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 성동혁, 1226456
퇴원 당일 지훈은 분주했다. 이틀 전부터 짐을 꾸린 치밀한 계획의 그는 병실을 돌아다니며 빠진 것은 없는지 살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날 빠트리고 짐만 가져가는 건 아니지. 날 기억해주는 거지. 지훈은 콘센트에 꽂힌 어댑터를 뽑아 둥그렇게 말았다.
잘 붙어서 따라와. 껌딱지도 괜찮을까. 원하면 그렇게 해. 쿨내 나는 뒷모습이 간호사를 따라나섰다. 반 시간도 되지 않아 병동 진료비 수납 절차부터 영수증 처리까지 일사천리로 마친 지훈은 병실로 돌아와 가방을 챙겼다. 그는 문 앞까지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이름이 불려 꽃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내게 손을 뻗었다.
― “껌딱지 빨리 와.”
손을 맞잡고 정한의 진료실로 향했다. 동그란 의자에 앉아 퇴원 후 주의사항을 들을 때에도 깍지는 풀지 않았다. 지훈은 어딘가 들떠 있었다. 전날 새벽 골머리 썩던 지방청사 도면 승인을 받고 병원까지 뜬눈으로 달려온 피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정한도 느끼던 참이었다.
얘 봐, 병원 탈출하고 싶어서 난리 났어. 지훈은 자신이 표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산만함으로 시선을 끌었다. 시계를 쳐다봤다가 옷걸이에 걸린 정한의 외투를 훑다가 뒤를 돌아 문을 신경 쓰더니 현재 내 기분이 어떤지도 물었다. 응, 나도 좋아.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다리까지 떨기에 허벅지를 눌렀다. 진정되지 않았다.
무리만 안 하면 될 것 같은데. 다른 건 문자로 보내. 의사를 보채는 그는 옆에서 보던 간호사도 웃겼다. K건설 입사 이래 하늘의 별 따기인 주말 휴가를 얻은 직장인의 흔한 모습이었다.
장기 여행이나 긴 외출은 당분간 자제하는 게 좋아. 집에서 충분히 휴식하면서 수분 섭취도 잘 해주고. 퇴원 후에 이틀 이상 속이 메스껍거나 두통이 심한 것 같으면 병원 와서 진찰 받아야 해. 그때그때 바로 와. 별거 아니겠지 내버려 두다가 악화돼서 온 환자들 생각보다 많으니까. 정한은 진료 기록을 정리하며 턱을 매만졌다.
― “마지막 주의사항은 뭘로 할까. 서로 예쁘게 챙기기?”
― “그건 내가 잘해.”
― “화해 제대로 했네?”
― “할 수밖에 없지.”
― “왜 그럴 수밖에 없어?”
― “내가 얘 좋아하니까.”
이 씨 왕의 가문답게 지훈은 널리 공표하듯 떠벌렸다. 정한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왕의 후손은 답답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강한 들숨 날숨이었다. 그런 건 나만 있을 때 해주면 안 돼? 누가 날씨 얘기하듯이 말하고 다녀? 지훈은 할 말이 있다는 듯 손등을 꾹꾹 눌렀다.
― “아니,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말하지 그럼 무슨….”
― “야!”
등받이 쿠션이 작은 얼굴을 강타했다. 지훈은 쿠션을 보듬으며 정한에게 호소했다. 나 왠지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 같은데 어떡하지. 단숨에 헤드락에 걸린 그는 ‘으어어-’ 힘없는 목소리로 끌려왔다. 초크로 좀 더 세게. 지훈은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 정한은 진지하게 입원 치료를 권했다.
― “상태가 심각하네.”
― “누가 봐도 정상이야.”
― “보통 환자 본인은 인지를 잘 못 하지.”
― “사랑꾼 이런 건 아니니까.”
― “넌 잘 아네?”
간호사는 뒤돌아 흐느꼈다. 보호자 지훈을 위한 마지막 진료였다. 다쳐서 보는 건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도장, 복사, 코팅, 액자까지 걸었으니까 꼭 지켜. 정한은 병원 본관 입구에서 멀어지는 차를 배웅했다. 환자 퇴원할 때만 신났다니까. 관심 없이 운전만 하는 줄 알았던 지훈은 백미러로 정한의 미소를 일찍이 보고 있었다.
