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 성동혁, 1226456
월요일 잡지사 풍경은 자극적이다. 사원증을 찍고 들어오는 사람치고 누렇게 뜨지 않은 얼굴이 없다. 누구든 정상적인 출근이 없다는 말이다. 역시나 최는 술 냄새를 풍기며 책상에 엎어졌다. 팀장님 오면 깨워줘요. 화장실로 튀어야 하니까. 조용하던 박은 미니 냉장고에서 헛개수를 꺼내 마시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람들이 일요일에만 뭘 맡겨 놨나 모임을 그렇게 하더라고요. 새벽에 도망치느라 진땀 뺐죠. 야구광인 박이 이태원 스크린 야구 내기로 3차까지 간 건 뻔한 사실이었다. 비교적 정상적인 두 발로 걸어온 팀장을 보자마자 최는 마하의 속도로 도망쳤고 박은 쓰레기통에 빈 병을 던져 넣고 의자에 앉아 안대를 꼈다. 다들 한 장씩 가져가. 이번 주 금요일 내가 쏜다. 모서리에 촌스러운 초록색 잎사귀가 그려진 티켓이 폭탄처럼 떨어졌다. 박은 안대를 끼기 전부터 직감한 듯 내 뒤에서 속삭였다.
저번 달 인터뷰가 자동차 극장 사장님들이었거든요. 잡지 나가고 인터뷰 덕분에 지방 손님들 늘었다고 E시 극장 사장님이 보낸 극장 표예요. 이메일 담당이 저니까 e-ticket 오자마자 조용히 넘겼는데 실물로도 보내실 줄이야. 혹시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걸요. 팀장님 모토가 ‘우리’, ‘함께’, ‘다 같이’거든요. 빠지는 사람 퇴사 직전까지 울릴 수 있음. 그녀가 티켓을 흔들며 다가오자 박은 그 자리에서 코 고는 척 입을 벌렸다. 그 한 장을 살포시 박의 입안에 끼워 둔 그녀가 싱긋 웃었다. 정성을 무시할 순 없잖아. 바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이. 진한 향수를 풍기며 그녀가 탕비실로 사라진다. 박이 안대를 벗고 그것을 우걱우걱 씹었다. 어쩔 수 없이 못 간다는 의지였는데 어디선가 같은 것이 날아왔다. 가볍게 박의 무릎에 착지. 탕비실에서 그녀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다.
― “저기, 우리 금요일에 이지훈 씨 인터뷰 있지 않아요?”
― “네, 오전에.”
― “근데 여길 왜 오셨지?”
박의 손가락이 자동 문을 가리켰다. 두 겹의 유리가 열리고 제 사무실인 듯 들어와 소파에 앉은 남자는 다름 아닌 이지훈이었다. 어머, 일찍 오셨네요? 커피를 들고 나오던 팀장이 점잖게 웃으며 커피를 건넸다. 미스 캐나다도 이리로. 펄 박힌 파란색 매니큐어를 피해 스윽 옆으로 몸을 숨겼다. 크레파스 시팔색 같다. 박은 낮게 깔린 내 목소리를 듣더니 큭큭 웃었다. 그런데 어째요. 이미 이지훈 씨 다 봐버렸는데요.
바쁘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여주 씨도 간다고 하니까 온 거 아니에요? 인터뷰 하면서 둘이 벌써 친해졌나? 지훈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코를 찡긋거렸다. 친해지는 중이죠. 저번에 보니까 달리기 잘하던데요. 토끼풀도 좋아하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잠을 자는 박을 제외하고 팀장 뿐이다. 달리기? 토끼풀이 뭔데? 그녀가 궁금한 투로 물었다. 친목도모요. 새벽 마실 그런 거. 개처럼 뛰었던 그날을 회상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밥 먹으러 갈까요? 브런치 어때요? 발음에 유난히 신경을 쓰던 그녀의 눈썹이 올라갔다. 어떠냐는 뜻이다.
― “저는 아침을 잘 안 먹어서.”
― “가요.”
― “응? 네?”
― “밥 먹으러.”
이번엔 그가 거들었다. 밥은 먹어야죠.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최가 화장실로 도망갈 때의 속도처럼 그녀 또한 재빠르게 가방을 챙기는가 싶더니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울상이 되었다. 가끔 최가 말했던 ‘팀장님 울면 슬픈 개죽이 같아요’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편집장님 면담. 오늘인 거 까먹었어. 둘이 밥 먹어. 카드는 이거 쓰고. 꼭 우리가 쏴야 해. 나중에 영수증 확인한다? 여러 컬러 파일을 챙겨 든 그녀가 부리나케 문을 나섰다. 식사는 다음에! 오늘은 여주 씨랑 먹어요! 다소 방정맞게 사라진 그녀다.
― “볼 일?”
― “편집장님 면담.”
― “아.”
엘리베이터 앞에서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화장실에서 깔끔한 아이라인을 획득한 최가 기지개를 켜며 복도를 지나치다 지훈을 보더니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거의 삿대질이랄까. 그도 당황한 듯 약간 인상을 구기긴 했지만.
― “설마 그 싸가…….”
― “싸가?”
― “…세요. 식사하다가 음식 남으면 싸가세요.”
