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 성동혁, 1226456
외국물은 역시 달라! 쏘 머치 디퍼런트!
강남 고깃집에서 술에 꼴은 김 팀장이 입술을 비볐다. 그녀는 내 볼과 광대뼈 언저리쯤 진득한 입술을 남기고 헤프게 웃었다. 해낼 줄 알았어. 싹수가 딱 보였다니까. 싹수가 영어로 뭐야? 응? 옆자리 박이 그녀를 말렸다. 팀장님 술 좀 작작 처! 마시라니까요! 감당 못 할 그녀의 입술이 박에게 돌진했다. 뒤로 넘어간 그들에게 장난스러운 야유가 들렸다. 단독 인터뷰를 위하여! 공중에 축배가 들렸다.
팀장은 지훈의 조건을 흔쾌히 수락했다. 인터뷰 따낸 사람이 끝까지 가면 운이 좋아. 잘 해봐. 제 담당이었던 최가 옆에서 약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쉽지만 전 다음 기회에. 그러면서 실실 웃는다. 적잖이 싫었던 눈치였다. 싸가지는 우리 팀장님으로도 충분하거든요. 두 시간 뒤 술에 꼴은 최가 은연중 말을 흘렸다. 경쟁사에 뺏긴 피라미보다 잘 빠진 금빛 잉어 건졌으니 얼마나 좋게요? 그렇게 마다하더니 인터뷰도 척척 해주고! 미스 캐나다 씨 우리 팀 복덩이로 들어온 거죠? 캐나다 가지 말고 우리랑 같이 쭉 있어요. 팀장님 히스테리 바이바이! 복수도 한방! 소고기도 한방!
거나하게 취했던 것 같다. 감사 주. 고맙 주. 그냥 주. 먹어 주. 따라주는 술만 직원 수대로 마셔도 만취였다. 자정 너머 택시는 언덕길 편의점 앞에 멈췄다. 빗길이라 미끄럽다는 핑계로 혼자 떠드는 주정뱅이를 내칠 모양이었다. 기사는 단말기를 내밀었다. 우리는 여기까지라고. 기사님, 우리 헤어져요? 정말 끝인 거예요? 영수증은 받지 않아요. 제 마음을 이곳에 사인하겠어요. 뒷문이 닫히는 순간 기사는 질린 얼굴로 차를 돌렸다. 뭐 그렇게 바쁘시다고. 일방통행 화살표를 역행해 달아나는 택시의 빨간 불빛을 시무룩하게 쳐다보다 편의점 문을 열었다. 투명 우산을 어깨에 메고 만 원을 카운터에 탁. 오천 원이라고 했는데 만 원 주고 나왔다. 직원이 거스름돈을 가지고 바깥까지 나왔다. 팁이에요. 직원은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기분이 좋았다. 샌들이 소나기에 젖어 찝찝해도. 가로등 몇 개가 꺼진 언덕길을 올라가면서도. 숨이 점점 차올라도. 굵은 빗방울에 우산이 무거워도.
― ‘연락할게.’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무려 1년 넘게 거절한 인터뷰를 승낙한 이유가 있다면 그중 하나가 나였으면 좋겠다고.
― ‘예전처럼 웃지도 않아.’
……
― ‘그 새끼 좀 살려주라.’
승관은 아물지 않는 상처를 보듬는 것도 내 일이라고 했다. 모든 건 나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끝을 맺는 것도 내 몫이라고. 불 꺼진 거실에 누워 지훈을 되감는다. 뜻밖의 해후 속 날이 선 눈빛과 가시 같은 말투. 드라마처럼 격한 포옹도, 진한 키스도, 하물며 눈물조차 없었다. 부유한 안개 속을 걷는 것만 같았다. 가파른 숨을 뱉으며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이내 날 향하던 새까만 눈을 떠올렸다. 일주일 넘도록 오지 않았던 연락, 특별한 조건, 그리고 어렴풋한 미소가 스쳤던 그 순간도. 만약 그것이 우리의 시작을 알린 거라면. 돌아가는 길목에 서 있는 당신이 이지훈, 바로 너라면.
모닥불처럼 타들어 가는 빗물이 창을 두드린다. 베란다 커튼 사이 들어오는 네온사인 불빛이 뺨을 적신다. 빨갛고 파랗던 것이 차차 어둠으로 사라졌다. 휴대폰을 곁에 두고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자동차 클락션이 때때로 창을 넘었다. 내일부터 술병에 시달릴 것 말고는 특별한 주말 계획은 없었다. 딱 한 가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거다. 초야의 선비처럼. 연락은 언제 오려나. 점심에 왔으면 좋겠다. 밥 먹을 핑계 댈 수도 있고. 방금 전 초야의 선비처럼 참을성 있게 기다리자고 했는데.
― ‘상시 대기. 연락 미스 나면 너희만 손해니까.’
지지고 볶고 맘대로 하고 싶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상대는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는 이지훈. 쉽게 넘겨짚을 인물이 아니었다. 각 잡고 조지는 건 비단 커리어만이 아니었음을.
토요일 새벽 5시.
지옥의 서막이 올랐다.
Oh My Rainbow
; The Finale
03. Bloom
동작역 1번 출구.
운동화 필수 지참.
한 시간 이내.
거실 바닥에서 튕기듯 일어나 고양이 세수만 하고 나갔더랬다. 녹음기와 노트북을 넣은 백팩이 좌우로 힘차게 흔들렸다. 개처럼 뛰고 있다는 거다. 짙은 어둠 속, 길게 뻗은 도로에 오백 미터 간격으로 설치된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며 속력을 가했다. 동작역 1번 출구 표지판을 짚고 젖은 머리카락을 넘겼다. 습기 찬 유리처럼 두피부터 땀이 흥건했다. 혼자 캐리비안베이 갔다는 의심을 사지 않길 바랄 뿐이었고 목구멍에서 전날 술과 안주를 토하지 않으면 백 세 인생은 거뜬하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나무 밑에서 나이키 운동복 차림으로 여유롭게 몸을 풀던 그가 멈칫했다. 출구 앞 비장한 눈빛과 마주한 것이다. 곰 아니고 사람이야. 물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듯 매무새를 만지며 다가가자 의아한 듯 물었다. 택시 안 탔어? 달리기가 심장에 좋잖아. 심장이 안 좋아? 예방하는 거야. 백 세 인생 살아야 하니까. 침을 꿀꺽 삼킨다. 사실 택시는 안중에도 없었다.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문자를 받자마자 이곳을 향해 달려갈 생각밖에 안 했으니까.
