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lection #01 ------------------------------------------------------------------------
싸늘한 공기. 두 겹 세 겹으로 분열하는 시선에 잡히는 모든 것들이 아득하다. 어느새 고개만 쏠리면 감기는 두 눈. 힘들다. 잘 수 없다는 건.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도 있다던데. 이게 무슨 팔자에도 없는 셀프고문이란 말인가. 인간의 본능 중 가장 참기 힘든 게 수면욕이라던데. 그 다음이 식욕, 그리고 성욕. 그러니까 나는 인간의 가장 힘든 본능을 이겨내고 있는 거야. 장하다 한소라.
-산 중턱에서 보는 달은 여기 서울에서랑은 비교가 안 돼. 진짜 크고 선명해서 손을 뻗으면 잡힐 거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니까.
-선배 말은 전부 다 진짜 같아요. 신기해.
-내 말은 전부 다 진짜인데...
-언제 그렇게 많은 걸 보고 듣고 겪을 수가 있어요? 선배는 혼자서 시간이 48시간 정도 되나 봐.
-내가 잠이 별로 없거든. 난 한 4시간 정도만 자면 괜찮아.
-와 어떻게 잠을 4시간만 잘 수 있어요? 안 졸려요?
까딱하다간 버스를 놓칠까 봐- 나는 낯선 도시, 낯선 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번호의 버스를 기다리며 쏟아지는 잠을 물리치려 애쓰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mp3 볼륨을 높여보려는 찰나, 음악이 뚝 끊겼다.
"어라 뭐야 이거 왜 이래..."
하긴, 거의 10년을 안쓰던 mp3가 몇 시간이라도 돌아간 게 용하지. 혹시나 싶어 충전해보니 불빛이 들어오길래 신기해하며 틀자마자 그 시절 듣던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밤새 일기장을 읽고 어느샌가 머릿 속으로 저절로 그려놓았던, 그 모양 그대로 따라 나와 이곳에 서 있는 지금 내 모습이 웃겼다.
이건 미친 짓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야.
나는 발치에 놓인 보라색 캐리어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는 1시간 뒤에 서울역 앞에서 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버스를 타야 한다. 짐을 싸들고 은행에 들렀다가 공항가는 버스를 타야지 하고 집을 나섰는데 , 왜 이렇게 갑자기 노선을 틀어 놓고 낯선 길 위에서 사서 고생 중인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귓가에 흐르던 음악들 때문이었을까. 꺼져버린 mp3를 내려다 보다가 아직까지 비행기표를 취소시키지 않은 게 생각나서 나는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생각보다 환불 수수료가 많이 나지 않았다. 성수기라 그런가.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나는 고민하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다음 비행기 시간을 검색해보았다. 잘하면 오늘 내로 바로 공항에서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졸음 반 고민 반 섞인 한숨을 내뱉다가 문득, 귀가 심심한 생각이 들어 나는 음악앱을 켜고 mp3에 있던 곡들을 하나하나 스트리밍시키고 이어폰을 귀에 다시 걸었다.
-선배 저 스마트폰 샀는데 볼래요? 이거 mp3 완전 좋아요 차원이 다르대요!
-오 신기하네. 와, 폰 되게 이쁘다.
-선배도 폰 오래 됐잖아요. 이걸로 바꿔요. 음악듣는 거 좋아하잖아요.
-음... 난 괜찮아.
-왜요, 한 번 들어봐요.
-음악은 음악기계로 듣고 싶어서.
-걍 아무거로나 들으면 되죠... 선배는 참 특이해...
나는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에게 강추하는 폰이라고, 매장 직원의 말에 홀려서 고민 끝에 새로 장만한 건데... 선배가 일주일 전부터 듣고 다니던 에픽하이의 노래들을 몇 곡을 추려 넣었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은 중얼거림에서 뺐다. 이것도 거절이라고 조금 서운했다.
-특이하다니. 사실 난, 거추장스럽지만 않다면 휴대용 cdp로 음악 듣고 다니고 싶은데. cd가 음질은 좋은데 휴대성이 나빠서 그게 아쉬워.
-그렇게 들으면 달라요?
-다르지. 씨디가 다르고 테이프가 다르고 MP3음원이 다르고. 씨디나 엘피판도 계속 듣던 거랑 새거랑 또 다르고. 아, 이어폰하고 헤드폰도 듣다보면 정말 달라. 한 번 들어볼래?
선배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음악이, 귀가 아니라 여기서 들려.
그리고는 가방에서 헤드폰을 꺼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커다란 헤드폰을 MP3에 연결하고 내 귀에 직접 걸어준 뒤- 조심스레 음악을 틀고 다시 나와 눈을 맞추는 선배의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시간의 상대성 이론이란 게 이런 거구나. 짧은 몇 초의 시간이 내 숨을 잡고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처럼 천천히 흘렀다. 나는 부끄러워져서 선배의 눈을 피한 채로 고개를 돌리고 두 손으로 조심스레 헤드폰을 잡았다. 음악이 선배의 말대로 귀 에서만 들리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양 쪽 귀 끝에서, 내 등 뒤에서, 머리 위에서 울리는 음악들이 심장에서 만나 쿵쿵 거렸다. 꼭 내 몸 자체가 스피커가 된 것 같았다. 신기한 느낌에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선배를 쳐다보았다. 그런 나를 보며 선배는 슥슥, 내 앞머리를 헝크러뜨리며 웃어주었다.
그해 내내 새로 장만한 휴대폰을 두고 고집스레 mp3로만 음악을 들으며 학교를 다녔다. 선배가 보란듯이 일부러 보는 앞에서. 늘 음악을 듣던 그 사람을 따라 하며 이것저것 알은체를 해보아도 그 해박한 음악 지식에는 발 근처도 가지 못했지만 – 그렇게 음악 듣는 방식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세상에 유일하게 닿아 있는 사람처럼 마음이 뿌듯했었다.
플레이리스트에서 첫 번째 곡이 끝나고, 그 곡을 따라 흐르던 추억도 거기서 멈췄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서 떼고 앞머리를 슥슥 훑었다. 이마에 닿았던 기다란 선배의 손가락이 따뜻했는지 차가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류소 화면에 내가 타려던 낯선 버스의 번호가 크게 깜빡였다. 잠시 후 ***번 버스가 도착합니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라.
언젠가 편입생들 모임에서 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 목소리가 일기장 한가득 써 있었다. 여행 시작부터 듣던 노래 가사들이 가득 적힌 페이지 옆에. 이어폰 줄을 mp3에 둘둘 감아 주머니에 넣고, 반대편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도로 저 끝에서 내가 기다리던 번호의 버스가 나타났다. 낑낑대며 캐리어를 들고 버스에 탄 나는 텅 빈 버스 안을 휘 둘러보고는 바로 기사님 뒷자리를 택했다. 행여 내가 졸더라도 종점에 닿으면 알아서 깨워주실테니. 이것도 선배가 알려준 방법 중 하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안식처가 필요해. 그래서 나는 그걸 여러 개 만들어 놨어. 많을수록 도움이 되니까.
-목적없이 무작정, 훌쩍 떠나는 게 좋아. 낯선 곳 낯선 버스정류장에서 낯선 번호의 버스를 기다리는 거. 그만큼 불안하면서도 설레는 게 없더라고. 안 어울리는 두 단어가 심장 안에서 부딪히는 느낌이 좋아. 사실, 세상 모든 것들이 양면적 모습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어. 누구나 낯선 내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무작정 떠나는 작은 여행 속에도 세상 모든 것에 존재하는 양가적 진실이 숨어있다는 게 멋있지 않니?
그래 지금 나는 미친 짓을 하는 게 아니라, 선배의 말대로 잘 살기 위한 과정을 택한거야.
첫눈이 제법 펑펑 내렸는데 그 이후로는 생각보다 눈은 별로 안 오고 춥기만한 겨울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런 산 속 마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한 겨울 내내 내린 눈을 녹이지 않고 쌓아둘 것만 같은 하얀 풍경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저 속에 얼마전 펑펑 내린 첫눈도 섞여있을까. 겨울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어쩌면 봄이 오고 나서도 한참을 이 산 속엔 첫눈이 쌓여있을 지도 모르겠다. 초겨울 산 속 이란 것을 증명하듯이, 마을 초입에 들어섰을 때보다 조금 더 진해진 햇빛은 산그늘 밑으로는 조금도 따스함을 나눠주지 않겠다는 듯 버스가 다니는 길 위로만 가늘게 빛을 쏘아 주었다. 돋보기로 햇빛을 몰아받는 흰종이 위의 개미처럼, 버스는 힘겹게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미 헐벗은 나무들과, 한겨울에도 초록빛인 나무들이 얼기설기 모여 눈이불을 덮고 있었다. 차가 올라가는 길 옆으로 낮은 개울이 하얗게 얼어있었다. 여기가 선배가 헤맸던 산골짜기가 맞을까?