창밖은 가을이었다. 길목마다 여물어가는 계절이었다. 몸보신에 제격이라는 오리탕 앞에서 지훈은 국자로 살점만 걷었다. 다음 주부터 출근은 이르지 않나. 건더기를 수북하게 쌓은 앞접시를 건네며 물었다. 팀장님 깁스 풀지도 않았는데 어제부터 출근했어. 다른 직원들이 떠맡은 일 신경 쓰였나 봐. 내 컨디션도 좋고 무리만 하지 않으면 되니까 얼른 백업하러 가야지. 먹어도 줄지 않는 마법의 접시 앞에서 힘든 기색을 보이자 지훈은 명의 정한의 말을 되짚었다.
아까 의사가 뭐라 그랬어. 서로 챙겨 주기. 가장 중요한 주의사항인데 잊으면 안 되지. 비장한 얼굴로 웃기려는 건 이제 보니 습관 같다.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지훈은 두 번째 밥공기를 비우며 물었다. 뭐가 똑같은데. 그럼 난 어쩔 수 없이 누구처럼 비장하게 웃기려는 수밖에.
― “날 너무 좋아하잖아.”
― “응.”
― “…응?”
― “엉.”
― “어?”
― “넌 나 놀리려면 한참 멀었어.”
지훈은 손을 들어 새 포장 주문을 부탁했다. 내일도 먹고 모레도 먹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예로부터 조상님들은 성심껏 밥을 먹여주는 자가 있으면 성군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인심이 어진 왕의 가문다웠다. 태평양 해파리 그런 건 안 돼. 날카롭게 내 수를 미리 읽을 줄도 알았다.
― “하늘 높다.”
― “가을이니까.”
포장 백을 들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뭔가 아쉬움이 많았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바람이나 쐬고 가자. 어차피 주말에 너랑 있을 거야. 지훈은 표정만 보고도 나를 알았다. 그래도 태평양 해파리는 안 돼. 장난을 포기할 줄 모르던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서울 근교를 달렸다. 마주 잡은 손은 내 무릎에, 약간 상기된 얼굴은 그의 어깨에 기댔다.
노을 진 고가 도로 옆 스타벅스 DT에 입성한 벤츠가 머뭇거렸다. 카페 주문에 젬병인 차주는 심각한 고민 끝에 카운터 옆에 정차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스피커 폰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직원의 음성. 지훈은 내 아바타였다.
― “아이스 바닐라 라떼 벤티로. 얼음 적게.”
― “아이스 바닐라 라떼 벤티 주세요. 얼음은 적게요.”
― “귀여운 이지훈도 추가해주세요.”
― “귀여운 이지훈도 추가…… 야.”
직원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 지점엔 귀여운 건 없는데 대신 크림 넣어 드릴까요? 지훈은 고개를 떨궜다. 괜찮아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사이즈로 주세요. 자신을 놀리려면 멀었다더니 거하게 한 방 먹었다. 아, 생각도 못 했는데. 방심했다. 테이크아웃 창구로 돌아 나오는 벤츠가 붉다. 어라? 검은색 아니었던가? 지훈아, 빨간색으로 칠했어? 이거 트랜스포머야? 그는 목각인형같이 음료를 받들어 내려놓을 뿐, 직원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출구로 향했다.
― “귀여운 지훈 샷이 빠져서 그렇게 달진 않네.”
―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 “아이스 아메리카노 달지 않아?”
― “아니.”
― “귀여움 한 바가지 흘렸으니까.”
― “그만.”
괴로워 몸서리치는 걸 계속 보고 싶은 나는 선량한 변태. 귓불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데 애써 태연하고 싶은 노력이 가상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괴로운 걸 좋아하는 선량한 변태. 우리 같이 살면 난 침대에서 자고 넌 바닥에서 자면 되겠다.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던 벤츠가 갓길에 급히 멈췄다. 차주는 이지훈. 누구보다 진지한 얼굴을 보라.