― “달려왔어?”
― “아니? 근처에서 운동하고 있었지.”
― “근처 어디?”
― “…남산타워?”
― “그게 근처라고?”
― “팔각정 공기 좋더라. 하하…….”
강북과 강남이 없던 도가니를 칠 지경이었다. 그가 던진 물병이 포물선을 그렸다. 본능적으로 들이켰다. 일명 동작역 1번 출구 삼다수 쇼. 인터뷰하려고 부른 거지? 어디로 가면 돼? 턱밑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하지만 묵묵부답. 그가 다리를 굽혀 운동화 끈을 조였다. 어디 멀리 나가려는 사람처럼.
― “달려.”
― “뭘?”
……뭐가 빠르게 지나간 것 같은데. 빈 물병을 쥐고 혼자 지키는 1번 출구. 머리 위로 까마귀가 울었다. 저 멀리 시야에 잡힌 이지훈이 손짓한다. 그는 벌써 저만치 달리고 있었다. 뭔데! 뭐 하는데! 얼떨결에 그를 쫓는다. 백팩이 또 달랑달랑. 교문 닫히기 5분 전의 초딩처럼. 살면서 그렇게 달려본 적이 있을까. 학교 다닐 때는 오래 달리기를 오래 걷기로 진작에 경기 명을 바꿔 제시간에 들어와 본 적도 없다. 전날 과음과 과식이 식도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한 손은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은 같이 가자고 아우성 했다. 그는 동작 대교를 지나 반포지구로 쉬지 않고 달렸다. 비 때문에 미끄러운 아스팔트에서도 그는 잘만 뛰었다.
두 개의 심장은 박지성뿐이라며. 전 국민 다 속은 거야. 여기 또 있어. 점점 느려지는 다리가 흙바닥에서 주저앉고 만다. 그는 이미 점이다. 완두콩보다 작았다. 아니다. 이젠 흑미 쌀 같아. 밥알에서 죄다 골라내기 전에 돌아와. 나쁜 새끼야! 돌아와! 세상은 해 뜨기 직전의 보랏빛. 양옆에 핀 토끼풀이 습한 바람에 나풀거렸다. 얘들아, 나도 땅에 박혀서 흔들리자. 토할 것 같아. 내가 양분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자리 좀 줘봐. 텃세 부리지 말고.
― “순 어리광.”
뒤도 돌아보지 않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손을 내민다. 토끼풀 양분으로 희생될 뻔했는데 제시간에 찾아와줘서 고마워. 헛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그가 이번엔 백팩을 가져간다. 꼭 쓸데없는 거 가져오지. 말은 저렇게 하면서 죽음의 달리기는 하지 않았다. 이름 모를 풀꽃이 흐드러진 길을 나란히 걸었다.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손바닥에 달라붙는 축축함에 간혹 노려보기도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멀리 한강 공원이 보이자 그가 가볍게 스트레칭했다. 밴쿠버의 아침보다 다정해 보이는 햇살을 보면서.
― “고온다습한 다정이다.”
― “뭐가.”
― “나 이런 다정 좋아하는 것 같아.”
― “뭔 말이야.”
― “밴쿠버보다 온도가 높고 습하지만 더 예쁘다고.”
― “한강은 원래 예뻐.”
― “그니까. 예쁜 한강을 어떻게 뛰는지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지 새벽에 직접 달리고 싶다고는 안 했거든.”
― “시간 나면 체력 관리는 여기서 해요.”
― “갑자기 존댓말?”
― “헬스장 가는 것보다 밖에서 뛰는 게 스트레스 푸는 데 도움도 되고요.”
인터뷰하러 왔다며. 하는 중이잖아, 지금. 머리 위로 마침표 일곱 개가 차례대로 찍혔다. 그러니까 행동력 남바완인 이지훈이 체력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말 뿐만 아니라 몸소 보여준 게 아니던가. 시상식 날 그를 설득하려 줄줄이 나열한 항목 중 하나였던 체력관리에 대한 물음을, 그 짧은 대답을 위해 소중한 걸음을 한 것이다.
― “직접 봐야 문장이 더 생동감 넘치니까.”
― “에디터 문장력까지 생각해주고 참.”
― “고마울 건 없어.”
― “두 번 뛰면 글자가 다 튀어나오겠다야.”
― “출발점까지 다시 돌아갈 건데 안 가?”
― “차라리 날 죽여.”
― “밥이나 먹고 들어가자.”
― “해장국. 어제 술 먹어서 토할 것 같아.”
허리를 숙여 금방이라도 게워낼 것 같은 입을 막는다. 썬 캡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팔을 앞뒤로 쫙쫙 뻗으며 아침 마실을 나온 중년들이 내 등을 후려치는 듯한 지훈과 나를 보며 혀를 찼다. 젊어서 술병 나면 늙어서도 고생인디. 아유, 차였네. 차였어. 딱 봐도 남자가 찼구만 뭘. 얼마나 마셨으면 헤어지지도 못하고 옛 애인 등을 두드리고 앉았어. 요즘 세상 참 변했어, 그죠? 응급 상황에도 부정하고자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1년 넘게 거부 당한 인터뷰를 제가 땄다니까요? 얘 싸가지라고 막 사람들이, 어? 그걸 아세요? 무리 중 썬 캡을 위로 올리며 다가온 아주머니는 내 손짓에 측은 지심이 들었는지 손을 꼭, 아주 꼬-옥- 잡았다.
