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lection #06 ------------------------------------------------------------------------
"아우 머리야..........."
또 다시 머리가 아파와서 잠이 깼다. 뭔가 익숙한 이 기분은.....
-위로해주는거야.
번쩍. 뭐지?!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 선배의 다락방 안, 전기 장판 위에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내가 누워 있었다. 뭐지, 이거 데자뷔인가? 아니면 꿈... 아니면.....
-하다보니 야해졌네...
뭉클하게 와 닿던 선배의 입술. 저절로 손 끝이 입술로 향했다. 꿈은 아닌데...
-알고 있었죠?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끝내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오르게 만들었다. 꿈이 아니야. 현실이야. 아아 어쩌면 좋아. 미치겠네. 그 자리서 숨을 죽이고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며 동동동 발을 굴렀다. 그러다 결국 이부자리 옆 책상에 무릎이 까이고 말았다.
"으악...."
무릎을 잡고 바닥에 쭈그려 앉는데 거실 바닥 저 편에 뭔가 꾸물대는게 보였다. 거실 앞 난로가 바닥에 웅크리고 자고 있는 선배였다. 또 다시 저 바닥에서 하룻밤을 새게 하다니. 나는 미안한 마음에 무릎의 통증도 잊고 선배에게 다가섰다. 막상 다가가 깨우려니 어젯밤의 기억 때문에 다시 망설여졌다.
-내가 선배 좋아했던거 옛날에도 다 알고 있었잖아요.
"아아... 미치겠네. 그 말은 하지 말 걸...."
내 인기척을 느끼고는 선배가 잠꼬대를 하며 뒤돌아 눕는 시늉을 했고 나는 그대로 쭈그리가 되어 바닥에 붙었다.
"깼어?"
어정쩡한 자세로 바닥에 붙는 수고가 무색하게 선배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네... 선배도 잘 잤어요?“
"음....."
선배가 끄응- 하며 다시 천장을 향해 바로 돌아눕는 시늉을 했다. 있는 힘껏 미간을 찌푸리는 폼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선배 바닥에서 자서 불편해서 그런가 봐요."
"아니, 그것보다 .... 감기가 왔나봐...."
"어머 어떻게 해, 나한테서 옮았나ㅂ..."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선배가 쿡쿡쿡, 웃음을 터트리다가 갑자기 얼굴을 더 찡그렸다.
"아... 웃으니까 골이 더 흔들리네.... 아아..."
"우...웃지마요 그럼."
"근데 웃겨...ㅋㅋㅋㅋ"
"어떻게 해요... 저 때문에..."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
"종점할머니 집이 어디에요, 선배?"
"갑자기 종점할머니는 왜..."
"동치미 국물 좀 얻어오려구요"
"푹- "
선배가 바로 터진 웃음을 뱉고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 웃기지말라고... 골 흔들린다니까..."
"선배 일어설 수 있겠어요? 일단 다락방으로 올라가요. 여기 바닥 너무 차요"
진짜로 내 몸살이 선배에게 전부 다 옮아간 것 같았다. 어정쩡하게 다락으로 걸어가는 내내 선배는 앓는 소리를 냈다.
"선배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저 슈퍼가서 쌍화탕 같은 거 있나 찾아볼께요..."
"괜찮아. 따뜻한데서 조금 자면 풀릴 것 같아."
"그래도..."
"괜챃다니까-"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서려는 찰나, 선배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일어서려던 나는 그대로 기우뚱거리다 주저 앉았다.
"잠깐만 이러고 있자. 정신 좀 차리고..."
맹한 목소리가 진짜로 심각하게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토닥토닥. 나도 모르게 저절로 선배의 가슴 위로 덮여있는 이불을 다독였다.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다른 쪽 팔로는 두 눈을 가린 채, 선배는 그렇게 다시 코를 골며 잠에 곯아 떨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잠들은 선배를 바라보다가, 나는 다락방에서 내려왔다. 몇 시일까. 햇살이 창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려 애쓰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휴대폰을 보는 걸 까먹었고 내 휴대폰이 어디있는가 찾지도 않고 있었다. 거실 책장 옆에 붙어있는 시계에 시선을 맞췄다. 오후 3시. 선배는 아직 잠들어있고, 나의 휴가는 아직 여유가 있고.... 오늘도 집으로 돌아가긴 그른걸까. 걱정인지 기대인지 모르겠는 마음을 품고 나는 선배의 책장으로 향했다.
