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던 시간들이 추억이 되는 순간부터 모든 기억들은 잔인해졌다.
길거리에서 지관통을 메고 다니는 사람만 봐도 눈물이 고였고 함께 타고 미술관을 향하던 버스 번호만 봐도 가슴이 시렸다. 그렇게 그 빈자리를 느껴야할 때 마다 심장이 녹는 것처럼 아팠다.
사람을 사람으로 잊어야 한다는 말도 너무 아팠다. 누군가를 잊는 것도 아프고, 누군가를 이용하는 것도 아픈 짓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속에 더 이상 그 누구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건내도. 우연히 건네 받은 차 한 잔에 마음이 따뜻해진다해도. 제 아무리 우연이 필연처럼 몰아치는 상황에 빠진다해도.
코드핑크 #01 ------------------------------------------
내가 기억하는 시작은 꽤 선명했다.
자주가는 편의점이나 까페 알바생의 인상착의나 특징을 일부러 정확하게 기억할 필요가 없듯이, 그 사람도 딱 그 정도의 인상으로 내 삶 일부분에 실루엣으로 자리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자주 들르던 미술관의 직원. 정확한 직위도 모르는 그냥 그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 정도?
"또 오셨네요."
"이번 전시는 꽤 전도유망한 젊은 화가들 작품이에요."
"오늘도 날이 춥죠?"
이런 기억에도 없는 직업적 멘트를 주고 받는.
그러다 어느 날인가, 흐린 날씨 탓인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이 미술관을 전세 내듯이 오랜 시간 머물렀던 날이 있었다. 너무 오래 있었나 싶어 서둘러 전시관을 나왔는데, 맘에 드는 그림이 몇 점 계속 맴돌았다. 미술관 내 매장에서 도록을 한 권 사고 원하는 그림이 담긴 엽서도 몇 장 사서 정리하느라 잠시 로비 소파에 앉아있을 때였다.
불쑥- 작은 꽃송이들이 둥둥 떠있는 커다란 머그잔이 내 시선 안에 들어왔다.
"아니 괜찮...."
고개를 들었는데,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아기같이 말간 얼굴로 그가 서 있었다. 엉겹결에 눈을 마주쳤는데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그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또렷한 그의 눈매가 찡긋- 움직이며 한 번 더 권유하는 표정을 지었다. 따뜻한 마음으로 차 한잔 정도는 거리낌없이 건네줄 수 있는 선한 인상이었다.
"이렇게 날이 흐리고 추운 날은 따뜻한 걸 마셔줘야 기분이 좋아져요."
이 사람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생각해보면 나는 이 사람의 제대로 된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얼굴 언저리, 어딘가로 애매하게 시선을 맞추면서 기계적으로 대답하고 대화를 끝내곤 했다. 그냥 내 시간을 방해받기 싫어하는, 혼자 쇼핑하고 싶어하는 화장품가게 손님처럼- 딱 그만큼만 그를 대해왔으니까.
"드세요, 오늘 이상하게 사람이 너무 없어서... 할 일이 없기도하고..."
"괜찮은데....."
그 때 그의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났다. 그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저 커다란 손은 낯설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모르겠는데, 힘을 주거나 쭉 뻗으면 살짝 독특하게 마디가 휘어져보여서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한 손으로는 머그잔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휴대전화를 찾는 그를 보며 차 한잔 건내 받는 것이 이렇게 까탈스러울 일인가 싶어 얼떨결에 잔을 받아 들었다. 그가 건네는 머그잔을 받아들고 나니 예전에 이 미술관 앞에서 대성통곡하며 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하고 있을까-
"다 드시고 저 쪽에 잔 두시면 됩니다."
그는 다시 말간 얼굴로 웃으며 말한 뒤 가버렸다. 더 이상 말걸지 않아줘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도록과 엽서를 번갈아 보면서 차를 마시면서도 내 시야 안에는 담겨 있지도 않을 그 사람의 자리가 느껴서 불편했다. 준 사람 성의가 있는데 손도 안대고 바로 일어서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아이스티도 아닌 따뜻한 차를 호로록 마셔버릴 수도 없고... 꽃송이들을 후후 불어대며 한모금 두모금 마시는 틈틈이 시계를 봐도 이럴때면 꼭 시간이 더디게가는게 참 난처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비도 쏟아지는데 천천히 도록이나 한 번 더 훑어보고 나갈까 싶기도 하고...
"저..."