― “세상에 남자는 많아, 아가씨.”
― “네, 계속 오해해 주세요…….”
― “이 총각은 왜 이리 화가 나 있어?”
― “혹 눈썹이 올라가 있나요?”
― “엄청.”
― “웃고 있는 거예요.”
아이구. 둘이 똑같네. 똑같아. 싸우지 말고 헤어지지도 말고 서로 아껴주면서 살아. 그녀가 덕담 아닌 덕담을 던지며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눈썹이 올라가 있으면 내가 웃고 있어? 그가 피식 웃으며 묻는다. 왜? 이젠 안 그래? 허리를 굽힌 채 되묻는다. 이미 속은 진정이 되었는데도.
― “그걸 기억하나 싶어서.”
― “당연히 기억하지.”
― “그게 당연해?”
― “응.”
허리를 들어 아무렇지 않게 앞장선다. 그는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쏟아지는 햇빛, 이른 금빛으로 물든 한강.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말 없는 우리. 너를 기억하는 건 당연한 거야. 웃을 때 예쁘게 접히는 눈꼬리. 골똘히 생각할 때 보이는 입가 위 보조개. 가지런한 송곳니. 습관처럼 머리를 넘기는 매끄러운 손가락. 지금도 길 위에 떨어진 이름 모를 꽃을 들고 유심히 바라보는 것까지.
― “역까지 타고 가.”
― “괜찮아, 아침이라 버스 많아.”
― “그래, 그럼.”
식사를 끝낸 지훈이 검은색 벤츠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멀어졌다. 오전 아홉 시가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과는 반대로 걸었다. 그와 달렸던 길로 돌아가는 것이다. 주말 나들이에 없어서는 서운할 관광버스가 교통 체증에 시달렸고 연달아 초록 불이 켜져도 버스를 포함한 차들이 갇혀 신음했다. 들끓는 아스팔트와 열기가 곳곳에 스며든다. 동작역 1번 출구가 보일 때까지, 그렇게 걸었다. 한 손엔 이름 모를 풀꽃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체를 느끼며.
* * *
지훈은 평일과 주말 상관없이 수시로 나를 불러냈다. 인터뷰에 대한 질문이 있다고 굳이 K 건설로 불러내서는 점심을 함께했고, 주말 밤에는 그가 요기요 대신 내 번호를 누른 덕분에 두 손은 항상 무거웠다. 메뉴는 주로 초밥. 시큐리티밖에 없는 빌딩 로비에서 야무지게 초밥을 해치우는 그는 정작 인터뷰에 관한 질문이 일절 없었다. 도대체 이유 없이 왜 불러 제끼느냐 물으면, 그는 혼자 밥 먹기 싫다고 간단히 답했다. 낮은 물론 야근이 습성인 동료들이 그를 혼자 둘 리 없다. 그는 한참 뒤에 그들이 정한 메뉴가 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로비 구석 엘리베이터에서 피곤에 절은 듯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지훈에게 아는 체하며 이렇게 말하는 거다.
초밥 먹기 싫다면서 내빼더니 이분이랑 약속 있었던 거야? 안녕하세요? 여러 명이 손을 내밀기에 어쩔 수 없이 각자 맞잡고 인사했다. 지훈은 귀찮은 듯 저리 가라며 휘휘 손짓했다. 왁자지껄한 그들이 떠나가자 다시 정적이 왔다. 비 내리는 전경을 바라보며 물을 마시던 지훈이 대뜸 잘 먹었단다. 초밥 먹기 싫다더니 나한테는 초밥 사 오라고 시킨 거야? 일부러? 똥개 훈련이야? 너 이거 갑질이야.
― “아까는 먹기 싫었어.”
―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 “응.”
― “너 때문에 오늘도 야근이잖아.”
― “축하해.”
가슴이 웅장해진다. 왜 개싸가지 별명이 붙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밥을 먹으며 읽던 서류 뭉치들을 정리한 그가 평소처럼 일어난다. 다음엔 연남에서 시켜. 신촌은 이제 별로다. 동료들이 내렸던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려는 그를 붙잡았다. 언제까지 놀아날쏘냐.
― “다음부터 인터뷰 관한 질문은 전화로 하자?”
― “생각해 보고.”
― “다음 인터뷰 스케줄 언제야? 우리 할 거 많아.”
― “봐서.”
그에게 시달리고 나면 사무실에서의 밤샘은 기본이었다. 하루 이틀이던가. 다크서클의 깊이는 나날로 깊어져 가는데 정시 출근한 팀장이 다가와 책상에 커피를 두고 격려했다. 인터뷰 당사자와 친밀도를 쌓으면 흐름이 달라진다니까. 더 깊이 팔 수 있는 거지. 미스 캐나다 다크서클처럼. 나름 훈장이라고 생각해. 그녀가 내 어깨를 강하게 잡는다. 이제 체력 관리 하나 알았다고요. 혹시 캐나다 본사 부편집장님 아세요? 그분이 절 보내셨거든요? 이건 필시 어둠의 조직과 연결된 음모인 게 틀림없습니다. 한국 온 이후로부터 되는 게 하나도 없고요. 팀장님도 조직원 중 한 명이죠? 고소할 거야.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면서 술래잡기하는 나와 팀장을 보던 박과 최는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불난 호떡집 구경만 실컷 했다.
심지어 그는 새벽에도 종종 대리운전을 맡겼다. 내 번호는 앞뒤가 똑같지 않아. 혹시 대리운전이라고 저장했니? 술도 잘 받지 않으면서 회식이라도 있는 날엔 꼭 얼굴이 빨개져서는 내게 키를 던졌다. 주소 네비에 있어. 그 말을 끝으로 앞 좌석에서 기절한 듯 잠에 들었다. 오피스텔에 도착하면 귀신같이 깨더니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에 팔을 올리고 또 잠을 자는 듯 말이 없었다. 가끔 한숨 섞인 숨을 뱉는 것 말고는.
― ‘2016 다음에 뭐라고?’
― ‘뭐.’
