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 성동혁, 1226456
특수 상황은 새로운 관심을 일으킨다. 중간고사 전날 뉴스 데스크가 그렇고 이사 직전 몰래 보는 졸업 앨범이 그렇다. 자발적 고통 끝에 오는 달콤한 달고나 커피와 수풀레도 같은 맥락이다. 올해의 특수성은 자연이었다. 병실 창밖 나뭇가지에 앉은 잠자리와 눈이 마주쳤다. 난 파브르였다. 유리창에 바짝 붙어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말을 건다. 날개 빛깔이 곱구나. 추석은 한참인데 꼬리가 붉네. 참치고추잠자리. 아이, 미안. 고추잠자리. 이래서 노출 광고가 무섭지. 그래도 ‘동원’은 붙이지 않았으니까 봐주라. 뭐? 싫어? 너 인성 문제 있어?
― “잠자리 인성을 여기서 왜 찾아.”
― “…놀래라.”
― “말 상대 필요하면 복도에 많고.”
― “낯 가리는 인성이라 불편해.”
― “무슨 말도 안 되는.”
지훈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었다. 낯은 부승관이나 이석민이 가리지. 얘네 오늘 저녁에 잠깐 들리겠다. 그는 휴대폰을 확인하며 소파에 기댔다. 잠깐 눈을 감는 듯 하더니 지체없이 어젯밤 보던 서류를 넘겼다. 촉촉한 손마디를 따라 지면이 부드럽게 마찰했다. 마르지 못한 물기가 목덜미로 떨어졌다. 시계는 오전 일곱 시를 향했다.
일반 병동 입원 당일, 짐가방을 들고 온 지훈은 대기실 앞에서 박과 대화를 나눴다.
정말요? 정말 그래도 돼요? 박은 지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3자의 눈엔 거의 로또 번호 공유 수준이었는데, 알고 보니 팀장과 최가 보다 쾌적한 2인실로 옮길 절차를 밟는 중이었고 난 그들보다 먼저 1인 병실로 이동 당하고 있었다.
사람 많으면 정신없어. 지훈은 소파 테이블에 짐을 두고 병실에 구비된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가방에 필요할 것 같아서 챙겨왔는데 맞으면 가져 가. 그가 화장실로 사라진 틈을 타 지퍼를 열었다. 묵직한 쇼핑백 안엔 뜯지 않은 속옷 패키지가. 어쩐지 허공에 대고 말하더라니. 사이즈는 정확해.
세안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여러 차례 업무 통화를 하다 결국 랩탑을 열었다. 그 불빛은 새벽까지 계속됐다.
지훈은 출근과 퇴근을 내 옆에서 했다. 무려 ‘퇴근’이 없는 회사에서 밤이 되면 처리하지 못한 잔업을 들고 왔다. 또한 업무가 끝나면 지쳐 뻗을 만도 한데 내가 알고 당신이 알고 모두가 아는 이지훈은 달랐다. 자기 전 침대의 높이는 물론 베개의 모양과 나의 납작한 뒤통수가 맞는지 확인했고 조명 각도를 틀어 조도를 낮게 조절했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떨어지다시피 한 담요를 주워 작은 배꼽을 덮어주고 나서야 비로소 보조 침대에서 불편한 잠을 잤다.
뇌진탕이나 골절상은 없으니 2주 뒤 퇴원만 맞춰 오라는 정한의 소견은 안드로메다로 떠난 지 오래다.
새벽에 숨 넘어가면 누가 책임져. 갑자기 드러눕는 게 육체와 정신이라며. 벨 누를 손은 필요할 거 아냐. 내 손가락 기니까.
그를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성격이었다. 관심 있는 것은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집을 스스로 에둘러 말했다. 다시 말해, 이지훈 영역 안에 내가 들어왔다는 거다. 뜨끈한 가슴에 5일 장터 대규모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진료실에서 펜을 빙빙 돌리던 정한이 동조했다. 핑계가 그럴듯하네. 묘하게 맞아. 병원에 눌러 살 타당한 이유를 얻어낸 지훈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앞뒤가 미묘하게 맞지. 얘 이런 거 좋아해. 이멀전시에 적합한 검지를 내게 뻗었다. 네 모든 건 여기에 달렸어. 나한테 잘해. 진료기록을 작성하던 정한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훈은 진료실을 나서는 순간까지 내게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집중 포인트는 따로 있다. 진료실을 나설 때 지훈은 내 어깨를 감싸면서 나왔다. 다시 말한다. 내 어깨를 감. 싸. 면. 서. 불과 이틀 전의 고온다습한 다정이었다.
― “꼬맹이들 복도에서 너 찾던데.”
― “누구?”
― “어제 게임 지고 쥐도 새도 모르게 도주한 누나.”
뜨거운 회상도 잠시, 서류를 마저 넘기던 지훈이 어젯밤 휴게실 사건을 되새겼다. 같이 게임 하자고 옆에서 하도 징징대길래 끼워줬더니 막판에 다 엎고 도망갔다고 그러더라. 패배자 누나가 편의점 털어준다고 했는데 갑자기 사라져서 어린 애들이 이도 갈던데. 참치고추잠자리와의 아쉬운 작별 후 멀쩡한 코를 훔치며 침대에 누웠다. 거하게 잠이 온다. 꿀잠이야. 곰돌이 푸도 부러워하는 숙면이야, 이거. 일부러 입을 벌리고 코를 곤다. 너 4번이네. 4번은 개인주의야. 얼굴에 드리운 작은 그림자. 물기 머금은 머리카락. 웃을 듯 말 듯 한 보드라운 입술. 그 주위를 돌고 도는 누군가의 흑심. 혼자 녹아 없어지기 전에 먼저 화를 내자. 그러자.
