 차이 안나는데도 세상 둘도 없을 귀요미 꼬꼬마같았던 녀석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동안 미적미적 댄 것에 한풀이라도 하듯이 갑자기 하루이틀만에 푹푹 자라나기 시작했다. 분명히, 고등학교 입학식 때 녀석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학교로 보냈던 기억이 있는데 하룻밤 자면 커져있고 또 하룻밤 자면 커져있더니 졸업식때는 저 위에 있는 얼굴을 올려다보며 졸업축하 꽃다발을 줬더랜다. 자라나는 키를 감당 못해 중간에 교복을 새로 맞춰 입기도 했었다. 중학교 때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었지만, 전지훈련이랍시고 툭하면 나가 살고 선배들과 어울려 지냈던 습관 때문인가 녀석은 정리정돈이 몸에 배어있었다. 빨래에도 집착이 심했고 요리도 곧잘 했다.
"김치도 못 담그면서. 이모가 돌아가실 때 내 손 꼬옥 붙잡고 이 집하고 누나 나한테 부탁하고 갔다. 할머니가 삼일에 한번씩 와서 반찬 안채워주면 우리집 하숙생들 전부 다 쫄쫄 굶기다가 집세 환불해 주고 빈털털이 될 껄."
주방에 내려와서 밥을 차리면서도 꾹이는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빠가 하면 된다. 울 아빠도 요리 잘 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동안 정들었던 하숙생들도 몇 있어서 못내보내고 옆동네 사시는 할머니가 이삼일에 한번씩 와서 도와주다보니 어영부영 댓명의 하숙생들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시간이 이만큼 흘러있었다. 챙겨주는 게 부실해서 금방 집들을 나갈 줄 알았는데 장례식장도 지켜주고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사정 봐주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취업준비생이었다가 경찰관이 되어서도 같이 사는 오빠가 한 명. 그 오빠가 알음알음으로 데려 온 후배가 또 한 명. 중학생때 지방에서 올라와서 울 엄마를 친엄마처럼 따르며 계속 지내던 학생이 두명. 그리고 하숙은 아니고 옥탑방에 세 줬는데 툭하면 와서 밥 얻어먹는 사람 두 명.
이미 병세가 보인지 오래였고 씩씩하고 다정하게 투병생활을 이어가신 엄마 덕분에 마음의 준비를 ㅁㅣ리 해왔는데도- 엄마가 떠나고나서 너무 힘들었다. 흔치 않은 하숙집이라 한번 들어오면 다들 잘 나가지도 않았지만 유난히 사이좋게 같이 살아오던 하숙집 식구들이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금방, 아무렇지 않게 엄마 이야기를 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에 누가 하숙을 해. 집 안에서 옷도 맘대로 못입고 화장실도 편히 못쓰고. 처음에 엄마한테 불평하던게 무색했다. 그래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살짝 흐트러질뻔했던 고등학교 시절 덕분에 원하던 대학은 들어가지 못했지만- 원하던 진학이 아니어서 그런가 학교에 미련도 없고 그래서 학교에 소홀할 핑계를 위해 이 하숙집을 놓지 않은건가 싶었지만 사실은 엄마와의 추억을 놓는게 될까봐 무서웠었다. 엄마와의 추억을 함께 살아온 하숙생들까지 사라지면 내가 못 버틸것 같아서 처음엔 악착같이 하숙집을 유지했다. 내가 아무리해도 엄마처럼 집안일을 해낼 수가 없는게 뻔한데도- 이상하게 함께 사는 사람이 줄지를 않았는데 생각보다 힘이 들지 않았던 건 이미 가족처럼 살아온 하숙생들ㅇㅣ 봐준 덕분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할머니와 아빠, 그리고 꾹이 덕분이었다. 이삼일에 한번씩 들러 반찬거리 국거리를 만들어놓고 가시는 할머니와, 집안일이 능숙한 다정한 아빠와, 그리고 빨래요정 부엌데기 전정국. 어느새부턴가 녀석은 특기를 발휘해 슬금슬금 집안일에 손을 대고 있었다.
"이모부 출장가면 어떻게 하려고. 저번에도 일주일이나 부산갔다오셨을 때 누나 나 없었으면 어쩔뻔했어?"