― ‘응?’
― ‘그거.’
― ‘그거 뭐?’
― ‘엉.’
― ‘이지훈 멍청해.’
― ‘다 들려.’
― ‘왜 이런 것만 잘 들어?’
― ‘엉, 그래.’
물개도 아니고 엉엉 대는 이지훈을 현관 앞에서 거의 한 시간을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무슨 정신이 든 건지 벌떡 일어난 그가 번호를 눌렀다. 해제되었습니다. 유유히 안으로 들어가는 무의식이 무서웠다. 신발도 벗지 못하고 문 앞에 넘어질 듯 앉기에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힘겹게 벽을 잡고 일어난 그가 현관을 팔로 막아선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했다.
― ‘들어오지 마.’
― ‘…….’
― ‘가.’
달칵 닫힌 문. 잠긴 도어락. 꺼진 센서 등. 쓸려오는 여름 바람. 이지훈 그렇게 버리고 갔으면서 되레 상처받은 척하기는. 이기적이다, 너. 적반하장이라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빨개진 눈을 벅벅 닦는다. 나는 왜 울지.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아서? 엉엉 물개처럼 우는 이지훈을 쥐어박고 싶어서? 앞뒤가 똑같은 번호라고 오해받아서? 아니, 이젠 저 영역 안에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아서. 일을 핑계로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겠니. 몇 번 좀 불러줬다고 마음이 동한 것뿐이야. 단지 그뿐이야, 라고.
* * *
아침부터 침대에 앉아 시리얼을 말았다. 한 움큼 주워 먹지 않아도 우유와 건더기의 양은 동일하다. 금세 양이 줄었다. 입맛이 없던 탓이기도 했다. 팀장의 문자가 연달아 울렸다. 오랜만에 한국 왔는데 몸이 고생하네. 한 템포 쉬어 간다고 생각하고 몸조리 잘해. 달고 살던 편두통이 문제였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했다. 애드빌 대여섯 개를 우르르 삼키고 하루 종일 자야 겨우 진정되는 불치병이었다. 의사는 한두 알이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과도 복용은 때론 기분을 나아지게 했다. 마리화나는 물지도 않았지만 가끔 욕구가 당기면 아픈 날만 기다렸다가 때려 붓던 못된 습관이었다.
팀장 밑에 쌓인 승관의 문자가 깜빡였다. 제 쉬는 날 먹기로 한 족발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주말 명화 오에스티 라디오 게스트로 발탁된 승관은 일주일 내내 바빴다. 주소 불러라. 배달 시켜 줄게. 두 명처럼 먹어. 너 잘하잖아. 자잘한 이모티콘 몇 개를 쏴준 후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다시 쨍한 햇살이 얼굴에 드리운다. 지훈의 연락은 없었다.
바람도 쐴 겸 미용실을 다녀오고 장도 보고 엄마는 외계인이라는 다소 난해한 아이스크림까지 사 먹었는데 그때까지도 연락은 없었다. 집에서 뻗어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닐까. 혹시 바닥에 코를 잘못 박아 머리가 깨진 건 아닐까.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골목길에 서서 전화를 걸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건조한 목소리만. 장 바구니를 죄다 냉장고 안에 쑤셔 넣고는 마실 차림으로 지하철을 탔다. 하늘은 먹구름을 몰고 오더니 기어코 비를 내렸다. 노란 우산을 짐처럼 짊어지고 빗물 젖은 도보를 빠르게 걸었다. 붉은 네온사인이 인상적인 24시 할매순대국.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이지훈의 단골 맛집이란다. 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직원이었고 조만간 맛집 인터뷰를 해야 하니 사전 답사가 필요했다. 절대 궁금하고 배고파서 그런 게 아니라 당사자와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니까. 응.
곱빼기로 주세요. 내장 많이요. 소주는 다 나올 때 주세요. 미니 항아리에서 배추와 깍두기를 꺼내 정성껏 썬다. 다시 말하지만 배고파서가 아니라 라포 형성을 위해서. 가게 내부에 특유의 삶은 돼지 냄새가 폴폴 풍겼다. 정겨웠다. 비 내리는 서울을 바라보며 생각에 젖는 것도 좋았다. 고온다습한 다정이란 거, 진짜 나 좋아하나 봐. 습하고 신경질 나지만 따뜻하잖아. 푸른 소나무도 있고, 조는 해바라기도 있고, 한강에서 본 풀꽃도 있고, 이지훈도 있고.
……뭐?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K 건설 로비에서 봤던 그들이었다. 다크서클이 깊게 자리한 그들 사이, 검은색 모자를 쓴 이지훈이 눈을 비비며 들어왔다. 고온다습 멈추세요. 서울 구경 올 스탑입니다. 차가운 흰 벽에 얼굴을 붙였다. 칸막이도 없는 개방적인 곳에서 그들은 보란 듯이 중앙 다인석 테이블을 꿰찼다. 그는 등을 보이며 앉았지만, 굉장히 크게 반가워하며 로비에서 인사를 건네던 남자가 맞은편에 앉은 탓에 긴장감은 늦출 수 없었다.
주인과 살갑게 인사하던 남자가 이번엔 타깃을 지훈으로 돌렸다. 지훈 씨 아니었으면 일주일 밤새도 모자랐을 텐데. 팀장님 존댓말 어색해요. 계속 내 옆에 있어라, 엉? 승진은 막지 마시고요. 지훈의 농담에 웃음이 그칠 줄 몰랐다. 그래요. 그대로 서로에게 집중해주세요. 전 나갈게요. 벽에 붙은 채 하얀 모자를 깊게 눌렀다. 뒷주머니에서 두 번 접힌 이만 원을 접시 밑에 끼웠다. 이제 문제는 출입문까지 가려면 저들을 꼭 지나쳐야 했는데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먹튀처럼 미친 듯이 달려서 나가거나, 아니면 자연스럽게. 아주 부드럽게. 터질 듯한 배를 두드리며 여유롭게. 우산을 방패로 얼굴을 가리며 나가면 더 괜찮은 방법이겠다. 왼 발에 그가 제발 뒤를 돌아보지 않길. 오른 발에 저 남자가 날 알아보지 않길. 지나가는 사람 연기를 기똥차게 잘하는 엑스트라 53의 연기와 같이.