최가 내 손에 들린 법카를 캐치하고 용케 말을 바꿨다. 오붓한 식사 되세요. 폴더처럼 접힌 몸이 그대로 사무실 안으로 꽁무니를 뺐다. ‘싸가세요’는 아닌 것 같은데. 맞을 걸? 저분이 말장난을 좋아해. 로비까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눈 대화는 단 두 마디 뿐이었다. 오늘은 밥 먹은 걸로 하고 바쁘면 들어가도 돼. 팀장님한테는 내가 잘 말할 게. 인포 데스크를 지나치며 나란히 걷던 그가 자리에 멈췄다. 통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은은하게 그를 비췄다.
― “밥 사.”
― “…….”
― “다 먹을 때까지 못 들어가, 너.”
……이지훈, 넌 계획이 다 있었구나?
Oh My Rainbow
; The Finale
04. 본심
주문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엔초 치폴레 가르망디 브레드. 에그는 써니 사이드 업 맞으시죠? 사이드는 하우스 샐러드와 웨지 감자, 드레싱은 애플 비니거와 랜치를 곁들이셨고요. 음료 역시 두 분 모두 에이드로 주문하셨습니다. 그럼 음료부터 드릴게요. 열정적인 직원은 걷는 걸음마다 당찼다. 그게 석민이라는 게 포인트였다.
― “음료 나왔습니다.”
― “알바해? 요즘 인기 장난 아니라며?”
― “이제 시작이지. 하하.”
― “돈이라면 과외는 생각 없어?”
― “이미 세 탕 뛰고 있어! 어머니들 A대 되게 좋아해!”
석민의 이름을 알린 지는 최근이라 음원 수입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회사 재정 또한 충분치 않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석민을 위해 몰려든 팬들이 대다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조만간 돈 때문에 일하는 건 그만두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지훈은 크게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가끔 왔었어. 얼굴 보러. 석민이 크게 끄덕였다. 지훈이 우리 가게 아주 브이아이피 등극했어. '아주'는 아무에게 주지 않는 거야. 지훈은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그가 싫은 티를 내도 석민은 웃음이 많았다.
맛있게 드시고 인증샷 부탁드려요. 둘이 같이 찍으면 다음 할인도 두 배입니다. 제 친구면 따따블. 공짜로 먹고도 추가 할인이 더 남았다는 뜻이죠. 싸우지 마시고 많이 드세요. 석민은 앞치마를 휘날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한적한 2층 야외 테이블에 아침이 내려앉는다. 오늘은 회사 대신 온 거야, 아님 그냥 너로 온 거야. 그가 음료를 마시며 무심코 묻는다. 방금 실수로 터진 노른자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 “오늘은 나.”
― “너?”
― “응, 너는.”
― “나는 원래 나.”
― “건축상 수상자 말고?”
― “응.”
― “공모전 대상 말고?”
― “응.”
― “졸작 멋지게 제출한 학생 말고?”
― “응.”
― “예전의 너?”
마지막 질문은 답이 없다. 상대방은 노른자를 터트려 식빵에 발라 먹는 게 다였다. 그렇기에 물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젯밤 불꽃놀이를 보러 갔었는지. 꽃집 주인이 얘기하던 단골 손님이 그가 맞는 지. 매년 주인 없는 프리지아를 품고 홀로 외로이 봤을 불꽃놀이가, 그 응답 없는 전화가 얼마나 고요했었을지. 이미 난장 된 접시를 깨작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 “어제 있잖아, 인터뷰 끝나고 뭐했어?”
― “사무실.”
― “밤에도?”
― “응. 너는.”
― “…나도.”
이젠 목소리 들을 수 있는데.
이런 날엔 옛날 번호가 습관이라서.
거짓말을 한다. 우리 모두. 노른자를 식빵에나 발라 먹는 일이 전부인 우리가 망설이는 건 무엇일까. 그를 알 수 없다. 속내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질색하던 인터뷰를 승인하기에 그것이 또 다른 시작인 줄 알았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어느 날은 되묻지도 않고 혼자 가버리더니 또 어느 날은 너로 왔어야 했다는 질책을 하다가, 마침내 오늘은 누구로 왔냐 묻더니 정작 듣고 싶은 대답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꽉 막힌 8차 선 도로에서 깜빡이는 초록 불. 나아지지 않는 정체에 머리가 복잡했다. 이석민 왜 .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관심은 폴라로이드 사진기와 오는 석민이었다.
인증샷 찍으면 다음 번에 할인이라고 했잖어! 너희들 딱 봐도 안 찍을 것 같아서 직접 왔어! 지훈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밖을 쳐다봤다. 무관심의 자세였다. 혼자 찍으면 반의 반 값은 돼? 석민이 민망하지 않게 독사진이 취향인 것 마냥 혼자 브이를 그렸다.
그런 건 안 돼! 못 보던 사이에 꼼수가 늘었네? 지훈! 얼른 붙어! 턱을 매만지던 그가 어쩔 수 없이 테이블 앞으로 몸을 당겼다. 둘이 잘 나온다. 싸우지 말고. 하나. 둘. 셋. 연달아 찍은 두 장엔 줄곧 눈을 감은 내가 있다. 빛의 반사로 자연적인 반응이었지. 석민이 큰 목소리로 킥킥 웃었다. 승관이한테 보여줘야지. 계정 폭파 위협을 가해도 석민은 하얀 앞니를 숨길 줄 몰랐다.
다시 찍어. 눈 잘 뜨고. 그가 석민을 부추겼다. 필름을 추가로 갈아 끼운 석민이 이번엔 조금 멀리 떨어져 찍었다. 넓게 찍으니까 풍경이 더 잘 나온다! 석민은 자신의 실력에 심취해 잠시 뜸을 들였다. 아까보다 더 가까운 거리의 그가 한숨을 내쉰다. 저러고 또 십분이지.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숨결. 석민의 카운트다운을 듣지도 못한 채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고 만다. 옅은 미소를 짓는 그를 보고 있는 나. 석민에게 사진을 건네 받은 그가 실소 했다.