"느예느예- 아이고 꾹이 없으면 아주 큰일날뻔했네."
"이제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다른 사람들껀 이따 누나가 챙겨."
"야, 국이 없잖아 국이. 집 밥의 기본은 밥과 국, 김치."
꿈틀, 앞치마를 곱게 매고 밥을 푸던 뒷모습에 살기가 어렸다. 꼬꼬마 시절부터 봐온 모습인데, 언제 저렇게 컸냐 싶었다가도 저렇게 꿈틀댈 때는 어릴 적 모습 그대로라 보면서 웃음이 났다.
"너는 왜이렇게 이름값을 못하냐- 꾹아. "
"...."
"꾹이야- 꾹아? 미역꾹이라도 좀 끓이자. 아님 시래기꾹, 뭇꾹, 감자꾹. 아니면 동태꾹?"
"........그만해라아"
"너나 그만해라. 이 누님 연애길 막는거"
"내, 내가... 내가 무슨 누나 연애길을 막아아"
밥그릇을 들고 식탁 앞으로 성큼 다가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도 어릴 때 그대로다. 큰 건 몸 밖에 없구나. 귀여운 모습에 푹푹 웃음이 터졌다.
"나, 나도 대타로 나갔는데 누나가 있어 놀랬↗다↘ "
흥분하면 사투리 튀어나오면서 말더듬는 것도 그대로.
"와 된장찌개 맛있다."
"꾹이가 끓여놓고 간거야. "
"오오... 꾹이가 솜씨가 참 좋아."
"네가 맛없는게 어딨니. 과일맛 신호등 치킨도 맛있다고 먹는 사람이 너 아니니?"
"괜찮았는데 왜... 먹을 만 하더만."
"그래서 꾹이한테 억지로 먹여서 애를 장염걸리게 만들어? 돌도 소화시키는 애가 오죽하면 장염이 걸려"
"아 그때 그거 치킨때문에 그런거 아니라니까... 하여간 누나는 꾹이만 편애하더라. 껌딱지라고 챙기는거야?! 밥도 솔직히 꾹이가 나보다 더 많이 먹거든?"
쯧쯧쯧... 쟤 한테는 밥 값을 더 받아도 될 것 같아. 나는 두번째 밥을 그릇에 퍼담는 허여멀건한 녀석을 바라보았다. 저런 태평양같은 어깨가 괜히 나오는게 아니지. 먹는게 다 어깨로 가는 녀석. 꾹이도 그렇고 저 녀석도 딱 스포츠관련 학과를 갔어야 했는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앞자리를 바라보았다. 뱅뱅이 안경을 쓰고 책을보며 밥을 먹던 또다른 녀석이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근데 꾹이는 어디갔어 누나?"
"밥 먼저먹고 알바 면접본다고 갔어."
"알바하잖아요 누나랑 같은 서점에서. 근데 또 해요? 돈독 올랐나."
"그러게. 방학하자마자 알바 구하네."
"누나가 모르는 일도 있어요? 꾹이일을?"
"내가 걔 엄마냐-"
"아 하긴..."
태평양과 키는 비슷하데, 까무잡잡하고 길쭉하니 정 반대처럼 보이는 녀석이 맥반석구운란처럼 맨질맨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꾹이가 누나 엄마지 참."
확 계란 터트리듯 밟아버릴까보다 ㅡ_ㅡ+ 내 살벌한 얼굴을 보고 맥반석이 다시 고개를 푹 책으로 떨궜다.
"아니다, 누나 껌딱지랬지 참."
"야 시끄러. 넌 방학인데 왜 집에 안가냐"
"나 시험 반년밖에 안남았어... 이제 진짜 피터지게 공부해야한다고..."
"많~이 드세요. 예비판사님. 내년 이제 이주일 남았다."
"으으으...."
맥반석이 갑자기 밥맛이 뚝 떨어진 표정으로 수저를 놓았다.
"시간가는게 무섭다 누나야... ㅜㅠ"
"힘내라.... 이따 야식 챙겨줄게."
