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D YOU #05 ------------------------------------------
"화장했어? "
"응. 왜?"
"아니, 왜 안하던 걸 하고 그래..."
"크리스마스니까 했다, 왜?!"
"크리스마스에 일하러 가면서 뭐가 좋다고..."
"시끄러워. 그러는 너는 알바하러 가면서 뭘 그렇게 차려입었냐"
"머, 나도 크리스마스라서 했다. 왜"
하여간. 내가 너랑 무슨 로맨스물을 찍겠니...
"저기 빈자리 났다. 저기 앉자"
"잠깐만."
꾹이는 나를 먼저 빈자리에 앉히고, 그 옆에 그냥 서서 손잡이를 잡았다.
"오늘 하루종일 일할텐데, 저쪽 가서 앉아. 나중에 다리 아플텐데."
"됐어."
버스를 따라 흔들리는 몸을 손잡이에 지탱한 채, 그렇게 꾹이가 내 옆에서 버티고 서있었다. 꾹이가 흔들릴 때마다,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내 옆으로 퍼졌다. 내 심장도 그 향기를 따라 흔들렸다. 두어정거장 지나가고 대학가 앞에 버스가 멈춰서자 사람들이 우루루 내렸다. 그렇게 내 옆자리가 비자마자 꾹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 앉았다. 털썩, 주저앉는 꾹이를 따라 다시 한번 익숙한 향이 공기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이어폰을 빼고 한쪽을 건냈다.
"들을래?"
"뭐 듣는데?"
꾹이가 고개를 내 쪽으로 숙였다. 나는 웃으며 꾹이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었다. 며칠전부터 계속 듣던 음악이 흘러나왔고, 꾹이가 바로 따라서 흥얼거렸다.
"어, 나도 이 노래 좋아하는데."
"그치. 이 노래 좋지?"
"응."
아침인데도 해가 안보이고 하늘이 꿉꿉했다. 눈이라도 올 것 같은 모양새에, 햇살이 안비춰도 마음이 설렜다. 익숙한 출근길도, 이렇게 다른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니. 마음이 둥실 떠올랐다. 사랑은 이렇게 생기는게 아니겠니, 어쩌면 내 맘의 반쪽을 네게 걸어보는 건데. 나는 노랫말을 중얼거리며 차장밖에 두었던 시선을 돌려 꾹이를 쳐다보았다. 휴대폰을 보던 꾹이가 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왜? 눈빛으로 말하는 꾹이를 보았다. 머리 자를 때가 되었구나. 앞머리가 조금씩 꾹이의 커다란 눈을 찌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꾹이의 앞머리를 옆으로 슥슥 넘겨주었다. 꾹이가 멈칫 하다가,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쑥쓰러운 표정으로 씩 웃더니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유난히 눈동자가 까맣고 아랫속눈썹이 짧아서, 저럴 때면 저 커다란 눈동자가 얼굴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장난스레 두 손을 꾹이의 턱 밑으로 갖다 대자 다시 눈을 깜빡인다. 왜? 깜빡이는 눈동자가 물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야, 너 눈알이 떨어질거 같다."
"뭐야..."
꾹이가 웃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웃는 얼굴 속에 동그랗게 솟아오르는 광대가 보였다. 사라진 줄 알았던 동그란 뺨이 아직 저기 있었네. 귀엽게스리. 나는 휴대폰을 들어 그런 꾹이의 옆모습을 찍었다.
"아 찍지마-"
"왜 이쁘구만"
"이쁘다니, 내가 애야?"
"그럼 멋있다고 해줄께. 좀 찍자."
"아씨, 그럼 나도 찍는다?"
"찍어라"
"아쭈?"
티격태격하다가 내릴 정류장을 놓쳤다. 나는 그게 올해의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위한 액땜이라고 생각했는데. 액땜이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불행의 전초전이란 걸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어머 크리스마스에도 일해서 어떻게 해?"