그가 엎드려 있어서 처음엔 없는 줄 알았다. 안그래도 체격이 큰 편인 사람이 저렇게 수그리고 있으니 작은 뒤통수와 비교되어서 어깨가 더 넓어보였다. 고맙다는 인사는 하고 가려고 어렵게 말을 건네는데 그는 계속 엎드린 채로 미동이 없다. 오늘따라 사람이 없다더니 ..............설마 농땡이 치면서 자는건가?
"저기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슬금슬금 뒷걸음치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인사를 건냈다.
"잘 마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할 말은 다 했다싶어 돌아서려는데 뭔가 기분이 꺼림칙했다. 아까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선한 이목구비와 살짝 톤이 높은 따뜻한 목소리도.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미친사람처럼 이 미술관 앞에서 펑펑 울던 날- 그런 나를 보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아무 말없이 차를 만들어 건내주던 하얀 손의 머뭇거림도. 모든 것이 맑고 선한 느낌이어서 꾀부리거나 게으름 피우며 흐트러질 사람같지는 않았다.
"저기...."
아무래도 이상해서 뒤돌아와서 까치발을 하고 그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어... 저기... 괜찮으세요?"
비스듬히 보이는 관자놀이에 땀이 한가득 차 있었다. 얼굴을 받치고 있는 두 주먹도 있는대로 힘이 들어가서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저기.. 저기 어디 아... 아프세요?"
그제야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들고 그가 쥐어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갑자기..... 복통...... .... "
"마..많이 아파요?! 아 어떻게..."
"전...화... 전화 좀.... "
"어... 어디다가..."
"아까.... 통화한...."
그가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휴대폰을 건냈다. 아마도 지인이거나, 미술관 동료거나....
"여보세요? 아... 저기... 저기 여기 미술관인데.... 여기 남자 직원분이 갑자기 아프셔서.... 네 ...성함... 성함이....... 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끄응...."
말갛고 선한 얼굴로 꽃차를 건낸 뒤 정확히 사십분 뒤에 맹장이 터진 남자. 그게 그의 첫인상이었다.
"환자 보호자 분이신가요?"
"네? 아니 저는 그냥 .... 아는 사람... 아니 아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저기..."
"지금 당장은 못하고 내일 일정 잡히는대로 수술 들어갈거에요. 내일 수술할 때 무통주사 맞으셔야 할텐데 먼저 설명 좀 드릴께요."
"저기 제가 보호자가 아니라서요... 보호자 분 지금 오고 계시는데...."
갑자기 요란한 기계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간호사가 침대 커튼을 확 치며 들어섰다.
"김쌤! 7번 침상환자요!!!"
"왜 그래, 무슨 일.."
"어레스트에요!! 빨리!"
"수쌤부터 불러요!! 코드블루라고!!! 보호자는 어디있어?!"
"저기..."
"죄송해요 응급환자 때문에, 잠시만요-"
어쩔 수 없이 같이 119를 타고 오긴 했는데, 지금 이게 뭔 난린지 모르겠다. 꽃차 한 잔 얻어마신 댓가로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를 몸소 겪고 있는 내 처지가 웃겼다. 커튼을 젖히고 살짝 나와보니 대각선 건너편 침대에 의료진들이 잔뜩 모여있는게 보였다. 의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명 보였고 번갈아 가며 환자 위로 뛰어올라가 심폐소생술을 하는 것 같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듣던 기계소리들이 계속 들려와 조금 낯설고 무서웠다. 커튼을 살짝 젖힌 채로, 잠들어있는 그에게 나도 모르게 말을 건냈다.
"많이 아프겠지만 참아요. 어짜피 터진거고 잘라내고 꼬매기만 하면 된대요. 저쪽 분은 생명이 오락가락하니까..... 우리가 양보해줘요....."
의료진들 발치에서 주저앉아 우는 사람이 보였다. 환자의 가족같았다. 가슴 속에서부터 목구멍까지, 뻑뻑하고 거친 모래가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 그래도 이렇게, 병원에 빨리 왔으니까"
"이렇게 올 수라도 있었으니까...."
".......... 그 사람처럼 허망하게 죽지는 않을거니까."
응급실 다른 환자들까지도 전부 그 난리통에 넋을 잃고 쳐다보는데 또 다른 사람이 응급실 입구로 들이닥쳐 난리를 피우는게 보였다.
"저기, 여기 금방 119 실려온 사람이요, 맹장이라고 하던데...!"
드디어 보호자가 왔구나. 나는 재빨리 가방을 들고 자리를 정리했다.
"보호자가 왔으니까 이제 괜찮겠지..."
재빨리 응급실을 나섰다. 병원 건물을 빠져나오는 찰나, 등 뒤로 계속 따라오던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아까의 코드블루 환자 침대가에서 주저앉아 울던 보호자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뒤돌아 보았다.