― “여기서 뭐 해?”
눈썹이 올라가면 웃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는 뒷모습만 보고도 나인 걸 알아챘다. 우린 참 모르는 게 없다.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창피함이 먼저 드는 까닭은, 앞서 말했다시피 마실 차림으로 나와 상의는 후줄근한 티셔츠와 무릎 늘어진 추리닝 때문이라 말할 수 있겠다. 고개를 숙여 얼굴을 확인한 남자가 손뼉을 치며 반가워했다. 그때 그분이네? 초밥! 남자와 함께 있었던 몇 사람들도 저마다 아는 체를 했다. 등이 차갑게 식었다. 귀가 뜨거웠다. 하지만 정작 지훈은 담담했다. 다행이다. 술 못 깨고 쓰러져서 죽은 줄 알았어. 그리고 미소 짓는다는 것이 그만 한쪽 입꼬리가 경련 되어 조커 같았다. 죽고 싶다. 정말 조커한테 걸려서 죽고 싶다. 맞은편 남자는 내 테이블에 올려진 순댓국과 소주를 보며 같이 먹자고 야무지게 옆자리 의자를 끌었다. 괜찮습니다. 많이 드세요. 먼저 갈게요. 휴대폰 게임에만 집중하던 지훈도 옆에서 거들었다. 먹고 가. 우리 때문에 손도 못 댄 것 같은데. 눈치는 승관 보다 한 수 위임이라.
그의 옆에 앉으니 사람들이 눈빛으로 묻는다. 당신은 뉘신 지. 그린 에이지에서 인터뷰하시는 분이요. 지훈은 그 시선들을 용케 알아차리고 가볍게 답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끈질기게 붙잡더니 결국 하네요? 초밥으로 날 기억하던 남자가 말을 이었다. 왜, 다들 기억 안 나? 작년에도 저쪽 팀장이 빌딩 인포에서 구구절절 거의 울다시피 사정했는데 얘 꿈쩍도 안 했잖아. 우리한테 설득 좀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얘 나보고도 그랬어. 질린다면서. 어차피 할 거 왜 그렇게 튕겼는지 몰라.
지훈은 보스몹을 깨느라 정신이 없었다. 얘 원래 그래. 신경 쓰지 말아요. 남자는 지훈의 싹퉁바가지를 칭찬했다. 일은 잘하는데 남이 얘기하면 관심 없는 티를 팍팍 내요. 지금도 본인 얘기하고 있는데 들은 척도 안 하잖아. 근데 인터뷰에 나도 끼워주면 안 돼요? 우리 회사 자랑 좀 하게. 그쪽 이름은 뭐예요? 번호 남겨주면 더 좋고. 지훈은 그제서야 휴대폰에 눈을 거뒀다. 팀장님 뒤에 밥 와요. 그렇게 들은 척도 안 하더니.
― “오늘 시간 돼?”
― “왜.”
― “다음 주에 1차 보고해야 하는데 우리 한 게 별로 없잖아.”
― “밥 먹고 시간 좀 남으니까 그때 해.”
― “오케이.”
얼굴 닳아. 안 봤어. 밥 먹어. 깍두기 먹을 거야. 네가 다 먹었어. 맛있으니까. 편식하네. 어른은 해도 돼. 어릴 때도 그랬잖아. 그땐 어리니까 할 수 있는 거고. 앞뒤가 오묘하게 맞네. 그래서 내 번호 앞뒤가 똑같은 대리운전이라고 저장했어? 그런 적 없어. 근데 술 취하면 자꾸 전화해? 대리운전인 줄 알았나. 너 때문에 야근을 얼마나 하는 줄 알아? 축하한다고 했잖아. 진심이 없어. 정-말-축-하-해-.
둘이 원래 아는 사이예요? 반말이 자연스럽네? 남자가 밥을 욱여넣으며 묻는다. 필사적으로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나와 달리 지훈은 무덤덤함 그 자체였다. 문제는 눈치 없는 그였다. 정확히 말하면 눈치 없는 척.
― “만났었어요. 예전에.”
바보같이 간과했다. 이지훈은 솔직하다는 것. 숨기면 숨길수록 그는 더욱 파헤친다는 것. 남자는 아예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민함이 꼭대기에 있는 애를 만나요? 어렸을 때부터? 성깔 장난 아닌데?
글쎄, 내게 예민한 적이 있었던가. 대놓고 성질부리는 건 보지 못했는데. 하기 싫어도 막상 하면 제일 잘하고, 원래 밥도 십분 컷으로 먹는데 비슷한 속도로 먹어 주고, 표현을 잘 안 해서 이기적일 것 같은데 은근 이벤트도 잘해주고, 같이 불꽃놀이도 보고, 인형 뽑기 할 때만 승부욕 때문에 조금 민감했던 것 빼고는 없었는데.
남자가 장난스레 한쪽 눈을 찌푸렸다. 그쪽한테만 잘해주는 스타일이구나? 만난 지 얼마나 됐어요? 1년? 2년? 아, 예전에 만났다고 했지? 뭐 때문에 헤어졌어요? 내가 해결해 줄게. 내가 시킨 소주는 팀장이 한 방울도 남김없이 해치운 뒤였다. 아무래도 당신이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속으로 그 말을 삼키며 또 그러냐는 듯한 사람들의 얼굴을 살필 때였다. 그가 먼저 일어나 계산서를 챙겼다.
― “먼저 갈게요.”
― “왜 헤어졌냐니까?”
― “고온다습하지 않아서요.”