왜 따로 자. 싫어. 누가 그래. 난 싫어 그런 거. 비상등 깜빡임 속도에 맞춰 랩 하는 이지훈을 보라. 결국 핸들에 머리를 기댄 채 협상하는 설득 왕 되시겠다.
― “아무튼 침대는 하나야. 괜찮지.”
― “아니?”
― “뭐가 문젠데.”
― “우리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한 침대를 써?”
―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냐고?”
― “별로 안 됐지.”
― “기간을 올해부터 세는 건 아니잖아.”
― “맞지, 새 출발이니까.”
지훈은 허탈하게 웃었다. 난 절대 못 해. 그 말을 끝으로 비상등이 해제된 벤츠가 폭주했다. 같이 잘 거야, 말 거야. 듣는 이에 따라 뜻이 천차만별일 질문을 지훈은 대놓고 물었다. 내 오피스텔 앞에서 기어를 올릴 때까지 지훈은 날 채근했다. 아직 대답 못 들었어. 난 집에 올라갈 거거든. 차 주인은 집주인보다 앞질러 공동 현관으로 걸어갔다. 당당히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그에게 열쇠를 던졌다. 키를 탭하고 현관 안으로 들어간 지훈은 집주인인 날 밖에 두고 문을 잠갔다. 어디 해보라는 식으로.
― “비밀번호.”
―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가을이라니.”
― “땡.”
― “귤 먹고 싶다.”
― “땡.”
― “귀염둥이 이지훈.”
― “진짜 땡.”
― “안아 주기?”
현관문이 열렸다. 두 팔을 벌려 와락 껴안았다. 엉겁결에 밀린 그는 날 품에 안으며 장난스레 등을 때렸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신문물을 바라보듯 멈칫하다 이내 밖으로 사라졌다. 그중 남색 나이키 모자를 쓴 소년이 지훈을 보며 동그랗게 눈을 떴다. 지난달 불꽃놀이를 보며 대강당을 뛰어다니던 열 살 프리지아 소년이었다. 다행인 건지 소년은 날 알아보지 못했다.
우와! 형아 여기 살아요? 형이 준 노랑 꽃 내 방에 있는데! 울 엄마가 예쁘다고 어제 이만큼 사 왔어요. 소년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원을 그렸다. 지훈은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형아! 오늘은 꽃이 없네요?”
― “있잖아.”
― “어디요?”
지훈의 매끄러운 손가락이 나를 향했다. 혼란스러운 소년은 뒷목을 긁으며 문이 닫힐 때까지 서 있었다. 쟤 충격 먹은 것 같은데. 지훈은 소년에게만 관심을 뒀다. 정작 상기된 뺨을 감추는 나를 모르고. 심지어 도어락을 열 때도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 집에 도사린 변수를 확인하지 못한 건 모두 이지훈 탓이다.
― “아악! 잠깐만!”
급박한 슬라이딩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원색 속옷과 자잘한 빨래를 주웠다. 지훈은 이미 먼 산을 보고 있었다. 우리가 내외할 사이인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라며. 내가 그랬어? 네가 그랬어. 빨래통에 처박다시피 버려두고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팀장이었다. 쉴 틈 없이 밀린 원고를 작성했다. 원격 보고까지 마친 후 노트북 카메라가 꺼지자 지훈은 뺨을 건드리며 물었다. 대답 언제 해줄 건데. 나는 침대 너는 바닥. 그건 불가능해. 충분히 가능해. 지훈은 쓰러지듯 소파에 나를 눕혔다.
― “싫어.”
― “순 어리광.”
― “알면 같이 자.”
― “하는 거 봐서.”
나는 이지훈의 선량한 변태. 괴롭히는 건 도가 텄다. 홀로 내리쬐는 햇살은 외롭지 않았고 열어 둔 창밖으로 블라인드가 조금씩 흔들렸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장난을 치거나 입술을 진하게 감쳐물고 숨 못 쉬게 만드는 그가 좋았다. 서로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아가는 것처럼, 번지는 숨결 곳곳마다 사랑이 뱄다.