아니, 진짜 억울해서 그래. 내일 퇴원한다는 애들이 너무 점잖게 게임을 하는 거야. 마지막 밤인데 추억이 되겠어? 안 되지?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겠어? 유희왕 카드 같이 긁어 줘야겠지? 막판엔 치사하게 연합 먹고 나만 공격하는데 그걸 안 엎고 배겨? 돈 걸었으면 바로 연행이야.
지훈은 실소했다. 밑장 빼기 여럿 당했다던데. 그는 모르는 게 없었다. 무거운 눈을 감았다. 고니가 되지 못한 채무자는 채권자들에게 곧 편의점을 안겨줄 팔자였다. 그때 여러 개의 발자국이 가까워지더니 문 앞을 서성였다. 급한 아침이라도 오는가 싶었는데 다름 아닌 편의점 담보 잡은 채권자들이었다. 저마다 손가락에 꼬깔콘을 끼우고 지훈에게 인사했다.
― “형아! 감사합니다!”
― “응.”
지훈은 손을 흔들었다. 사복 차림의 아이들은 신나게 달려 나갔다. 큰아이들 양 옆구리엔 과자 박스가, 가장 작은 아이는 투게더 흑임자를 통으로 들고 나갔다. 형들한테 안 뺏기고 혼자 한 통 먹어보는 게 소원이래. 그는 머릿수가 일곱도 더 되어 보이는 다둥이 아빠였다. 즐거웠고 두려웠죠. 미래엔 한 명이면 충분할 것 같네요. 아, 이건 인터뷰에 쓰진 마. 싱겁게 웃던 그가 문을 닫고 대뜸 웃통을 벗었다. 반듯한 어깨와 뚜렷한 굴곡이 점점 다가오는데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정말? 여기서? 그 미래를 지금? 금방이라도 내 위로 쓰러질 듯한 운명에 눈을 감는다.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어떤 촉감도 다가오지 않지. 머리맡에 둔 옷을 집어 든 것뿐이니까. 셔츠 핏 장난 아니다. 이거 한정판에 품절 떠서 구하지도 못하잖아. 디자이너 유명한 사람인데 이름이 뭐더라. 꼬르꼬르 어쩌구.
― “말 지어내기 힘들지 않아?”
― “전혀?”
― “정말 여기서 그 미래를 위해 뭘 하는데?”
― “뭐가?”
― “평소 생활이 가능해?”
― “무슨 뜻인지?”
― “정말 몰라?”
― “햇살이 그립다.”
세월을 건너 뛰어도 나는 나. 블라인드 창을 모조리 걷고 출소한 장기수의 심정으로 눈을 찌푸렸다. 복역 7년 만에 맛보는 세상이라니. 그간 있었던 인생의 쓴맛을 돌이키며 새우등으로 누웠다. 조용히 안대를 살짝. 담요로 배꼽도 살짝. 두 손을 겹쳐 뺨에도 살짝. 살 탄다. 밤에 간지러워서 긁다가 또 난리 나지. 지훈은 블라인드를 제자리로 돌렸다. 내가 일을 벌이는 쪽이라면 그는 전담 마크 처리 반이었다. 세월을 건너뛰어도 이지훈은 역시 이지훈.
병원 밥은 맛이 없다는 걸 너도 잘 알 거야. 그런 의미로 치킨이 먹고 싶은데 출근 준비하는 누구 있으면 대답 부탁해. 일방적인 대화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눈을 가려도 알 수 있다. 뒤통수에 박히는 따가운 시선을. 파일을 정리하고, 손목에 시계를 차고, 머리를 뒤로 넘기며 옷매무새까지 체크하던 그가 다가왔다. 핑계도 참 가지가지다. 미묘하게 맞지. 나 이런 거 좋아하니까. 지나간 말도 곱씹어보는 세심함까지 갖춘 난 고로 치킨 먹을 자격이 된다.
밥 온다. 일어나. 예민한 후각은 심심한 배춧국임을 오십 미터 전방에서부터 알았다. 뭐랄까, 오늘의 기분은 마치 푸른 속살의 아기 배추랄까. 난 좀 더 자라야겠으니 그럼 이만. 머리 정수리 끝까지 담요를 덮는다. 그것은 돌돌 말려 구석으로 날았다. 응, 어림도 없지.
― “치킨 아니면 안 먹어.”
― “퇴원하면 사 줄게.”
― “깔끔한 거 좋아하지? 엽떡?”
― “밥 먹는 거 보고 갈 거니까 얼른.”
― “위장이 지금이래, 배달.”
― “아니래, 아까 연락 왔어.”
― “그래?”
― “신호 잘못 갔다고. 배춧국 먹고 싶다던데.”
― “……위장이 어떻게 말을 해.”
지훈의 ‘위장 연락 사건’에 배식 담당자들마저 쳐다볼 정도였으니 당사자의 붉기 농도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맛있겠네. 파랗고. 배추 많고. 아니. 난 괜찮아. 오전 미팅 때 샌드위치 먹으니까. 그는 탐스럽게 익은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화이트 셔츠와 취향 묻은 로퍼가 어울리는 그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옆에서 책을 봤다. 단지 위아래가 뒤집힌 것뿐.
― “그게 읽혀져?”
― “클라이맥스라 서술이 대단하네.”
― “뒤집어졌는데?”
― “주인공이 이런 생각을 하다니.”
― “말 지어내기 힘들지 않아?”
― “전혀.”
맛없는 배춧국 한입, 완전 범죄를 꿈꾸는 이지훈 한입. 식사를 끝내야만 출근할 수 있다는 막중한 조건에 씹는 속도가 빨라진다. 이지훈 님 트러블 없는 직장생활 하시라고 기꺼이 먹어드립니다. 백김치가 숨긴 생강에 눈물짓고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나물에 좌절했다. 지훈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뒤집힌 책장을 꿋꿋이 넘겼다.