넵킨을 펴놓고 카메라와 함께 줄 카드에 쓸 멘트를 고민하면서 낙서를 하고 있을 때였다. 소름이 쫙 돋았다. 뭐냐 이 목소리는.
"있잖아, 나 저번에 말한 그 언니야. 오빠네 학교 인문대에 연극동아리 있다고 했잖아."
"아하..."
인상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든 나는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어, 가진이네?"
"아.. 네.."
"음? 가진 언니랑 아는 사이에요?"
"응. 우리 사귀었었는데."
"어머 신기하다! 난 몰랐어! 세상이 엄청 좁다더니!"
제발 꺼지라고.
"있잖아, 내가 언니 연극하는거 보고 싶어서 막 그 학교 다니는 언니한테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그 언니가 자기도 그 동아리라면서 막 오빠이야기 하길래, 같이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내가 언니 보여주려고 같이 온거거든."
오빠이야기만 했겠니? 오빠랑 나 사이 이야기도 했겠지. 그럼 우리가 사귀었던 것도 알았겠네? 너 진짜로 다 알면서 데려온 게 아니라고?!
"잘지냈니? 크리스마스에 일하는거 보니 아직 남친 안사귀었나봐?"
"그러는 오빠도 애랑 있는거 보니까 아직 여친 안사귀었나보네."
"그러니까. 잘지내나 봐. 난 가끔 너 생각 했는데."
이 뻔뻔한 새뀌가. 역시 헤어지길 잘했어.
"어머 오빠~ 가진 언니 남친 있어요. "
"-주문하세요."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봐도 알 것 같다. 지금 꾹이가 표정이 어떨지.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불여시가 다시 신나서 떠들었다.
"저 둘이 사귀거든요~ 그래서 옛날에 그 우리 서점 영상도 여친이라고 콕 찍어서...."
등 뒤의 서늘한 눈빛도 모자라서 이젠 내 앞에서도 서늘한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아니라고!! 그땐 나 얘 안좋아했다고!! 아니 그게 지금 중요한게 아니고;;; 그건 진짜로 내가 꾹이 여친이라서 찍은게 아니라 저 불여시가 못해서 꾹이가 날 픽한거라고!
"가진언니가 그렇게 연기를 잘한다면서요?"
"음.. 뭐, 내가 가르쳐 주긴 했지...."
의문스런 표정으로 나와 꾹이를 번갈아 보는 시선이 불쾌했다. 나도 나지만, 꾹이가 저런 시선을 받게 하는건 정말 싫다고. 무슨 죄지은 사람 쳐다보듯이.
"하숙집.때문에 매일 바쁘다고 연습을 많이 못하긴 했지만. 매일 집에 일있다고 사라지는 통에 연극에도 집중을 못하고 데이트도 제대로 못하고...."
"그래도 주연도 맡고 그런다면서요"
픽,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가며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가진 누나가 실전에 강해서. 카메라 빨도 잘받고. 그래서 내가 좀 찍었어요. 연극하는것도 몇번 찍어봤는데 연극조명보단 카메라가 훨씬 잘 받는 얼굴이라. "
응? 나는 꾹이를 돌아보았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든 채로 꾹이가 두사람을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누나 수업중에 희극관련 교양수업때문에 친해진 친구들하고 취미삼아 하는 거라고 하던데요 뭐. 워낙 작은 동아리고 진짜 연극 전문으로 하는 학생들도 아니고 재미삼아 하는건데 주연 조연이 뭐가 중요해. 연영과도 아닌데 이 정도면 잘하는거지. 아, 이런 것도 다 경력 쌓이는 거 아닌가요? 연영과면서 아직도 무대에 한 번도 안오르고 오디션 한 번 제대로 못 봤으면서 입으로만 잘난척하는 사람보다야 훨 실력있지. 우리 누나가."
이 자식이 또 뼈를 때리기 시작했다. 말로만 때려도 겁나 아픈 놈인데. 근육돼지라서 말에도 근육이 붙어버린게 분명해.