― “정신 또 뺐어.”
― “…….”
― “큰일 나, 진짜.”
까만 벤츠가 잡지사 빌딩 앞에 섰다. 이대로는 아쉬워 일부러 느긋하게 안전 벨트를 풀었는데 그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차 주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차에 관심 있어? 벨트만 붙잡고 있길래. 문을 닫는 순간 멀어지는 역동적인 스피드. 아이스 커피를 물고 돌아오던 최가 손을흔들었다. 왜 대나무처럼 서 있어요? 그녀는 월요병이 도졌냐며 뒤에서 쫑알거렸다. 차라리 월요병이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개방적인 회사라지만 낮술은 안 되겠지. 점심 먹고 배부른 박이 자연스레 옆에서 걸었다. 원래 처음이 어려운 거죠. 한적한 사무실에서 서류를 뒤적이던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스 캐나다 표정이 왜 그래? 밥 먹으러 간 거 아니었어? 거의 바람 맞았는데? 질문 폭탄인 그녀를 지나쳐 책상에 얼굴을 부볐다. 밥은 먹었죠. 8차 선 퇴근 길에서. 정체기에요. 정체기. 최와 박이 더 물어볼 것이 많은 그녀를 당겨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식곤증이라도 왔으면 좋겠건만 눈을 감을수록 얼굴과 목소리가 선명했다. 알고 싶다 이지훈. 어딘가 경계심 있는 그 마음을. 그를 살려달라던 승관의 어두운 낯빛 또한 스쳐간다. 허투루 말할 녀석이 아니기에 한숨은 더욱 깊어져 갔다. 결과적으로 이지훈은 내게 스무고개쯤 되었다. 앞으로 접어야 할 손가락이 무진장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지난 7년간 혹독한 수련을 거쳐 새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자부했으나 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 ‘정신 또 뺐어.’
……
― ‘큰일 나, 진짜.’
……저 말이 뭐라고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지.
* * *
지훈은 사흘 내내 연락이 없었다. 그 부재를 목요일, 그러니까 오늘 점심에 승관과 밥을 먹다 알게 되었는데 듣는 내가 속 터질 지경이었다. 작년부터 지방 청사 옆에 세울 멀티 플레이스 단지 도면을 클라이언트들의 변심으로 몇 달째 갈아엎는 중이었고, 마지막이라 생각한 이번 컨펌에서도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캔슬을 먹었다고. 다시 말해, 자신들이 투자한 브랜드 입점이 연기되어 그 날짜에 맞추려 계속 미루는 것임을 암암리에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지 도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뿐이라고 엿을 먹이는 중이라고. 처음엔 5층 휴식 공간에 의자가 너무 많아 불편하다고 하더니, 두 번째엔 에스컬레이터 뒤쪽 공간이 너무 작다고 투털거렸고, 사흘 전 마지막 보고라 생각한 날에도 1층 현관문이 다섯 개면 홀수라 운이 좋지 않다고 개 같은 소리를 한 덕분에 승관의 말을 빌려 현재 지훈은 개빡침모드라고.
― “연락을 안 할 만했네.”
― “못하는 거지. 꼬투리 못 잡게 개고생 중이거든. 지금도 한 열댓 명 모여서 끙끙대고 있을걸.”
― “집에도 못 갔어?”
― “말했잖아, 칫솔만 일곱 개라니까.”
승관이 혀를 끌끌 차며 젓가락을 집었다. 나는 제발 그놈이 어디 가서 기절만 안 했으면 좋겠다. 맑은 된장국 속 새우를 가려 먹는 녀석이 밥그릇 뚜껑에 등이 구부러진 분홍색 새우들을 건졌다. 삼십도 안 돼서 이지훈 등 이렇게 될까 봐 겁나. 등짝에 지렛대 붙여줄까. 공사용 까만 테이프 알지. 엉, 그거. 아니, 내 입 막지 말고. 밥맛은 떨어진 지 오래, 결국 숟가락을 놓았다.
― “명절날 교통체증 알아?”
― “매년 겪지. 4시간 거리가 8시간으로 뛰잖아.”
― “내가 꼭 거기에 있는 것 같아.”
― “대장이 막혔어? 화장실 저쪽이야.”
― “아니, 대장 말고.”
― “그럼, 뭐?”
― “마음이 꽉 막혀있는 느낌이라고.”
― “당장 안기고 싶은데 쉽게 못 간다고?”
― “무당집 차릴래?”
― “걔 마음을 잘 몰라서?”
― “이미 차렸어?”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시간이 괜히 시간이냐. 떨어진 만큼 거리 생기는 건 당연하고 그걸 좁히는 게 너랑 이지훈 몫이겠지. 내가 선생도 아니고 너 지금 딱 교무실 와서 교제 상담 하는 것 같다? 엉? 너희 내년엔 다른 반으로 나눠 놓을 거니까 알아서 해. 쓰지도 않은 안경을 올리는 척 녀석의 검지가 구부러진다. 내일 밤에 우리 라디오에 석민이 나와. 괴짜라 명곡도 많고. 꼭 들어야 한다고 녀석이 당부했다. 아마 E시로 내려가는 고속도로 안에서 들을 확률이 컸다. 노력은 해 볼게. 재미 없으면 가차 없이 잘리는 거야. 승관은 그럴 리가 없다며 남은 새우 잔해를 밥 그릇 뚜껑에 묻었다.