선배는 시를 좋아했는데, 인문학 서적이나 철학서적도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이었다. 선배를 따라 읽다가 읽다가 포기했던 책이 쇼펜하우어의 책이었다. 선배 옆에서 그 책이나 읽어볼까 싶어 손을 뻗었는데 엉뚱하게도 이상의 시를 집어들었다. 이상의 시 따위는 읽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말야. '날개'정도는 이해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어렵다 못해 괴기스럽기까지한 그의 시는 평범한 내겐 너무 어려우니까. 꼭 외국어를 보는 기분이다. 영어도 아닌 독일어나 불어... 뭐 그런 낯선 언어. 아니 그보다도 더 낯선 그리스나, 스웨덴, 핀란드 언어. 그런 느낌? 분명 알고 소리내어 읽어볼 수도 있는 글자인데 그 조합성에서 문제를 일으켜 두뇌 속에 혼란을 몰고 오는 것이다. 결국 뜻도 모르고 계속 읽다보면 무의식적으로 주문을 외우는 모양새로 그의 언어를 중얼거리는 꼴이 된다. 정말 고약한 예술성이라니까. 아무리 선배를 따라 어려운 책들을 읽어봐도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아 절망하곤 했었다. 아, 헤르만 헤세는 나도 좋아했었다. 읽어도 읽어도 제자리인 것 같은 다른 책에 비하면 그래도 읽는 속도에 맞춰 내용을 비춰주었으니까. 책장을 따라 바쁘게 시선을 훑었다.
"그렇지. 있을 줄 알았어."
나는 책을 들고 다시 선배의 옆자리로 갔다. 선배는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그 옆에 침낭을 끌고가 엎드려서 책을 펼쳐 들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하나의 세계.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책 읽어?"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서 소설 속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 선배가 돌아누운 채로 나를 보며 웃고 있다.
"뭐 읽고 있었어?"
나는 말없이 책을 건내주었다.
"아 이거....."
선배는 누운 자세 그대로 책을 펼쳐들었다.
"이거 재미있지."
"네."
"어디까지 읽었어?"
"음... 여기까지요"
나는 선배가 누운 채로 두 손으로 들고 있는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많이 읽었네, 시간 많이 지났나?"
"몇 번 읽어본 거라서 그런가 빨리 읽히네요."
선배가 페이지를 넘겼다.
"내가 그린 꿈 속의 새는 떠나갔지만, 대신 나는 친구를 되찾았다. 그것은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내게 답장을 주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 잡고 완전히 선배의 한쪽 팔을 잡고 누워 선배가 읽어주는 소설을 들었다.
나른한 느낌, 흐믓한 자유시간. 기분이 너무 좋아서 오히려 이상한 느낌이었다. 단 이틀만에 이런 편안한 기분이 되다니. 금방 읽은 데미안의 감동이, 아직도 가슴 속에 뭔가 학구적이고도 멋스런 감정으로 기분좋게 심각한 심리상태를 유지시켜주었다. 이런 걸 지적 만족이라고 하는건가. 선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점점 현실에서 분리된 감정에 맞춰 멋대로 취해버렸다.
정신이 승화되는 기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게 바로 이런 기분이겠지. 머리 속을 어지럽혔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던 내 현실과 잡생각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동안의 힘들었던 생각들도 정리해보았고.... 이상하지. 눈물이 날만큼 정신이 그냥 편안하기만했다. 내 마음의 언짢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슬픔일뿐이었다. 내 감정을 통째로 꺼내어 두 눈앞에 내려놓고 수정구슬 들여다보듯 무덤덤한 마음으로 툭툭 건드려보았다. 수정구슬이 움직이며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그건 흐믓한 눈물같은 톤을 달고 흘렀다. 내 삶이 이렇게, 잔잔한 저수지의 수면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창 밖의 따스한 햇빛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아직 그 공기는 남아서 선배의 목소리를 따라 내 속으로 계속 밀려들어왔다. 내 아픔들을 하나하나 거둬들어 나가고 있었다. 속이 비워지는 느낌.
나는 몸을 돌려 다락방 창 밖으로 보이는 산속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선배가 읽던 책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왜?"
나는 고개를 창 밖으로 고정한 채 말했다.
"선배가 언젠가 낯선 번호의 버스를 타고 이곳에 처음 내렸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때 어떤 맘이었어요?"
탁. 선배가 책을 덮는 소리가 났다. 선배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좀 많이 지쳐있었어."