"조교님이 소개해줘서 알바 꽤 하면서 이것저것 찍어봤거든요. 몇 번 찍어보니까 바로 알겠던데요. 연기를 얼굴로만 하고 목소리로만 하나. 몸으로 하는 것도 연긴데. 진짜 배우들은 얼굴 한 번 안나오고 목소리 한 번 안나와도 뒷모습이랑 숨소리만으로도 연기를 하던데. 알죠 그런거? 뭐 그 정도 수준은 안바래도 최소 낄끼빠빠는 알아야 연기 아닌가."
꾹이가 한 손으로 불여시를 가리켰다.
"근데 그게 안 되시더라고요. 얼굴 한 번 안나오는 30초 짜리 배너 영상인데. ng를 스무번 넘게 내시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누나 쓴 건데. 역시 경험자 다워서 딱 두번만에 ok나던데요. 연영과시면 울 누나보다 더 잘하시려나. 울 누나한테 연기 가르칠 정도면 ng같은 건 진짜 한 번도 안내시겠네. "
와 심장 떨려. 맞은 건 저 두사람인데 왜 내가 다 아프지. 얼굴이 시뻘개져서, 한 대 때리려고 왔다가 열 대쯤은 얻어맞은 얼굴로 두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심장이 계속 벌렁거렸다. 애가 이렇게 말을 잘했나? 당황하거나 흥분하면 더듬기부터하던 녀석이. 역시 실전에 강한 녀석이야. 못하는게 없는 녀석이야. 절대 어느 싸움에서 건 질 운명이 아닌 녀석이라고. 난 절대 꾹이랑 적을 안두겠어. 이런 애를 적으로 두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
"...내가 좀 심했나."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꾹이를 쳐다보았다.
"그러게 왜 그런 녀석이랑 사귀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다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커피 안내려? 주문 밀린다."
"어? 응. 응 알았어. 미안."
일 끝나면 함께 이것저것 또 신나게 돌아다니다 늦게 들어갈 마음이었는데. 이 분위기에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거 같았다. 주문했던 카메라도 크리스마스가 지나야 도착한다고 하고. 크리스마스의 저주는, 아무래도 올해에도 계속 될 모양이다. 하아.. 기운빠져.
망개떡 싸부는 급한 일이라고 짐도 못싸가지고 내려가더니 아직도 연락이 없다. 무슨일일까. 일주일은 걸린다고 하더니 . 덕분에 가게는 빌렸지만. 이러다 가게까지 오픈 못하고 그만 두는거 아닐까. 봄꽃이 피면 싸부네 가게에서 꾹이랑 카라멜케이크 먹고 싶었는데. 나는 싸부에게 받은 도어락비번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들고 온 카메라가 담긴 선물 상자를 피아노 위에 올려두고, 나는 기운없이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았다. 가게 안의 인기척을 느끼고 골목안에서 묭묭이가 나타나서 유리창을 긁었다. 문을 열자 묭묭이가 익숙한 듯 기지개를 한번 켜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사부작거리며 소리없이 들어서는 묭묭이가 싸부랑 꼭 닮아보였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도 그렇고, 발자국소리 없이 조용히 걷는 폼도 그렇고. 그래서 남자사람은 기겁하고 싫어하는 묭묭이가 싸부한테는 곁을 주는건가?
나는 상자를 열고 카메라를 꺼냈다. 꾹이의 간신배 친구가 가르쳐준 대로 나는 인터넷으로 카메라의 기종을 알아내서 어렵게 조작법을 겨우 검색해 낼 수 있었다. 최대한 이해한 게 딱 열번째 줄까지였지만. 그 이후로는 다시 무슨 소린지 헷갈렸다. 나는 피아노 위에 카메라를 올려 두고 카메라 렌즈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촛점이 흐려졌다 또렷해졌다 다시 내 얼굴이 왕방울만하게 화면에 꽉 찼다.