늦은 저녁,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사무실 의자는 빙빙 돌았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청초한 목소리만 반복됐다. 바쁜데 회사 건물 앞으로 찾아가면 진심 오바지. 내일 인터뷰인데 펑크 낼까 봐 왔다고 하면 비지니스고 나발이고 다신 안 볼 것 같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책상 옆에 심어 둔 유일한 말 동무 선인장에게 끝내 이실직고 한다. 보고 싶은 걸 어떡해. 나 진짜 미쳤지. 강화 유리 책상에 애꿎은 이마만 박살이 난다. 선인장은 시무룩했다.
* * *
저분은 눈이 왜 그래요? K건설 빌딩 사거리 카페에 마주 앉은 지훈이 묻는다. 퀭하시죠. 원래 저러세요. 인터뷰 후 카메라를 정리하던 박이 안타깝다는 듯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아까 지훈 씨 오늘 인터뷰 할 수 있다고 하셨을 때 간만에 사람처럼 엄청 좋아하셨는데. 그렇다고 지금 좀비 같다는 말은 아니구요. 밤새 말 못하는 선인장에게 고해성사 해 본 적도 없는 인간들이 말이 많다. 지훈의 손가락이 제 눈 두 개를 동그랗게 가리켰다. 일을 얼마나 많이 하길래 다크서클이 파인 거야. 주된 원인이 본인인 줄도 모른 채 잘만 놀려댔다. 어제 목요일을 화끈하게 땡겼거든요. 클럽 물이 좋더라고요. 영원히 잠영할 뻔. 지훈은 다 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드셨네요. 옆에서 지켜보던 박이 내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지훈 씨 까칠하게 생겼는데 말은 청산유수네요. 인터뷰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한 마디를 안 져요. 그걸 놓칠 리 없는 지훈이 답했다. 원래 까칠한 사람이 말을 잘해요. 박은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전혀요. 오늘 오길 잘한 것 같아요. 싸가지가 아니라서? 지훈이 낮게 웃었다. 멋쩍은 박도 뒷머리를 긁었다. 본인 싸가지인 거 이미 알아. 박이 내 뒤로 몸을 숨겼다. 지훈은 뒷머리를 매만지며 가만히 물었다.
― “붙어있으면 덥지 않아?”
― “뭐가?”
― “둘이.”
― “아, 괜찮아.”
― “안 괜찮은데.”
― “응?”
― “아냐.”
박이 등 뒤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지훈 씨 화났죠? 표정이 심상치가 않아요. 박의 말대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그다. 여름은 독립적이어야 해. 그래야 체온 유지도 되고. 상생하며 살 수도 있고. 가끔 먼 산을 바라보며 말도 안 되는 여름 상생을 얘기하던 그가 빈 옆자리를 툭툭 쳤다. 여기가 시원해요. 제일 좋은 자리야. 에어컨 45도 각도. 팔랑귀 박은 정해준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높게 들었다. 시큼한 겨드랑이를 말리는 중이었다. 너무 좋다. 오늘 자동차 극장만 안 가면 천국인데. 그사이 팀장이 떠올랐는지 울상을 지으며 묻지도 않은 지훈에게 하소연을 시작했다.
자동차 극장 티켓 여러 개 생기는 바람에 강제로 E시 가야 하거든요. 여주 씨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팀장님 주도라 빠질 수가 없어요. 근데 그 날이 하필 오늘이라니까요? 안 그래도 장거리 연애라 주말밖에 시간이 없는데 직장 상사와 데이트라뇨! 이건 노동력 착취입니다! 어딘가 느슨해진 지훈이 박을 위로했다. 사회생활 힘들죠. 그럴 땐 집에만 있고 싶고. 왠지 말랑한 말투였다. 기회는 지금이다.
― “승관이한테 들었어. 많이 바쁘다고.”
― “할 만해.”
― “잠은 자?”
― “그럭저럭.”
― “밥은 먹고?”
― “응.”
― “극장 티켓 더 있는데 갈래?”
― “아니.”
― “알아.”
― “근데.”
― “그냥 물어봤어.”
틈새 작전 실패. 말랑함 취소다. 단칼에 내치는 단단한 단호박 꼭지 같은 그가 일어났다. 다음 인터뷰는 주말로 미룰 수도 있어. 일이 좀 번거롭게 돼서. 연락은 미리 줄게. 그는 경계심 많던 처음과 다른 목소리로 박에게 굿바이 인사를 했다. 불금 파이팅. 어딘가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이 괘씸했다. 희미하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나만 들은 거 아니죠? 노래 들은 거. 박은 동의했다. 네. 애니메이션 주제가 부르셨어요. 달빛 천사. 저희들의 우상이죠. 박은 카메라를 정리하다 장난스레 팔을 쳤다. 이지훈 씨 되게 괜찮죠? 갑자기 인터뷰한다길래 이 양반이 맘 먹고 깽판이라도 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요목조목 말도 잘해주고 추가 질문도 하게 하게끔요. 완전 내 스타일. 그래서 사람은 대화를 해봐야 해요. 적어도 한 시간은 꼼꼼히. 그런데 여주 씨랑 지훈 씨, 원래 아는 사이죠? 반말로 묻고 반말로 답한 우리를 보았으니 딱히 거를 것이 없었다. 박은 기다란 삼각대를 메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쩐지 명함도 쉽게 받더라니. 팀장님 아시면 난리 나시겠네. 그래도 이건 비밀로 할게요. 오늘 퇴근 전에 제 편집 피드백 해주시면요. 기브앤테이크가 확실한 박이었다.