"뭐 때문에요?"
선배가 나를 따라 자세를 바꿔 밖으로 같이 시선을 주었다.
"...아낌없이 베풀어지는 관심과 사랑이 어느 순간 잔인하게 느껴지는 시점이 있어. "
나는 한쪽 팔을 괴고 선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더이상 이 마음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야. "
이번에는 선배가 고개를 계속 창 밖에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 순수하게 고마워하는 것만으로는 끝이 될 수 없다는거... 그렇게 점점 능력의 한계치로 나는 몰려가는거야. 갚기 위해서. 보여줘야하니까."
창밖으로 다시 눈송이가 하나 둘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빚처럼 늘어나는 마음들이 얼마나 두려운지 아니? 이 사람을 상처 입혀서는 안돼, 이 사람의 말은 무조건 다 들어줘야 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받았으니까. 아직은 어리고, 거부할 용기도 없고. 고스란히 받아내기엔 너무나 버거워서... 조금... 아니 많이 힘들었지. '기대'라는 건, ' 믿음'이란 건 그렇게 누군가의 자랑이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고통이야."
나는 조용히 선배의 말을 경청했다. 처음 듣는 선배의 속마음. 힘들어하던 소년의 마음이 이토록 잔잔하고도 확고한 톤의 목소리를 지닐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을 힘들었을까.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래. 부피는 달라도, 종류는 달라도 우리는 모두 같은 무게의 고통을 짊어지며 살고 있어.
"물론 나는 부모님을 사랑했어. 이 마음은 아직까지도 절대 가식이 아니야. 하지만 내게 부모님은 그런 존재이기도 하셨어... 그런데 그렇게 내가 무겁고 고통스러운 사랑에 치여 허덕일 때 , 내 반대 편 기울어진 시소 아래에서 나와는 다른 이유로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어. 그래서 결국, 나의 뒤늦은 방황이 시작된거지."
선배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부끄럽지만, 나는 아직도 방황중이야."
"........저도 그런걸요."
선배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뭔가 쑥쓰러웠지만, 나도 무언가 말을 해야할 것 같았다.
"저 산골짜기 밖에, 내가 내버리고 온 나의 현실들이 있죠. 선배와는 다른 모양, 다른 부피를 하고 있겠지만. "
이제는 안다. 애늙은이가 아닌 어린 어른같던 선배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선배가 어떤 마음인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알 것 같아요."
"그래?"
"제가 어제 그랬죠, 제가 옛날에 선배 좋아한거 알았냐고. 그거 진짜였어요"
"............."
"그런데 언젠가 제가 너무 힘들어서 술먹고 선배한테 술주정한 적 있잖아요. 그때 선배의 말이, 제게 정말 큰 위안이 됐거든요."
복잡미묘한 선배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부피는 다르지만 질량은 같은 삶의 무게. 누군가 내 고통을 이해해주고 공감해 준다는게 얼마나 큰 위로인데요. 그렇게 선배의 말이 제 좌우명이 된 거예요. 그리고 그때, 진짜 제대로 깨달아버렸어요. 내가 선배를 진짜로 진짜로 엄청 좋아하고 있었구나. 좋아하는 거 이상으로. 나는... 이 사람이 해준 말을 평생 기억하고 살겠구나. "
깜빡이는 선배의 눈이 알수 없는 빛으로 일렁였다.
"결국은 같은 말의 도돌이표 같은 건데, 선배의 말대로 사람은 누구나 다 힘들고 외로운 거니까. 내 고통에 빗대어 선배의 고통도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을거 같아요. "
"........"
"그래서 선배도 참 많이 힘들었나보다.... 낯선 곳에 어줍잖은 안식처를 마련하고 바람처럼 머무는 마음은. 선배처럼 똑똑하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건, 또 할 수 있는 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사람이 이렇게 스스로 내린 닻에 매여서 방황한다는 건. 얼마나 힘들고 지친 마음이길래....."
그렇다면, 이젠 내가 선배에게 위로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구나. 현실에 지쳐 바람같은 선배의 기억을 쫓아온 내게 선배가 위로가 되었듯이, 현실을 떠나 바람처럼 살던 선배에게도 현실 속의 내가 위로가 되었구나. 나는 이유모를 뿌듯함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내가 선배와 동등해지는 순간이 온 것인가. 마음이 두근거렸다.
"뭔가 뿌듯하네요."
"뭐가?"