― “이지훈.”
― “응, 다 먹어.”
― “시금치가 아프대.”
― “밥 속에 묻었으니까.”
― “언제 봤어?”
― “다 보이지.”
― “지훈 찬스.”
― “있을 리가.”
곧은 눈은 책만 보지만 입술은 뺨과 아주 조금 가깝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던 그가 슬쩍 옆을 본다. 눈이 마주치니 바로 피한다. 내용이 생각이 안 나네. 끝까지 뒤집힌 책을 읽으며 보는 듯 마는 듯 지훈은 줄곧 나를 봤다. 글쎄, 무던한 이지훈은 변함없었지만 어딘가 달랐다. 전과는 미세한 차이였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병원에 온 후부터, 그러니까 면허 정지 수준으로 달려왔던 그날부터였다. 가시적이며 고온다습한 이지훈의 다정 말이다. 자세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제시간 아까운 줄 아는 남자가 짧은 휴식 시간에도 내 옆에 붙어 있었다. 이른 새벽에 같이 산책을 나가거나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눈을 붙일 때까지 말을 걸었다. 전자는 병원 산책로가 길 잃어버리기 딱 좋다는 이유였고, 후자는 건강한 삶의 기본인 일정한 수면 시간을 지켜주고 싶단다. 참고로 산책로는 병동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으며 한국인 평균 수면도 지키지 못하는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둘째, 수면의 질에 극도로 예민한 남자는 진즉 여러 번 배겼을 허리를 눌러가며 며칠째 좁은 침대에서 밤을 보냈다. 이건 좀 뭣 같네 따위의 촌철살인을 심어도 모자랄 판에 불평불만도 없었다. 그러므로 성향이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로서는 현재 상황도 익숙하지 못했다.
― “네 휴대폰 내 명의로 열었어. 병원에 있을 때라도 써. 퇴원하고 계속 써도 상관없고. 일 끝나면 픽업하고 올 테니까 답답해도 오늘만 참아.”
― “시간이 더럽게 없지만 날 위해서 휴대폰 픽업을 가겠다고?”
― “생각해보니까 이것도 앞뒤 미묘하게 맞는 문장이네.”
― “나 그런 거 좋아해.”
― “알아, 나도 좋아해.”
마지막 셋째, 정체기에 거대한 변화가 찾아왔다. 응당 넘겨도 될 대답을 정성껏 받아줬다. 끝엔 호의의 대표 격인 공감대 형성도 있다. 나도 좋아해. 충격에 휩싸여 밥알을 넘기지도 못한 채 그대로 입을 벌리고 만다. 갑자기 왜 그래? 그때 차에서 내릴 때 머리 다쳤어? 내가 또 뭐 잘못했어? 왜 잘해줘? 밑밥 까는 거야? 오늘만 오고 다신 안 올 거야? 우리 마지막이야? 인터뷰 파토 내면 위약금 장난 아니거든? 나 아파! 환자라고! 너 가면 드러눕는다? 어?
입안에서 폭발한 밥알이 우수수 떨어진다. 지훈은 분노의 팔자 눈썹을 보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알던 성격 어디 가나 했다. 뺨과 병원복과 시트에 붙은 밥알을 차례대로 떼며 가볍게 손을 털었다. 계속 헛다리 짚네. 그날 괜히 안아줬어. 마침내 위아래 뒤집힌 책은 탁자에 반듯하게, 그는 벽에 나른하게 기댔다.
― “보고 싶었다던 사람이 말에 책임질 줄을 몰라. ”
……
― “내가 여기 왜 있겠어.”
한층 편해진 표정과 느긋한 목소리. 시계는 어느덧 출근과 가까워졌다. 불쑥 맞닥뜨린 고백에 코를 박다시피 밥을 먹었다. 다 먹어야 지훈이가 출근할 수 있으니까. 응. 지하 어딘가 묻어 둔 시금치도 꺼내 먹었다. 여름이 제철도 아닌데 달다. 무진장 달았다. 그렇게 먹기 싫다더니. 지훈은 두 눈을 찡그렸다. 소리 없이 웃을 때 드러나는 특유의 표정으로. 아, 이번에도 말랑한 건 덤인가?
― “그래서. 밥 먹어야 치킨이 와, 안 와.”
― “와.”
― “강렬하게.”
― ˗ˋˏ와ˎˊ˗.
― “굿.”
그는 날 조련할 줄도 알았다.
E시 오토 극장 사태는 전원 생존으로 마무리되었다. 극장 사장은 각 병실을 돌아다니며 과일 바구니를 돌렸다. 살아줘서 고맙다는 진심 어린 말에 가슴에 붕대를 두른 40대 중년의 남자가 사장과 눈물을 흘렸다. 사망자, 실종자, 징계 없이 끝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난 일 년간 휴가 없이 달렸던 팀장은 여태 곤한 잠을 자는 중이었다. 그녀를 서포트했던 최도 마찬가지였다. 티는 안 내셨지만 일 때문에 힘들어하셨어요. 직책이 괜히 있나요. 업무량이 살인적으로 많으셨거든요. 박은 그들의 가족을 병실로 안내한 후 대기실에 앉았다.
지훈 씨께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같이 일하는 동료분들이니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이라고 하시더라구요. 작년에 인터뷰 거절만 수도 없이 당했을 때 팀장님 말대로 극단적인 안티 소셜인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나 봐요. 싸가지도 취소에요. 완전 취소.
둘 다 깨어나면 병실에 한 번 갈게요. 박은 간호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복잡한 데스크를 지나 복도 끝에 다다르자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품하던 정한과 마주쳤다. 지훈의 안경과 비슷한 테를 올리며 정한은 눈을 크게 깜빡였다. 나노 확률을 뚫은 운명적인 만남이야. 오늘도 제때 약을 챙겨 먹지 못한 탓이었다.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정한은 반대로 끄덕였다. 운명이야, 우리.