네 명함 받고 일주일 동안 거의 패닉이었어. 일도 제대로 못 했지. 7년 동안 혼자 이별하고 다시 만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네가 왔으니까. 미친 척하고 연락해볼까 하다가 그만둔 적도 있고. 그러다 낸 결론은 그래도 너 만나자. 어쩌겠어. 보고 싶은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오늘은 미워했다가 내일은 보고 싶다가, 다음날도 죽도록 미워했다가 어쩔 수 없이 또 보고 싶은 거라면 만나야지. 안 그럼 내가 죽겠는데.
일부러 번호도 안 바꿨는데 연락은 안 오더라. 네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까 국제 번호까지 다 받았어. 미국, 스페인, 브라질, 러시아. 나라는 왜 그렇게 많은 거야. 캐나다 빼고 다 오던데.
각자 달의 반대편에 있던 시간을 담담하게 말하는 그가 아팠다. 보고 있어도 사무치도록 그리운 얼굴을 감싸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는 내게 입을 맞추며 고백했다. 우리의 불꽃을 보러 그날 갔었노라고. 나 역시 대답했다. 그날 우린, 같은 불꽃 아래 있었노라고. 수줍게 핀 나를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뒷모습을, 그 사랑을 느꼈노라고.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그때도 불꽃놀이 봤었잖아. 넌 아파트 베란다에 있었고 나는 밑에 있었을 때. 학교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그날만큼은 괜찮을 것 같아.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네 옆에 있는 거지. 같은 곳에서 같은 시선으로. 불꽃놀이도 더 집중하고.
그날 난, 너만 보고 있었거든.
Oh My Rainbow
; The Finale
06. 불행총량의 법칙
인터뷰 중단 요청이 들어온 건 월요일 아침이었다. 나를 회의실로 따로 불러낸 팀장은 상황을 설명했다. 그린 에이지 한국 지사 지분 반절 이상을 점유한 Y코스메틱에서 인터뷰 담당자가 바뀌지 않는 한 투자 금액 모두 철회하겠다는 압박이었다. 부당한 처사였고 그들의 월권이었다. 위층에서 반발하다 꺾인 팀장은 고개를 숙였다. 다음 달부터 진행할 프로젝트 계획서가 내 앞에 떨어졌다.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 “스타트 잘 끊었으니까 나머지는 우리가 마무리할게. 다음 프로젝트는 무조건 메인으로 갈 거야. 리소스 충분하니까 서포트든 백업이든 원하는 대로 불러. 나중에 본사로 돌아가면 파견 성과에 도움 될 거야.”
새 계획서를 들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문 앞을 서성이던 최와 박이 뒤를 따랐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여기도 엄연히 체계가 있는데 월권이라뇨. 이유는 묻지도 말라고 했다는데 완전 무대포에 배 째라 식이잖아요. 계획서가 눈에 들어오세요? 화도 안 나시냐구요. 답답한 박은 머리를 헝클었다.
그들이 돌아간 후에도 책상에 앉아 페이지를 넘겼다. 제대로 꾸린다면 팀장의 말대로 파견 성과는 물론 그토록 가고 싶었던 본사 기획실도 넘볼 수 있었다. 손쉽게 굴러들어온 행운이었다. 마다할 것 없었다. 따로 정리한 키워드를 작성해 이메일로 보냈다. 주석을 달아 추가 메모를 덧씌웠다. 모니터 속 최종 담당자 이름 앞에 얇은 커서가 깜빡였다. 시곗바늘은 정오에 가까웠다. 노트북을 덮고 외투를 입었다.
― “어디 가세요?”
― “코스메틱 회장님 만나러요.”
― “네?”
― “팀장님한테는 외근이요.”
지상으로 올라온 SUV가 빠른 속도로 도로를 달렸다. 목적지는 처음부터 확고했다. 당사가 Y코스메틱에게 업혀 있는 건 그리 놀랄 만한 사실은 아니었다. 단지 Y코스메틱의 회장과 지훈의 관계였다. 한쪽 부모가 없고, 미래가 없고, 그래서 아무것도 이득 볼 것이 없다는 날카로운 눈빛은 정한의 말대로 나의 귀국을 알고 있었다. 지훈의 뒤를 밟은 그림자가 건넨 사진으로 나의 존재를 알았을 테고 그것은 분명 이 사단을 만들었을 것이다. 차의 엔진을 죽인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아카시아가 흐드러지도록 핀 저택이었다.