"워, 이거 뭐냐. "
나는 촛점 같은건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머신이 보였다. 싸부는 많이 급했는지, 답지 않게 가게를 잔뜩 어지러뜨리고 사라졌다. 커피머신 앞에 포터필터가 보였다. 꾹이가 분리된 필터를 들고 당황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싸부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나를 보면서 안절부절 못하다 화를 내던 모습도.
"카메라 받으면 기분 풀리려나. 아씨, 왜 하필 크리스마스에 그 불여시가 나타나가지고..........."
나는 다시 머리를 감싸앉고 주저앉았다.
"아씨, 바보야. 전 남친 좀 봤다고 크리스마스에 분위기도 못내고 그냥 들어오는게 어딨냐. 너 나 좋아하는거 맞냐고요."
징징거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들고 피아노 위의 카메라를 쳐다보는데, 어느샌가 묭묭이가 카메라 옆에 서있었다.
"나도 너 좋아한다고요.....전정국 이 바보 멍충...."
묭묭이가 한 발을 카메라 위에 올리고 있는게 보였다. 헉. 안돼! 그게 얼마짜린데!!!
"으아 묭묭아 그거 떨어뜨리면 안돼!!!!"
늦었다. 묭묭이의 앞발이 카메라에서 떠났고 카메라는 그렇게 피아노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그대로 몸을 뻗었다. 머리가 피아노다리에 쿵,하고 세게 부딪혔지만 다행히 카메라가 그런 내 위로 떨어졌다. 나는 아픔도 잊고 바로 카메라를 번쩍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응? 이리저리 들어보는데 액정화면에 영상이 비쳤다. 빨갛게 깜빡이는 불빛도 보였다. 뭐야 이거 녹화되고 있는거야? 뭐지? 언제부터 녹화되고 있었던거지? 묭묭이가 언제부터 저기 위에 올라가 있었지? 아무리 카메라를 이리저리 살펴도 녹화되는 화면을 끄는 법을 모르겠다. 나는 피아노 위의 묭묭이를 노려보았다.
"야!! 이거 어떻게 끄는거야!? 네가 켰으니까 네가 끄라고!! 야 모른척하지말고! 저게 진짜... 야 너 완전 꼬질이 아깽이 시절부터 먹여주고 키워줬는데!! 어떻게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냐?!어?!"
이걸 어떻게 끄지? 아, 맞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그냥 ON버튼을 OFF로 돌려버렸다. 그렇지 이 방법이있었지. 그런데 녹화된 영상은 어떻게 지우지?
톡톡.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창 밖에 싸부님이 보였다.
"아, 잠..잠시만요..."
나는 재빨리 카메라를 상자에 넣었다. 다행히 커다란 피아노에 가려서 밖에서는 내 앉은 자리가 잘 안보일 것 같았다.
"가게에서 뭘 하길래 그렇게 숨겨?"
"아, 이건... 비밀이요."
나는 다급하게 두 손을 휘휘 저었다.
"근데 싸부 일 다 끝난거에요? 급한일..."
"아. 내일 다시 내려갈거야, 챙겨갈게 있어서 올라왔어. 앞으로 이삼일 더 비울거같아."
"어, 안되는데."
"응?뭐가?"
"아... 아니 가게 좀 빌린다고 했잖아요. 그거... 원래 내일 하려고 했는데 안될거같아서."
"무슨 일인데. 친구들 불러서 연말파티라도 하게?"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봄까진 오픈 안하니까 안심하고 써. 날짜만 말해줘. 빌려줄테니. 혹시 필요하면 케이크도 만들어줄까?"
"고마워요 싸부님."
아.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신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싸부님, 저 케이크 만드는 법 좀 알려주시면 안돼요?! 그 카라멜케이크요!"
"알려주는건 어렵지 않은데...왜, 내가 만들어줄 수도 있는데.. 아, 저기 냉장실에도 케이크 있을거야. 그거..."
"제가 직접 만들어야 돼서요! 그,그, 케이크에 막 글자쓰고 그러는 거, 그것도 가르쳐주세요!"
싸부가 갑자기 푹 웃었다.
"....누구 줄건데?"
"그건 .... 비밀...."