정한은 구내에서 가장 큰 아이스티를 들고 산책로를 걸었다. 여름 막바지의 태양은 온 힘을 다해 타올랐다.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는데. 환자로 다시 만난 건 별로였지만. 정한은 벤치에 앉아 음료를 가볍게 맞댔다. 쌤 짧은 머리 잘 어울려요. 말을 돌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정한은 이미 안다는 눈치였다.
―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 있는 거야?”
― “일단은 6개월 파견직이에요.”
― “6개월 다음은?”
― “선택이죠. 그때처럼.”
정한은 입술 끝으로 빨대를 물었다. 그때처럼 선택이라. 돌아갈지 남을지, 인생은 원래 다 이런 건가. 지훈이는 알아? 아니요. 말 안 했어요. 아직 결정된 건 없어서. 머리 위로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정한은 되물었다.
― “그럼 앞으로 남은 인생에, 그 미래에 지훈이가 있어?”
그 순간의 나는 밴쿠버 고층 빌딩을 떠올렸다. 본사 부편집장 디에잇 손끝에 걸려 바람에 흔들리던 파견 지원서를. 한 치 망설임 없이 손을 뻗던 그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은 그제야 편히 등을 기댔다.
― “그 대답 언제 하려나 했지.”
― “7년 동안 하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 “떠나보니까 어때?”
― “제 인생만큼 지훈이도 소중한 걸 알았죠.”
이런 말은 직접 해야 하는데 꼭 쌤 앞에서만 하게 돼요. 정한은 조용히 웃었다. 진심을 내보이긴 누구나 어렵지. 그건 네 지훈이도 마찬가지고. 이내 짧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숨을 들이켰다. 아마 그동안 엄청 뻗댔을 거야. 마음은 그게 아닌데 싫어하는 척도 했을걸. 자존심 빼면 그게 이지훈이니. 멍충이가 슬리퍼라도 제대로 신고 와서 말을 하든지. 짝짝이 슬리퍼 아직도 해명 못 했어. 순정파 주제에 은근 사람 애타게 만든다니까.
옅은 미소를 머금은 정한이 잠시 눈을 감는다. 그 모습이 지훈과 무척이나 닮았다. 왼손으로 햇살을 막으며 눈부시게 웃는 정한에겐 반지가 없었다. 시선을 느낀 정한은 일부러 손을 가까이 내밀었다. 작년에 이혼했어. 바람 피웠거든. 뭐야, 의심하는 건 아니지? 나도 은근 순정파라니까. 집안 내력이 그래. 꽤 아픈 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하는 것도 지훈과 비슷했다.
사랑 없는 결혼이 얼마나 가겠어. 내 사람 지키지도 못하고 인생 말아먹은 내 탓이지. 정한의 얼굴엔 씁쓸함이 돌았다. 기업 간 협력을 핑계로 결혼 사업의 희생양이 된 장본인이었다. 뜸을 들이던 정한이 말했다. 다음 차례는 어쩌면 내 옆에 있는 남자일 수도 있음을.
― “K건설 외아들 약혼 떠들어 대는 거, 알고 있어?”
― “저번에 기사 봤어요.”
― “지훈이한테 말은 해 봤니?”
― “아직은요.”
깊은 숨이 흩어졌다. 정한은 답답한 듯 하늘을 쳐다봤다. 루머로 넘기기엔 지훈이 부모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너 없는 동안에도 몇 번 있었던 일인데 그때마다 지훈이가 막았거든. 올해는 아예 결판 지을 모양이던데. 특히 어머니 쪽.
내게 가시 같았던 그녀의 우아한 얼굴이 스쳤다. 한쪽 부모가 없고, 미래가 없고, 그래서 아무것도 이득 볼 것이 없다는 날카로운 눈빛을.
― “네가 돌아왔다는 것도 이미 알고 계실 거야.”
― “아신다구요?”
― “지훈이 뒤에 붙은 사람 많으니까.”
― “사람이면…….”
― “감시받는 거지.”
정한은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지훈이 잡기도 전에 너 먼저 쫓아낼 것 같아서 미리 하는 말이야. 이번엔 떠나가지도 말고 떠나보내지도 말고 지훈이 옆에서 버텨 줘. 서로가 지키지 못하면 내 턱시도 걔가 입어야 하니까.
해는 사선으로 기울었다. 콜을 받은 정한이 먼저 일어났다. 처음과 같은 따뜻한 눈빛이었지만 그 속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애처로움이 묻어나왔다.
― “형으로써 부탁하는 거야.”
― “…….”
― “결혼식장에서 우는 사람은 나 하나로도 족하니까.”
태양은 정한을 뜨겁게 삼켰다. 같은 자리에서 쬐는 햇볕을 맞으며 생각에 잠겼다. 장미 가시에 찔리듯 도망쳐 나온 그날의 밤과, 그런 날 잡지 못한 지훈의 슬픔을 곁에 두고 오래도록 곱씹었다. 적막한 오후였다.
* * *
저녁이 되자 편집장과 직원들이 병실을 찾았다. 팀장과 최도 박의 부축을 받으며 문턱을 넘었다. 들어올 때부터 편집장의 눈치를 살피던 박은 특집호가 대화 서두에 오르자 금세 풀이 죽었다. 팀장만큼이나 편집장도 긴 시간 기대했던 아이템이었다. 같은 날 발간될 경쟁사에서는 지훈과 같이 상을 받았던 수상자들의 인터뷰가 실릴 예정이었다. 뜰 때 동시에 터트려야 우리 쪽이 유리할 텐데 어떡하죠. 지훈을 그린 에이지의 금빛 잉어라 칭하던 최 또한 난감해했다.