어깨를 있는대로 늘어뜨린 채 맥반석이 2층으로 올라갔다. 쯔쯔쯔.... 축쳐진 녀석을 의문스럽게 쳐다보면서 2층에 있던 하숙생 오빠가 내려왔다. 망개떡처럼 뽀얀 얼굴로 늘 조용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도저히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동안의 외모였지만 대학생때부터 우리집에서 거의 6년을 산 하숙생 오빠가 몇년 후배라고 데려왔으니 나보다 오빠라고 그저 짐작만 할 뿐인.
"왜 저래?"
"갑자기 신분파악이 됐나봐요. 내년 여름에 법학... ? 뭔 시험있다고 하던데. 벌써부터 피말리네."
"아하 로스쿨 준비하는구나. 힘들겠네."
"식사 안하세요? 그러고보니 요새 밥 먹는 거 못 본 것 같아요."
"응. 밖에서 잔뜩 먹고 와서 괜찮아. 아 그보다, 나 이따가 휴대용 버너 있으면 좀 써도 될까?"
"네. 괜찮아요. 뭐하시게요?"
망개떡오빠가 씩 웃더니 손안에 쥐고 내려온 걸 보여주었다.
"엉? 콩 아니에요? 콩밥먹고 싶어요? 아님 콩장? 말을 하지, 할머니한테 부탁하면 만들어주실거에요."
"아.. 아니, 이건 그런 콩이 아니고...."
푹 터지는 웃음을 삼키며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원두야. 커피만드는 콩."
"원두콩은 갈색 아니에요? 이건 초록색이잖아요."
"이건 생두야. 이걸 볶으면 갈색으로 변하고. 네가 알고 있는 갈색 원두콩은 볶은 거야."
"아하...."
하얗고 작은 망개떡 오빠의 손안에서 동그랗게 굴러다니는 초록색 생두를 보자니 맘이 쳐졌다. 오늘의 운세에서 내게 행운의 색이 초록색이라고 했는데. 오빠의 말처럼 내 행운은 볶은 원두색으로 변해버렸어. ㅡㅜ
"생두를 좀 샀는데. 어떤가 좀 확인해보려고."
"근데 이걸 어떻게 볶아요?"
"그냥 후라이팬에 볶아도 돼. 불 조절만 잘하면."
"우와.... 오빠 이런 취미가 있는지 몰랐네요?"
신기해서 박수를 딱 치다가 문득 든 생각.
"아 오빠 이거 만들어서 2층에 맥반석 녀석 갖다줘도 돼요?"
"맥반석?"
"이따 야식 주면서 같이 주려고요. 공부하느라고 맨날 새벽까지 책만보잖아요."
아하.... 또 한번 푹 웃음을 터트리며 오빠가 대답했다.
"응. 이거 볶고나면 숙성시켜야해서 당장은 안되는데 .... 전에 사 놓은 원두가 있어. 그거 내려줄께. "
"오오. 잘됐다. 고마워요 ㅎㅎㅎ"
"착하네 윤가진. 이럴 땐 선배가 말한 너네 엄마랑 꼭 닮았어."
"우리 엄마는 요리 완전 잘하고 집안일도 진짜 잘했는데요. 난 할머니랑 꾹이 없으면 진짜 하나도 못해"
"사람들을 챙겨주는 마음을 말하는거야."
"저는 애들이 있는게 좋아요. 크리스마스에 혼자 지내지 않아도 되잖아요!"
슥슥-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오빠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식탁 위를 훑었다.
"선배는 오늘도 나이트 근무고... 꾹이가 안보이네 그러고보니?"
"꾹이는 밥만 차려놓고 알바 면접갔대. 근데 형, 나도 커피 한잔 얻어마셔도 돼?"
"물론이지. 이따 내려와. 근데 꾹이는 무슨 알바를 또 해?"
"몰라요. 제가 어떻게 알아요..."
"윤가진이가 모르는 꾹이 일도 있어? 꾹이는 가진이 껌딱지 아니었어?"
"껌딱지가 다 컸다고 이젠 비밀이 막 생겨요, 하나 둘씩."
그렇다. 하숙생들이 전 부 입모아 말할 정도로 윤가진 껌딱지였던 꾹이. 전정국이에게 어느새 부턴가 하나 둘 씩 비밀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