"누군데?"
이미 다 알면서 자꾸 물어보지 말아요. 싸부의 시선이 피아노 쪽으로 향했다. 피아노 위에 내가 가져온 박스가 보였다. 급히 카메라를 집어넣느라고 늘어놓은 포장지와, 하트 모양 카드들은 차마 못 집어넣었다. 나는 화제를 돌리려고 품에서 타로카드를 꺼냈다.
"싸부 이거 돌려드릴께요. 여왕카드."
"아, 이거... 왜?"
"찾아보니까 이거 짝 안맞으면 점 못친다던데요?"
"점 치려는거 아니니까 상관없는데."
"그래도요. 이거 비싸다면서요."
"음. 싸진 않았는데... "
"그런데 그렇게 선뜻 막 남을 주면 어떻게 해요?"
나는 두손을 허리에 얹고 싸부를 향해 잔소리를 시전했다.
"가게까지 내면서 어쩜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요. 나니까 양심껏 돌려주는거에요. 부적삼으려고 했는데."
"알았어, 알았어. 고맙다."
"고마우면 케이크만드는 법 알려주기. 꼭이요."
"그래. 알았어."
나는 신나서 싸부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디데이를 며칠로 할까나.
"뭐하느라고 늦었어. 밤에."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던 꾹이는 내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서는 싸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형. 부산갔다더니 이제 온거에요?"
"아, 응. 근데 또 내려가야 해. 내일 아침 일찍 내려갈거야."
"무슨 일인데요?"
"별일아니야."
쓱쓱, 싸부는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는 넌 어디나가니, 이 밤중에."
"아... 종강파티 다시 한다고. 우리 조원끼리. 조교님도 오신다고 하는데 빠질수가 없어서."
"아.. 그래."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랐다.
"아, 꾹아."
"왜?"
"너 나 언제 찍었는데?"
"응?"
"나 연극하는거 찍었다며. 그거 진짜야?"
"아... 그거.... 그냥 카메라 연습삼아 찍어봤다."
"언제? 언제 와서 찍었는데? 왜 나한테 말 안했어?"
"뭐, 나도 연습 삼아 찍은 거라 별루라 안보여준거다"
"그래도... 아직 있어? 나 보여주면 안돼?"
"됐다. 벌써 옛날에 다 지웠다."
"치사하게"
" 나 오늘 늦는다."
쿠당탕.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며 재빨리 나가버리는 꾹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간신배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소용없어. 나에겐 네 카메라의 기종 이름과 인터넷이 있지. 늦는다고? 더 잘됐네. 후후후.
"오오오 됐다됐다됐다"
한시간을 헤맨 끝에 겨우 영상 목록에 도달했다. 실수로 지우기라도 하면 끝장이야. 난 꾹이한테 죽을거야. 조심조심. 나는 액정에 뜬 목록을 보았다. 영상이 꽤 많네. 빽뺵한 사진들 속에 꽤 많은 영상들이 보였다. 꾹이의 얼굴도 보였다. 까르륵 거리며 웃기도하고, 심드렁하게 렌즈를 피하기도하고. 쑥스럽다며 끝까지 카메라를 등지기도하고. 꾹이는 여전하구나. 저 밖에서도. 생각보다 익숙한 얼굴들도 꽤 보였다. 익숙할랑 말랑한 녀석의 학교 친구들 모습이 보였고, 꾹이의 학교 교정도 보이고. 우리 하숙집 사진도 많았다. 뭐야, 다 같이 쓰는거라더니 꾹이 손을 월등히 많이 탄 것 같았다. 묭묭이까지 보이네. 그리고 당연하게 보이는 내 모습.