사무실에서 박과 머리를 맞대던 중 나에게는 차갑지만 남에게는 상냥한 이지훈이 떠올랐다. 참으로 남에게만 고온다습한 다정이었다. 빨래 통에서 막 꺼낸 셔츠처럼 꾸깃한 얼굴로 박이 건넨 에너지 드링크를 두 캔 연달아 마시는 중이었다. 여덟 시 정각이 되자 팀장이 입구를 막고 사람을 셌다. 죽음의 카운트였다. 이미 머리 좋은 팀원들은 거의 다 빠져나가고 남은 건 체념한 박과 나, 거의 성공할 뻔한 문 앞 최였다. 남자친구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입술이 애잔했다.
― “금요일은 일하는 거 아니야. 월요일에 맡기는 거야.”
― “미루면 2위로 밀려난다면서요.”
― “융통성 모르니? 잡지사 다니면서 그 정도 플렉-써블도 없으면 어떡해? 내 발음 어때? 플레엑-서블?”
인간 네비게이션이라던 팀장은 출발과 함께 조수석에서 곯아떨어졌다. 인간 졸도게이션이었다. SUV는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최는 시속 백 사십에 뛰어내리면 뼈의 부서짐 강도가 어떻게 되는지 검색창을 뒤졌다. 박은 문부터 걸어 잠궜다. 나와 운전을 교대한 후에도 박과 최는 시시콜콜 잡담을 주고 받았다. 열에 아홉은 팀장을 골릴 목적이었다. E시에 거의 다다랐을 때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10시 정각이 되자 미리 틀어 놓은 라디오 주파수에 승관의 목소리가 걸렸다. 석민이 게스트라더니 오프닝 송도 이미 듀엣이다.
― “인기 실감하시나요?”
― “아유, 그럼요. 공연도 하고 팬미팅도 잡히고 하루하루 감사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 “석민 씨와 동문인 제가 괜히 자랑스럽네요.”
― “그럼 학교 다닐 때 이야기 좀 싹 풀까요?”
― “거침없이 음소거 될 수 있다는 점 양해 바라구요.”
― “거침없이? 감당이 되겠어요?”
― “네, 이제 오프닝인데 조용히 하시고요. 우리 연습 잘 했잖아?”
― “아 맞다! 노래 불러야 되는데!”
― “아니! 제가 부탁 드리면!”
― “어-케이!”
현재 카스테라가 초록 창 검색어 1위라고 하는데 정말 역대급이 될 것 같습니다. 박과 최가 끅끅거리며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A대 덤앤더머 어디 갔나 했더니 이젠 방송국까지 점령한 대대적인 스타가 되었다. 야심 차게 준비한 스피드 게임에서 고릴라와 침팬지의 차이점을 몸으로 설명하던 석민은 승관의 호흡곤란 덕택에 겨우 멈출 수 있었고, 전화 데이트에 초대된 석민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 승관이 최고!'를 연발하며 석민의 패배를 가져왔다. 저기 있잖아. 둘 다 내 친구야. 저래 보여도 속은 여려. 비포장도로를 지나며 그들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산속으로 들어가자 라디오가 끊기며 종국엔 수신이 없었다. 데이터를 가진 기기는 다 그랬다. 극장 주차장 입구에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주인이 형광봉을 흔들었다.
비가 그칠 것 같진 않으이. 벌써 위짝 동네는 난리가 났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디. 갑작스러운 폭우에 발이 묶인 차는 우리 뿐만이 아니었다. 주인이 안내한 주차장엔 수십 대의 불빛이 모여 있었다. 빗방울은 더욱 굵어졌고 얕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속보는 뚝뚝 끊겼다. 37년만의 최대 강수량과 E시 집중 주의를 강조했다. 그것을 끝으로 라디오도 맛이 갔다. 비는 폭우로 변했다. 차 보닛이 좌우로 강하게 움직였다. 주차장을 나갔던 몇 대의 차가 다시 돌아왔다. 길이 잠긴 모양이었다. 노란 색 우비를 입은 사장과 직원들이 차를 옮겨 다니며 상황을 설명했다. 외부 극장을 둘러 싼 철조망이 점점 흔들렸다. 앞에 붙은 '낙상주의' 표지판을 최가 가리켰다. 뒤에 뭐가 자꾸 내려오는데요? 네 명이 동시에 앞을 본 순간, 땅이 꺼지듯 그 일이 일어났다.
박이 제일 먼저 문을 열었다. 우산을 버리고 달려온 사장과 직원들이 급히 소리쳤다. 산사태란다. 하얗게 질린 팀장이 벨트를 풀고 문을 열었다. 그녀가 앞쪽에서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밟힌 건 순식간이었다. 박이 팀장을 일으켰다. 정신을 반쯤 잃고 달리던 거구의 남자가 박의 다리에 걸려 쓰러졌다. 그들은 한데 엉켰다. 아수라장이었다.