알콜에 지배된 남자는 지훈의 대답과는 상관없이 박수를 쳤다. 계산을 했어! 우리 지훈이가! 옆자리 팀원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지훈 씨가 다 했잖아요. 팀장님 만취하셔서 못 보신 것뿐이지. 지훈은 그러거나 말거나 카운터에서 계산 후 바로 밖을 나섰다. 팀장이야. 술만 마시면 저래. 우리 팀에도 저런 사람 있어. 직급은 같아. 팀장 되면 저렇게 되나 봐. 지훈이 픽 웃었다.
* * *
Q1. 건축으로 꿈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 텐데요.
A1. 아버지가 건축 일을 하셔서 자연스럽게 관심사가 그쪽으로 갔죠. 사실 어머니는 의사를 원하셨는데 딱히 제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었어요. 외과 의사 사촌 형이 걸핏하면 다 때려치우고 로빈 크루소 돼서 무인도에 고립되고 싶다는 말을 자주 들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Q2. 건축의 길로 들어서면서 가장 힘든 점이 있을까요?
A2. 아무래도 시간과 체력의 싸움이 아닐까 싶어요. 잠을 많이 자는 스타일인데 본격적으로 업으로 삼은 이후부터 제대로 잔 적이 없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만큼 공들인 도면이나 디자인이 잘 나오면 뿌듯하죠.
Q3. 스트레스가 많을 것 같아요.
A3. 어쩔 땐 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도 많아요. 계속 사무실에 살면서 며칠 동안 집에 못 들어 간 적도 있었고, 날짜 개념도 달력 보고 알 정도였어요. 한 번은 최종까지 갔던 도면을 엎어야 할 때가 있었는데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죠.
Q4. 지훈 씨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을까요?
A4.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작업물이 생각한 대로 잘 나오면 그만한 해소법이 없죠. 반대로 막히는 느낌이 들면 잠깐 잠을 잔다거나 가끔 새벽 조깅을 나가요. 생각 정리도 되고 한결 나아지더라고요. 요즘은 사촌 형이 같이 달리자고 연락 오는데 백 퍼센트 마실 정도나 갈 사람이란 걸 알아서 몰래 나가고요.
Q5. 사촌 형과 친하신가 봐요?
A5. 외동이란 것도 있고 어렸을 때부터 자주 같이 놀았어요. 집도 가까워서 야식 먹고 싶으면 형이 몰래 불러서 대문 앞에서 컵라면 먹고, 들키면 혼자 도망가서 저만 혼났는데 다시는 같이 놀지 않을 거라고 다짐해도 다음 날이면 풀려서 문제였죠. 형이 피규어를 모았는데 그중 몇 개를 들고 찾아왔거든요. 꼭 제가 좋아하는 모델로.
Q6. ‘차갑다’, ‘예민하다’라는 단어가 그리 생소하진 않으실 것 같은데 솔직한 마음은 어떠세요? 작년 공모전 대상 인터뷰 컨택을 거절하셨다고 들었거든요. 이번 인터뷰도 사실 어떻게 보면 겨우 이뤄낸 거라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A6. 판단은 사람들의 몫이니 어쩔 수 없죠. 일부러 나서서 내 마음은 이래, 사실은 그게 아니야, 라고 부정할 필요도 없었고요. 인터뷰를 거부했던 이유는 아마 아실 거예요. 제가 아니라 제 부모님과 배경에 포커스 맞춰지는 게 싫었어요. 공모전 수상 소감보다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을 건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어떤 주식을 사들일 건지 사람들의 관심은 확실히 거기에 가 있으니까요. 이번 인터뷰는 그런 질문 없을 거라 하셨으니 편해져도 되겠죠.
Q7. 그럼요. 이제 마음 놓으시고 편하게 하셔도 돼요.
A7. 사실 시작할 때부터 편했어요.
Q8. 다행이에요. 그럼 이번엔 작품 이야기로 들어가 볼게요. A대 건축학과 졸업작품 당시 프리지아를 굉장히 많이 넣으셨더라구요. 작품 제목도 ‘프리지아’였는데요. 작품의 짧은 소개와 프리지아와는 어떤 관계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A8. 그때 주제가 아마 현대사회에 잃어버린 과거를 간직하기 위한 주거시설이었을 거예요. 아무래도 현재에 과거를 심는 게 포인트이다 보니 신축보다 리모델링으로 결정했고요. 프리지아를 넣은 이유는 개인적으로 당시에 그 꽃이 제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매개체였기 때문에 표현하는 입장으로서 전달하고 싶었어요. 주제와 소개와 실제 작품 세 요소가 잘 맞아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Q9. 작년 공모전 역시 프리지아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주제가 ‘추억’이었어요. 프리지아가 과거의 매개체라 하셨으니 추억이라는 주제 역시 감히 추측해 보는데요. 그 작품이 이번 젊은 예비 건축가상 수상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개인적인 질문이긴 하나, 이 인터뷰를 보시는 분들도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프리지아란 지훈 씨에게 어떤 과거였으며, 또 어떤 추억이 있을까요.
A9. 생각하면 아프고 힘든 시간이었죠. 한때 그 프리지아가 저였고, 또 누군가였고, 우리의 마음이었고, 일방적인 이별이었어요. 많은 의미가 있는 과거죠. 저에겐. 작품 속에 녹일 때는 제 기억 속에 있는 누군가를 대상화한 게 바로 그 프리지아였어요. 제가 그린 도면에, 지은 건물에, 이젠 돌아오지 않을 누군가를 제 추억에서 항상 살게 하고 싶었거든요.
― “이젠 과거에만 머무는 매개체인가요?”
― “시간은 늘 그렇죠.”
일정하게 돌아가는 녹음기와 서늘한 침묵. 질문지는 한참이나 더 남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시간은 늘 그렇다는 말. 그는 말한다. 이젠 과거라고. 과거일 뿐이라고. 그 과거를 떠올리며 한 번도 네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고 프리지아 정원에 꽃이 피고 지는 순간까지 너를 잊어 본 적이 없는 나를 외면한 채. 아빠의 원망을 지우고, 은수의 죽음을 보내고, 스스로의 자격지심을 닦아내도 그림자를 흥건히 적시는 건 풋내음 가득한 프리지아였다. 그날 그렇게 두고 온 너의 뒷모습을 몇 번이나 되돌아보면서, 무수한 별들에 네 이름을 지우면서, 그러다 다시 네 이름을 부르면서, 출국장 밖을 계속 내다보면서, 네가 있을까 싶어서.