..............죽은걸까?
아니면 살아난걸까?
마음이 무거워서 발걸음을 돌리는데 시간이 걸렸다.
입김을 뿌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길었다.
사실 일부러 더 먼 길을 돌아 걸어왔다.
생각을 정리해야할 것 만 같아서.
좋았던 시간들이 추억이 되는 순간부터 모든 기억들은 잔인해졌다.
길거리에서 지관통을 메고 다니는 사람만 봐도 눈물이 고였고 함께 타고 미술관을 향하던 버스 번호만 봐도 가슴이 시렸다. 그렇게 그 빈자리를 느껴야할때마다 심장이 녹는 것처럼 아팠다.
사람을 사람으로 잊어야 한다는 말도 너무 아팠다. 누군가를 잊는 것도 아프고, 누군가를 이용하는 것도 아픈 짓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속에 더이상 그 누구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건내도. 우연히 건네 받은 차 한잔에 마음이 따뜻해진다해도. 제 아무리 우연이 필연처럼 몰아치는 상황에 빠진다해도.
"원래 원하는대로 사는 사람은 많이 없대요. 저도 사실 하고 싶던 건 따로 있었거든요. 안그래도 고민하고 있었는데....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수술하면서 겸사겸사 맘을 먹었죠."
"그럼, 그만두신지가..."
"한 달이요."
"인수인계가 오래 걸렸나봐요"
"아뇨 따로 크게 필요치 않아서 일주일 하고 끝냈죠. 다른 직원도 있고."
"아.... 그런데 제가 오늘 여기 올 줄 어떻게 알고..."
"어짜피 백수인데요. 시간도 많고. 맨날 나와서 기다렸어요."
아... 그러고보니 옷차림도 평소와 달랐다. 톤다운 된 핑크색 후드티에 청바지, 하얀운동화. 후드티만 입기엔 좀 춥지 않을까, 이미 패딩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많이 보이는데... 늘 정장차림아니면 캐주얼해도 형식을 차린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어린 아이처럼 앞 머리도 내렸다. 이 사람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고 보기 좋아서 나도 모르게 자꾸 그 앞 머리에 시선이 갔다. 내게 진 빚이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뭔가 조금 더 필사적으로 말을 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옷차림 때문에 낯설어서 그렇게 느낀 거 였을까.
" 저 옆에 공원있잖아요. 평소에도 저기서 시간 많이 보냈거든요. 강아지들이 산책 많이 오는데라서 카메라 들고 가서 사진도 찍고 음악도 듣고.... "
"아..."
그제서야 그가 들고 있던 카메라가 보였다.
"많이 기다렸어요. 감사인사도 아직 제대로 못했는데..."
"에이...괜찮아요. 몸은 좀 어때요?"
"다 나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어디 들어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해요."
"괜찮아요."
"늘 괜찮다고만 하시네요"
내가 그랬었나?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영화관 피규어를 모으고 있거든요."
"영화관 피규어요?"
"네, 팝콘 콤보시리즈 이런거 사면 콜라 뚜껑에 꽂아주는 탑퍼 피규어요."
"아... 그런데요...?"
"영화는 혼자 볼 수 있는데 팝콘은 혼자서 세트 두개세개를 동시에 먹을 수가 없더라구요. 피규어가 총 다섯갠데. 최소 세개는 사야하니까. 콜라 여섯개를 동시에 먹을 수가 없어서...."
그건 그렇지. 그런데...
"제가 수술 한지도 얼마 안되서 그런거 막 먹으면 또 안된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니까, 그것도 그렇지. 그런데....
" 그래서 말인데, 영화는 맘대로 보시고, 팝콘도 사드릴테니 피규어만 저한테 양보해주세요! 영화는 진짜로 보고 싶은거 막 보시구요. "
"아, 괜찮..."
진짜로 나도 모르는 말버릇이었나 싶어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은혜갚을 기회를 좀 주세요."
뭔가 더이상 이야기를 이어가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입을 떼야하나 시선을 떨구다가 그의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나를 따라 시선을 떨군 그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더니 곧바로 들어서 사진찍는 시늉을 했다.
"사실 제가 원래 하고 싶던 건 사진찍는거 였거든요."
"비싸보이네요."
"비싼거 맞아요. 중고로 샀는데도 꽤 주고 샀어요. 한 장 찍어드릴까요?"
"아뇨, 저 지금 상태가 좀 그래서..."
"이쁜데요."
"아뇨, 제가 무슨..."
"진짜 이뻐요."