면담 불가능하면 전화 인터뷰라도 해야죠. 그것도 안 되면 서면도 있고 방법은 많아요. 제가 할게요. 발간 늦추지 마세요. 일 년 넘게 지훈의 인터뷰를 기다렸던 팀장의 굳은 결심이었다. 그녀는 내게 그동안 진행한 모든 것들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를 제지한 건 박이었다.
글쎄요. 전화나 서면으로 돌리지 않아도 될걸요. 박은 지훈과 나와의 관계를 알고 심지어 같이 병원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였다. 팀장은 한심한 눈으로 혀를 찼다. 미스 캐나다는 병원에 있고 이지훈은 밖에 있는데 뭘 어떻게 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 병문안으로 모셔 놓고 병실 인터뷰라도 해? 그 싸가지가 참 잘도 오겠다. 편집장까지 은연중 동조했다. 묘한 미소를 그린 박은 그녀의 뒤를 가리켰다. 저기 오시네요. 그 싸가지.
픽업한 휴대폰 박스를 들고 나타난 지훈이 문을 열다 느리게 닫았다. 박은 재빨리 지훈의 팔을 잡아챘다. 쑥스러워하지 마시고 들어오세요. 지훈을 알아본 편집장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지훈도 정중히 손을 잡았다. 팀장과 최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누가 병원에 이지훈 심었어? 그러니까요. 제 눈이 잘못된 건 아니죠? 그들 사이의 박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말했잖아요. 전화나 서면 그런 거 필요 없다구요. 편집장과 의미 모를 눈빛을 주고받던 지훈은 잠시 후 모두가 경악할 만한 고백을 하고야 말았다.
― “제 여자친구입니다.”
정체 풀린 8차선 고속도로에 잘빠진 벤츠 한 대가 시속 이백으로 달렸다. 이건 면허 정지를 넘어 국가적 취소다. 고온다습한 다정의 피날레였다. 민망함이 뒤늦게 찾아온 지훈에게 편집장은 말했다. 이번 특별 호는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한 문장에 모든 것을 압축한 한국 지사 편집장의 대단한 능력이었다. 놀란 팀장은 자신의 입을 막았고 최의 함지박만 한 입은 박이 막았다.
― “잘 부탁드립니다.”
― “저야말로.”
한바탕 쓸려간 병실에서 팀장과 최는 박에게 끌려가기 직전까지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속일 작정이었냐 묻기에 짓궂은 우연이 데려온 운명이었다고 답했고, 언제부터 사귀었냐 화를 내길래 지훈은 교복 입었을 때부터 손을 잡았던 것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박은 두 사람을 업다시피 매달고 지훈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새 친해지기라도 했는지 지훈도 작게 흔들었다.
― “확인 안 해?”
― “…….”
― “맘에 안 드나.”
지훈은 탁자에 놓인 휴대폰을 턱으로 가리켰다. 나랑 같은 기종이긴 한데. 표정 보니까 싫은가 보다. 내 머리 꼭대기에서 놀던 이지훈은 이럴 때만 눈치가 없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넋 놓은 날 살폈다. 진짜 맘에 안 들면 바꾸고. 멍충이 이지훈을 앞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자친구라고 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건 뭐야. 그 찰나의 분위기, 얼굴, 표정, 눈빛까지 차례대로 스쳐 지나가기도 바쁜데 이까짓 휴대폰이 뭐가 중요해. 앞에서 뭘 하는지 미동이 없더니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스팸이 오나 싶었는데 들여다본 화면엔 [우리 지훈이] 다섯 글자가. 그는 마주 앉은 채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 맞나. 옛날에 내가 저장했던 거.
― “……너 진짜 여우 같아.”
― “약간 칭찬 같기도 하다.”
― “여자친구는 무슨 뜻인데? 그냥 막말한 거야?”
― “고르고 골라서 한 건데.”
― “아침부터 왜 그래?”
― “아침부터 내가 맘에 안 들었어? 휴대폰처럼?”
― “장난하지 말고.”
― “아, 여자친구라고 말해서 맘에 안 들었네.”
퇴근을 너무 일찍 했다. 너무 빨랐어. 뭔가 골이 난 지훈은 옷가지를 챙겨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백두산 물을 직접 퍼서 쓰는지 오늘따라 샤워도 길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가 젖은 머리를 말리며 문을 열었다. 나는 그를 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완전 마음에 들어. 퇴근 일찍 해서 좋아. 달려와 줘서 고마워. 보고 싶었다는 마당에 꺼릴 것은 없었다. 솔직하면 그만이고 당사자가 알면 그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그러나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지훈의 상체였다.
― “…아니, 왜 바지만 입고 위를 안 입었어.”
― “…….”
― “다음부턴 미리 말해줘.”
적반하장은 이럴 때 쓰는 거다. 다부진 등을 껴안던 손을 떼 병원복에 물기를 닦았다. 슬슬 멀어지려는 순간 허리를 바짝 당긴 건 그럼에도 꺼릴 것 없는 그였다.
― “끝까지 해야지.”
― “……다 했는걸?”
― “아닐걸.”
병원 바디워시가 이렇게 향긋했었나.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포근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허리를 감싼 손끝을 느낀다. 톡톡, 간지러운 시그널.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날 담은 새까만 두 눈이 반짝였다.
― “안아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숨이 짙어질수록 지훈은 안으로 파고들었다. 코끝에 스미는 달달한 향과 그보다 달콤한 입술을 느끼며 은은하게 붉어진 뺨을 감싼 순간이었다. 습관처럼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건 무자비한 타이밍의 승관이었다. 어우 씨, 죄송합니다. 녀석은 황급히 문을 닫았다. 질끈 눈을 감은 채 한숨을 쉬던 지훈이 병실 문을 열었다. 들어와. 어차피 들어올 거잖아. 치킨과 등장한 승관은 석민까지 매달고 온 열정의 배달원이었다. 자유분방한 석민의 눈이 이제 막 티셔츠를 입는 지훈에게 향했다. 너는 왜 벗고 있어? 일교차 커서 밤에 감기 걸려. 승관은 테이블에 치킨 박스를 내려놓으며 석민을 부정했다.