-그 날은 마음이 너무 지쳐서, 지방 어느 도시로 떠났다가 여행계획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서울에서 처럼 버스를 탔어. 그날은 정말 무작정이었던거 같아. 그런데 그만 버스 안에서 잠들어버렸지 뭐야.... 비몽사몽 어딘지도 모르고 내리고 보니 산골짜기 종점이었어. 산촌 작은 마을이라 버스가 몇 대 없었고. 내가 내린 버스는 막차였고. 덕분에 집에 돌아올 때 애를 좀 먹었지. 동네분이 시내로 나오는 길에 태워주지 않으셨다면 꼼짝없이 산골짜기에서 노숙할 뻔했어. 그 다음부턴 무전여행을 떠나도, 한 번 들리고 말 곳도 무조건 버스 번호랑 운행시간표를 메모하면서 다니게 되더라고.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산골짜기에서 한참을 헤매다 내려왔는데 얼마나 무섭던지.
-산 속이라 가로등도 없고 사람도 거의 없을텐데. 진짜 무서웠겠다.
-그렇지. 그런데 산 속을 나와도 마찬가지더라. 깜깜한 한밤중에 낯선 도시 한가운데 어정쩡하게 떨어지니까 그것도 똑같이 낯설고 무서운 거야. 서울행 버스표를 손에 쥐고 나서야 맘이 놓였어. 한참을 손 안의 표를 쳐다봤던 거 같아. ‘서울’ 그 두 글자가 이렇게 다행일 일이냐고. 외롭다 힘들다 가타부타 말이 많아도 결국 익숙한 나의 삶 한자리가 그리워지고 말아서 뭔가 ‘내가 졌구나’ 이런 맘도 들고. 그런데 그게 서글프면서도 행복한 느낌이 들었어. 신기하지?
나도 선배처럼 이렇게 낯선 골짜기를 헤매고 나면, 내 힘든 삶의 자리가 그리워지게 될까. 서글프면서도 행복한 느낌이 들게 될까.
산골 마을을 돌고 돌아 온 버스는 나를 종점에 내려놓고 떠났고 나와 함께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커다란 배낭을 매고, 그 옆에 캐리어까지 하나 끌고. 내던져지 듯 버스에서 내린 나는 휭한 바람을 맞으며 그제야 제대로 잠이 깼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정말 완벽한 산 중턱이었다. 선배의 말대로 커다란 나무 중간에 도끼 자국이 난 듯이 자리한 작은 버스정류장.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없이 지나쳐 온 산길 중간 중간에 보이던 정류소들과 달리 여긴 그래도 종점이라고 버스가 돌아설 수 있게 작은 공터 같은 공간이 있었고, 거기에 조그많게 자리 잡은 지붕있는 정류장도 있었다.
"으이, 왜 안왔댜아- 아가씨, 아가씨 빼고 차 안에 아무도 없었지?"
산세를 향해 360도로 시선을 빙 돌리며 막막함을 없애려 애쓰던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버스정류장 안에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 안에서 튀어나온 하얀 머리를 쪽진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걸고 있었다. 아니 이 할머니는 얼마나 작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는 대한민국 평균 키를 가진 내가 이렇게 한참을 내려다 봐야하는거야. 진짜 귀여우시네. 웃음이 났다.
"네. 저 혼자였어요"
"차를 놓쳤는가...?"
할머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2G 휴대폰이었다.
"그니까... 뭐냐... "
휴대폰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던 할머니는 다시 나와 시선을 맞추더니 거침없이 계속 말을 걸어오셨다.
"이봐요 아가씨. "
"네?"
"여기, 우리 손녀딸 번호 좀 찾아줘"
다짜고짜 폰을 들이대는 할머니의 거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까맣게 탄 투박한 손 마디마디가 빨갛게 얼어 곱아있었다. 손끝에 하얗게 일어나 있는 각질이 마음을 찔렀다.
"우리 손녀딸이 방학이라고 친구들 데리고 온다고 했는데 왜 안오는 지 몰겄어"
"아... 전화번호 저장해놓으셨어요?"
"응, 저번에 와서 뭐 번호 찍어줬는데 나는 잘 몰러- "
"손녀딸 이름이 뭔데요?"
"혜원이. 정혜원이-"
"정혜원..."
낯선 2G폰을 잡고 있자니 나도 헷갈렸다. 스마트폰을 쓴지 10년 남짓 되었을까, 어느새 2G폰은 쓰기 어려운 폰으로 변해있었다.
"찾았어요 할머니. 여기요, 통화버튼 눌러 드릴께요"
"어이구 역시 젊은이들이 달라 달라, 고마워요~"
두 손을 휘저으며 반가워하는 할머니께 휴대폰을 넘겨드리고, 나는 가방에서 낡은 다이어리를 꺼냈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1시 10분. 정류장에 붙어있는 버스시간표를 쳐다보았다. 첫차 시간이 7시. 막차 시간도 7시.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강산이 서너번은 더 바뀌어도 이 마을로 들어서는 마을버스 시간표는 변하지 않을 거라더니. 10년은 아직 못채웠지만 어쨌든 선배의 말이 사실이었다. 나는 펜을 꺼내 다이어리 속 선배가 이야기 해주었던 강원도 산골마을 ***번 버스의 종점 옆에 버스시간표를 적었다. 첫차와 막차 사이에 3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있었다. 달칵, 볼펜의 심지를 누르며 나는 깨달았다. 늘 무언가 메모하는 습관. 이것이 선배에게서 내게로 꽃씨처럼 날라온 것이었구나.
-아날로그의 좋은 점이 뭔지 알아?
-음... 있어 보인다는 것?
-정답이네!
-너무 쉽잖아요
-그리고 또 있어. 디지털 기기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치를 잃게 되지 않는다는 것.
-그런가.
-디지털은 계속 변하니까... 이젠 플로피 디스켓도 못 쓰잖아. 그런데다가 저장해버리면 나중에 진짜 못 보게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이렇게 노트에 펜으로 적어두면 내가 죽기 직전에도 쉽게 볼 수 있지.
-그것도 있어 보이는 거네.
-그러게.
내가 죽기 직전까지 이걸 보관하고 있을까? 버스 시간을 옮겨 적으면서 나는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젊은 시절 여행했던 어느 시골 마을의, 하루치 할당량이 달랑 5대인 버스 시간표를 손에 꼭 쥐고 운명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니 이게 뭔 엉뚱한 상상인가 싶어 웃음이 터진 것이다. 이왕 운명하면서 마지막으로 되새길 거, 버스 시간표에 추가 정보 하나 더 넣어볼까. 나는 그 옆에 빨간펜으로 화살표를 그린 뒤, 버스 정류장을 조그맣게 그려 넣었다. 그리고 메모를 하나 더 추가했다. '종점 밑으로 조금 내려가면 예전엔 없었다던 슈퍼도 생겼음!' 그리고 빨간 밑 줄 쫙쫙, 별표 세 개 추가.
-넌 진짜 엉뚱해. 꼭 빨간머리 앤 캐릭터 같다.
-칭찬인가?
-칭찬이지.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머리앤, 이쁘지는 않지만... 어 딱 너네?
-뭬이야?!
-이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 어 잠깐, 아닌 거 같은데?
-선배!!!!!!
삶에 지쳐 잊고 살았던 스무 살 무렵의 기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다이어리 속에도 없었던 자잘한 추억들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다 꽁꽁 숨어 있었던 건지. 차가운 산 속 공기가 내 안으로 밀려와 숨쉬기가 어려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벅찬 기억의 온도 때문에 호흡이 흐트러졌던 건 가봐. 마음이 따뜻해졌다. 옷을 든든히 입은 때문이 아니라, 되살아난 따뜻한 추억들 덕에 이 속이 따뜻해져 왔나 보다.
"좋아... 이제 폐교를 찾으며 되는데..."
커다란 두개의 산 - 침엽수와 활엽수가 자로 그은 듯이 반반인 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운동장을 가진 작은 시골마을 폐교. 나는 다시 한번 산세를 훑었다. 뭐야, 나무들이 전부 반반으로 섞여 있는데? 당황한 나는 다이어리로 시선을 내렸다가, 종점 밑에 있는 슈퍼로 내려갔다. 이런 시골하고 안 어울리게 온장고도 보이고 나름 깔끔해보인다 싶었는데,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 안은 역시나 가정집과 술집을 겸업 중 임이 분명해 보이는 것이 어느 시골에나 있음직한 분위기의 가게였다. 사람 좋아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문소리가 들리자 안쪽에서 티비를 보다가 비죽이 몸을 반만 내밀었다.
"음? 처음보는 얼굴이네?"
"아... 여행 왔어요. "
"이 한겨울에 아가씨 혼자?"
"네.... "
"거참, 이 산골에 뭐 볼 게 있다고. 아 낼모레 뭐 저 짝에서 겨울농장 문 연다던데 그것 땜에 왔는가?"
"아뇨ㅡ 저는 누구를 좀... 찾느라고...."
"뉘집? "
"저기... 이 마을에 폐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옛날에 초등학교 분교였는데, 거기..."
"아, 저 짝 산 중턱에 말하는 건가? 거기 폐교 허문지가 언젠데- 거긴 왜 찾는데?"
"허물었다고요?"
"그러치. 벌써 몇 년 됐는데?"
아.... 그러면 안되는데...
"요새 젊은이들은 왜 그렇게 폐교를 찾아. 그 서울 총각도 그렇게 폐교 폐교 노래를 부르더니."