대문을 열고 돌담을 건너 집안에 발을 내딛는 순간까지 위압적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내 숨이 막혔다. 긴 복도 끝에 다다르자 계단 밑 넓은 거실이 펼쳐졌다. 자신만큼이나 우아한 찻잔을 든 그녀가 책장을 넘겼다. 맞은편에 앉아 숨을 들이켰다. 그렇게 삼십 분이 흘렀다. 양장 서적에 가죽끈으로 책갈피를 덧댄 그녀의 입술이 마침내 벌어진다. 지훈의 모였다.
어리석은 건 타고난 팔자라지만 제 분수 하나 지금껏 감당하지도 못 하면서 누굴 또 망치려고 달려들어?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기어이 돌아와서 누굴 만나? 집착이라고 생각 안 드니? 네가 아버지가 있니, 가정적인 엄마가 있니. 회사에서 직책 좀 던져주니까 갑자기 뭐라도 되는 것 같아? 잘난 줄 평생 타봤자 고작 십 년이고 나이도 거꾸러지는 마당에 누구 발목 잡으려고 자꾸 나타나서 이 지경까지 만드니? 사람이 주제를 알아야 판단도 하는 거야. 만나는 것도 이득이 있어야 만나는 거라구. 결혼을 투자해서 기업을 만드는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 줄은 아니? 포기. 포기라구. 가진 게 없으면 포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구 몇 번을 말하니?
아물지 못한 상처가 덧나도록 기꺼이 몸을 내어주었다. 그녀는 사정없이 빈틈을 찔렀다.
곧게 컸던 애가 너 때문에 망가진 거야. 그 세월이 얼마니? 선 자리는 죄다 망쳐 놓고 집엔 한 번을 안 들어오더니, 이젠 또 네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는데 내가 가만히 있어야겠니? 비행기 티켓이든 해외에 나가 살 집이든 필요하면 얼마든지 줄 테니 다신 나타나지 말아라. 이쯤 했으면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녀가 손짓했다. 거실 앞을 지키던 남자가 내려왔다. 당장 내보내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힘겨운 듯 머리를 짚었다. 진한 향수가 훅 끼쳤다. 남자는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그러나 갈 수가 없다. 버거운 이 자리로부터 남자를 따라 도망쳐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정작 두 발은 꼿꼿하게 붙어 있다. 더는 온실 속의 프리지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때였다. 애석한 눈물의 희생은 없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자란 내가 있었다.
― “인터뷰 손 떼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지훈이는 계속 만날 거고요. 원하시면 퇴사 감안하겠습니다. 한국 떠날 일은 없겠지만요.”
찻잔이 파열됐다. 파편들이 어지럽게 튀었다. 시린 뺨에 생채기가 드러났고 그녀는 그 뺨을 힘껏 내려쳤다. 상대적인 가난 탓이라기엔 그녀는 악에 받쳐 있었다. 결혼을 투자해 기업을 만드는 집안은 지훈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학교 창밖에 앉아 날 바라보던 앳된 시선 끝엔 무엇이 있었을까. 그녀는 스스로 투자 가치를 지워버린 당신의 아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내 곁에서 유영하는 지훈을 당신은 잘라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의 손바닥이 허공으로 향했다. 그 앙상한 팔목을 잡아챈 건 정한이었다. 내 앞을 막아선 정한은 그녀에게 애원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이모 제발! 자그마치 7년이야. 이제 그만 할 때도 됐잖아. 애들 안쓰럽지도 않아요? 사랑 좀 지켜보겠다고 지훈이 죽은 듯이 살았어. 그 잘난 이모 아들이 7년을 혼자 아등바등 버티다가 이제 겨우 행복해지고 있다고. 사랑하는 사람 잃어버릴까 봐 그 폭우에 달려간 놈이라구요. 등 뒤에 자기랑 똑같은 애 업고 와서 울어. 살려 달라고. 난 그걸 두 번이나 봤어. 이모가 지훈이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뒤 밟히는 거 알면서도 입 다물고 있잖아. 그동안 약으로 숨 붙이고 산 게 천만다행이라구요. 이젠 살게 좀 내버려 둬요. 제발 부탁이야.