― “이쥰 쟤 지금 더워.”
― “벌써 감기 걸렸어? 귀도 엄청 빨개.”
― “감기가 사람일 수도 있지.”
― “승관, 라디오 녹음 연속으로 뜨더니 맛이 갔어?”
― “비유 모르냐? 메타포?”
― “메타몽?”
― “돌아버려.”
지훈은 소파에 앉아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응급실 당일 새벽 지훈의 연락을 받고 울면서 달려왔다던 그들은 현재 친구의 안위보다 치킨이 급선무였다. 아침이 될 때까지 지훈과 함께 내 강렬한 콧바람과 열을 체크했다던 승관 마저 석민 먹방에 관심을 뒀다.
여주, 살아줘서 고마워. 감수성이 풍부한 석민은 날개를 뜯다 말고 두 팔을 벌렸다. 자연스레 앞을 막은 지훈은 다가오는 석민을 그대로 승관에게 돌렸다. 가서 안아. 네 거야. 승관은 석민이 허리를 안고 콧물을 흘리건 말건 내버려 뒀다. 대신 날렵한 시선으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했다.
뼈다귀가 제대로 구실을 하는지, 세포가 골절되어 본인 이름을 까먹진 않았는지 다소 이과적이지 못한 질문들이 오고 갔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승관아. 녀석은 내 얼굴을 주물럭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기억 조작까지 걸리다니. 얼굴은 클레이 점토가 아님을 명시해도 그건 제 친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승관의 필수 체크 사항 중 하나였다.
― “이 똥뙈지 다신 못 보는 줄 알고 얼마나 무밭 고추밭을 뛰어다녔는지.”
― “보통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고 말해.”
― “정한이 형이 그러던데 넌 취미로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는다며?”
― “지랄한다.”
― “왜? 지훈 슬리퍼 한 짝 잃어버렸어?”
― “분위기를 보니까 한 짝은 잃었는데 다른 한 짝을 찾았네. 살아 움직이는 걸로.”
― “둘 다 나가.”
서로 껴안은 부와 석이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중 석이 똑바로 앉으며 물었다. 둘이 하는 인터뷰는 어떻게 됐어? 중단이야? 나는 지훈을 지나쳐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중단은 아니고 컨디션 괜찮으니까 시간 맞춰서 계속 진행할 거야. 이번엔 조용하던 승관이 벌컥 화를 냈다. 머리부터가 산발인데 제정신이냐? 막걸리 같은 소릴 하고 있어. 지훈은 내 옆에 앉아 승관을 나무랐다.
― “넌 급성 맹장 터지기 직전에도 라디오 하러 갔으면서 왜 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 “얘가 나랑 같냐? 난 맹장 터져서 똥 밭 굴러도 얜 절대 안 돼!”
― “뭐가 안 돼.”
― “이제 겨여어어우우우 영어 하나 배웠는데 갑자기 잘못되면 겨여어어우우우 영어밖에 모르는 인생이 허무해지잖아!”
……저걸 지금 위해준답시고 씨부렁거리는 거냐. 그래 새끼야, 이제 영어 하나 배웠다. 근데 모국어가 조온나게 잊혀지질 않아. 아직도 꿈을 반반씩 꿔. 후반 양반도 아니고 무마니도 외칠까 고민 중이야. 부승관 겟 아웃. 고어웨이. 내 무드가 고추밭이다 이 말이야. 승관에게 튀어 오르는 발차기를 지훈이 막으며 달랬다. 고혈압으로 죽겠다. 승관은 지훈 뒤에 숨어 활짝 웃었다. 그래서 널 위해 준비했어. 고혈압을 그대 품 안에. 녀석은 치킨을 가리키며 맞을 짓만 골라 했다.
―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병원에서 치킨 먹을 생각을 해?”
― “뭐야, 이지훈이 계좌로 현금 다발 쏘길래 신나서 사 왔더니만.”
― “나한테는 세 번이나 당부해서 스케줄 끝나자마자 바로 왔는데 너무하다.”
― “요즘 병원에서 치킨 몰래 먹기 챌린지 하고 있다던데 다들 알고 있었어?”
아침에 봤던 행운의 참치고추잠자리에게 감사 인사를 보낸 후 젓가락을 들었다. 승관이는 다 먹었으면 복도에 누구 오는지 살펴봐. 낌새 있으면 바로 알려줘. 정한 쌤 오면 혈압 재러 갔다고 알려주고. 이유는 부승관 너 때문이라고 하면 이해해 주실 거야. 석민은 자신보다 나사 빠진 자를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지훈은 익숙해 보였다. 괜찮아. 가끔 이래. 승관도 마찬가지. 응, 쟤 어렸을 때도 이상했어. 녀석은 주머니에 삐딱하게 손을 꽂고 문을 지켰다. 어쩐지 군말 없이 나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혼자 웃겨 죽는 승관이 다가왔다.
녀석은 연사 촬영이 특기였고 사진 속에는 휴대폰에 집중하는 석민과, 산발의 나와, 물티슈로 내 입가를 벅벅 닦는 지훈이 있었다. 김여주 왕초다. 왕초. 움막 짓다 나왔어 방금. 승관의 말 한 마디에 석민은 매운 양념이 목에 걸려 화장실로 뛰었다. 지훈은 석민을 따랐다. 그들이 비운 자리에 앉은 승관은 조용히 사진을 넘겼다.
― “이지훈이 웃네.”