"뭐야 이거 친구들이랑 같이 쓰는거라면서 이런 사진들을 지우지도 않고!!! "
내가 이런 얼굴이었나. 꾹이가 나를 볼 땐 내가 이런 표정었구나. 아씨 좀 더 이쁜 표정 지을 걸. 와씨, 이건 완전 ... 완전 폭탄인데. 앤 왜 이런 걸 찍고 난리야. 투덜대며 사진들을 훑었다. 이 안에, 내가 모르던 꾹이가 한가득 있었다. 나는 카메라 가방에 있는 다른 메모리카드를 꺼냈다. 오늘 외박한다고 아까 꾹이에게서 톡이 와있어서, 나는 안심하고 모든 영상을 다 훑어볼 참이었다. 다시 끼워넣은 메모리카드에는, 저번 가을에 축제 때 내가 처음으로 조연을 맡았던 연극무대 영상도 있었다. 짜식. 늦게 와서 꽃다발만 건내준 줄 알았는데 이런 걸 몰래 찍고 있었단 말이지. 그럼 이때부터였나?
"쭉쭉! 술이들어간다~"
거나하게 취한 술자리가 보였다.
"자~그럼 우리 꾹이 차뤠~"
"아 씨 진짜... 그만해..."
이렇게 혀가 꼬인 꾹이는 또 처음이다. 카메라를 쳐다보며 웃고 있는 꾹이가 보였다. 귀여워... 이게 언제지? 머리 색깔보니까 꽤 예전인데.
"첫사랑! 첫사랑!"
박수를 치며 꾹이에게 벌주를 권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꾹이의 첫사랑. 나도 궁금하다.
"아씨...."
고개를 툭툭 떨구다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꾹이가 졸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중학교 때."
중학교 때 꾹이가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가?
"그때 알았지. 그냥 앞으로 뭐하냐, 공부에 취미도 없었는데. 그 걱정은 있었는데...."
"그때가 언젠데?"
흔들리는 카메라가 내 대신 질문을 던졌다.
"나 운동 그만뒀을 때. 나 다쳐서 태권도 그만뒀을 때."
아, 부상으로 수술하던 때. 그때 이야긴가부다.
"누나가 병원에서 나 품에 안고 위로해주니까 세상 다 가진 것 처럼 기분이 좋아지더라. 운동 그만두게 되면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오오오올~~~~~"
두두두두두두...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뭐 어떻게야. 그냥 그게 다지. 내가 엄청 좋아했었지. 가진누나. "
꾹이가 술잔이 가득 널려진 테이블 위로 한쪽 팔을 올려 턱을 괴고 계속 카메라를 쳐다봤다.
"근데, 누나는 아니야. 이것 저것 누나가 하는거 다 따라하면서 쫓아다녀도. 날 쳐다도 안 봐."
꿈뻑꿈뻑. 커다란 눈이 천천히 감겼다 떴다를 반복했다.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커지면, 또 윤가진은 저만큼 커져있고. 아니 죽을 힘을 다해 쫓아가도 왜 자꾸 나보다 어른인거냐고.... 나중엔 짜증이 나서... 너무 힘든거야. 내가 너무 억울해가지고... 좀만 더 일찍 태어날걸...."
커다란 쌍거풀이 스르륵 풀리면서 꾹이가 감긴 눈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다~가진~ 가진이 누나가, 나, 이 나를 못가졌네!? 나 황금손 황금막내 전정국이를 못 알아보고오..... 줘도 못가지는 가진이 누나는 맨날 최영장군님 이야기만 하면서...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랬다고오...."
술에 젖어서 중얼거리는 꾹이의 얼굴이 커졌다 가까워졌다, 흐려졌다 또렷해졌다를 반복했다.
"그래서 포기했지 머.... 끝."
쌍거풀이 접히는 속도가 점점 느려질수록, 꾹이의 말도 점점 느려졌다.
"야 포기가 어딨냐. 포기는 배추 셀때나 하는거라며"
"음음- 누나는, 아쭈아쭈... 소중한 누나니까. 나한테 하나밖에 없는 누나니까. "
꾹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눈을 부릅떴다.
"내가 맘 정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
쌍거풀이 눈두덩이 속으로 스륵 사라지는게 보였다. 떨어질 것 처럼 커다란 눈동자가 단호하게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젠 끝. 이젠 다 끝난 얘기지."
