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깜짝아" 3교시 수업 전에 동방 소파에서 누워 자고 있었는데 눈떠보니 은은하게 웃고 있는 정재현 얼굴이 보였다. "우리 공주님 일어났어?" "얼굴 치워라" "원래 잠자는 공주님은 " "비켜" "쪽쪽" "아 진짜 뒤진다" 손바닥으로 정재현 얼굴을 주욱 밀어내니 정재현이 손바닥에 쪽쪽거리며 입 맞췄다. "모닝 뽀뽀" 그냥 죽일까 저거
불도저 정재현 프롤로그 이 지긋지긋한 정재현과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자그마치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엄마와 재현이네 어머님은 서로에게 하나뿐인 단짝이었는데, 나중에 애를 낳게 된다면 자식들에게 저희와 같은 친구를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렇게 같은 산부인과에서 5일 차이로 태어난 우리가 친해지는 건 콩 심은 데서 콩 나듯 당연한 일이었다. 미니미한 정자 시절부터 친구로 약속되어 있었던 우리는 같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총 19년을 함께하며 흔히 말하는 '불알친구' 그 이상인 '정자 친구'로 서로에게 하나뿐인 '친구'였다.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옛 어르신 말 틀린 거 하나 없다고 강산이 두 번 바뀔 때쯤 정재현이 변했다. 때는 19살 여름, 성적에 마지막으로 반영되는 3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2주 앞뒀을 때. 우린 정재현네 집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내가 잠시 쉬자고 책상을 뒤집어엎어도 방바닥에서 꿋꿋이 문제 풀던 정재현이 그날따라 이상하게 문제집 대신 턱 괴고 날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는 것이었다. 왜 꼬나보냐는 자원의 질문에 정재현은 상상치도 못한 동문서답으로 선빵을 때렸다. "자원아, 나 너 좋아하나 봐" 얘가 더위 먹었나...? "에어컨 18돈데..." 에어컨 온도를 확인한 자원의 사고회로가 정지 됐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 "대가리에 총 맞았냐?" 그 당시 자원에겐 정재현이 자신을 좋아한단 사실이 총기 소유 불가인 대한민국에서 총 맞는 것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얼빠진 자원에 대답에 정재현은 은은히 웃으며 말했다. 이래서 자기가 자신을 좋아하는 거 같다며 대체 뭐가? 친구가 더위 먹었을까 봐 에어컨 온도를 확인하는 세심함이? 대한민국에서 대가리에 총 맞았냐고 물어 보는 멍청함이? 동공에 지진난 나와 달리 정재현은 그저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있다는 사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리고 존나게 팼다 정재현을. 얘는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 내가 정재현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정재현은 입학식부터 학교를 뒤집어 놀 만큼 잘 생겼다. 1학년 3반 정재현, 재현의 풀 네임이었다. 라스트 네임 1학년 미들네임 3반 퍼스트 네임 정재현. 물론 구라고 구자원이 정재현 놀릴 때 쓰는 말이다. 귀티 나는 외모, 탄탄한 피지컬, 소매 사이 슬쩍 보이는 까르띠에 시계까지 마치 인터넷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재현은 3월부터 난리였다. 같은 반 친구들 이름은 아직 몰라도 1학년 3반에 정재현이 있는 건 알았으니, 말로는 가히 다 나타낼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페이스북에 처음 올라온 1학년 정재현 여자친구 있나요? 을 시작으로 '1학년 3반 정재현 여자친구 있나요' 시리즈는 재현이 3학년으로 레벨업하며 '선배님'이란 어드벤티지가 더해지면서 절정에 올랐다. 보통 사람이 이렇게 잘나면 꼭 시기, 질투 하는 트롤들이 있는데 정재현은 그것 조차 없었다. 얼굴 잘난 정재현은 재수 없게도 모든 면에서 잘났기 때문이다. 공부 잘해, 운동 잘해, 집도 잘살아. 남자에겐 선망이었고 여자들에겐 로망이었다. 덕분에 정재현은 어딜가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이 꼬였다. 그게 문제였다. 사람 꼬이는 정재현 때문에 내 학교생활은 액션물이었다. 누군가 고등학교 때 생활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내 허리를 꼭 붙잡고 네가 참으라던 친구들의 온기, 손에 쥐어진 누군가의 머리카락, 다급한 담임 선생님의 뜀박질 소리 정도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그 당시 내 별명은 지옥에서 온 미친 강아지였다. 조그마한 게 성깔이 더럽다고. 이상하게 정재현한테 꼬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날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정재현 옆에 붙어 있단 이유만으로 얼평은 기본이고 SNS 연탐에 이상한 소문까지 돌았다. 정재현 얘기 시작하면 구자원으로 끝날 정도였으니. 이러니 내 학교생활이 완만할 수가 없었지. 그래도 그땐 정재현 성적이 나보다 월등히 높았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대학 진학하면 더 이상 그의 인기에 휘말릴 일 없다는 희망이 있었다. 근데 원서 지원 마지막 날 정재현이 하도 찡찡거리길래 남는 원서 정재현이 지원한 대학교에 버리는 카드로 넣었는데, 우주상향 대학교에 덜컥 붙어버린 것이다. 좋은 대학에 붙은 걸 감사해야 할지 고생길 훤히 열린 내 대학 생활에 슬퍼해야 할 지 수능 전날보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 와중에 정재현은 이 정도면 운명이니 평생 운명하자고 또 꼬리 쳤다. 그렇게 같이 입학한 대학교에서도 역시 정재현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누구나 하나씩 품고 있을 대학교 환상, 그거 정재현이었다. '국어국문학과 정재현'으로 진화한 도시대 첫사랑남 정재현의 인기가 어느 정도냐면 오바아니고 진짜 하루에 한 번씩 학교 순회한다는 공약 걸으면 학생회장 될 수 있을 정도다. 친구라고 못 땅땅땅 박아 둔 때도 그 난리였는데 도시대 첫 사랑남 정재현과 내가 사귄다? 안 봐도 유투브다. 그래서 꾸준히 거절 중이다. 정재현은 꾸준히 구애 중이고. 창과 방패의 싸움이다. "자원아 우리 오늘" "싫어" "아직 말 다 안 했는데" "뭐 또 사귀자 데이트하자 그런 소리 할 거 아니야" "오늘 밥 같이 못 먹는다고" "..." "우리 자원이 내심 기대하고 있었구나 귀여워" 정재현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볼을 꼬집었다. 아, 열 받아 "아 밖에서 이러지 좀 마 에타에 또 올라온다고" "그럼 안에서는 돼?" "아 그냥 하지 마" "구자원 안 만지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너 좋다는 사람 널렸잖아 왜 나한테 이래" "내가 자원이 좋아하니까" "얘기가 자꾸 원점으로 가냐" "결국은 내 사랑으로 돌아오는 거야" 아 얘랑 더 이상 얘기해봤자 나만 피곤하다. 아양 떠는 정재현을 무시한 채 강의실로 들어가자 정재현이 외쳤다. "자기야! 수업 열심히 들어" 정재현 얼굴에 쏠려있던 시선이 저에게로 집중됐다. 아 시발 통통튀는 애교쟁이 정재현 한 번 보고싶어서 짧게 싸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