대형 스크린 뒤에서 바위 파편들이 쏟아져 내렸다. 숨을 못 쉬는 최를 문밖으로 밀었다. 엎어진 그녀를 억지로 당겼다. 가야만 한다고. 박은 기절한 팀장을 업고 달렸다. 손에서 미끄러진 휴대폰이 땅으로 떨어졌다. 돌아갈 시간이 없었다. 바로 뒤에서 찢어질 듯한 고함이 들렸다. 스크린과 가장 가까운 자동차가 바위에 깔렸다. 차들은 연속 추돌 됐다. 폭우 속 까마귀 떼가 지나갔다. 최의 손을 잡고 무작정 달렸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피소인 학교 체육관에 비상이 떨어졌다. 사람들의 공허한 눈이 제각각 흩어졌다. 서로 껴안고 울거나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흙탕물을 뒤집어쓴 사장이 전원 생존을 알리고 나서야 바닥에 주저앉았다. 박은 사장을 위로했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팀장이 눈을 떴다. 최도 겨우 숨을 돌렸다. 그러나 밖이 문제였다. 우연찮게 잡힌 수신에 사장은 1분 가량 외부와 연락이 닿았다. 도로가 침수되고 119는 물론 사설 응급차까지 고립됐다. 구급 헬기마저 기상 악화로 날지 못했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 몰랐다. 팀장은 펑펑 울었다. 자책의 눈물이었다. 최도 그녀를 따라 울었다. 박은 고개를 숙였다. 괜찮다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피하지 못한 우연이었을 뿐이라고. 나는 그들을 조용히 다독였다. 분명 나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음에도.
하루가 꼬박 지난 것 같았다. 박과 최는 서로 기대 얕은 잠을 잤다.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 눈을 감는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흐름이었다. 그러니 죽음은 면해 괜찮다고 대충 얼버무려도 되었다. 팀장은 무릎을 베고 내 것까지 숨죽여 울었다. 위로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되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을 뱉었다.
팀장님은 여기서 나가면 누구 먼저 보고 싶어요? 저는 딱 한 사람 있긴 한데 제 맘 같지 않은 사람이라 슬퍼요. 팀장님도 오랫동안 한 사람만 사랑해본 적 있어요? 그거 되게 눈물 나는 거 아시죠. 단념해도 계속 보고 싶어.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까 답답해서 결국 돌아오고. 후회하는 게 있다면 다시 만났을 때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안아줄 걸. 그게 가장 마음에 걸려요. 그것 때문에, 그걸 못 해서 돌아가는 중이거든요. 7년을 유배 당하고 겨우 돌아왔는데 아직도 표현을 못 해요. 진짜 바보 같죠. 보고 싶다고 말도 못 했어요. 이건 정말 바보다. 텔레파시가 더 낫겠네.
팀장이 결국 싱겁게 웃었다. 저 멀리 사이렌이 들렸다.
* * *
체육관 앞은 구급대원들과 방송국 기자들로 엉켜 있었다. 응급차는 중상자부터 이송했다. 안과 밖에서 들것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들에게 걸어가던 최가 기절했다. 박은 그녀를 업고 구급차로 달려갔다. 다리에 치명상을 입은 팀장도 들것에 실려 나갔다. 흡사 전쟁터와 같았다. 부상자와 보호자를 찾는 다급한 목소리만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먼저 가요. 뒤따라 갈게요. 박은 최와 팀장과 함께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순식간이었다. 구급대원에게 저지당한 카메라가 분주해졌다. 마이크를 든 기자들은 각도만 다를 뿐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뱉어냈다.
한반도를 강타한 폭우가 E시에 영향을 끼친 가운데, 산사태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해 안타까움을 주고 있습니다. 전원 생존을 확인했으나 이송 후 부상자들의 상황이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오프닝을 딴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어린 소녀도 있었고 가정을 지킨 아버지도 있었다. 밤새 물살에 쓸려 내려간 잔해 옆에 앉아 숨을 골랐다. 머리는 산발이고 옷은 얼룩졌고 얼굴은 엉망진창인 데다가 목소리까지 나갔다. 엄마가 한국 방송을 많이 보는 편이었던가. 지독한 몰골을 향해 걸어오는 기자를 보며 생각했다. 음악 방송 보면 카메라 빨간 불이 작동 중이라는 표시라던데 날 찍고 있는 거겠지. 승관이는 텔레비전을 보나. 걘 라디오를 더 듣지 않을까. 심각한 얼굴의 기자가 옆에 쪼그려 앉아 전날 상황을 물었다. 왜 이렇게 되신 겁니까? 전날 상황은 기억하십니까? 왜 이렇게 됐냐는 건 제 얼굴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묻는 거지요? 비바람을 많이 맞았습디다. 흙바람이 제 얼굴을 강타하더군요.
― “대피할 때 많은 난관이 있었을 텐데요.”
― “일단은 무작정 뛰었던 것 같고…….”
아스팔트에 찢긴 듯한 타이어 소리에 기자는 물론 카메라 맨까지 그쪽을 돌아봤다. 구급차 옆 검은색 벤츠가 섰다. 저건 최소 면허 정지다. 기자는 카메라 맨 신호에 따라 대답을 채근했다. 무작정 뛰었다고 하셨는데 그때 비가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스크린 앞쪽 차는 완전히 짓이겨져 있던데요. 산사태가 일어날 것이라는 걸 직감하셨습니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영감을 얻어서라도 그럴듯한 대답을 해줘야만 물러날 것 같았다. 직감 같은 직감 아닌 직감이라 말하던 찰나였다.
벤츠 밖으로 최소 면허 정지인 남자가 튀어나왔다. 휴대폰을 꽉 쥐고. 짝짝이 슬리퍼에 양말도 신지 않고. 초점 잃은 눈으로 보이는 들것마다 멈추고 얼굴을 확인하는 다급한 남자. 찾는 사람이 아니면 곧바로 다른 들것으로. 그 들것도 다 보았으면 이번엔 허망하게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휴대폰을 꼭 쥐고서. 짝짝이 슬리퍼에 양말도 신지 않고.