꾹이가 풀린 눈으로 웃으면서 카메라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영상이 꺼지고, 화면이 영상목록으로 돌아갔다.
화면이 끝나도, 나는 카메라를 잡고 그대로 계속 앉아있었다. 한참을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어 그렇게 멍청히 앉아 있는데, 누군가 집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났다.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방을 나왔다. 계속 머리가 멍했다.
조심스레 1층으로 내려가는데 거실로 들어서는 꾹이가 보였다. 익숙한 섬유유연제 냄새 대신 술냄새가 확 퍼졌다. 아까 영상에서 처럼 풀린 눈을 한 꾹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웃어보였다.
"아직 안잤어 누나?"
술기운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가 서러울 이유가 없는데. 나는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계단에 선 채로 벽에 등을 기댔다.
"미안 누나. 그래도 외박 안하고 일찍 들어온다고 욕 한 바가지 얻어먹고 온거다."
며칠 전, 이 벽에 기대서 가슴 두근거렸던 게 생각났다.
"왜 그래? 뭔일있어?"
나는 그대로 꾹이를 지나쳐 내 방으로 향했다.
"누나."
꾹이가 내 손을 잡았다.
"왜 그래 누나, 무슨 일 있구나?"
나는 고개를 홱 돌려서 꾹이를 쳐다보았다. 술냄새가 폴폴 풍기는 꾹이의 얼굴이 보였다. 취중에도 뭔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입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키고 나는 손을 떨쳐냈다.
"아무일도 없어. 졸려서 그래."
"뭐야, 왜그래.."
"내일 말해. 담배냄새 술냄새 나는거 싫어"
"아, 미안..."
머리를 긁다가 다시 비틀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는 꾹이의 발소리를 들었다. 발소리가 멈췄는데 방문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알게뭐야. 나는 방문을 열었다. 침대위에 풀썩 넘어지듯 누웠는데 익숙한 향기가 또 둥실 내 위로 떠올랐다.
-사람은 저마다 향기가 있대. 사람이 죽어도, 그 향기가 계속 남아서 남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기억하는거라고 하더라.
우리 꾹이는 아무데서나 막 자서 걱정이야. 잠자리가 편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법인데.
-그래서 그 향기가 사람들 기억 속에서 다 사라지면 그때 그 사람의 영혼도 사라지는 거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2층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2층 복도에 있는대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이 들은 꾹이가 보였다. 저 근육덩어리를 내가 방으로 옮길 자신도 없고. 다른 애들을 깨워서 부탁하긴 좀 그렇고. 이렇게 누워있는거 누가 화장실 가다가 보기라도 하면 뭐, 옮겨주겠지. 나는 한숨을 쉬고 이불을 꺼내왔다. 정신없이 곯아 떨어져서 누워있는 꾹이 위로 이불을 덮었다. 웅얼거리며 이불을 잡아 끄는 꾹이를 보고 나는 자리에 동그랗게 주저 앉았다. 2층 베란다 창문으로 가로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얼마전, 저 창틀 위에 나를 앉혀놓고 장난치던 꾹이의 얼굴을, 나는 그렇게 앉은 채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또 다시 울컥. 속에서 알수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포기했다며. 근데 왜 날 찍었어? 왜 내 편들어줬어? 왜 계속 다정하게 행동해서 나 착각하게 했어?
-누나 나는, 여기서 계속 누나랑 살거야.
... 소중한 누나니까. 나한테 하나밖에 없는 누나니까.
-그래도 된다. 그냥 평생 누나가 해라.
내가 맘 정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러니까 이젠 끝.
답답하다.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이렇게 아픈게, 어떻게 좋은 기분일 수가 있었지? 나는 그렇게 한참을 가로등 불빛에 기대서 꾹이를 바라보았다. 밤이 너무 길어서, 어떻게 그 긴 시간을 쪼그리고 앉아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길어서. 나는 그 시간이 꼭 현실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멍청하게 며칠을 흘려보냈다. 바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