"저는 선배가 너무 좋아서, 무조건 선배를 따라하고 싶었던거 같아요. 뭐든지 흉내 내고 다녔죠. 선배가 하는 말이 조금만 멋있어도 기억해뒀다가 집에와서 일기장에 옮겨적고, 선배가 좋다고 한 음악, 책 모두 따라 읽고 .... 그렇게 닮고 싶었어요. 언젠가 선배가,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 했었잖아요? 제가 딱 그랬어요."
"나를 흉내냈다고?"
"네"
선배가 나를 쳐다봤다.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왜?"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제 말했잖아요. 방금도 말했고."
"너는 나를..."
"저 선배 되게 좋아했어요. 좋아하니까 따라하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왜 닮고 싶어 하겠어요."
선배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알고 있는거 아니었나? 나는 말을 이어야 할 지 그만둬야 할 지 헷갈렸다. 아니 그럼 내가 이 한겨울에 이런 낯선 산골짜기로 왜 찾아왔다고 생각한거야. 뭔가 마음이 뾰루퉁해져서 나는 다시 변명처럼 말을 쏟아냈다.
" 나는 현실이 정말 지긋지긋한데. 나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 같은 데.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선배는, 내가 닮고 싶은 선배는 너무 멋있고. 닮을 엄두조차 안났지만 선배를 따라하면서 뭔가 공통점을 찾고 싶었던 거 같기도하고.... 이러면 나를 좋아해줄까, 선배를 좋아하는 사람들 눈에도 내가 선배처럼 멋있어보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존경하는 그런 감정 같기도하지만,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도 변해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따라해도 나는 선배가 아니니까. 선배가 조금 얄밉더라고요."
선배가 다시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선배와의 기억으로 선배를 위로해줄 수가 있다니, 꼭 제가 옛날의 선배가 된 거 같아요."
선배의 눈이 분명 나를 보고 있는데, 다른 생각으로 꽉찬 표정을 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선배의 속눈썹이 방황하는 시선을 따라 흔들렸다.
"기분... 나빴어요?"
선배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소복히 쌓이는 눈은 이틀 전과는 다르게 금방 그칠 것 같았다. 산골짜기에 천천히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낮 동안 받은 빛들을 모아 둔 눈밭이 다가오는 어둠을 향해 다시 빛을 뿌렸다. 덕분에 해가 사라져도 달이 보이지 않아도 운동장이 훤해 보였다. 달도 뜨지 않는 추운 밤. 어둡지만 환한 아름다운 겨울 밤이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즘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고요한 풍경이 저절로 시를 불러왔다. 마음 속으로 더듬거리며 그렇게 시 하나를 읊었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제대로 외운 것이 맞을까 찬찬히 곱씹고 또 곱씹었다. 이 정도면 토씨하나 안틀리고 다 맞는 것 같아.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정지된 채 정신만 살아남은 시간을 선물받은 어느 소설 속 주인공처럼- 긴 시간 머릿 속에서 자신의 작품을 되새김질 하며 마침내 완성시키고, 그렇게 잔인한 신의 선물이 끝나고나서 이윽고 이어흐르게 된 시간 앞에서 비명을 지를 정도의- 길고 긴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 될만큼 오랜 시간 후에 선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찾아와줘서 고마워. "
선배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네 덕에 나도 나를 찾았어."
선배의 눈 안에 방황이 끝나가는 것이 보였다.
"생각 많이 했는데. 아무래도 이야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뭘요?"
"새가 알에서 태어나려면, 하나의 세계를 부수는 수 밖에 없다고 했잖아."
"소설 이야기 하는거에요?"
"그게........ 그러니까...."
떠듬떠듬, 말을 잇는 선배를 쳐다보았다.
"어렸을 때..... 내가 좀 많이 아팠었어."
어느 정도는 짐작했었다.
"사고가 크게 났었거든. 나는 그 기간이 기억에 없는데 정말 심각했었나 봐. 심장이 잠깐 멈춘적도 있었대."
선배가 내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에 대 주었다. 니트 안으로 흉터 자국이 잡혔다.
"이식받은 장기가 익숙해 질 때까지 약도 엄청나게 먹었고. 그래서 면역력도 엄청 떨어졌었고... 말그대로 살아있는 시체였지."
선배가 머뭇거리다가 내 시선을 피해 창 밖으로 고개를 다시 돌렸다. 나도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선배가 설명해주었던- 그래서 머리 속으로만 그려왔던 풍경이 이젠 너무도 익숙하게 내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낯선 풍경이, 이틀 만에 이렇게 익숙하게 다가 올 일 일까.