카메라로 얼굴을 가린 채 그가 계속 말했다.
"여자사람친구로라도 알고 지내고 싶을만큼 이뻐요."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시선을 피하는 것도 까먹는 가보다. 나는 진짜로 대놓고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카메라 앵글 안에서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할 겨를 조차 없었다. 그냥 시선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그의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로 그날 밤, 응급실에서 돌아오면서 주문처럼 되뇌이던 생각들을 떠올렸다. 사람을 사람으로 잊는 건 아픈 일이다. .....이기적인 짓이다.
"그거 그냥 습관이죠. "
"네?"
"싫어도 좋아도 그냥 괜찮다고 하고 계속 손해만 보는 스타일이죠?"
"글쎄요, 그...그런가...?"
"무조건 괜찮다고만 하지마요. 그거 처음엔 고마워하다가 나중엔 당연하게 생각들 해요. 그런 영화대사도 있잖아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였나."
-난 미술관에서 그림 볼 때가 제일 행복해. 행복하면서 마음이 짖눌리는 기분이야. 신나게 작업하면서 행복했는데, 그런 맘에 여기와서 그림들을 보면 다시 자신감이 뚝 떨어지거든.
-지루하진 않지? 난 여기 분위기가 참 좋아. 너도 괜찮지?
-다행이다, 난 네가 싫어하면 어쩌나 했거든.
"그러니까... 지금도 '괜찮아요' 이런 말만 하지 말고, 제가 갚을 은혜를 그냥 좀 누리는 것도 좋을텐데."
"......"
" 맹장터진다고 죽기까지야 하겠냐마는..... 덕분에 병원도 빨리갈 수 있었고..... 또 보호자 올 때까지 있어줬다면서요. 입원서류 작성도 도와주고.... 전 너무 아파서 기억도 안나지만... 그래서 더 미안하고..."
마음에 빚이 남은 채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어떤 심정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아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그 사람의 말끝이 흐려지는 것을 계속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영화 상영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식사하기엔 좀 짧고, 그렇다고 죽치고 영화관에서 기다리기엔 긴 - 딱 그만큼의 애매한 시간. 그는 망설임없이 근처 빵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여기가 sns에서 유명해요"
"여기 빵이 맛있어요?"
"유명하죠."
그가 커다란 비밀이라도 알려주 듯 장난스레 속삭였다.
"그런데, 비쥬얼이 더 유명해요. 여기 2층 인테리어도 이쁘고 조명도 좋거든. 사진찍기 딱 좋아."
"팝콘을 이렇게 샀는데 또 빵집에 와요?"
"어짜피 저녁먹자고 해도 또 괜찮다고 할거잖아요."
얼떨결에 영화관에 따라오고 나서도 주춤주춤 망설이는 내 맘을 읽었는지 그가 팝콘세트가 든 커다란 종이가방을 장난스레 흔들며 말했다.
"팝콘하고 콜라는 반으로 나누고, 빵 몇개 포장해서 집에 가져가요. 저녁 대신 사주는 거니까."
영화관 가기 전에 커다란 종이가방을 사길래 왜그러나 했더니 그는 진짜로 콤보세트를 세 개나 사버렸고, 원하는 피규어를 전부 다 차지했다. 다섯 종류의 피규어를 차지하고는 하나 남는 똑같은 피규어는 잠시 고민하더니 선심쓰듯이 건냈다.
"이것도 선물로 드릴께요. 똑같은 거 두 개니까."
........ 이 사람, 어쩌면 나한테 은혜갚겠다는 건 핑계고 진짜 피규어가 목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에 확신이라도 주듯이, 그는 신나서 피규어를 테이블 위에 주루룩 올려놓더니 열심히 카메라로 찍기 시작했다.
"아, 여기 그늘지네. .. 잠시만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피더니 휴대폰으로 손전등 불빛을 켜고 내 손에 건냈다.
"여기 잠시만 이렇게 비춰주시면... "
"아... 이렇게요?"
"예 여기 이쪽에서 빛을 쏴주면 그늘이 없어져요."
"아하 "
"아니아니, 근데 너무 그렇게 뽝! 빛을 쏴도 사진이 죽어요"
"아, 예...."
얼떨결에 그의 조명 스탭이 되어 피규어 작품사진을 같이 찍다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덩치는 커다란 사람이 이렇게 조그만 피규어들에 집착하는 것도 어딘가 귀여웠고, 팝콘세트를 진짜로 한꺼번에 세 개나 사들이는 것도 웃겼다. 이 사람과 있으면 자꾸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하는 상황 속에 놓여지는 것 같다. 흘깃, 그가 잠시 시선을 카메라에서 떼서 나를 쳐다보는 거 같아 아랫입술을 꼭 다물었다.