강한 마찰과 함께 정한의 고개가 돌아갔다. 내려친 손을 붙잡고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정한의 넓은 어깨가, 언젠가 지훈이 말했던 모습과 같았다. 사랑을 잃은 허망한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 “원하지도 않는 결혼 하면서 내 인생은 거기서 끝난 거야. 손 놓지 말고 지켰어야 했어. 절대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 “…….”
― “이 말, 지훈이가 나중에 똑같이 할 거야.”
거실 밖은 소란스러웠다. 남자들을 제치고 달려온 지훈이 거칠게 손을 잡았다. 헤아릴 수 없는 눈빛과 슬픔이 서렸다. 그녀가 좀 더 뺨을 내려쳤더라면 지훈이 오기 전에 도망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최소한 굳은 피로 얼룩진 뺨을 들키지 않아도 됐을 텐데.
― “나가자.”
지훈의 한 마디에 그녀가 달려들었다. 정한은 억지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내 생채기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던 지훈의 시선이 자신에 대한 집착과 분노가 서린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시키면 받드는 게 자식의 도리라고 했다. 다시 내 곁에서 헤엄하는 지훈은 결코 그럴 리가 없었다.
― “자식 된 도리, 해본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안 해요. 계약 성사하듯이 떠밀려 하는 결혼에 난 없으니까.”
― “너 여기서 나가면 네 손 붙들고 있는 애 어떻게 될 것 같니?”
그녀는 더욱 분노했다. 싸늘한 협박이었다. 정한의 낮은 한숨이 흘렀다. 비행기 티켓과 집쯤은 쉽게 내어 줄 수 있는 그녀는 보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지훈은 붙든 손을 세게 움켜잡았다. 대답은 태연했고 서늘했다.
― “그럼 같이 없어져야죠.”
……
― “살 이유가 없잖아.”
지훈은 자신의 차에 날 태운 뒤 본가를 빠져나갔다. 서로가 말이 없었고, 대신 발길이 닿는 대로 달렸다. 발밑에 가라앉은 공기는 차가웠다. 어느 강가에 멈춘 우리는 노을이 질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지훈은 등을 기대 눈을 감았다. 주저하던 시선이 그를 향한 건 보닛 위로 여린 어둠이 스며들 때였다.
* * *
지훈은 자신의 오피스텔 앞에 멈추기까지 긴 시간을 망설였다. 그는 집이 엉망이라는 이유로 잠시 차를 떠나 먼저 들어갔다. 잠시 후 편한 차림으로 돌아온 그가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을 누르고, 현관문을 열기까지 지훈은 어딘가 불안한 사람처럼 곁을 서성였다.
― “예전엔 들어오지도 말라더니.”
― “그땐 더 엉망이었어.”
그의 성은 단조로웠다. 모노 톤의 테이블과 정갈한 침대, 컴퓨터 주변 피규어가 전부였다. 벽에 액자 걸기를 싫어하는 탓에 회색 벽지 또한 깔끔했다. 소파 밑은 미처 치우지 못한 폴라로이드 사진이 떨어져 있었다. 7년 전 내가 찍어준 지훈이었다. 그는 민망한 듯 웃었다. 테이프를 몇 번이나 떼었다 붙이기를 반복했는지 끈적거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구급상자를 열어 내 옆에 앉았다.
― “왜 겁도 없이 혼자 가서 이런 상처나 달고 와.”
― “거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 “전화 안 받길래 사무실로 연락했더니 알려주더라. 담판 지으러 가는 사람처럼 회장님 만나러 갔다고.”
― “정한 쌤까지 볼 줄은 몰랐는데.”
― “예전에 놓고 간 물건 있어서 오늘 잠깐 들린다고 했었어. 형도 몰랐겠지. 네가 거기 있을 줄은.”
