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불길이 치솟았다.
자욱히 솟아오른 흙먼지에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까맣게 물든 밤하늘 위로 치솟은 연기는 뱀이 혀를 날름거리듯 어지러이 휘청이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안팎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오가는 소리와 비명이 섞여 눅눅한 여름내 사이로 묻혀버리는 듯 했다.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감았다 뜨며 뒷걸음칠치기 시작했다. 손에 들려진 것들을 서둘러 마당에 던져버리고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기 위해 다리를 절뚝거리며 인파 사이를 헤집었다. 하얗던 비단결이 바닥에 마구 짓이겨지고, 집 안에서부터 풍겨나오는 진득한 피 냄새는 점차 제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나는 살갗 위로 그 것들이 땅거미처럼 달라붙는 것만 같아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도로 이마 위로 쓸어올리자 손바닥 위를 가로지르는 흉터 마냥 터를 잡은 잿더미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짙은 연기 냄새에 눈이 멀고, 코 끝이 찡해져옴을 느끼며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막기 위해 여러번 거듭해 입술을 물었다.
무섭게 치솟아오른 불길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그 것도 찰나였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추고, 불길에 나무결이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남은 거리 위에는 어느 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살짝 들어올렸던 손을 도로 내리고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거대한 총성소리와 함께 우거진 숲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헌병대가 줄지어 대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まち(대기)! "
우두머리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헌병대 사이를 유유히 지나며 뱉은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집 안에 갇혀있을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은 나와 저만치 먼 곳, 헌병대의 눈길이 미처 닿지 못한 저택 뒷마당에 홀로 남겨져 있을 유모가 다인 듯 싶었다. 맞추어진 듯 질서있게 모여 선 헌병대 사이를 지나온 남자는 몇차례 주변의 것들을 살피더니 반쯤 얼굴을 가리고 있던 군모를 슬쩍 들어 저택을 바라보았다. 비틀어진 심사가 돋보이는 입매가 고집스럽게 다물어져 담배 따위를 물고 있었다.
남자의 입에 물려진 담배 끝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모습을 응시했다. 남자가 느릿하게 걸음을 디딜 때마다 열을 지어 갈라지는 사람들 탓에 나도 밀려나 듯 그들을 따라 바깥으로 비켜설 수 밖에 없었지만 코 끝을 스치는 익숙한 담배 향기만큼은 선명했다.
" 총독님께서 슬퍼하시겠군. "
남자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몇마디를 이죽거리더니 이내 뒤돌아 헌병대를 향해 손짓했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 고정시키고 있던 총을 집어든 헌병들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쏘아대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의 손에 들린 총이 먼저 발포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총알들이 사람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닥으로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한 앞줄 쪽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등을 돌려 반대쪽으로 향하는 갓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나무기둥 따위를 스쳐지나며 얼결에 마주쳤던 남자의 눈에 나는 가만히 입술을 다물고 뛸 수 밖에 없었다. 어눌하지도 않은, 유창한 발음으로 조선말을 짓껄인 그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표정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개를 쳐들고 아랫사람들 대하듯 바닥에 무릎을 꿇어내리며 핏물을 토해내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권위적이었다.
동지면서.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겨우 아물었다고 생각한 상처가 격한 움직임에 도로 벌어지기 시작한 듯, 핏물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옴에 따라 입술이 달달 떨려오기 시작했지만, 이내 그 비명소리마저 하나 둘 사라져가는 것에 울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갓길의 마지막 문턱에 선 채로 고개를 돌려 저택을 바라보았다. 건물 하나를 통채로 삼켜버릴 듯 불길이 맹렬하게 울부짖었다.
치맛자락을 쥔 손에 힘을 준다. 주저하던 나는 그대로 뒤돌아 불길이 치솟는 건물 안 쪽으로 달렸다. 한쪽 발에서 벗겨진 꽃신이 마구 바닥을 나뒹굴었지만 그 것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까맣게 변한 소매깃으로 닦아내며, 불길이 그나마 덜한 가장 안쪽의 문지방을 힘껏 젖혔다. 껍데기가 벗겨진 듯 살갗으로 다가오는 열기가 한층 뜨거워짐이 느껴졌다.
1.