서울 총각? 나는 눈을 반짝이며 아줌마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내가 반색을 하자 아주머니는 손을 정류장 쪽 산 중턱으로 휘휘 저으며 가르키는 시늉을 했다.
"몇 년 전에 서울서 온 총각인데, 그 전부터 들락날락하긴 했고... 터 잡은 건 몇 년 안 돼. 암튼 여기서 뭐 뭐 할거라나. 자세히는 몰라. 가끔 서울 친구들도 오고. 우리 동네에 뭐 주말농장 이런 거 생긴다고 막 타지 사람들 들어서긴 하던데 그 총각도 그런 친구지 뭐.“
"아, 혹시 그 서울 총각이요..."
"그런데 그 서울 총각 봄가을엔 와서 사는데 지금은 없어"
질문을 하기도 전에 돌아온 대답에 맥이 쪽 빠졌다. 그래, 아무래도 이 방법으론 아니지. 동창들 통해 알음알음 추적하는 게 맞는 방법이지. 대화의 목적을 잃은 나는 몸을 돌려 아쉬운 표정으로 온장고에서 두유를 꺼냈다. 반대로 아줌마는 이제야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가게 밖으로 슬리퍼를 신고 나오며 계속 알은체를 해왔다.
"둘이 무슨 사인데?"
"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 뭔데...“
”아이구 답답혀라“
가게문이 드르륵- 열리며 아까 그 버스 종점에 있던 할머니가 휴대폰을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친한 사이인지 가게 아줌마는 손을 들어 반갑게 아는 척 인사를 건내려하는데, 할머니는 아랑곳없이 휴대폰만 쥐고 계속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통화가 안된디야..."
"할매 전화 그만 좀 해요. 내가 몇 번을 말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버럭 화를 내는 가게 아줌마에 깜짝 놀라 나는 주춤거렸다.
"웜마? 아까 그 아가씨네- "
"아는 사이에요? 난 이 아가씨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도 아까 정류장에서 봤어. 맞다, 아가씨 누구여?”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내게로 향하는데 딱히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설명할 자신도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냥 머슥하게 웃으며 대답을 미루는데, 할머니가 박수를 딱 쳤다.
"최씨네 손녀인가?! 그 최씨네 아들 지금 와 있든디."
"최씨네는 아니여, 이 아가씨는 그 서울 총각 찾아왔대-"
"아 서울 총각?"
"그 총각 근데 봄가을에만 살짝씩 왔다가잖아요."
"아니 겨울에도 가끔씩 오는디"
"그런가? 그렇게 띄엄띄엄 올 거면 왜 집은 사놨대?"
"산 게 아니라 빌린 겨, 몸이 아직 안좋은가..."
"저기..."
서울 총각에게로 화제가 옮겨진 대화 속에 도저히 끼여들 틈이 없다;;
"아아 맞다. 수술하고 휴양 온 거였다고 했지. 맞다맞다."
"아니 수술은 어렸을 때 했다 그랬어~ 그때 왜 옛날에 이장네 사랑방에도 한참 머물고 그랬었자네."
"하긴 어딘가 좀 허술한 게 아팠던 사람 같긴 해. 그치?"
"사람만 좋구만 뭐가 허술해. 엄~청 똑똑한 사람이여~. 서울에 있는 대학교도 합격하고 그랬다했어~"
"오오, 그랬구나. 어쩐지 총각이 엄청 말을 잘하더라. 컴퓨터도 잘하고. "
"근디 합격하면 뭘 해. 아파서 학교는 근처도 못가봤다 하드라고. 아깝게...쯧쯧."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군.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없이 이어졌고 뻘줌하게 두유병을 들고 서 있던 나는 얼른 지폐 한 장을 두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대화 속에 끼어들지 않고도 궁금한 건 대충 얻어 걸렸고, 이 산골짜기 버스정류장은 그냥 내가 방황하는 길 중 하나로 끝날 듯 했다. 따뜻한 두유를 핫 팩 삼아 두 손을 녹이며 버스정류장을 향했다. 막상 나오니 막막했다. 다음 버스가 오는 시간은 오후 4시. 세 시간 가까이 뭐하고 있는다... 손 끝에서 식어가는 두유병을 만지작거리며 버스 종점에 앉아있는데 아까 그 할머니가 다가왔다.
"서울 총각 친구여?"
"음... 아마도요? "
대답하기가 애매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그 학교는 다 허물어서 무슨 회사에서 건물 짓는다던데- 짓는다짓는다 말만하고 몇 년 째 그대로여. 그 근처에 뭐 선생님들 지내라고 지어놓은 관사가 있었거든. 서울 총각이 거기 빌려서 왔다갔다 하드라고"
저기 할머니 그 서울 총각은 아무래도 내 지인이 아닌 것 같은데요;;; 튀어 나올 뻔 한 말을 삼키고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볼텨? 즈 좀만 올라가면 되는디."
"아... 아뇨, 안 계시다고 하니까..."
"잘하면 서울 총각 와 있을 수도 있어, 홍길동인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왔다 갔다 하더라고"
의도치 않게 훔쳐 들은 대화 속 서울 총각은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니다. 고로 이 마을도 선배가 말한 그 마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입김을 길게 내뱉으며 정류장 뒤편의 높은 산을 올려다보았다. 허무한 내 맘과는 다르게 새하얀 눈에 덮힌 겨울 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산 중턱에서 보는 달은 여기 서울에서랑은 비교가 안 돼. 진짜 크고 선명해서 손을 뻗으면 잡힐 거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니까.
저 산중 어딘가에 선배가 말한 폐교가 있을 것 같았다. 커다란 달이 텅빈 운동장을 아름답게 비춰주는. 선배가 밤마다 자신의 창안 가득 채우고 싶어 했던 달빛이, 이 산골짜기의 달빛과 다를 이유가 없다. 어짜피 달은 하나니까. 다른 장소, 다른 시간이지만 결국은 같은 달을 보는 것이다.
-내 방 창 밖에 항상 그 달이 있었으면 좋겠어.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바로 할머니가 손을 잡아 끌었다. 어짜피 두세 시간 가까이 할 일도 없다.
시골 마을에서의 '조금'이 서울에서 말하는 '조금'이 아니라는 걸 내가 깜빡했다. 종점에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캐리어까지 하나 끌고 산골짜기를 향해 걸어 올라가느라 점점 숨이 가빠올 즈음이었을까.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돌아서려고 할 즈음 산중턱에 갑자기 커다란 공터가 나타났다. 딱 학교 운동장만한 크기의 커다란 공터였다. 그보다 조금 위에, 내가 산길을 따라 올라선 방향 반대방향으로 조그맣고 낡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일반 가정집처럼은 안 보였다. 어찌보면 창고같이 보이기도 했다. 옛날 스타일의 격자무늬 창문 사이로 난로의 연통 같은 것이 삐죽이 나와 있었다. 연통은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차갑게 얼어있는 듯 보였다. 아마도 사라진 분교의 선생님들 숙소로 지어놓은 건물 같았다. 운동장 끝까지 걸어가 앞에 펼쳐지는 산 아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커다란 산 두 개. 하나는 크고 하나는 조금 작은. 반은 초록빛 그대로고 반은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숭숭 드러난. 몇 개의 집들도 보였고 얼어붙은 개울도 보였다.
-운동장 한가운데 서면 바로 앞에 커다란 산 두 개가 보여. 오른쪽 산은 좀 낮고 왼쪽 산은 조금 더 높고. 거짓말처럼 반은 침엽수 반은 활엽수라서 색도 다르고 산이 참 특이했어. 그 밑으로는 얇은 개울이 흐르고. 집 댓개가 옹기종이 모여있었고. 근데 그 산골짜기 사이로 달이 떠오르면서 그렇게 산 아래 골짜기 마을을 비추는데 -그 흔한 가로등 불빛 하나 없이도 달빛 별빛이 집 하나하나를 비춰주는데- 순간 이게 현실 같지가 않더라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흰 눈을 걷어내고 햇빛 대신 침침한 달빛을 뿌리자 선배가 말했던 모습과 똑같아졌다. 긴가민가 싶어 다시 운동장 위 작은 집을 올려다 보았다.
- ....그런 곳에서 살고 싶더라. 평생 살진 못하더라도.. 잠시 잠깐 안식처가 필요한 때가 오면, 정말 너무 힘들 때가 오면, 이 모든 기계음 다 놓아두고. 훌훌 떠나서... 모든 거 다 잊고 그 곳에서 쉬고 싶어... 좀 게을러 보일 수도 있는데. 뭐 어때. 달콤한 게으름이란 말도 있잖아.
선배의 말을 들으며, 그의 그 삶속에 내가 녹아드는 상상을 했었지. 아주 잠깐.
-그 서울 총각 봄가을엔 와서 사는데 지금은 없어
정말 선배가 맞는 건가?
-아파서 학교는 근처도 못가봤다 하드라고. 아깝게...쯧쯧.
...아닌가?
"저기야, 함 가볼텨? 혹시 모르자녀."