― “…….”
― “진짜 돌아왔네.”
빗나간 연사의 마지막 장에는 환하게 웃는 지훈이가.
* * *
병원 생활은 외롭지 않았다. 지훈의 아침 출근 배웅을 하는 것도 좋았고 휴게실에서 팀장, 최와 박이 한 팀이 되어 이마 때리기 배 고스톱 경기를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평일에는 가끔 스케줄 없는 승관이 놀러 와 고스톱 일인자가 되어 그들의 이마를 빨갛게 만들었으며, 아주 또 가끔은 공연이 끝난 석민과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미니 사인회를 개최한 적도 있었다. 연령층은 다양했으며 사인회 첫 번째는 단연 팀장이었다. 박과 최가 말리지 않았다면 석민은 팔이 나가도록 죽어라 사인만 휘갈기다 전사했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가고 난 뒤 밤이 되고 넉넉한 달이 떠오르면 지상 주차장에 헤드라이트를 끄고 달려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 “오늘도 바빴어?”
― “괜찮았어.”
― “밥은 먹었고?”
― “많이 먹었지.”
― “세 공기 먹었어?”
― “하나 더.”
― “배 완전 볼록하겠네?”
― “또 만질 궁리 한다.”
하루 중 가장 고대하던 시간은 지훈의 퇴근이었다. 녹음기를 틀고 야경이 보이는 로비 테이블에 앉아 난 열심히 묻고 그는 열심히 답했다. 건축의 영감은 일상에서 발견할 때도 있고 꿈으로도 꾼다고 했다. 음악에서도 감각을 찾을 수 있는데 ‘부르노 마스’의 오랜 팬인 그는 들뜬 목소리로 설명했다. 내가 언젠가 꼭 섭외해서 같이 사진 찍게 해줄게. 본사에서 그 정도 짬은 되거든. 지훈은 실소했고 우리의 대화도 계속됐다.
Q1. 건설 회사에서 건축 도면을 담당하고 계시잖아요. 사실 건설 회사에서 설계팀은 생소한 영역인데 건축 사무소가 아니라 건설 회사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A1. 이 질문은 개인적인 이야기가 불가피하게 들어갈 것 같아요. 일단은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기업이고 2018년 이후로 건설사도 회사 내 건축 사무소를 운영할 수 있다는 방침이 나왔었거든요. 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에서도 자체적인 사무소가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그 다음해부터 시범 운영을 했고요. 저도 도움이 되고자 지원하게 됐죠.
Q2. 지훈 씨 이야기를 쭉 들어보면 정말 빈틈없이 달려온 것만 같은 느낌인데요. 여기서 간단한 질문 하나 할게요. 쉬는 날엔 뭐 하세요?
A2. 보통 집에 있죠. 밖에서 시달리고 들어오면 나가기가 싫더라고요. 음악을 듣거나 영화도 보는 편인데 주로 잠을 많이 자는 것 같아요. 밀린 잠을 자는 것도 있지만 원래 잠을 좋아해서 하루 꼬박 잔 적도 있어요.
Q3. 알죠. 좋아하는 거.
A3. 저에 대해 많이 아시네요.
Q4. 그럼 이 질문은 어떨까요? 친구들과 자주 만나시는 편이세요?
A4. 자주는 아니어도 만날 땐 만나요. 나가기 직전까지 귀찮아 하는데 막상 나가면 잘 놀죠. 보드 게임장 좋아하고 맛집 가는 것도 좋아해요. 혼자 밥 먹는 걸 싫어해서 같이 먹고 싶은 날에는 일부러 만나는 경우도 있어요.
Q5. 내일 저녁 같이 드실래요?
A5. 고백 같네요.
Q6. 받아주시는 거예요?
A6. 그러죠, 뭐.
Q7. 지훈 씨 친구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요. 라디오국 카스테라 디제이 부승관 씨요. 최근 카스테라 3주년을 맞이하면서 승관 씨가 보고 싶은 얼굴 중 지훈 씨의 이름을 가장 먼저 언급하셨어요. 그 방송, 혹시 들으셨어요?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A대 동문이라고 알려져 있잖아요.
A7. 방송을 듣진 않았는데 연락이 오긴 했었어요. 제 이름으로 삼행시도 지었다고 했는데 별로 재밌을 것 같진 않아서 영원히 듣지 않을 생각입니다. 제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Q8. 이번 잡지가 나오면 승관 씨가 본인 욕하는지 꼭 챙겨 본다고 하셨거든요.
A8. 세상 둘도 없는 사이라고 방금 말하지 않았나요.
Q9. 꼭 넣어 드릴게요. 좀 더 자세히 말해주실 수 있나요?
A9.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예요. 지금도 유대감이 깊죠. 성격도 정 반대라 부딪히는 경우도 많고 한 번씩 엉뚱한 행동을 하는 친구라 이해가 안 갈 때도 있지만, 왜 저럴까 싶다가도 그만큼 서로를 잘 아니까 이제는 그냥 넘어가게 돼요.
Q10. 엉뚱한 행동이라면 어떤 걸까요?
A10. 아직도 의문이라 하면 한 7년 전부턴가? 봄에는 꼭 유자차를 마셔야 한다고 쿠팡 대량 구매해서 저희 집으로 배달시킨 적이 있거든요. 매년 봄만 되면 그 박스가 문 앞에 쌓이는데 아직도 정리를 못 했어요. 여름에는 감기 걸려서 강아지만도 못한 놈 되지 말라고 약국 털어오고 겨울 되면 수제 목도리가 한반도 방한에 제격이라면서 무지개색으로 택배 와요.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걱정인지 신종 괴롭힘인지 부승관 씨 인터뷰 보시면 따로 연락 주세요.
Q11. 그거 내가 부탁한 거야.
A11. 네가? 왜?