― “그때 심정이 어떠셨습니까?”
많이 보고 싶었어요.
지훈을 빈틈없이 끌어 안는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새벽 내내 사람들의 차가운 등을 어루만져 준 것처럼 땀에 젖은 그를 차분히 쓸어 내린다. 자꾸만 억누른 감정이 폭죽처럼 터졌다. 제어가 되지 않았다. 난 울지도 않고 밤새 잘 이겨냈는데 그를 보고 나선 왜 그리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던 건지. 굴곡 많은 내 인생에서 까짓 것 버틸 만한 일이었는데도 뜨거운 눈물이 계속 앞을 가렸다. 지난 날의 그리움이 턱 끝에 모여 뚝뚝 떨어진다. 괜찮지 않다고. 무서웠고 두려웠다고. 이제 표현 못하는 바보 딱지는 최소한 날려버릴 수 있을 거라고.
― “……보고 싶었어.”
어쩐지 단잠이 올 것만 같아.
* * *
내 인생을 병원에서 보내는 순간은 꽤 되었다. 엄마에게 억지로 붙잡혀 진료실에 간 적도 있었고 그녀 대신 승관의 뒤에 숨어 진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 고열에 시달려 업혀간 적도 있으며 훗날엔 제 발로 찾아간 적도 있었다. 마지막 상담을 끝으로 영원한 작별인 줄 알았던 소독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의 부활 시간을 구체적으로 묻는 남자의 목소리가 똑똑히 박혔다.
― “얘 언제 일어나.”
― “병원이 점집도 아니고.”
― “올 때 구토 증상 있었어.”
― “알아, 네가 열 번도 더 말했어. 이제 열한 번.”
― “언제 깨어나는데.”
― “돌림 노래야 뭐야?”
― “답답해서.”
― “내 환자인데 나만 하겠니?”
거기 몰래 눈 뜬 환자 분. 잘생긴 내가 보이면 눈을 깜빡여봐. 짧게 친 머리가 인상적인 정한이 뚫어져라 얼굴을 쳐다봤다. 눈싸움 아니고 반응 확인하는 거야. 잘생겼으면 깜빡여. 부드러운 목소리에 깜빡 속을 뻔했다. 눈물샘이 마르는 일이 있어도 절대 꿈쩍 하지 않을 테다. 정한이 안타까운 듯 한숨을 쉬었다. 미남을 봐서 눈이 멀어버렸구나. 쌤은 어떻게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이것도 실력이야, 그치. 지훈은 못마땅한 듯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너 예전에도 응급실에 난입하지 않았어? 지훈이랑 같이? 고열 때문에 등에 업혀 온 걸 ‘난입’이라 골라 말하더니 오른손을 척 내민다. 이 손이 널 살린 마이다스의 손이다. 지훈은 이마를 짚었다. 아쉬운 건 나였다. 링거만 아니면 두 팔 들어 북한 대동단결 박수 쳐 줬을 텐데.
― “그때도 나한테 흠뻑 빠져서 중환자실 갈 뻔하지 않았어?”
― “약은 드셨어요?”
― “요새 바빠서 시간을 못 맞췄지 뭐야.”
― “오래된 것 같은데요.”
― “여기 좀 볼게요.”
정한이 펜 라이트로 동공을 비췄다. 천천히 불빛 따라가 보자. 에이 또 나 본다. 집중력 백만 배로 빛을 쫓는 강인한 정신력. 정한이 웃으며 라이트를 껐다. 검사 몇 개만 할게.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일주일 뒤에 죽자고 드러눕는 게 육체와 정신이거든. 순서 오면 안내해 줄 거야. 지훈이가 보호자니까 잘 돌보고. 차트를 빠르게 써 내리던 정한이 안경을 치켜세웠다. 너희 싸웠어? 지훈은 진료에 관련 없는 질문은 답할 가치가 없다며 싹을 잘랐다. 거기서 물러날 정한이 아니었다.
― “싸운 건 아니지만 화해를 안 한 거지?”
― “뭔 소리야.”
― “아, 절묘하게 콜이 들어왔어.”
― “가, 이제.”
― “오늘도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 다들 축하해줘.”
― “어, 축하해.”
정한이 콜을 받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다시 올게. 그때까지 화해하고 있어. 휘날리는 하얀 가운이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데스크에서 인적 사항 기입을 마친 지훈과 함께 안내에 따라 층을 올랐다. 순서는 E시에서 세브란스로 이송된 1차 중상자가 우선이라 검사는 지연 되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저리거나 통증 있으면 바로 말해. 있을 것 같아도 말하고. 순서는 한참이나 남았는데 대화가 끊기고 만다. 그가 물길을 텄으니 이번엔 내 차례였다.
― “다친 곳 없어서 괜찮을 것 같긴 한데.”
― “그래도 의사 말 들어.”
― “언제는 돌팔이라며.”
― “헛소리 할 때만.”
― “그게 언젠데?”
― “아까 잘생김에 눈이 멀었다고.”
― “맞는 말이지.”
― “검사 항목 중에 안과도 있었나.”