운동장 끝에서부터 종종종 돌계단이 돋아나 이어져 있었고 돌계단 끝 집 입구에는 낮은 나무 대문이 걸려있었다. 처마 끝 모서리에 장작이 한가득 그림처럼 쌓여 있었지만 온기라곤 보이지 않는 풍경화 같은 집의 모양새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작정 찾아왔는데 막상 추억이 코 앞에 현실로 들어차니 조금 망설여졌다. 사람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누군가 있다해도 내가 찾던 선배일지도 모르겠고. 얼굴 한 번 보고도 낯선 사람이다 알아채는 사람 몇 안되는 동네에서 십 년 넘게 왕래하는 사람의 정보를 잘못 알리도 없을 것 같고. 애매하다.
"아, 아니에요. 보니까 사람 없는 것 같은데요.
"아쉬워서 어쩐대"
"괜찮아요. 집 알았으니까 다음에 오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해요 할머니-"
"잉, 그랴. 도로 내려갈텨?"
"네, 천천히 내려갈께요."
"그랴 그럼 구경하다 내려와. 여기가 터가 좋아서, 산 아래 구경하고 있으면 시간이 후딱가. 저 마을 농장 놀러오는 사람들이 여름에는 막 여기 그 자동차 끌고 와서 텐트치고 불도때고 막 그러다 가기도 하고 하니께"
"네, 감사해요-"
"천천히 둘러보고 내려와요잉"
저 작고 굽은 몸으로 어떻게 이런 가파른 산길을 잘 다니시는 건지 신기해 할 틈도 없이 눈 깜짝 할 사이에 할머니는 눈 앞에서 사라졌다. 평생 걸어다닌 동네여서일까. 지금 걷는 길이 이 계절 이 시간이면 무른 상태인지 얼은 상태인지 전부 다 데이터화 되어 몸 속에 이미 인식되어져 있는걸까. 어떻게 발을 디뎌야할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쉽게 쉽게 길을 걷는 할머니가 부러웠다. 나도 저 정도의 나이가 되면, 내 삶을 걸어가는 길이 좀 저렇게 거침없어질까. 아니, 내가 살아온 서울이란 도시는 너무 크고 힘들어서 이런 작고 이쁜 산골에서의 걸음걸이로는 쉽게 걸어나갈 수 없을 수도 있다. 도망쳐 온 나의 현실들이 떠올랐다.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모른 척하는 걸 거야
젖어 있는건지 건조한 건지 모르지만 그 말은 위안도 되고 슬픈 자극도 되었다.
-내가 같잖고 꼴깝떠는 거 같죠.
-아니.
-세상에 제일 재수없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에 대해 떠들어 대는 거라고 했는데. 내가 잘난거라고는 생각 안하지만 나름대로 힘들었는데... 안 그럴려고 애써도 자꾸 짜증이 나요. 자꾸 티내는 것 같아서 싫고.
-알지, 너 힘든 거 다 알아.
-난 내가 살아오면서 힘들고 그럴 때마다 금방금방 짜증내고 화내고 싸우고 스트레스 안받게 다 해소시켜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 속에 쌓인게 있었나봐요.
-잘하고 있었네. 장하다.
-내가 너무 애같죠?
-아냐. 이해할 수 있어.
-선배가 어떻게 알아요. 선배는 집도 잘살고 공부도 잘하고 부모님한테 이쁨도 받고....
-소라야,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 저마다, 부피는 달라도 질량은 같은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거든.
토닥토닥, 선배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 너의 고통이 같잖다는게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진 최대치의 고통이 얼마일까, 내 통증에 빗대어 너의 아픔을 짐작할 수 있다는 거지.
-그렇죠...
나는 한숨을 폭 쉬었다.
-나도 이런데, 엄마는 내 나이 배도 넘게 살아오면서 그 속에 얼마나 쌓였을까, 생각은 해요. 아니 그래도 너무하잖아. 나도 우리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공부 잘하는데. 오빠만큼은 아니어도 진짜 잘 할 수 있는데. 나도 공부 더 하고 싶다고요. 나는 학교다닐 필요도 없는 존재인 것 처럼... 적당히 하고 졸업이나 하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돼. 너는 너대로 아주 잘하고 있잖아. 이렇게 편입하고 잘 적응하고.
-우리 엄마는, 나는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닌 거 같아. 그런게 있대요. 똑같은 자식들이어도 부모가 너무 힘들면 어느 한 자식을 몰아서 이뻐하고 다른 자식을 몰아서 미워한대요.
-.....우리 소라가 속에 쌓인 게 너무 많았네...
-이미 저 아이에게 나보다 더 잘해주고 있으면서 왜 나를 이렇게 미워하나,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않대요. 너만 아니면 이 아이에게 그 몫까지 더 잘해줄 수 있는데, 하고 미워지는 거래요.
-아이고, 우리 소라 너무 취했다. 이제 그만 마셔야겠네.
-아, 나 술취해서 우는 거 진짜 꼴불견인데 내가 그러고 있네... 훌쩍.
-술기운 빌어서 우는거지, 언제 속 시원히 울어보겠니. 실컷 울어. 괜찮아. 술잔만 내려놓자. 내일 알바 일찍 나가야한다며.
-고마워요 선배. 선배 아니었음 난 진짜 어디다 하소연을 하나... 선배 군대가면 나 이제 어떻게 하죠?
-걱정마. 네가 찾아오면 언제든 위로해줄께. 지금처럼.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 저마다, 부피는 달라도 질량은 같은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거든.
선배의 그 말은 취중에도 너무나 또렷히 기억에 남아서, 추억의 일기장을 들추기 전부터도, 내 맘 속에 이미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누구나 외롭고, 누구나 자신만의 힘듬이 있고 아픔이 있다. 내 아픔이 보잘 것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이 같잖다는 게 아니라, 모두가 맘 속에 각자 저마다의 아픔들을 품고 산다는 걸. 나는 그렇게 선배의 말을 이해했고 좌우명처럼 받아들였다. 나는 그렇게 쿨하고 관대하게 내 삶의 무게를 버텨내려 애쓰며 살아왔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적이니까. 나는 지금 다시 한번 이기적인 인간이 될꺼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것 같이 무겁기만 한 마음으로는... 그저 우울할 뿐이다. 너무 답답해서 가슴이 외려 삭막해져 버리면 차라리 웃게 되는 게 사람 심리겠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 당할 수 없는게 사람 마음. 그 속마음. 난 어쩔 수가 없는거다. 그저 제대로 이해당하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 다는게 생각보다 어렵고 대단한 일이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시 한 번 운동장 아래 산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선배가 이야기했던 이 산골 마을의 풍경은 한여름이었다. 눈 앞에 보이는 하얗고 추운 풍경 속에서 겨울의 이미지를 지워가며 하나하나 바꿔 그려보았다. 새하얀 눈이 녹아 한여름 계곡물이 되어 흘렀고, 눈 앞 가득 빼곡하게 들어찬 자연스럽고도 선명한 진초록의 나뭇잎도 보인다. 그 삼림의 그늘이 느껴져 뜨겁게 쏟아지는 한여름 햇살도 마냥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렇게 기분 좋은 따스함이 한가득 내 몸 위로 쏟아졌다. 내 발가락 끝까지 따스한 입김을 불어주는 햇살의 감촉. 그대로 운동장에 대자로 누워 한참 동안을 늘어져 푸른 나무들의 숨소리와, 매미소리를 들었다.
-산속의 매미는 도시의 매미와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지. 나뭇잎 사이사이에서 아주 기분 좋게 울어대는데, 도시의 시끄러운 소리들 틈바구니에서 악쓰듯 울어대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야. 자기 스스로도 애처롭고 처절해서 결국엔 자괴감이 들 만큼 빼액대는 서글픈 본능같은 건 없어. 자연의 형상에 고스란히 맞추어 아름다운 도형의 각 꼭짓점에 위치한 것 처럼 셀 수도 없는 여러 마리가 그렇게 여러 곳에서 울거든.
그 꼭짓점과 꼭짓점들은 같은 도형 안에 위치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도형의 것이 되기도 하면서 그렇게 이 산 속으로 은하수 별빛처럼 수도 없이 많은 도형을 그리며 차분히 내려 앉았고, 놀랍게도 그 수많고도 다른 도형을 이룸으로써 그 자체가 멋진 악보가 되고 또 그 악보의 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그 사이사이엔 또 다른 음표의 도형이 보였다. 시원한 초록나무의 숨소리, 사랑스런 햇살의 따스함, 재잘거리며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손 끝 발 끝이 시려오면서 다시 한 여름 풍경 속으로 흰 눈이 내려 앉았다.