Q12. 지훈 씨에게 음식이 또 빠질 수가 없죠. 주변에서 ‘밥잘남’으로 알려진 지훈 씨에게 묻습니다. 밥 먹을 때 이것만큼은 필수로 있어야 하는 반찬이 있나요?
A12. 유자차 쿠팡 대량 구매를 네가 시켰다고?
Q13. 지금은 녹음 중이니까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A13. 부승관이 약국을 쓸어왔어. 목도리가 무지개색이었다니까.
Q14. 네, 대답이요.
A14. 반찬은 상관없는데 밥 먹을 때 라면을 같이 먹어요. 없으면 뭔가 허전하더라고요.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그걸 부탁했다고?
Q15. 지훈 씨만의 맛집 있으세요?
A15. 회사 근처 순댓국집 좋아해요. 술 마신 다음 날 해장하기도 좋고요. 아니, 근데…….
Q.16. 술을 많이 드시는 편인가요?
A16. 큰 작업 끝나면 팀원들끼리 뒤풀이처럼 마시는데 많이는 못 마셔요. 주량이 약하진 않은데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나 몸에 빨갛게 티가 나서 좋아하진 않죠.
Q17.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A17. 누구 맘대로.
두 개의 그림자가 로비를 빠져나간다. 호박색 가로등을 헤치는 빠른 걸음을 지훈이 단숨에 따라잡았다. 그런 부탁을 왜 해. 오늘의 지훈은 여기에 꽂혔다. 대답해줄 때까지 절대 물러나진 않을 것이다. 정한과 찬란한 햇살을 받았던 벤치 앞에서 마주한 지훈 위로 동그란 보름달이 떴다.
― “내가 돌아올 때까지 챙겨 달라고.”
― “…….”
― “돌아오면 내가 다 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지.”
근데 승관이가 너무 많이 쌓아 놔서 사줄 것도 없겠다. 지훈에게 팔을 잡힌 채 배시시 웃는다.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무엇을 결심한 듯한 얼굴이기도 했다.
유자차 질리면 율무차 줄게. 율무차도 질리면 녹차 줄게. 감기약은 쌓인 채로 살아. 평생 그대로면 더 좋고. 건강하다는 뜻이니까. 무지개색 일곱 개면 목도리는 보색으로 맞추자. 네가 빨간색이면 난 초록색. 보라색이면 연두색. 어때, 눈에 띄고 커플 같겠지.
지훈은 반응이 없었다. 마지막 커플 얘기는 빼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질러 버렸으니 주워 담기는 평행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더 숨길 것도 꺼릴 것도 없는 나의 특기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앞으로 걷는 것. 달밤 공기가 좋네. 산책은 아침이 아니라 밤이었구나. 갑자기 귀신이나 나와서 아까부터 계속 뒤에서만 걷는 이지훈 놀랬으면 좋겠네. 그럼 무섭다고 나한테 달려올지도 모르는데. 현실감 없는 상상과 함께 걷는 여름밤, 그는 나란히 보폭을 맞추며 품으로 당겼다.
― “이렇게 있어야 눈에 띄고 커플 같지.”
― “고백인가요?”
― “받아 줄 거면.”
― “그러지, 뭐.”
― “그럼 이건.”
네 번째 약지에 끼운 반지가 선명했다. 7년 전 그를 떠날 때 같이 두고 간 내 마음이었다. 나를 잊어야만 당신이 살 수 있다는 그 말을 기어코 어긴 남자였다. 이제 비는 그쳤는데, 더는 오지 않을 빗방울이 눈에만 시큰하게 고였다. 정한의 말마따나 멍충이 이지훈은, 어쩌면 7년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렸을 그는 꽤 담담했다.
― “말했잖아, 내일 또 만나자고.”
……
― “오늘이 그 내일.”
‘사랑해.’
……
‘내일 또 만나.’
사랑한다는 말로도 부족한 당신을 두고 가는 게 아니었다. 내 7년은 그 후회가 전부였다. 사랑해. 내일 또 만나. 사랑해. 사랑해. 젖은 꿈을 따라다니던 당신의 목소리 역시 과거에만 머물 수 없었다. 지난 과거를 잊고 앞을 향해 가야 한다는 담당 의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긴 나는 그 넓은 품에서 잔뜩 토해내듯 울었다.
인디언이 심었다던 밴쿠버 전설 나무는 신통력이 컸다. 캐나다 귀신은 보지도 못했고 엄마의 무소식은 희소식이었으며 부편집장의 블랙베리 시장 주가가 상장한 걸 보면 승관이처럼 의리에 강한 생명체였다. 그러니 그 소원 끝에 하나만 더 붙여 간절히 빌어본다. 올해가 지나도 여권에 출국 도장은 찍히지 않게 해주세요.
― ‘형으로써 부탁하는 거야.’
……
― ‘결혼식장에서 우는 사람은 나 하나로도 족하니까.’
여전히 지훈 앞에서 속수무책이라는 나지만, 그는 나에 대해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황량한 사막에서 지훈의 존재를, 그 사랑을 처절히 느끼고 돌아온 나는 더는 보호해야 할 온실 속 프리지아가 아니라는 것.
― “우리, 같이 살까.”
이번엔 내가 감히 당신을 지켜줘야 할 순간이라는 걸.
Epilogue.
터닝 포인트를 아시나요?
인생의 전환점이라 불리는 이 단어의 또 다른 말은 이미 준비된 우연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과도 같은 말이죠.
청취자 여러분의 터닝 포인트는 언제였나요?
내 인생을 바꿔준 그 순간을, 당신은 기억하시나요?
오늘 밤을 마무리할 좋을 구절을 읽으면서 여러분의 디제이 부는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부승관의 카스테라, 우리 또 만나요.
내일은 분명히 더 행복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