뜨거운 열기에 기어코 정신을 놓고 만 어머니를 붙잡은 채로 울었다. 까맣게 재가 묻어난 얼굴이 가슴 위로 선명하게 다가와 박히는 듯 했다. 불씨가 튀어 살갗이 따가웠지만 그보다는 어머니가 우선이었다. 나는 힘없이 바닥에 늘어진 어머니의 손을 붙잡아들고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차마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저에게 용서해달라고. 결코 허락받지 못할 용서를 빌었다. 어깨를 붙들고 그 사이로 반쯤 몸을 웅크린 채로 끝없이 울음을 토해냈다. 울컥 터져버린 울음은 좀처럼 쉽게 그쳐들 것 같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어머니의 눈꺼풀이 단 한번이라도 뜨이길 바랬다. 제 살갗 위로 닿아오는 몸의 열기가 잠시라도 떠나질 않았으면 좋겠다 여겼다. 불길의 올가미로 된 어머니의 방을 둘러보며 울었다. 어스러져내리는 수랍장과 더불어 견고히 버티고 서 있던 나무기둥 마저 무섭게 떨궈지고 이제 남은 것은 저와 어미 뿐이었다.
불길이 치솟아오르는 반대쪽으로 어머니의 몸을 끌어올렸다. 축 늘어진 어머니의 몸을 붙잡은 채로 커다란 방 안을 따라 움직이기에는 힘에 부쳤지만, 그렇다고 어머니만을 남겨둘 수는 없었다. 이제와 무슨 쓸데없는 효심인가싶어 자조가 터져나오기도 했지만, 그만큼 번져가는 후회를 막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파리해진 어머니의 입술을 바라다보며 인상을 구겼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방울지며 소매를 끊임없이 적셔나갔다. 허리를 굽혀 어머니의 품에 안기며 한참을 울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당장이라도 어머니의 살가운 목소리와 함께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느껴질 것만 같았지만 언뜻 스쳐지났던 눈길에 닿은 것은 까맣게 재가 묻어난 채 떨구어진 어미의 손이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제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
어머니의 몸을 붙들어안은 채로 그 자리에 머물러있던 나는 어느샌가 가까이로 다가온 인기척을 느끼고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참이나 숙이고 있던 고개가 들리고 눈물로 얼룩져 잘 보이지도 않는 시야를 소매 끝으로 닦아내자 그제야 제 앞에 선 남자의 형상이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불길이 미처 닿지 못한 문지방 너머 사이로 나를 응시하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 일본인인가? "
남자는 익숙한 듯 유창한 조선말을 사용했다. 무뚝뚝한 어조에서 떨어져나오는 목소리에 놀라 눈동자를 굴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머니의 시체를 조금 더 가까이 붙들어안으며 남자의 반대쪽으로 뒷걸음질 치는 일 뿐이었다. 그래보았자 발길이 닿는 곳이 불이 번질대로 번진 계단의 끝일 뿐이라 뾰족한 수가 없었지만, 총도 폭탄도. 마땅히 목숨을 부지할 만한 도구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제가 택할 수 있는 일이란 도망 밖에 없었다.
" 시체를 들고 도망을 간다.. "
흥미롭다는 듯 조금 더 방문을 열어젖힌 남자가 내 품에 쓰러지듯 안겨진 어머니의 등을 바라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나는 어머니의 몸을 조금 더 안쪽으로 밀어젖히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방 안으로 자욱히 들어찬 연기에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졌다. 나는 남자의 눈을 또렷히 응시했다. 군모의 그림자가 드리운 아래로 반쯤 드러난 눈이 나를 희롱하는 듯 느껴져 울컥하고 분이 차올랐다.
반쯤 흐트러진 머리가 바람결을 따라 살랑이며 살갗을 간지럽혔다. 소매를 비집고 드는 열기가 마치 내가 불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졌다는 착각을 들게 할 만큼이나 뜨거웠다. 군모를 깊게 눌러쓴 남자는 무언가 할 말을 고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품 속에서 총을 집어들었다.
" 조선인인가? "
인상을 구기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말에 목구멍 사이로 마른 침이 넘어갔다. 곧이어 총머리를 반쯤 쥐여잡은 손으로 마저 수갑을 꺼내든 남자가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그리 좋지 못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사이로 마당으로 향하는 복도 끝이 드러났다. 바깥쪽 벽에 부딪힌 문은 금새 불이 옮겨붙어 타는 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총머리를 쥔 손을 들어 몇번 흔들어보이더니 이내 수갑을 짤랑였다. 그 모든 행동이 이 긴박한 상황과는 맞지 않게 묘하게 여유로워보여 심사가 뒤틀리는 듯 했다. 그래서였는지, 남자의 손을 떠난 총머리가 나를 향하고 이내 내 발치 앞에 떨어졌을 때, 나는 당황한 표정을 차마 숨기지 못하고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볼 수 밖에 없었다. 해보라는 듯 거만한 몸짓으로 몇번 고개를 까닥인 남자는 진부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어머니의 몸이 떨어져나가 불길에 닿지 않도록 유의하며 조심스레 허리를 굽힌 나는 그 때까지도 남자가 드러난 내 등 사이로 총기 따위를 꺼내들까 무서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마침내 손 끝에 차가운 총기의 끄트머리가 닿아옴과 동시에 그 것을 낚아챈 나는 언젠가 보았던 잔상을 떠올리며 남자의 얼굴을 향해 겨누었다. 총구 끄트머리를 바라보고 있을 남자의 갸름한 얼굴이 눈가 위로 또렷히 맺혀왔다.