"선배가 말한 것과는 전혀다른 풍경인데 그래도 좋네요"
선배가 없으면 어때. 어쩌면 나는 선배를 찾겠다는 마음보다는, 이 풍경이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첫사랑은 못 찾았어도 그 추억은 되찾았지 않은가. 나는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음악을 틀었다. 그 시절 음악들이 귓가에 울리자 마음이 곧바로 따뜻해졌다. 운동장 입구에서부터 지그재그로 눈밭을 가로질러 온 내 발자국을 따라 시선을 주었다. 발자국으로 이어진 점선 끝에 두텁게 쌓인 눈 밭으로 포옥 들어가 반쯤은 가려있는 빨간 운동화가 보였다. 언제던가, 선배가 이쁘다고 해줬던 빨간 캔버스. 역시 한겨울에 신기엔 좀 춥지. 양말을 두 겹이나 신었는데도 발이 시렸다. 더구나 이렇게 눈밭에서 신기엔... 하지만 이미 젖어 버린 거. 나는 음악에 발걸음을 맞추며 제멋대로 걷기 시작했다. 빨간 운동화가 타임머신이라도 된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그 시절의 내가 되어 까불거리는 걸음걸이를 하고 있었다. 어느 동화책에 나오는 소녀처럼 춤이라도 출 모양새로. 음악을 들으며 한참을 그렇게 눈밭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 위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울과는 비교도 안된다는 커다란 달을 못 본게 아쉽지만- 이렇게 파란 하늘을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어서, 그 강렬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이 좋아서 나는 빙그레 웃음을 띄웠다. 손 끝에 닿을 달도 없는데, 나는 빈 낚싯대를 드리우듯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라앉는 마음. 사소하고 가볍게 느껴지는 오히려 즐길 수도 있는 작은 감정의 언짢음들. 마음을 멈추는 건,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
그렇게 계속 제멋대로 풀어져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의 꼬리잡기를 이어가다가... 간신히 그 생각 중 하나를 잡아냈다. 배고파. 이제 그만 일어나서 내려가야겠다. 버스 시간이 다가 온다. 정신 차리고 현실로 돌아가야겠다. 일단 버스 타고 시내로 나가면 서울 가는 버스고 뭐고 간에 뭐 따뜻한 거라도 사 먹어야지.
- 외롭다 힘들다 가타부타 말이 많아도 결국 익숙한 나의 삶 한자리가 그리워지고 말아서 뭔가 ‘내가 졌구나’ 이런 맘도 들고. 그런데 그게 서글프면서도 행복한 느낌이 들었어. 신기하지?
선배가 했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처음 보는 낯선 번호의 버스를 타보는 것. 이렇게 낯선 곳에서 내가 도망쳐 온 나의 현실을 되돌아보는 것. 나의 현실을 객관화 시켜보는 것. 차곡차곡 마음이 정리되었다.
몸을 일으키는데 순간 내가 헛 것을 본 건가 했다. 운동장 입구 쪽에 누군가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두 손으로 부비고 나서 눈에 힘을 주는데, 키가 꽤 커보이는 젊은 남자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었더라. 민망해져서 내가 한 행동들을 되짚어보았다. 한참을 누워있었고, 그러다 추워져서 벌떡 일어났다가, 음악을 들으면서 허부적허부적 이상하게 걸었겠지. 그러다 다시 또 갑자기 벌러덩 누워서 하늘을 향해 손짓을 하고...
나는 벌떡 일어나서 몸에 뭍은 눈을 털기 시작했다. 이 동네는 보이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나타났다하면 종점에서 만났던 할머니 처럼, 그 할머니의 서울 총각이 홍길동처럼 하듯이 번쩍 하고 갑자기 나타나 버리는 이상한 곳이다. 툭툭 눈을 털어내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다시 운동장 입구에 서있는 남자를 보았다.
검은색 터틀넥과 꽤 두꺼워보이는 오버핏 후드코트. 무채색으로 휘감은 온 몸에 꼭짓점처럼 콕 찍혀있는 빨간색 비니. 심장이 순간 멈추는 것 같았다. 긴가민가하며 한걸음씩 다가서자 그가 점점 눈에 들어왔다.
훤칠한 키. 작고 동그란 얼굴. 긴 팔다리. 멈춘 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가까이 갈수록 작고 동그란 얼굴이 점점 눈에 들어왔다. 살짝 위로 빗겨쓰는 비니 덕에 어정쩡하게 보이곤 하던 이마 아래로 쌍거풀 없이 갸름한 눈매. 꼭 다물고 있어도 상냥해 보이던 끝이 쏙 올라선 입매와, 그 옆에 낮은 광대가 봉긋 올라서면 귀엽게 접히던 팔자주름. 그리고 저렇게 나를 보고 웃어주면 보이던 예쁜 보조개.
남준선배였다.
-걱정 마. 네가 찾아오면 언제든 위로해 줄께. 지금처럼.
익숙하다.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도서관으로, 음반 가게로, 학과 사무실로. 선배 뒤를 쫓아다니며 조잘대던 내게로 가끔씩 이렇게 잔잔한 눈빛을 보내주며 웃음 짓던 선배가. 추억은 추억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살아 이어지기도 하는 걸까.
반가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reflection #02 ------------------------------------------------------------------------
눈꼬리에 달려있는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한걸음에 달려가 덥썩 안겼다.
"와 난 설마 했는데 선배 진짜 여기 사는 거구나!!"
무거워 보이는 장바구니를 양손에 들고 있던 선배는 그대로 어정쩡하게 두 팔을 든 채로 품에 매달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눈물을 닦아 내고 나는 머쓱하게 선배를 올려다 보았다. 선배는 계속 아무 말이 없었다. 온 몸을 휘감는 낯선 정적에 소름이 돋았다. 아.... 아닌가?
"...선배... 아...아닌가...?"
가느다랗게 웃고 있던 작은 두 눈이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맞는데. 이 얼굴. 선배의 품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비누 냄새. 그런데도 선배는 계속 말없이 나를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
"저기... 저.... 김남준선배 아니..."
쌍거풀 없는 눈이 다시 천천히 휘었다.
"맞는데. 내 이름."
"아아... 선배 장난치지마요!"
양 끝이 이쁘게 휘는 입매가 여전했다.
"미안. 놀랐어?"
"당연하죠. 근데 선배 뭔가 좀 변했다. 처음에 거기 그렇게 서 있는데 못 알아봤어요."
"....그런가?"
"음...아닌가. 생긴 것도 옷 입는 것도 다 그대로인데.... 근데 그 놈의 비니는 아직도 써요?"
선배는 말없이 웃으며 자신의 품에 매달려있는 나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한 손을 들어 장바구니를 가리켰다.
"이것도 여전하네요."
"이거?"
"비닐봉투 안 쓴다고 장바구니 들고 다니던 거. 선배는 그때부터 특이했어서 다 기억나요"
"......근데 언제까지 이러고 대화 할 건데?"
"아..."
나는 후다닥 선배의 품에서 떨어졌다.
"너무 반가워서 그만..."
그러도고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툭툭, 장난처럼 치대며 계속 말을 걸었다.
"선배 진짜 보고 싶었는데... 어쩜 군대 간다 그러고 그렇게 연락이 뚝 끊겨요?"
선배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주제로 나오면 그냥 사람 좋은 미소로 밍밍하게 웃곤 했는데 바로 그 미소가 또 나와버렸다. 여전하구나.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요? 잘 살았어요?"
"너는 어떻게 살았는데?"
"나는 그냥... 뭐...."
하긴 나도...... 살아 온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그대로 대화가 끊기자, 반가운 마음은 부끄럽게 고개를 숙였고 나는 필요 이상으로 난리를 쳤는가 싶어 뻘쭘해졌다. 어색해진 선배의 얼굴을 본 순간, 일기장 속 글귀들 사이사이 잘려나갔던 기억들과 밑도 끝도 없이 나를 들뜨게 해던 추억들이 정확한 제자리를 찾아 일렬로 줄을 서서 떠올랐다. 사람의 기억력은 절박한 상황에 따라 이렇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하나보다.
-고마워요 선배. 선배 아니었으면 난 진짜 어디다 하소연을 하나... 선배 군대 가면 나 이제 어떻게 하죠?
-걱정 마. 네가 찾아오면 언제든 위로해 줄께. 지금처럼.
-그래도 돼요?
-그럼.
-그럼 선배도 저에게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돼요. 다 들어 드릴께요.
선배의 다정했던 얼굴이 살짝 흐트러졌었다. 입매는 가늘게 미소를 지었지만 눈이 웃음을 멈춘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하나의 표정에서 두 개의 모습이 보일 수도 있을까.
-중국 태산에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리고는 뜬금없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었다.
-선녀의 얇은 비단옷으로 스치듯 문질러서 그 큰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겁'이라고 한대. 그런 시간이 수없이 쌓이면 억겁이 되는 거지.
-그래서요?
-그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나는 너에게 다 말해줄 수 있을거야.
-결론은 말 안해주겠다는 거네!
-사람의 인연이란 게 원래 그런거야.
-선배는 저랑 아무 인연도 아니란 건가요?
-아니, 언젠가는 말하겠지. 그럼 그때 내가 너의 인연이 되지 않을까.
자신을 어미새 쫓듯 따라다니던 여자아이를 향해, 최대한으로 완곡하게 닫힌 마음을 보여주던 선배의 다정한 말투.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감정에 너무 취해서 이성을 잃었구나. 선배는 가볍게 내 앞머리를 흐트러뜨리거나, 조심스레 등을 두드려주긴 했어도 품을 한가득 내어준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아아 차라리 기억하지 말 걸 그랬나. 귓볼이 확 달아올랐다. 말 없이 빨간 운동화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선배의 얼굴을 보다가. 한참을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나는 입이 말라왔다. 어색하게 끝낸 대화를 마무리하고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을 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입을 떼야할지 감이 안왔다. 선배를 따라 뜻도 모르고 읽었던 어려운 책들에는 이런 내용은 없었던 것 같은데. 있다 해도 아마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읽고 흘렸을 수도 있지만. 선배는 이런 시간이 길게 이어지게 놔둔 적이 없었다. 예의 그 상냥한 미소와 수려한 말솜씨로 다시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어주었었다. 세월이 흐를 만큼 흐른 걸까.