너, 거기 없구나.
나, 여기 있는데.
― “가야 돼.”
― “너는…….”
― “…….”
― “내가 과거야?”
돌아가는 녹음기. 멈춘 페이지.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와 조용히 올려다보는 나. 약속한 한 시간이 마지막 바퀴를 앞두고 있다. 야속한 초침은 끝을 향해 내딛는데 묻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내가 되묻는다. 과거가 되었냐고. 우린 이제 과거일 뿐이냐고. 초침이 마지막 구간을 내달릴 때였다. 자리를 떠나려던 그가 뒤를 돌았다.
― “그런 걸 묻고 싶었으면 너로 왔어야지.”
― “…….”
― “그린 에이지가 아니라.”
― “…….”
― “너로 왔었어야지.”
― ‘그린 에이지입니다.”
― ‘…….’
― ‘상,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7년이야.”
― “…….”
― “나랑 이러는 게 쉬워?”
― “…….”
― “인터뷰 핑계로 물을 수 있을 만큼 넌 아무렇지 않아.”
― “…….”
― “나만 애탔지.”
멀어지는 뒷모습. 내가 일부러 등을 돌리던 그날의 그때처럼. 유리창 안으로 태양이 부서지고 건너편 도보 밖으로 목 꺾인 해바라기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것을 하염없이,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결국 숨죽여 우는 내가 있었다.
* * *
이틀 만에 출근한 내 주위를 빙빙 돌며 팀장이 박과 최에게 물었다. 혹시 미스 캐나다를 보지 못 했나? 피골이 상접한 자가 대신 앉아 있는데. 두 시간 뒤, 팀장은 사무실 밖으로 피골이 상접한 해골을 내쫓았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 먼 나라 가까운 나라 캐나다에서는 아프면 일 안 시킨다며? 어디 가서 좋은 냄새나 맡다 와. 마약은 말고. 얼떨결에 밀려나 로비 구석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데 승관의 연락이 왔다. 빌딩 근처인데 점심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 석민이도 있어. 근처라더니 빌딩 문앞에서 당당히 전화하던 승관이 유리창 너머 내게 손을 흔들었다. 너냐? 좀비냐? 뭐냐? 녀석 뒤에 숨어 있던 석민이 새하얀 이를 보이며 웃는다. 잘 있었어? 기타를 맨 걸 보니 취미 반인가 싶었는데, 승관은 석민에게 어깨 동무를 하며 그를 게스트라 불렀다.
― “싱어송라이터 이석민. 인기 장난 아냐 요즘.”
― “불가사리에서 마이크 휘어잡더니.”
― “그땐 내가 더 잘했는데 양보해줬지.”
― “언제 한번 라디오 출연하면 되겠네.”
― “안 그래도 컨펌 받고 오는 길이거든요.”
― “날짜 알려주면 들을 게.”
― “듣기도 전에 너 죽겠는데?”
석민 역시 독 사과 여럿 먹어 치운 듯한 나를 보며 머리 열을 쟀다. 열은 없어? 괜찮어? 7년 만에 만났는데 아프면 안 되잖어. 뭐 잘못 먹었냐? 약 사다 줘? 옆에서 승관도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더위 먹었어? 더위사냥 사줄 수 있어. 승관은 석민의 기타를 당겨 고개를 저었다. 저건 더위 사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냐. 밥은 우리끼리 먹자. 불러줄 노래도 있는데! 그건 라디오에서 하면 되잖냐. 라이브로! 밥을 라이브로 먹자. 먹방 어때. 승관은 타고 온 밴에 울상인 석민을 밀어 넣었다.
― “회사 잘렸냐.”
― “그럼 벌써 한국 떴지.”
― “진짜 아파?”
― “아픈 건 아닌데 그냥.”
― “마음에 폭풍이 몰아치는 구만.”
― “귀신이네.”
― “라디오 3년이면 지나가는 사람 말투만 봐도 다 알지.”
― “내가 어떤데.”
― “가만히 내버려 두십쇼. 심각합니다.”
밴에 올라탄 승관이 까만 창문을 내렸다. 오늘 중앙공원에서 불꽃축제 한다는데 시간 되면 가봐. 너 예전에 좋아했잖아. 우린 라디오 특별 코너 짜러 간다. 안녀엉. 승관의 얼굴 옆으로 석민의 큰 손바닥이 흔들렸다. 또 만나! 라이브로! 승관이 두 귀를 막는다. 아우 시끄러! 불가사리도 씹어 먹더니 이젠 가요계까지 씹어 드실 전망이었다.
한적한 4차선 도로에 밴이 내달린다. 흙먼지가 날렸고 굽굽한 바람이 불었다.
* * *
― ‘오늘 중앙공원에서 불꽃축제 한다는데 시간 되면 가봐. 너 예전에 좋아했잖아.’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렀다. 8월 오후의 기승이었다. 익숙한 가로수 길을 건너 상점 즐비한 거리를 걸었다. 지훈과 자주 가던 카페는 옷 가게로 변했고 영화관과 파스타집도 식당으로 변한 뒤였다. 저 꽃집은 예전이랑 그대로인 것 같은데.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우연히 발견한 꽃집은 세월을 먹은 듯 흔적이 진했다. 이거 주세요. 카운터 옆 드라이플라워를 가리키자 주인은 선물 카드 등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작은 온실 속에 핀 프리지아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예쁘네요. 저도 좋아해요.
― “예쁘죠? 개인적으로 키우는 건데 오래 전부터 이맘 때쯤 원하는 손님이 있어서 그분에게만 팔고 있어요.”
― “오랜 단골 손님이신가 보다.”