"웃는거 보니까 지루하진 않나봐요. 다행이네."
"네... 뭐."
"사진 한 번 볼래요? 잘 나왔다.... 어.... 이거 다시 한 번만 찍어도 돼요? 미안해요"
"괜찮.... 아, 네... 그나저나 저 팝콘들은 어쩌죠. 콜라도..."
"먹으면 되죠. 걱정말아요. 저 보기보다 대식가거든요"
"아직 음식 가려드셔야하지 않아요? 팝콘도 그렇고 콜라같은 탄산음료도..."
"그건 그렇지만 .... 아 잠시만요 이쪽으로 불빛 좀..."
계속 카메라로 이리저리 사진을 찍으며 집중하느라 내 말은 안중에도 없어보이던 그가 갑자기 물었다.
"도레미파솔라시도에 중에서 '라'만 계속 부르면 그걸 뭐라하게요?"
"네?"
"콜라."
"........네?"
................이게 뭐지?
"콜라랑 제일 친한게 누구게요?"
"...........글쎄요;;"
"사이다"
수술한 부위는 맹장인데 뇌가 잘못됐나보다.
"사이다랑 콜라는 친한 사이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 렌즈를 내 쪽으로 돌렸다.
"웃으니까 더 이쁘다."
"아- 찍지마요"
"왜요 진짜 이쁜데."
"저 안이뻐요. 아까부터 계속..."
"-생각해봤어요?"
"뭘요?"
"친구하는 거."
숨이 탁 막혔다. 허허실실 농담하다가 갑자기 저렇게 치고 들어오니까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다.
"해요. 뭐가 어려워."
"뭐... 누가 어렵다고 했나요. 좀 갑작스러워가지고.."
"나는, 여사친 만드는게 소원인데. 여사친이 없거든요."
"여사친 많을 것 같은데요?"
"나는 여사친을 원하지, 근데 다들 날 좋아하잖아. 그래서 여사친이 안돼. "
"왜요?"
"보면 모르겠어요?"
그가 카메라를 내려놓고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방금 날린 어이없는 개그도 그렇고, 몰랐는데 생각보다 되게 능글맞다. 오늘따라 굉장히 다른 사람 같았다. 뭔가 좀 변한 거 같기도하고.
"진짜라니까. 지금 비웃는 거?"
"아니예요, 알았어요. 알겠네요."
"이렇게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사람친구가 생기면 얼마나 좋겠어."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시선을 맞췄다. 저렇게 정색을 하면 또 당황스러운데. 이런 식으로 다시 치고 들어오니까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나 취미가 사진찍기라 인생 사진도 마구마구 찍어줄 수 있는데."
그가 테이블 위로 팔짱을 끼고 내 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진지한 표정을 거두고 다시 방긋방긋 아기처럼 미소를 띄었다.
"맛있는 거 먹는 거 좋아해서 내가 아는 맛집만도 백군데가 넘어요. 나랑 친구 안하면 손해일텐데."
남자사람친구. 그러고보니 나도 딱히 그런 존재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불현듯, 그가 건내주던 따뜻한 꽃차가 떠올랐다. 작은 장미꽃송이들이 분홍색으로 말갛게 퍼진 채로 둥둥 떠다니던 달큰한 꽃차를 마시며 나는 이미 이 순간을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날 이 사람을 응급실에 버리듯이 두고 심장이 제 멋대로 고장날까봐 생각을 다잡으며 그렇게 긴 걸음을 했던 걸지도.
"-친구하자?"
그가 테이블 위로 한 손을 건냈다.
"안녕 친구야"
"어... 응... 아니..."
악수를 해줘야하나 어째야하나 망설이는데 반쯤 넘어간 내 마음을 눈치채고 그가 픽 웃었다.
"아니는 무슨 아니야. 너 친구 이름은 아냐?"
"......왜 몰라요, 응급실 데려가서 서류 쓴 게 난데."
"오올..."
"그런데 그날 민증보니까 나보다 나이 많던데, 그냥 친구해도 되나?"
"뭐? 잠깐만...."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웃겨서 손을 맞잡고 조그맣게 흔들어주는 시늉을 했다.
"친구라며."
다정한 사람.
착하고 선한 사람.
재미있고 명랑하고 주도적이면서도 배려있는 사람.
그리고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줄 수 있는 센스있는 사람.
필요할 때는 미루거나 망설이지 않는 사람.
"친구하자, 김석진."
내 생에 처음 가진 남자사람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