선배의 침묵이 흐른 세월만큼 길어졌다고 느껴질 무렵, 결국 선배가 먼저 입을 뗐다.
"이렇게 왔는데... 잠깐 차라도 한 잔 하고 가"
선배는 긴 침묵만큼 어색한 친절을 보였다. 시선은 나를 향한 채로 고개를 틀어 집을 가리키는 선배의 모습이 뭔가 맘에 내키지가 않았다. 민폐를 끼치는 건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아... 아니에요. 저 이제 그만 가볼께요. 버스 시간도 얼마 안 남았을걸요. 이따 4시에 버스 온다고 했는데."
"막차 7시에 또 있어. 괜찮아. 누추하지만 들어와. 몸도 좀 녹이고. 신발 다 젖었네. 발 시리겠다. "
선배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낮은 돌계단 쪽으로 앞장서서 걸어갔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선배의 집을 쳐다보았다. 저 창 밑 어딘가에서 선배는 꿈꾸던 달빛을 받으며 뒤척이다 잠들곤 하겠지. 나도 모르게 선배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밟으며 걷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었던 선배의 마음 속을 향해. 선녀의 비단옷처럼 투명한 겨울 햇살이 무지개 빛을 뿌리며 선배의 집을 비춰주고 있었다. 선배의 안식처가 진한 햇빛에 처마 밑 고드름을 뚝뚝 흘리며 작게 울었다. 중국의 태산이라고 했던가. 그 산 어딘가에 있다던 큰 바위도, 누군가의 인연을 위해 제 몸을 닳히면서 저렇게 울었을까.
"돌계단 조심해. 눈 때문에 미끄러워."
선배는 슬깃 나를 뒤돌아보다가 내가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한 번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조심스레 선배의 표정을 살폈다. 가느다란 눈매 속 작고 선명한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 아, 다행이다. 입도 눈도 다정스레 웃는 선배를 보고나니 갑갑했던 마음 속이 편하게 가라앉아서 나는 눈을 깜빡이며 선배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낮은 돌계단 끝 나무 대문을 가볍게 열고 들어선 선배는 현관 입구에 장바구니를 턱,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섰다. 벽도 지붕도 낡은 흰색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눈에 덮힌 지붕은 빛바랜 회색이었다. 선배를 닮아 무채색으로 중무장한 작고 낡은 집은 현관문만 -얼핏 보면 빨간색으로 보일 만큼 - 짙은 갈색이었다. 어두운 원목의 현관문을 열던 선배의 뒷모습이 집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현관문 바로 정면에, 집의 거실 정 중앙으로 조그만 난로가 보였다. 그 앞에 쭈그리고 앉은 선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성냥을 집어 들었다. 팔각형의 오래된, 이젠 드라마에도 보기 힘들 저런 성냥갑은 어디서 구해서 쓰고 있는 걸까. 너무나 선배다운 모습에, 나는 반가워서 웃음이 터졌다. 티틱. 티딕. 틱. 몇 번을 성냥을 긋는 소리가 났는데 선배는 계속 그 자세로 쭈그리고만 있었다. 왜 불을 안 붙이지? 고개를 슥- 빼보니 선배와 난로 사이에 부러진 성냥이 몇 개 떨어진 게 보였다.
“아... 이게... 이게 자꾸 부러지네. 잠시만.”
선배는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주변을 살피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거실, 주방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애매한 것이 선배의 집은 원룸처럼 그냥 뻥 뚫려있었다. 현관 왼편으론 거실과 서재같은 느낌이고 오른편이 주방같았는데, 주방 쪽이 운동장을 향해 있는 아주 작은 직사각형의 구조였다. 주방 쪽에서 한참을 덜그럭 거리더니, 선배는 라이터를 찾아와서 다시 난로 앞에 앉았다. 우여곡절 끝에 난로가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석유냄새를 확- 내 앞까지 풍겼다. 선배는 손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내가 아직 현관문 밖에 서 있는 것을 알고는 바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들어와. 추운데 왜 아직도 거기 있어."
툭툭. 잠시 머뭇거리던 선배의 긴 손가락이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더니 현관문 안쪽으로 내 몸을 살짝 밀었다. 그리고나서 나를 지나쳐 다시 돌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뭐하려는건가 돌아보니 밍기적거리다가 선배를 따라 오느라 운동장 한 켠에 두고 왔던 내 캐리어 쪽으로 가고 있었다. 운동장의 흰 눈들이 반사시키는 햇빛들이 쨍하니 눈에 들어와 박혔다. 눈이 시려 선배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한쪽 눈을 찡그렸다.
"들어가- 안에 난로 켜놔서 금방 따뜻해질거야- 몸 녹이고 있어-"
캐리어를 드느라 한 쪽으로 기울어진 어깨. 나와 마찬가지로 쨍하게 빛을 반사하는 눈밭 때문에 한껏 찡그려진- 거의 감겨지다시피한 눈으로 지어보이는 미소. 어서 들어가라 손짓하는 선배 때문에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선배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취업위주의 대학교를 마지못해 들어갔다가 고집을 피워 결국 원하던 학교 원하던 학과로 편입한 후에도 집 안에 눈치가 보여 맘이 편치 않았었다. 학비에 비하면 택도없는 장학금이지만 그거라도 받아보겠다고 책을 달고 살았다. 부족한 학비와 용돈에 보태기 위해 그 머리터지는 와중에 아르바이트까지 수 없이 해야만했다. 잠 잘 시간이 부족해서 졸린 것 까지는 참겠는데 눈이 떨리고 두통까지 생기기 시작 할 때는 정말이지 아... 이제는 정말 포기해야하나 싶어졌다. 편입생이라 차별받는 것도 서러운데, 집에 다가는 하소연 할 수도 없었다. 편입생들 편하라고 – 실은 이것도 차별이었지만- 따로 만들어준 낡은 학과 사무실에서 멍한 표정으로 공부하면서 한편으론 포기 반의 마음으로 취업 자리를 알아보다가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해 혼자 울던 날이었다. 한참을 훌쩍거리고나서 큰 숨을 들이쉬며 창문을 열었을 때, 그 아래 화단에서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장미꽃 향기를 맡으며 책을 읽고 있던 선배와 눈이 마주쳤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는 듯이 미안한 웃음을 지어보이던 선배.
-너도 우리학과니? 아...편입생이구나?
젖은 울음을 삼키며 딸꾹질을 하는 나를 보던 선배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읽던 책을 건냈다.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이미 전에 읽었던 책이다.
-울지마라.
선배의 말에 눈물이 다시 툭, 떨어졌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슥, 눈물을 닦는 나를 보며 선배가 조심스레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선배는 여전히 다정하구나. 이렇게 갑작스레 방문한 오랜만에 만난 후배에게도.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냥 내가 알아서 마음이 풀리고 따듯해졌다. 기억 때문에. 좋아하는 것 만으로도 위안이 되어주었던 선배와의 추억들 때문에. 삶에 지쳐가던 내게 필요한 힐링이었다. 속눈썹에 방울방울 달린 눈물을 슥 훔쳐내고 현관문안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들어선다. 그가 꿈꾸 듯 말해왔던 달콤한 게으름의 공간으로.
쌀쌀한 방안, 난로 주변만큼은 선배만큼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오며 나를 반겼다. 난로의 온기를 따라 방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거실 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장이었다. 책장 옆으로 높은 천장이 보였다. 일부러 내 놓은 듯이 집의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서, 들어와 보니 더더욱 창고나 작업실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방의 한 중앙에 커다란 난로가 보였다. 운동장을 향해 나있던 커다란 창쪽으로 연통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연통이 차갑게 얼어보였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실제로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아까 선배가 켜둔 작은 원통형의 난로는 비교도 안되는 크고 멋있는 난로 위에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연통을 따라 주방 쪽으로 시선을 이어갔다. 주방은 유난히 천장이 낮아 보였는데, 자세히보니 주방은 살짝 밑으로 내려가 있었고 그 위로 반층형의 다락방이 있는 것 같았다. 오후의 진한 햇빛이 마치 훔쳐보듯이 다락방의 쳐져있는 커튼 틈새를 뚫고 거실쪽으로 길게 빗금을 그리고 있었다. 기다란 거미줄처럼 늘어진 햇빛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꽉꽉 채워진 책들이 넘쳐나다 못해 아예 책장에 기대어 바닥에서부터 탑을 이루며 군데군데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음악 씨디들과 엘피판도 한가득이었다. 아아, 저 엘피판들. 나는 반가워서 그 앞으로 한달음에 다가섰다. 그 옆에 낡고 작은 피아노가 있었고, 또 그 옆 책상 위엔 엔틱한 디자인의 턴테이블이 보였다. 그리고 이 고풍스런 분위기에 안어울리는 알록달록한 피규어들이 그 사이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엉뚱한 조합에 웃음이 살풋 났다. 서울의 작은 고시원에서 나의 여행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인형들도 생각났다. 뭔가의 공통점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좀... 지저분하지? 내가 정리를 잘 못해서... 나도 지금 내려온 지 얼마 안되고... 누가 올지 몰랐네.”