― “아유, 오래 됐죠. 한 8년 정도 됐나? 요즘은 저장 기술이 좋아져서 여름에도 쉽게 구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불가능했거든요. 그 손님이 고등학생쯤 되어 보였는데 어찌나 간절해 보이던지.”
― “꼭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나 봐요.”
― “맞아요. 여자친구 줄 거라구. 그 이후로 어떻게 됐나 궁금했었는데 잘 됐는지 매년 마다 와서 한 송이씩 사가요. 시중에 나온 거 말구 제가 손수 키운 걸루. 특별히 빨간 리본도 매 줘요.”
― “이번에도 왔었어요?”
― “일이 바쁜 건지 올해는 좀 늦네요. 자, 포장 맘에 들어요?”
― “감사합니다.”
친절한 주인은 문 앞까지 배웅했다. 오늘 불꽃놀이 하는 거 알아요? 날씨가 좋아서 예쁠 거야. 그녀가 정겹게 손을 흔든다. 나도 오래된 손님처럼 한 손을 들었다. 불꽃놀이 알죠. 아파트 베란다에서 보면 더 좋은 걸요. 예전에 본 적 있어요. 나는 위에서, 누군가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그날 알았거든요. 예쁘다는 건 결코 화려한 폭죽만이 아니었다는 걸.
* * *
하얀 달이 떴다. 열대야에 이기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고 계획대로 찾아온 타 지역 사람들도 간혹 섞여 있었다. 오늘 밤 강한 비바람이 불 예정이라던 기상청의 오보를 B시는 믿지 않은 덕분이었다. 중앙공원 대강당이 유독 북적였다. ‘베스트 뷰’ 팻말을 본 사람들은 은빛 돗자리를 깔고 눕거나 종이 박스로 간이 돗자리를 만들어 나눠 앉았다. 여러 길로 나뉜 공원길은 각각 솜사탕과 차가운 맥주, 오징어를 파는 기계가 있었고 명당 앞은 무알콜 칵테일을 파는 미니 리어카가 점령하고 있었다.
블루 에이드 뭐라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알콜 때문이라고 하고 싶지만 무알콜이다. 대강당 옆 둘둘, 넉삼 너구리처럼 앉아 있는 앙꼬들 사이 쭈그려 앉는다. 다들 오징어를 안 먹네. 맥반석 오징어가 불꽃놀이 포인트인데.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시대에 왜 다들 못 붙어서 안달입니까? 이 훤한 밤에 입술 좀 그만 드세요. 솜사탕도 있고 오징어도 있고 취하지 말라고 맛 좋은 칵테일도 있는데 왜 씹어 먹지도 못할 걸 드세요? 명당 치고는 자리 터가 좋지 않았다. 대강당 무대에 줄줄이 앉아있는 어린아이들을 따라 앉았다. 누나, 그거 뭐에요? 파란색 완전 내 크레파스 시팔색. 너 그거 욕이지. 아니요. 나 취했니. 그거 술이에요? 너 땀이 왜 이렇게 많아? 아까 애들이랑 뛰어다녔어요. 젊음이 좋긴 하다. 이거 새로 산 건데 멋있죠. 로보트 샌들이네. 저 열 살. 안 물어 봤어. 어른들은 맨날 묻던데. 귀 옆에 꽂은 거 뭐야? 이거요? 꽃이야? 응, 아까 어떤 형이 줬어요. 제가 색깔 크레파스 시팔색이랑 똑같다고 하니까요. 이거 이름이 뭐더라. 프. 프으. 뭐지?
불꽃이 터졌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성이 섞였다. 로보트 샌들을 신은 아이는 무대에서 이리저리 뛰며 더 높게 보려 애썼다. 어느새 구석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던 소년이 불현듯 손뼉 치며 다가왔다. 명당 중앙, 누군가를 가리키며.
― “프리지아.”
― “…….”
― “저 형이 줬어요.”
까만 볼캡을 쓴 작은 얼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난 이지훈을 잘 알았다.
소중하게 끌어안은 프리지아가 현재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까지도.
― ‘인터뷰 담당은 네가.’
― ‘연락할게.’
― ‘아까는 먹기 싫었어.’
― ‘생각하면 아프고 힘든 시간이었죠. 한때 그 프리지아가 저였고, 또 누군가였고, 우리의 마음이었고, 일방적인 이별이었어요. 많은 의미가 있는 과거죠.’
― ‘이젠 돌아오지 않을 누군가를 제 추억에서 항상 살게 하고 싶었거든요.’
― ‘너로 왔었어야지.’
까만 캔버스 위로 불꽃이 터졌다. 그는 겨울의 꽃을 안고 여름의 불꽃을 응시했다. 어린 두 눈과 붉은 뺨. 이윽고 좌절하는 시선까지도. 젖은 꿈을 따라다니던 그 뒷모습에 마침내 다다랐을 때, 그가 한참을 망설이다 건 휴대폰 너머 상대방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불꽃의 굉음에도 파묻히지 못한 슬픔이.
이젠 목소리 들을 수 있는데.
이런 날엔 옛날 번호가 습관이라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그렇게 그가 멀어진다.
한 손엔 빨간 리본으로 묶인 프리지아를 들고서.
― ‘예쁘죠? 개인적으로 키우는 건데 오래 전부터 이맘 때쯤 원하는 손님이 있어서 그분에게만 팔고 있어요.’
― ‘오랜 단골 손님이신가 보다.’
― ‘아유, 오래 됐죠. 한 8년 정도 됐나? 요즘은 저장 기술이 좋아져서 여름에도 쉽게 구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불가능했거든요. 그 손님이 고등학생쯤 되어 보였는데 어찌나 간절해 보이던지.’
― ‘꼭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나 봐요.’
― ‘맞아요. 여자친구 줄 거라구. 그 이후로 어떻게 됐나 궁금했었는데 잘 됐는지 매년 마다 와서 한 송이씩 사가요. 시중에 나온 거 말구 제가 손수 키운 걸루. 특별히 빨간 리본도 매 줘요.’
나, 여기 있어.
너, 거기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