지훈은 복잡한 얼굴로 밴드를 뜯었다. 면봉에 묻힌 연고를 바를 때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보면 네가 다친 줄 알겠어. 가벼운 농담에도 무거운 분위기는 쉬이 걷히지 않았다. 따갑게 짓무르는 상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파리한 형광등 밑에서 뱉는 낮은 숨이 신경 쓰였다. 인터뷰 끝까지 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 “다 버리고 같이 도망갈까.”
― “언제든.”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품이었다. 인터뷰 담당 바꾸는 대신 너 계속 만난다고 했어. 원하시면 퇴사도 감안하겠지만 절대 안 떠날 거라고. 다친 건 아픈데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서 괜찮아. 그땐 이렇게 못 했잖아. 네 손 놓고 떠날 줄만 알았지, 끝까지 옆에 있겠다는 생각은 못했으니까. 아까 정한 쌤이 네 얘기 많이 했어. 나 없었을 때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
그런데 지훈아. 그런데…….
소파 옆 수납장을 향해 다가갔다. 반쯤 열려 있는 마지막 서랍 안에는 빈 통이거나 먹다 만 알약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바래진 처방전과 영수증이 뒤죽박죽 섞였다. 구겨진 하얀 봉투에는 복용하거나 그만두길 반복한 각각 다른 날짜의 것들이 뭉쳐 있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미친 듯이 파헤쳤다. 해마다 승관이 약국을 털어 쟁여 놓았다던 감기약 따위가 아니었다. 난 그 쓰임새를 잘 알고 있었다. 아빠와 은수를 잊기 위해, 지훈을 떠나기 직전까지 억지로 집어삼켰던 눈물이었다. 강도 높은 수면제 라벨에 쓰인 이름을 보는 순간 지훈의 암담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 ‘그 새끼 좀 살려주라.’
― ‘그동안 약으로 숨 붙이고 산 게 천만다행이라구요. 이젠 살게 좀 내버려 둬요. 제발.’
가라앉는다. 가라앉고 있었다. 지훈은 내 팔목을 움켜쥐고 조용히 서랍을 닫았다. 그 손을 붙잡고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그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부드럽고 여린 손이 내 등을 어루만졌다. 끝내 떫은 눈물을 흘렸다.
지훈은 홀로 비탈길을 걸었다. 그곳은 오로지 죽은 별이 떠 있는 세상이었으며 죽음과 그리움에 질식된 검은 바다였다. 내가 겨우 빠져나온 지옥에서, 정작 그가 갇힌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 “이제 괜찮아.”
……
― “정말.”
삭막했던 성에 해가 들었다. 비틀어진 프리지아가 옅게 숨을 골랐다. 내가 좋아했던 시집과 소설이 연달아 꽂힌 책장에도 밝은 빛이 스며들었다. 책상 위 액자가 반짝였고 사진 속 날 보며 웃고 있는 열아홉의 당신이 있었다. 오직 내게만 지는 사랑을 하는 이지훈을, 나 또한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찬 바람이 불었다.
그가 감춘 사진들이 흩어졌다.
온통 나였다.
Epilogue.
여러분은 ‘불행총량의 법칙’에 대해 아시나요? 청취자분의 사연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구절인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제 드라마를 보다 인상 깊게 들은 대사가 있어요. ‘불행총량의 법칙’. 즉 불행에도 총량이 있어서 타인에 비해 더 자주, 크게 불행을 겪은 사람은 그 사람 인생에 있는 불행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행복만 남아있다는 단어예요, 라고요.
오늘 라디오 들어오기 전에 생각해 봤어요. 정말 불행에도 정해진 양이 있다면, 더 나아가 우리 눈에 보일 수만 있다면, 세상 속에서 힘든 사람들이 다가올 행복을 위해 조금 더 버티며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이번에도 제 친구 얘기를 하게 되네요. 오랫동안 힘들었고, 아파했고, 슬퍼했던 그 친구는 남들보다 일찍 불행을 써버렸으니 이제 행복만 남았을 겁니다. 전 이 글을 읽으면서 그렇게 믿기로 했어요. 유자차와 감기약은 더 이상 챙겨주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여기서 노래 한 곡 들을게요.
잠시 후 2부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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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에 있는 불행총량의 법칙과 그 내용은 독자님의 댓글을 부분 인용하였습니다 :) |