선배는 현관 앞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코트부터 벗어 옆 자리 의자에 휙 던졌다. 그러다 내 눈치를 보고는 주섬주섬 주워 의자 위 벽에 걸린 옷걸이에 조심스레 걸었다. 똑같이 아무렇게나 벗어 두었던 신발도 주워세우고는 뭍은 눈을 툭툭 털어 정리했다. 뒤늦게 가지고 들어온 나의 캐리어를 현관 의자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고나서야 먼저 들고 왔던 재활용 장바구니들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난로 위에 올려둔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나는 주전자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주방에서 계속 달그락 소리가 났다. 천장을 계속 뒤지는 폼이 뭔가 나에게 대접할 것을 찾는 눈치였다. 맘이 급했는지 투다닥, 그 안의 무언가를 쏟기도 하면서. 그렇게 분주한 와중에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선배가 신경 쓰였다. 눈치를 봐야 하는 건 나인데.
"선배 장 봐 온 것부터 정리해요. 전 괜찮아요."
"아... 아냐. 뭐 마실 거라도 줄까?"
"아까 밑에 슈퍼에서 산 거 있어요"
주머니에서 반쯤 마신 두유병을 꺼내 보여주자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아직도 피아노 쳐요?"
"아... 그건 피아노가 아니라 풍금이야..."
"풍금?"
"응. 학교 허물 때 버리길래 주워왔지."
"아..."
-난 평생 음악이랑 관련된 일을 하고 살고 싶어. 그게 꿈이라면 꿈이야.
뭔가 선배답다 싶어서 그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풍금을 살짝 손으로 훑다가, 나는 그 옆 책상의 턴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방 쪽 커다란 테이블에서 내 쪽을 바라보고 서서 장바구니를 정리하던 선배가 나를 따라 시선을 옮기는 게 느껴졌다.
"내가 생각했던 거랑 똑같네요."
"....뭐가?"
"선배의 안식처인데, 내가 함부로 들어왔죠?"
"아... 응. 뭐.... 함부로는 아니지, 내가 들어오라고 했잖아."
"걱정마세요, 막 건드리지 않을게요. "
“음?”
"선배 물건 함부로 만지는 거 싫어하잖아요."
"아... 아냐 난 괜찮아. 듣고 싶은 거 맘대로 들어도 돼"
"듣고 싶어도 어떻게 듣는 건지도 몰라요. 구경만 할께요"
"아... 엘피판은 처음봐?"
"처음보다뇨"
훽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선배가 순간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 음반 사러 다닐 때 따라다니면서 본게 얼만데...."
"아, 난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지금이야 레트로다 뭐다해서 좀 쉬워졌는데 그때는 진짜 엘피판 구하기 힘들어서 여기저기 발품 많이 팔았잖아요. 그때 선배가 해줬던 이야기들 다 기억나요. "
"내가 어떤 이야기들을 해줬는데?"
"그냥 음악이야기랑... 인생이야기랑... 선배 음악 이야기할 때 진짜 멋있었는데..."
"내가 그랬나?“
"네. 선배는 나보고 엉뚱하다고 했지만 정말 엉뚱한 건 선배였잖아요.”
“내가 엉뚱하다고?”
“네. 선배는 늘 예측 가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끔씩 전혀 예상못할 때가 있었거든요.”
“어떻게?”
“음... 음악만 해도 그랬죠.”
선배는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채 나를 쳐다보았다.
“어느 날인가, 전혀 연상을 못했는데 선배가 추천해준 음악이 로콘롤이더라고요. 로콘롤은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음악이라고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유쾌한 음악이라고. 선배 때문에 저도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듣다보니 선배의 말이 맞는 거예요. 이렇게나 신났다가, 이렇게나 달달했다가. 난 로콘롤은 엘비스프레슬리만 생각해서 느끼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뭔가 음악에 대한 편견이 있었구나. 그래 좋아, 언젠가 선배가 말했던 내 인생의 배경음악은 로콘롤로 정해야겠다."
"......내가 그런 이야기까지 했어?"
"선배 기억못하다니 섭섭한데..."
나는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배는 내 표정에 진심으로 당황한 것 같았다. 저렇게 쩔쩔매는 선배라니, 상상해 본 적이 없는데. 이건 내가 예측할수 있는 한도 밖의 모습이었다. 하긴, 아까 그렇게 성냥개피를 부러뜨리며 난로 하나 켜는 것도 쩔쩔매는 모습도 생각해보니 선배답지 못했다. 선배는 늘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면 행동 지침서가 있는 것처럼, 미리 예습이라도 해온 것처럼 차분하고 여유가 있고 능숙한 모습이었으니까.
"아... 너무 오래되니까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네가 기억력이 너무 뛰어난 거 아니야?"
선배가 다가왔다. 엘피판들을 슥- 훝는 기다란 손가락이 보였다.
"내 인생의 배경음악 이런 얘기... 나 아무한테나 안 한 거 같아서..."
나만 기억하는 것이라 해도 마음이 씁쓸했다. 내가 아무나 일 수도 있고, 아무나가 아니었지만 이미 선배의 기억에서 지워져 있을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나는 씁쓸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선배가 우리 그때 언제더라, 편입생들 모임 뒷풀이 자리에서 그랬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배경음악이 있다고. 삶에서 위안을 얻기 위해 꼭 만들어야하는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가 있다고."
"내가 취해서 별 애기를 다했나보다. 낯뜨겁게."
선배가 어깨를 으쓱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늘 그래. 질러놓고 현타오는 타입이라. 그러지 말 걸 후회도 많이 하고.“
”선배가요? 선배는 후회할 일은 안지르는 타입이 아니었어요?“
”아...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이게 그렇게 진지할 일인가.
"뭐... 사실 다들 취해서 기억 못 할 수도 있어요..."
"넌 기억하잖아."
"제가 며칠 전에 짐정리하다가 대학생 때 물건들을 좀 찾았거든요. 씨디도 있고, 일기장도 있고... 뭐 별거 다 있더라고요...."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었나 보네. 옛날 일기장에 다 써 있었던 거야?"
"그렇죠 뭐..."
말이 너무 많은가 싶어 잠시 입을 닫았다. 짝사랑하던 사람이 하던 말들을 하나하나 마음 속에서 되새김질하는 거, 그래서 이렇게 영화대사 외우고 싯구절 외우듯이 말할 수 있는 거. 전부 그 시절 일기장에 하나하나 매일 밤 기록되고 있었다고. 엘피판을 계속 훑다가, 나의 말이 어정쩡하게 끊기자 선배는 조용히 나를 내려보았다. 또 침묵. 역시 낯설다. 추억은 추억으로만 두는 게 나았을까. 시계는 이미 4시를 넘었다. 아까 버스를 타고 그냥 가는게 좋았을 걸 그랬나. 뭔가 시무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막상 말을 끊자 다시 잇기가 애매했다. 아무리 신나서 그 시절의 나처럼 굴고 싶어도 이미 나는 수년의 세월을 이 안에 쌓아놓은 여자 어른이 되어 있었다. 끝없이 발랄하기는 애매하지 않은가. 선배야 뭐 그 시절에도 지금처럼 애어른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아까 눈밭에서처럼, 또 다시 어색하게 흐르는 정적에 선배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그때까지 쓰고 있던 비니를 벗어 소파 위에 던져두고 현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는 거울을 보며 투블럭의 단정한 머리를 자연스레 손으로 훑으며 넘겼다. 적당히 헝클어지면서 자리를 잡는 얇고 숱 많은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였다. 어느정도 머리 모양이 자리를 잡자, 선배가 긴 팔을 뻗어 거울 옆 창가에 던져지듯 놓여있던 안경을 들었다. 아니 왜 안경이 거기 가 있지? 생각했던 것 보다 선배는 정리가 잘 안되는 성격이었나보다- 하고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안경을 쓴 거울 속의 선배가 침묵을 깨고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네 인생의 배경음악은 누구의 로콘롤로 정했어? 척 배리? 버디 홀리? 아니면 제리 리 루이스?"
"아직 못 정했어요"
"왜?"
"그것도 선배 덕분이죠"
"나 때문이라고?"
거울 속에서 동그랗게 눈을 뜨는 선배의 얼굴이 귀여워보였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다니. 선배는 나이가 드니까 더 귀여워지는 거 같네. 베시시 웃음이 새나왔다.
"처음엔 저도 열심히 로콘롤 음반 몇 개 사서 들었죠. 물론 저는 씨디였지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선배가 또 힙합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세상에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 장르가 없다고. 내가 왜 그렇게 줏대 없이 음악을 듣냐고 했더니, 선배가 그때 뭐라 그랬는지 기억 나요? "
"나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 다 좋다고... 그랬었지.“
진지한 선배의 표정과 다르게, 나는 이제야 그 시절이 기억난 듯 더듬으며 대답을 하는 선배를 보고 다시 신이 났다.
"한달이 멀다하고 다른 음악 이야기를 하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아는 게 많은가 신기하기도 하고... 덕분에 저도 어디 가서 음악 이야기 나오면 아는 척 좀 해요. 선배 덕분에... "
”그럼 지금 하나 골라. 내가 틀어줄게. “
선배는 아무래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예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내게 위로를 주려 애쓰는 것 같았다.