"서울 처자 아직도 안갔제?! 거기 있는가?!"
또, 이렇게 만난 지 이틀 밖에 안된 할머니의 목소리가 익숙해질 일일까. 나는 익숙해져버린 종점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웃음을 띄웠고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아아니 무슨, 번갈아가면서 감기를 앓아~!?"
종점할머니는 싸들고 온 청국장을 쾅소리나게 주방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괜찮아요 할머니-"
"뭔소리여 목소리가어제랑 다르게 팍 맛이 갔구만. 좀 만 기다려 내가 쌍화탕 좀 달여올테니-"
"아이고 할머니 진짜 괜찮은데...."
휑하니 사라지는 할머니를 따라 선배가 옷도 못 챙겨입고 만류하며 따라 나섰다.
나는 창가에 앉아 입김을 뿌리며 멀어지는 종점 할머니와 난처하게 서있는 선배를 쳐다보았다. 이틀 전, 내가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운동장을 뛰어다녔을 때, 선배가 딱 이 자리에서 나를 쳐다보았지. 유리창에 내가 뿌린 입김 만큼의 뿌연 안개가 뭍어났다. 그리고 글씨가 보였다.
기억났다. 그 겨울, 편입생이라 족보를 얻지 못한 우리는 나름 악에 차서 치열하게 학과사무실에서 늦게까지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난방도 제대로 안되는 낡은 학과 사무실에서 있는대로 껴입고 서로의 온기로 추위를 이기며 공부하다가 맞이했던 함박눈. 그 후로 몇 년이 지나도록 회자되었던 그 해의 기록적인 폭설을 겪은 우리는 신이 나서 나가 뛰어놀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선배가 창가에 서서 그런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유리창에 무언가 끄적이면서. 나중에 입김을 불어 확인해보니, 선배는 짧은 시를 유리창에 써 놓았었다.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우리는 동시에 개가 되었다며 깔깔거렸다. 아니지, 너희는 다 꽃씨가 된거지. 한 겨울 눈밭에서도 꽃을 피우는. 선배가 반박하며 미소지었었다. 나는 그 때의 그ㅡ 선배의 미소를 따라하며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너는 누구니?
처음 보는 싯귀다. 나는 뒷구절이 더 있나 싶어 입김을 한번 더 불어넣었다. 아무리 입김을 불어도, 뒷 구절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너는 누구니?
천천히 사라지는, 유리창 위에 새겨진 낯선 필체의 다섯 글자와 물음표 안에 되돌아오는 선배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추운지 으스스 어깨를 떨며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그렇게 선배는 조심스레 총총 걸음으로 돌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너른 어깨 아래 단단하게 자리한 가슴을 따라 니트의 주름이 허리춤까지 그림자를 만들었다. 손 끝에 자잘하게 잡히던 선배의 흉터자국이 떠올랐다.
너는 누구니?
나는 재빨리 가방을 찾아 그 속에서 회색 벨벳 커버의 다이어리를 꺼냈다. 어디쯤이었더라. 나는 사진이 붙여진 페이지를 찾아 급하게 휙휙 다이어리를 넘겼다.
또 다시 기억이 났다. 우리를 눈 밭에서도 꽃을 피우는 꽃씨들로 만들어줬던 그 겨울이 지나 뜨거운 여름이 찾아왔을 때, 그때도 학과 사무실에 모여 땀 흘리며 공부하고 있었다. 낡은 학과 사무실은 겨울에 히터가 없었듯이 여름에도 에어컨이 없었다. 더위에 지쳐 공부고 뭐고 다 때려 치우자며 무작정 선배의 차를 타고 떠났었다. 능숙하게 차를 운전하며 다른 후배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선배가 우리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서해바다였다. 모래사장에서 작은 꽃게를 잡아 올리며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던 선배. 바닷물에 젖어 온 몸에 달라붙은 치렁치렁한 윗옷을 벗어들고, 이 쪽을 향해 총총 걸음으로 뛰어 왔었다. 그리고 옷을 말리는 동안 선배는 미어터지는 바닷가 민박집에서 쉐프라해도 믿을만큼 완벽한 손놀림으로 우리에게 기적의 김치볶음밥을 직접 만들어줬었다.
더듬거리는 손으로 사진 속의 선배를 훑었다.
너는 누구니?
그때 선배의 가슴팍에 흉터같은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