짤막한 순간이었지만 어깨에 얹혀진 어머니의 입술 새로 숨결이 터져나오면. 지금 이 순간을 용서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언뜻 뇌리를 스친 것 같았다. 방아쇠 위에 얹혀진 손가락이 꼭 다른 사람의 신체마냥 어색하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돌려 내 머리에 겨눴다. 눈살이 찌푸려지도록 힘을 주어 눈꺼풀을 내린 저는 방아쇠를 쥔 손가락을 힘껏 당겼다.
" …. "
머리를 짖이기듯 아려오는 고통도, 그 어떤 암전도 없음에 놀라는 것도 잠시 고개를 든 저는 이내 총구 반대편을 서툰 손길로 더듬기 시작했다. 당황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손짓이었다. 달달 떨려오는 손에 이내 바닥으로 떨구어진 그 것은 기울어진 바닥을 따라 바깥쪽을 향하더니 불길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남자의 꿍꿍이를 알 수 없어 발갛게 달아오른 볼로 고개를 든다.
제대로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하고, 몇 번이나 헛방아질을 하는 제가 우습다는 듯 손짓한 남자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일전의 딱딱하고 사무적인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제법 상냥한 것이라 놀란 나는 참고 있던 숨을 뱉을 수 밖에 없었다.
" 따라 와. "
-
남자와 함께 기차에 오른 나는 이내 남자의 동료를 자처하는 괴상한 차림의 남자를 하나 더 만날 수 있었다. 저를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다고 하던 남자는 그런 남자의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귀빈석 안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바깥 풍경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괴상한 차림의 남자는 제 맞은 편에 앉아 입에 맞을리가 없지만 일단 배라도 채워야하지 않겠느냐며 귀빈석 구석에 박혀있던 가방을 꺼내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를 한 번, 여전히 알 수 없는 헌병대 차림을 한 남자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보는 저는 지금 이 상황이 혼란스러워 미처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 음, 좀 오래되긴 했는데.. "
통 속에 액체를 들고 그 동안의 시간을 가늠하는 듯 잠시 가늘어졌던 남자의 눈이 도로 풀려지더니 이내 저를 향했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귀빈석 내를 뒤적여 잔 몇 개를 찾아들더니 그 안으로 통 속의 액체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제법 깊숙히 파인 유리잔이 가득 메워지도록 채운 그는 일단 먹고 보라며 고갯짓했다. 저를 이곳까지 안내해주고 옷 몇벌을 사다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아직 정확한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건네는 음료도 무턱대고 마실 용기는 없어 주저하던 차였다.
창 밖을 응시하던 남자는 문득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하더니 제 옆에 앉은 남자의 입술에 두터운 수건 따위를 물려주며 설핏 웃어보였다.
" 영감은 그 말 좀 줄이면 참 좋겠어. "
영문도 모른 채 물었던 수건을 머쓱한 손길로 도로 빼낸 남자는 고개를 쭈욱 내민 채로 어깨를 늘어트리며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쪽은 영감. 제 옆의 남자를 소개하듯 말문을 뗀 남자는 단조롭기에 짝이 없는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제 소개를 하라는 듯 주어지는 압박에 헛기침을 뱉으며 눈치를 보니 이내 영감을 따라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뉘인다.
" 경성까지 가면, 거기서 헤어질거야. "
" ...예? "
영감의 대답에 슬쩍 눈을 흘긴 남자가 눈썹을 찡그리며 마저 말을 이었다. 우리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데 저렇게 어린 애를 데리고 다닐 수도 없잖아. 나는 나를 짐짝으로 취급하는 남자의 태도가 조금 못마땅했지만 그의 말이 마냥 틀린 것만은 아니라 조용히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연 중에 향한 눈길 사이로 어렴풋이 흔들리는 바닥이 맺혔다. 지금껏 제가 한번도 밟아보지 못했던 고급스런 카페트 위로 얹혀진 양질의 구두가 어색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