”음... 글쎄요. 뭐가 좋을까. “
”아직 못 정했다면 내가 골라줄까?“
선배는 판 하나를 골라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턴테이블 위에 올리더니 그 옆의 선들을 만지작거렸다. 책장과 풍금에 눈이 팔려 몰랐는데, 책상 뒤로 전자키보드가 보였다. 복잡한 선이 연결된 노트북과 컴퓨터도 있었다. 휴대폰도 잘 안바꾸던 사람이, 의외네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곧바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빵빠방 빠방하고 터지는 익숙한 첫 음에 나야말로 빵 터졌다.
“아 미치겠다. 뭐예요 선배”
“congratulation~ and celebrations~ when i tell everyone that you're in love with me~♪♬”
선배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엘피판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검은 터틀넥 니트를 입고, 뿔테안경을 쓰고, 투블럭의 머리를 세미포마드 스타일로 넘긴 멋진 모습을 하고서는 가당치도 않게 두 손을 모아쥐고 살짝살짝 어색한 어깨춤을 추는 선배의 모습이 너무 웃겨서,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미친 듯이 웃었다.
”이거 별로야? 내가 생각하는 세상 최고로 유쾌한 로콘롤인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더니 뒤돌아서 음악에 맞춰 엘피판을 장난스레 훑는 모습이 꼭 장난기 가득한 사춘기 소년 같았다.
”어렵군. 유쾌한 분위기가 아니라면, 사랑스런 분위기인가?“
선배가 다시 꺼내든 엘피판 표지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건 너무 베이직하지 않아요? 엘비스 프레슬리잖아"
"당연하다고 무시하면 안돼. 당연할만큼 타당한 이유가 있는 거지. 그리고 지금 배경에 딱 인 것 같은데?"
선배가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턴테이블 위에 엘피판을 올리고 바늘을 옮겼다. 지금 배경이 어때서. 나는 거실로 시선을 돌렸다. 난로 위에 아지랑이처럼 열기가 올라오는게 보였고, 그 위로 피아노 줄처럼 겹겹이 겨울 햇살이 보였다. 어렵게 자신의 공간을 마련한 햇살은 방안에 둥둥 떠다니는 작은 먼지 알갱이들까지 부드럽게 비춰주었다. 어느 정도 따뜻해진 공기가 달달하게 방안을 가득 채웠고, 푸른빛을 조금씩 감추고 흐려기 시작하는 창 밖으로 눈 덮힌 산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달달하다 못해 느끼한, 익숙한 목소리가 그 안에 흘러들었다. 그렇구나. 잘 울리는구나. 가만히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는 씨익, 가볍게 웃는 얼굴. 으쓱하는 눈썹 위로 주름지는 이마가 익숙했다. 아, 이제야 다시 내가 알던 선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단정하게 눈을 맞추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건실하고 착한 남자 어른 같던. 옛날부터 상상해오던 모습 그대로 이렇게 커다란 어른이 되어있는 것을 보니 신기했다. 하긴, 학생이었을 때 부터 선배는 어른 같긴 했지만. 사회에 나와서 한 두 살은 큰 차이가 아닌데, 학생 때는 일 이 년 선배인 게 왜 그렇게 어른 같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나이의 선배도 아이나 다름아니었을텐데.
아, 그런가 보다. 이렇게 가끔가끔 낯선 건. 이제 같은 어른의 시선으로 그를 보게 되서일까. 그는 더 이상 애어른이 아닌 진짜 어른이 되었고, 어렸던 나도 진짜 어른이 되었다. 시선의 높이 차이. 그가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마음들이, 이제는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비춰지는 걸까. 그는, 어린 나보다는 이렇게 커버린 내가 더 편했던 걸까.
”Like a river flows surely to the sea.....“
립싱크하듯이 노래 가사를 나즈막히 따라부르며 엘피판의 곡목을 훑는 선배를 보며 나는 다시 옛날 생각이 났다. 아침 강의시간에 늦어 헐레벌떡 교문 앞을 뛰어가는 중에, 어디선가 나는 익숙한 향에 이게 뭘까 한참을 생각했다. 하루종일,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속에서 피어오르는 이 향이 뭘까. 뭔데 이렇게 마음이 두근거릴까. 내내 속에서 맴돌던 그 향기는 다시 마주친 선배를 보고서야 정확히 알게 되었다. 바로 초여름이면 꽃집에서 길거리에 묶음으로 내놓고 팔던 장미꽃 향기였다. 선배의 냄새는 꽃향기가 아니라 베이비파우더 같은 비누 냄새였지만. 나는 장미꽃만 보면, 그 냄새만 맡으면 선배가 떠오르곤 했다. 울지마라. 유명한 싯구절을 조용히 건내던 선배. 선배 주변으로 화단 가득 피어있던 붉은 장미꽃들. 우주 만물의 당연한 법칙인 것 처럼 - 그 이후로 장미향만 맡으면 그 모습이 영화의 한장면처럼 느릿하게 머릿속으로 떠오르곤 했다. 노래가 다 끝나고 다시 정적이 흘렀지만 나는 아련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나 보다. 가만히 그런 나를 쳐다보던 선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내가 할 이야기가 있는데... 뭐 커피라도 일단 마실래?"
선배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선배의 말에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내 배꼽시계가 먼저 대답을 해버렸다. 전혀 내 뇌를 거치지 않은 정확한 생체시계의 대답을.
꼬르륵...
선배는 순간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기다려 봐. 내가 장 봐온 거 있어."
한 손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리고 선배는 주방 쪽으로 향했다.
”아... 하필 이 타이밍에..."
인상을 찌푸리며 선배를 보았다. 아직도 정리가 안 된 장바구니를 앞에 두고, 선배는 앞치마부터 매고 있었다. 잡학다식하고 아는 게 많았던 선배. 음식에도 일가견이 있어 하다못해 떡볶이집 하나를 가도 선배의 뒤만 따라가면 절대 실패한 적이 없었다.
"일단 이거부터 마셔. 배 많이 고픈가 본데."
율무차를 타서 내게 건네는 선배의 손가락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잔을 건내 받으며 선배의 손가락을 조심스레 보았다. 엔틱한 반지 몇 개가 끼워져 있었지만, 커플링 같은 느낌을 주는 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도 모르게 뺨을 살짝 때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싶어 나를 쳐다보는 선배를 보면서 어색하게 입을 뗐다.
“맛있네요 율무차.”
“맛있지? 그거 동네 어르신이 직접 만들어 주신거라 파는 거랑 다를 거야. 좀 가져가도 돼. 엄청 많거든. 이따 좀 덜어줄까?”
선배가 가르쳐줬던 기적의 김치볶음밥이 아직도 내가 자랑하는 일등 요리 레시피라는 걸 말해주고 싶은데 그것도 선배는 '내가 그런 이야기도 했었어?' 할 것 같아 망설여졌다. 내게는 커다랗고 따뜻하던 추억들이 선배에게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기억도 안 나는 평범한 일상들 중 하나 일 거라는 게 서운했다. 나 같은 여자애들 많았겠지. 선배는 인기가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선배 옆에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붙던 애들 중에서는 내가 일등이었는데. 선배가 그래도 나는 이뻐한다고 여자애들이 질투도 했었는데.
“아.... 뭐 먹을래? 여기 장 좀 봐온 게 있는데...."
내가 율무차를 다 마실 때까지도 선배는 메뉴를 못 정한 거 같았다. 나도 뭔가 도와줄까 싶어 다가섰다. 그제야 선배가 장 봐온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라면이 종류별로 한가득 있었다. 아니 무슨 ... 라면만 먹고 사나. 라면 다음으로 나오는 것들은 햇반과 통조림 들이었다.
"저, 김치볶음밥이요!"
"어... 김치볶음밥은 안 사왔는데 잠시만..."
음? 사오다니. 눈에 물음표를 달고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장바구니를 뒤지던 선배의 손이 느려졌다.
"아... 마..만들어달라고?"
선배는 내 눈 속 물음표를 읽고는 다시 당황한 표정을 했다.
"아니, 만들어주는거는 어렵지 않은데. 재료.. 아 재료가 없어서..."
"뭐 있는걸로 하면 되는 걸..."
"기..김치가 없어서..."
"김치가 없다고요?"
"응, 김치가 없어.."
긁적.. 내가 좀... 눈치없이 굴었나? 아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민폐, 민폐는 안돼.
"아니, 그냥 뭐 라면 먹죠. 오 라면 많다. 저 짜장라면 좋아해요."
"아, 그럴까?"
”아 맞다 김치 없댔죠? 라면에 김치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그.. 그러게, 김치... 김치가 없어서 어떻게 하지....."
뭔가 절박한 표정의 선배를 보니 이상했다. 김치가 없는 게 이렇게 심각할 일 일까. 진짜 세월이 흐르긴 흘렀구나. 선배의 이런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너무 낯설었다. 아 역시, 나는 잘못 온걸까. 계속해서 입을 달싹이는 선배는 뭔가 말 할 듯 말듯 내 눈치를 살폈다. 그때였다.
"서울총각!!!!"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