내 이름을 호명하는 목소리에 그가 일어났다. 두꺼운 주사 바늘이 혈관을 뚫어 붉은 혈액을 빨아 올리고 거대한 기계가 뇌와 흉부를 스칠 때까지 그는 내 옆에 있었다. 모든 검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는 링겔대를 잡고 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 혼자 말이 많았다. 최소 면허 정지 차주가 너였을 줄은 몰랐어. 누가 차를 그렇게 대. 면허 시험 다시 보고 싶은가 봐. 시답잖은 얘기가 피로해졌는지 그가 눈가를 꾹 눌렀다. 그러니까. 뭐가 예쁘다고. 고요한 엘리베이터엔 둘의 숨소리만. 생명줄과 같은 링겔대는 여전히 지훈의 손에.
― “나 거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 “어제 간다고 했었잖아. 내 인터뷰 끝나고.”
― “뉴스 보고 온 거야?”
― “응.”
― “뉴스에 내 얼굴 나오면 확인해 줄래?”
― “그런 게 왜 궁금해.”
― “모자이크로 나오면 고소하게.”
― “모자이크면 다행이지.”
― “범인 같잖아.”
― “너 빼고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
― “알려줘 꼭?”
― “별걸 다.”
웃기려고 했는데 반응이 없다. 일단 봐서. 그렇다고 무작정 반응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와 긴 복도를 지나 베드로 돌아왔을 때 E시에서 트랜스퍼 된 경상자들이 줄 지어 들어왔다. 눈앞에서 팀장과 최가 지나가는 중이었다. 달려오던 박이 나를 발견하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으세요? 방금 회사 연락 취했어요. 다들 많이 다친 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박은 옆에 있던 지훈에게 아는 체를 했다. 그는 가벼운 목례를 했다. 박이 팀장과 최가 지나간 복도를 가리켰다. 여긴 지훈 씨가 계시니까 전 저쪽에 가볼 게요. 베드에 등을 기대 긴 숨을 토했다. 지금은 너만 생각해. 그가 담요를 위로 끌어 당겼다.
― “회사 안 가봐도 돼?”
― “결과 나오면.”
― “언제 나올지 몰라.”
― “그럼 그때까지 기다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에 밝은 달이 찼다. 그는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선잠을 잤다. 무슨 꿈을 꾸는지 속눈썹이 옅게 떨렸다. 옆으로 누워 조명에 반사된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 “바보야, 어련히 살아서 돌아올까.”
짝짝이 슬리퍼에 양말도 없이. 어벙한 건 죽어도 싫어하면서. 핏기 없는 얼굴로 실려 나가는 사람들을 확인하던 텅 빈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감히 오늘은 어떤 '당신'으로 왔는지 묻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그걸로 충분했다.
― “가장 보고 싶은 사람 있냐고 묻더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 “……너라고.”
조용히 고백하는 밤.
Epilogue.
― ‘가장 보고 싶은 사람 있냐고 묻더라.’
……
― ‘……너라고.’
지훈은 응급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1층 로비 자판기 앞에서 종이컵을 문 정한이 지훈을 맞이했다. 유자차를 받아 든 지훈이 볼멘 소리를 냈다.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그러자 정한이 코웃음 쳤다. 넌 오십 줄을 넘겨도 애지. 나보다 나이 빨리 먹으면 커피 타 줄게. 영원히 그럴 일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갈아 신었네? 왼쪽 나이키에 오른쪽 아디다스 신고 오더니. 2030년 유행인데 시험 삼아 해 본 거야? 정한의 농담에 지훈의 두 발이 슬그머니 뒤로 간다. 어쩌다 보니까. 바빴어. 그는 성격 답지 않게 말도 얼버무렸다. 동그란 안경을 가운 앞 주머니에 넣은 정한이 지독하게 파고 들었다. 어디까지 가나 싶었다.
― “어떻게 바쁘면 그렇게 될 수 있는데?”
― “많이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 “내가 수술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짝짝이 경험은 없거든.”
― “덜 살아봐서 그래.”
― “인생을 논하는 중이니 동생아?”
― “맘대로 생각해.”
두 발을 더 깊숙이 안으로 넣는다. 지금도 짝짝이 슬리퍼를 신은 것처럼. 정한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7년을 과거에만 묻고 살 지훈이 아니었다.
― “반갑지 않아?”
― “반가워야 해?”
― “미워? 올해는 미워하는 해야?”
― “다 아는 척 하지 마.”
― “까칠하긴.”
지훈이 머리를 헝클었다. 하루가 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피곤함이 서렸다. 정한의 나른한 한숨이 바깥으로 샜다. 물난리에 도로는 죄다 막혔는데 너 그때 어디 있었어? 기억나지도 않을걸. 이미 기어 넣고 있었으니까. 숨겨진다고 숨겨지나. 그게 네 진심인데. 자판기 밖으로 희미하게 번지는 불빛. 정한은 열아홉과 스물의 지훈을 떠올렸다.
― “사람은 한 번 잃으면 다신 돌아오지 않아.”
― “…….”
― “기적처럼 왔잖아. 우린 그걸 운명이라 부르고.”
정한이 일어났다.
언제나 그랬듯이.
― “2030년에도 그런 스타일은 범람할 것 같진 않다.”
― “맘대로 생각하라니까.”
― “보통 생각이 아니지. 현명한 판단이랄까.”
― “판단은 진료실에서나 해.”
―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환자 분?”
모질고 지독했던 7년을 함께 견딘 정한이 새벽의 하늘을 가리킨다.
더는 죽은 별을 삼키지 않아도 될 그 선명한 바다를.
― “이지훈님, 비가 그쳤네요.”
……
― “퇴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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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이 번외는 다음 편과 같이 올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쁜하루보내지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